People of Eldar · Archive Cards

인물 도감

전투 능력치 안내

공격력 ↔ 방어력 · 마법력 ↔ 항마력 · 신비력 ↔ 신비저항 · 명중률 ↔ 회피력

🩸 HP 피해를 버틸 수 있는 최대 체력. 피해가 누적되어 0이 되면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
💪 공격력 검·창·주먹·화살 등 물리 공격의 위력 기준. 상대의 방어력에 대응한다.
🧙 마법력 마법&신성 계열 공격과 효과의 위력 기준. 상대의 항마력에 대응한다.
✨ 신비력 도깨비의 도술·악마와 드래곤의 권능 등 신비 계열 효과의 위력 기준. 상대의 신비저항에 대응한다.
🛡️ 방어력 물리 공격을 견디는 능력. 높을수록 공격력 기반 피해를 효과적으로 버틴다.
🔗 항마력 마법 공격과 마법적 효과, 신성력 등을 견디는 능력. 상대의 마법력에 대응한다.
😖 신비저항 도술·드래곤or악마의 권능·봉인 등에 저항하는 능력. 상대의 신비력에 대응한다.
🏃 회피력 공격 자체를 피하는 능력. 공격 측의 명중률과 비교하여 적중 여부를 판정한다.
🎯 명중률 공격이 실제로 적중하는지를 결정하는 판정값. 카드의 여덟 가지 고정 능력치와는 별도로, 전투 시 상대의 회피력과 비교하여 명중률이 회피력보다 높으면 공격이 명중한다.

※ 캐릭터 카드에는 여덟 가지 고정 능력치가 표시되며, 명중률은 전투 중 별도로 적용되는 적중 판정값이다.

국가와 세력별로 보존된 인물 기록. 각 카드에서 캐릭터의 전투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단의 과거 보기를 열면 해당 인물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Roster

황금왕국 델피로

7명
왕실1명
HAV
하비엔 카마리앙 올든골드 델피로
델피로왕실
“선한 뜻은 보고하지 마라. 몇 명이 살아남았는지만 말해.”
🩸 HP100
💪 공격력50
🧙 마법력75
✨ 신비력1
🛡️ 방어력60
🔗 항마력60
😖 신비저항60
🏃 회피력70
과거 보기
하비엔의 이야기는 델피로 왕궁의 거대한 곡물창고에서 시작된다.

그녀가 아직 왕관의 무게보다 황금빛 장식에 더 관심이 많았던 어린 시절이었다.

당시의 하비엔에게 부왕은 좋은 왕이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고, 백성 앞에서 웃는 법을 알았으며, 굶는 사람을 보고 지나치지 못했다.

왕궁의 식탁에 올라온 빵을 남기지 말라고 가르친 것도 그였다.

“왕이 먹는 한 끼에는 백성 수백 명의 손이 들어간다.”

어린 하비엔은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그래서 첫 번째 기근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아버지가 내린 결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해 델피로의 비는 늦었다.

황금강의 수위가 내려가고, 왕관평야의 밀밭은 제대로 여물기 전에 고개를 숙였다.
시장에서는 밀가루 값이 하루가 다르게 올랐고, 수도 외곽에는 굶주린 농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귀족들과 관리들은 왕실 비축곡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겨울이 아직 남아 있었고, 다음 파종에 사용할 종자곡까지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왔다.

그러나 부왕은 창고를 열었다.

“사람이 오늘 굶어 죽는데 내년을 걱정해서 무엇하겠느냐.”

왕실의 곡물은 수도와 주변 영지에 풀렸다.

굶주리던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광장에서는 왕의 이름을 외쳤고, 성문 앞에는 감사의 꽃과 빵이 쌓였다.

어린 하비엔도 그 광경을 보았다.

그녀는 그날 처음으로 왕이라는 자리가 무엇인지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높은 곳에 앉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자신이 언젠가 되어야 할 통치자의 모습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겨울이 끝난 뒤에도 비는 충분히 내리지 않았다.


다음 해의 파종철이 왔을 때 문제가 드러났다.

전년에 풀어버린 곡물 중에는 식량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종자곡도 섞여 있었다.

겨우 살아남은 농민들에게 씨앗이 부족했다.
왕실은 다른 지방에서 종자를 사들이려 했지만 이미 대륙 곳곳에서 곡물 가격이 올라 있었다.

귀족들은 자기 영지의 창고를 닫았다.
상인들은 더 높은 가격을 기다렸다.
왕실 금고에서 돈을 꺼내도 필요한 양을 구할 수 없었다.

겨우 심은 밭도 수확량이 부족했다.

그리고 두 번째 기근이 찾아왔다.

첫해보다 훨씬 컸다.

처음에는 수도에서 먼 마을들이 사라졌다.
세금을 거두러 간 관리들이 빈 집과 잠기지 않은 문만 보고 돌아왔다.

그다음에는 길가에 버려진 농기구가 늘어났다.

왕궁으로 들어오는 보고서에는 더 이상 ‘식량 부족’이라는 표현이 쓰이지 않았다.

아사.
이주.
마을 소멸.
폭동.
유기된 아이.

열두 살의 하비엔은 우연히 부왕의 집무실에 쌓인 보고서를 읽었다.

숫자들이 있었다.

몇 명이 죽었는지.
몇 개 마을이 사라졌는지.
얼마나 많은 토지가 파종되지 못했는지.

그녀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작년에 광장에서 왕을 찬양했던 사람들의 일부가 올해는 죽었다.

그들을 살렸던 결정 때문에.

정확히는,
그 결정 이후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비엔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작년에 곡식을 풀지 않았어야 했습니까?”

왕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한 해 전보다 눈에 띄게 늙어 있었다.

“아니다.”

“그럼 잘한 결정이었습니까?”

이번에는 더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것도 아니다.”

어린 하비엔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결정은 옳거나 틀려야 했다.
사람을 살렸다면 옳아야 했고, 더 많은 사람을 죽게 했다면 틀려야 했다.

하지만 왕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다.

그날 부왕은 마지막에 한마디만 남겼다.

“나는 그날 굶는 사람들을 보고 견디지 못했다.”

그 문장은 하비엔에게 오래 남았다.

왕이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창고를 열었다는 사실도.

그 선의가 거짓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진심으로 선한 선택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그 후 하비엔은 점점 말수가 줄었다.

누군가 정책을 제안하면 목적보다 결과를 먼저 물었다.

“얼마나 필요한가.”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지.”
“실패하면 어느 지역이 대가를 치르나.”
“그 뒤는?”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어린 공주의 지나친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비엔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좋은 의도라는 말에는 특히 냉담했다.

무료 배급을 주장하는 관리에게는 다음 해의 저장량을 물었고,
세금을 줄이자는 귀족에게는 줄어든 예산만큼 어느 시설을 포기할지 물었다.

군대를 파견하자는 기사에게는 승리 가능성이 아니라 전쟁 뒤 남을 고아와 부상자의 숫자를 계산하게 했다.

그녀는 점점 칭찬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갔다.

잔인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 번 살린 사람을 다음 해에 더 비참하게 죽게 만드는 것이 두려웠다.

하비엔에게 자비는 순간의 행동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 때만 허락되는 약속으로 변해갔다.


왕위계승자로 성장하면서 그녀는 부왕과 자주 충돌했다.

부왕은 여전히 백성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
하비엔은 장부를 먼저 보았다.

왕은 때때로 딸에게 말했다.

“사람은 숫자가 아니다.”

하비엔은 대답했다.

“그러니까 숫자를 봐야 합니다.”

보고서의 숫자 하나가 실제 사람 한 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다.

차가운 공주.
피도 눈물도 없는 왕녀.
곡물 한 자루까지 계산하는 여자.

그런 소문이 따라붙었다.

하비엔은 해명하지 않았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32대 여왕이 된 뒤에도 그녀의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왕실 비축곡은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구호 정책에는 반드시 다음 계절의 계획이 붙었다.
한 지역을 살리기 위해 다른 지역의 식량이나 맥류를 끌어와야 한다면 그 비용까지 공개하게 했다.

회의에서 누군가 말했다.

“폐하, 이것은 백성을 위한 정책입니다.”

하비엔은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선한 뜻은 보고하지 마라. 몇 명이 살아남았는지만 말해.”

그 문장은 곧 그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누군가는 현명한 여왕의 냉철함이라 칭찬했다.

누군가는 사람을 숫자로만 보는 폭군의 언어라고 비난했다.

하비엔은 어느 쪽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결과가 나오기 전의 평가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상황은 조금 달랐다.

왕궁의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집무실에 혼자 남으면, 하비엔은 가끔 오래된 기근 기록을 펼쳤다.

첫 번째 기근에서 살아난 사람의 수.
두 번째 기근에서 죽은 사람의 수.
부왕의 명령서.
당시 관리들이 제출했던 반대 의견.

그리고 어린 자신이 보고서 가장자리에 남긴 작은 글씨.

‘그럼 어떻게 했어야 했지?’

스물여덟 살이 된 지금도 그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창고를 열지 않았다면 첫해에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창고를 열었기 때문에 다음 해에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렇다면 올바른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더 적은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
더 오래 살아남게 만드는 것?
아니면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구하려 손을 내미는 것?

하비엔은 자신이 만든 모든 원칙이 결국 어린 시절의 두려움에서 태어난 것은 아닌지 가끔 의심한다.

자신이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정말 책임감이 강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시는 아버지처럼 선의를 품고 실패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럼에도 그녀는 다음 날이면 다시 왕관을 쓴다.

회의실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제안서의 마지막 장까지 읽고,
누가 칭찬받을지를 묻기 전에 누가 비용을 치를지를 확인한다.

하비엔은 이제 선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선의가 얼마나 쉽게 사람을 움직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두려워한다.

좋은 마음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면제받을 수 있다고 믿는 순간을.

그녀가 왕좌에 앉아 지키려는 원칙은 단순하다.

통치자는 선한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자신이 내린 결정 뒤에 남은 시체와 굶주림과 상처를 남의 잘못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것이 어린 시절의 하비엔이 아버지에게서 배운 가장 잔혹한 교훈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의 하비엔이 가장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는 교훈이기도 하다.

언젠가 자신의 냉정함 때문에 살릴 수 있었던 누군가를 버리게 된다면,
그 순간에도 지금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결과를 감당했으니 옳았다고.

하비엔은 아직 그 답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결정한다.

그리고 결정한 모든 결과를 기록하게 한다.

언젠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까지도,
누구도 지워버릴 수 없도록.


황금깃털기사단2명
REI
레이네 폰 아드리아노
델피로황금깃털기사단-기사단장
“검을 뽑지 마십시오. 다만 우리가 검을 잃었다고 생각하게 두지도 마십시오.”
🩸 HP200
💪 공격력75
🧙 마법력20
✨ 신비력1
🛡️ 방어력70
🔗 항마력60
😖 신비저항60
🏃 회피력70
과거 보기
레이네의 이야기는 그녀가 황금깃털기사단의 갑옷을 처음 지급받았던 해에서 시작된다.

그때의 레이네는 지금처럼 신중한 사람이 아니었다.

명령을 빠르게 이해했고,
검을 정확히 휘둘렀으며,
기사단의 규율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선배 기사들은 그런 그녀를 믿음직하다고 평가했다.

레이네 역시 자신이 좋은 기사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좋은 기사는 명령을 지킨다.
동료를 의심하지 않는다.
주저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신입기사였던 어느 봄, 델피로 남부에서 수인 유목민과 관련된 보고가 올라왔다.

가축이 사라졌다.
상단의 짐마차가 습격당했다.
국경의 곡물 창고에서 물자가 없어졌다.

그리고 몇 장의 장부가 증거로 제출되었다.

사라진 물자의 양.
유목민들이 거래한 가축의 숫자.
그들이 머물렀던 장소와 날짜.

숫자는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레이네의 상관은 말했다.

“저들이 물자를 빼돌리고 있다. 무장하기 전에 끝낸다.”

누군가 유목민에게 직접 확인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증거가 있는데 무엇을 더 확인하지?”

레이네도 그렇게 생각했다.

기사단은 도둑을 잡으러 가는 것이었다.
델피로의 백성과 재산을 지키러 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명령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공격은 새벽에 이루어졌다.

유목민들의 천막에는 아직 불이 제대로 피어오르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황금깃털기사단은 퇴로를 막고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서로 사용하는 말이 달랐고,
놀란 가축들이 울부짖었으며,
누군가 천막 안에서 활을 들고 뛰어나왔다.

그것이 사냥용 활인지 전투용 활인지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검이 뽑혔다.

한 번 누군가가 검을 뽑자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방패가 부딪치고,
말들이 줄을 끊었고,
천막 하나가 넘어졌다.

레이네도 싸웠다.

훈련받은 대로 상대의 공격을 방패로 받아내고,
열린 틈으로 정확하게 검을 밀어 넣었다.

잘 훈련된 기사다운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다쳤다.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유목민들은 기사단과 정면으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날 아침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있었고, 몇몇 천막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레이네는 자신의 검을 닦다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

압수품이라고 모아둔 상자 안에 문제가 된 곡물이 거의 없었다.

장부에 기록된 양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레이네는 처음으로 상관에게 물었다.

“물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상관은 짧게 대답했다.

“숨겼겠지.”

그 순간에도 레이네는 그 말을 믿었다.

믿고 싶었다.

이미 검을 휘두른 뒤였기 때문이다.


진실은 몇 달 뒤 밝혀졌다.

장부는 조작되어 있었다.

사라진 곡물 일부는 다른 창고로 옮겨졌고, 일부는 관리들과 상인들의 거래에 사용되었다.

유목민들이 거래했다는 가축의 숫자도 서로 다른 장부의 기록을 억지로 이어붙인 것이었다.

그들을 몰아낸 뒤 남은 방목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레이네가 공격했던 사람들은 장부에 적힌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기사단 내부 조사가 시작되었다.

레이네는 조사관 앞에서 당시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말했다.

누가 명령했는지.
어떤 장부를 보았는지.
어떤 지시를 받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조사관은 말했다.

“당신은 신입이었습니다.”

레이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령을 내린 것은 상관입니다.”

그 말도 사실이었다.

“제시된 자료를 신뢰할 충분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것 역시 사실이었다.

조사관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당신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레이네는 그 문장을 가장 오래 기억했다.

그것은 그녀를 위로해주는 말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검을 움직인 손은 상관의 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레이네에게 ‘명령’이라는 말의 의미가 달라졌다.

명령은 책임을 대신해주지 않았다.

장부도 마찬가지였다.

문서에 적혔다는 이유로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확신해서 말한다는 이유로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레이네는 현장을 직접 보기 시작했다.

보고서에 도적이라고 쓰여 있으면 도적이 무엇을 빼앗았는지 확인했다.

반란이라고 적혀 있으면 누가 먼저 무기를 들었는지를 물었다.

진압 명령이 내려오면 주민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눈으로 보았다.

동료들은 처음에는 그녀를 답답하게 여겼다.

“단장님은 확인해야 움직이는 사람이군요.”

훗날 한 기사가 그렇게 말했을 때 레이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확인하지 않고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검을 뽑는 일에도 신중해졌다.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말보다 먼저 상대가 왜 무기를 들었는지 보았다.

협상 자리에서는 언제나 무장한 병력을 충분히 준비했다.

하지만 그 병력을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지도 않았다.

레이네가 원하는 것은 상대가 델피로를 약하다고 착각하는 평화가 아니었다.

싸우면 이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
그럼에도 싸우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평화였다.

힘이 없어서 검을 뽑지 못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었다.

상대의 선의에 자신의 목숨을 맡긴 것에 가까웠다.

반대로 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먼저 검을 뽑는 것도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의 자신이 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레이네는 자주 말했다.

“검을 뽑지 마십시오. 다만 우리가 검을 잃었다고 생각하게 두지도 마십시오.”

그 말은 적에게 하는 경고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중함이 언제나 사람을 살린 것은 아니었다.

몇 년 뒤, 레이네가 한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을 때였다.

변경의 작은 마을에서 무장집단이 주민들을 억류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정보는 불완전했다.

무장집단의 숫자도 달랐고,
목적도 분명하지 않았으며,
주민이 실제로 인질인지 그들에게 협력하고 있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젊은 시절이었다면 즉시 돌입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레이네는 기다렸다.

정찰대를 한 번 더 보냈다.
증언을 교차 확인했다.
주변 퇴로를 조사했다.

오판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사이 무장집단은 일부 주민을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추격은 늦었다.

사흘 뒤 발견된 마차 안에는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함께 있었다.

레이네는 시신 앞에서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성급하게 검을 뽑아서 죽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검을 뽑아야 할 시간을 결정하지 못해서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날 그녀는 또 하나를 배웠다.

기다리는 것도 결정이라는 것을.

확신이 생길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사람 역시,
그 기다림의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기사단장이 된 지금도 레이네는 보고서를 쉽게 믿지 않는다.

하지만 보고서를 모두 의심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으려 한다.

현장을 확인한다.
가능한 증언을 듣는다.
틀렸을 때 어떤 피해가 생기는지 계산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결정을 내린다.

완벽한 확신이 오지 않더라도.

그것이 그녀가 가장 어려워하는 순간이다.

전투가 시작되면 레이네는 망설이지 않는다.

방패로 공격을 받아내고,
흔들린 순간 정확하게 반격하며,
주변 기사들의 움직임까지 하나의 선처럼 연결한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전투가 아니다.

검을 뽑기 직전의 몇 초다.

정말 싸워야 하는가.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가.

지금의 판단은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신중함인가.

아니면 다시 틀릴까 두려워 결정을 미루는 비겁함인가.

그 질문에는 지금도 확실한 답이 없다.

그래서 레이네는 위험할수록 목소리를 낮춘다.

흥분한 사람이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자신의 두려움이 명령처럼 들리지 않도록.

그리고 부하들에게 자신과 같은 변명을 남기지 않도록.

“명령받았기 때문에 했습니다.”

레이네는 그 말을 가장 싫어한다.

자신도 한때 그 말 뒤에 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원하는 황금깃털기사단은 명령을 잘 따르는 기사단이 아니다.

명령을 이해하고,
현장을 보고,
필요하다면 질문하고,
마지막에는 자기 손으로 한 선택을 자기 책임으로 인정할 수 있는 기사단이다.

레이네가 믿는 평화도 마찬가지다.

검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검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뽑았을 때 생길 일을 알고도,
아직은 뽑지 않기로 선택하는 상태.

그리고 정말 뽑아야 할 순간이 왔을 때,
두려움 때문에 한 걸음 늦지 않는 것.

레이네는 아직 그 두 순간 사이의 정확한 경계를 찾지 못했다.

아마 평생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매번 직접 확인하고,
결정하고,
그 결과 앞에 남는다.

다시는 자신의 검이 다른 사람의 판단 뒤에 숨어버리지 않도록.


HEL
헬드란 폰 홀리몰리
델피로황금깃털기사단-부단장
“언젠가 홀리몰리라는 나라를 세울 거야. 그러니 지금 실컷 웃어둬!”
🩸 HP160
💪 공격력55
🧙 마법력25
✨ 신비력1
🛡️ 방어력50
🔗 항마력45
😖 신비저항50
🏃 회피력50
과거 보기
헬드란의 이야기는 지금은 지도에서 이름조차 희미해진 작은 영지에서 시작된다.

델피로 남부, 안발룽으로 향하는 길목의 메마른 변경.
훗날 부러진깃발변경이라 불리게 될 땅 한쪽에 홀리몰리 가문의 영지가 있었다.

크지도 않았다.
비옥하지도 않았다.
황금왕국의 이름과 어울릴 만큼 부유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헬드란에게는 세상의 전부였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보리밭.
여름이면 먼지를 뒤집어쓰고 돌아오는 목동들.
시장 입구의 오래된 우물.
축제만 열리면 술에 취해 가문의 오래된 전쟁 노래를 부르던 노인들.

그리고 성문 위에서 바람에 펄럭이던 홀리몰리 가문의 깃발.

어린 헬드란은 언젠가 그 깃발을 자신이 물려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홀리몰리 가문은 오래된 귀족가였지만 강한 가문은 아니었다.

좋게 말하면 전통이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전통밖에 남지 않은 집안이었다.

토지는 줄어들었고,
빚은 늘었으며,
주변의 더 큰 귀족가들은 홀리몰리의 영지를 오래전부터 탐내고 있었다.

헬드란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주 말했다.

“영지는 빼앗길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을 빼앗기면 끝이다.”

그 말 때문에 헬드란은 어린 시절부터 가문의 이름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검술을 배웠다.
승마를 배웠다.
영지의 역사와 귀족법을 외웠다.

홀리몰리의 장자는 홀리몰리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헬드란이 좋아했던 것은 그런 수업들이 아니었다.

그는 성벽 아래로 내려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농부들의 수레를 밀어주고,
대장간에서 망치질을 흉내 내고,
병사들과 힘겨루기를 했다.

귀족가의 장자답지 않다는 꾸중도 자주 들었다.

헬드란은 그때마다 웃었다.

“내 영지 사람들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그때의 그는 그것이 특별한 생각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자신이 영주가 된다면,
지금 알고 있는 이 사람들과 계속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문제는 영지가 언제까지나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헬드란이 성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지 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경계석 하나의 문제였다.

그다음에는 방목지였다.
수로의 사용권이 문제가 되었고,
세금과 오래된 계약서가 따라붙었다.

협상은 몇 차례나 깨졌다.

상대 영주는 병력을 모았고,
홀리몰리 역시 병사를 불러들였다.

헬드란은 그것을 전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귀족들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영지전.
몇 번 싸우고,
누군가가 물러서고,
다시 계약서를 쓰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전투에 나설 때도 그는 웃었다.

“이기고 돌아오면 술은 내가 산다!”

병사들도 웃었다.

며칠 뒤 그들 가운데 몇 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홀리몰리 가문은 연이어 패했다.

병력도,
돈도,
지원해줄 친척도 상대보다 부족했다.

용병들은 계약이 끝나자 떠났고,
창고의 곡물은 병사와 주민 사이에서 빠르게 줄어들었다.

마지막에는 영지 중심의 성 하나만 남았다.

성벽 밖에서는 연기가 올랐다.
영지민들이 성 안으로 몰려들었다.

헬드란은 매일 부상병을 옮겼고,
무너진 성벽에 돌을 쌓았으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직 성벽도 있고, 나도 있고, 저기 아버지도 멀쩡하잖아!”

그는 일부러 더 크게 웃었다.

겁에 질린 아이 앞에서는 더 큰소리로 떠들었고,
패배 소식이 들릴수록 더 터무니없는 승리 이야기를 했다.

그때부터였다.

절망적일수록 더 큰 꿈을 말하는 그의 버릇이 생긴 것은.

두려워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두려워하는 사람이 자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공격을 앞둔 밤.

헬드란의 아버지는 남은 기사들을 성의 대청으로 불러들였다.

탁자 위에는 홀리몰리의 깃발이 놓여 있었다.

남은 병력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내일 끝까지 싸운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문이 패할 수는 있다. 하지만 홀리몰리의 마지막이 도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귀족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는 명령이었다.

성을 지키다 죽는다.
가문의 깃발 아래 최후를 맞는다.

패배해도 명예는 남는다.

헬드란 역시 평생 그렇게 배웠다.

그래서 그는 물었다.

“영지민들은?”

아버지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성 안에 남는다.”

“왜?”

“문을 열면 적도 들어온다.”

헬드란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러니까 왜 같이 죽어야 하냐고.”

대청이 조용해졌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들은 홀리몰리의 백성이다.”

헬드란은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자신이 평생 믿어온 문장을 다른 방향에서 보았다.

홀리몰리의 백성.

그 말은 자신들이 그 사람들을 소유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끝까지 책임진다는 뜻인가.

가문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백성이 죽어야 한다면,
대체 그 이름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날 밤 헬드란은 아버지의 명령을 어겼다.

남쪽의 작은 보급문을 열었다.

남아 있던 말과 수레를 모았다.
먹을 수 있는 곡물을 자루에 담았다.
아이와 노인을 먼저 태웠다.

몇몇 병사들에게는 원하는 사람만 따라오라고 말했다.

명령은 아니었다.

“살고 싶은 사람은 나랑 가자.”

누군가 물었다.

“도련님은요?”

헬드란은 대검을 어깨에 걸쳤다.

“내가 제일 뒤지.”

그리고 다시 웃었다.

“장자는 원래 마지막에 나가는 거야. 아마도.”

그날 수백 명이 성을 빠져나왔다.

추격대가 따라붙었고,
헬드란은 좁은 길목마다 남아 시간을 벌었다.

갑옷은 여러 번 찢어졌고,
말도 한 번 잃었다.

그래도 계속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돌진하는 법만 배웠던 홀리몰리의 후계자는,
그날 처음으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패배하는 법을 배웠다.


새벽이 밝았을 때 성에서는 검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홀리몰리 가문의 마지막 깃발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영지는 끝났다.

헬드란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승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날 이후 헬드란에게는 영지도 없었고,
물려받을 성도 없었으며,
귀족으로서 보장받은 미래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이름뿐이었다.

홀리몰리.

한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문의 이름이었다.

이제는 그 이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헬드란은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자주 입에 올렸다.


피난민들이 델피로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누군가는 다른 영지의 소작농이 되었다.
누군가는 도시의 막노동꾼이 되었다.
병사였던 사람은 용병이 되기도 했다.

한때 홀리몰리의 사람이라 불리던 이들이 제각기 다른 삶으로 흩어졌다.

헬드란 역시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사람들이 떠날 때마다 같은 말을 했다.

“이번에 망했다고 끝난 거 아니야.”

처음에는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에 잘되면 되지.”

한 노인이 헛웃음을 쳤다.

“도련님은 이제 영지도 없잖습니까.”

헬드란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새로 만들면 되지.”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뭘 말입니까?”

헬드란은 웃었다.

“나라.”

그 순간 몇 사람이 정말로 웃음을 터뜨렸다.

헬드란은 오히려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래, 실컷 웃어둬. 나중에는 입장료 받을 거니까.”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가 홀리몰리라는 이름을 가문이 아니라 미래의 나라를 뜻하는 말로 사용한 것은.


그 뒤 헬드란은 황금깃털기사단에 들어갔다.

몰락한 귀족의 장자라는 이름은 처음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기 영지도 지키지 못한 후계자.
아버지의 마지막 명령을 어긴 아들.
패전한 가문의 생존자.

헬드란은 그런 말을 들으면 대개 웃었다.

“맞아. 아주 화려하게 망했지.”

그리고 훈련장으로 나갔다.

귀족 출신 기사에게도,
평민 출신 병사에게도,
용병 출신 신입에게도 똑같이 대했다.

검을 잘 쓰는 사람이 앞에 섰고,
다친 사람은 뒤로 보냈다.

패배한 사람에게는 다시 일어나라고 했다.

한 번의 실패를 이유로 사람을 버리는 것을 특히 싫어했다.

자신이 그렇게 버려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헬드란은 빠르게 승진했다.

전투에서는 가장 먼저 뛰어들었고,
퇴각할 때는 가장 늦게 물러났다.

겁에 질린 병사 앞에서는 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살아서 돌아가면 내가 술 산다!”

누군가 외쳤다.

“부단장님 지난번에도 안 샀잖습니까!”

“그러니까 살아서 받아내!”

그런 식이었다.

그에게 허풍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아직 다음이 있다는 말을,
믿기 어려울 때 대신 외쳐주는 방식이었다.


헬드란이 꿈꾸는 홀리몰리는 과거의 영지를 복원한 나라가 아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말한다.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아도 올라갈 수 있는 나라.

전쟁에서 한 번 패했다고 모든 것을 잃지 않는 나라.

빚을 졌다고 자식까지 평생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나라.

실수한 사람에게 다시 시도할 자리가 남아 있는 나라.

헬드란은 그런 나라를 만들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선언한다.

“언젠가 홀리몰리라는 나라를 세울 거야. 그러니 지금 실컷 웃어둬!”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미쳤다고 하고,
누군가는 술자리에서나 할 이야기라며 넘긴다.

헬드란은 개의치 않는다.

자신이 한때 성 하나를 영원한 세계라고 믿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지가 사라져도 사람이 남았다.

사람이 남는다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그가 패배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다.


하지만 그의 꿈에는 아직 헬드란 자신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은 모순이 남아 있다.

그는 혈통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신이 만들 나라의 이름은 여전히 홀리몰리다.

몰락한 자신의 가문명.

누군가 한번은 그에게 물었다.

“혈통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면서 왜 나라는 네 가문 이름인데?”

헬드란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제일 먼저 생각했으니까.”

농담처럼 넘겼다.

하지만 그 질문은 남았다.

홀리몰리라는 이름을 이어가려는 것은 과거를 넘어서는 일일까.

아니면 자신도 결국 가문의 이름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헬드란은 아직 그것을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그에게 홀리몰리는 왕조의 이름이 아니라 약속의 이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언제까지 그렇게 받아들일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도 있다.

헬드란은 강한 힘이 약자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 자체는 그의 삶에서 나왔다.

힘이 없었던 홀리몰리는 패배했고,
힘이 없던 영지민들은 귀족들의 전쟁에 휩쓸렸다.

그래서 그는 누구도 함부로 무너뜨릴 수 없을 만큼 강한 나라를 꿈꾼다.

강한 군대.
튼튼한 법.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

하지만 아직 헬드란은 충분히 묻지 않았다.

그 강한 군대가 잘못된 명령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튼튼한 법이 누군가에게만 유리하게 만들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약자를 지키기 위해 만든 권력이 어느 날 자신을 지켜야 할 대상으로 선언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권력을 잃어본 사람이다.

아직 권력을 가진 채 잘못되어본 사람은 아니다.

언젠가 홀리몰리가 정말 나라가 된다면,
그 질문은 더 이상 농담으로 넘길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의 헬드란은 아직 기사다.

황금깃털이 달린 망토를 걸치고,
대검을 어깨에 올리고,
자기 짐에 쓸데없는 물건을 잔뜩 넣고 다니는 스물다섯 살의 젊은 기사.

전투가 벌어지면 가장 먼저 앞으로 나간다.

누군가 넘어지면 손을 내민다.

패배했다고 주저앉은 사람이 있으면 대개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

“한 번 졌잖아.”

“한 번밖에 안 졌네.”

그에게 패배는 끝이 아니다.

영지도 잃었다.
가문도 몰락했다.
아버지도 잃었다.

그래도 자신이 남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았다.

그렇다면 다음이 있을 수 있다.

헬드란은 그것을 믿는다.

정확히는,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그날 성문을 열어 탈출시킨 사람들이 단지 조금 늦게 절망하기 위해 살아남은 것이 아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황이 나빠질수록 그의 목소리는 커진다.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한다.
성벽을 세우겠다고 말한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허풍이라고 웃는다.

헬드란도 함께 웃는다.

아직은 허풍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게 꿈이란 처음부터 가능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내일도 움직이게 만드는 말을 먼저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다.

홀리몰리라는 나라는 아직 지도 어디에도 없다.

지금 존재하는 것은 몰락한 가문의 이름과,
그 이름을 더 이상 패배의 묘비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한 기사의 고집뿐이다.

그리고 헬드란은 그 정도면 시작하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칠중저울회2명
MAR
마르케스
델피로칠중저울회-회장
“무료라는 말은 대가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대신 내는지 숨긴다는 뜻이지요.”
🩸 HP60
💪 공격력5
🧙 마법력30
✨ 신비력1
🛡️ 방어력10
🔗 항마력10
😖 신비저항5
🏃 회피력30
과거 보기
마르케스의 이야기는 불이 난 창고에서 시작된다.

그가 아직 열세 살이었을 때였다.

델피로 서부의 상업지대에는 거대한 창고들이 강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곡물과 직물, 광석과 향신료, 귀금속과 계약서가 같은 거리에 쌓여 있었다.

그곳에서 마르케스의 부모는 창고 관리 노동자로 일했다.

아버지는 적재 목록을 확인했고,
어머니는 출고 수량과 봉인을 검사했다.

둘 다 높은 직급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수가 생기면 가장 먼저 책임을 묻는 자리였다.

마르케스는 어릴 때부터 장부를 보며 자랐다.

아버지가 저녁마다 숫자를 맞추는 모습을 보았고,
어머니가 한 줄 잘못 적힌 기록 때문에 몇 시간씩 창고를 다시 확인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숫자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건조했다.

창고 안에는 마른 포장재가 쌓였고,
금속 램프의 불씨가 자주 튀었다.

노동자들은 몇 차례 안전 설비를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물통을 더 비치해달라.
낡은 방화벽을 교체해달라.
경비 인원을 늘려달라.

하지만 상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었다.

마르케스는 당시 그 판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돈은 필요하면 쓰는 것이었다.

창고가 불에 타면 더 큰 손해가 아닌가.

그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안 고쳐요?”

아버지는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안 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나면?”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건 그때 계산하겠지.”

마르케스는 그 대답을 오래 이해하지 못했다.

며칠 뒤 이해하게 되었다.

너무 늦게.


화재는 새벽에 시작되었다.

작은 불씨 하나가 포장 천에 옮겨붙었다.

불은 금방 퍼졌다.

방화벽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물통은 부족했다.
경비 인원은 불길보다 적었다.

창고 안에는 아직 야간 근무자들이 남아 있었다.

마르케스의 부모도 그 안에 있었다.

사람들은 문을 열려고 했다.
잠긴 출고구를 부수려고 했다.
물통을 날랐다.

하지만 불은 계산보다 빨랐다.

아침이 되었을 때 창고 절반이 무너져 있었다.

마르케스는 부모의 시신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이름이 적힌 작은 금속표 두 개뿐이었다.


장례가 끝난 뒤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상단 직원은 매우 공손했다.

유가족에게 정해진 금액이 지급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망자 수.
부상자 수.
소실된 물자.
건물 복구비.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었다.

마르케스는 그 장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 안에는 더 오래된 기록도 있었다.

방화벽 교체 비용.
추가 물통 설치 비용.
경비 인원 증원 비용.

그리고 예상 사고 발생률.

그 아래에는 노동자 사망 시 지급해야 할 평균 보상금이 적혀 있었다.

숫자들은 정리되어 있었다.

안전 설비를 개선하는 비용보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노동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비용이 더 저렴했다.

그래서 개선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마르케스는 몇 번이나 계산을 다시 했다.

틀리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우연히 죽은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장부 안에서는 이미 죽을 수도 있는 사람으로 계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감당 가능한 비용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 마르케스는 숫자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집착하게 되었다.

문제가 숫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숫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전 설비 비용도.
사고 위험도.
사람이 죽었을 때 지급할 돈도.

문제는 그 계산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마르케스는 생각했다.

숫자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숫자를 숨긴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그 믿음은 그의 인생 전체를 바꿨다.


그는 상업을 배웠다.

계산을 배웠고,
계약법을 배웠고,
보험과 이율과 위험 분산을 배웠다.

생쥐수인 특유의 작은 체구 때문에 처음에는 얕보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마르케스는 한 번 본 장부의 숫자를 거의 잊지 않았다.

어떤 거래가 어디에서 손해를 만드는지,
어떤 계약 조항이 누구에게 위험을 떠넘기는지 빠르게 찾아냈다.

그는 협상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이 비용은 누가 부담합니까?”

대답이 돌아오면 다시 물었다.

“실패할 경우에는요?”

“예상 손실은 어느 쪽에 귀속됩니까?”

“그 책임을 질 수 없는 사람에게 넘어갈 가능성은 없습니까?”

상대는 종종 짜증을 냈다.

마르케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짜증을 낼수록 중요한 내용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가 칠중저울회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한 광산 계약 때문이었다.

계약서에는 광부들에게 높은 임금을 지급한다고 적혀 있었다.

겉보기에는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장비 파손 비용,
숙식비,
의료비,
도구 대여료가 모두 노동자의 임금에서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사고가 발생하면 치료비도 개인 부담이었다.

결국 노동자는 일을 많이 할수록 빚을 지게 되는 구조였다.

마르케스는 계약서 전체를 다시 계산했다.

그리고 회의석상에서 말했다.

“임금이 높다는 설명은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다만 그 임금을 실제로 받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는 비용 항목을 하나씩 읽었다.

누군가 말했다.

“노동자들이 동의한 계약 아닙니까?”

마르케스는 안경을 고쳐썼다.

“동의는 내용을 알았을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 계약은 결국 수정되었다.

그 뒤로 마르케스는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곤란한 계약이 생길 때마다 사람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며 그는 상단주가 되었다.

하지만 화려한 상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값비싼 옷보다 오래 입을 수 있는 외투를 골랐고,
연회에서는 술보다 계약서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피곤한 눈은 늘 그대로였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는 ‘무료’였다.

누군가 말했다.

“이 서비스는 무료입니다.”

마르케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비용은 어디에서 충당합니까?”

“그건 저희가 부담합니다.”

“정확히 누가 부담합니까?”

그는 끝까지 확인했다.

그에게 무료라는 말은 대가가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가를 내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가까웠다.

그래서 자주 말했다.

“무료라는 말은 대가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대신 내는지 숨긴다는 뜻이지요.”


마르케스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약한 사람에게 위험이 떠넘겨지는 구조다.

가난한 사람이 더 높은 이자를 내는 계약.

전쟁이 나면 귀족 대신 변경 주민이 먼저 손해를 보는 보험.

상인이 이익을 얻고 사고가 나면 노동자가 책임지는 운송 계약.

그는 그런 구조를 보면 거의 집요할 정도로 문제를 파고든다.

누가 이익을 얻는가.
누가 위험을 진다.
누가 실패했을 때 빠져나갈 수 있는가.
누가 빠져나갈 방법조차 없는가.

그에게 공정함은 모든 사람이 같은 값을 내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자신이 모르는 비용을 대신 내게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케스의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그는 착취를 막기 위해 모든 것을 측정하려 한다.

노동자의 안전도.
전쟁의 위험도.
치료 비용도.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도.

숫자가 있어야 숨길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숫자를 붙이는 순간,
사람들은 그 숫자를 비교하기 시작한다.

한 사람을 살리는 데 드는 비용.
열 사람을 살리는 데 드는 비용.

누구를 구하는 편이 더 효율적인지.

어느 생명이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지.

마르케스는 그런 계산을 혐오한다.

그런데 동시에,
그 계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언어를 누구보다 정교하게 만들고 있다.

그 역시 알고 있다.

어느 날 한 젊은 직원이 물었다.

“상단주님, 생명에도 가격을 매길 수 있습니까?”

마르케스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비용과 위험을 곧바로 계산했을 사람이었다.

한참 뒤 그는 말했다.

“가격을 매기지 않으면 죽었을 때 아무것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이 생깁니다.”

직원이 다시 물었다.

“그럼 가격을 매기면요?”

마르케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의 다음 문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격을 매길 수 있다면,
살아 있는 사람도 거래할 수 있지 않은가.


그 후 마르케스는 계약서에 한 문장을 자주 덧붙인다.

‘본 보상액은 해당 생명의 가치가 아니라 발생한 손실에 대한 최소 책임을 산정한 것이다.’

법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문장이다.

보상금의 액수를 바꾸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반드시 적는다.

숫자가 사람의 가치로 오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것으로 충분한지는 자신도 모른다.


마르케스는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먼저 출구를 찾는다.

계약마법과 계산술을 이용해 금속 탄환의 궤도를 비틀고,
필요하면 상대의 행동에 조건과 대가를 걸어 시간을 번다.

하지만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보다 살아서 빠져나가는 편을 선호한다.

누군가 그것을 겁이 많다고 놀리면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죽으면 손실이 너무 큽니다.”

대개 그렇게 말한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절반은 진심이다.

그에게 목숨은 함부로 베팅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목숨이라면 더욱 그렇다.


마르케스의 장부가방 안에는 오래된 종이 한 장이 남아 있다.

부모가 죽었던 창고의 안전 개선안이다.

방화벽 교체 비용.
물통 추가 배치 비용.
야간 인력 증원 비용.

그리고 사고 발생 시 예상 보상금.

종이는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닳았지만 숫자는 아직 읽을 수 있다.

마르케스는 가끔 그 장부를 펼친다.

그때마다 같은 사실을 확인한다.

부모를 살릴 수 있었던 비용은 분명 존재했다.

그 비용은 너무 비싸서 지불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지불하지 않는 편이 더 이익이라고 결정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묻는다.

누가 이익을 얻는지.

누가 비용을 내는지.

누가 위험을 떠안는지.

그리고 그 사실을 당사자가 알고 있는지.

마르케스는 세상에서 모든 대가를 없앨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마법에도 대가가 있고,
사업에도 손실이 있고,
정책에도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그 대가가 가장 약한 사람에게 조용히 떠넘겨지는 일을 막는 것.

그래서 그는 오늘도 계산한다.

숫자를 믿어서가 아니라,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이 다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계속 경계한다.

언젠가 자신이 만든 완벽한 장부가,
사람의 생명까지 너무 정확하게 계산해버리는 날이 오지 않기를.


BLD
벨라디
델피로칠중저울회-소속 상인
“원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대가를 치를 자신이 없는 거죠?”
🩸 HP900
💪 공격력5
🧙 마법력10
✨ 신비력90
🛡️ 방어력15
🔗 항마력20
😖 신비저항99
🏃 회피력35
과거 보기
벨라디의 이야기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벨라디 자신도 그것을 연도나 장소로 설명하지 않는다.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그녀는 웃으며 대답한다.

“아주 먼 곳이에요. 여기서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주소랍니다.”

그녀가 말하는 ‘먼 곳’은 바다 건너의 다른 대륙이 아니다.

엘다르의 별과 맥류가 닿지 않는 세계.
악마들이 지구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리고 벨라디는 그곳에서 태어난 생물도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인간이 무언가를 원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하고,
이미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 움켜쥐는 동안 축적된 하나의 개념.

탐욕.

그것이 어느 순간 이름과 의지를 얻었다.

지금 사람들이 벨라디라고 부르는 존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 엘다르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벨라디는 인간의 욕망을 특별히 흥미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욕망은 어디에나 있었다.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원했다.
가난한 사람은 돈을 원했다.
병든 사람은 건강을 원했고,
늙은 사람은 시간을 원했다.

너무 당연했다.

불이 타오르고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원하는 존재가 무언가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벨라디가 흥미를 느낀 것은 욕망 그 자체가 아니었다.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가족을 위해서입니다.”

“나라를 위해서입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갸웃했다.

원하고 있으면서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을 위해 바라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벨라디에게 그것은 이상했다.

거짓말이라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자기 자신에게조차 숨기려는 행동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기로 했다.


벨라디가 선택한 곳은 델피로였다.

황금왕국.

황금강을 따라 곡물과 금속이 움직이고,
칠중회랑의 거래소에서는 하루에도 수천 장의 계약서가 오갔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사고팔 때마다 그것의 가치를 숫자로 표현했다.

땅.
곡물.
배.
노동.
위험.
미래의 수익.

아직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물건조차 가격이 붙었다.

벨라디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다른 곳에서는 숨기던 욕망을 델피로의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입 밖에 냈기 때문이다.

“더 벌고 싶다.”

“저 상단을 이기고 싶다.”

“내 아이에게 이 재산을 남기고 싶다.”

“저 땅이 갖고 싶다.”

그녀에게 거래소는 성전보다 솔직한 장소였다.

사람들은 황금 앞에서 자신의 기도를 숨기지 않았다.

벨라디는 젊은 상인의 모습을 만들었다.

긴 붉은 머리를 양쪽으로 묶고,
황금빛 세로동공은 약한 마법으로 둥글게 감췄다.

뿔도 숨겼다.

녹색과 황금색 드레스를 입고,
보석을 걸고,
늘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름을 하나 골랐다.

벨라디.

진명은 아니었다.

진명이 따로 있는지조차 그녀는 알려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구경했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돈이 필요하세요?”

“명예는요?”

“저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지는 않으세요?”

그녀는 강요하지 않았다.

필요하지도 않았다.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발견하면 대개 스스로 움직였다.

벨라디는 작은 기회만 보여주었다.

조금 더 낮은 가격에 살 수 있는 물건.
조금 더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는 채권.
경쟁자의 실수를 이용할 수 있는 계약.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서라고 했다.

누군가는 직원들을 위해서라고 했다.

누군가는 이번 한 번뿐이라고 했다.

그다음에는 대부분 이유가 조금씩 바뀌었다.

벨라디는 그것이 재미있었다.


그녀가 탐욕이라는 개념에 진정으로 매료된 것은 한 남자를 만난 뒤였다.

그는 부유한 사람이 아니었다.

작은 운송업체에서 장부를 관리하던 평범한 인간이었다.

아내가 병들어 있었다.

치료에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에게는 어린 자식도 둘 있었다.

남자는 벨라디에게 말했다.

“돈이 필요합니다.”

벨라디는 웃었다.

“얼마나 필요하세요?”

남자는 치료비만큼의 액수를 말했다.

벨라디는 그에게 한 채권을 소개했다.

위험은 높았지만 성공하면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었다.

남자는 망설였다.

벨라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택은 남자가 했다.

채권은 성공했다.

남자는 돈을 벌었다.

아내는 치료를 받았다.

가족은 살아남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야기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몇 달 뒤 남자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아내가 아프지 않았다.

“지난번과 비슷한 상품이 있습니까?”

벨라디는 물었다.

“돈이 또 필요하세요?”

남자는 잠시 망설였다.

“아이들에게 더 좋은 집을 주고 싶습니다.”

벨라디는 더 큰 거래를 소개했다.

남자는 성공했다.

집을 샀다.

다음에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다음에는 가족이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재산을 원했다.

그다음에는 자식들이 귀족에게 고개 숙이지 않게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는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정도 자본이면 상단을 하나 살 수 있습니다.”

“저 사람보다 제가 시장을 더 잘 이해합니다.”

“여기서 멈추면 지금까지 얻은 기회를 버리는 겁니다.”

그의 눈은 처음 만났을 때와 달라져 있었다.

벨라디는 그 변화를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신기했다.

처음의 욕망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아내를 살리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 욕망이 충족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형태만 바뀌었다.

가족을 살리고 싶다.

가족을 편하게 만들고 싶다.

가족을 누구보다 부유하게 만들고 싶다.

자신이 누구보다 부유해지고 싶다.

벨라디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욕망은 목적지가 아니라 길일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결국 큰 실패를 했다.

빌린 돈으로 투자한 사업이 무너졌다.

채권자들이 몰려왔다.
집과 창고가 담보로 넘어갔다.

그래도 빚이 남았다.

남자는 벨라디를 찾아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초췌한 얼굴이었다.

“방법이 있습니까?”

벨라디는 있었다.

항상 방법은 있었다.

그녀는 남자 앞에 새로운 계약서를 놓았다.

조건을 하나씩 설명했다.

숨기는 내용은 없었다.

남자가 가진 미래 수익.
상속권.
가족 공동재산.

마지막에는 가족들이 가진 재산에 대한 처분권까지 계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남자는 얼굴을 굳혔다.

“그건 제 것만이 아닙니다.”

벨라디는 밝게 웃었다.

“맞아요.”

그리고 계약서를 그의 앞으로 조금 밀었다.

“그러니까 서명하지 않으시면 돼요.”

그녀는 강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것뿐이었다.

남자는 오래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물었다.

“이걸 하면 전부 되찾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있어요.”

“얼마나 됩니까?”

벨라디는 확률을 말해주었다.

높지 않았다.

남자는 다시 계약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명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남자는 자신의 재산만 잃지 않았다.

가족의 몫까지 잃었다.

아내는 그를 떠났다.
자식들도 함께 떠났다.

남자는 벨라디를 찾아와 소리쳤다.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어!”

벨라디는 정말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웃지도 않고 물었다.

“제가요?”

“당신이 그 계약을 내놨잖아!”

“조건은 전부 설명드렸는데요.”

남자는 책상을 내리쳤다.

“가족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어!”

그 순간 벨라디는 아주 오래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도 사실이었을까.

가족을 잃을 가능성까지 알면서 계약서에 서명했던 순간에도?

벨라디는 부드럽게 물었다.

“정말 마지막까지 가족을 위해서였나요?”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벨라디는 그 침묵을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벨라디에게는 하나의 확신이 생겼다.

욕망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거짓말할 수 있다.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신에게도,
법정에서도.

하지만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를 보면 결국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돈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돈을 위해 어디까지 내놓을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명예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명예를 얻기 위해 누구를 버릴 수 있는지가 더 정직했다.

벨라디에게 욕망은 죄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백이었다.

가장 솔직한 형태의 고백.

그녀는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이미 존재하는 욕망에 값을 붙여 앞에 내려놓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원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대가를 치를 자신이 없는 거죠?”

그 말은 그녀에게 도발이 아니다.

진심 어린 질문에 가깝다.


시간이 지나면서 벨라디는 칠중저울회에 스며들었다.

젊은 상인.
조금 기묘하지만 계산이 빠르고,
새로운 투자처를 잘 찾으며,
사람의 마음을 이상할 정도로 정확하게 읽는 여자.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악마라는 사실을 밝힐 이유는 없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편이 훨씬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상인들은 그녀 앞에서 욕망을 이야기했다.

귀족들은 가문의 번영을 말했다.
평민들은 신분 상승을 말했다.
부모는 자식의 미래를 말했다.

벨라디는 언제나 밝게 들었다.

그리고 가끔 아주 작은 질문을 던졌다.

“그걸 얻을 수 있다면 무엇까지 포기하실 수 있어요?”

질문 하나면 충분한 경우가 많았다.

사람은 스스로 답을 만들었다.


그녀의 신비력은 그런 욕망에 형태를 준다.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은 황금 사슬이 된다.

놓치고 싶지 않다는 집착은 계약 낙인이 된다.

무언가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여기는 마음은 저주가 되어 그 가치 자체를 부풀린다.

평범한 금화 하나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처럼 느끼게 만들 수도 있다.

자신의 검을 잃는 것이 목숨을 잃는 것보다 두려워지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벨라디는 이런 힘을 사용할 때조차 상대에게 전혀 없는 욕망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없던 걸 만든 게 아니에요.”

그녀는 웃으며 말한다.

“조금 크게 보여드렸을 뿐이죠.”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벨라디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그녀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있다.

대가 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그런 행동도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아이 대신 죽는다면,
아이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라고 해석했다.

기사가 동료 대신 칼을 맞는다면,
명예를 얻고 싶은 욕망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구하려 위험 속으로 뛰어들면,
자기 자신을 선한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욕망이라고 결론 내렸다.

언제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욕망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은 없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델피로 시장에서 작은 사고가 일어났다.

짐마차 하나가 비탈에서 미끄러졌다.

사람들이 피했고,
한 아이만 길 한가운데 남았다.

근처에 있던 노동자 하나가 아이를 밀쳐냈다.

그리고 대신 마차에 치였다.

둘은 가족도 아니었다.

노동자는 아이의 이름도 몰랐다.

보상금도 없었다.
명예도 없었다.
주변에 그 행동을 제대로 본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며칠 뒤 노동자는 죽었다.

벨라디는 이상해서 그 사람의 주변을 조사했다.

숨겨진 관계가 있었는지.
아이의 가족에게 빚이 있었는지.
종교적 신념 때문이었는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는 그 순간 그냥 몸을 움직였다.

그것뿐이었다.

벨라디는 그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뒤로 그녀는 비슷한 행동을 볼 때마다 더욱 집요해졌다.

“왜 그러셨어요?”

“뭘 얻으려고요?”

“누가 알아주길 바라셨죠?”

대부분의 사람에게서는 결국 어떤 욕망을 찾아낼 수 있었다.

사랑.
죄책감.
명예욕.
신앙.
소속되고 싶은 마음.

그러면 벨라디는 안심했다.

역시 인간은 정직했다.

욕망이라는 언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아주 드물게,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손해를 볼 것을 알고도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넘겨주는 사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빚을 대신 갚는 사람.

대가도 감사도 남지 않을 것을 알면서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그런 행동을 보면 벨라디의 미소는 잠시 멈춘다.

이해하지 못해서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에게 불쾌함보다 강한 호기심을 준다.


벨라디는 여전히 믿는다.

욕망은 존재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가장 정직한 고백이라고.

사람이 무엇을 원한다고 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얻기 위해 무엇을 지불하는지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고.

그래서 그녀는 거래를 좋아한다.

대가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가격표가 붙는 순간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
무엇을 더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벨라디에게 그 순간만큼 인간이 아름다운 때는 드물다.

욕망 앞에서는 왕도 상인도 노동자도 비슷하게 흔들린다.

그녀는 그것을 보며 화사하게 웃는다.


그러나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선택만은 아직 설명하지 못한다.

벨라디는 그것을 순수한 선의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아직 찾지 못한 욕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보상.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만족.
죽은 뒤의 명예.
타인을 소유하려는 애정.

무엇이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벨라디가 수없이 관찰해온 세계의 구조에 작은 구멍이 생기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원하지 않고도 줄 수 있다면.

아무것도 얻지 않고도 잃을 수 있다면.

가장 소중한 것을 거래가 아닌 선택으로 내놓을 수 있다면.

욕망만으로는 존재의 전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벨라디는 아직 그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런 사람을 만나면 가까이 다가간다.

평소보다 더욱 다정하게 웃는다.

그리고 아주 좋은 기회를 건넨다.

돈.
권력.
사랑.
구원.

상대가 가장 원할 법한 것을 하나씩 앞에 늘어놓는다.

언젠가는 반드시 가격을 말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정말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세요?”

그 질문을 던질 때 벨라디의 황금빛 눈은 언제나 즐겁게 빛난다.

하지만 그 웃음 안에는 그녀 자신도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조금 섞여 있다.

호기심.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신념이 틀렸다는 증거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두려움.

탐욕의 악마 벨라디는 인간이 욕망 때문에 무너지는 모습을 셀 수 없이 보아왔다.

그녀에게 그것은 새롭지 않다.

오히려 지금 그녀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반대쪽이다.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기회 앞에서,
정말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런 존재를 만나는 날,
벨라디가 그 선택을 인정할지,
끝까지 숨겨진 욕망을 찾아내려 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벨라디 자신조차도.


빈손의형제단2명
KRA
케라
델피로빈손의형제단-단장
“법대로 하자고? 후훗, 좋아. 그 법이 우릴 사람으로 셌는지부터 보자.”
🩸 HP100
💪 공격력70
🧙 마법력30
✨ 신비력1
🛡️ 방어력30
🔗 항마력30
😖 신비저항60
🏃 회피력75
과거 보기
케라의 이야기는 델피로의 화려한 황금빛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작된다.

칠중회랑의 거대한 상관과 은행들이 보이지 않는 골목.
마차가 지나가기에는 좁고,
비가 오면 배수로의 물이 문턱까지 차오르는 노동자 지구였다.

케라는 그곳에서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좋은 집은 아니었다.
창문 한쪽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고,
겨울이면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

그래도 어머니는 늘 말했다.

“우린 빚은 없어.”

어린 케라는 그 말이 왜 자랑인지 몰랐다.

돈이 없는 건 가난이고,
빚이 없는 건 그냥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델피로에서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빚이 없다는 것은 아직 자신의 내일이 자기 것이라는 뜻이었다.


케라의 어머니는 봉제공이었다.

귀족들이 입는 옷의 안감을 꿰매고,
상인들의 외투를 수선하고,
기사들의 망토 가장자리에 장식을 달았다.

손이 빠르고 꼼꼼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일해도 모이는 돈은 많지 않았다.

케라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옆에서 실을 정리하고 천 조각을 날랐다.

고양이수인 특유의 좋은 균형감각과 빠른 손 덕분에 높은 선반을 타고 올라가는 일은 누구보다 잘했다.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꼬리를 잡아당겼다.

“떨어진다.”

“안 떨어져.”

“떨어진 애들이 다 그렇게 말했어.”

케라는 투덜거리면서도 내려왔다.

그 시절의 그녀에게 세상은 불공평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곳은 아니었다.

돈이 없으면 일한다.
일하면 돈을 받는다.
돈을 모으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산다.

느리더라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쓰러진 것은 케라가 열일곱이던 겨울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피로라고 생각했다.

기침이 길어졌고,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어느 날에는 바늘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다.

치료사는 약과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비용을 들은 케라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을 팔아도 부족했다.

팔 수 있는 장신구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케라는 돈을 빌리기로 했다.

그 선택을 특별히 비극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델피로에서는 모두가 돈을 빌렸다.

상인은 배를 사기 위해 빌렸고,
귀족은 영지를 개발하기 위해 빌렸으며,
농민은 다음 파종을 위해 빌렸다.

자신은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빌리는 것뿐이었다.

계약서도 읽었다.

이율.
상환 기간.
연체 시 추가 이자.

전부 적혀 있었다.

케라는 자신의 이름을 썼다.

그때는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상태는 잠시 좋아졌다.

케라는 더 많이 일했다.

낮에는 창고에서 짐을 옮겼고,
밤에는 주점 일을 도왔다.

잠을 줄이면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자는 케라보다 잠을 적게 잤다.

일하지 않는 동안에도 늘어났다.

치료비가 한 번 더 필요했다.

케라는 또 돈을 빌렸다.

두 번째 계약은 첫 번째보다 조건이 나빴다.

그래도 서명했다.

어머니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몇 달 뒤 채권자가 찾아왔다.

상환이 늦었다고 말했다.

케라는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채권자는 친절했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가 내놓은 것은 새로운 계약서였다.

돈을 갚을 때까지 지정된 사업장에서 일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숙식도 제공되고,
임금 일부가 자동으로 빚을 갚는 데 사용된다고 했다.

케라는 계산했다.

가능해 보였다.

서명했다.

그 순간부터 케라의 노동권은 채권자의 것이 되었다.


처음 몇 주 동안은 정말 평범한 일처럼 보였다.

창고에서 일했다.
짐을 옮겼다.
화물을 분류했다.

하지만 임금에서 숙식비가 빠졌다.

작업복 비용도 빠졌다.
도구 대여료도 빠졌다.
관리비도 빠졌다.

빚은 거의 줄지 않았다.

케라는 다른 직장을 구하겠다고 말했다.

관리인은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상환이 끝날 때까지 노동 장소의 지정권은 채권자에게 있었다.

케라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계약 위반 벌금이 추가되었다.

도망치면?

추적 비용까지 채무에 포함되었다.

케라는 계약서를 한참 바라보다가 웃었다.

“와.”

관리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뭐가 우습지?”

“아니, 그냥.”

케라는 꼬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데 이렇게 많은 글자가 필요한 줄 몰랐어.”

관리인은 그녀에게 무례하다고 말했다.

케라는 그날 처음으로 법적으로 정당하다는 말이 사람답다는 말과 아무 관계도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머니는 결국 죽었다.

케라는 장례식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못했다.

관리인이 반나절의 외출만 허락했기 때문이다.

장례 비용도 빚에 더해졌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진 빚이었다.

이제 어머니는 없었다.

그런데 빚은 남아 있었다.

케라는 처음으로 계약 담당자에게 물었다.

“치료받을 사람도 죽었는데 내가 왜 계속 갚아야 해?”

담당자는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채무와 치료 결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렇구나.”

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었다.

그 순간부터 그녀의 웃음은 조금 달라졌다.

즐거워서 웃는 것만은 아니었다.

화를 내면 상대가 경비를 부르고,
울면 상대가 불쌍한 얼굴을 해줄 뿐이었다.

웃으면 적어도 상대가 잠깐 당황했다.

그래서 케라는 화가 날수록 농담하는 법을 배웠다.


계약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관리자에게 물었다.
법률 상담소를 찾아갔다.
상단의 분쟁 조정관에게 호소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거의 같았다.

계약은 적법했다.

강제로 서명한 증거가 없었다.

조건도 계약서에 적혀 있었다.

케라가 읽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유효했다.

한 관리가 말했다.

“법대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케라는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래?”

그리고 물었다.

“그 법에 나는 사람으로 적혀 있어?”

관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케라는 이미 계약당사자였다.

채무자.
노동 제공자.
상환 의무자.

그 모든 이름은 있었지만,
그 전에 사람이라는 사실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케라는 결국 법으로 계약을 깨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계약서를 훔치기로 했다.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다.

계약서가 보관된 사무실의 창문 위치를 확인하고,
야간 경비의 순찰 시간을 외우고,
벽을 타고 올라갔다.

고양이수인인 것이 그날만큼 편리했던 적은 없었다.

금고의 자물쇠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케라는 결국 철사를 두 개 부러뜨렸다.

세 번째 철사가 돌아갔을 때 작은 소리가 났다.

찰칵.

케라는 중얼거렸다.

“법보다 이쪽이 쉽네.”

금고 안에는 자신의 계약서만 있지 않았다.

수십 장.

아니, 수백 장의 계약서가 있었다.

이름도 다양했다.

인간.
수인.
고블린.
하플링.

치료비 때문에 빚진 사람.
장례비 때문에 빚진 사람.
농사를 망쳐 빚진 사람.
부모의 빚을 물려받은 사람.

케라는 자기 계약서를 찾았다.

손에 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다른 계약서들을 바라보았다.

자기 것만 들고 나갈 수도 있었다.

그게 가장 안전했다.

잠깐 고민했다.

그다음 욕을 했다.

그리고 가능한 만큼 전부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날 밤 케라는 혼자 도망치지 않았다.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던 채무자들을 깨웠다.

“일어나.”

누군가 잠결에 물었다.

“왜?”

케라는 계약서 뭉치를 흔들었다.

“우리 오늘부터 실업자야.”

처음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경비가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케라는 창고의 줄을 끊어 통로를 막았고,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뒷골목 길을 알려주었다.

경비 하나가 검을 뽑았을 때 케라는 처음으로 단검을 사람에게 겨눴다.

죽이지는 않았다.

손목을 치고,
검을 떨어뜨리고,
발목에 와이어를 걸었다.

상대가 넘어졌다.

케라는 그의 검을 멀리 차버렸다.

“미안.”

그리고 웃었다.

“근데 나 지금 퇴근 중이라.”

그것이 빈손의형제단이 태어난 첫날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이름조차 없었다.

그저 빚진 사람들이 계약서를 들고 함께 도망쳤을 뿐이었다.


처음 몇 달은 살아남는 것만으로 바빴다.

추적자가 붙었다.

채권자들은 도난당한 계약서를 회수하려 했다.

일부 채무자들에게는 현상금까지 걸렸다.

케라는 사람들을 숨겼다.

폐창고.
하수도.
허름한 여관의 다락.

도시의 법이 닿지 않는 장소들을 배웠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도 찾아왔다.

계약 때문에 일터를 떠날 수 없는 노동자.

부모의 빚 때문에 팔려갈 처지의 아이.

읽지도 못하는 계약서에 손도장을 찍은 고블린.

집 한 채를 담보로 돈을 빌렸다가 가족 전체의 노동권을 잃은 수인.

케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대개 같은 말을 했다.

“계약서 어디 있어?”

그다음은 훔쳤다.

없애고,
바꿔치기하고,
때로는 채권자를 협박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되는 사건은 정상적으로 처리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사람이 망가지는 사건이라면 다른 방법을 썼다.

그 원칙은 단순했다.

법보다 사람이 먼저였다.


‘빈손의형제단’이라는 이름도 그 무렵 붙었다.

어느 날 구조한 채무자가 케라에게 말했다.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집도 없었다.
돈도 없었다.
직업도 잃었다.

케라는 자기 손을 펴 보였다.

“나도.”

상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케라는 웃었다.

“그럼 잘됐네. 빼앗길 게 없잖아.”

그 말이 퍼졌다.

빈손으로 시작한 사람들.

빈손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던 사람들.

그리고 남의 손에서 빼앗긴 것을 다시 돌려놓으려는 사람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그들을 빈손의형제단이라고 불렀다.

케라는 이름이 꽤 마음에 들었다.

“단장은 누구냐”는 질문에는 잠깐 고민했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바라보았다.

케라는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첫날에 혼자 도망칠걸.”

그렇게 단장이 되었다.


케라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죽인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대답이 없어진다는 점을 싫어한다.

단검은 급소를 찌르는 데도 쓸 수 있지만,
손목과 무릎을 제압하는 데 더 자주 사용한다.

와이어는 목을 조르는 것보다 무기를 빼앗고 다리를 묶는 데 쓴다.

싸움이 시작되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목표는 승리가 아니다.

사람을 빼내는 것.
계약서를 확보하는 것.
도망칠 길을 만드는 것.

그것이 끝나면 사라진다.

기사들이 추격하면 지붕 위에서 손을 흔들기도 한다.

“수고해! 다음엔 좀 더 빠른 사람 보내!”

그 능글맞은 태도 때문에 기사단과 관리들에게는 특히 미움을 산다.

케라는 그 점도 조금 즐긴다.


그녀는 법 자체를 증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약속을 어기고,
힘이 있는 자는 힘이 없는 자에게 자기 뜻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은 있어야 한다.

다만 케라는 한 가지 조건을 붙인다.

법이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

계약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때만 약속이다.

한쪽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서명하고,
다른 쪽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면,
두 서명의 무게는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도 계약은 계약이야.”

케라는 꼬리 끝을 흔들었다.

“그래?”

그리고 웃었다.

“그럼 목에 칼 대고 서명받는 것도 계약이라고 하지 그래.”

상대가 굶주림은 칼이 아니라고 말하면,
케라는 더 크게 웃는다.

“굶어본 적 없구나?”


그녀의 대표적인 말도 그런 경험에서 나왔다.

한 번은 붙잡힌 형제단원을 석방하기 위해 관리와 협상하던 자리였다.

관리는 케라에게 법을 존중하라고 말했다.

“불만이 있어도 법대로 해결해야 합니다.”

케라는 의자에 기대앉아 웃었다.

“법대로 하자고?”

꼬리가 의자 뒤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후훗, 좋아.”

그녀는 탁자 위의 계약서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 법이 우릴 사람으로 셌는지부터 보자.”

그 말은 빈손의형제단 안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었다.

케라에게 법의 정당성은 오래되었다거나 왕이 승인했다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는가.

그것이 먼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생겼다.

처음에는 명백한 사건들이었다.

속여서 맺은 계약.
강제로 찍은 서명.
빚을 이용한 감금.

누가 피해자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형제단의 이름이 커지자 애매한 사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상인은 말했다.

“저 사람은 분명 계약 내용을 알고 돈을 빌렸습니다.”

채무자는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어.”

어떤 농민은 수확을 담보로 돈을 빌렸고 실제로 계약 조건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흉작이 오자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그 계약은 부당한가.

어떤 상단주는 위험한 사업에 투자한 사람에게 약속한 손실을 부담하라고 요구했다.

그것도 착취인가.

모든 실패한 계약을 없애준다면,
계약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케라는 처음으로 쉽게 웃을 수 없는 문제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형제단 안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누군가는 모든 고리대금 계약을 불태워야 한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폭력적인 채권자만 공격해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귀족과 상단의 재산을 훔치는 것은 무엇이든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케라는 마지막 주장에는 반대했다.

“부자라고 무조건 나쁜 놈이면 세상 참 편하겠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정당한 개입인지는 그녀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결국 결정은 케라에게 돌아왔다.

이 사람은 구한다.

이 계약서는 없앤다.

이 사건은 손대지 않는다.

이 채권자는 협박한다.

저 상인은 죄가 없다.

케라가 선을 그었다.

법이 사람의 존엄을 판단하는 것이 싫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가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인지 케라 자신이 판단하고 있었다.


한 형제단원이 그녀에게 직접 물은 적도 있었다.

“단장.”

“응?”

“우리가 틀리면?”

케라는 장난스럽게 웃으려다가 멈췄다.

“뭐가?”

“구해달라는 사람이 거짓말한 거면?”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계약서를 훔쳤는데 실제로는 저 사람이 다른 사람 돈을 떼먹은 거라면?”

케라는 침묵했다.

그 질문은 불편했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했던 말과 비슷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판단했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책임은 없다.

그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뒤부터 형제단은 가능한 한 계약 당사자 양쪽의 기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건을 맡기 전에 증언을 더 들었다.

명백하지 않다면 바로 계약서를 훔치지도 않았다.

케라는 투덜거렸다.

“우리 도둑 아니었어? 왜 자꾸 서류가 늘어나냐.”

그러면서도 직접 읽었다.


그렇다고 케라가 합법적인 조직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필요하면 지금도 창문으로 들어간다.

필요하면 계약서를 훔친다.

사람을 감금한 채권자가 있다면 문을 부수고 꺼내온다.

경비가 칼을 뽑으면 무장을 해제한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대부분 농담 하나를 남긴다.

무서워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숨을 돌릴 틈을 주기 위해서다.

누군가 자신을 영웅이라고 부르면 케라는 질색한다.

“영웅은 무슨.”

그녀는 대개 그렇게 대답한다.

“난 서류 훔치는 도둑인데?”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찾아오면 결국 이야기를 듣는다.

끝까지 듣고,
투덜거리고,
계산하고,
마지막에는 일어난다.

정이 많다는 말을 들으면 부정한다.

“그냥 저 꼴을 보고 있으면 밥맛이 떨어져서 그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형제단 안에 거의 없다.


케라는 지금도 어머니가 남긴 작은 재봉가위를 가지고 있다.

전투에는 쓸 수 없는 물건이다.

날도 많이 무뎌졌다.

가끔 실밥을 자를 때나 사용한다.

그 가위를 볼 때마다 케라는 자신이 처음 왜 계약서를 훔쳤는지를 기억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삶을 돌려받고 싶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끝나지 않던 빚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뒤에 우연히 다른 사람들의 계약서까지 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모른 척하지 못했다.


케라는 사람이 계약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믿는다.

법보다 먼저 존재하고,
빚보다 먼저 존재하며,
신분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떤 문서도 사람 자체를 소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법을 어길 때마다 새로운 질문이 따라붙는다.

누가 법을 어겨도 되는지를 누가 정하는가.

누가 약자인지를 누가 판단하는가.

구조한다는 명분으로 상대의 선택을 무시하기 시작한다면,
자신은 과거의 채권자들과 얼마나 다른가.

케라는 그 질문에 완벽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아마 그래서 더욱 농담을 많이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정의의 편이라는 말을 너무 진지하게 믿기 시작하는 순간,
누군가를 억압하면서도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제단원이 케라의 판단에 반대하면 웬만하면 듣는다.

짜증은 낸다.

놀리기도 한다.

하지만 입을 막지는 않는다.

자신을 의심해줄 사람이 없는 단장은,
결국 작은 왕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케라는 여전히 법을 잘 지키는 시민과는 거리가 멀다.

수배서가 붙은 도시도 있고,
그녀를 도둑이나 선동가라고 부르는 상단도 있다.

반대로 어떤 노동자 거리에서는 이름만 말해도 술 한 잔을 공짜로 받을 수 있다.

케라는 둘 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칭찬도 수배금도 결국 남이 붙인 가격표라고 생각한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다.

빚 때문에 도망칠 수 없다는 사람.
계약 때문에 가족과 떨어질 처지라는 사람.
법정에 가도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사람.

케라는 먼저 계약서를 달라고 한다.

읽는다.

그리고 정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웃는다.

그 웃음을 오래 본 형제단원들은 안다.

누군가의 금고가 곧 털릴 것이라는 뜻이다.

케라는 단검을 챙기고,
와이어를 허리에 감고,
가죽재킷의 주머니를 확인한다.

그리고 문을 나서며 말한다.

“자, 법대로 해보자고.”

잠깐 뒤 꼬리가 장난스럽게 흔들린다.

“물론 어느 법인지는 가서 정하고.”


GOB
고브나 작은걸음
델피로빈손의형제단-협력자
“비밀이 나쁜 게 아냐. 누구한테 감췄는지가 중요하지.”
🩸 HP50
💪 공격력10
🧙 마법력10
✨ 신비력5
🛡️ 방어력10
🔗 항마력10
😖 신비저항50
🏃 회피력95
과거 보기
고브나 작은걸음의 이야기는 델피로의 오래된 시장 골목에서 시작된다.

사람 두 명이 나란히 지나가기 힘든 좁은 길.
상점의 간판들이 머리 위를 거의 덮고,
낮에도 햇빛보다 등불이 더 익숙한 곳이었다.

고블린들에게는 그리 불편하지 않은 거리였다.

큰길은 인간에게 맞춰져 있었지만,
뒷골목은 달랐다.

배수로와 지붕 사이의 좁은 틈.
오래된 건물 뒤편의 연결통로.
낮은 창문과 창고의 환기구.

작은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길이 오히려 더 편했다.

고브나는 어릴 때부터 그 길들을 외웠다.

어느 담장은 비가 오면 미끄러운지.
어느 지붕은 밟으면 소리가 나는지.
어느 상점의 뒷문은 밤마다 제대로 잠기지 않는지.

누가 가르쳐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냥 많이 돌아다녔고,
한 번 본 길을 잘 잊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은 그녀를 작은걸음이라고 불렀다.

발소리는 작았고,
사라지는 것은 빨랐다.


고브나는 오빠와 함께 자랐다.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둘은 시장에서 가능한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오빠는 자물쇠를 고쳤다.
고브나는 물건을 배달했다.

돈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둘이 먹고살 정도는 되었다.

오빠는 늘 고브나에게 말했다.

“남의 물건 건드리지 마.”

고브나는 뾰족한 귀를 까딱였다.

“안 쓰는 것도?”

“주인이 있으면.”

“몇 년 동안 창고에 처박힌 것도?”

“그것도.”

고브나는 별로 납득하지 못했다.

고블린에게 사용하지 않고 방치한 물건의 소유권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빠와 함께 살려면 인간의 법도 알아야 했다.

고브나는 규칙을 외웠다.

이것은 가져가면 안 된다.
저것은 길에 떨어져 있어도 경비대에 신고해야 한다.
저 창고의 물건은 십 년째 먼지만 쌓여 있어도 누군가의 재산이다.

이해하는 것과 따르는 것은 다른 문제였지만,
적어도 어디서 문제가 생기는지는 알았다.


문제가 생긴 것은 고브나가 열다섯 살이던 해였다.

시장 중심의 보석상에서 귀금속 몇 점이 사라졌다.

값비싼 목걸이.
루비가 박힌 반지.
그리고 귀족에게 납품할 예정이던 작은 보석함 하나.

창고의 자물쇠에는 억지로 부순 흔적이 없었다.

누군가 열쇠를 사용했거나,
자물쇠를 능숙하게 열었다는 뜻이었다.

경비대는 시장의 자물쇠공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고브나의 오빠가 잡혀갔다.

이유는 충분해 보였다.

그는 며칠 전 그 보석상의 창고 자물쇠를 수리했다.

구조를 알고 있었다.

밤에 일하는 경우가 많아 시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고블린이었다.

마지막 이유는 아무도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오빠는 훔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비는 물었다.

“그럼 누가 훔쳤지?”

오빠는 몰랐다.

“증명할 수 있나?”

그것도 할 수 없었다.

보석상 주인은 분노했다.

“자물쇠를 열 줄 아는 놈입니다.”

누군가 옆에서 말했다.

“고블린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웃었다.

고브나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법원 앞에서 오빠를 기다렸다.

오빠는 임시 구금된 채 재판을 기다리게 되었다.

유죄가 확정되면 도난액을 갚을 때까지 강제노동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 돈은 둘이 평생 벌어도 갚기 힘든 액수였다.

고브나는 변호인을 찾아갔다.

변호인은 말했다.

“무죄를 입증할 증거가 필요합니다.”

고브나는 물었다.

“안 훔쳤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

변호인은 잠시 침묵했다.

“진범을 찾는 게 가장 확실하겠지요.”

고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날부터 고브나는 시장을 다시 돌아다녔다.

이번에는 배달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라진 보석이 어디로 갔는지 찾기 위해서였다.

보석상 직원들을 지켜보았다.

짐꾼들의 술자리 이야기를 들었다.

야간 경비의 순찰 시간을 기록했다.

누가 갑자기 돈을 많이 쓰기 시작했는지도 살폈다.

며칠 동안 별다른 단서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전당포에서 특이한 루비 조각이 거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장신구에서 억지로 떼어낸 흔적이 있었다.

고브나는 전당포 주인을 찾아갔다.

“누가 팔았어?”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님 정보는 비밀이다.”

고브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냥 나왔다.

그날 밤 다시 들어갔다.

창문으로.


장부에는 판매자의 이름이 없었다.

대신 거래를 중개한 사람의 표시가 남아 있었다.

고브나는 그 표시를 따라갔다.

결국 한 이름이 나왔다.

보석상 주인의 아들.

고브나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의 이름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상단주의 저택은 시장의 낡은 집들과 달랐다.

높은 담장.
경비병.
마법등.
잠긴 창문.

고브나는 한동안 건물을 바라보았다.

정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갔다.

옆 건물의 굴뚝을 타고,
빨랫줄을 건너고,
장식용 배수관을 붙잡았다.

두 번 미끄러졌다.

한 번은 거의 떨어질 뻔했다.

그래도 들어갔다.


상단주의 아들 방에는 보석이 없었다.

고브나는 서랍을 열었다.

옷장도 확인했다.
침대 아래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잠깐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책상 아래 작은 금고를 발견했다.

자물쇠는 복잡했다.

고브나는 오빠가 자물쇠를 고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다.

직접 열어본 적은 많지 않았다.

그날 처음으로 제대로 시도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바깥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브나는 숨을 멈췄다.

발소리가 지나갔다.

다시 철사를 움직였다.

찰칵.

금고가 열렸다.

안에는 남은 보석 몇 점과 작은 장부 하나가 있었다.

고브나는 보석만 챙기지 않았다.

장부를 펼쳤다.

그 안에는 도난품을 팔아넘긴 기록이 남아 있었다.

날짜.
가격.
중개인.

그리고 보석을 훔친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도박빚이었다.

상단주의 아들은 아버지의 창고에서 보석을 빼돌렸고,
자물쇠가 멀쩡하자 최근 자물쇠를 수리한 고브나의 오빠에게 의심이 돌아갔다.

그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고블린 자물쇠공 하나가 대신 잡혀가는 편이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고브나는 보석과 장부를 들고 법원으로 달려갔다.

정확히는 법원으로 달려가려 했다.

중간에 멈췄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저택에 불법 침입했고,
금고를 열고,
물건을 훔쳐 나온 상태였다.

이대로 경비에게 가져가면 자신도 잡힐 가능성이 있었다.

장부를 압수당한 뒤 사건 자체가 조용히 처리될 수도 있었다.

상대는 부유한 상단주의 아들이었다.

고브나는 처음으로 알았다.

진실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 진실이 효력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증거가 있어도 누군가 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진실을 알고 있어도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브나는 증거를 하나만 가져가지 않았다.

장부 내용을 베꼈다.

여러 장으로.

한 장은 법원에 보냈다.

한 장은 경쟁 상단에 보냈다.

한 장은 시장 상인들의 조합에 흘렸다.

그리고 원본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한 곳에서 막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보석상의 아들이 범인이라는 이야기가 시장 전체에 돌았다.

경쟁 상단은 사건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다.

상인조합도 조사를 요구했다.

법원은 더 이상 조용히 넘길 수 없었다.

오빠는 풀려났다.

상단주의 아들은 조사를 받았다.

고브나는 그날 법원 앞에서 오빠를 기다렸다.

오빠가 나오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빠가 먼저 물었다.

“네가 했지?”

고브나는 고개를 저었다.

“뭘.”

“고브나.”

“몰라.”

오빠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장부는?”

고브나는 잠시 침묵했다.

“안전한 데.”

“어딘데?”

“비밀.”

오빠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고브나는 그제야 아주 조금 웃었다.


그 사건 이후 고브나는 정보를 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그 전까지 비밀은 숨겨진 것이었다.

찾아내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은 발견되는 순간 힘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 아는가.
언제 아는가.
누구에게 전달되는가.

그것에 따라 같은 정보의 힘은 전혀 달라졌다.

오빠가 결백하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증명하지 못했을 때 그 진실은 오빠를 감옥에서 꺼내주지 못했다.

상단주의 아들이 범인이라는 사실도 처음부터 사실이었다.

그러나 장부가 금고 안에 잠겨 있는 동안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래서 고브나는 생각했다.

진실은 전달되어야 한다.

다만 아무에게나 전달하는 것도 위험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전달되어야 했다.


몇 년 뒤 고브나는 케라를 만났다.

정확히는 케라가 숨어 있던 곳을 먼저 발견했다.

빈손의형제단은 아직 규모가 작았다.

추적을 피해 사람을 빼돌리고,
채권자와 경비대의 움직임을 피해 다니던 시기였다.

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싸울 사람이 아니었다.

정보였다.

경비가 어느 길로 오는지.
어느 창고에 계약서가 있는지.
누가 밀고자인지.
어느 검문소가 교대하는지.

고브나는 그 정보를 알고 있었다.

시장과 뒷골목을 오가며 자연스럽게 들은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형제단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케라는 너무 말이 많았다.

처음 만난 날부터 웃으며 말했다.

“너 잘 숨는다?”

고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같이 일할래?”

“싫어.”

“이유는?”

“시끄러워.”

케라는 크게 웃었다.

고브나는 그 웃음 때문에 더 싫어졌다.

그런데 며칠 뒤 형제단 사람 하나가 붙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브나는 경비대 이동 경로를 적은 쪽지 하나를 케라의 은신처에 던져두었다.

그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또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케라는 쪽지가 나타날 때마다 말했다.

“우리 말 없는 고양이가 또 왔네.”

고브나는 어느 날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고블린이야.”

케라는 눈을 깜빡였다.

“아, 듣고 있었구나.”

“계속.”

“미안?”

“안 미안해 보여.”

“맞아.”

고브나는 그날부터 형제단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락책이라는 역할은 그녀에게 잘 맞았다.

정면에서 싸울 필요가 없었다.

정보를 가져오고,
사람을 연결하고,
필요하면 몰래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 되었다.

단도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투척침으로 추격자의 움직임을 늦추고,
연막탄을 터뜨리고,
지형을 이용해 사라지는 편을 좋아했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보다,
상대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드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고브나는 정보를 모았다.

경비대 근무표.
상단 내부 명단.
밀수 경로.
채권 보관 위치.
귀족가의 비밀 통로.

하지만 모든 정보를 형제단에 넘긴 것은 아니었다.

필요한 것만 말했다.

케라가 한번 물었다.

“너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어?”

고브나는 대답했다.

“필요한 만큼.”

“내가 필요한 만큼?”

“내가 생각하기에.”

케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좀 무서운 말인 건 알아?”

고브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브나는 정보를 가져야 사람이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전쟁이 날 것을 모르고 국경에 남는 것과,
알면서 남는 것은 다르다.

계약의 위험을 모르고 서명하는 것과,
알고도 서명하는 것도 다르다.

추격자가 오는 줄 모르고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려주면 선택할 수 있다.

싸울지.
숨을지.
달아날지.
남을지.

그래서 고브나는 연락책 일을 단순한 전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보는 사람에게 선택지를 돌려주는 일이다.

자신의 오빠에게도 그랬다.

결백이라는 진실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증거가 세상에 전달된 뒤에야 선택할 수 있었다.

법원도.
시장 사람들도.
오빠 자신도.


그녀가 자주 하는 말도 그 경험에서 나왔다.

형제단 내부에서 어떤 정보를 숨겼다는 사실 때문에 한 사람이 고브나에게 따진 적이 있었다.

“왜 우리한테 말 안 했어?”

고브나는 짧게 대답했다.

“필요 없었으니까.”

“비밀로 했잖아.”

“응.”

“그게 잘한 거야?”

고브나는 한동안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중요한 말을 할 때마다 그러듯이.

“비밀이 나쁜 게 아냐.”

잠시 뒤 한마디를 덧붙였다.

“누구한테 감췄는지가 중요하지.”

그것이 고브나의 원칙이었다.

적에게 은신처를 숨기는 것은 필요했다.

추격대에게 탈출 경로를 감추는 것도 필요했다.

하지만 위험을 함께 감당해야 하는 동료에게 그 위험 자체를 숨기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적어도 고브나는 그렇게 구분하려 했다.


문제는 그 구분을 누가 하느냐였다.

대부분 고브나 자신이었다.

그녀는 타인의 선택권을 지키기 위해 정보를 모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정보를 누가 알아도 되는지를 자신이 판단했다.

한번은 형제단이 어느 상단의 계약 창고를 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고브나는 그 상단이 최근 사설 경비를 크게 늘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병력 수는 확신하지 못했다.

정보가 틀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불확실한 정보가 작전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작전 당일 예상보다 많은 경비가 나타났다.

형제단원 하나가 크게 다쳤다.

모두 살아 돌아오기는 했다.

케라는 돌아온 뒤 고브나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고브나는 잠시 침묵했다.

“늘었다는 건.”

방 안이 조용해졌다.

“왜 말 안 했어?”

“확실하지 않았어.”

케라는 평소처럼 웃지 않았다.

“그럼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으면 되잖아.”

고브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오래 남았다.

고브나는 타인에게 선택할 정보를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 선택을 대신하고 있었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알면 혼란스러울 것이다.

이 정보는 지금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저 사실을 알면 위험한 선택을 할 것이다.

그 판단들이 쌓이면,
결국 고브나가 다른 사람의 선택지를 결정하는 것이 되었다.

정보를 독점한 사람이 권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도.

자신 역시 그 권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뒤로 고브나는 정보의 확실성을 함께 말하기 시작했다.

“확인됨.”

“한 명에게 들음.”

“소문.”

“절반쯤 맞을 듯.”

케라는 마지막 표현을 듣고 웃었다.

“그건 대체 몇 퍼센트야?”

고브나는 대답했다.

“몰라.”

“그럼 왜 말해?”

“모른다는 것도 정보야.”

케라는 그 말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고브나가 모든 것을 공개하게 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숨기는 정보가 많다.

연락책의 이름.
피난민의 위치.
밀고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전까지의 의심.
동료가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과거.

누군가 물어도 답하지 않는다.

협박을 받아도 입을 다문다.

동료가 잡혔다는 이유로 다른 은신처의 위치까지 말하는 일도 없다.

고브나에게 정보의 공개는 언제나 옳은 일이 아니다.

진실도 칼처럼 사람을 해칠 수 있다.

누군가의 정체를 공개하면 그 사람은 죽을 수도 있다.

숨겨진 피난처를 공개하면 수십 명이 잡힐 수도 있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비밀이 사람을 살렸다.

그래서 그녀는 여전히 판단한다.

무엇을 말할지.
무엇을 숨길지.
누구에게 전달할지.

다만 예전보다 그 판단을 조금 더 의심한다.


지금의 고브나는 빈손의형제단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케라처럼 사람들 앞에서 떠들지도 않는다.

전투가 벌어져도 선두에 나서지 않는다.

회의에서도 대부분 구석에 앉아 있다.

그러다가 필요한 순간에 한마디를 한다.

“북문 안 돼.”

사람들이 바라본다.

“왜?”

“경비 두 배.”

“확실해?”

“직접 봤어.”

그걸로 끝이다.

그녀가 긴 설명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필요한 것은 말한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굳이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내용은 언제나 한 번만 말한다.

듣지 않았다면 다시 물어야 한다.


고브나는 아직도 오빠를 가끔 만난다.

오빠는 여전히 자물쇠를 고친다.

예전보다 조금 좋은 가게를 얻었다.

고브나가 찾아가면 가장 먼저 묻는다.

“이번에는 뭐 훔쳤냐?”

고브나는 대개 대답한다.

“아무것도.”

오빠는 믿지 않는다.

한번은 오래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오빠가 말했다.

“그때 네가 증거를 안 찾아왔으면 난 아직도 빚 갚고 있었겠지.”

고브나는 단도를 닦으며 대답했다.

“응.”

“고맙다.”

손이 잠시 멈췄다.

고브나는 눈을 피했다.

“늦었어.”

“뭐가?”

“십 년 전에 했어야지.”

오빠가 웃었다.

고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귀끝이 조금 움직였다.


고브나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비밀이 들키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정보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고브나가 알아서 알려주겠지.”

그 말이 싫다.

사람들이 스스로 확인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출처를 남긴다.

직접 봤는지.
누군가에게 들었는지.
추측인지.

최종 판단은 듣는 사람이 하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없는 순간이 있다.

한 명에게만 알려야 하는 비밀도 있다.

누군가가 진실을 알면 오히려 위험해지는 일도 있다.

그때마다 고브나는 다시 선택한다.

그리고 선택할 때마다 아주 오래전 금고 속 장부를 떠올린다.

진실은 그곳에도 있었다.

하지만 잠겨 있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진실은 오빠를 구하지 못했다.

반대로 아무에게나 퍼진 정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 두 극단 사이에서 고브나는 지금도 길을 찾고 있다.


그녀가 믿는 것은 단순하다.

정보가 있어야 선택할 수 있다.

위험을 알면 도망칠 수 있다.

거짓을 알면 거부할 수 있다.

적이 오는 것을 알면 싸울지 숨을지 고를 수 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그래서 고브나는 계속 듣는다.

시장 골목의 소문을 듣고,
상단의 장부를 읽고,
경비병들의 교대 시간을 외운다.

필요하면 벽을 타고,
창문을 열고,
서랍을 뒤진다.

그리고 얻은 정보를 품고 돌아온다.

그다음이 가장 어렵다.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

어디까지 말할 것인가.

지금 말해야 하는가.

그 판단이 정말 상대의 선택을 돕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통제권을 놓지 못하는 것인지.

고브나는 아직 완전히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중요한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를 낮춘다.

한 번만 말한다.

듣는 사람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그리고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비밀이 나쁜 게 아냐.”

고브나는 그렇게 말한다.

“누구한테 감췄는지가 중요하지.”

다만 요즘은 그 문장 뒤에,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 질문 하나가 더 따라붙는다.

그걸 결정하는 사람은,
누가 감시해야 하지?


Roster

화합왕국 레흐니티

6명
열두뿌리회의2명
EPI
에피르타 윈드시드
레흐니티열두뿌리회의-의장
“그대의 말이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옳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 HP80
💪 공격력10
🧙 마법력90
✨ 신비력1
🛡️ 방어력30
🔗 항마력70
😖 신비저항70
🏃 회피력40
과거 보기
에피르타의 이야기는 루크스의 숲이 아직 지금보다 더 깊고, 더 많은 노래를 품고 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의 에피르타는 지금처럼 모두의 말을 끝까지 기다리는 대장로가 아니었다.

물론 그때도 온화했고,
그때도 사근사근했으며,
쉽게 목소리를 높이는 엘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확신에 찬 사람이었다.

옳은 판단이 있다면,
그것은 늦기 전에 내려져야 한다고 믿었다.

숲은 살아 있는 거대한 몸과 같고,
썩은 부분을 도려내지 않으면 결국 전부가 병든다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당시의 레흐니티에서는 제법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엘프들은 오래 살았지만,
오래 산다는 것이 언제나 망설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긴 시간을 살아온 자일수록,
한 번의 지체가 수십 년 뒤 어떤 상처로 돌아오는지 너무 잘 아는 경우도 많았다.

젊은 시절의 에피르타는 바로 그런 부류였다.

신중하되,
필요하다면 잘라낼 줄 아는 사람.

그녀는 열두뿌리회의의 젊은 조율자로서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땅의 맥류를 읽고,
빛의 흐름을 조율해 병든 뿌리를 멈추게 하며,
숲의 숨결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누구보다 정확하게 감각했다.

정령목 지팡이를 처음 맡아 들었을 때,
노장로 하나는 그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오래지 않아 숲의 결정을 대신 말하게 될 겁니다.”

당시의 에피르타는 그 말의 무게를 자랑처럼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결정해야 한다.
누군가는 망설이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숲을 지키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재앙은 봄의 끝자락에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이상이었다.

숲 깊은 곳, 햇빛이 거의 닿지 않는 저층림에서 나무 몇 그루의 껍질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잎은 푸르렀지만 생기가 없었고,
나뭇가지에서는 낯선 덩굴이 마치 피줄기처럼 엉켜 자라났다.

그 덩굴은 꽃도 피우지 않았고,
향도 거의 없었으며,
밤이 되면 희미하게 젖은 살결 같은 광택을 냈다.

처음 발견한 드라이어드들은 그것을 새로 태어난 숲의 병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며칠 뒤, 그 덩굴이 감싼 나무의 뿌리 끝에서 맥류가 비정상적으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정령들이 그 주변을 피했고,
작은 짐승들은 방향 감각을 잃었으며,
근처 샘물은 흙냄새 대신 썩은 꽃잎 같은 냄새를 풍겼다.

기생덩굴이었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숙주의 수액과 마력, 기억의 잔흔까지 빨아들여 자기 몸집을 키우는 재앙성 식생.

문제는 그것이 단순히 나무 한 그루를 죽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기생덩굴은 땅속의 뿌리망을 타고 번졌다.

루크스의 숲은 서로 멀리 떨어진 나무들조차 맥류와 뿌리로 이어져 있었다.

한 곳이 깊이 감염되면 결국 숲의 더 깊은 곳까지 썩어 들어갈 수 있었다.

보고를 받은 열두뿌리회의는 즉시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 중심에 젊은 조율자 에피르타가 있었다.

그녀는 땅에 손을 대고 맥류를 읽었다.

그리고 오래 침묵한 뒤,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태워야 합니다.”

곁에 있던 엘프 하나가 숨을 삼켰다.

“전부요?”

“최소한 감염된 구역과 그 주변의 뿌리 연결부까지.”

에피르타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기생덩굴은 잘라내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땅속에 남은 뿌리가 다시 살아난다.
빛과 정령수만으로는 번식을 막기 어렵다.

지금 불태우지 않으면,
이 숲의 병은 훗날 더 넓은 숲을 집어삼킬 수 있었다.

그녀의 판단은 논리적이었다.

너무도 논리적이어서,
듣는 많은 이들이 반박하지 못했다.

문제는 그 감염 구역이 단순한 숲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드라이어드들이 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땅의 오래된 나무들과 함께 태어나고 자라 온 드라이어드들의 거주권역이었다.

그들에게 그 나무는 집이 아니었다.

몸의 일부에 가까웠다.

어떤 이에게는 자매였고,
어떤 이에게는 어머니였으며,
어떤 이에게는 자기 자신과 다르지 않은 뿌리였다.

엘프들이 병든 숲을 하나의 구역으로 보았다면,
드라이어드들은 그 안의 나무 하나하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회의는 길어졌다.

드라이어드 대표들은 숲을 태우는 것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들 가운데 한 드라이어드가 있었다.

이름은 실라엔.

에피르타보다도 더 오래 산 존재였고,
감염된 구역 중심에 자리한 거대한 물푸레나무와 결속된 자였다.

실라엔은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은 불타는 나무를 목재의 손실로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희에게 저 숲은 계산의 대상이 아닙니다.”

에피르타는 반박했다.

아주 부드럽게,
그러나 흔들림 없이.

“그 말이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병이 퍼지면, 더 많은 나무와 더 많은 존재가 같은 말을 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실라엔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를 위해 결정을 내리겠다는 건가요?”

에피르타는 망설이지 않았다.

“숲 전체를 위해서입니다.”

그때의 그녀는 그것이 충분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많은 엘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숲 전체를 지키기 위해 일부를 포기한다.

그것은 잔혹했지만 합리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실라엔은 고개를 저었다.

“전체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었나요?”

그 질문은 회의장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에피르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질문을 충분히 길게 붙잡고 있지 않았다.

재앙은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열두뿌리회의는 결국 감염 구역 소각을 결정했다.

완전한 만장일치는 아니었다.

반대가 남아 있었고,
드라이어드들의 일부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에피르타는 직접 그들을 설득하러 갔다.

그녀는 위험성을 설명했고,
맥류의 오염 방향을 보여주었으며,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숲 전체가 병들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침묵했으며,
누군가는 그녀를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떠나지 않았다.

실라엔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불태워질 물푸레나무 아래서,
그녀는 에피르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숲을 지키려는 마음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감당하지 않은 결정을 우리 대신 끝내버리지는 마세요.”

에피르타는 처음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무엇을 대답해도 설득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미 설득이 아니라 통보의 단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에피르타는 정령목 지팡이를 땅에 꽂았다.

빛의 조율로 숲 외곽에 봉쇄선을 세우고,
땅의 맥류를 꺾어 기생덩굴의 번식길을 막았다.

그 위로 불이 지나갔다.

보통의 불꽃이 아니었다.

나무를 태우기 위한 불이 아니라,
오염된 생장과 병든 맥류를 정화하기 위한 조율된 화염이었다.

그래도 타는 것은 타는 것이었다.

수액이 끓는 소리가 들렸고,
덩굴은 끈적한 비명을 내듯 수축했으며,
오래된 나무들은 검게 갈라졌다.

드라이어드 몇몇은 끝내 물러나지 않았다.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결속한 나무와 함께 재가 되었다.

재앙은 멈췄다.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기생덩굴의 확산은 그날 끊겼고,
루크스의 숲 중심부는 무사했다.

많은 엘프들이 에피르타의 결정을 칭찬했다.

숲을 구한 판단이었다고.

늦었다면 훨씬 더 끔찍한 피해가 났을 것이라고.

그 말들 역시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에피르타는 더욱 괴로웠다.

옳았을지도 모르는 결정이,
왜 이렇게 오래 마음속에 잿가루처럼 남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각이 끝난 뒤의 숲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원래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새들은 그 구역을 피해 날았고,
정령들은 재가 식을 때까지 거의 다가오지 않았다.

에피르타는 몇 번이고 그 자리를 찾았다.

검게 그을린 뿌리와 무너진 줄기 사이를 걸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그녀를 향해 고개 숙이는 모습도 보았다.

감사와 원망이 섞인 눈빛이었다.

어느 날, 소각지 가장자리에서 작은 새싹 하나가 올라온 것을 보았다.

그것은 희망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 가벼워 보였다.

사라진 이름들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에피르타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결정이 옳았는가를 묻는 것과,
그 결정이 모두에게 감당 가능한가를 묻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숲은 살았다.
그러나 어떤 존재들에게 그 결정은 단순한 손실이 아니라 세계의 종말이었다.

그들의 반대는 감상적인 고집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과 존재를 스스로 설명하려는 마지막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었으면서도,
결국 전체를 위해 정리해버린 것은 에피르타 자신이었다.

그녀는 그 후 한동안 회의에서 거의 발언하지 않았다.

대신 들었다.

오래, 아주 오래.

엘프의 말뿐 아니라,
드라이어드의 말도,
요정의 말도,
숲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짧은 생의 존재들이 두려워하는 것까지도.

누군가는 그녀를 변했다고 했다.

결정을 내리는 속도가 늦어졌다고.
예전보다 너무 많은 사람의 의견을 물어본다고.

에피르타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라고 생각했다.

한 번 숲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삶을 밀어버린 이상,
다시는 그렇게 쉽게 ‘전체’를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세월이 흘러 에피르타는 결국 열두뿌리회의의 대장로가 되었다.

그녀의 회의는 길기로 유명했다.

어떤 이는 답답하다고 했고,
어떤 이는 대장로가 결단을 피한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에피르타는 알고 있었다.

서둘러 끝난 결정이 얼마나 오래 상처를 남기는지.

그래서 그녀는 누구의 말이든 먼저 그 타당성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반대할 때조차 먼저 말한다.

“그대의 말이 옳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예의가 아니었다.

과거의 자신이 놓쳤던 첫 번째 진실이었다.

상대가 틀렸다고 느껴질 때조차,
그 안에는 그 사람만이 감당해온 삶의 무게가 담겨 있을 수 있다.

결정을 내리는 자가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 결정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에피르타는 믿는다.

모두가 감당할 수 없는 결정은 아직 완성된 결정이 아니라고.

그 말은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녀도 불가능한 일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누군가는 언제나 더 아프고,
누군가는 더 많이 잃는다.

하지만 최소한 그 상실이 누구의 것이며,
누가 무엇을 포기하게 되는지,
당사자의 목소리까지 포함해 끝까지 드러나야 한다고 믿는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결정은 너무 쉽게 아름다운 이름을 얻는다.

질서.
안정.
전체의 이익.
숲의 미래.

에피르타는 그런 말들이 얼마나 많은 재를 덮어왔는지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신념이 언제나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합의를 기다리는 동안 기회가 지나가기도 한다.

질병이 퍼지고,
짐승이 굶고,
숲 가장자리의 마을이 맥류 이상으로 고통받는 동안에도,
에피르타는 더 많은 의견을 듣고 더 많은 존재를 참여시키려 한다.

그것이 늦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그녀의 내면에는 늘 두 개의 두려움이 함께 산다.

하나는 과거처럼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결정을 너무 빨리 내려 누군가의 세계를 태워버릴까 두려운 마음.

다른 하나는,
이번에는 모두를 기다리다가 지금 당장 죽어가는 존재를 구하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이었다.

에피르타는 아직도 그 둘 사이의 완전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아마 평생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는 회의석에 앉아 한 사람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조급해하는 이들에게는 부드럽게 설명하고,
분노하는 이들에게도 쉽게 맞서지 않으며,
반대하는 존재의 말 안에서 그 존재만이 잃게 될 것을 먼저 찾으려 한다.

그것은 그녀가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한 번 너무 강한 결정을 내려본 사람만이 선택한 방식에 가깝다.

에피르타는 루크스의 숲을 지키는 대장로다.

그러나 그녀가 지키려는 것은 단지 숲의 생존만이 아니다.

그 숲 안에서 살아가는 각자의 시간과 이름,
그리고 다수의 필요 앞에서도 너무 쉽게 잘려나가던 작은 목소리들까지 포함한 숲 전체다.

아주 오래전, 불길 속에서 사라진 드라이어드들의 자리는 지금도 완전히 메워지지 않았다.

숲은 다시 자랐고,
새 뿌리는 땅속에서 이어졌으며,
재가 깔린 자리에도 새로운 잎이 돋았다.

하지만 에피르타는 안다.

다시 자란다고 해서 같은 숲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그녀는 부드럽게 말한다.

“그대의 말이 옳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문장을 마음속에 더 오래 붙든다.

그 옳음을,
누가 감당하게 될 것인가.

에피르타가 대장로가 된 뒤 가장 오래 붙잡고 있는 질문은,
아마도 바로 그것이다.


AYN
아인다 프레시루트
레흐니티열두뿌리회의-부의장
“그들이 악해서 막는 게 아니야. 선한 채로도 우릴 망칠 수 있으니까 막는 거다.”
🩸 HP70
💪 공격력10
🧙 마법력50
✨ 신비력1
🛡️ 방어력20
🔗 항마력40
😖 신비저항35
🏃 회피력40
과거 보기
아인다의 이야기는 레흐니티의 숲 가장자리에서 처음으로 인간 상단의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의 아인다는 지금처럼 외부인을 보면 먼저 인상을 찌푸리는 엘프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는 열두뿌리회의 안에서도 교류에 적극적인 편이었다.

숲은 넓었고,
엘프의 삶은 길었으며,
굳이 바깥세상과 등을 지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짧게 살았지만 빠르게 배웠다.

드워프는 엘프에게 없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수인 상인들은 먼 지역의 물건과 이야기를 함께 가져왔다.

아인다는 그런 교류를 흥미롭게 여겼다.

자신들이 숲을 잘 안다고 해서 세상 전체를 아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젊은 엘프들에게 자주 말했다.

“모르는 걸 무서워하기 전에 좀 봐.”

“보고도 싫으면 그때 욕해.”

당시의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덜 신경질적이었다.

적어도 외부인의 마차가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한숨부터 쉬지는 않았다.


아인다에게는 배우자가 있었다.

이름은 세리에나.

그녀는 오래된 정령목을 돌보는 엘프였다.

거대한 나무의 가지와 잎을 살피고,
정령들이 남기는 작은 변화를 읽으며,
병든 뿌리가 생기면 며칠이고 땅 곁에 머물렀다.

아인다와는 성격이 꽤 달랐다.

아인다가 문제를 발견하면 먼저 원인을 찾으려 했다면,
세리에나는 먼저 그 문제 곁에 앉았다.

어느 날 아인다가 물었다.

“아픈 나무 옆에 가만히 있다고 낫냐?”

세리에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도 아플 때 옆에 있어달라고 하잖아.”

“난 나무가 아니잖아.”

“가끔은 나무보다 말이 안 통하던데.”

아인다는 그 말을 듣고 투덜거렸지만,
그날 밤에도 세리에나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둘은 숲의 깊은 곳에 자리한 정령목 군락을 오랫동안 함께 돌보았다.

아인다에게 숲이 고향이었다면,
세리에나는 그 고향 안에서 가장 익숙한 목소리였다.


인간과의 공동시장 계획이 처음 올라왔을 때 아인다는 찬성했다.

레흐니티 경계 밖에서만 이루어지던 교역을 숲 가장자리까지 끌어들이자는 계획이었다.

엘프들은 약초와 정령목 수지,
수공예품과 숲의 염료를 내놓고,
외부 상인들은 금속 도구와 곡물,
유리제품과 먼 지방의 약재를 가져오기로 했다.

반대도 많았다.

낯선 사람들이 숲의 길을 알게 될 수 있다.

사냥꾼이 상인을 가장해 들어올 수도 있다.

외부의 병충해가 들어올 가능성도 있다.

아인다는 그 우려를 하나씩 들었다.

그리고 대체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규칙을 만들자는 거잖아.”

마차를 검사하고,
무기를 제한하고,
진입 구역을 정하고,
상인들이 숲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문을 닫는 것보다는 관리되는 교류가 낫다고 믿었다.

아인다는 직접 시장의 동선을 짰다.

정령목 군락과 거리를 두고,
상인들이 이용할 길을 별도로 정했다.

그는 꽤 자랑스러워했다.

“봐. 서로 귀찮게 안 하고 필요한 건 얻을 수 있잖아.”

세리에나도 그 계획을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한마디를 덧붙였다.

“모르는 건 항상 조금씩 들어와.”

아인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내가 보고 있지.”


공동시장은 성공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인간 상인들은 엘프의 약초를 좋아했다.

엘프들은 인간이 만든 정밀한 금속도구와 새로운 천을 흥미롭게 여겼다.

아이들은 외부 상인들이 가져오는 사탕과 장난감을 기다렸다.

몇몇 인간 상인은 엘프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엘프 상인들은 델피로식 계산법을 익혔다.

상인들 사이에서 다툼이 생긴 적도 있었지만 큰 사고는 없었다.

아인다는 회의에서 말했다.

“봤지?”

“문 열었다고 세상이 바로 끝나진 않아.”

반대하던 장로 하나가 혀를 찼다.

아인다는 꽤 만족했다.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은 실제로 그랬다.


문제는 너무 작아서 처음에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 인간 상단의 짐수레가 비가 많이 내린 지방을 지나 레흐니티에 들어왔다.

수레 바퀴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다.

흔한 일이었다.

마차 아래쪽에는 축축한 짚이 조금 붙어 있었다.

그것도 특별하지 않았다.

검사관은 무기를 확인했고,
밀수품이 없는지 살폈으며,
위험한 마법물품도 발견하지 못했다.

마차는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누구도 진흙 사이에 섞인 회백색 균사를 보지 못했다.

곰팡이 포자였다.

외부 지방의 죽은 목재에서는 흔하게 발견되는 종류였다.

인간의 도시에서는 별다른 피해를 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레흐니티의 정령목은 달랐다.

정령과 맥류가 깊게 스며든 생목은 그 포자에게 완전히 새로운 숙주였다.

곰팡이는 뿌리의 마력을 먹고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 이상을 발견한 것은 세리에나였다.

정령목 한 그루의 잎이 밤마다 아주 조금씩 회색으로 변했다.

그녀는 아인다를 불렀다.

아인다는 나무껍질을 긁어보았다.

안쪽에 가느다란 흰 균사가 퍼져 있었다.

“병이네.”

세리에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보는 거야.”

아인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다.

처음 보는 병이라고 해서 치료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감염 부위를 잘라냈다.

약초를 발랐다.

뿌리 주변의 흙도 갈아냈다.

며칠 뒤 다른 나무에서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그다음에는 세 그루.

그다음에는 일곱 그루였다.

아인다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시장을 폐쇄하자고 요구했다.

열두뿌리회의에서는 너무 성급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원인이 시장이라는 증거가 아직 없었다.

아인다는 책상을 두드렸다.

“증거 찾는 동안 뿌리는 기다려준대?”

결국 시장은 임시 폐쇄되었다.

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곰팡이는 땅속으로 퍼졌다.

정령목의 뿌리와 균사망이 맞닿으며 감염 범위가 넓어졌다.

정령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나무들은 겉으로 살아 있었지만 내부부터 썩어갔다.

엘프들은 밤낮없이 감염된 뿌리를 잘라냈다.

아인다는 땅의 흐름을 읽으며 오염구역을 표시했다.

독성 꽃가루로 곰팡이의 번식을 억제했고,
균사마법으로 숲의 균류를 움직여 외부 포자와 경쟁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완전히 막지 못했다.

세리에나는 감염된 정령목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인다는 몇 번이나 말했다.

“나와.”

“아직 뿌리가 살아 있어.”

“그러다 너까지 감염돼.”

“엘프한테 옮는 병은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

세리에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도 아무것도 몰랐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곰팡이는 엘프의 몸을 병들게 하지는 않았다.

대신 세리에나가 결속하고 있던 정령목을 죽였다.

정령목과 깊이 연결된 일부 엘프와 드라이어드에게는 그 죽음이 단순한 나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리에나는 나무가 쇠약해질수록 함께 약해졌다.

처음에는 손끝의 감각이 둔해졌다.

그다음에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

아인다는 그녀를 다른 구역으로 옮기려 했다.

세리에나는 거부했다.

“여기 있을래.”

“미쳤어?”

아인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무 하나 때문에 같이 죽겠다는 거야?”

세리에나는 힘없이 웃었다.

“나무 하나 아니잖아.”

그 말에 아인다는 더 화를 냈다.

화낼 상대가 세리에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차를 끌고 온 상인은 이미 숲을 떠난 뒤였다.

그 역시 자신이 무엇을 가져왔는지 몰랐다.

누구를 붙잡아 죽인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다.

악의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사실이 아인다를 더욱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정령목은 결국 죽었다.

세리에나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마지막 날, 아인다는 그녀 곁에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잔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시장 같은 건 열지 말았어야 했어.”

세리에나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당신이 열자고 했잖아.”

아인다는 입을 다물었다.

“알아.”

잠시 뒤 세리에나가 다시 말했다.

“후회해?”

아인다는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후회한다고 말하기에는 시장에서 얻은 것도 많았다.

새로운 약재가 들어왔고,
서로를 모르던 사람들이 친구가 되었다.

어떤 아이는 그 교류 덕분에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배우자는 죽어가고 있었다.

결국 아인다는 말했다.

“응.”

세리에나는 눈을 떴다.

“그럼 다음에는 더 잘 열어.”

아인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음이 어딨어.”

“당신은 문 닫고 평생 살 사람 아니잖아.”

아인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리에나는 며칠 뒤 숨을 거두었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살아남았다.


곰팡이 사태는 결국 진정되었다.

감염된 정령목 수십 그루가 죽었다.

숲 일부는 오랫동안 출입이 제한되었다.

공동시장은 무기한 폐쇄되었다.

조사 끝에 원인도 밝혀졌다.

어느 인간 상단의 짐수레에 묻어온 외부 균류.

상인은 처벌받지 않았다.

고의가 아니었다.

당시 규정에도 진흙이나 일반 곰팡이 포자를 검사하라는 조항은 없었다.

법적으로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아인다는 그 결과를 보고 웃지도 화내지도 못했다.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도 숲은 죽었다.

악당이 없는데도 세리에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아인다는 자신이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전까지 위험은 주로 악의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사냥꾼.
침략자.
밀렵꾼.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을 막으면 숲은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번 재앙에는 악의가 없었다.

상인은 돈을 벌러 왔을 뿐이었다.

엘프들은 교류를 원했을 뿐이었다.

아인다 자신도 부족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모두가 나름대로 선한 채로,
숲을 망가뜨렸다.


그날 이후 아인다는 경계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예전의 그에게 경계는 의심의 표시였다.

너를 믿지 않기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선.

이제는 아니었다.

서로를 믿더라도 필요한 거리라고 생각했다.

너를 미워하지 않아도,
네가 무엇을 가져올지 모를 수 있다.

너 역시 나를 해칠 생각이 없어도,
내가 가진 것이 너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를 수 있다.

그러므로 거리가 필요하다.

검역이 필요하고,
규칙이 필요하며,
닫힌 문도 때로는 필요하다.

아인다는 점점 까다로운 사람이 되어갔다.

외부 물품은 검사했다.

외부인이 숲에 들어올 때는 이동경로를 제한했다.

처음 보는 식물과 균류는 격리했다.

누군가 불평하면 가장 나쁜 가능성부터 늘어놓았다.

“그거 하나 잘못 들어왔다가 숲 절반 죽으면 네가 살릴 거냐?”

사람들은 그를 피곤한 노인이라고 불렀다.

아인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실제로 피곤했기 때문이다.


그는 외부인을 악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인간은 위험하다고 단순하게 말하면 정정했다.

“인간이어서 위험한 게 아니야.”

“그럼 왜 막습니까?”

아인다는 늘 비슷하게 대답했다.

“그들이 악해서 막는 게 아니다.”

잠시 뒤 넓은 챙의 모자를 눌러쓰며 덧붙였다.

“선한 채로도 우릴 망칠 수 있으니까 막는 거다.”

그것이 아인다의 신념이 되었다.

경계는 적대가 아니다.

서로를 파괴하지 않기 위한 안전거리다.

불을 피울 때 나무와 거리를 두는 것처럼.

독성이 있는 꽃과 아이를 떨어뜨려놓는 것처럼.

거리를 둔다고 증오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함께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규칙이라고 생각했다.


아인다는 열두뿌리회의의 부족장이 된 뒤에도 그 원칙을 밀어붙였다.

그의 구역에 들어오는 상단은 가장 많은 검사를 받아야 했다.

바퀴를 씻었다.

짐은 분류했다.

외부 토양은 숲 안으로 가져갈 수 없었다.

낯선 종자는 별도 보관했다.

상인들이 불평했다.

“다른 구역보다 절차가 너무 많습니다.”

아인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다른 데로 가.”

“무역이 줄어들 텐데요.”

“숲이 죽는 것보단 싸.”

그런 태도 때문에 그는 교류를 싫어하는 엘프로 알려졌다.

아인다 자신도 굳이 오해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싫은 놈으로 기억되는 것이 죽은 배우자를 한 번 더 만드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외부인과 거의 만나지 않는 젊은 엘프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인간에 대해 책으로만 배웠다.

상단을 본 적도 없으면서 인간 상인은 모두 숲을 속이려 한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수인을 처음 보고 몬스터라고 착각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아인다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화를 냈다.

“모르면 물어.”

“추측하지 말고.”

하지만 곧 불편해졌다.

그 무지를 만든 데 자신의 정책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을 닫으면 위험은 줄어든다.

동시에 안쪽 사람들은 바깥을 모르게 된다.

모르는 것은 상상을 낳는다.

상상은 대개 현실보다 무섭다.

결국 안전을 위해 세운 경계가 공포를 키울 수도 있었다.

아인다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래도 쉽게 문을 다시 열 수 없다는 자기 자신이었다.


한 번은 젊은 엘프 하나가 공동시장 재개를 제안했다.

검역기술도 발전했고,
과거보다 훨씬 안전한 절차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인다는 처음부터 반대했다.

“안 돼.”

젊은 엘프가 물었다.

“검토도 안 하시고요?”

“했다.”

“언제요?”

“네가 말 꺼내기 전에.”

실제로 그는 이미 자료를 읽어봤다.

검역법.
격리시설.
맥류 오염 검사술.

과거보다 안전해진 것은 분명했다.

재개를 주장하는 쪽의 논리도 타당했다.

그럼에도 아인다는 반대했다.

젊은 엘프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완벽하게 안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영원히 못 엽니다.”

아인다는 대답했다.

“알아.”

“그런데도요?”

이번에는 잠시 침묵했다.

“응.”

그날 밤 아인다는 거의 잠들지 못했다.

자신이 정말 합리적으로 위험을 계산하고 있는지,
아니면 수백 년 전의 죽음을 아직도 모든 판단에 덮어씌우고 있는지 구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세리에나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도 계속 남아 있었다.

다음에는 더 잘 열어.

아인다는 그 말을 싫어했다.

그래서 잊지 못했다.

그녀는 문을 영원히 닫으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인다는 때때로 혼자 정령목 군락을 걷다가 그 사실을 떠올린다.

과거 감염되었던 구역에는 이미 새로운 나무들이 자랐다.

곰팡이에 강한 종도 생겼다.

숲은 변했다.

자신만 그날에 멈춰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마차가 숲 경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바퀴 아래를 보는 사람도 여전히 아인다다.

진흙은 없는지.
균사는 없는지.
이상한 냄새는 나지 않는지.

그것은 이제 거의 습관이 되었다.


아인다는 고립이 좋은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부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레흐니티 밖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약재와 기술이 있다는 것도 안다.

서로 얼굴을 보지 않으면 편견이 깊어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경계를 없애자는 말을 들으면 먼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한다.

병이 들어오면?

오염된 맥류가 섞이면?

낯선 생물이 숲에서 번식하면?

누군가 아무 악의 없이 한 행동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만들면?

사람들은 그런 그를 비관적이라고 부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인다는 최선의 가능성을 믿기 전에 최악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한 번 최악을 직접 살아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외부인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외부에서 온 손님이 규칙을 잘 지키면 생각보다 친절하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피곤하다.

길을 잃은 인간에게 방향을 알려주고도 마지막에는 잔소리를 붙인다.

“표지판 봐라.”

“봤는데요.”

“그럼 왜 반대로 갔어.”

다친 상인을 치료해주고도 말한다.

“다음부터 숲에서 모르는 열매 먹지 마라.”

“먹을 수 있을 것처럼 생겼는데요.”

“독버섯도 먹을 수 있게 생겼어.”

그는 그렇게 퉁명스럽게 사람을 돌본다.

숲도 마찬가지다.

늘 불평하고,
문제를 먼저 찾고,
아무도 묻지 않은 위험까지 지적한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밤길을 돌아다니며 뿌리를 확인하는 것도 아인다다.

피곤하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에게 경계는 결국 관심의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아무 상관 없는 존재라면 거리를 계산할 이유도 없다.

함께 살아야 하니까 거리를 정한다.

서로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선을 긋는다.


지금의 아인다는 여전히 문을 쉽게 열지 않는다.

하지만 완전히 잠그지도 않는다.

검역된 교역로를 조금씩 허용하고,
외부 연구자와의 제한된 교류를 승인하며,
젊은 엘프들이 바깥세상을 직접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잔소리는 늘어난다.

“기록 남겨.”

“바퀴 씻어.”

“이상한 거 발견하면 만지지 마라.”

“그리고 제발 모르는 식물 입에 넣지 좀 마라.”

사람들은 웃는다.

아인다는 웃지 않는다.

하지만 예전처럼 모든 제안을 처음부터 막지도 않는다.

아주 조금씩,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 문을 열고 있다.

그것이 세리에나가 말한 ‘더 잘 여는 방법’인지 아직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적어도 하나는 분명하게 믿는다.

가까워지는 것이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니다.

멀어지는 것도 언제나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서로를 오래 보고 싶기 때문에 거리를 둬야 한다.

아인다는 그것을 누구보다 뼈아프게 배웠다.

그래서 오늘도 숲의 경계에서 마차 하나가 들어오면 먼저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고 묻는다.

“어디서 왔어.”

“짐은 뭐고.”

“바퀴는 씻었냐.”

상대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 아인다는 피곤한 얼굴로 지팡이에 기대며 중얼거린다.

“싫어해서 이러는 게 아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낮은 목소리로 덧붙인다.

“다시는 좋아하는 걸 묻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


새벽이끼수호대2명
RUA
루아 윈드시드
레흐니티새벽이끼수호대-대장
“숲을 지키고 싶다면 숲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봐야 해!”
🩸 HP200
💪 공격력50
🧙 마법력75
✨ 신비력1
🛡️ 방어력50
🔗 항마력50
😖 신비저항70
🏃 회피력70
과거 보기
루아 윈드시드의 이야기는 새벽이끼경계림에 불이 붙었던 어느 여름밤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날의 화재를 이야기하려면,
그보다 조금 전의 루아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당시의 루아는 새벽이끼수호대에 들어온 지 오래되지 않은 젊은 수호자였다.

하이엘프로서는 아직 어린 편이었지만,
검을 다루는 실력만큼은 이미 수호대 안에서도 눈에 띄었다.

그녀가 쓰는 무기는 엘프에게 흔한 활이나 가벼운 검이 아니었다.

자기 몸만 한 양손대검.

바람의 정령력을 검날에 실어 휘두르면 베기의 범위가 몇 배로 넓어졌고,
땅의 조율술을 더하면 무거운 일격에도 자신의 자세가 흔들리지 않았다.

다른 수호자들이 숲 사이를 빠르게 움직이며 적을 몰아내는 동안,
루아는 가장 위험한 곳으로 직접 들어갔다.

그녀는 그것이 수호자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강한 사람이 서는 것.

누군가 다쳐야 한다면 자신이 먼저 다치는 것.

그리고 위험이 숲 안으로 들어오면,
자신의 검으로 다시 밖으로 밀어내는 것.

그때의 루아에게 수호란 아주 명확한 일이었다.

경계가 있고,
그 안에 지켜야 할 것이 있으며,
밖에서 들어오는 위험을 막는다.

복잡할 이유가 없었다.


새벽이끼경계림에는 인간들이 사용하는 작은 교역로가 하나 있었다.

델피로에서 레흐니티로 들어오는 황금대로의 끝자락과 이어지는 길이었다.

인간 상인들은 그 길을 통해 천과 금속제품을 가져왔고,
엘프들은 약초와 수지, 목공품을 내놓았다.

하지만 교류가 항상 원활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간들은 숲의 규칙을 답답해했다.

허락 없이 나무를 자르면 안 된다.

지정된 장소 밖에서 불을 피우면 안 된다.

특정 꽃이 피는 계절에는 일부 길을 사용할 수 없다.

밤에는 정령들이 지나는 길을 비워둬야 한다.

인간 상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규칙이 많았다.

반대로 엘프들 역시 인간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급한지.

왜 하루를 줄이기 위해 위험한 지름길을 택하는지.

왜 수십 년 뒤의 숲보다 이번 계절의 이익을 먼저 걱정하는지.

루아 역시 인간 상인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했다기보다는,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수호대가 경고하면 그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뒤 비슷한 일이 또 생겼다.

루아는 동료들에게 자주 말했다.

“그냥 규칙대로 하면 되잖아.”

“왜 꼭 사고를 치고 나서 설명을 듣는 거야?”

그녀에게 문제는 간단해 보였다.

숲에 들어오려면 숲의 법을 따르면 된다.

따르지 않는다면 내보낸다.

그것이 모두에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은 평년보다 훨씬 건조했다.

며칠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낙엽은 바스러질 만큼 말랐고,
낮은 관목은 작은 불씨 하나에도 쉽게 타오를 상태였다.

새벽이끼수호대는 교역로의 화기 사용을 금지했다.

상인들에게도 공지가 전달되었다.

문제는 그 공지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미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엘프어로 작성된 문구는 분명했다.

‘경계림 내부의 모든 인공화염 사용 금지.’

인간 상단에 전달된 번역문은 조금 달랐다.

‘경계림 내부 야영지에서 화톳불 사용 금지.’

불을 피우지 말라는 의미와,
야영용 불만 피우지 말라는 의미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아무도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수호대는 전달했다고 생각했다.

상인들은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화재가 시작된 날,
인간 상단 하나가 교역로에서 수레바퀴를 수리하고 있었다.

금속 테가 틀어졌다.

대장장이가 작은 휴대용 화로를 꺼냈다.

그에게 그것은 야영용 화톳불이 아니었다.

작업도구였다.

번역된 규정만 놓고 보면 금지된 물건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불씨는 아주 작았다.

문제는 바람이었다.

갑자기 불어온 돌풍이 화로의 숯조각 하나를 말라붙은 풀밭으로 날렸다.

불은 순식간에 번졌다.

상인들은 당황했다.

물을 부었다.

외투로 불을 덮었다.

하지만 오히려 짐승들이 놀라 날뛰었고,
수레 하나가 넘어지며 길을 막았다.

연기가 나무 사이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새벽이끼수호대가 도착했을 때,
상황은 이미 단순한 작은 화재가 아니었다.


루아는 가장 먼저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불길 사이로 바람을 일으켜 연기를 밀어내고,
대검을 땅에 내리쳐 흙을 뒤집었다.

불이 번질 길을 끊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누군가 외쳤다.

“인간들이 불을 질렀다!”

수호자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교역로에서는 크고 작은 마찰이 있었다.

나무 훼손 문제.
길 사용 문제.
사냥권 문제.

일부 엘프들은 인간 상인들이 숲의 규칙을 일부러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불길은 그 의심에 너무 잘 맞아떨어졌다.

한 수호자가 인간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인간 상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은 반대로 엘프들이 자신들을 공격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상단 호위병 하나가 검을 뽑았다.

루아는 그 모습을 봤다.

그녀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화재.
숲을 침범한 인간.
뽑힌 검.

모든 상황이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였다.

루아는 대검을 들었다.

“무기 내려!”

호위병은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양쪽 모두 상대가 먼저 공격한다고 생각했다.


싸움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위험했다.

인간 상단의 호위병들은 엘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수호대 역시 그들이 외치는 인간어를 모두 알아듣지 못했다.

불길과 연기 속에서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루아는 상대의 검을 대검으로 쳐냈다.

바람을 실은 일격에 호위병이 뒤로 넘어졌다.

죽이려는 공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다른 호위병이 루아에게 달려들었다.

수호자 하나가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빗나갔다.

그리고 뒤편에 묶여 있던 말이 날뛰었다.

수레가 다시 넘어졌다.

기름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불길이 솟구쳤다.

루아는 그 순간에야 깨달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리는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불 속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만 싸워!”

루아가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거대한 불길이 교역로 한쪽을 덮쳤다.

루아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수호자를 밀쳐냈다.

그리고 자신은 무너지는 불붙은 나무 아래에 깔렸다.


정신을 잃기 직전 루아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인간의 얼굴이었다.

자신과 싸우던 호위병이 아니었다.

상단과 함께 이동하던 치료사였다.

짙은 갈색 머리를 한 젊은 인간 남자였다.

그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루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수호대와 싸우고 있는 인간이었다.

왜 자신에게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다음 기억은 끊겼다.


루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임시 야영지였다.

갑옷 일부가 벗겨져 있었다.

팔과 어깨에는 화상 붕대가 감겨 있었다.

옆구리는 숨을 쉴 때마다 아팠다.

눈앞에는 인간 치료사가 앉아 있었다.

루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치료사가 그녀를 눌렀다.

“누워요.”

루아는 인간어를 조금 알아들었다.

그 정도 말은 이해했다.

“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치료사는 물을 건넸다.

루아는 다시 물었다.

“왜 나 살렸어?”

치료사는 그 질문을 겨우 알아들었다.

그리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쳤으니까요.”

루아는 눈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대답이냐는 표정이었다.

치료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짓을 섞어 말했다.

“다친 사람.”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가 루아를 가리켰다.

“치료사.”

그리고 두 손을 펼쳤다.

그에게는 그것으로 설명이 끝이었다.

루아에게는 아니었다.


화재는 결국 진압되었다.

불탄 숲은 넓었다.

정령목 몇 그루가 손상을 입었고,
동물들의 서식지가 사라졌다.

엘프도 다쳤고,
인간도 다쳤다.

처음 며칠 동안은 서로가 서로를 비난했다.

엘프들은 인간이 금지된 불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인간들은 그런 금지 규정을 전달받은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수호대는 공문서를 내밀었다.

인간 상단은 번역문을 내밀었다.

두 문서를 나란히 놓은 뒤에야 문제가 드러났다.

한 문장은 ‘모든 인공화염’이라고 적혀 있었고,
다른 문장은 ‘야영지의 화톳불’이라고 적혀 있었다.

루아는 그 문서를 오래 바라보았다.

누구도 숲을 태우려고 하지 않았다.

상인은 규칙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수호대도 중요한 경고를 빠뜨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은 제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 결과 숲이 불탔다.

루아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악당 한 명이 불을 질렀다면 쉬웠을 것이다.

잡아서 처벌하면 된다.

검으로 쓰러뜨리면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검으로 벨 사람이 없었다.

오해는 베어지지 않았다.

잘못된 번역문도 대검으로 부술 수 없었다.


부상에서 회복하는 동안 루아는 자신을 구한 인간 치료사와 자주 마주쳤다.

그의 이름은 테온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능숙하게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대화 하나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루아가 숲을 뜻하는 단어를 말하면,
테온은 인간어의 비슷한 표현을 알려주었다.

테온이 약초 이름을 말하면,
루아는 엘프들이 사용하는 이름을 알려주었다.

어느 날 루아가 물었다.

“그날 우리 싸웠잖아.”

테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들어왔어?”

불길 속으로 왜 자신을 구하러 왔느냐는 뜻이었다.

테온은 잠시 생각했다.

“당신이 날 공격한 건 아니었으니까.”

루아는 바로 반박했다.

“우리 편이 네 편 공격했어.”

“우리 편도 당신들 공격했습니다.”

“그럼 똑같네.”

“그러니까 그만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루아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테온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정하는 동안 사람 죽으면 치료사는 할 일이 없어집니다.”

그 말이 루아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루아는 사건이 끝난 뒤에도 교역로를 자주 찾아갔다.

예전에는 순찰을 위해서였다.

이후에는 사람을 보기 위해서였다.

상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길을 사용하는지 봤다.

왜 무거운 마차를 숲까지 끌고 오는지 물었다.

왜 엘프의 규정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지도 들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외부인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령이 지나는 길을 막지 말라는 규칙.

루아에게는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령을 보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길을 비워두라는 이상한 요구였다.

특정 나무를 만지지 말라는 규칙도 마찬가지였다.

엘프는 그 나무에 어떤 정령이 깃들었는지 알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그냥 비슷한 나무 가운데 하나였다.

루아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규칙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왜 지켜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야 했다.

그것도 수호자의 일이었다.


그 뒤 루아는 새벽이끼수호대 안에서 조금 이상한 수호자가 되었다.

순찰 범위를 경계선 밖까지 넓히자고 주장했다.

“왜?”

선배 수호자가 물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숲인데.”

루아는 대답했다.

“그러니까 밖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지.”

“밖은 밖이야.”

“밖에서 시작한 게 안으로 들어오잖아.”

그녀는 교역로를 따라 인간 마을에도 가봤다.

상인들과 이야기했고,
목동들에게 길을 물었으며,
경계 근처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직접 확인했다.

처음에는 수호대 일부가 못마땅하게 여겼다.

숲을 지키는 사람이 왜 인간 문제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느냐고 했다.

루아는 늘 비슷하게 대답했다.

“불 붙고 나서 뛰어가는 것보다 불 붙을 이유를 없애는 게 빠르잖아.”

그녀에게 수호의 의미가 바뀌기 시작했다.

기다렸다가 막는 것이 아니었다.

위험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먼저 찾아가는 것이었다.


몇십 년 뒤,
루아가 한 부대를 맡았을 때 그 방식은 처음으로 큰 효과를 냈다.

인간 벌목꾼들이 경계림 가까이에 임시 숙영지를 만들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수호대 일부는 즉시 쫓아내자고 주장했다.

허가되지 않은 벌목이었다.

루아도 처음에는 검을 들고 출발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해보니 상황이 이상했다.

나무는 거의 베어져 있지 않았다.

벌목꾼들의 식량도 부족했다.

그들은 델피로의 한 지방에서 산사태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피난민들이었다.

목재를 팔아 겨울 식량을 구하려 했을 뿐이었다.

규칙을 어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냥 쫓아내면 다른 곳에서 다시 나무를 벨 가능성이 높았다.

루아는 그들과 이야기했다.

대신 쓰러진 고목을 정리하는 일을 맡겼고,
레흐니티 상인들과 연결해 정당한 값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수호대에서는 반대가 있었다.

“우리 일이 아닌데.”

루아는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 말했다.

“맞아.”

그리고 숲을 가리켰다.

“근데 저 사람들이 굶으면 다시 우리 일이 돼.”

그 사건 이후 그녀의 방식에 동의하는 수호자들이 늘어났다.


루아가 수호대장이 된 뒤에는 아예 원칙이 되었다.

위험이 숲에 도착하기 전에 조사한다.

국경 밖의 분쟁도 살핀다.

상인과 여행자의 움직임을 단순히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파악한다.

외부 세력과 대화할 수 있는 수호자를 양성한다.

새벽이끼수호대의 임무는 더 이상 숲 안에서 화살을 겨누는 일만이 아니었다.

때로는 길을 설명하고,
때로는 번역하고,
때로는 서로 다른 규칙 사이에서 협상했다.

루아는 그런 일을 전투보다 약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필요한 전투 하나를 막을 수 있다면 검보다 훨씬 좋은 무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주 말했다.

“숲을 지키고 싶다면 숲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봐야 해!”

그녀에게 그것은 외부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수호자의 의무였다.


하지만 루아에게는 다른 문제가 생겼다.

책임을 너무 많이 자기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부하가 실수하면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제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수호자가 판단을 잘못하면 말했다.

“제가 확인했어야 했습니다.”

작전 중 누군가 다치면 가장 먼저 자기 결정을 돌아봤다.

처음에는 훌륭한 대장처럼 보였다.

부하들도 그런 루아를 신뢰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수호자들이 중요한 결정을 루아에게 넘기기 시작했다.

“대장님이 결정해주세요.”

“루아님이 보시면 더 정확할 겁니다.”

“일단 기다리겠습니다.”

루아는 처음에는 그것을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다.

대장이니까 당연하다고 여겼다.

문제는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부하들이 기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소규모 순찰대가 숲 외곽에서 밀렵꾼으로 의심되는 무리를 발견했다.

상대는 아직 사냥하지 않았다.

무기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밀렵꾼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었다.

순찰대장은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루아에게 연락을 보냈다.

루아는 다른 지역에 있었다.

답을 보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무리는 숲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결국 실제 밀렵꾼이었다.

정령수 한 마리가 죽었다.

사건이 끝난 뒤 루아는 순찰대장을 질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했다.

“내가 더 명확한 지침을 줬어야 했어.”

순찰대장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옆에 있던 늙은 수호자가 말했다.

“아니.”

루아가 돌아보았다.

“네 잘못도 있어.”

루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내가 책임진다고.”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네 잘못이라고.”

루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노인은 순찰대장을 가리켰다.

“얘가 자기 판단보다 네 판단을 먼저 기다렸잖아.”

그리고 루아를 바라보았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루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루아는 자신이 부하를 보호한다고 생각했던 행동을 다시 돌아봤다.

실수하면 자신이 책임졌다.

위험한 일은 자신이 먼저 했다.

중요한 결정은 자신이 내렸다.

모두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부하는 안전할 수 있었다.

동시에 성장하지 못했다.

판단할 기회도,
실수하고 그것을 책임질 기회도,
자기 방식으로 사람을 지키는 법을 배울 기회도 줄어들었다.

루아는 자신이 과거의 화재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떠올렸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험해진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오해가 생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부하들의 판단을 듣기도 전에 자기 판단으로 덮어버리고 있었다.

형태만 달랐을 뿐,
비슷한 실수를 하고 있었다.


그 뒤부터 루아는 일부러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보고를 받은 뒤 바로 명령하지 않았다.

“넌 어떻게 생각해?”

처음에는 부하들이 당황했다.

“대장님께서 결정하시는 거 아닙니까?”

“내가 물었잖아.”

“그래도...”

“틀려도 되니까 말해.”

루아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하의 판단이 위험해 보이면 입이 먼저 움직였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자기가 대신하고 싶었다.

특히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는 더 그랬다.

그녀는 여전히 완전히 고치지 못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갑옷을 입는다.

가장 무거운 임무를 자기 이름 옆에 적는다.

부하가 다치는 것보다 자신이 다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 마음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마음이 언제부터 타인의 가능성을 빼앗는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 젊은 수호자가 루아에게 직접 불만을 말한 적도 있었다.

“대장님은 저희를 못 믿으십니까?”

루아는 즉시 대답했다.

“믿지.”

“그런데 왜 위험한 임무는 항상 대장님이 먼저 갑니까?”

“내가 제일 강하니까.”

“그러면 저희는 언제 강해집니까?”

루아는 입을 다물었다.

젊은 수호자는 계속 말했다.

“대장님이 없을 때 숲을 지킬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은 루아에게 꽤 아팠다.

자신은 늘 숲을 지키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하는 방식으로 숲을 지킨다면,
언젠가 자신이 사라졌을 때 남는 것은 무엇인가.

루아는 그 질문에 아직 완전히 대답하지 못했다.


현재의 루아는 여전히 새벽이끼수호대에서 가장 먼저 위험으로 뛰어드는 사람이다.

중갑을 입고,
거대한 양손대검을 들고,
부대 선두에 선다.

바람의 정령력이 검날을 따라 흐르면,
본래 닿지 않을 거리까지 거대한 참격이 이어진다.

땅의 조율술을 펼치면 발밑의 뿌리와 토양이 그녀의 자세를 받치고,
돌진하는 적조차 정면에서 받아낸다.

그녀는 뒤에서 지시만 내리는 지휘관이 아니다.

“내 뒤로!”라고 외치기보다,
“같이 가!”라고 말하는 쪽에 가깝다.

부하들은 그런 루아를 좋아한다.

그리고 가끔은 답답해한다.

본인이 다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짐을 들면 빼앗아 들고,
위험한 정찰이 있으면 자기 이름부터 적으며,
부하가 실수하면 상대가 뭐라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책임이라고 선언한다.

그럴 때 오래 함께한 수호자들은 말한다.

“대장.”

“왜?”

“또 시작했습니다.”

“뭘?”

“혼자 숲 전체 업고 가기.”

루아는 대부분 웃으며 넘긴다.

“내가 힘이 좀 세잖아.”

하지만 속으로는 그 말이 농담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루아는 지금도 화재가 났던 자리를 가끔 찾아간다.

백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숲은 많이 회복되었다.

불탔던 나무들의 자리에는 새로운 나무가 자랐다.

당시 만들어졌던 교역로도 지금은 훨씬 정교한 규칙 아래 운영된다.

엘프어와 인간어로 된 표지판이 함께 세워져 있다.

그중에는 화기 사용 규칙도 있다.

이번에는 누구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그림까지 그려져 있다.

루아는 그 표지판을 볼 때마다 조금 웃는다.

거대한 대검보다 작은 그림 하나가 숲을 더 잘 지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날 자신을 구했던 치료사 테온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인간의 삶은 엘프보다 훨씬 짧았다.

루아에게는 함께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 길지 않은 기억처럼 느껴지지만,
그에게는 생애의 상당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테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루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교역로의 치료소에 인간어로 된 작은 문장을 하나 적어두었다.

‘다친 사람이 누구인지는 치료한 뒤에 물어도 된다.’

테온이 정확히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루아는 그것이 그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아는 대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적도 있다.

숲을 약탈하려는 자도 있고,
협상을 시간 끌기로 사용하는 자도 있다.

그런 상대에게는 검을 든다.

망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검을 뽑기 전에 하나를 더 확인한다.

정말 적인가.

우리가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었는가.

상대는 우리의 경고를 이해했는가.

그리고 지금 벌어진 위험의 원인이 정말 눈앞의 사람에게 있는가.

과거의 루아에게 수호자의 무기는 검과 갑옷이었다.

지금의 루아에게는 하나가 더 있다.

이해하려는 노력.

그것이 아무리 답답하고 느리더라도,
때로는 가장 큰 화재를 막는 수단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아직 배우지 못한 것도 있다.

숲을 지키려면 숲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은 배웠다.

상대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하지만 사람을 지키는 것과,
그 사람이 스스로 위험을 감당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 사이의 거리는 아직 어렵다.

루아는 누군가 다치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 자기 밑에 있는 사람이 다치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대신 앞에 선다.

대신 책임진다.

대신 결정한다.

그것은 분명 사랑과 책임에서 시작된 행동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부하가 자신의 검을 들고,
자신의 판단으로 숲을 지켜야 한다.

루아도 그 사실을 안다.

그래서 요즘 그녀가 가장 어려워하는 훈련은 대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부하가 결정하는 동안 기다리는 것.

잘못될 가능성이 보여도 바로 답을 주지 않는 것.

그리고 정말 실수했을 때,
그 실수까지 빼앗아 자기 책임이라고 하지 않는 것.

루아에게는 적진으로 돌진하는 것보다 그쪽이 더 어렵다.


그래도 그녀는 조금씩 배우고 있다.

수호자는 모든 위험을 대신 맞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수호라는 것을.

숲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나무 하나가 모든 바람을 막아주는 숲은 오래가지 못한다.

작은 나무도 뿌리를 내려야 하고,
각자의 가지가 빛을 받아야 한다.

루아는 그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한다.

마음이 따라가는 데 조금 오래 걸릴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새벽이끼경계림 바깥에서 이상한 소식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누군가 묻는다.

“대장님, 어디 가십니까?”

루아는 대검을 등에 메며 대답한다.

“보러 가야지.”

“아직 숲 안에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루아는 씩 웃는다.

“그러니까 지금 가는 거야.”

그리고 숲 밖을 향해 걷는다.

불이 보인 뒤에 달려가던 수호자에서,
연기가 생길 이유부터 찾아가는 수호자로.

그러면서도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리면 가끔 걸음을 늦춘다.

혼자 먼저 가버리지 않기 위해서.

언젠가는 자신 없이도 그 길을 걸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DRN
드란셰 그린베리
레흐니티새벽이끼수호대-대원
“...말은 오늘 바뀌어. 습관은 목숨이 걸렸을 때 드러나지.”
🩸 HP60
💪 공격력30
🧙 마법력75
✨ 신비력5
🛡️ 방어력30
🔗 항마력30
😖 신비저항30
🏃 회피력50
과거 보기
드란셰 그린베리의 이야기는 한 마리의 매에서 시작된다.

정확히는,
그 매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던 한 엘프에게서 시작되었다.

드란셰의 아버지는 새벽이끼경계림에서 오래 근무한 수호자였다.

그는 이름난 전사도 아니었고,
대단한 마법을 사용하는 엘프도 아니었다.

대신 숲의 동물을 잘 알았다.

어떤 새가 어느 계절에 돌아오는지.
어느 짐승이 발자국을 숨기는지.
어떤 울음소리가 평소와 다르면 숲에 문제가 생긴 것인지.

특히 매를 좋아했다.

어린 드란셰는 아버지와 함께 숲 가장자리의 높은 바위에 앉아 몇 시간씩 매를 관찰하곤 했다.

대화는 많지 않았다.

아버지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대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드란셰가 올려다보면 나뭇가지 사이로 매 한 마리가 지나갔다.

“봤냐.”

“응.”

“뭐가 보였어.”

어린 드란셰는 대답했다.

“매.”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름이고.”

드란셰가 다시 하늘을 보았다.

매는 원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먹이 찾는 중.”

“왜?”

“고개가 아래로 향했으니까.”

아버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식이었다.

말을 듣는 것보다,
눈앞의 행동을 보는 법부터 배웠다.


아버지는 드란셰에게 사람도 비슷하다고 가르쳤다.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만 보지 마.”

“그럼?”

“다음에 뭘 하는지 봐.”

그때의 드란셰는 그 말을 특별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늘 하던 잔소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
그 문장이 드란셰의 삶 전체를 설명하게 되었다.


새벽이끼경계림의 숲매는 외부 사냥꾼들에게 꽤 값비싼 동물이었다.

길들이기 어렵지만 한번 길들이면 숲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았고,
높은 지능과 정령 친화성을 가진 개체는 귀족들의 사냥매나 군사용 전령으로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레흐니티에서는 숲매의 포획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특히 번식기에는 둥지 주변 접근 자체가 금지되었다.

문제는 국경 바깥에서는 그 규칙이 거의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외부 밀렵꾼들이 몰래 들어왔다.

알을 훔쳤고,
어린 매를 잡았으며,
때로는 어미를 죽이고 새끼만 가져갔다.

수호대가 적발할 때마다 쫓아냈다.

몇몇은 체포했고,
상단에 항의도 보냈다.

한동안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다.

드란셰의 아버지는 그것을 오래 지켜본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자주 말했다.

“이번엔 사과했대.”

드란셰가 물었다.

“그러면 끝?”

아버지는 피곤하게 웃었다.

“다음 봄 봐야지.”


그해 봄에도 밀렵꾼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세 명이었다.

그들은 숲매 둥지 위치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내부 정보를 산 것인지,
이전 밀렵꾼들에게 지도를 받은 것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수호대가 흔적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둥지 하나가 비어 있었다.

어린 매 두 마리가 사라졌다.

아버지는 추적에 나섰다.

드란셰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안 돼.”

“나도 활 쓸 줄 알아.”

“알아.”

“그럼 왜.”

아버지는 짧게 대답했다.

“오늘은 안 돼.”

드란셰는 화가 났다.

자신이 아직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몰래 뒤를 따라갔다.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을 만큼 멀리.

하지만 놓치지 않을 만큼 가까이.

그 선택 때문에 드란셰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게 되었다.


밀렵꾼들은 숲의 좁은 계곡에서 따라잡혔다.

한 명은 새장이 달린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 안에서 어린 매가 몸부림쳤다.

아버지는 활을 겨눴다.

“내려놔.”

밀렵꾼 하나가 말했다.

“죽이러 온 거 아닙니다.”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매만 가져갈 겁니다.”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밀렵꾼이 천천히 가방을 내려놓는 듯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단검을 뽑았다.

전투는 짧았다.

아버지는 한 명의 어깨에 화살을 맞혔다.

다른 한 명의 다리를 베었다.

세 번째가 뒤에서 달려들었다.

드란셰는 숨어 있던 자리에서 활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쏠 수 있었다.

하지만 확신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밀렵꾼의 몸이 겹쳐 있었다.

잘못 쏘면 아버지를 맞힐 수도 있었다.

몇 초였다.

드란셰는 기다렸다.

그리고 그 몇 초 사이 밀렵꾼의 칼이 아버지의 옆구리에 들어갔다.

드란셰는 그제야 화살을 쐈다.

밀렵꾼은 쓰러졌다.

너무 늦었다.


아버지는 곧바로 죽지는 않았다.

드란셰가 달려갔을 때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왜 왔어.”

첫마디였다.

드란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화를 내지도 않았다.

대신 새장을 가리켰다.

“먼저.”

드란셰는 알아들었다.

새장을 열었다.

어린 매는 한쪽 날개를 다친 상태였다.

날지 못했다.

드란셰는 매를 품에 안았다.

다시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호흡은 더 약해져 있었다.

드란셰가 말했다.

“치료사 올 거야.”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 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드란셰는 같은 말을 몇 번 더 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확신해서가 아니었다.

그랬으면 해서였다.

아버지는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죽었다.

품에 안았던 어린 매는 살아남았다.

훗날 드란셰의 어깨에 앉아 함께 숲을 누비게 되는 매였다.


밀렵 사건은 큰 문제가 되었다.

범인들은 외부 상단과 연관되어 있었다.

상단은 공식 사절을 보냈다.

사과했다.

유감을 표했고,
유가족에게 보상을 제안했으며,
다시는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드란셰도 그 자리에 있었다.

사절은 정중했다.

고개를 숙였다.

“이번 사건에 대해 깊이 사과드립니다.”

드란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련자들을 엄중히 처벌하겠습니다.”

대답하지 않았다.

“재발 방지에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에서 드란셰의 시선이 처음 움직였다.

재발 방지.

그녀는 그 말을 기억했다.

아주 정확하게.

다음 봄을 보기 위해서였다.


다음 봄에도 밀렵꾼이 들어왔다.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같은 상단 소속도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매를 노렸다.

또 하나의 둥지가 털렸다.

또 사과가 왔다.

관련자가 처벌되었다고 했다.

다음에는 경비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다음 해에는 조금 조용했다.

드란셰는 기다렸다.

그다음 해,
다른 경로에서 밀렵 흔적이 발견되었다.

다시 사과했다.

드란셰는 그때부터 사과를 듣는 표정이 달라졌다.

화를 내지는 않았다.

비웃지도 않았다.

그냥 들었다.

그리고 기억했다.

누가 무엇을 약속했는지.

언제 했는지.

다음에는 실제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말보다 그다음을 보기 시작했다.


드란셰는 새벽이끼수호대에 들어갔다.

활을 선택했다.

아버지가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큰 장궁이었다.

처음에는 다루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드란셰는 바꾸지 않았다.

몇 년 동안 몸을 단련했다.

정령마법을 화살에 실었다.

바람의 흐름을 화살촉에 감고,
숲의 정령과 감각을 맞추어 시야 밖의 목표까지 맞히는 법을 익혔다.

어린 시절 구해낸 매도 성장했다.

드란셰는 그 매와 정령적 연결을 맺었다.

눈을 감으면 매가 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길.

풀숲을 지나가는 작은 움직임.

사람의 머리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발자국의 방향.

그녀는 추적에 뛰어났다.

그리고 기다리는 데도 능숙했다.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고 목표를 관찰했다.

누군가는 그런 그녀를 답답하다고 했다.

드란셰는 개의치 않았다.

사람을 판단하는 데도 같은 방식을 사용했다.

한 번의 말.

한 번의 선행.

한 번의 실수.

그런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반복되는 것을 봤다.


누군가 숲을 존중한다고 말하면,
드란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다음에 나뭇가지를 어떻게 다루는지 봤다.

정령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몇 달 뒤에도 같은 행동을 하는지 확인했다.

실수한 사람이 사과하면,
사과를 받아주지도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냥 말했다.

“알았어.”

그리고 지켜봤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것을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는 말했다.

“사과했잖아.”

드란셰는 대답했다.

“응.”

“그럼 됐지.”

“뭐가.”

상대는 할 말을 잃었다.

드란셰에게 사과는 행동의 끝이 아니었다.

변화의 시작을 선언하는 말에 가까웠다.

시작이라고 말했으면,
그다음이 있어야 했다.


한 번은 외부 상단이 숲의 수지를 불법으로 채취하다 적발된 일이 있었다.

상단주는 직접 찾아와 사과했다.

보상도 충분히 지급했다.

관련 직원을 해고했고,
새로운 내부규칙까지 만들었다.

주변 수호자들은 이번에는 진심 같다고 말했다.

드란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동료가 물었다.

“너는 저 정도 해도 못 믿어?”

드란셰가 말했다.

“아직.”

“뭘 더 해야 하는데?”

“다음에 안 하면 돼.”

그리고 몇 년을 지켜봤다.

그 상단은 실제로 변했다.

새로 들어온 직원들에게도 숲의 규칙을 교육했고,
허가되지 않은 채취를 자체적으로 신고하기도 했다.

드란셰는 그제야 상단주의 이름을 신뢰 가능한 거래자 명단에 올렸다.

상단주가 그 사실을 알고 물었다.

“이제는 믿어주시는 겁니까?”

드란셰는 잠시 생각했다.

“조금.”

상대는 웃었다.

드란셰는 웃지 않았다.

그래도 그에게 등을 보이고 걸었다.

드란셰에게는 그쪽이 훨씬 큰 신뢰의 표시였다.


루아가 수호대장이 되었을 무렵,
두 사람은 자주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성격은 상당히 달랐다.

루아는 먼저 가는 사람이었다.

드란셰는 먼저 보는 사람이었다.

루아는 외부인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란셰는 이야기를 들은 뒤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더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아가 말했다.

“직접 만나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많아.”

드란셰는 대답했다.

“하루는.”

“뭐?”

“하루는 다 괜찮아 보여.”

루아가 한숨을 쉬었다.

“넌 사람을 몇십 년은 봐야 믿겠다.”

드란셰는 잠시 생각했다.

“몇 년이면 돼.”

“그게 길다고.”

드란셰에게는 별로 길지 않았다.

엘프에게 몇 년은 충분히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문제는 모든 종족에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드란셰는 루아를 존경했다.

수호대장이 가장 위험한 곳으로 먼저 들어가는 것을 봤다.

자기 잘못이 아닌 일에도 책임을 피하지 않는 것도 봤다.

부하를 버리지 않는 것도 여러 번 확인했다.

그 신뢰는 하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된 행동 끝에 생긴 것이었다.

그래서 드란셰는 루아의 명령을 따른다.

필요하다면 목숨을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루아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특히 대화와 이해가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믿음에는 거리를 둔다.

한 번은 둘이 순찰을 마치고 돌아오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루아가 말했다.

“말이 통하면 싸울 일도 줄어.”

드란셰가 대답했다.

“줄긴 하지.”

“그럼 맞잖아.”

“말하고 나서 바뀌면.”

루아는 드란셰를 바라봤다.

드란셰는 계속 걸었다.

“말은 쉽잖아.”

그녀에게 대화는 출발점이지 증거가 아니었다.


둘의 차이는 어느 인간 사냥꾼 집단을 처리할 때 크게 드러났다.

그들은 실수로 금지된 구역에 들어왔다고 주장했다.

루아는 우선 이야기를 들었다.

길을 잘못 들었고,
사냥 제한구역인지 몰랐으며,
다시는 들어오지 않겠다고 했다.

증거도 부족했다.

수호대는 그들을 경고한 뒤 내보냈다.

드란셰는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를 붙였다.

루아가 알아차렸다.

“못 믿어?”

“응.”

“근거는?”

“없어.”

루아의 눈썹이 올라갔다.

드란셰가 덧붙였다.

“그래서 공격 안 했잖아.”

매는 며칠 동안 그들을 추적했다.

사냥꾼들은 실제로 돌아갔다.

다시는 숲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루아가 나중에 말했다.

“봤지? 진짜 길 잃은 거였어.”

드란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믿어?”

“다시 안 들어오면.”

루아는 결국 웃었다.

드란셰는 왜 웃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드란셰의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신뢰를 얻기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을 요구했다.

특히 인간처럼 짧게 사는 존재에게는 그 시간이 더욱 길었다.

한 인간 수호관이 몇 년 동안 새벽이끼수호대와 협력한 적이 있었다.

이름은 카엘이었다.

그는 외부 밀렵조직의 정보를 여러 번 넘겼다.

숲의 규칙도 철저히 지켰다.

한 번은 자신의 상단과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밀렵 계획을 신고했다.

루아는 그를 꽤 빨리 신뢰했다.

드란셰는 아니었다.

카엘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말을 걸었다.

“오늘은 몇 점입니까?”

드란셰가 물었다.

“뭐가.”

“신뢰도요.”

“몰라.”

“어제보다 올랐습니까?”

“아마.”

그는 웃었다.

몇 년 동안 비슷한 대화가 이어졌다.


어느 날 카엘이 레흐니티를 떠나게 되었다.

가족 문제로 델피로 깊숙한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

루아와 다른 수호자들이 작별을 나눴다.

드란셰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카엘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 이제 믿을 만합니까?”

드란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지난 몇 년을 생각했다.

카엘이 한 말.

그가 지킨 약속.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도 했던 행동.

충분했다.

드란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말했다.

“응.”

카엘의 얼굴이 밝아졌다.

잠시 뒤 드란셰가 덧붙였다.

“조금.”

카엘은 웃었다.

“그 정도면 성공했네요.”

그리고 떠났다.

몇 달 뒤,
카엘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인간에게는 갑작스러운 병이었다.

엘프에게는 너무 빠른 죽음이었다.

드란셰는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매와 시야를 연결한 채 혼자 숲을 오래 걸었다.

자신은 결국 그 사람을 신뢰했다.

하지만 신뢰한다고 말해준 시간은 단 하루뿐이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드란셰는 그 뒤부터 자신의 기준을 조금 의심하기 시작했다.

오래 본다는 것은 틀린 방법이 아니었다.

반복된 행동이 신뢰를 만든다는 생각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오래’가 언제인지는 누가 정하는가.

자신이 상처받지 않을 만큼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정말 신중함인가.

아니면 다시 누군가를 잃기 싫어서 관계의 시작 자체를 미루는 것인가.

드란셰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사람을 오래 본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예전보다 아주 조금 빨리 행동하기 시작했다.

신뢰한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같이 순찰을 나간다.

자기 물통을 건넨다.

등을 맡긴다.

드란셰에게는 말보다 그런 행동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대사도 그런 생각에서 나왔다.

한 번은 젊은 수호자가 외부인의 사과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물었다.

그 외부인은 실수로 숲의 어린 나무를 훼손했고,
곧바로 잘못을 인정했다.

수호자가 말했다.

“진심으로 미안해 보이던데.”

드란셰는 화살촉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그럴 수 있지.”

“그럼 믿어도 되겠지?”

드란셰의 손이 멈췄다.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말은 오늘 바뀌어.”

수호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드란셰는 다시 화살을 화살통에 넣었다.

“습관은 목숨이 걸렸을 때 드러나지.”

그녀는 사과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사과만으로 끝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지금의 드란셰는 새벽이끼수호대에서도 손꼽히는 추적자다.

숲에서 그녀를 숨기는 것은 어렵다.

정확히는,
그녀와 그녀의 매 둘 모두에게 숨는 것이 어렵다.

드란셰가 나무 아래에서 장궁을 들고 있어도,
시야는 이미 숲 위를 날고 있을 수 있다.

매의 눈으로 수백 걸음 밖의 움직임을 찾는다.

화살에는 정령마법을 실어 보낸다.

바람이 궤도를 잡고,
숲의 정령들이 장애물 사이의 작은 틈을 알려준다.

그녀의 화살은 물리적인 활에서 출발하지만,
실제로 적을 꿰뚫는 힘은 정령마법과 조율에서 나온다.

그녀는 필요하지 않다면 먼저 쏘지 않는다.

관찰한다.

한 번.

두 번.

상대가 무엇을 하려는지 확신할 때까지.

그 신중함 덕분에 불필요한 전투를 피한 적도 많다.

그리고 그 신중함 때문에 기회를 놓친 적도 있다.

드란셰 자신도 알고 있다.


루아와의 관계도 비슷하다.

드란셰는 루아를 깊이 신뢰한다.

하지만 루아가 옳다고 믿지는 않는다.

루아는 이해하면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드란셰는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해했다고 말한 뒤에도 행동이 달라지지 않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다.

그래서 둘은 자주 의견이 부딪친다.

“일단 이야기해보자.”

루아가 말하면 드란셰는 대답한다.

“이야기는 해.”

“그런데?”

“활은 들고.”

루아는 그것을 지나친 경계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드란셰는 루아가 사람을 너무 빨리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둘은 함께 움직인다.

루아가 앞으로 나가면,
드란셰는 뒤에서 주변을 살핀다.

루아가 상대와 이야기할 때,
드란셰는 상대의 손과 시선과 호흡을 본다.

서로의 방식이 완전히 같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빈틈이 줄어든다.

드란셰는 그것을 인정한다.

입 밖으로 자주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녀의 어깨에 앉는 매는 이제 오래된 동료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구하려 했던 둥지에서 살아남은 새.

드란셰는 그 매에게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누군가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왜 이름 없어?”

드란셰는 대답했다.

“있어.”

“뭔데?”

“내가 알아.”

그 뒤로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지금도 드란셰만 안다.

매 역시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드란셰는 사과를 싫어하지 않는다.

선의를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변화가 말보다 오래 남아야 한다고 믿는다.

오늘 숲을 존중한다고 말한 사람이,
내년에도 같은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가.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도 규칙을 지키는가.

자기에게 손해가 생겼을 때도 약속을 기억하는가.

드란셰에게 신뢰는 그런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그 증거를 너무 많이 요구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충분히 노력하고도 지친다.

누군가는 마음을 열었다가 계속 시험받는 기분에 돌아선다.

누군가에게는 드란셰가 신뢰할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

카엘처럼.

그 사실은 그녀가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상처다.


그래서 요즘의 드란셰는 아주 작은 연습을 한다.

확신하기 전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

누군가가 도움을 주면,
그 행동이 앞으로 반복될지 확인하기 전에 일단 고맙다고 말하는 것.

물론 잘하지 못한다.

어느 날 동료가 그녀 대신 야간 순찰을 맡아주었다.

다음 날 그 동료가 물었다.

“고맙지?”

드란셰는 말했다.

“응.”

상대가 놀랐다.

드란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아니, 바로 말해서.”

드란셰는 잠시 생각했다.

“취소할까.”

“아니.”

그런 정도의 변화다.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작다.

드란셰에게는 꽤 큰 변화다.


아버지가 죽은 날 이후,
드란셰는 말보다 행동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그 믿음으로 살아왔다.

그 원칙 덕분에 거짓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반복되는 잘못을 사과 한마디로 덮으려는 사람도 알아봤다.

제도가 변하지 않은 채 내놓는 사과가 얼마나 공허한지도 배웠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것도 조금씩 배우고 있다.

행동을 오래 보는 것과,
누군가가 가까이 올 때마다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신뢰에는 증명이 필요하지만,
언젠가는 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계속 지켜보기만 한다면 신뢰는 영원히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다.

드란셰는 그 경계를 아직 찾는 중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여전히 말이 없다.

상대가 떠들어도 듣는다.

웃어도 본다.

약속을 해도 기억만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말과 행동이 같은 방향으로 반복되는 것을 확인하면 아주 조금 자세를 바꾼다.

활시위를 당기던 손을 내리고,
등을 돌려 같은 길을 걷는다.

드란셰에게는 그 행동이 어떤 긴 인사말보다 큰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언젠가는,
상대가 떠나기 전에 먼저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믿는다고.

아직은 그 말까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지만.


열린가지합창회2명
HDE
하이드 우든스킨
레흐니티열린가지합창회-회장
“조용하다고 평화로운 것은 아닙니다. 죽은 나무도 아무 소리를 내지 않으니까요.”
🩸 HP300
💪 공격력5
🧙 마법력5
✨ 신비력1
🛡️ 방어력40
🔗 항마력30
😖 신비저항20
🏃 회피력35
과거 보기
하이드 우든스킨의 이야기는 한 그루의 나무가 병들었을 때 시작된다.

레흐니티의 깊은 숲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여러 세대의 드라이어드가 태어나고 정령들이 머물렀던 나무들은 특별히 근원목이라 불렸다.

근원목은 단순히 오래된 나무가 아니었다.

수많은 뿌리가 그 나무에서 갈라져 나왔고,
그 주변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은 크고 작은 형태로 그 생명과 연결되어 있었다.

근원목 하나가 쓰러진다고 숲 전체가 죽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조상과 기억과 고향을 한꺼번에 잃는 것과 비슷했다.

하이드가 태어난 곳에도 그런 나무가 있었다.

수백 년 된 거대한 느릅나무였다.

하이드는 그 나무의 뿌리 사이에서 처음 눈을 떴다.

어린 시절에는 줄기의 빈 공간에서 잠들었고,
비가 내리는 밤이면 잎사귀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노래를 만들었다.

그에게 숲은 처음부터 음악이었다.

바람이 가지를 지나가는 소리.

딱정벌레가 나무껍질 아래를 긁는 소리.

빗물이 뿌리 사이로 스며드는 소리.

드라이어드들이 서로를 부르는 노래.

하이드는 그것들을 듣고 흉내 냈다.

노래를 시작하면 작은 덩굴들이 몸을 일으켰고,
꽃은 계절보다 조금 일찍 피기도 했다.

그는 싸움보다 노래를 좋아했다.

누군가와 다투는 것보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음을 내다가 하나의 화음을 만드는 순간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젊은 시절의 하이드는 갈등이라는 것도 결국 충분히 이야기하면 조화롭게 끝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처음 근원목에 이상이 생겼을 때 아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잎 몇 장의 가장자리가 검게 변했다.

수액의 향이 조금 달라졌다.

뿌리 한쪽에서 아주 희미한 쓴맛이 느껴졌다.

오래된 나무에는 가끔 있는 일이었다.

계절이 지나면 회복되는 병도 많았다.

하이드는 병든 가지 곁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생명의 흐름을 안정시키는 오래된 노래였다.

며칠 동안은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새 잎이 돋았다.

하이드는 안심했다.

하지만 그다음 달,
더 높은 가지에서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하나가 아니었다.

열 장.

수십 장.

그리고 뿌리 아래쪽에서 회색 반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근원목과 연결된 드라이어드들도 몸의 이상을 느꼈다.

피부의 나뭇결이 갈라졌다.

머리카락처럼 자란 잎이 말랐다.

아침마다 손가락 끝의 감각이 조금씩 사라졌다.

하이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오른손 새끼손가락이었다.

아무 느낌이 없었다.

손가락을 꺾어도,
바늘 같은 가시로 찔러도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장로들에게 알렸다.


조사가 시작되었다.

엘프 조율사들이 찾아왔다.

드라이어드 장로들도 뿌리를 살폈다.

정령에게 물었다.

하지만 원인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맥류 오염은 아니었다.

저주도 아니었다.

기생식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무는 그냥 죽어가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그 죽음은 연결된 드라이어드들에게도 퍼지고 있었다.

회의가 열렸다.

하이드는 당연히 자신도 참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근원목에 관한 일이었다.

자신의 몸에도 이미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회의장에서 나가달라는 말을 들었다.

“왜입니까?”

한 장로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하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함께 들으면 되겠군요.”

“괜한 불안을 만들 필요는 없어요.”

그 말이 이상했다.

하이드는 잠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손가락 두 개에서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불안은 이미 있는데요.”

장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회의장은 닫혔다.


며칠 뒤,
드라이어드들에게 공식적인 설명이 전달되었다.

근원목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쇠약을 겪고 있다.

추가 조사를 진행 중이다.

당분간 외부와의 접촉을 줄이고 안정을 취하라.

하이드는 이상함을 느꼈다.

말은 부드러웠다.

그런데 설명에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얼마나 위험한지.

회복 가능성이 있는지.

자신들의 몸에 나타나는 증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것도 없었다.

하이드는 다시 장로를 찾아갔다.

“무엇을 발견하셨습니까?”

“아직 조사 중입니다.”

“그 말은 며칠 전에 들었습니다.”

“조금 기다려주세요.”

“얼마나 기다리면 됩니까?”

대답이 없었다.

하이드는 그때 처음으로 침묵이라는 것이 평화로울 수만은 없다고 느꼈다.

모두가 조용했다.

회의에서는 소란이 없었다.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근원목의 잎은 계속 떨어졌다.


하이드는 스스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엘프 조율사에게 물었다.

정령들에게도 물었다.

근원목의 오래된 기록을 찾아봤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장로들의 기록 일부를 보게 되었다.

내용은 짧았다.

회복 가능성 희박.

원인 미상.

연결된 드라이어드의 생존 가능성 역시 낮음.

격리 권고.

외부 공개 시 혼란 우려.

하이드는 몇 번이나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외부 공개 시 혼란 우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하이드는 그날 처음으로 장로들에게 분노했다.

그것도 아주 깊게.


회의장에 찾아갔다.

이번에는 나가달라는 말을 듣고도 나가지 않았다.

“왜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장로 하나가 긴 한숨을 쉬었다.

“확실하지 않았으니까요.”

“생존 가능성이 낮다고 적혀 있군요.”

“가능성일 뿐입니다.”

“그러면 그 가능성을 우리가 알아서는 안 됩니까?”

다른 장로가 말했다.

“알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이드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조용해졌다.

“아무것도요?”

“현재로서는.”

장로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밖에 알리면 공포가 퍼진다.

드라이어드들이 숲을 떠나려 할 수도 있다.

엘프와 외부 종족이 근원목의 병을 위험한 전염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혼란만 만드는 것보다 조용히 돌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악의를 가지고 한 결정은 아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피해를 줄이려 했다.

그래서 하이드는 더 화가 났다.

“조용히 죽으라는 말이군요.”

회의장이 얼어붙었다.

장로가 말했다.

“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하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으셨지요.”

“그게 문제입니다.”


하이드는 다른 드라이어드들에게 사실을 알렸다.

혼란이 일어났다.

장로들이 우려한 그대로였다.

누군가는 울었다.

누군가는 분노했다.

숲을 떠나겠다는 이도 있었다.

외부 치료사를 부르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왔다.

장로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이드 자신도 그 혼란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정말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았던 것은 아닐까.

진실을 알린다고 병이 낫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공포만 커졌다.

그러나 며칠 뒤 변화가 생겼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각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다른 숲의 기록을 찾았다.

어떤 이는 정령들에게 이전에 본 적 없는 병에 대해 물었다.

누군가는 외부에서 비슷한 증상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교역상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살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어도.

자신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쓸지 스스로 고르기 위해서였다.

하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알았다.

진실이 반드시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실을 모르면 선택조차 할 수 없다.


외부에서 처음 답을 보내온 것은 인간 치료사들이었다.

델피로의 한 연구자가 근원목에서 채취한 조직을 살펴보고 싶다고 했다.

장로들은 반대했다.

정체불명의 병든 근원목 조직을 외부에 넘기는 것은 위험했다.

하이드는 밀어붙였다.

“이미 죽고 있습니다.”

“그래도 위험을 늘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선택입니다.”

결국 제한적으로 허가되었다.

몇 주 뒤 인간 연구자들이 숲에 도착했다.

그들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정령과 대화하지도 못했다.

나무의 맥류를 읽지도 못했다.

대신 작은 유리그릇과 확대경,
이상한 배양액들을 가지고 왔다.

드라이어드들 가운데는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이드 역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 한 인간이 근원목의 병든 조직을 보다가 이상한 말을 했다.

“이 안이 너무 깨끗합니다.”

하이드는 이해하지 못했다.

“병들었는데 깨끗하다니요?”

인간은 설명했다.

나무 표면과 내부에서 특정 세균류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고.

보통 식물과 공생하며 다른 유해균의 침입을 막는 미생물까지 사라져 있다고 했다.

엘프와 드라이어드들은 처음 듣는 관점이었다.

그들에게 나무의 건강은 맥류와 정령,
토양과 물의 문제였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생물들이 나무를 보호한다는 생각은 낯설었다.


조사는 계속되었다.

원인이 조금씩 드러났다.

과거 근원목 주변에서 발생했던 부패병을 막기 위해 장로들이 강한 정화 조율을 반복한 기록이 있었다.

병원성 균류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근원목과 공생하던 미세한 세균류까지 크게 줄어들었다.

당시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수십 년이 지나면서 균형이 무너졌다.

근원목은 외부의 작은 병원체조차 버티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을 없애려던 정화가 나무를 지나치게 깨끗하게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치료 방법은 더욱 이상했다.

다른 건강한 숲에서 가져온 토양과,
외부 인간 거주지의 오래된 과수원에서 채취한 미생물 군집을 근원목의 뿌리에 이식하는 것이었다.

장로들은 크게 반대했다.

“인간의 땅에서 나온 세균을 근원목에 넣겠다고요?”

인간 연구자는 말했다.

“인간의 세균이 아닙니다.”

“그냥 거기 살던 겁니다.”

그 말은 당시의 드라이어드들에게 별로 안심이 되지 않았다.

하이드조차 망설였다.

잘못되면 남은 시간마저 줄어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선택할 수 있었다.

위험이 무엇인지 들었다.

성공 가능성도 들었다.

실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들었다.

드라이어드들은 직접 논의했다.

그리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이드는 그 차이를 평생 기억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군가가 그들을 대신해 조용히 결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선택했다.


치료는 느렸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근원목의 잎은 계속 떨어졌다.

하이드의 팔에서는 나뭇결이 갈라졌고,
몸 일부의 감각도 더 둔해졌다.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러던 어느 새벽,
근원목 가장 낮은 가지에서 새 잎 하나가 돋았다.

너무 작아서 처음에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하이드는 몇 시간 동안 그 잎을 바라봤다.

다음 주에 두 장이 더 생겼다.

그다음 달에는 뿌리의 썩은 냄새가 줄었다.

공생균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근원목은 살아남았다.

연결된 드라이어드들 역시 서서히 회복했다.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병이 너무 깊었던 몇몇 드라이어드는 그전에 죽었다.

그래도 하이드는 살아남았다.

장로들이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게 하려 했던 드라이어드 가운데 하나가,
외부 인간이 가져온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 덕분에 살아남았다.

하이드는 그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사건 이후 하이드의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화가 나도 소리치지 않았다.

사람의 말을 끊기보다 끝까지 들었다.

하지만 침묵을 바라보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조용한 회의가 좋은 회의라고 생각했다.

싸움이 없으면 화합이라고 여겼다.

이제는 아니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말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체념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상처받았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문 사람도 있다.

하이드에게 침묵은 더 이상 평화의 증거가 아니었다.

때로는 가장 위험한 신호였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조용하다고 평화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잠시 미소를 지은 뒤 덧붙인다.

“죽은 나무도 아무 소리를 내지 않으니까요.”


하이드가 열린가지합창회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에게 합창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낮은 음이 있다고 높은 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선율이 겹친다고 반드시 소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목소리가 나머지를 덮어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합창회를 점차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으는 장소로 만들었다.

엘프.

드라이어드.

요정.

정령.

때로는 외부에서 온 인간과 수인까지.

축제에서 노래하는 것뿐 아니라,
갈등이 생겼을 때 각자가 무엇을 느끼는지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열었다.

어떤 회의에서는 노래보다 불평이 더 많았다.

하이드는 만족했다.

불평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말하고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했다.

“합창회가 요즘 너무 시끄럽습니다.”

하이드는 웃으며 대답했다.

“건강하다는 뜻일 수도 있겠군요.”


하이드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드러난 갈등보다 숨겨진 갈등을 더 두려워한다.

누군가 불만을 말하면 들을 수 있다.

상처받았다고 말하면 사과하거나 고칠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알 방법이 없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관계가 부러진다.

그에게 그것은 병든 근원목과 같다.

겉으로 잎이 붙어 있다고 안쪽까지 건강한 것은 아니다.

뿌리가 썩고 있는데 조용하다는 이유로 괜찮다고 생각하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상처가 말할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분노도.

원망도.

불신도.

아름답게 표현될 필요는 없다.

그저 존재한다고 인정받아야 한다.

그다음에야 화합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하이드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진실을 너무 믿었다.

정확히는,
진실이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치유가 시작된다고 믿었다.

자신을 살린 것도 숨겨졌던 사실이 드러난 뒤였기 때문이다.

근원목이 죽어간다는 사실.

장로들이 회복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는 사실.

정화술의 오래된 기록.

그 모든 것이 공개된 뒤에야 다른 선택지가 생겼다.

그래서 하이드는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면 가능한 한 빨리 꺼내놓으려 했다.

대부분은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열린가지합창회에 젊은 드라이어드 둘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둘은 오랫동안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심각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하이드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오래전 공동으로 돌보던 나무가 죽었을 때,
한쪽이 치료를 중단하는 결정에 몰래 동의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사자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이드는 숨기는 것이 더 큰 상처를 만들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합창회의 대화 자리에서 그 문제를 꺼냈다.

“이제는 말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배신감을 품고 있던 드라이어드는 준비되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이드가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침묵이 오래될수록 뿌리는 더 깊이 엉키니까요.”

결국 사실이 공개되었다.

상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사과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오히려 둘은 한동안 서로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며칠 뒤 배신감을 품고 있던 드라이어드가 하이드를 찾아왔다.

“왜 당신이 말할 때를 정했습니까?”

하이드는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말할 일이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요.”

상대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알게 된 거겠지요.”

그 말은 하이드에게 오래 남았다.


하이드는 처음으로 자신의 신념에도 폭력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말하도록 강요하는 것도 폭력이 될 수 있었다.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

동시에 자신의 상처를 언제 말할지 선택할 권리도 있었다.

하이드는 전자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한 나머지 후자를 잊고 있었다.

모든 씨앗이 같은 계절에 싹트지 않는다.

어떤 뿌리는 겨울을 지나야 움직인다.

억지로 흙을 걷어내 햇빛을 보여준다고 더 빨리 자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말라 죽을 수도 있다.

하이드는 자연을 그렇게 잘 알면서도,
사람의 상처에는 같은 원리를 적용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꽤 부끄러웠다.


그 후 하이드의 방식은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진실을 숨기지 말자고 말한다.

하지만 먼저 묻는다.

“지금 말씀하고 싶으십니까?”

“누구와 함께 듣는 것이 좋겠습니까?”

“제가 알고 있다는 사실부터 밝혀도 괜찮겠습니까?”

예전의 하이드라면 답답하게 느꼈을 절차다.

지금은 그것 역시 치유의 일부라고 생각하려 한다.

말할 자리를 만드는 것과,
그 자리로 사람을 끌고 나오는 것은 다르다.

문을 열어두는 것과 밀어 넣는 것도 다르다.

하이드는 그 차이를 배우는 중이다.

완전히 익숙해진 것은 아니다.

누군가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으면 여전히 참기 어려워한다.

그 사실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럴 때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지만,
평소보다 단호해진다.


하이드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투에 적합한 사람도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대화로 끝내려 한다.

그러나 누군가 입을 막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이드가 노래를 시작하면 땅속의 뿌리가 깨어난다.

덩굴이 발목을 휘감고,
꽃가루가 시야를 뒤틀며,
적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기 시작한다.

필요하다면 상대의 생명력을 조금씩 빼앗아 움직임을 멈추게 한다.

죽이기 위해서라기보다,
싸울 의지를 꺾기 위해 사용하는 힘이다.

하이드는 전투에서도 같은 생각을 한다.

상대의 목소리를 영원히 없애버리는 승리는 가능한 한 피한다.

살아 있다면 언젠가 다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이드 역시 그 정도의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다만 선택할 수 있다면 침묵시키는 것보다 멈추게 하는 쪽을 고른다.


합창회장이 된 지금도 하이드는 노래를 자주 한다.

그의 합창에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목소리만 들어가지는 않는다.

음이 틀리는 사람도 있다.

박자를 놓치는 사람도 있다.

목소리가 거칠고 작은 사람도 있다.

하이드는 그런 목소리를 쉽게 빼지 않는다.

누군가 말했다.

“저 사람 때문에 화음이 흐트러집니다.”

하이드는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그럼 빼야 하지 않습니까?”

하이드는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요.”

“우리의 화음을 바꾸어야겠지요.”

그것이 하이드가 생각하는 화합이다.

모두를 같은 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채 함께 노래할 방법을 찾는 것.

불편한 음을 제거해서 얻은 정숙함은 그에게 화합이 아니다.


그래서 하이드는 열두뿌리회의의 결정에도 가끔 반대한다.

누군가 분쟁을 조용히 봉합하자고 하면,
그는 먼저 묻는다.

“봉합 전에 안쪽을 씻었습니까?”

갈등을 더 이야기하면 관계가 악화된다는 의견이 나오면 말한다.

“이미 악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태도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다.

일을 크게 만든다고 말한다.

괜히 오래된 상처를 다시 헤집는다고도 한다.

하이드는 그런 비판을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자신이 너무 일찍 진실을 꺼내 상처를 키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 더 오래 묻는다.

이 진실은 누구의 것인가.

누가 말해야 하는가.

누가 알아야 하는가.

그리고 지금이 정말 말할 때인가.

마지막 질문이 여전히 가장 어렵다.


하이드는 자신이 병들었던 근원목을 지금도 찾아간다.

나무는 완전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오래된 가지 몇 개는 죽었고,
한쪽 줄기에는 병의 흔적이 검은 나뭇결로 남아 있다.

하지만 살아 있다.

봄이면 잎이 돋고,
새들이 둥지를 틀며,
새로운 드라이어드들이 그 주변에서 태어난다.

하이드는 가끔 나무껍질에 손을 얹는다.

아주 작은 떨림이 느껴진다.

수많은 미생물과 뿌리와 정령이 만들어내는 생명의 움직임.

자신들을 살린 것은 하나의 위대한 마법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하찮아 보였던 외부의 지식과,
누군가가 가져온 작은 생물들과,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할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그 경험 때문에 하이드는 지금도 믿는다.

목소리를 잃은 존재에게 선택은 거의 남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는 이제 한 문장을 더 배우고 있다.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지금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햇빛과 비슷하다.

생명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갑자기 너무 강한 빛에 드러난 어린 싹은 오히려 말라버릴 수도 있다.

하이드는 아직 그 빛의 양을 정확하게 조절하지 못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많이 보여준다.

때로는 기다려야 할 순간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념까지 하나의 완성된 노래라고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계속 고쳐 쓰는 곡에 가깝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올 때마다 조금씩 화음이 달라지는 곡.


지금의 하이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이것이다.

“괜히 말해서 일을 크게 만들지 맙시다.”

그 말을 들으면 평소의 온화한 미소가 조금 사라진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묻는다.

“누구에게 큰 일이 되는 것입니까?”

이미 상처받은 사람에게는 진작부터 큰 일이었을 수도 있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하이드는 그 차이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동시에,
상처받은 사람에게 자신의 고통을 증명하라고 재촉하지 않으려 한다.

두 가지를 함께 지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도 그는 시도한다.

숲의 노래 역시 한 음만으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도 열린가지합창회에는 여러 목소리가 모인다.

즐거운 노래도 있고,
불평도 있다.

누군가는 오래된 원망을 말하고,
누군가는 아직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하이드는 둘 다 받아들이려 한다.

침묵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침묵할 권리 역시 함부로 빼앗지 않으려 한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그 둘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 차이를 안다.

적어도 알아가고 있다.

회의가 끝난 뒤 누군가 묻는다.

“오늘도 결론이 안 났네요.”

하이드는 나뭇가지 사이의 바람 소리를 잠시 듣는다.

그리고 부드럽게 대답한다.

“괜찮습니다.”

“노래도 첫 음에서 끝나지는 않으니까요.”

그에게 진정한 화합은 조용함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말하고,
아직 말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기다릴 자리가 있으며,
서로 다른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은 채 다음 음을 찾는 상태다.

하이드는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완벽하게 고요해서가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PRR
후리링
레흐니티열린가지합창회-부회장
“헤헤, 싸울 거면 이름부터 물어봐! 그래야 나중에 화해하기 덜 어색하잖아?”
🩸 HP50
💪 공격력5
🧙 마법력40
✨ 신비력1
🛡️ 방어력10
🔗 항마력25
😖 신비저항70
🏃 회피력70
과거 보기
후리링의 이야기는 그녀가 말이라는 것을 너무 좋아했던 시절에서 시작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후리링은 말을 있는 그대로 두는 법이 거의 없었다.

사람에게는 별명을 붙였다.

긴 이름은 줄였고,
딱딱한 문장은 노래처럼 바꾸었으며,
지루한 이야기는 조금 더 재미있게 꾸몄다.

“오늘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후리링은 다른 사람에게 날아가 이렇게 전했다.

“구름 할아버지가 오늘 숲에 물 쏟으러 온대!”

“남쪽 길에 쓰러진 나무가 있어 통행이 어렵습니다.”

그 말은 후리링을 거치면 이렇게 변했다.

“남쪽 길이 나무한테 잡아먹혔어. 돌아가!”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더 잘 기억했다.

후리링의 말은 빠르고,
재미있고,
귀에 잘 들어왔다.

그래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소식을 옮기는 일을 자주 맡았다.

요정은 작아질 수 있었다.

나비만 한 크기로 몸을 줄이면 나뭇가지 사이를 빠르게 통과할 수 있었고,
바람을 타면 말이나 수레보다 훨씬 빠르게 짧은 거리를 이동할 수도 있었다.

후리링은 그것을 좋아했다.

누군가의 말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날아가,
그 사람의 표정이 바뀌는 순간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말 하나가 사람을 웃게 만들었다.

말 하나가 싸움을 끝내기도 했다.

후리링은 자신에게 꽤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가 오랫동안 한 가지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재미있게 바꾸어도 되는 말과,
절대로 바꾸어서는 안 되는 말.


당시 레흐니티와 델피로의 경계에는 작은 마을 하나가 있었다.

새벽이끼경계림의 바깥과 왕관평야로 이어지는 길 사이에 자리한 곳이었다.

엘프도 살았고,
인간도 살았으며,
수인과 하플링 상인들도 계절마다 드나들었다.

큰 마을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나라를 오가는 여행자들이 쉬어가는 곳이라 서로 다른 언어가 늘 섞여 있었다.

후리링은 그곳을 좋아했다.

낯선 사람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장 위를 날아다니며 처음 보는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어?”

상인이 대답하면 바로 다음 질문이 나왔다.

“거긴 뭐가 맛있어?”

“왜 그게 먼저입니까?”

“중요하잖아.”

그녀는 낯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가까이 가서 물었다.

그 덕분에 인간어도 꽤 능숙하게 배웠다.

정식 통역사가 될 정도로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충분했다.

그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해 경계지역은 좋지 않은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봄에 비가 너무 많이 왔다.

길이 무너졌고,
몇몇 밭은 물에 잠겼다.

여름에는 반대로 비가 거의 오지 않았다.

곡물 수확량이 줄었다.

국경마을의 저장고에는 겨울을 날 식량이 부족했다.

레흐니티 안쪽에서 식량을 보내려 했지만 숲의 운송로에도 문제가 있었다.

델피로 쪽에서도 상황을 알고 있었다.

인간 사절단 하나가 마을을 찾아왔다.

구호물자와 통행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정식 통역사가 오기로 했지만,
폭우로 다른 길에 발이 묶였다.

회의를 하루 미루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후리링이 인간어 할 줄 알지 않습니까?”

후리링은 바로 손을 들었다.

“응! 잘해!”

옆에 있던 드라이어드가 물었다.

“정확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후리링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녀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회의는 처음에는 잘 진행되었다.

델피로의 사절은 마을에 필요한 곡물의 양을 물었다.

레흐니티 측은 창고 현황을 설명했다.

후리링은 양쪽의 말을 빠르게 옮겼다.

가끔 어려운 표현은 조금 쉽게 바꾸었다.

딱딱한 표현에는 농담도 하나씩 끼워 넣었다.

사람들이 웃었다.

긴장된 회의 분위기가 풀렸다.

후리링은 만족했다.

역시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델피로 사절이 지원 가능성을 설명했다.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현재 왕실과 주변 상단에 지원을 요청하겠다.

도로 상황이 회복되고 충분한 물량이 확보된다면,
첫서리가 내리기 전에 일부 곡물을 보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조건이 붙어 있었다.

지원 요청.

물량 확보.

도로 복구.

그리고 가능성.

후리링은 그 문장을 알아들었다.

문제는 너무 딱딱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웃으며 레흐니티 쪽을 돌아보았다.

“걱정하지 마!”

작은 방울이 딸랑거렸다.

“인간들이 첫서리 오기 전에 곡물수레 끌고 온대!”

몇몇 사람이 표정이 밝아졌다.

후리링은 더 신이 났다.

“길이 좀 말썽이어도 어떻게든 해본다잖아. 왕국 금고도 두드려보고 상단도 쥐어짠대!”

델피로 사절은 마지막 표현까지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했다.

사람들이 웃었기 때문에 회의가 잘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후리링에게 물었다.

“그럼 지원은 확정입니까?”

후리링은 잠깐 생각했다.

사절은 분명 도와주려고 했다.

아마 곡물도 올 것이다.

그녀는 웃었다.

“응. 온대.”

그 한마디가 약속이 되었다.


마을은 그 말을 믿었다.

정확히는 후리링을 믿었다.

델피로가 첫서리 전까지 곡물을 보내기로 약속했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그에 따라 계획도 바뀌었다.

원래는 부족한 식량을 아끼기 위해 일부 주민을 숲 안쪽 마을로 분산시키려 했다.

그 계획이 취소되었다.

비축곡 일부는 이미 굶고 있던 인근 피난민들에게 풀었다.

다른 상단과 높은 가격으로 맺으려던 긴급 곡물계약도 보류했다.

몇 주만 기다리면 델피로의 지원이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후리링은 사람들이 안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들이 빵을 조금 더 받아가는 것도 보았다.

누군가 말했다.

“잘됐다.”

후리링도 기뻤다.

자기가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곡물수레는 오지 않았다.

델피로 쪽에서도 지원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연이어 생겼다.

확보하기로 한 곡물의 양이 예상보다 적었다.

한 상단이 계약에서 빠졌다.

결정적으로 국경으로 이어지는 도로 일부가 산사태로 무너졌다.

사절이 처음부터 말했던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도로 상황이 회복된다면.

그러나 레흐니티의 마을 사람들은 그 조건을 듣지 못했다.

그들이 들은 것은 하나였다.

첫서리 전에 곡물수레가 온다.

첫서리가 내렸다.

수레는 없었다.

며칠이 더 지났다.

사람들은 불안해졌다.

마을의 식량 책임자가 후리링을 찾아왔다.

“지원대는 언제 옵니까?”

후리링은 처음에는 웃으며 말했다.

“조금 늦나 보지?”

“확실히 오기로 한 것이 맞습니까?”

“응.”

대답한 뒤,
후리링은 아주 잠깐 멈췄다.

자신이 들었던 원래 문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요청하겠다.

확보된다면.

도로가 회복된다면.

보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것은 약속이 아니었다.

후리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곧바로 델피로 쪽으로 날아갔다.

처음에는 평소의 몸으로 달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 숲에 들어서자 몸을 줄였다.

나비만 한 크기가 되어 바람을 탔다.

지쳐도 멈추지 않았다.

사절단이 머무는 역참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날개를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였다.

후리링은 사절을 찾아 물었다.

“곡물 어디 있어?”

사절은 당황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마을에 보내기로 했잖아.”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후리링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았다.

사절은 설명했다.

지원 요청 자체는 승인되었다.

하지만 예정 물량 전체를 확보하지 못했다.

도로도 끊겼다.

다른 우회로를 찾고 있었지만 첫서리 전에는 불가능했다.

그는 오히려 물었다.

“그 사실을 알고 대비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후리링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을은 대비하지 않았다.

자기가 괜찮다고 했기 때문이다.


후리링은 돌아가는 내내 한 번도 농담하지 않았다.

마을의 상황은 이미 나빠지고 있었다.

긴급 구매를 다시 시도했지만 곡물 가격은 전보다 훨씬 올라 있었다.

겨울이 시작된 뒤라 다른 지역 역시 비축곡을 쉽게 내놓지 않았다.

일부 주민은 결국 다른 마을로 이동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추위로 다친 사람도 나왔다.

몇몇 가축은 도축해야 했다.

밭에 남겨두었던 다음 해의 종자곡 일부도 식량으로 사용되었다.

굶어 죽은 사람이 대규모로 생기지는 않았다.

주변 마을과 레흐니티 내부에서 급히 지원이 도착한 덕분이었다.

그래도 피해는 분명했다.

누군가는 집을 잃었다.

누군가는 겨울 내내 병을 앓았다.

다음 봄의 수확도 줄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결정 가운데 일부는 존재하지 않았던 약속을 믿고 내려진 것이었다.

후리링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을 회의가 열렸다.

누가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는지 확인해야 했다.

델피로의 원본 기록도 도착했다.

사절이 실제로 했던 말이 적혀 있었다.

후리링은 그 문서를 읽었다.

한 글자씩.

자신이 무엇을 지웠는지도 알 수 있었다.

‘요청하겠다.’

그녀는 그것을 ‘보내준다’로 바꿨다.

‘가능하다면.’

그 말은 아예 없애버렸다.

‘예상한다.’

그것은 ‘약속했다’가 되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전달했습니까?”

후리링은 입을 열었다.

평소 같았다면 무언가 말이 바로 나왔을 것이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악의는 없었다.

거짓말을 해서 이득을 얻으려던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회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고 싶었다.

복잡한 문장을 쉽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말에 사람들이 웃는 것이 좋았다.

후리링은 결국 말했다.

“내가 재미있게 말하려고 했어.”

회의장은 조용했다.

그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후리링 자신에게조차 끔찍하게 들렸다.

사람들의 겨울이 어려워진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기가 말을 재미있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후리링은 사과했다.

처음에는 평소처럼 조금 밝게 시작하려 했다.

습관이었다.

“내가 이번에는 진짜 크게 사고를...”

말하다가 멈췄다.

사람들의 표정을 봤기 때문이다.

웃을 일이 아니었다.

후리링은 처음부터 다시 말했다.

“내가 잘못 전달했어.”

변명하지 않았다.

“사절은 약속하지 않았어.”

“조건이 있었는데 내가 빼버렸어.”

“그걸 믿고 너희가 결정했어.”

조금씩 목소리가 작아졌다.

“미안해.”

누군가는 사과를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리링은 처음으로 그 차이도 그대로 두었다.

웃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화해를 재촉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과,
상대가 지금 용서해야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건이 끝난 뒤 후리링은 한동안 소식을 전달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누가 부탁해도 피했다.

“다른 사람 시켜.”

사람들은 그녀가 겁먹었다고 생각했다.

맞았다.

말을 잘못 전달할까 무서웠다.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하던 말까지 몇 번씩 머릿속에서 확인했다.

자연스럽게 말수가 줄었다.

후리링답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하이드는 어느 날 그녀를 불렀다.

둘은 한동안 꽃이 핀 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하이드가 물었다.

“요즘 노래를 거의 하지 않으시는군요.”

후리링은 다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노래하다가 또 사람 굶길까 봐.”

하이드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노래를 멈춘다고 잘못된 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후리링은 그를 노려봤다.

“지금 시적인 말 듣고 싶지 않은데.”

하이드는 미소 지었다.

“그럼 평범하게 말씀드리지요.”

“다시 배우시면 됩니다.”

후리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 후리링은 말의 종류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상적인 이야기.

농담.

소문.

자기 의견.

그리고 약속.

마지막은 다른 것과 섞지 않았다.

누군가 공식적인 내용을 전달해달라고 하면 먼저 물었다.

“그대로 말하면 돼?”

대답이 그렇다고 하면,
정말 그대로 말했다.

어려운 표현이 있어도 자기 마음대로 쉽게 바꾸지 않았다.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원래 말과 자신의 설명을 반드시 구분했다.

“여기까지가 그 사람이 한 말.”

그다음 손가락을 들었다.

“이제부터는 내 생각.”

처음에는 번거로웠다.

후리링에게 말은 원래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런데 약속만큼은 줄에 묶어 옮겨야 했다.

그래도 지켰다.

누군가의 선택이 그 말 하나에 달려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 후리링은 다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말이 많은 요정 중 하나가 되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많이 떠들었다.

낯선 여행자가 나타나면 가장 먼저 날아갔다.

“처음 왔지?”

“네.”

“티 나.”

“어디서요?”

“표정이 길 잃은 버섯 같아.”

상대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 후리링은 즐거워했다.

사람들에게 이상한 별명도 붙였다.

큰 갑옷을 입은 사람은 쇳덩이.

말이 없는 사람은 돌멩이.

긴 수염이 있는 사람은 빗자루.

누군가 싫다고 하면 다른 별명을 만들어주었다.

“그럼 뭐가 좋아?”

그녀에게 별명을 붙이는 일은 상대를 자기 방식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장난칠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후리링은 사람들이 서로 웃어본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국경마을 사건을 겪으면서 말의 위험을 배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 사건 이후 오랫동안 여러 종족과 함께 지내며 다른 것도 보았다.

처음 만난 종족끼리는 서로를 쉽게 무서워했다.

인간 아이가 처음 드라이어드를 보면 움직이는 나무라고 숨어버렸다.

엘프 아이도 갑옷을 입은 인간 병사를 보면 침략자라고 생각했다.

어떤 요정은 고블린을 처음 보고 몬스터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함께 밥을 먹고,
같이 길을 잃고,
실수로 서로의 발을 밟고,
별것 아닌 일에 웃고 나면 조금 달라졌다.

공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하나의 무서운 이름에서 구체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인간.

고블린.

수인.

드라이어드.

그런 이름 대신,
아까 국을 쏟은 사람.

노래를 못하는 사람.

웃을 때 코를 찡그리는 사람.

그런 기억이 생겼다.

후리링은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웃어본 사람을 완전히 낯선 괴물로 상상하기는 조금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 믿음 때문에 후리링은 열린가지합창회와 잘 맞았다.

하이드는 사람들에게 말할 자리를 만들었다.

후리링은 그 자리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만들었다.

회의 시작 전부터 사람들 사이를 날아다녔다.

긴장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너 오늘 표정 엄청 무섭다.”

“긴장해서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더 무서운 표정 해줄까?”

후리링이 얼굴을 찡그렸다.

대부분은 웃었다.

그 웃음 뒤에야 처음 말을 꺼내는 사람도 있었다.

후리링은 그런 순간을 좋아했다.

서로를 무서워하던 사람들이 같이 실수하고 같이 웃은 뒤 조금 편해지는 순간.

그녀에게 그것도 화합이었다.

완벽한 합의보다 먼저 오는 작은 친숙함.

그래서 그녀는 믿는다.

함께 웃고 실수하는 경험이 있어야 서로에 대한 공포와 낯섦이 줄어든다고.


하지만 후리링은 그 믿음 때문에 또 다른 실수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너무 심각해지면 본능적으로 농담을 했다.

울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웃겨주고 싶었다.

분노한 사람이 있으면 분위기를 조금 가볍게 만들고 싶었다.

대부분의 경우 도움이 되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열린가지합창회에서 외부 상단의 벌목 때문에 터전을 잃은 드라이어드의 증언을 듣는 자리가 있었다.

증언자는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결속했던 나무가 잘려나간 이야기를 하다가 몇 번이나 멈췄다.

회의장 분위기는 무거웠다.

후리링은 견디기 어려웠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말했다.

“저렇게 못되게 자른 놈들은 다음 생에 전부 잡초로 태어나서 매일 밟혀야 돼!”

몇 사람이 어색하게 웃었다.

후리링도 웃었다.

증언자는 웃지 않았다.

한참 뒤 그가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까?”

후리링의 웃음이 멈췄다.

“아니.”

“그런데 왜 웃습니까?”

후리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의 고통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너무 무거워 보여서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후리링의 의도였다.

상대가 받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

자신의 상처가 농담의 재료가 된 느낌.

그 차이를 후리링은 처음으로 선명하게 보았다.


회의가 끝난 뒤 후리링은 그 드라이어드를 찾아갔다.

평소처럼 날아가지 않았다.

사람과 비슷한 크기로 걸어갔다.

상대 앞에 서서 말했다.

“미안해.”

드라이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후리링은 계속 말했다.

“웃기려고 한 건 맞아.”

“네 얘기가 웃겨서가 아니고.”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그건 네가 알아야 할 이유는 아니네.”

드라이어드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후리링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싫었으면 내가 잘못한 거야.”

그날 상대는 그녀를 용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후리링도 요구하지 않았다.

국경마을 사건 이후 배운 것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의도가 결과를 없애주지는 않는다.


그 뒤로 후리링은 이상한 고민을 시작했다.

농담을 해야 하는 순간과 하지 말아야 하는 순간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그녀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였다.

후리링은 원래 웃음으로 사람과 가까워지는 존재였다.

그 방식을 완전히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실제로 웃음 때문에 긴장이 풀리고,
덕분에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던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누군가의 고통을 자기 마음대로 가볍게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규칙을 만들었다.

우는 사람 앞에서는 농담하지 않는다.

금방 실패했다.

울면서 농담해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음 규칙.

죽음 이야기가 나오면 농담하지 않는다.

그것도 실패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친구의 우스운 이야기를 하며 함께 웃고 싶어 했다.

후리링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왜 사람은 규칙대로 안 돼!”

하이드는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사람이니까 그렇겠지요.”

“도움 안 되는 대답이야.”

“그렇군요.”


결국 후리링은 아주 단순한 방법을 하나 배웠다.

물어보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자주 잊는다.

그래도 정말 상처가 깊어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먼저 말하려 한다.

“농담해도 돼?”

누군가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누군가는 웃으며 그러라고 한다.

누군가는 싫다고 한다.

그러면 하지 않는다.

후리링은 처음에는 그 방법이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즉흥성이 없었다.

요정답지 않았다.

하지만 곧 다른 점을 발견했다.

상대가 직접 허락하고 난 뒤의 농담은 오히려 더 편했다.

자신도 상대의 표정을 일일이 두려워하지 않고 웃을 수 있었다.

후리링은 그것도 하나의 약속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작은 약속.

지금은 함께 웃어도 된다는 약속.


약속에 관한 한 후리링은 지금 굉장히 까다롭다.

처음 보는 사람은 대부분 놀란다.

평소에는 그렇게 가볍게 떠들던 요정이,
공식적인 협상이 시작되면 갑자기 표정부터 달라지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한다.

“가능하면 사흘 안에 지원하겠습니다.”

후리링은 반드시 그대로 반복한다.

“가능하면. 사흘 안에. 지원한다.”

그리고 확인한다.

“확정 아니지?”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전달한다.

상대편에서 묻는다.

“사흘 안에 온다는 뜻입니까?”

후리링은 즉시 고개를 젓는다.

“아니.”

평소의 발랄한 말투가 잠시 사라진다.

“가능하면 사흘 안에 지원한다고 했어. 확정 아니야.”

그다음에야 웃는다.

“그러니까 사흘 뒤에 안 왔다고 나 잡아먹으면 안 돼.”

농담은 그 뒤다.

약속을 먼저 정확하게 전달하고 난 다음.

그 순서만큼은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


그녀의 방울도 그런 습관과 연결되어 있다.

후리링은 공식적인 전달을 시작할 때 작은 방울을 한 번 울린다.

딸랑.

그 소리가 나면 주변 사람들도 안다.

지금부터 후리링이 하는 말은 장난이 아니다.

별명도 없고,
과장도 없고,
말장난도 없다.

전달받은 그대로 말한다.

끝나면 다시 방울을 두 번 울린다.

딸랑, 딸랑.

그러면 후리링이 씩 웃는다.

“끝! 이제부터 내가 떠드는 건 믿고 싶은 것만 믿어!”

사람들은 웃는다.

하지만 그 작은 의식 덕분에 누구도 중요한 말을 농담과 혼동하지 않는다.

후리링에게는 꽤 소중한 습관이다.

자신이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만들어둔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후리링은 전투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강한 전사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위험해지면 몸을 나비만큼 줄인다.

바람 사이로 빠르게 움직이고,
별빛을 흩뿌려 여러 개의 허상을 만든다.

빛가루를 한꺼번에 터뜨려 눈앞을 가리거나,
바람의 방향을 뒤틀어 상대가 자신이 어느 쪽을 보고 있는지 착각하게 만든다.

싸워서 쓰러뜨리는 것보다 헷갈리게 만든 뒤 도망치는 편을 좋아한다.

동료가 함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오른쪽!”

상대가 오른쪽을 보면 후리링은 왼쪽으로 날아간다.

“진짜 오른쪽 말고 내 오른쪽!”

혼란스러운 적이 화를 내면 웃는다.

“봐, 싸움하면 말부터 꼬이잖아!”

하지만 누군가 항복이나 협상을 제안하는 순간에는 농담을 멈춘다.

조건을 정확히 확인한다.

누가 무엇을 내려놓는지.

어디까지 물러나는지.

무엇을 약속하는지.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다.


후리링의 대표적인 말도 그런 성격을 잘 보여준다.

두 집단이 처음부터 서로를 적대하던 자리였다.

양쪽 모두 무기를 들고 있었고,
누군가 작은 실수만 해도 싸움이 벌어질 분위기였다.

후리링은 두 집단 사이로 날아갔다.

누군가 소리쳤다.

“비켜!”

후리링은 공중에서 빙글 돌았다.

“싫어!”

“싸움에 끼어들지 마!”

후리링은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헤헤, 싸울 거면 이름부터 물어봐!”

모두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후리링은 계속 말했다.

“그래야 나중에 화해하기 덜 어색하잖아?”

그 말 하나로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기적은 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상대의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상대가 대답했다.

몇 분 뒤에는 서로가 왜 그곳에 왔는지도 이야기하게 되었다.

결국 그날 검은 뽑히지 않았다.

후리링은 그런 작은 순간들을 믿는다.

사람들이 적이라는 이름보다 먼저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

공포가 조금 작아지는 순간.

그녀에게 화합은 종종 거기서 시작된다.


하지만 후리링은 아직도 실패한다.

누군가 울고 있는데 분위기를 풀겠다고 엉뚱한 별명을 붙였다가 혼난 적도 있다.

장례식에서 너무 침울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고인의 우스운 이야기를 꺼냈다가 유족의 표정을 보고 바로 입을 다문 적도 있다.

반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평소처럼 웃겨주길 바랐는데”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그래서 후리링은 여전히 고민 중이다.

웃음이 언제 위로이고,
언제 회피인지.

언제 사람을 가까워지게 하고,
언제 상대의 고통을 작게 만들어버리는지.

정답은 아직 없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후리링에게는 매우 불편하다.

그녀는 원래 금방 답을 찾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도 사람에 관한 문제만큼은 빠르게 답을 만들지 않으려 한다.

한번 너무 빠르게 의미를 만들어버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가끔 후리링은 오래전 국경마을을 다시 방문한다.

그 마을은 지금도 남아 있다.

당시보다 창고도 커졌고,
구호물자에 관한 규칙도 훨씬 명확해졌다.

외부 지원이 확정되지 않았을 때는 반드시 예비계획을 함께 마련한다.

통역문에는 원문이 함께 붙는다.

조건이 있는 약속에는 조건을 눈에 띄게 표시한다.

후리링이 만든 규칙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실수가 계기가 된 규칙들이다.

그 사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조금 이상해진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해 겨울을 힘들게 보낸 사람들의 시간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같은 방식의 실수가 반복될 가능성은 줄었다.

후리링은 그 정도라도 의미가 있기를 바란다.


지금의 후리링은 여전히 시끄럽다.

열린가지합창회에서도 가장 먼저 낯선 사람에게 다가간다.

처음 온 사람이 혼자 서 있으면 곧바로 말을 건다.

“이름 뭐야?”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길어. 별명 만들어도 돼?”

“벌써요?”

“빨리 친해지면 좋잖아.”

그녀는 함께 웃는 일을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실수도 보여준다.

자기가 넘어지면 먼저 웃는다.

말을 잘못하면 인정한다.

“아, 틀렸다.”

예전이라면 그 자리에서 재미있게 고쳐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중요한 내용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말한다.

“방금 건 잊어.”

그리고 방울을 울린다.

딸랑.

“다시. 정확하게 말할게.”

그 순간의 후리링은 놀랄 만큼 진지하다.


그녀는 말이 사람을 이어준다고 믿는다.

농담도 그렇다.

웃음도 그렇다.

함께 저지른 작은 실수도 그렇다.

낯선 존재와 함께 넘어지고,
같이 길을 잃고,
서로의 이상한 음식 취향을 놀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존재는 더 이상 막연한 공포가 아니게 된다.

그러나 후리링은 이제 안다.

말은 사람을 이어줄 수 있는 만큼,
사람의 선택을 빼앗을 수도 있다.

자신이 하지 않은 약속을 했다고 만들 수도 있다.

위험을 안전하다고 바꿀 수도 있다.

누군가의 상처를 작은 농담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그녀는 두 가지를 동시에 지키려고 한다.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

그리고 웃음 때문에 중요한 말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

아직 두 번째가 더 어렵다.


회의가 너무 무거워지면 지금도 후리링의 입술이 움찔한다.

농담 하나가 떠오른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말했다.

요즘은 주변을 먼저 본다.

누가 울고 있는지.

누가 화가 나 있는지.

누가 억지로 웃고 있는지.

그리고 아주 가끔 묻는다.

“나 지금 웃겨도 돼?”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면 후리링의 얼굴이 바로 밝아진다.

“좋아. 그럼 내가 방금 생각한 엄청 형편없는 농담이 있는데.”

누군가 싫다고 하면 입을 다문다.

물론 오래 가지는 않는다.

잠시 뒤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래도 그 작은 멈춤은 후리링에게 중요하다.

과거의 자신에게 없었던 시간이기 때문이다.

상대의 마음이 들어올 자리를 남겨두는 몇 초.

후리링은 이제 그것도 대화라고 생각한다.

말하는 것만큼,
말하지 않는 순간도.

그리고 누군가 정말 중요한 약속을 전해달라고 하면,
그녀는 먼저 방울을 한 번 울린다.

딸랑.

웃음기가 조금 사라진다.

한 글자도 더하지 않는다.

한 글자도 빼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 말을 믿고 자신의 내일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전달이 끝나면 방울을 두 번 울린다.

딸랑, 딸랑.

그리고 다시 익숙한 미소가 돌아온다.

“자, 중요한 얘기 끝!”

후리링은 날개를 펼치며 웃는다.

“이제 친해지는 얘기 하자. 너 별명 있어?”


Roster

전투연합국 안발룽

6명
대모래맹약회의2명
KRN
카레나 벼락걸음
안발룽대족장-&의장
“하핫! 힘이 남는다면 네 것이 아니지! 아직 쓰러진 사람이 있다는 뜻이야!”
🩸 HP220
💪 공격력85
🧙 마법력5
✨ 신비력1
🛡️ 방어력80
🔗 항마력35
😖 신비저항70
🏃 회피력70
과거 보기
카레나 벼락걸음의 이야기는 우물 하나를 두고 사람이 죽던 시절에서 시작된다.

안발룽에서는 물이 단순한 자원이 아니다.

길이고,
계절이고,
가축이며,
때로는 한 씨족이 다음 해에도 존재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목숨 그 자체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나라의 사람들은 우물을 땅에 난 구멍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안발룽에서는 달랐다.

오아시스 하나에는 여러 세대의 이름이 붙었다.

누가 처음 발견했는지.
어느 해에 말랐는지.
어느 씨족이 돌을 쌓았는지.
어떤 싸움에서 빼앗겼는지.

아이들은 자기 집의 위치보다 먼저 가까운 우물까지 가는 길을 배웠다.

카레나도 그랬다.


그녀가 태어난 씨족은 크지 않았다.

이름난 전사도 많지 않았고,
거대한 가축떼를 거느린 부유한 씨족도 아니었다.

대신 이동이 빨랐다.

비가 내린다는 소문이 들리면 가장 먼저 천막을 걷었고,
먼 곳에서 모래폭풍이 오는 것이 보이면 누구보다 빠르게 길을 바꾸었다.

카레나는 어릴 때부터 힘이 셌다.

열두 살에는 자기 몸만 한 물주머니를 들었고,
열다섯에는 성인 남자들과 가축을 몰았다.

씨족 사람들은 농담처럼 말했다.

“저 애가 지나간 자리엔 모래가 늦게 떨어진다.”

그래서 벼락걸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카레나는 마음에 들어 했다.

어린 그녀에게 강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강하면 더 오래 걸을 수 있었다.

무거운 물을 더 많이 나를 수 있었다.

짐승에게서 동생을 지킬 수도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얕보면 때려눕힐 수도 있었다.

그 시절 카레나는 힘이라는 것이 복잡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있으면 좋은 것.

없으면 빼앗기는 것.

그 정도였다.


가뭄이 찾아온 것은 카레나가 열일곱이던 해였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모두가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안발룽에는 원래 비가 적었다.

우물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가축에게 주는 물을 줄였다.

낮의 이동을 피했다.

다음 오아시스로 향하는 길을 조금 앞당겼다.

하지만 가뭄은 끝나지 않았다.

비구름은 보이지 않았다.

작은 샘부터 말랐다.

풀이 사라졌다.

가축의 갈비뼈가 드러났다.

아이들의 입술이 갈라졌다.

씨족은 더 큰 우물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 우물은 다른 씨족의 것이었다.


처음에는 물을 사려고 했다.

가축을 내놓았다.

가죽을 내놓았다.

남아 있던 금속도구도 내놓았다.

하지만 우물의 씨족 역시 가뭄을 겪고 있었다.

그들은 말했다.

“우리도 부족하다.”

카레나의 아버지가 물었다.

“아이들 마실 것만이라도.”

상대 부족장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 아이에게 주면 우리 아이가 못 마신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카레나는 그 말을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천막에는 어린 동생이 셋 있었다.

막내는 이미 열이 나고 있었다.

물 대신 입술에 젖은 천을 대주어야 했다.

둘째는 밤마다 물을 달라고 울었다.

카레나는 그 울음을 들었다.

그리고 우물 반대편에서는 물 긷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처음 죽은 것은 막내였다.

열이 내려가지 않았다.

치료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몸에 물이 없었다.

카레나는 어린 동생을 품에 안고 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 뒤 둘째도 죽었다.

그날 카레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할버드를 들고 모래를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날이 부러질 것처럼 계속 내리쳤다.

분노할 대상이 필요했다.

하늘은 칠 수 없었다.

가뭄도 죽일 수 없었다.

그래서 우물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에게는 물이 있다.

우리에게는 없다.

그럼 가져오면 된다.

그 생각은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편했다.


카레나는 젊은 전사들을 모았다.

대부분 그녀와 비슷한 또래였다.

모두 누군가가 말라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부모.
동생.
배우자.
가축.

카레나는 말했다.

“달라고 해서 안 주면 가져온다.”

누군가 물었다.

“우물 지키는 놈들은?”

카레나는 바로 대답했다.

“밀어내.”

“싸우면?”

그때의 카레나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겨.”

그녀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없었다.

자기 씨족의 아이들이 죽고 있었다.

그 앞에서 상대 씨족의 사정까지 생각하는 것은 약한 자의 사치라고 여겼다.

그날 밤 그들은 우물을 습격했다.


카레나는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방패를 든 상대 전사의 자세를 할버드 자루로 무너뜨렸다.

다른 전사의 검을 건틀릿으로 쳐냈다.

좁은 우물길에서 씨족 전사들이 부딪쳤다.

싸움은 금방 엉망이 되었다.

모래가 날렸다.

물항아리가 깨졌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카레나 앞에 또래쯤 되어 보이는 전사 하나가 섰다.

젊은 남자였다.

그 역시 지쳐 있었다.

입술이 말라 있었고,
팔에는 오래된 천이 감겨 있었다.

그는 창을 들었다.

카레나는 할버드를 들었다.

둘 다 물러나지 않았다.

한 번 부딪쳤다.

두 번째에는 카레나가 창을 걷어냈다.

세 번째에는 할버드 날이 남자의 몸에 들어갔다.

그는 쓰러졌다.

카레나는 멈추지 않았다.

우물을 확보해야 했다.

동생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죽은 사람을 볼 시간은 없다고 생각했다.


싸움은 카레나 쪽의 승리로 끝났다.

상대 씨족 전사들은 밀려났다.

카레나는 우물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항아리 가져와!”

자기 씨족 사람들이 환호했다.

누군가는 울었다.

드디어 물을 얻었다.

카레나는 그 순간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물 반대편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자기 씨족 아이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돌담 뒤편에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조금 전 자신들이 공격한 씨족의 아이들이었다.

한 아이가 빈 물그릇을 끌어안고 있었다.

다른 아이는 울지도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

그 옆에는 늙은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카레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물었다.

“우리 몫도 가져갈 거냐?”

카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조금 전 자신이 죽인 전사가 떠올랐다.

카레나는 다시 시신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남자의 허리에는 작은 가죽끈이 묶여 있었다.

물주머니 하나와,
조잡하게 깎은 나무장식이 달려 있었다.

카레나는 그 장식을 알아봤다.

아이들이 가족에게 만들어주는 종류였다.

자신의 동생도 비슷한 것을 만들어준 적이 있었다.

남자는 자기 씨족의 물을 독점하려고 싸운 것이 아니었다.

아마 똑같은 이유로 싸웠을 것이다.

자기 뒤에 있는 아이들에게 물을 주기 위해서.

카레나는 한동안 서 있었다.

승리했다는 느낌이 사라졌다.

그제야 알았다.

우물 반대편에도 동생이 있었다.


자기 씨족의 전사 하나가 물통을 끌고 가려 했다.

카레나가 막았다.

“반만.”

전사가 이해하지 못했다.

“뭐?”

“반만 가져가.”

“미쳤어? 우리가 이겼잖아.”

카레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우물 뺏었잖아.”

카레나는 우물 반대편의 아이들을 가리켰다.

“저건?”

전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쪽 씨족이잖아.”

카레나는 낮게 말했다.

“아이야.”

상대가 다시 뭐라고 하려 했다.

카레나는 할버드를 땅에 꽂았다.

“반만 가져간다.”

이번에는 명령이었다.


자기 씨족에서도 반발이 나왔다.

동생 둘이 이미 죽었다.

사람을 죽여가며 얻은 우물이었다.

그런데 왜 패배한 씨족과 나눠야 하느냐고 했다.

카레나의 어머니조차 물었다.

“네 막내가 또 죽으면?”

그 질문 앞에서 카레나는 오래 침묵했다.

남아 있는 막내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물 반대편의 아이들도 떠올랐다.

결국 말했다.

“그럼 내가 더 적게 마실게.”

어머니가 화를 냈다.

“네가 안 마신다고 물이 생겨?”

“안 생겨.”

카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다른 데서 더 찾아와야지.”

그날 이후 카레나는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물을 빼앗는 것은 문제를 옮긴 것뿐이었다.

자기 씨족이 살고,
다른 씨족이 죽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가뭄 자체는 그대로였다.


카레나는 두 씨족의 전사들을 모았다.

며칠 전까지 서로를 죽이던 사람들이었다.

분위기는 좋을 리 없었다.

카레나가 죽인 전사의 가족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형이 카레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내 동생은 안 살아나.”

카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미안하다고 할 거냐?”

카레나는 잠시 생각했다.

“미안해.”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도 그날 다시 돌아가면 싸웠을 거야.”

주변이 술렁였다.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카레나는 피하지 않았다.

“우리 애들도 죽고 있었으니까.”

잠시 뒤 우물을 가리켰다.

“근데 네 동생도 같은 이유로 싸웠겠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카레나는 말했다.

“그래서 다음에는 서로 죽이기 전에 물부터 나누자.”

그것이 그녀가 처음 제안한 공동분배였다.


처음에는 거의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물을 많이 확보한 씨족은 손해라고 생각했다.

가축이 많은 씨족은 왜 자기 가축을 남에게 나눠줘야 하느냐고 했다.

약한 씨족은 강한 씨족이 약속을 지킬지 의심했다.

카레나는 한쪽씩 찾아다녔다.

말로 설득했다.

안 되면 밤새 싸웠다.

정말로 싸움을 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말싸움이었다.

물론 가끔 진짜 주먹도 나갔다.

안발룽의 회의는 원래 조용한 장소가 아니었다.

카레나는 말했다.

“물이 남는 해에는 네가 내준다.”

“가뭄이 네 쪽에 오면 우리가 준다.”

“가축이 너무 많아서 풀을 다 먹어치우면 일부는 다른 씨족에 넘긴다.”

“대신 다음에 네 떼가 병들면 저쪽에서 새끼를 준다.”

사람들은 물었다.

“왜 우리가 그래야 하지?”

카레나는 항상 비슷하게 대답했다.

“다음 가뭄이 누구 천막 위에 올지 아니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의 가장 강한 논리였다.


몇 년에 걸쳐 물과 가축의 공동분배 규칙이 만들어졌다.

완벽하지 않았다.

약속을 어기는 씨족도 있었다.

물의 양을 속이는 사람도 있었다.

밤에 몰래 가축을 빼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싸움은 여전히 일어났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가뭄이 오면 바로 창을 들기 전에 찾아갈 곳이 생겼다.

회의가 있었다.

서로에게 요구할 수 있는 몫이 있었다.

그리고 카레나는 그 과정에서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힘이 세서만은 아니었다.

자기 씨족에게 손해가 되는 결정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한번은 카레나의 씨족이 우연히 큰 물웅덩이를 먼저 발견했다.

사람들은 위치를 숨기자고 했다.

카레나는 그날 저녁 대모래맹약회의에 위치를 알렸다.

자기 씨족 사람이 따졌다.

“왜 우리가 찾은 걸 남한테 알려?”

카레나는 대답했다.

“찾은 건 우리지.”

그리고 물주머니를 들어 보였다.

“비 내린 건 우리가 아니잖아.”


그녀의 신념은 점점 분명해졌다.

강한 사람은 더 많이 가질 권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더 무거운 짐을 질 수 있는 사람이다.

물주머니를 하나 더 들 수 있다면,
자기 것 하나를 더 챙기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것을 대신 들어야 한다.

전투에서 버틸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안전한 곳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뒤에 남아야 한다.

먹을 것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풍족하다는 뜻보다 주변에 굶는 사람이 없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카레나는 그 생각을 거창한 철학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냥 당연하다고 여겼다.

한번은 젊은 전사가 훈련이 끝난 뒤 말했다.

“대족장, 아직 힘 남았습니다!”

카레나는 크게 웃었다.

“하핫!”

그리고 쓰러져 있는 다른 전사들을 가리켰다.

“힘이 남는다면 네 것이 아니야!”

전사가 눈을 깜빡였다.

카레나는 웃으며 소리쳤다.

“아직 쓰러진 사람이 있다는 뜻이라고!”

그 말은 이후 그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카레나가 대족장이 된 뒤,
그 원칙은 안발룽 전체의 정책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가뭄이 심한 지역에는 다른 씨족의 물과 가축을 보냈다.

전투로 남성 전사가 많이 죽은 씨족에는 다른 부족에서 노동력을 지원했다.

고아가 늘어난 씨족의 아이들은 여러 부족이 함께 먹였다.

카레나는 자신의 몫부터 줄였다.

회의에서 누군가 물었다.

“대족장 천막의 배급까지 줄일 필요가 있습니까?”

카레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내 배는 남의 배보다 크냐?”

“상징적인 문제입니다.”

“그럼 상징적으로 굶지 뭐.”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가 요구하는 희생은 가능한 한 먼저 자신에게 적용했다.

그래서 많은 씨족이 그녀를 따랐다.

문제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느 해,
남부의 한 씨족이 가축의 공동분배를 거부했다.

그들은 수년 동안 힘들게 떼를 늘렸다.

병든 가축을 골라내고,
새로운 방목지를 찾아 이동하며,
여러 차례 약탈까지 막아낸 결과였다.

그해 다른 지역에 심각한 가뭄이 찾아왔다.

맹약회의는 그 씨족에게 가축 일부를 내놓으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거부했다.

족장이 말했다.

“우리가 번 것이다.”

카레나는 대답했다.

“저쪽 애들은 굶고 있어.”

“그래서 우리 아이의 몫을 빼앗겠다는 건가?”

“네 씨족은 충분히 남는다.”

족장의 얼굴이 굳었다.

“그걸 누가 결정했지?”

카레나는 바로 대답하려 했다.

회의가 계산했다.

가축 수와 사료량을 확인했다.

저 씨족은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는 분명했다.

그런데 상대가 다시 말했다.

“지난겨울 우리가 가축을 지킬 때 다른 씨족이 대신 추위에 떨었나?”

“새끼를 낳다가 죽은 암컷을 네가 묻었나?”

“왜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제 네가 그 몫을 정하지?”

카레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결국 맹약회의는 분배를 강제했다.

카레나도 찬성했다.

그 가축 덕분에 가뭄 지역의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다.

결과만 보면 옳은 결정이었다.

카레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가축을 내놓은 씨족은 오랫동안 맹약회의를 원망했다.

그들에게 공동분배는 연대가 아니었다.

강한 중앙의 명령으로 자기 재산을 빼앗긴 일이었다.

한 젊은 목동이 카레나에게 말했다.

“대족장님은 가진 자가 나누어야 한다고 하죠.”

“그래.”

“싫다고 해도?”

카레나는 대답했다.

“사람이 죽는다면.”

목동은 다시 물었다.

“그럼 대족장님이 옳다고 생각하면 제 것은 언제든 가져가도 됩니까?”

그 질문은 카레나가 쉽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카레나는 힘이 있는 자의 책임을 믿었다.

그런데 자신은 이제 안발룽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과거의 그녀는 우물을 가진 강한 씨족이 약자에게 물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녀는 그 말을 강제로 실행할 수 있었다.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맹약을 통해 제재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말하는 책임과,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몫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은 어디에서 갈리는가.

카레나는 처음으로 그 질문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희생을 감당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굶을 수 있다.

자신은 목숨을 걸 수 있다.

자기 가축을 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씨족의 아이에게,
다른 사람의 부모에게,
다른 집안의 미래에게 같은 결정을 대신 내려도 되는가.

아직 완전한 답은 없다.


그래서 최근의 카레나는 분배를 결정할 때 이전보다 더 오래 묻는다.

얼마나 남는가.

누가 얼마나 내놓는가.

내놓은 뒤 그 씨족에는 어떤 위험이 생기는가.

그리고 당사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녀의 기본적인 결론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옆에서 사람이 죽는데 풍족한 씨족이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강제할 수도 있다.

다만 이제 그것을 선행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필요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한다.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결정이,
다른 사람에게는 명백한 강제가 될 수 있다.

둘 중 하나를 없는 일로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었다.


하지만 카레나가 더 어려워하는 문제는 따로 있다.

이빨연맹이었다.

안발룽의 거친 황야를 오가는 여러 전투집단 가운데,
이빨연맹은 특히 외부 세력과의 충돌이 잦았다.

델피로와 세레이온 국경의 인간 마을을 습격했다는 보고도 여러 차례 들어왔다.

가축을 빼앗았다.

저장식량을 가져갔다.

때로는 사람이 다쳤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대족장인 카레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즉시 전면적으로 제지하지 못했다.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이빨연맹의 전사들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카레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국경의 상단과 영주들에게 가축을 빼앗긴 경험이 있었다.

안발룽 부족민이라는 이유로 거래에서 속은 사람도 있었다.

국경선이 변경되면서 오래 이용하던 방목지를 잃은 씨족도 있었다.

마을 경비대와의 충돌로 가족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게 습격은 단순한 약탈만이 아니었다.

복수였다.

되찾기였다.

자신들을 먼저 밀어낸 사람들에게 치르게 하는 대가라고 생각했다.

카레나는 그 감정을 이해했다.

너무 잘 이해했다.

열일곱 살의 자신도 우물을 습격했기 때문이다.

동생이 죽었고,
상대에게 물이 있었고,
그래서 할버드를 들었다.

이빨연맹의 누군가가 말했다.

“대족장도 했잖아.”

카레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한 번은 이빨연맹 지휘관과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

카레나가 인간 마을 습격을 중단하라고 말했다.

상대는 웃었다.

“왜?”

“민간인까지 건드렸어.”

“우리 천막 불탔을 때 걔들은 민간인이었나?”

“저 마을 애들이 그 불 질렀냐?”

“우리 애들은?”

말이 막혔다.

지휘관은 계속했다.

“우리 가축 가져간 놈들은 국경 너머에서 보호받고 있어.”

“우리 방목지는 인간 영주의 땅이 됐고.”

“회의는 몇 년째 이야기만 하지.”

“우린 뭘 해야 하는데?”

카레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분노할 이유는 있었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고 해서 아무 마을이나 공격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려 했다.

그러다가 과거의 우물이 떠올랐다.

자기도 같은 논리로 사람을 죽였다.

입이 잠시 늦었다.

그 짧은 망설임을 상대는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습격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카레나는 제한 명령을 내렸다.

아이를 해치지 마라.

주거지를 불태우지 마라.

식량을 가져가더라도 겨울을 날 최소량은 남겨라.

스스로는 그것이 현실적인 통제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막으면 이빨연맹 일부가 맹약회의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면 통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적어도 안에서 규칙을 걸어두는 편이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어느 날 국경 마을의 피해 기록을 받아들었다.

죽은 사람.

다친 사람.

잃어버린 가축.

불탄 창고.

카레나는 기록을 한참 보았다.

그리고 불편한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습격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조금 덜 잔혹하게 만들려고 했을 뿐이었다.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그 차이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한 인간 상인이 회의석상에서 그녀에게 직접 말했다.

“대족장께서는 그들의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셨습니다.”

카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우리 아이는 누구에게 이해받습니까?”

카레나는 침묵했다.

남자의 가족은 습격으로 가게를 잃었다.

아이 하나가 크게 다쳤다.

그는 계속 말했다.

“그들도 피해자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피해자가 되어야 합니까?”

카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익숙한 질문이었다.

우물 반대편에 있던 아이들과 같았다.

누군가의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넘길 권리를 주는가.

열일곱 살의 카레나는 그렇다고 행동했다.

서른넷의 카레나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데 자신은 여전히 그 경계를 완전히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카레나는 이빨연맹 문제를 더 이상 남의 일처럼 다루지 않기 시작했다.

명령문 끝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어떤 습격을 금지할지 명확하게 했다.

그리고 어겼을 경우 책임을 묻겠다고 선언했다.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빨연맹 내부에서도 반발이 크다.

일부는 카레나가 인간 국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일부는 자기 동생들을 잃은 사람이 이제 와서 복수를 막는다고 비난한다.

카레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난다.

반박하고 싶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받아들인다.

자신의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한다.

“맞아.”

“나도 사람 죽이고 물 뺏었다.”

주변이 조용해진다.

카레나는 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게 어디까지 가는지 알아.”


카레나는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의 면죄부로 만들고 싶지 않다.

동시에 자기 과거를 지우고 도덕을 설교하는 대족장도 되고 싶지 않다.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자주 싸운다.

누군가 그녀에게 묻는다.

“그럼 복수하지 말라는 겁니까?”

카레나는 대답한다.

“아니.”

그리고 잠시 생각한다.

“복수하고 싶다는 건 이해해.”

“근데 네가 죽이고 싶은 놈이 진짜 네 원수인지는 보고 휘둘러.”

그 말은 과거의 자신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다.

열일곱 살의 카레나는 우물 앞의 전사를 적으로 봤다.

죽이고 나서야 그가 자신과 같은 누나와 형과 자식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봤다.

지금은 가능한 한 그 순서를 바꾸려고 한다.

먼저 본다.

그다음 필요하면 싸운다.


전투에 들어가면 카레나는 여전히 망설이지 않는다.

거대한 할버드를 들고 가장 앞에 선다.

방패벽이 있으면 정면으로 간다.

피할 수도 있다.

옆을 돌아갈 수도 있다.

카레나는 굳이 가장 두꺼운 곳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그곳을 무너뜨리면 뒤의 사람들이 덜 싸워도 되기 때문이다.

중량 건틀릿으로 방패를 때려 자세를 무너뜨리고,
할버드 자루로 틈을 벌린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진형 안에 들어간다.

누군가 그것을 무모하다고 말하면 웃는다.

“내가 버티잖아.”

“언제까지요?”

카레나는 크게 웃는다.

“너희 다 지나갈 때까지!”

그녀에게 선두는 명예로운 자리가 아니다.

가장 많이 맞을 수 있는 사람이 서야 하는 자리다.


부족 아이들에게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레나는 아이 앞에서 목소리를 낮춘다.

무서워하는 아이에게는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다.

자기 팔에 난 흉터를 보고 겁먹는 아이가 있으면 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킨다.

“이건 염소한테 박힌 거야.”

아이가 눈을 크게 뜬다.

“진짜요?”

“거짓말.”

“대족장님!”

그제야 웃는다.

아이들이 배급줄에서 자기 몫을 양보하려 하면 오히려 혼낸다.

“네가 왜 양보해.”

“대족장님 드리려고...”

“난 커서 굶어도 오래 버텨.”

그리고 아이의 그릇을 다시 채운다.

“넌 커야 되니까 먹어.”

그녀의 분배 원칙은 언제나 그런 곳에서 시작한다.

더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버티는 것.


하지만 카레나는 점점 알게 되었다.

자기가 버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강한 사람도 반드시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남에게 몸을 던지라고 명령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자기 가축을 나누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다.

남의 가축을 가져가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 차이를 모른다면,
‘강한 자의 책임’이라는 신념은 아주 쉽게 새로운 강자의 명령이 될 수 있다.

카레나는 아직 그 위험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다.

급한 상황에서는 지금도 결정부터 내리는 편이다.

“저쪽으로 물 보내.”

“가축 삼백 마리 내.”

“전사 오십 명 지원해.”

그리고 나중에야 사람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듣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자기 방식이 정말 과거와 달라졌는지 묻게 된다.

열일곱 살의 자신은 힘으로 우물을 빼앗았다.

지금의 자신은 회의와 맹약의 이름으로 몫을 가져간다.

목적이 다르다고 해서 방식의 폭력성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카레나는 요즘 한 가지를 부하들에게 반복해서 말한다.

“내가 명령했다고 끝난 거 아니다.”

누군가 묻는다.

“무슨 뜻입니까?”

“내 명령 때문에 누가 손해 봤는지 나한테 가져와.”

“불만도요?”

“특히 불만.”

부하가 웃으며 말했다.

“대족장님 욕한 것도 보고해야 합니까?”

카레나도 웃었다.

“그건 이름까지 적어.”

잠깐 뒤 덧붙였다.

“잘한 욕이면 내가 술 산다.”

그녀는 자기 결정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않으려 한다.

성공하면 부하들이 잘한 것이다.

실패하면 자신이 명령했다.

그 원칙만큼은 확고하다.

하지만 책임을 진다는 말이 언제나 잘못된 결정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조금씩 배우고 있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로 타인의 희생을 쉽게 결정하기 시작한다면,
그것 역시 위험한 힘이 될 수 있다.


카레나는 가끔 열일곱 살 때 죽인 전사의 무덤을 찾아간다.

상대 씨족의 묘역이라 자주 가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녀를 싫어했다.

지금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 무덤 앞에서 카레나는 사과를 반복하지 않는다.

이미 했다.

죽은 사람에게 계속 사과한다고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대신 가끔 물 한 그릇을 놓는다.

안발룽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무거운 제물이다.

그리고 잠시 앉아 있다가 돌아간다.

그 남자의 얼굴은 이제 기억이 흐릿하다.

하지만 허리에 달려 있던 작은 나무장식은 아직 기억한다.

우물 반대편에도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물건.

카레나가 대족장이 된 지금까지도 놓지 못한 기억이다.


현재의 카레나는 안발룽에서 가장 강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할버드를 잘 쓰는 것도,
다른 사람보다 오래 버티는 것도,
전투에서 앞줄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좋아한다.

다만 이제 힘을 가지는 이유를 다르게 생각한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버틸 수 있기 위해서다.

누군가 쓰러지면 짐을 들어준다.

가뭄이 오면 자기 몫부터 줄인다.

전쟁이 나면 가장 앞으로 간다.

자신의 명령이 실패하면 이름을 숨기지 않는다.

그것이 카레나가 생각하는 강함이다.


그러나 앞으로 그녀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더 어렵다.

강한 사람이 더 많은 짐을 져야 한다면,
누가 강한 사람인지 누가 정하는가.

얼마나 내놓을 수 있는지도 누가 정하는가.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해 개인의 것을 가져갈 수 있다면,
그 한계는 어디인가.

그리고 피해를 입은 사람이 복수를 원할 때,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과 그 행동을 허용하는 것은 어디에서 갈라져야 하는가.

카레나는 아직 이빨연맹의 문제에 완전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들의 분노를 안다.

그래서 함부로 악인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우물 반대편의 아이를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자기편의 고통만 보고 끝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 카레나가 앞으로 가장 힘들게 내려야 할 명령은 적진으로 돌격하라는 명령이 아닐 것이다.

자신과 함께 싸워온 사람들에게 멈추라고 말하는 명령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분노로 죄 없는 사람을 해칠 권리는 없다고 선언하는 것.

그리고 그 명령 때문에 자기 편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물러서지 않는 것.


카레나는 아직 거기까지 완전히 가지 못했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은 있다.

이제는 자신이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망설임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잘못된 선택을 한 뒤 고개를 숙이는 것만이 아니다.

결정해야 할 순간에 결정하는 것 역시 책임이다.

카레나는 그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대모래맹약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돌아간 뒤에도 가끔 혼자 남는다.

지도 위의 우물들을 본다.

씨족들의 이동로를 본다.

국경의 인간 마을도 본다.

예전 같았다면 자기 사람을 먼저 찾았을 것이다.

지금은 지도 반대편도 함께 본다.

그곳에도 누군가의 동생이 있을 테니까.

누군가의 아이가 있을 테니까.

누군가가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다음 날이 되면 다시 거대한 할버드를 들어 어깨에 올린다.

사람들이 쓰러져 있으면 가장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민다.

“일어나.”

누군가 힘들다고 투덜거리면 크게 웃는다.

“하핫! 힘이 남는다면 네 것이 아니야!”

그리고 직접 가장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린다.

“아직 쓰러진 사람이 있다는 뜻이라고!”

그것이 카레나 벼락걸음이 믿는 강함이다.

다만 이제 그녀가 배우고 있는 것은,
짐을 대신 들어주는 것과 남의 짐을 마음대로 정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 경계를 지키지 못한다면,
약자를 위해 휘두른 힘도 언젠가는 다시 우물을 빼앗던 열일곱 살의 할버드와 닮아갈 수 있다.

카레나는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누구보다 힘을 믿으면서도,
자신의 힘부터 가장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BRU
바루 바위주먹
안발룽대모래맹약회의-부의장
“좋은 날의 약속은 필요 없다. 나쁜 날에도 지켜질 약속을 만들어라.”
🩸 HP300
💪 공격력50
🧙 마법력5
✨ 신비력1
🛡️ 방어력60
🔗 항마력10
😖 신비저항30
🏃 회피력45
과거 보기
바루 바위주먹의 이야기는 깨진 약속 하나에서 시작된다.

정확히는,
종이에 적혀 있었고,
양쪽 대표가 도장을 찍었으며,
여러 사람이 증인으로 지켜보았는데도 깨질 수 있었던 약속에서 시작되었다.

그 일이 있기 전의 바루도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크 씨족에서는 말 한마디의 무게가 컸다.

누군가 사냥에 함께 가겠다고 하면 함께 갔다.

가축을 지켜주겠다고 했다면 밤새 잠들지 않았다.

물을 나누겠다고 약속했다면 자기 몫이 줄어도 지켰다.

바루에게 약속이란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한다고 했으면 한다.

안 할 거라면 처음부터 말하지 않는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약속이라면 오히려 더 무거울 것이라고 믿었다.

개인이 목숨을 걸고 지키는 말을,
수많은 사람을 다스리는 자들이 가볍게 다룰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안발룽 남동부에는 큰 가뭄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물 몇 곳이 말랐고,
가축의 수가 빠르게 줄었다.

안발룽 안에서 가능한 분배는 이미 시작된 뒤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곡물이 필요했다.

남쪽 황야에서 넉넉한 곡물을 한꺼번에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대모래맹약회의는 세레이온과 협상을 시작했다.

생명교황국은 비옥한 평야와 강의 하류를 가지고 있었다.

곡물 생산량도 안발룽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대신 안발룽은 가죽과 광물,
사막을 지나는 안전한 남부 교역로를 제공할 수 있었다.

양쪽 모두 얻을 것이 있는 거래였다.

바루는 당시 사절단을 호위하는 전사였다.

말이 많지 않았고,
협상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맡은 일은 단순했다.

사절을 목적지까지 지킨다.

곡물을 가져온다.

무사히 돌아간다.

바루는 그런 명확한 일을 좋아했다.


협상에는 시간이 걸렸다.

곡물의 양.

가격.

운송 시기.

국경을 통과할 수레 수.

안발룽 측이 제공할 가죽과 광물의 양.

그리고 안전보장.

양쪽은 여러 번 문서를 고쳤다.

바루는 회의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문 앞에서 기다렸다.

며칠 동안 같은 사람들이 들어갔다 나왔다.

어느 날 사절이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됐다.”

바루가 물었다.

“확실한가.”

“서명까지 끝났다.”

“누가.”

사절은 세레이온 지방관의 이름을 말했다.

교황국 측 관리들의 서명도 있었다.

안발룽 대표의 인장도 찍혀 있었다.

바루는 문서를 직접 보았다.

글을 빠르게 읽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중요한 부분은 끝까지 확인했다.

첫 번째 곡물수레가 도착할 날짜.

교환 물자의 양.

국경 통행 허가.

양쪽 사절의 안전보장.

분명했다.

바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 만들어졌다.

이제 지키면 되는 일이었다.


첫 번째 교역은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곡물수레가 안발룽으로 들어왔다.

가뭄 지역으로 곡물이 분배되었다.

바루는 아이들이 처음으로 배를 채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 기억을 오래 간직했다.

어떤 아이는 빵을 너무 급하게 먹다가 목이 막혔다.

바루가 물통을 건넸다.

아이의 어머니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바루는 말했다.

“우리 것이 아니다.”

여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바루는 곡물자루를 가리켰다.

“값을 치렀다.”

그에게 그것은 시혜가 아니었다.

정당한 교환이었다.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몇 차례만 더 거래하면 가장 어려운 계절을 넘길 수 있었다.

바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두 번째 교역을 준비하던 중 세레이온의 지방관이 교체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방관이 바뀌어도 이미 체결한 협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발룽의 사절단은 약속된 날짜에 출발했다.

곡물의 대가로 넘길 광물과 가죽을 실었다.

바루도 함께 갔다.

국경 검문소에 도착했을 때 처음 이상함을 느꼈다.

경비병들이 그들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사절이 문서를 내밀었다.

“통행협정이 있습니다.”

경비대장은 문서를 오래 읽었다.

그리고 말했다.

“이건 전임 지방관의 인장입니다.”

사절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현재는 효력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바루는 그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했다.

“서명했다.”

경비대장이 그를 바라보았다.

바루는 문서를 가리켰다.

“너희가.”

“전임 지방관이 했습니다.”

“세레이온이 했다.”

경비대장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새 지방관의 확인이 필요했다.

사절단은 기다렸다.


확인은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안발룽에서는 곡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절단은 계속 항의했다.

세레이온 측에서는 다시 심사해야 한다는 답이 왔다.

전임 지방관이 지나치게 유리한 조건을 안발룽에 제공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일부 관리들은 협정을 재협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루는 그 말을 들을수록 표정이 굳었다.

“이미 했다.”

사절이 한숨을 쉬었다.

“나도 알아.”

“그런데 왜 다시 하지.”

“사람이 바뀌었으니까.”

바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문장을 이해하려고 했다.

사람이 바뀌었다.

그래서 약속도 바뀐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와 약속한 것인가.

세레이온인가.

아니면 그날 책상 반대편에 앉아 있던 한 인간인가.

바루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사절단은 국경 인근에서 대기할 수 없게 되자 다른 관문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협정문 원본을 가지고 있었다.

물자도 그대로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허가된 교역 사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로운 지방행정기관에서 관련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국경의 작은 마을에는 다른 이야기가 먼저 도착했다.

무장한 오크들이 대규모 물자를 끌고 세레이온 안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안발룽 약탈대일 가능성이 있다.

마을 경비대가 동원되었다.

사절단이 그들을 발견했을 때 양쪽 모두 긴장해 있었다.

바루는 앞에 나섰다.

손은 모닝스타에서 떨어뜨렸다.

사절이 문서를 들었다.

“우리는 대모래맹약회의의 공식 사절입니다.”

누군가 외쳤다.

“무기를 버려라!”

사절이 대답했다.

“공식 협정이 있습니다!”

서로의 말이 제대로 닿지 않았다.

그리고 뒤쪽에서 말 한 마리가 놀랐다.

수레가 흔들렸다.

경비병 하나가 그것을 돌진의 시작으로 착각했다.

화살이 날아왔다.


첫 번째 화살은 바루의 어깨에 맞았다.

가죽갑옷에 박혔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바루는 모닝스타를 들지 않았다.

대신 크게 외쳤다.

“멈춰.”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사절 한 명이 쓰러졌다.

그 순간 안발룽 호위대에서도 무기가 올라갔다.

바루가 뒤를 향해 말했다.

“내려.”

호위전사가 소리쳤다.

“우릴 죽이고 있습니다!”

“내려.”

바루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를 아는 전사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바루는 사절들 앞에 섰다.

몸으로 화살길을 막았다.

방패는 없었다.

그래도 거대한 체격만으로 여러 사람을 가릴 수 있었다.

세 번째 화살이 모피 어깨보호대에 박혔다.

네 번째는 빗나갔다.

그리고 한 경비병이 가까이 달려들었다.

바루는 모닝스타를 사용하지 않았다.

건틀릿 낀 손으로 창대를 붙잡았다.

비틀어 빼앗았다.

창을 바닥에 던졌다.

“싸우러 온 것 아니다.”

그때 다른 쪽에서 날아온 창끝이 바루의 얼굴을 스쳤다.

오른눈을 가로질렀다.

세상이 절반만 남았다.


바루는 쓰러지지 않았다.

피가 얼굴을 덮었다.

오른쪽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사절 앞에 섰다.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붙잡았다.

“바루!”

그가 짧게 말했다.

“문서.”

사절은 피 묻은 협정문을 다시 들었다.

“우리는 사절이다!”

이번에는 세레이온 경비대 안에서도 누군가 이상함을 느꼈다.

약탈자라면 왜 반격하지 않는가.

왜 물자수레를 버리지 않는가.

왜 계속 문서를 보여주려 하는가.

한 성직자가 달려와 경비대장에게 공격을 멈추라고 외쳤다.

상황은 그제야 가라앉았다.

몇 분이었다.

그 몇 분 동안 사람 셋이 죽었다.

여러 명이 다쳤다.

그리고 바루는 오른눈을 잃었다.


오해였다는 사실은 금방 밝혀졌다.

사절단은 정말 공식 사절이었다.

협정도 실제로 존재했다.

전임 지방관의 서명 역시 위조가 아니었다.

세레이온 측은 사과했다.

공격을 명령한 책임자를 조사하겠다고 했다.

치료비와 피해보상도 제시했다.

바루는 치료를 받으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붕대로 가린 오른눈이 욱신거렸다.

사절단 대표가 물었다.

“뭐라고 답할까.”

바루는 잠시 생각했다.

“곡물.”

“뭐?”

“곡물부터.”

가뭄 지역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과가 그들의 배를 채워주지는 않았다.

결국 일부 곡물은 뒤늦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원래 약속했던 양보다 적었고,
시기도 늦었다.

안발룽에서는 더 많은 가축을 도축해야 했다.

몇몇 씨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죽은 사람도 있었다.

누구 하나가 처음부터 그들을 굶기려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 바뀌었고,
행정이 끊겼고,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고,
경비대가 잘못 판단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죽었다.


바루는 그 사건 이후 오랫동안 한 가지를 생각했다.

약속이 왜 실패했는가.

세레이온의 사절이 거짓말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임 지방관도 당시에는 협정을 지킬 생각이었을 것이다.

경비병들 역시 안발룽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일부러 거짓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좋은 사람도 있었다.

사과도 진심이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약속이 사람의 선의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지방관이 있는 동안에는 유지된다.

사정을 아는 경비대장이 있는 동안에는 안전하다.

양쪽이 서로 친절한 동안에는 문제가 없다.

바루에게 그런 약속은 더 이상 약속이 아니었다.

운이 좋은 날에만 작동하는 희망에 가까웠다.


그 뒤부터 바루는 협정을 볼 때 내용보다 먼저 실패했을 때를 확인했다.

누가 책임지는가.

지휘관이 바뀌어도 유지되는가.

협정문은 어느 기관에 보관되는가.

국경의 말단 경비에게도 전달되는가.

한쪽이 약속을 어기면 다른 쪽은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가.

보상은 있는가.

중재자는 누구인가.

누군가 말했다.

“서로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바루가 대답했다.

“안 된다.”

“왜요?”

“믿는 사람도 바뀐다.”

그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사람은 죽는다.

자리를 떠난다.

마음이 바뀐다.

후임자는 전임자의 생각을 공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어서는 안 되었다.

좋은 사람이 사라져도 남아 있는 구조여야 했다.


바루가 대모래맹약회의에서 영향력을 얻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는 화려한 연설을 하지 않았다.

회의에서도 필요한 말만 했다.

누군가 새로운 맹약을 제안하면 다른 사람들은 이익을 이야기했다.

바루는 물었다.

“어기면.”

제안자가 눈을 깜빡였다.

“예?”

“어기면 어떻게 하지.”

그 질문 하나 때문에 회의가 몇 시간 더 길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답답해했다.

합의가 잘되고 있는데 왜 배신부터 이야기하느냐고 했다.

바루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맹약이 가장 필요 없는 순간은 모두가 기분 좋을 때였다.

물이 충분하다.

곡물이 많다.

싸울 이유가 없다.

그런 날에는 종이 한 장 없어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

문제는 가뭄이 오는 날이었다.

전쟁이 나는 날.

가축이 죽는 날.

약속을 지키는 것이 손해가 되는 날.

바루는 말했다.

“좋은 날의 약속은 필요 없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나쁜 날에도 지켜질 약속을 만들어라.”


그래서 바루가 관여한 맹약에는 항상 뒤쪽이 길었다.

약속을 지키는 방법보다,
약속이 깨졌을 때의 절차가 더 자세한 경우도 있었다.

첫 번째 위반.

재협상 기한.

보상.

중재 씨족.

반복 위반 시 교역 제한.

무력충돌이 발생했을 때의 책임자.

사절단 안전보장.

특히 마지막 항목은 바루가 직접 확인했다.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부의장님, 사절 안전조항만 세 번 확인하셨습니다.”

바루는 오른눈을 가로지른 흉터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부족했다.”

그 뒤에는 아무도 농담하지 않았다.


바루는 선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약속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실제로 있다는 것도 안다.

문제는 평화 전체를 그것에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도 친구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친구의 후임자까지 같은 마음일지는 알 수 없다.

오늘의 왕이 약속을 지킬 수도 있다.

다음 왕은 아닐 수 있다.

그래서 바루에게 평화는 감정이 아니다.

구조다.

배신하지 않기를 바라는 상태가 아니라,
배신이 너무 큰 손해가 되도록 서로를 묶어놓는 상태다.

교역.

인질이 아닌 상호보증.

공동 우물.

연결된 이동로.

위반 시 보상.

그리고 마지막에는 서로가 함부로 싸움을 시작할 수 없게 만드는 힘.

바루는 그것들을 평화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불신이라고 부른다.

바루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

그 정도만 말한다.

그에게 적당한 불신은 전쟁보다 싸다.


그의 전투 방식도 비슷하다.

바루는 빠른 전사가 아니다.

화려하지도 않다.

거대한 모닝스타를 들고,
두꺼운 가죽갑옷과 모피를 걸친 채 천천히 앞으로 간다.

적의 방패가 있으면 부순다.

진형이 있으면 체중을 실어 밀어낸다.

하지만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은 공격보다 버티는 일이다.

뒤에 부상자가 있으면 길목을 막는다.

아군이 후퇴해야 하면 마지막까지 남는다.

좁은 통로에서는 거대한 몸 자체가 성벽이 된다.

누군가 묻는다.

“언제까지 버팁니까?”

바루는 대답한다.

“다 빠질 때까지.”

그 뒤에는 말이 없다.

실제로 그렇게 한다.

바루에게 약속은 선언이 아니라 위치다.

지키겠다고 했으면,
위험이 왔을 때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카레나 벼락걸음이 대족장이 된 뒤 바루는 그녀를 높이 평가했다.

카레나는 강했다.

하지만 그보다 바루가 중요하게 본 것은 책임을 피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명령이 실패하면 부하를 앞세우지 않았다.

자기가 내린 명령이라고 말했다.

자기 씨족의 몫도 필요하면 나눴다.

앞에 서야 할 때는 정말 앞에 섰다.

바루는 그런 행동을 오랫동안 봤다.

그래서 그녀를 인정했다.

누군가 물었다.

“대족장을 믿습니까?”

바루는 말했다.

“믿는다.”

바루에게는 상당히 큰 말이었다.

하지만 믿는다는 것이 모든 판단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바루는 더 거칠게 반대했다.


특히 이빨연맹 문제에서 그랬다.

인간 마을을 향한 습격이 반복되었다.

카레나는 그들의 사정을 이해했다.

과거에 빼앗긴 방목지.

가축.

죽은 가족.

무시된 항의.

바루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분노에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루의 결론은 카레나보다 빨랐다.

“막아야 한다.”

카레나가 말했다.

“알아.”

“그럼 막아.”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바루는 그녀를 바라봤다.

“단순하다.”

카레나의 얼굴이 굳었다.

“저놈들한테 왜 저러는지 들어봤어?”

“들었다.”

“그럼 알잖아.”

“안다.”

바루는 천천히 말했다.

“이유가 있다.”

잠시 뒤 덧붙였다.

“허락은 아니다.”


카레나는 그런 바루를 답답해할 때가 있다.

사람의 분노를 문서 한 장으로 막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루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결정을 늦추는 것 역시 결정이라고 본다.

금지하지 않은 습격은 계속된다.

책임을 묻지 않은 위반은 다음 위반을 쉽게 만든다.

애매한 경계는 결국 각자가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한다.

그것이 과거 세레이온에서 자신이 겪은 일이었다.

전임 지방관의 약속.

후임 지방관의 해석.

경비대의 오인.

누구도 처음부터 사절을 죽이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도 제때 막지 않았다.

바루에게 모호함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다.

사람이 죽는 공간이다.

그래서 카레나가 오래 고민하면 낮게 말한다.

“정해.”

카레나는 짜증을 낸다.

“생각 중이야.”

“알아.”

“알면 좀 기다려.”

바루는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 말한다.

“죽는 쪽도 기다리면.”

카레나는 그 말에는 쉽게 화내지 못한다.


그러나 바루 역시 자신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평화를 지키려면 배신의 대가가 명확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대가를 실제로 부과할 힘도 있어야 한다.

말뿐인 제재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바루는 맹약회의의 호위전력을 강화하는 데 찬성했다.

공동수송대를 만들었다.

사절을 보호할 무장대를 늘렸다.

국경에 감시초소를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상대 국가가 협정을 어겼을 때 교역로를 통제할 수단도 마련하려 했다.

바루에게는 모두 방어였다.

다시는 무방비한 사절단이 약탈자로 오인받아 죽지 않도록 만드는 장치였다.

하지만 국경 반대편에서 보는 모습은 달랐다.

안발룽이 병력을 늘린다.

무장한 수송대가 움직인다.

감시초소가 세워진다.

교역로 차단 훈련을 한다.

세레이온의 일부 지방관들은 그것을 침공 준비라고 해석했다.


한번은 세레이온 사절이 바루에게 직접 물었다.

“평화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런데 왜 국경 병력을 늘립니까?”

바루는 대답했다.

“평화를 지키려고.”

사절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쪽에서는 위협으로 보입니다.”

바루는 잠시 침묵했다.

“공격할 생각 없다.”

“그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 질문에 바루는 곧바로 답하려다가 멈췄다.

너무 익숙한 질문이었다.

자신이 평생 다른 사람에게 묻던 질문이었다.

선의를 믿을 수 있는가.

말을 믿을 수 있는가.

바루 자신은 아니라고 답해왔다.

그렇다면 세레이온 역시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자신에게는 방패인 것이,
상대에게는 휘두르기 직전의 무기로 보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바루는 군사력만으로 억지력을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더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힘이 너무 약하면 약속을 강제할 수 없다.

힘이 너무 강해 보이면 상대는 먼저 공격해야 안전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단순한 무력이 아니었다.

무력이 어떻게 사용될지를 묶는 약속까지 필요했다.

바루는 공동감시를 제안했다.

양쪽 사절이 초소를 방문할 수 있게 했다.

훈련 일정 일부를 사전에 공유했다.

수송호위대의 인원과 이동구간을 문서로 남겼다.

일부 안발룽 전사들은 불만을 품었다.

“왜 우리 병력 숫자를 저쪽에 알려줍니까?”

바루는 말했다.

“모르면 더 크게 생각한다.”

“저들이 악용하면요?”

“그것도 약속에 넣는다.”

바루다운 해결 방식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약속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생기는 경우까지 약속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 태도 때문에 바루의 맹약은 복잡하다.

하지만 한번 맺으면 오래간다.

그는 좋은 관계를 만들기보다 나쁜 관계에서도 버틸 수 있는 구조를 만들려고 한다.

상대를 좋아하지 않아도 지킬 수 있는 약속.

서로 의심해도 유지되는 교역.

지도자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 규칙.

분쟁이 발생해도 곧바로 무기를 들지 않게 만드는 절차.

바루에게 그것이 평화다.

서로 사랑하는 상태가 아니다.

서로를 배신하지 않을 이유가 충분한 상태다.

누군가는 너무 차갑다고 말한다.

바루는 대답한다.

“살아 있으면 좋아할 시간 있다.”

그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


오른눈의 흉터는 지금도 남아 있다.

바루는 안대를 쓰지 않는다.

완전히 보이지 않는 눈 위로 긴 상처가 지나간다.

아이들이 처음 보면 무서워할 때가 있다.

바루는 그런 아이들에게만 목소리를 조금 부드럽게 한다.

한 아이가 물었다.

“눈은 어떻게 됐어요?”

바루는 말했다.

“약속이 약해서.”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옆의 어른도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바루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필요한 사람은 언젠가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약자에게도 바루는 특별히 친절한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대신 행동한다.

배급줄에서 밀려난 아이가 있으면 앞으로 보낸다.

지친 노인이 짐을 들고 있으면 말없이 받아 든다.

전투에서 젊은 병사가 겁먹으면 용기를 내라는 연설을 하지 않는다.

그 앞에 선다.

“뒤에 있어.”

그게 전부다.

누군가 고맙다고 하면 고개만 끄덕인다.

바루는 자신이 약자를 특별히 불쌍히 여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힘이 있는 사람이 앞에 서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는 카레나와 꽤 닮아 있다.

그래서 둘은 자주 부딪치면서도 서로를 존중한다.

카레나는 힘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은 짐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바루도 동의한다.

다만 바루는 거기에 하나를 더 붙인다.

그 책임도 약속으로 묶어야 한다.

좋은 대족장이 있는 동안만 작동하는 제도라면 충분하지 않다.

카레나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야 한다.


한번은 둘이 늦은 밤까지 회의장에 남아 있었던 적이 있었다.

카레나는 지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할 수 있어.”

바루가 즉시 말했다.

“그게 문제다.”

카레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나 죽으라는 얘기냐?”

“아니다.”

“말이 왜 그렇게 들리는데.”

바루는 탁자 위의 맹약문을 가리켰다.

“네가 없어도 돌아가야 한다.”

카레나는 한동안 문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가끔 보면 넌 사람보다 종이를 더 믿는 것 같아.”

바루는 고개를 저었다.

“종이도 안 믿는다.”

카레나가 웃음을 멈췄다.

바루가 말했다.

“지킬 방법을 믿는다.”

그것이 바루라는 사람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종이에 적힌 문장만으로 평화가 유지된다고 믿지 않는다.

사람이 지켜야 한다.

그리고 사람이 지키지 않을 때도 다음 단계가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바루는 자신의 약속부터 그렇게 다룬다.

한번 말했다면 상황이 나빠졌다고 취소하지 않는다.

비가 오지 않아도.

상대가 싫어져도.

자기에게 손해가 되어도.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그에게 확답을 재촉하면 오래 침묵하는 경우가 있다.

상대가 답답해한다.

“한다고 하실 겁니까, 아닙니까?”

바루는 끝까지 생각한다.

그리고 한번 대답하면 바꾸지 않는다.

“한다.”

그 말이 나오면 주변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바루가 살아 있는 한 지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루 자신의 또 다른 약점이기도 하다.

한번 한 약속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인다.

상황이 변해도 쉽게 수정하지 않는다.

약속을 바꾸어야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경우에도,
먼저 약속을 지킬 방법부터 찾는다.

누군가는 그것을 신뢰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완고함이라고 부른다.

둘 다 맞다.

바루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쉽게 고치지 못한다.

자신의 오른눈을 가져간 사건이,
‘상황이 바뀌었다’는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정이 달라졌다는 말은 언제나 위험하게 들린다.

그래서 새로운 사정이 생기면 약속을 없애기보다 다시 모두를 불러 수정하자고 한다.

몰래 바꾸지 않는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무효라고 선언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약속을 바꾸는 것 역시 약속으로 해야 한다고 믿는다.


현재의 바루는 대모래맹약회의의 부의장이다.

회의석상에서 가장 말을 적게 하는 사람 중 하나다.

다른 사람들이 한참 논쟁하는 동안 팔짱을 끼고 듣는다.

카레나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 기다린다.

어느 정도까지는.

그리고 정말 필요한 순간이 오면 낮게 말한다.

“정해.”

카레나는 그 한마디가 싫을 때가 많다.

하지만 무시하지는 않는다.

바루가 결정을 서두르는 이유가 조급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정되지 않은 경계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본 사람.

누가 책임지는지 정해지지 않은 약속 때문에 눈 하나를 잃은 사람.

그에게 미정이라는 말은 중립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 틈에서는 가장 먼저 약한 사람이 대가를 치른다.


바루가 앞으로 풀어야 할 문제 역시 그가 가장 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경계를 분명하게 만든다.

무력을 준비한다.

배신의 대가를 정한다.

그 모든 것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다.

하지만 상대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세레이온이 국경 병력을 늘린다.

바루는 위협이라고 느낀다.

안발룽이 호위대를 늘린다.

세레이온도 위협이라고 느낀다.

서로 평화를 지키기 위해 방패를 들다가,
어느 순간 양쪽 모두 상대가 칼을 뽑으려 한다고 믿게 될 수 있다.

바루는 이제 그 위험을 알고 있다.

그래서 힘만 늘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그 힘의 용도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오해가 생겼을 때 바로 이야기할 통로가 있어야 한다.

누가 자리를 떠나도 기록이 남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약속이 깨졌을 때 곧바로 피로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중간 단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바루가 만들고 싶은 평화다.

믿어서 무기를 버리는 평화가 아니다.

서로 무기를 가지고도 함부로 사용할 이유가 없는 평화.

지도자가 바뀌어도 유지되는 평화.

서로가 기분 나쁜 날에도 작동하는 평화.


바루는 아직 세레이온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아마 쉽게 신뢰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증오하지도 않는다.

자신을 치료한 사람도 세레이온 사람이었다.

공격을 멈추게 한 성직자도 그곳의 사람이었다.

깨진 협정을 다시 복구하려고 노력한 관리들도 있었다.

그에게 문제는 어느 종족이나 나라가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다.

좋은 사람이 없어도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가.

그것이 더 중요하다.

바루는 선한 사람을 환영한다.

다만 평화를 그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다.


가끔 젊은 맹약회의 의원들이 그에게 묻는다.

“부의장님은 사람을 그렇게 못 믿습니까?”

바루는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대답한다.

“사람은 믿는다.”

상대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바루는 오른눈의 흉터를 한 번 만진다.

“영원히 같을 거라고는 안 믿는다.”

사람은 변한다.

그래서 약속도 그 변화를 견뎌야 한다.

맑은 날의 우정이 아니라,
가뭄과 패배와 분노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

바루는 지금도 새로운 맹약문을 받을 때마다 가장 먼저 마지막 장을 펼친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무엇을 얻는지는 나중에 본다.

누군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먼저 본다.

그 부분이 비어 있으면 문서를 덮는다.

그리고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한다.

“다시 써.”

누군가 이유를 물으면 단 한 번 설명한다.

“좋은 날의 약속은 필요 없다.”

그의 하나 남은 눈이 상대를 똑바로 바라본다.

“나쁜 날에도 지켜질 약속을 만들어라.”

바루에게 평화란 믿음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날에도 사람들이 죽지 않도록 만들어놓은 상태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그 상태를 만들기 위해,
문서와 무기 사이의 정확한 거리를 찾고 있다.


이빨연맹2명
NZR
나자르 물결바람
안발룽이빨연맹-연맹장
“우리가 훔쳤다는 건 안다. 다른 선택을 남겼다면 보여줘라.”
🩸 HP220
💪 공격력65
🧙 마법력20
✨ 신비력1
🛡️ 방어력50
🔗 항마력30
😖 신비저항55
🏃 회피력80
과거 보기
나자르 물결바람의 이야기는 서류가 물과 식량보다 늦게 도착했던 어느 가뭄에서 시작된다.

안발룽의 리자드맨들에게 둥지형제라는 말은 꼭 같은 피를 타고났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에 같은 둥지터에서 자라고,
같은 어른들에게 사냥과 길 찾기를 배우며,
같은 물항아리를 나누어 마신 아이들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나자르에게는 그런 둥지형제들이 있었다.

열셋.

어린 시절에는 누가 친형제이고 누가 사촌이며 누가 다른 집 아이인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같이 모래 위를 뛰었다.

도마뱀을 잡았다.

물웅덩이에 먼저 뛰어든 놈을 다 같이 욕했고,
먹을 것이 부족하면 가장 작은 조각까지 나누었다.

싸움도 자주 했다.

나자르는 특히 많이 싸웠다.

성격이 급했다.

누군가 말을 빙빙 돌리면 참지 못했다.

주먹질이 끝난 뒤에는 오래 원한을 품지도 않았다.

어제 서로 피가 나도록 싸운 녀석과 오늘 같은 그릇에서 고기를 먹었다.

그에게 싸움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지,
관계를 영원히 끝내는 의식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린 나자르는 세상도 대체로 그렇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있으면 말한다.

말해서 안 되면 싸운다.

끝나면 끝난다.

복잡할 이유가 없었다.


그 생각이 처음 무너진 것은 스물한 살 무렵이었다.

남부 황야에 긴 가뭄이 찾아왔다.

비가 오지 않았다.

작은 오아시스부터 바닥을 드러냈다.

가축이 먼저 죽었다.

그다음에는 병든 노인들이 쓰러졌다.

나자르의 씨족은 몇 번이나 이동했다.

다른 씨족과 물을 교환했다.

남아 있던 가죽을 팔았다.

무기 하나까지 곡물과 바꾸었다.

그래도 모자랐다.

하루 두 끼가 한 끼가 되었다.

한 끼가 반 끼가 되었다.

둥지형제들의 몸에서도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느려졌다.

비늘의 광택이 사라졌다.

말수가 줄었다.

가장 어린 녀석 하나가 고기를 먹다가 갑자기 말했다.

“나 배 안 고파.”

나자르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남은 고기를 그 녀석 입에 밀어 넣었다.

“거짓말하지 마.”

“진짜인데.”

“배고픈 놈들이 마지막에 하는 거짓말이 그거야.”

아이는 싫다고 했지만 결국 먹었다.

나자르는 그날 자기 몫을 먹지 않았다.


씨족 회의에서는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북쪽으로 이동하면 다른 씨족과 우물을 놓고 충돌해야 했다.

서쪽은 이미 말라 있었다.

남쪽에는 더 거친 황야뿐이었다.

동쪽에는 세레이온이 있었다.

강과 평야.

곡물창고.

안발룽 사람들이 보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식량이 있는 땅이었다.

씨족장은 세레이온에 구호를 요청하기로 했다.

곡물을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 계절의 노동권과 광물채굴권 일부를 대가로 내놓겠다고 했다.

가축이 회복되면 갚겠다고도 했다.

나자르는 사절단에 자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빨리 가져오고 싶었다.

둥지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레이온 국경에 도착한 날,
나자르는 처음에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비병들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성직자도 이야기를 들었다.

구호 담당 관리도 나왔다.

모두 비교적 친절했다.

씨족장이 보낸 문서를 내밀었다.

관리는 읽었다.

그리고 물었다.

“씨족 등록 증명이 있습니까?”

나자르가 눈을 깜빡였다.

“뭐?”

“대모래맹약회의에서 발행한 씨족 증명서입니다.”

사절이 말했다.

“우리 인장이 여기 있습니다.”

“씨족장의 인장은 확인했습니다.”

관리도 곤란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 규모의 구호물자를 외부로 반출하려면 공식 등록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자르가 물었다.

“왜.”

관리는 설명했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 씨족 이름으로 구호물자를 받은 사례가 있었다.

같은 씨족이 다른 이름을 사용해 여러 번 지원을 요청한 적도 있었다.

창고의 곡물은 교황국의 여러 지역이 함께 비축한 것이므로,
정해진 절차 없이 한 집단에게 대량으로 내줄 수는 없었다.

말은 이해됐다.

나자르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논리는 알았다.

그래서 물었다.

“얼마나 걸려.”

“빠르면 며칠입니다.”

나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이면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며칠은 일주일이 되었다.

씨족 증명이 도착했다.

그러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구호 요청 인원의 수와 등록된 씨족 인원이 달랐다.

가뭄 동안 다른 작은 무리들이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관리 하나가 말했다.

“등록되지 않은 인원까지 같은 기준으로 배급하기는 어렵습니다.”

나자르가 물었다.

“왜.”

“누가 실제 구성원인지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

“같이 굶고 있어.”

“그 사실을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줘.”

관리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자르는 그 문장을 처음 들었다.

이후 너무 많이 듣게 될 문장이었다.


추가 확인이 들어갔다.

다음에는 운송 문제가 생겼다.

구호를 승인해도 국경을 통과하는 수레 수에 제한이 있었다.

그 제한을 늘리려면 다른 부서의 허가가 필요했다.

나자르는 직접 그곳으로 갔다.

담당 관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애들이 죽고 있어.”

관리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가능한 한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오늘.”

“오늘은 어렵습니다.”

“내일.”

“제가 확답할 수 없습니다.”

나자르의 꼬리가 바닥을 세게 쳤다.

“그럼 누가 할 수 있는데.”

상급자의 이름이 나왔다.

그 상급자를 찾아갔다.

이번에는 창고 책임자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창고 책임자는 구호 승인 원본을 요구했다.

원본은 아직 다른 관청에 있었다.

나자르는 처음으로 행정이라는 것이 사막의 미로보다 복잡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사이 씨족에서 전령이 왔다.

한 명이 죽었다.

둥지형제 중 하나였다.

이름은 바사크였다.

어린 시절 나자르와 가장 많이 싸운 녀석이었다.

나자르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다시 관청에 갔다.

서류 진행 상황을 물었다.

“검토 중입니다.”

“한 명 죽었어.”

관리가 입을 다물었다.

“안타깝습니다.”

나자르가 물었다.

“그러면 빨라져?”

상대가 대답하지 못했다.

나자르는 다시 물었다.

“죽었다고 적으면 빨라져?”

“절차는...”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나자르는 책상을 내려쳤다.

부서졌다.

경비병들이 달려왔다.

나자르는 싸우지 않았다.

스스로 손을 들었다.

“미안하다.”

그리고 부서진 책상을 가리켰다.

“저건 내가 갚아.”

잠시 뒤 관리에게 말했다.

“대신 빨리 해.”


관리는 노력했다.

정말로 노력했다.

나자르는 그것을 알았다.

그 관리가 직접 다른 부서에 뛰어가는 모습도 봤다.

퇴근 시간이 지난 뒤에도 문서를 정리하는 모습도 봤다.

신전의 성직자 하나는 자신의 배급권을 내놓아 작은 식량자루 몇 개를 먼저 마련해주었다.

국경 경비병들은 사절들이 잘 곳도 제공했다.

누구도 노골적으로 나자르의 씨족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대부분 도와주고 싶어 했다.

그런데 식량은 오지 않았다.

그것이 나자르에게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악당이 있었다면 죽이면 됐다.

탐욕스러운 관리가 창고 앞을 막고 있었다면 끌어내면 됐다.

그런 사람은 없었다.

친절한 사람이 있었다.

미안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규정을 설명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자기 사람들이 죽고 있었다.


두 번째 전령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이름이 둘이었다.

세 번째에는 세 명이었다.

나자르는 계산했다.

열셋이던 둥지형제 가운데 이미 여섯이 죽었다.

남은 녀석들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사절단의 한 노인이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나자르는 물었다.

“얼마나.”

“승인이 거의 끝났다고 한다.”

“어제도 그랬어.”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면 아무것도 못 얻는다.”

나자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다.

문제를 일으키면 더 늦어진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 날 일곱 번째 이름이 도착했다.

둥지형제의 절반이 넘게 죽었다.

그날 나자르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세레이온의 곡물창고 위치를 알고 있었다.

며칠 동안 관청을 오가면서 보았다.

경비 교대시간도 대강 알고 있었다.

사절단 사람들에게 말했다.

“난 가져간다.”

노인이 눈을 크게 떴다.

“뭘.”

“곡물.”

“허가가 아직 안 났다.”

“알아.”

“그럼 도둑질이다.”

나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잡히면 협정도 끝이다.”

“알아.”

노인이 화를 냈다.

“알면 왜 하겠다는 거냐!”

나자르는 전령이 가져온 이름들을 내려다봤다.

“더 죽으니까.”

그게 전부였다.


그날 밤 나자르는 몇 명과 함께 창고에 들어갔다.

경비병을 죽이지 않았다.

가능하면 다치게 하지도 않았다.

문을 지키던 병사 하나가 창을 들고 막았을 때,
나자르는 언월도 자루로 손목을 쳤다.

창이 떨어졌다.

병사가 소리쳤다.

“도둑!”

나자르는 대답했다.

“맞아.”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변명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지금 하는 일이 법적으로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곡물자루를 수레에 실었다.

필요량을 계산했다.

전부 가져가지는 않았다.

그때의 나자르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죽지 않을 만큼만 가져간다.

나머지는 남긴다.

그것이면 정의롭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밤이 끝나기 전에 국경을 빠져나갔다.


곡물은 씨족에 도착했다.

남은 둥지형제들은 살아남았다.

여러 아이도 살았다.

굶주림으로 쓰러졌던 노인 몇 명이 다시 일어났다.

나자르가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를 맞았다.

누군가는 안았다.

누군가는 영웅이라고 불렀다.

나자르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훔친 거야.”

누군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를 살렸잖아.”

나자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둘 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훔쳤다.

그리고 살렸다.

그에게는 처음으로 두 문장이 동시에 참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었다.


얼마 뒤 세레이온의 정식 구호 승인이 나왔다.

너무 늦었다.

승인문에는 필요한 도장이 모두 찍혀 있었다.

씨족 자격도 확인되었다.

구호량도 정해졌다.

운송 허가도 붙어 있었다.

모든 절차가 제대로 끝났다.

나자르는 그 문서를 오래 바라보았다.

틀린 것은 거의 없었다.

각 절차에는 이유가 있었다.

등록되지 않은 집단에게 창고를 무제한 열 수는 없다.

누가 지원 대상인지 확인해야 한다.

지역 농민에게서 거둔 비축곡을 외부에 보낼 때는 책임도 필요하다.

나자르는 그 논리를 이해했다.

그런데 둥지형제 일곱은 죽었다.

서류는 그들을 살리지 못했다.

그날 나자르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누구도 악하지 않아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절차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정확히는,
절차를 끝낼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사람부터 죽는다.


그 이후 나자르는 규칙이라는 것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법이 있다고 옳은 것은 아니다.

소유권이 있다고 언제나 먼저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다.

창고 안에 곡물이 있고,
문 밖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면,
나자르에게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누구의 이름이 창고 문서에 적혀 있는지가 아니었다.

사람이 죽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는 그 논리를 위험하다고 했다.

나자르는 인정했다.

“위험하지.”

“그럼 왜 주장합니까?”

“굶어 죽는 것도 위험하니까.”

그는 복잡한 말을 싫어했다.

둘 다 위험하다면,
먼저 죽는 쪽부터 살린다.

그게 나자르의 방식이었다.


그 사건 이후 나자르는 이빨연맹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연맹장이었던 것은 아니다.

남부의 물자수송대를 호위했다.

굶주린 씨족에게 가축을 전달했다.

상단이 곡물을 팔지 않으면 협상했다.

협상이 실패하면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가끔은 빼앗았다.

그는 그것을 선행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약탈 아닙니까?”

누군가 물으면 대답했다.

“맞아.”

“그런데 정당하다고 생각합니까?”

“죽는 놈 살릴 다른 방법 있으면 말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었다.

구호.

징발.

절도.

약탈.

무슨 단어를 붙이든 곡물 한 자루의 양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곡물이 누구의 배에 들어가는지가 중요했다.


나자르는 빠르게 연맹 안에서 영향력을 얻었다.

그는 결정을 오래 끌지 않았다.

어느 씨족이 사흘 뒤면 식량이 떨어진다고 보고하면 바로 움직였다.

“확실한가?”

“예.”

“그럼 간다.”

사람들은 그런 속도를 좋아했다.

대모래맹약회의에서 지원량을 논의하는 동안,
이빨연맹은 이미 수레를 움직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자르에게 사흘 뒤 굶는 사람은 사흘 뒤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 움직여야 하는 이유였다.

전투에서도 같았다.

언월도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적진에 들어간다.

긴 꼬리로 중심을 잡고,
모래 경사면을 이용해 방향을 빠르게 바꾼다.

여러 명에게 둘러싸여도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빠르게 판단하고,
빠르게 움직이고,
싸움이 끝나면 멈춘다.

쓰러진 상대를 굳이 쫓아가 죽이지 않는다.

원한을 다음 싸움까지 끌고 가는 것도 싫어한다.

“끝났으면 끝난 거야.”

그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연맹장이 된 뒤에도 나자르는 자기 행동을 아름답게 꾸미려 하지 않았다.

한번은 세레이온 사절이 공개적으로 따졌다.

“당신들은 우리 국경마을의 창고에서 곡물을 훔쳤습니다.”

나자르는 바로 대답했다.

“알아.”

사절은 오히려 잠시 말을 잃었다.

“부인하지 않는 겁니까?”

“왜 부인해. 가져갔는데.”

“그것은 범죄입니다.”

“그것도 알아.”

“그런데도 정당화하겠다는 겁니까?”

나자르의 꼬리가 모래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그가 말했다.

“우리가 훔쳤다는 건 안다.”

잠시 뒤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른 선택을 남겼다면 보여줘라.”

그에게 그것은 도발이 아니었다.

진짜 질문이었다.

다른 길이 있었다면 알고 싶었다.

다음에는 그쪽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죽는 동안 기다리라는 답은 선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처음 몇 년 동안 나자르는 자기 원칙에 거의 의심이 없었다.

굶는 사람이 있다.

저쪽 창고에는 곡물이 있다.

남는 곡물이 있다면 가져온다.

그렇게 여러 씨족을 살렸다.

문제는 어느 겨울부터 시작되었다.

이빨연맹이 세레이온 동부의 작은 농촌 창고를 습격했다.

보고상으로는 곡물이 충분히 쌓여 있었다.

남부 안발룽에서는 심한 가뭄 때문에 몇 개 씨족이 굶고 있었다.

나자르는 결정을 빨리 내렸다.

“가져와.”

연맹은 창고를 털었다.

경비대와 충돌도 있었다.

사람 몇 명이 다쳤다.

곡물은 남부로 이동했다.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다.

나자르는 성공한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그 겨울의 끝까지는.


봄이 오기 직전,
그 농촌 출신 인간 하나가 이빨연맹을 찾아왔다.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다.

가죽주머니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말라붙은 밀 이삭 몇 개가 들어 있었다.

남자가 나자르 앞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이게 뭔지 압니까?”

나자르가 말했다.

“밀.”

“종자입니다.”

나자르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계속했다.

“당신들이 가져간 창고에는 겨울 식량만 있던 게 아닙니다.”

다음 봄에 심을 씨앗도 있었다.

일부는 가축에게 먹일 사료였다.

마을은 당장 굶어 죽지는 않았다.

나자르의 연맹이 전부 가져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늘 최소량은 남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 ‘최소량’은 나자르가 계산한 것이었다.

오늘 죽지 않을 양.

그 마을 사람들이 겨울 뒤 무엇으로 밭을 심을지는 계산하지 않았다.

남자가 말했다.

“당신들 덕분에 남쪽 사람들이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우리도 살고 싶었습니다.”

나자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해 그 마을의 파종 면적은 크게 줄었다.

가축 일부를 팔아 종자를 다시 사야 했다.

빚을 진 농가도 생겼다.

겨울을 버텼던 노인 몇 명은 봄에 영양 부족으로 죽었다.

아이들은 다른 지역의 친척집으로 보내졌다.

마을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자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남는 곡물’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자기 생존을 위해 비축한 식량이었다.

단지 남부보다 조금 덜 급해 보였을 뿐이었다.

나자르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틀렸다고 간단히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 곡물이 없었다면 안발룽의 아이들이 죽었을 것이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 곡물을 가져갔기 때문에 세레이온의 농민들이 더 위험한 겨울과 봄을 보내야 했다.

그것도 사실이었다.

어느 쪽도 지울 수 없었다.


나자르는 인간 남자에게 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지.”

상대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걸 왜 저한테 묻습니까?”

나자르의 표정이 굳었다.

남자가 계속했다.

“우리 창고를 털기로 결정한 건 당신 아닙니까.”

맞는 말이었다.

나자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밀 이삭을 가리켰다.

“저희에게 물어본 적도 없잖습니까.”

그 말에서 나자르는 오래전 세레이온 관청을 떠올렸다.

자기 씨족이 굶고 있었다.

관리들은 규칙에 따라 무엇을 줄 수 있는지 결정했다.

굶고 있는 사람들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자르는 그 구조를 증오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 역시 다른 사람의 창고 앞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몫을 자신이 결정하고 있었다.

형태만 달랐다.

한쪽은 서류를 들고 있었다.

한쪽은 언월도를 들고 있었다.

결정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둘 다 자기 선택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나자르는 약탈 규칙을 바꾸었다.

가능하면 먼저 창고의 용도를 확인한다.

겨울 식량인지.

종자곡인지.

다른 지역으로 보내야 하는 물자인지.

가축 사료인지.

그리고 가능하면 거래를 먼저 제안한다.

광물.

가죽.

향후 통행권.

호위.

다음 계절의 상환.

나자르가 협상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느린 협상은 싫어한다.

누군가 사람이 굶는 상황에서 며칠씩 문장을 다듬으면 화를 낸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으려고 한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굶주림은 언제나 자기 쪽에서 더 가까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빨연맹의 습격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뭄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상단은 손해 보는 거래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국경에는 오래된 원한도 있다.

몇몇 씨족은 세레이온과 델피로에 빼앗긴 것이 있다고 믿는다.

나자르 자신도 그들의 분노를 이해한다.

그래서 때로는 여전히 명령한다.

“가져와.”

그 명령 뒤에 누가 대가를 치르게 될지 예전보다 오래 생각할 뿐이다.

문제는 오래 생각하는 동안 남쪽에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자르에게 그 몇 시간은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다.

그는 자신의 둥지형제들을 기억한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말을 듣던 동안 하나씩 사라진 이름들.

그래서 누군가 신중하게 검토하자고 하면 먼저 묻는다.

“몇 명이 그동안 굶는데.”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나자르는 쉽게 기다리지 않는다.


카레나와도 이 문제로 자주 충돌한다.

카레나는 이빨연맹이 인간 마을을 습격하는 일을 제지하려 한다.

동시에 왜 이빨연맹이 그렇게 행동하는지도 이해한다.

나자르는 그 망설임을 안다.

한번은 카레나가 말했다.

“민간 마을은 이제 건드리지 마.”

나자르는 바로 물었다.

“남쪽에서 굶으면?”

“회의에 요청해.”

“며칠.”

카레나가 입을 다물었다.

“몇 명 죽고 나면 승인돼?”

카레나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다고 아무 창고나 털 수는 없어.”

“알아.”

“알면 멈춰.”

나자르는 잠시 침묵했다.

“다른 길을 먼저 만들어.”

“만들고 있어.”

“그럼 빨리.”

그는 카레나를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한 지도자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미래의 제도만 말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도가 완성될 때까지 먹을 식량도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루와는 다른 식으로 부딪친다.

바루는 약속과 구조를 중시한다.

배신의 대가가 명확해야 평화가 유지된다고 말한다.

나자르는 그 말의 논리를 이해한다.

그래도 묻는다.

“약속 깨면 벌주는 데 얼마나 걸리는데.”

바루가 대답한다.

“정해둬야 한다.”

“굶는 놈은 그동안 뭘 먹어.”

바루는 침묵한다.

나자르는 그 침묵을 싫어한다.

하지만 바루 역시 자신의 질문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래서 둘은 싸우면서도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지는 않는다.

나자르에게 상대가 자기 논리를 끝까지 말할 수 있다면 아직 함께 일할 수 있다.

위선보다 충돌을 더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의 전투 방식도 그런 성격과 닮아 있다.

나자르는 한곳에서 버티는 전사가 아니다.

언월도를 크게 돌린다.

한 명을 깊게 베기보다 여러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넓은 궤적을 만든다.

모래를 박차고 옆으로 빠진다.

꼬리로 중심을 잡으며 즉시 방향을 바꾼다.

사막의 경사와 바위,
낮은 모래언덕까지 전부 이동로로 사용한다.

상대가 진형을 갖추기 전에 흔든다.

불리하면 오래 버티지 않는다.

빠진다.

다른 길을 찾는다.

싸움은 목적이 아니다.

곡물을 가져오거나,
사람을 빼내거나,
추격을 끊으면 끝이다.

그래서 전투가 끝난 뒤 포로에게 화풀이하는 것을 특히 싫어한다.

한 전사가 쓰러진 적을 걷어찬 적이 있었다.

나자르가 손목을 잡았다.

“끝났어.”

“저놈이 우리 둘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싸웠잖아.”

전사는 분노했다.

“그걸로 끝입니까?”

나자르는 대답했다.

“안 끝내면 언제 끝나는데.”

그는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분노를 먹여 키우는 것도 싫어한다.


나자르가 가장 경멸하는 것은 위선이다.

약탈하면서 정의라고 부르는 것.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자신은 피해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

사람을 굶기면서 절차를 지켰으니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

그런 말을 들으면 바로 지적한다.

근거도 함께 말한다.

“네 창고에 식량 있었다.”

“우리 쪽은 사흘치 남았다.”

“지원 요청은 두 번 거절됐다.”

“그래서 가져갔다.”

그는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 도둑이라고 하면 인정한다.

약탈자라고 해도 크게 반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단어로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 훔쳤다.”

“그다음은?”

왜 훔쳤는지.

어떤 선택지가 있었는지.

누가 기다릴 수 있었고 누가 기다릴 수 없었는지.

그것까지 보자고 한다.


그러나 같은 기준은 나자르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왜 훔쳤는가.

남부 사람들이 굶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서 훔쳤는가.

겨울을 준비하던 농민에게서.

그들에게 다른 선택은 있었는가.

나자르는 그 질문 앞에서 점점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한때 그는 자신과 씨족이 선택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기다리거나 죽거나.

그래서 창고를 털었다.

그런데 자신이 습격한 농민에게도 선택권은 없었다.

곡물을 내놓을지 묻지 않았다.

얼마가 필요한지 그들이 결정하지 않았다.

무장한 이빨연맹이 와서 가져갔다.

자신을 죽인 절차와,
자신이 휘두르는 무력이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인지 그는 확신하지 못한다.

둘 다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구조일 수 있다.

네 사정은 알겠다.

하지만 결정은 우리가 한다.


그 사실 때문에 나자르는 요즘 약탈 뒤의 기록을 직접 보려고 한다.

얼마를 가져왔는지만 보지 않는다.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그 지역에는 얼마가 남았는지.

그다음 계절에는 어떤 피해가 났는지.

가능하면 피해를 갚는다.

가죽을 보낸다.

광물을 보낸다.

가축이 회복되면 일부를 넘긴다.

상대가 받지 않는 경우도 있다.

“훔쳐놓고 돈 보내면 끝입니까?”

그 말을 들으면 나자르는 대답한다.

“아니.”

“그럼 왜 보냅니까?”

“안 보내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는 보상으로 죄가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잘못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싫어한다.

끝난 싸움의 원한은 오래 품지 않지만,
끝난 싸움의 대가는 가능한 한 남겨두지 않으려 한다.


한번은 이빨연맹의 젊은 전사가 말했다.

“연맹장님, 세레이온 놈들은 우리한테 준 것도 없는데 왜 우리가 갚습니까?”

나자르가 물었다.

“누가 안 줬는데.”

“세레이온이요.”

“어느 놈.”

전사가 입을 다물었다.

나자르는 계속 물었다.

“우리가 턴 농부가 내 둥지형제 구호 막았어?”

“그건...”

“서류 늦춘 놈이야?”

“아닙니다.”

“그럼 왜 걔가 대신 갚아.”

그 질문을 하는 순간 나자르는 자신도 완전히 그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자기 자신에게.

하지만 그 분노도 오래 숨기지는 않는다.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 다음 판단에 넣는다.

나자르에게 후회는 멈추기 위한 감정이 아니라 다음 행동을 바꾸기 위한 자료에 가깝다.


그렇다고 그의 핵심 신념이 약해진 것은 아니다.

굶주리는 생명은 여전히 소유권보다 먼저다.

나자르는 그 부분에서는 물러서지 않는다.

창고 안의 곡물을 지키기 위해 문밖의 아이가 굶어 죽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문서상 그 곡물이 누구의 것이든 마찬가지다.

다만 이제 그 뒤에 한 문장이 더 붙는다.

그 곡물을 빼앗긴 사람도 생명이라는 것.

그 역시 다음 달과 다음 계절을 살아야 한다는 것.

나자르가 찾는 답은 그래서 예전보다 어려워졌다.

과거에는 창고 문만 열면 됐다.

지금은 문 양쪽을 모두 봐야 한다.

밖에서 굶고 있는 사람.

안에 곡물을 쌓아둔 사람.

그리고 그 곡물이 왜 거기 있는지.

그 셋을 동시에 보면서도,
죽는 사람보다 늦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

그게 지금 나자르가 풀지 못한 문제다.


때로는 세레이온의 관리들과 다시 마주친다.

나자르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당연하다.

그의 이빨연맹이 국경창고를 여러 번 털었기 때문이다.

한 늙은 관리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 때문에 절차가 더 엄격해졌습니다.”

나자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약탈 위험 때문에 반출관리와 경비가 늘었습니다.”

나자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증오했던 느린 절차가,
자신의 행동 때문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 아이러니는 웃기지 않았다.

관리도 말했다.

“당신들은 절차가 느려서 약탈한다고 합니다.”

“그래.”

“당신들이 약탈해서 절차가 더 느려집니다.”

나자르는 이를 드러내며 짜증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둘 다 고쳐.”

관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이 쉽군요.”

“쉬운 말이 틀린 말은 아니야.”

그게 나자르다.

문제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나자르는 이빨연맹의 연맹장이다.

남부에서 굶주림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표정부터 달라진다.

“며칠치.”

“나흘입니다.”

“아이 몇.”

“스물셋입니다.”

“가까운 창고.”

부하가 위치를 말한다.

예전의 나자르라면 그 자리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지금은 하나를 더 묻는다.

“그 창고는 뭘 위해 쌓은 거지.”

부하가 모르면 인상을 찌푸린다.

“알아와.”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뛰어.”

그래도 너무 늦으면 움직인다.

판단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지는 않는다.

그 기다림의 끝을 이미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자르는 자신이 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 옳은 선택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 둘이 다르다는 것도 안다.

사람을 살린 결정이 다른 사람을 굶길 수 있다.

도둑질이 생명을 구할 수 있다.

법을 지킨 사람이 사람을 죽게 내버려둘 수도 있다.

반대로 사람을 살리겠다는 명분으로 남의 생존권을 짓밟을 수도 있다.

그에게 세상은 예전보다 훨씬 복잡해졌다.

성격은 여전히 단순한 편이지만.

누군가 빙빙 돌려 말하면 여전히 짜증을 낸다.

누군가 위선적인 명분 뒤에 숨으면 더 화를 낸다.

그리고 자기 행동을 물으면 숨기지 않는다.

“훔쳤냐?”

“응.”

“때렸냐?”

“응.”

“다시 할 거냐?”

그 질문에서만 조금 오래 생각한다.

“상황 같으면.”

잠깐 멈춘다.

“다른 방법부터 찾고.”

그 정도가 지금의 변화다.


나자르는 죽은 둥지형제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한다.

의식적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다.

잊히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자랐고,
같이 싸웠고,
같이 물을 마셨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죽는 동안 세레이온의 관청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무도 악의를 품지 않았다.

모두가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

나자르는 그래서 더욱 절차를 두려워한다.

악의는 눈에 보인다.

검을 들면 된다.

하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느린 선의는 어디를 베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죽고 있다면 먼저 움직이고 싶어 한다.

그 본능은 아마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다른 이름들도 기억하려고 한다.

자신의 명령 때문에 겨울 비축을 잃은 농부.

종자를 팔아야 했던 가족.

가축을 잃은 마을.

그 사람들도 숫자가 아니다.

자기 둥지형제들처럼 이름이 있고,
기다리는 가족이 있으며,
다음 계절을 살아야 한다.

그것까지 본 뒤에도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때로는 그래야 할 것이다.

나자르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정말 한쪽에서 오늘 사람이 죽고 있고,
다른 쪽에는 내일을 위한 식량이 있다면,
그는 여전히 오늘을 먼저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제는 그 선택을 정의라는 한 단어로 끝내지 못한다.

살아남은 쪽이 다른 쪽에게 진 빚까지 함께 봐야 한다.

그 빚을 갚을 방법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것은 약탈을 더 잘할 문제가 아니라 구조 자체를 바꿀 문제라는 것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누군가 나자르에게 평화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빠르다.

“원하지.”

“그런데 왜 계속 무기를 듭니까?”

“평화가 밥은 아니니까.”

상대가 얼굴을 찌푸리면 나자르는 설명을 덧붙인다.

“굶는 놈한테 내년 협정 얘기해봐.”

“안 들려.”

그리고 잠시 뒤 말한다.

“그래도 내년 협정은 만들어야지.”

그게 지금의 나자르다.

예전에는 오늘만 보았다.

오늘 굶는다.

그러니 오늘 가져온다.

이제는 억지로 내일까지 보려고 한다.

오늘 가져온 곡물이 누구의 내일이었는지까지.

아직 잘하지는 못한다.

급한 보고가 들어오면 지금도 언월도부터 잡는다.

하지만 문을 나서기 전에 한 번쯤 묻는다.

“저쪽은 얼마나 남아 있지?”

그 질문 하나를 더 하게 되기까지,
나자르는 너무 많은 사람의 굶주림을 보았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마지막에는 직접 결정한다.

남에게 책임을 넘기지 않는다.

잘못했다면 잘못했다고 말한다.

그래도 다른 길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그것 역시 숨기지 않는다.

“우리가 훔쳤다는 건 안다.”

나자르는 언제나 거기서 시작한다.

자기 행동을 아름다운 이름으로 덮지 않는 것.

그리고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음 말을 한다.

“다른 선택을 남겼다면 보여줘라.”

예전의 나자르는 그 말을 상대에게만 했다.

지금은 자기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정말 다른 선택은 없었는가.

아니면 자신이 너무 빨리 언월도를 들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을 볼 시간이 없었던 것인가.

그 답을 찾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굶는다.

그래서 나자르 물결바람은 오늘도 오래 고민하지 못한다.

다만 예전보다 한 번 더 보고,
한 번 더 묻고,
그 뒤에는 누구보다 빨리 움직인다.


SRK
사르크 모래바람
안발룽이빨연맹-기동대장
“푸흐흐. 한 번 무서워 달아난 병사는 내일 살아 있어. 오래 싸운 병사는 누군가를 죽이지.”
🩸 HP80
💪 공격력55
🧙 마법력5
✨ 신비력1
🛡️ 방어력35
🔗 항마력20
😖 신비저항10
🏃 회피력85
과거 보기
사막토끼수인에게 귀가 좋다는 것은 단순히 작은 소리를 잘 듣는다는 뜻이 아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말발굽의 수를 구분할 수 있다.

모래언덕 너머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만 듣고 누군가 무장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바람이 좋다면 보이지 않는 곳의 대화도 희미하게 들린다.

사르크는 어릴 때부터 그것을 이용했다.

몰래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숨겨둔 간식을 찾아냈다.

친구가 뒤에서 놀래키려고 다가오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다가 먼저 발을 걸었다.

그리고 웃었다.

“푸흐흐. 다 들렸는데.”

그녀는 빠르기도 했다.

모래 위에서 방향을 바꾸는 법을 일찍 배웠고,
성인 전사들도 따라잡기 힘들 만큼 짧은 거리를 폭발적으로 달렸다.

그래서 싸움보다 먼저 맡게 된 일은 전달이었다.

편지를 들고 달렸다.

씨족 사이의 말을 옮겼다.

전투 중에는 부대와 부대 사이를 오갔다.

누군가 말했다.

“넌 전령이 딱이구나.”

사르크는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칼도 잘 던져.”

“알아.”

“창도.”

“알아.”

“그런데 네가 제일 빨라.”

사르크는 귀를 축 늘어뜨렸다.

“그건 맞네.”

그때의 그녀는 전달이라는 일을 단순하게 생각했다.

편지를 받아서,
상대에게 가져다준다.

그러면 상대는 내용을 안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 일이 벌어진 것은 사르크가 아직 이빨연맹의 정식 기동대원이 되기 전이었다.

안발룽 동부와 세레이온 서남부의 경계는 오랫동안 불안했다.

정확한 국경선보다 오래된 이동로가 먼저 존재했던 땅이었다.

안발룽 씨족들은 계절마다 가축을 몰고 이동했다.

세레이온의 농민들은 조금씩 경작지를 넓혔다.

한쪽에게는 조상이 오가던 길이었다.

다른 쪽에게는 부모가 개간한 밭이었다.

서로의 말은 모두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자주 싸웠다.

가축이 밭으로 들어갔다.

농민들이 울타리를 세웠다.

씨족 전사가 울타리를 부쉈다.

마을 경비대가 전사를 잡았다.

씨족이 포로를 되찾으러 왔다.

경비대는 그것을 습격이라고 불렀다.

습격으로 사람이 죽었다.

다음에는 복수가 왔다.

사르크가 자랄 때쯤에는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를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각자 자기 쪽에서 죽은 사람의 이름만 알고 있었다.


그해에는 상황이 특히 나빴다.

작은 충돌이 몇 차례 이어졌다.

세레이온 쪽 마을 하나에서 가축이 사라졌다.

안발룽에서는 씨족 사람 둘이 실종되었다.

양쪽 모두 상대를 의심했다.

전사들이 모였다.

성기사단의 순찰도 늘었다.

더 큰 싸움이 나기 직전이었다.

그때 몇몇 씨족장이 먼저 협상을 제안했다.

싸움이 커지면 이길 수 있는 쪽도 없다고 판단했다.

설령 한쪽이 국경마을 몇 곳을 빼앗는다 해도,
그 뒤에는 더 큰 군대가 올 것이다.

가축은 죽고,
밭은 타고,
아이들은 굶게 된다.

그래서 양쪽의 중간쯤 되는 마른 오아시스에서 대표들이 만나기로 했다.

안발룽 쪽에서는 여러 씨족이 함께 참석하기로 했다.

그것이 나중에 문제가 되었다.

협상을 위해 많은 사람이 모인 모습은,
멀리서 보면 전쟁을 위해 병력이 집결한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르크가 편지를 맡았다.

씨족장들의 인장이 찍힌 문서였다.

내용은 단순했다.

지정된 날에 협상대표가 오아시스에 모인다.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세레이온 측 대표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협상이 끝날 때까지 주변 마을과 씨족의 상호습격을 중단한다.

사르크는 문서를 품 안에 넣었다.

씨족장이 말했다.

“직접 전달해라.”

“알아.”

“누가 받았는지도 확인하고.”

사르크가 씩 웃었다.

“내가 애야?”

씨족장은 그녀의 긴 귀를 한번 잡아당겼다.

“애지.”

“놔.”

그녀는 웃으며 출발했다.

그때는 자기가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보다,
이번에는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 기뻤다.


사르크는 세레이온의 국경초소에 도착했다.

경비병들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담당 성직자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문서를 읽었다.

사르크가 물었다.

“됐지?”

성직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부와 인근 기사단에도 전달하겠습니다.”

사르크는 다시 확인했다.

“오아시스에 우리 쪽 사람들 모이는 거 알지?”

“확인했습니다.”

“싸우려고 모이는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사르크는 만족했다.

돌아갔다.

그녀가 들은 대답 가운데 거짓말은 하나도 없었다.

성직자는 정말 전달하려 했다.

문서는 정말 상부로 보내졌다.

문제는 그 정보가 모든 사람에게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인근에서 움직이던 성기사단 일부는 며칠 전 다른 임무로 급히 배치된 부대였다.

국경마을 습격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받고 이동 중이었다.

그들에게 협상에 관한 정식 명령은 아직 전달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정보가 먼저 들어왔다.

안발룽 여러 씨족의 무장전사들이 한곳에 집결하고 있다.

가축과 보급수레도 모이고 있다.

경계 가까운 오아시스다.

최근 습격이 반복되고 있다.

그 정보 자체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여러 씨족의 전사들이 모여 있었다.

협상대표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도 하고 있었다.

문제는 목적이 빠져 있었다.

그들은 협상을 위해 모였다.

기사단은 침공 준비라고 판단했다.


사르크가 씨족의 야영지로 돌아온 날 저녁,
사람들은 오랜만에 긴장을 조금 풀고 있었다.

전사들은 무기를 닦았지만 전투대형을 만들지는 않았다.

씨족장들은 다음 날 어떤 요구를 할지 논의했다.

누군가는 가축 배상부터 말하자고 했다.

누군가는 포로 교환이 먼저라고 했다.

아이들도 있었다.

협상이 길어질 것을 생각해 가족 일부가 함께 이동해온 씨족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르크는 불가에 누워 귀를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이야기.

가축 울음.

솥 안에서 물 끓는 소리.

평범했다.

그래서 멀리서 들려온 첫 번째 소리를 이상하게 느꼈다.

금속.

규칙적인 충돌.

여러 말의 발굽.

사르크의 귀가 곧게 섰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해.”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봤다.

사르크는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시 들었다.

말.

갑옷.

많았다.

“기사 온다.”

누군가 웃었다.

“협상단이 벌써?”

사르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속도가 너무 빨랐다.

협상 사절의 이동 소리가 아니었다.

전투부대였다.


사르크는 야영지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모래언덕 위에 올라갔다.

멀리서 빛이 보였다.

갑옷이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대열이 퍼지고 있었다.

포위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사르크는 즉시 소리쳤다.

“무기 들지 마!”

주변 전사들이 그녀를 바라봤다.

“왜?”

“편지 갔어.”

그녀는 확신했다.

오해일 것이다.

보여주면 된다.

설명하면 된다.

사르크는 모래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흰 천을 하나 잡았다.

바람에 크게 흔들었다.

“협상!”

세레이온 쪽을 향해 소리쳤다.

“협상하러 모인 거야!”

거리가 멀었다.

바람은 반대쪽으로 불었다.

사르크의 목소리가 어디까지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더 앞으로 달렸다.

그때 기사단 쪽에서 신호가 울렸다.

진군 신호였다.


사르크는 멈췄다.

세레이온 병력이 속도를 높였다.

첫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사르크의 귀에는 화살이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피했다.

뒤에서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야영지의 전사들이 무기를 들었다.

당연했다.

공격받고 있었다.

사르크가 소리쳤다.

“잠깐!”

아무도 듣지 않았다.

말들이 돌진했다.

누군가 창을 던졌다.

성기사들의 방패에 부딪쳤다.

그것으로 상대편에서는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한쪽은 먼저 날아온 화살을 기억했다.

다른 쪽은 먼저 날아온 창을 기억했다.

몇 분 뒤에는 순서가 아무 의미도 없어졌다.


전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씨족들은 협상을 위해 모였다.

많은 전사가 있었지만 하나의 지휘체계로 편성된 군대는 아니었다.

천막 사이에는 아이와 노인도 있었다.

말과 가축도 묶여 있었다.

기병 돌격이 들어오자 야영지는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사르크는 뛰었다.

아이 하나를 끌어당겨 말 아래에서 빼냈다.

투척칼로 기사의 고삐를 끊었다.

짧은 창을 던져 다른 말의 진행 방향을 바꿨다.

사람을 죽이기보다 길을 만들었다.

“남쪽으로 뛰어!”

누군가 물었다.

“족장들은?”

“일단 뛰어!”

그녀는 다시 돌아갔다.

천막 사이에서 비명이 들렸다.

너무 많았다.

좋은 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날만큼 저주한 적이 없었다.

멀리서 죽는 사람의 소리까지 들렸다.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

아이를 부르는 목소리.

갑옷에 칼이 미끄러지는 소리.

누군가 넘어지며 모래를 긁는 소리.

사르크는 모든 방향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편지를 전달했던 일을 계속 생각했다.

분명 전달했다.

상대도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죽고 있었다.

사르크는 싸움 중에도 이상할 만큼 그 생각을 반복했다.

편지가 갔다.

편지가 갔다.

편지가 갔는데.

왜?

나중에야 답을 알게 된다.

편지는 갔다.

다만 필요한 사람에게 제때 가지 않았다.

사르크가 전달한 사실과,
현장의 기사들이 알고 있던 사실이 달랐다.

그 사이에 사람들이 죽었다.


사르크는 그날 살아남았다.

빠르기 때문이었다.

어디에서 공격이 오는지 먼저 들을 수 있었고,
말이 방향을 바꾸기 전에 사각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몇몇 사람도 빼냈다.

그러나 아주 적었다.

해가 떠오를 무렵 야영지는 거의 무너져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여러 씨족의 지도자와 전사가 죽었다.

아이들도 죽었다.

사르크가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시신을 세는 것이 아니었다.

편지를 찾는 것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자신도 모른다.

자기가 잘못 전달했을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며칠 뒤 세레이온 쪽에서 확인이 왔다.

협상 제안은 실제로 접수되어 있었다.

협상 승인도 진행되고 있었다.

공격한 기사단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공식 사과가 왔다.

상황을 몰랐다.

잘못된 보고를 받았다.

집결한 무장세력을 침공 준비로 판단했다.

통신과 지휘체계에 문제가 있었다.

책임자를 조사하겠다.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겠다.

사르크는 그 말을 들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기사단은 상황을 몰랐을 것이다.

오히려 그게 더 끔찍했다.

사람을 몰살하려는 악의가 없었는데도 몰살이 일어났다.

협상을 반대하는 명령이 없었는데도 협상단이 공격받았다.

모두가 자기에게 주어진 정보대로 행동했다.

그래서 아무도 전부를 보지 못했다.

사르크는 그날부터 모호함을 싫어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의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는 이런 말을 믿지 않았다.

‘아마 알겠지.’

‘전달됐을 것이다.’

‘저쪽도 싸우려는 건 아닐 것이다.’

‘이 정도면 경고를 이해했겠지.’

그녀에게 그것은 전부 위험한 말이었다.

알면 확인한다.

모르면 묻는다.

위협한다면 상대가 위협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게 한다.

퇴로를 열어줄 거라면 어디로 도망가야 하는지까지 보여준다.

싸울 의도가 없다면 상대가 그것을 오해할 수 없도록 만든다.

사르크의 방식은 점점 극단적으로 명확해졌다.

누군가는 그녀를 거칠다고 했다.

사르크는 반박하지 않았다.

거친 것과 위험한 것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거친 쪽을 고를 생각이었다.


이빨연맹에 들어간 뒤 사르크는 기동전에서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그녀는 긴 싸움을 싫어했다.

정면에서 서로 진형을 맞추고,
한 시간씩 화살을 주고받고,
부상자가 쌓이면서도 누구도 물러나지 않는 전투를 보면 짜증부터 냈다.

“왜 계속 싸워?”

누군가 말했다.

“저쪽이 아직 버티니까.”

사르크는 되물었다.

“그럼 못 버티게 만들면 되잖아.”

그녀가 말한 것은 모두 죽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싸울 생각 자체를 없애자는 뜻이었다.


사르크의 기동대는 밤을 자주 이용했다.

적의 보초가 바뀌는 시간을 알아냈다.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소리를 냈다.

실제 인원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포위한 것처럼 발자국을 만들었다.

사르크는 높은 곳에서 투척침을 쏘아 보초의 투구에 정확히 박았다.

죽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

혹은 손에 들고 있던 무기의 끈만 끊었다.

다음에는 장교 천막의 기둥에 칼을 꽂았다.

그 옆에 짧은 쪽지를 남겼다.

‘다음은 목.’

실제로 목을 노릴 생각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그렇게 믿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음 날 적 부대가 철수하면 사르크는 만족했다.

“봐.”

“한 명도 안 죽었잖아.”

동료가 물었다.

“저쪽은 밤새 죽는 줄 알았을 텐데요.”

사르크가 웃었다.

“그래서 도망갔잖아.”


그녀에게 공포는 잔혹함이 아니었다.

도구였다.

칼과 비슷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였다.

적 하나를 실제로 죽이는 것보다,
열 명에게 죽을 수 있다고 확신시키는 편이 싸움을 빨리 끝낼 수 있다.

적의 지휘관 앞에 보이지 않게 접근해 목덜미에 칼끝을 대고 살아서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다음에는 잘 때 말고 깨어 있을 때 올게.”

그 뒤 그 지휘관은 부대를 철수시켰다.

사르크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숫자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녀는 자주 말했다.

“푸흐흐.”

가볍게 웃었다.

“한 번 무서워 달아난 병사는 내일 살아 있어.”

그리고 투척칼을 손가락 사이에서 돌렸다.

“오래 싸운 병사는 누군가를 죽이지.”


그녀는 포로를 고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위협했다.

말하지 않는다고 바로 손가락부터 자르는 식의 행동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공포는 상대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할 수 있을 때 가장 강했다.

실제로 잔혹한 일을 벌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더 큰 잔혹함이 필요해진다.

사르크는 그런 전쟁을 싫어했다.

“무서운 척하는 거랑 미친 짓 하는 건 달라.”

젊은 대원이 물었다.

“상대는 차이를 압니까?”

사르크는 대답했다.

“몰라도 돼.”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들이 실제로 어디까지 할 사람인지 상대가 모를수록 더 빨리 싸움을 포기한다고.

그것이 전체 희생을 줄인다고.


사르크의 방식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싸우지 않고 물러난 부대가 많았다.

사상자도 줄었다.

이빨연맹 안에서는 그녀를 높게 평가했다.

나자르 역시 사르크의 기동대를 자주 사용했다.

보급로를 끊는다.

경비대를 겁줘 물러나게 한다.

추격대를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한다.

필요한 식량을 확보한 뒤 오래 싸우지 않고 빠진다.

사르크에게 잘 맞았다.

정면전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상대가 싸움을 포기하게 만드는 편을 좋아했다.

누군가 그녀를 비겁하다고 불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응.”

“도망도 잘 가.”

그리고 웃었다.

“살아 있는 비겁자가 죽은 용사보다 다음 싸움은 잘하거든.”


문제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세레이온 동부의 한 국경마을을 다시 지나갔을 때였다.

몇 달 전 사르크의 기동대가 그 지역의 경비대를 몰아낸 적이 있었다.

당시 작전은 그녀가 보기에는 완벽했다.

마을 자체를 공격하지 않았다.

경비병 두 명만 가볍게 다쳤다.

밤새 여러 곳에서 화살과 투척칼을 날려 포위당한 것처럼 느끼게 했다.

우물 옆에는 이빨연맹의 표식을 남겼다.

경비대장의 침실에는 칼 하나를 꽂아두었다.

아침이 되기 전 경비대는 철수했다.

이빨연맹은 필요한 물자를 가져갔다.

죽은 사람은 없었다.

사르크는 성공으로 기록했다.

몇 달 뒤 그 마을에 다시 왔을 때,
이상한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그녀를 보는 순간 숨었다.

정확히는 사막토끼수인의 긴 귀를 보는 순간이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문 뒤로 몸을 숨겼다.

남자아이 하나는 돌을 집어 들었다.

어른이 급히 막았다.

사르크는 웃으며 말했다.

“푸흐흐. 던지면 맞혀서 돌려준다?”

평소 같으면 누군가 웃었을 것이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날 사르크는 마을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이 밤에 자주 깨기 시작했다.

창문에서 작은 소리가 나면 이빨연맹이 왔다고 생각했다.

바람에 금속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면 울었다.

경비대에서 전역한 한 남자는 자기 침실에 꽂혀 있던 칼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칼을 매일 갈았다.

다음에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르크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왜.”

주민이 대답했다.

“다음에는 가족이 있을 테니까요.”

“그때도 안 죽였잖아.”

사르크는 진심으로 말했다.

주민은 그녀를 바라봤다.

“우리는 그걸 몰랐습니다.”

사르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자신의 전술이었다.

몰라야 했다.

정말 죽일지 아닐지 알 수 없어야 공포가 커졌다.

그녀가 만들어놓은 불확실함을 사람들이 몇 달 뒤까지 가지고 살고 있었다.


더 불편한 일은 몇 년 뒤 일어났다.

이빨연맹의 보급대를 공격하는 작은 무장집단이 나타났다.

세레이온 정규군은 아니었다.

마을 청년들과 전직 경비병들이 만든 집단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방위대라고 불렀다.

안발룽 쪽에서는 복수대라고 불렀다.

사르크가 포로 하나를 심문했다.

젊은 인간 남자였다.

아직 수염도 제대로 자라지 않은 얼굴이었다.

사르크가 물었다.

“왜 우리 수레 털어.”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너희도 그랬잖아.”

“우린 식량 가져갔고.”

“그래.”

“넌 왜.”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너희 때문에 평생 겁쟁이라는 소리 들었어.”

사르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의 아버지는 과거 사르크가 겁을 줘 철수시켰던 경비병 중 하나였다.

살아남은 병사였다.

사르크가 살리고 싶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남자는 계속 말했다.

“아버지는 그날 도망쳤어.”

“응.”

“마을에서는 겁먹고 도망쳤다고 했지.”

“살았잖아.”

사르크는 습관처럼 대답했다.

남자가 웃었다.

기쁜 웃음이 아니었다.

“매일 그 얘기 들으면서 살았어.”

사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희가 다시 올까 봐 매일 칼 들고 잤고.”

“아버지는?”

“죽었어.”

“우리한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병으로.”

사르크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말했다.

“그래도 난 너희가 싫어.”

그 말은 논리적이지 않았다.

사르크에게는 그랬다.

자신들은 그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죽지 않게 싸움을 끝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은 싸우러 왔다.

자신이 살려둔 사람이 다음 전쟁의 이유가 되어 있었다.


사르크는 그날 포로를 죽이지 않았다.

원래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무기를 빼앗고 풀어주었다.

남자가 물었다.

“왜.”

사르크가 말했다.

“죽이면 네 친구들 더 화나잖아.”

“살려 보내면 안 화날 것 같아?”

사르크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돌아갔다.

그 질문은 남았다.

사르크의 계산에는 늘 오늘의 사망자가 있었다.

몇 명이 죽었는가.

몇 명이 다쳤는가.

얼마나 빨리 전투가 끝났는가.

하지만 몇 년 뒤 누가 무기를 들게 되는지는 계산하지 않았다.

공포는 오늘의 전쟁을 짧게 만들었다.

그 공포를 기억하며 자란 아이가 내일의 전쟁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은 사르크에게 꽤 불쾌한 문제였다.

자신의 신념을 완전히 버릴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긴 전투보다 짧은 공포가 낫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칼과 창이 몇 시간 동안 부딪치면 사람이 죽는다.

후퇴할 길이 없다면 끝까지 싸우게 된다.

적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전투를 계속한다.

그래서 사르크는 지금도 압도적인 첫 충격을 선호한다.

지휘관의 무기를 첫 순간에 날려버린다.

보초에게 자기가 이미 사각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계속 싸우면 죽는다’는 판단을 최대한 빨리 만들게 한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퇴로를 더 분명하게 만든다.


“저쪽 비워.”

기동대원이 물었다.

“포위 안 합니까?”

“안 해.”

“도망갑니다.”

사르크가 웃었다.

“그게 목적이야.”

예전의 사르크는 적이 도망갈 수 있다고 스스로 알아차리기를 기대했다.

지금은 일부러 보여준다.

한쪽 길에는 공격하지 않는다.

철수 신호를 명확하게 알린다.

무기를 버린 사람에게는 공격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공포 자체는 남긴다.

하지만 무엇을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지는 분명하게 만들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씨족이 몰살당했던 날,
어떻게 해야 공격이 멈추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사르크는 그 상황만큼은 다시 만들고 싶지 않다.


기동대에서도 그녀의 명령은 짧다.

“죽이지 마.”

“팔만.”

“말 끊어.”

“왼쪽 비워.”

“도망가면 쫓지 마.”

부하들은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사르크가 가장 과감하고 위협적인 지휘관인데,
실제 사살 명령은 생각보다 적기 때문이다.

한 대원이 물었다.

“겁주는 걸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죽이는 건 싫어합니까?”

사르크가 귀를 까딱였다.

“죽으면 무서워할 시간도 없잖아.”

부하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사르크는 웃었다.

“농담이야.”

잠시 뒤 덧붙였다.

“죽이면 다음에 걔 가족이 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나자르와 사르크는 잘 맞는 편이다.

둘 다 판단이 빠르다.

문제를 오래 끄는 것을 싫어한다.

싸울 이유가 끝났으면 싸움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르크는 나자르보다 공포 자체를 더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나자르가 말한다.

“너 너무 많이 겁줘.”

사르크가 웃는다.

“죽이는 것보단 싸잖아.”

“나중까지 겁먹으면?”

예전의 사르크라면 어깨를 으쓱했을 것이다.

지금은 잠깐 생각한다.

“그게 문제지.”

그렇다고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카레나와의 관계는 조금 다르다.

카레나는 이빨연맹의 인간 마을 습격을 문제 삼는다.

사르크도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이 남긴 공포가 동부 주민들에게 무엇으로 돌아오는지 직접 봤기 때문이다.

한번은 카레나가 말했다.

“너희가 겁주고 빠진 마을에서 복수대가 또 생겼어.”

사르크는 대답했다.

“알아.”

“그럼 방식 바꿔.”

“바꾸고 있어.”

카레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도 밤에 칼 꽂고 다니잖아.”

사르크가 씩 웃었다.

“목에 꽂는 것보다 낫지.”

카레나는 웃지 않았다.

사르크도 잠시 뒤 웃음을 거뒀다.

“근데.”

“뭐.”

“그냥 점잖게 싸우면 더 많이 죽어.”

그것이 사르크가 아직 놓지 못하는 부분이다.

공포가 후대의 증오를 만든다고 해서,
오늘 눈앞의 전투를 길게 끌 수도 없다.

그 사이에도 사람이 죽는다.


사르크는 언젠가 세레이온의 한 마을에서 아이와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열 살도 되지 않아 보이는 인간 여자아이였다.

사르크를 보자 처음에는 뒤로 물러났다.

긴 귀를 보고 이빨연맹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사르크가 말했다.

“안 잡아먹어.”

아이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토끼가 사람 먹는 거 봤어?”

아이도 모르게 조금 웃을 것 같다가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물었다.

“우리 아빠 죽였어?”

사르크의 웃음이 멈췄다.

“이름.”

아이가 말했다.

사르크는 모르는 이름이었다.

“몰라.”

그녀는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아이가 다시 말했다.

“사막 사람들이 죽였대.”

사르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는 누가 어느 부대였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안발룽.

이빨연맹.

긴 귀.

전부 하나의 얼굴로 섞여 있었다.

사르크는 자신 역시 어릴 때 성기사 갑옷을 보면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날 자기 씨족을 공격한 기사들의 얼굴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백색과 금속.

성창.

세레이온.

오랫동안 그것만 남아 있었다.


사르크는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자기가 죽인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다.

거짓 사과는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무섭지.”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그랬어.”

아이가 처음으로 그녀를 똑바로 봤다.

사르크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자기 과거를 들려준다고 아이의 아버지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 똑같이 피해자였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말은 너무 쉽게 책임을 흐린다.

다만 그날 이후 그녀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공포는 얼굴을 지운다.

상대가 누구인지 볼 여유를 없앤다.

사르크가 전투에서 원하는 효과가 바로 그것이었다.

생각할 시간도 없이 도망가게 만드는 것.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까지 얼굴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종족과 깃발만 보고 싸우게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 사르크는 전투 이후의 행동에도 관여한다.

기동대가 마을을 통과하면 불필요한 파괴를 금지한다.

벽에 협박문을 남길 때도 조건을 명확하게 적는다.

‘다시 오면 죽인다’보다,
‘이 길로 무장병력이 들어오면 공격한다’처럼 범위를 정한다.

무기를 내려놓은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

아이 앞에서 일부러 위협하는 부하가 있으면 바로 때려눕힌다.

한 대원이 항의했다.

“겁줘야 다음에 덤비지 않습니다.”

사르크는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병사한테 겁줘.”

“아이도 나중에는 병사 됩니다.”

사르크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러니까 만들지 말라고.”

그 말을 하고 나서 그녀 자신도 잠시 침묵했다.

자기가 이미 몇 명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르크가 갑자기 온화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적 앞에서 잘 웃는다.

침투한 뒤 상대 지휘관 바로 뒤에서 말한다.

“푸흐흐. 뒤 늦게 보는 버릇 있네.”

상대가 돌아보기도 전에 무기를 걷어찬다.

투척칼이 손가락 사이에서 날아간다.

침은 갑옷 사이의 틈을 노린다.

짧은 창은 달리는 힘까지 실어 던진다.

거리가 가까워지면 몸을 낮추고 상대의 중심 아래로 파고든다.

무거운 적일수록 방향을 바꾸기 어렵다는 것을 이용한다.

누군가 자신을 잡으려 하면 이미 다른 사각에 있다.

싸움을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장난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사르크 본인은 계산하고 있다.

어디까지 겁주면 물러날까.

어디까지 다치게 해야 다시 달려들지 못할까.

어디에 길을 열어줘야 도망갈까.

그것이 그녀의 전투다.

죽이는 기술보다,
계속 싸울 마음을 꺾는 기술.


다만 이제는 하나를 더 계산하려 한다.

이 사람이 살아 돌아간 뒤 무엇을 말할 것인가.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오늘 자신을 무서워한 사람이 내일 어떤 깃발 아래 설 것인가.

그 계산에는 답이 없다.

사르크는 그런 종류의 문제를 싫어한다.

칼의 거리와 투척각도는 계산할 수 있다.

사람의 기억은 그렇지 않다.

같은 일을 당해도 누군가는 다시 싸우지 않는다.

누군가는 평생 복수를 준비한다.

누군가는 자신이 겁먹었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사르크는 가끔 짜증스럽게 말한다.

“사람 머릿속이 제일 귀찮아.”

하지만 이제 무시할 수는 없다.

자신이 만들어낸 공포가 다음 전쟁의 병사가 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한번은 부하가 사르크에게 물었다.

“지휘관님 신념이 틀렸다고 생각합니까?”

사르크는 바로 대답했다.

“아니.”

“그럼 계속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

“방법이 덜 완성된 거지.”

부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르크는 모래 위에 선을 하나 그었다.

“여기서 싸움 시작해.”

선을 조금 뒤에 하나 더 그었다.

“여기서 끝났어.”

그리고 훨씬 멀리 세 번째 선을 그었다.

“근데 여기서 애가 칼 들면.”

잠시 모래를 바라봤다.

“그럼 끝난 게 아닌 거잖아.”

그것이 그녀가 최근 들어 가장 자주 고민하는 문제다.

전투가 끝나는 순간과,
전쟁이 끝나는 순간은 다를 수 있다.

사르크는 전자를 끝내는 데 아주 능숙하다.

후자는 아직 잘 모른다.


과거 씨족의 학살터에는 지금도 가끔 간다.

야영지가 있던 자리에는 오래된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았다.

사막은 흔적을 잘 지운다.

천막 자국도 사라졌다.

핏자국도 없다.

돌 몇 개만 남아 있다.

사르크는 그곳에 서면 귀를 움직이지 않는다.

일부러 힘을 뺀다.

아무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도 기억 속에서는 들린다.

말발굽.

금속.

비명.

그리고 자기가 계속 외쳤던 목소리.

“협상이야!”

아무에게도 제대로 닿지 못했던 말.

그 사건 이후 사르크는 말이 상대에게 전달됐다고 쉽게 믿지 않는다.

상대가 이해했는지도 확인한다.

특히 전투 직전에는 더 그렇다.

“지금 물러나면 안 쫓는다.”

한 번 말한다.

상대가 못 들은 것 같으면 더 크게 말한다.

깃발로도 표시한다.

퇴로도 열어둔다.

그다음에도 싸우겠다고 하면,
그때는 망설이지 않는다.


사르크는 여전히 공포가 전쟁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날에는 가장 자비로운 도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적이 싸우기 전에 달아난다면,
그날의 시체는 줄어든다.

그 사실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제 공포에는 이자가 붙는다는 것도 안다.

오늘 적게 흘린 피의 대가가,
몇 년 뒤 다른 형태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무섭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 물러나야 하는지.

어디로 물러날 수 있는지.

물러난 뒤에도 살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싸움이 끝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려줄 것인지.

사르크는 그 모든 것까지 전술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여전히 점잖은 말 뒤에 숨은 긴 전쟁이다.

“상황을 지켜보겠습니다.”

“추가 협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상대의 의도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긴 귀가 뒤로 눕는다.

필요한 말일 수 있다는 것은 안다.

그래도 묻는다.

“그동안 몇 명 죽는데?”

대답할 수 없다면 그녀는 움직이려 한다.

그 성급함이 다른 비극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래서 예전보다 한 번 더 확인한다.

전령이 갔는가.

받았는가.

현장 지휘관도 아는가.

상대가 퇴로를 이해했는가.

항복 조건을 들었는가.

그 질문들은 모두 오래전 편지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


현재의 사르크는 스물넷이다.

아직 젊다.

웃음도 많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입꼬리가 먼저 올라간다.

누군가는 그것을 잔혹함이라고 오해한다.

일부는 실제로 맞다.

사르크는 상대가 겁먹는 모습을 전술적으로 만족스럽게 볼 때가 있다.

하지만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하나다.

더 싸우지 않는 것.

문제는 그것을 이루는 방식이다.

공포로 오늘의 칼을 내리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공포가 내일 다른 손에 칼을 쥐게 만들 수도 있다.

사르크는 지금 그 모순 한가운데 있다.

그래서 전투가 끝난 뒤 예전보다 오래 현장을 본다.

몇 명이 죽었는지만 세지 않는다.

누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도 본다.

문 뒤의 아이.

다친 병사의 배우자.

겁먹어 무기를 버린 젊은 병사.

그들이 오늘 무엇을 기억하게 될지를 자신은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불필요한 것을 더 남기지는 않으려고 한다.


가끔 부하가 묻는다.

“저 부대 추격합니까?”

도망치는 적들이 보인다.

예전 같으면 사르크는 이미 답했을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 대답은 같다.

“아니.”

“다시 올 수도 있습니다.”

사르크가 웃는다.

“그럼 그때 또 겁주지 뭐.”

잠깐 뒤 표정이 조금 가라앉는다.

“오늘은 살아가게 둬.”

부하가 다시 묻는다.

“왜요?”

사르크는 멀어지는 병사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익숙한 웃음을 흘린다.

“푸흐흐.”

“한 번 무서워 달아난 병사는 내일 살아 있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투척칼 하나가 천천히 돌아간다.

“오래 싸운 병사는 누군가를 죽이지.”

예전에는 그 문장에서 끝났다.

지금의 사르크는 마음속으로 한 문장을 더 붙인다.

살아 돌아간 병사가,
내일 누구를 미워하게 될지도 잊지 말 것.

그것이 사르크 모래바람이 아직 배우고 있는 전쟁의 나머지 절반이다.


아슈카리 씨족2명
SIM
시메이라 나비구름
안발룽유리불분지-오아시스 스쿠티-아슈카리 씨족-잔향지기
“우후후...다 같이 웃었다고 끝난 건 아니란다... 안 웃은 사람이 왜 안 웃었는지도 들어야지?”
🩸 HP85
💪 공격력50
🧙 마법력30
✨ 신비력1
🛡️ 방어력25
🔗 항마력45
😖 신비저항60
🏃 회피력90
과거 보기
시메이라 나비구름은 축제가 시작되기 전보다,

끝난 뒤의 광장을 더 오래 기억한다.

음악이 멈춘 뒤.

횃불이 하나씩 꺼지고,

사람들이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고,

바람에 장식천만 흔들리는 시간.

그때가 되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시메이라를 찾아왔다.

---

시메이라는 유리불분지 중앙의 오아시스 스쿠티에서 태어났다.

아슈카리 씨족의 아이였다.

그녀가 처음 기억하는 소리도 축제의 북소리였다.

쿵.

따닥.

짤랑.

어른들이 박자를 맞췄고,

아이들이 그 사이를 뛰어다녔다.

시메이라도 그중 하나였다.

---

오아시스 스쿠티에는 축제가 많았다.

비가 왔을 때.

새 우물이 완성되었을 때.

상단이 무사히 돌아왔을 때.

아이가 성년이 되었을 때.

두 집안이 결혼했을 때.

오래 싸운 사람들이 화해했을 때.

죽은 사람을 보내줄 때도 축제를 열었다.

슬픈 축제였다.

그래도 노래는 있었다.

---

아슈카리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자주 말했다.

“우리는 레흐니티에서 화합을 배웠다.”

어린 시메이라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물었다.

“레흐니티 사람들도 이렇게 춤춰?”

어른이 웃었다.

“아마 우리만큼은 아닐걸.”

“그럼 뭘 배운 거야?”

“다른 목소리를 없애지 않고 같이 끝까지 듣는 법.”

시메이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재미없어.”

“그래서 우리가 춤을 붙인 거지.”

그 대답은 마음에 들었다.

---

어린 시메이라는 축제를 좋아했다.

예쁜 천을 좋아했다.

반짝이는 장식을 좋아했다.

방울 소리를 좋아했다.

사람들이 자기 꼬리를 보고 예쁘다고 말해주는 것도 좋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

사막여우 수인의 큰 귀는 멀리 있는 소리를 잘 들었다.

다른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속삭임도 들었다.

누가 뒤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지도 금방 알았다.

어느 날 또래 아이들이 천막 뒤에서 말했다.

“시메이라 또 저 옷 입었어.”

“자기가 예쁜 줄 아나 봐.”

시메이라는 천막 반대편에서 귀를 쫑긋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 나왔다.

아이들이 얼어붙었다.

시메이라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응.”

“뭐?”

“나 예쁜 줄 아는데?”

아이들이 아무 말도 못 했다.

시메이라는 만족했다.

그때부터였다.

남이 자기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조금 즐기게 된 것은.

---

시메이라는 사람을 놀리는 법도 빨리 배웠다.

말을 조금 느리게 했다.

웃음을 길게 흘렸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상대가 예상한 대답을 바로 해주지 않았다.

“우후후……”

그렇게 웃으면 어른들은 종종 말했다.

“또 여우 짓 한다.”

시메이라는 그 말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

처음에는 그냥 장난이었다.

그런데 자라면서 그것이 꽤 유용하다는 것을 알았다.

화난 사람은 정면에서 화를 받아치면 더 크게 소리쳤다.

반대로 시메이라가 웃으며 말하면 잠깐 멈췄다.

“우후후…… 그렇게 소리치면 내가 무섭잖니.”

“지금 내가 화 안 나게 생겼어?”

“아니.”

시메이라가 웃었다.

“그러니까 왜 화났는지부터 말해보렴.”

상대는 대개 한 번 더 화를 냈다.

그래도 결국 말했다.

---

시메이라는 말을 잘하는 아이보다,

듣는 것을 잘하는 아이였다.

누가 어떤 단어에서 잠깐 멈췄는지 기억했다.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목소리가 떨렸던 순간도 기억했다.

싫다고 소리쳤지만 정작 상대가 떠날 때 붙잡으려 했던 손도 봤다.

큰 귀가 소리를 들었다면,

시메이라는 그다음을 봤다.

---

그렇다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 말을 싫어했다.

누군가 말했다.

“시메이라는 듣기만 해도 거짓말인지 알겠네.”

시메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란다.”

“귀 좋잖아.”

“목소리 떤다고 거짓말하는 건 아니거든.”

“그럼 뭘 알아?”

시메이라가 웃었다.

“불편하다는 것 정도?”

“왜 불편한지는?”

“우후후……”

시메이라가 손가락으로 상대를 가리켰다.

“물어봐야지.”

---

아슈카리에서는 분쟁이 생기면 축제를 열었다.

말 그대로 축제를 위한 분쟁은 아니었다.

먼저 이야기했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 확인했다.

보상을 정했다.

서로의 요구를 들었다.

때로는 결투도 했다.

그 뒤 같은 불 앞에 앉았다.

먹었다.

마셨다.

노래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분쟁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

시메이라에게 그 모습은 아름다웠다.

정말로.

전날까지 서로 죽이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같은 탁자에 앉았다.

원한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부모가 미워했던 집안의 아이와 다시 놀았다.

칼을 뽑았던 사람들이 다음 날 같이 우물을 고쳤다.

시메이라는 아슈카리의 방식을 자랑스러워했다.

---

그녀가 잔향지기의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정식 직책도 아니었다.

축제 준비를 돕던 어느 날이었다.

두 가족이 물 사용권을 두고 크게 다퉜다.

어른들이 며칠 동안 중재했다.

결국 합의가 이루어졌다.

축제가 열렸다.

두 집안 대표가 같은 잔을 들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음악이 울렸다.

모두 웃었다.

시메이라도 웃었다.

---

그날 밤이었다.

축제가 거의 끝났다.

시메이라는 천막 뒤에서 장신구를 풀고 있었다.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큰 귀가 움직였다.

시메이라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갔다.

낮에 화해했던 집안의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

“어머.”

시메이라가 말했다.

“오늘의 주인공이 여기서 뭐 하니?”

여자가 황급히 얼굴을 닦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메이라는 웃었다.

“그래?”

“네.”

“그럼 갈게.”

정말 돌아섰다.

여자가 바로 말했다.

“잠깐만요.”

시메이라는 속으로 웃었다.

겉으로는 천천히 돌아봤다.

“응?”

---

여자가 말했다.

“저 아직 그 사람들 싫어요.”

시메이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합의했는데.”

“응.”

“사과도 받았어요.”

“응.”

“보상도 받았고.”

“응.”

여자가 주먹을 쥐었다.

“그런데 아직 싫어요.”

---

시메이라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러면 왜 웃었니?”

여자가 고개를 숙였다.

“다들 보고 있었으니까요.”

“누가 웃으라고 했어?”

“아뇨.”

“그럼?”

한참 뒤에 대답이 나왔다.

“안 웃으면 제가 망치는 것 같아서요.”

---

시메이라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누구도 웃으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누구도 용서하라고 협박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자는 웃어야 한다고 느꼈다.

축제가 그렇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기대가 그렇게 만들었다.

---

시메이라는 그날 처음 물었다.

“끝났다는 게 뭘까.”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한 질문이었다.

---

그 뒤부터 비슷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화해식에서는 웃었다.

그런데 며칠 뒤 상대가 지나가면 몸이 굳었다.

용서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같은 천막에는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보상을 받았다.

그래도 밤에는 울었다.

시메이라는 하나씩 들었다.

---

처음에는 어른들에게 말했다.

“그 사람 아직 안 끝났대.”

어른 하나가 웃었다.

“감정은 시간이 걸리지.”

“그럼 끝났다고 적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분쟁은 끝났잖니.”

“마음은?”

“그것까지 공동체가 어떻게 해결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시메이라는 더 고민했다.

---

다른 어른은 말했다.

“계속 들여다보면 끝난 싸움도 다시 시작된다.”

그 말도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아슈카리의 방식은 수많은 피를 막았다.

누군가 멈추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몇 년이고 이어졌을 복수도 있었다.

시메이라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

그래서 축제를 싫어하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좋아했다.

좋아했기 때문에 제대로 하고 싶었다.

---

시메이라는 작은 장부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이름도 없었다.

공식 화해기록과 다른 내용을 적었다.

`합의했으나 상대와 단둘이 있는 것은 거부.`

`보상 완료. 감정적 화해는 하지 않음.`

`공개적으로 용서했으나 이후 다시 울며 찾아옴.`

`같은 문제가 두 번째 반복될 가능성 있음.`

---

누군가 장부 표지를 보고 물었다.

“뭐 적어?”

시메이라가 바로 덮었다.

“우후후…… 여우의 비밀이란다.”

“별거 아니잖아.”

“별거 아니면 더 볼 필요 없겠네?”

그렇게 넘겼다.

---

나중에 시메이라는 장부에 이름을 붙였다.

`남은 소리.`

축제가 끝난 뒤에도 남아 있는 것들.

노래가 멈췄는데도 사라지지 않은 감정들.

시메이라는 그것들을 기록했다.

---

그 일을 오래 하면서 시메이라의 말투도 변했다.

사람을 긴장시키지 않는 법을 배웠다.

상대가 말하기 싫은 이야기를 억지로 끌어내지 않는 법도 배웠다.

조금 웃었다.

조금 장난쳤다.

조금 가까워진 뒤 질문했다.

---

“우후후…… 그래서 정말 괜찮니?”

“괜찮아요.”

“그렇구나.”

시메이라는 웃는다.

바로 다음 질문을 하지 않는다.

잠깐 기다린다.

상대가 다시 입을 연다.

“……사실은.”

시메이라는 그때 듣는다.

---

사람들은 시메이라가 굉장히 여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늘 웃었다.

상대를 놀렸다.

누가 시비를 걸어도 눈웃음을 지었다.

남자가 작업을 걸어오면 오히려 상대를 더 당황하게 만들었다.

여자가 칭찬하면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어머, 계속 그러면 나 착각한단다?”

상대가 얼굴을 붉히면 만족스럽게 웃었다.

---

그런 시메이라에게도 아무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연애소설이었다.

---

처음에는 우연이었다.

스쿠티를 지나던 상단의 헌책더미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표지에는 남녀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막 끝에서 당신을 기다리며.`

시메이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촌스러워.

그리고 샀다.

---

그날 밤 절반을 읽었다.

다음 날 나머지를 다 읽었다.

마지막 장에서 울었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

주인공들이 오해 때문에 헤어지는 장면에서는 책을 덮었다.

“그냥 말하면 되잖아.”

다시 펼쳤다.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아, 진짜……”

몇 줄 뒤 다시 읽었다.

끝까지 다 읽었다.

---

그 뒤로 한 권이 두 권이 됐다.

두 권이 다섯 권이 됐다.

시메이라는 책을 다른 서류 뒤에 숨겼다.

누가 방에 오면 가장 먼저 그쪽을 확인했다.

---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능청스러웠다.

누군가 연애상담을 하면 턱을 괴고 웃었다.

“우후후…… 그 정도도 모르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말해야지.”

“뭐라고?”

시메이라는 연애소설에서 읽은 문장을 세 개쯤 떠올렸다.

그리고 가장 평범한 말을 골랐다.

“좋아한다고.”

---

정작 누군가 시메이라에게 물으면 달랐다.

“너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

“어머.”

시메이라가 웃었다.

“왜, 관심 있니?”

“아니, 그냥 물어본 건데.”

“그럼 비밀.”

능숙하게 넘겼다.

실제로 대답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자기에게 돌아오는 순간에는,

생각보다 훨씬 약했기 때문이다.

---

시메이라의 그런 모습을 가장 먼저 조금 눈치챈 사람은 카레나 벼락걸음이었다.

정확히는 연애소설까지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그건 아직 시메이라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카레나가 알아챈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시메이라가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것.

---

두 사람이 가까워진 것은 카레나가 아직 지금처럼 수많은 씨족의 일을 짊어지기 전부터였다.

카레나는 종종 스쿠티에 왔다.

회의 때문일 때도 있었다.

물을 구하러 올 때도 있었다.

사람을 만나러 올 때도 있었다.

그리고 축제가 있으면 거의 반드시 끼어들었다.

---

카레나는 시끄러웠다.

시메이라도 조용한 편은 아니었지만,

종류가 달랐다.

카레나는 웃으면 광장 반대편에서도 들렸다.

“하핫!”

시메이라는 처음 몇 번 귀를 눌렀다.

“카레나.”

“왜?”

“내 귀가 사람 귀보다 크다는 건 알고 있니?”

“알지!”

“그럼 조금만 작게 웃어주렴.”

카레나가 크게 웃었다.

“싫어!”

시메이라는 그때부터 조금 싫어했다.

며칠 뒤에는 친구가 됐다.

---

둘은 성격이 꽤 달랐다.

카레나는 생각하면 몸부터 움직였다.

시메이라는 웃으면서 상대가 무슨 말을 더 할지 기다렸다.

카레나는 힘이 있으면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메이라는 쓸 필요가 있는지 먼저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야기는 잘 통했다.

---

카레나는 시메이라에게 자기 고민을 꽤 솔직하게 말했다.

우물 이야기.

씨족 이야기.

누구에게 나누라고 명령하는 것이 정말 옳은지.

자기가 힘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어디까지 결정해도 되는지.

시메이라는 대부분 듣기만 했다.

그리고 가끔 물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뭐라고 했니?”

카레나는 그 질문을 싫어하지 않았다.

---

반대로 시메이라가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항상 이상하게 끝났다.

카레나가 물었다.

“너는 요즘 어때?”

“나?”

시메이라가 눈웃음을 지었다.

“우후후…… 나를 그렇게 걱정해주는 거니?”

“그래.”

대답이 너무 빨랐다.

시메이라가 잠깐 멈췄다.

“……재미없게 바로 대답하네.”

---

카레나는 시메이라의 그런 버릇을 알고 있었다.

정말 대답하기 싫을 때 더 많이 웃는다는 것.

농담으로 넘기려 할수록 말꼬리가 더 부드러워진다는 것.

상대에게 질문을 되돌려주면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

한 번은 큰 축제가 끝난 다음 날이었다.

시메이라는 밤새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사람은 남편과 화해했다고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기 무섭다고 했다.

한 사람은 형제와 손을 잡았지만 아직 용서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 사람은 모두 앞에서 웃고 난 뒤 혼자 울었다.

시메이라는 전부 기록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

아침에 눈을 뜨니 카레나가 앞에 앉아 있었다.

시메이라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뭐 하는 거니?!”

카레나가 웃었다.

“오.”

“뭐가 오야?”

“방금 평범하게 말했어.”

시메이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가.”

“그것도 평범하네.”

“카레나.”

“응.”

“진짜 나가.”

---

카레나는 나가지 않았다.

시메이라에게 물주머니를 던졌다.

“마셔.”

“왜?”

“네 꼴 봐.”

시메이라는 물을 받아들었다.

“아름답다는 말로 들을게.”

“눈 밑 새까맣다.”

“매혹적이지?”

“안 자면 쓰러져.”

“쓰러지면 네가 업어주렴.”

카레나가 바로 대답했다.

“그래.”

시메이라는 또 말이 막혔다.

---

카레나가 말했다.

“시메이라.”

“응?”

“남들 얘기만 듣지 마.”

이번에는 시메이라가 웃지 않았다.

카레나는 계속했다.

“네 것도 좀 말해.”

“무슨 이야기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면서 말하라니 너무 무책임한데?”

“그게 친구지.”

---

시메이라는 그 말을 우스운 말처럼 넘겼다.

“우후후…… 아주 든든한 친구를 뒀네.”

하지만 기억했다.

카레나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

카레나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시메이라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시메이라는 싸울 줄 알았다.

사막여우 수인답게 빨랐다.

귀가 좋았다.

상대의 발소리와 장비가 스치는 소리를 빨리 잡아냈다.

쌍곡도와 짧은 사슬도 익숙하게 다뤘다.

도망쳐야 할 때 도망칠 줄도 알았다.

---

카레나가 걱정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

시메이라가 타인의 감정을 너무 오래 들고 다닌다는 것.

남들은 이야기하고 돌아간다.

조금 가벼워진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시메이라에게는 하나씩 남는다.

장부에도 남고,

머릿속에도 남는다.

---

카레나는 가끔 말했다.

“네가 다 해결할 필요 없어.”

시메이라가 웃었다.

“해결한다고 한 적 없는데?”

“그래도 다 기억하잖아.”

“내 귀가 좋아서 어쩔 수 없단다.”

“그 얘기 아니야.”

시메이라는 그때마다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

나자르 물결바람과 처음 만난 것은 훨씬 나중이었다.

시메이라는 첫날부터 그를 싫어했다.

나자르도 마찬가지였다.

---

이빨연맹의 연맹장.

리자드맨.

커다란 언월도.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을 싫어하는 남자.

생각을 끝내기 전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남자.

적어도 시메이라 눈에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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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르가 스쿠티에 온 날,

아슈카리 사람들과 이빨연맹 사이에 작은 분쟁이 있었다.

이빨연맹 전사들이 오아시스 외곽 창고의 물자를 가져갔다.

그들 주장으로는 오래전에 받지 못한 거래대금의 일부였다.

아슈카리 쪽에서는 도둑질이라고 했다.

나자르는 부정하지 않았다.

“가져갔다.”

시메이라가 물었다.

“허락은 받았니?”

“안 받았다.”

“그럼 보통 도둑질이라고 한단다.”

“알아.”

시메이라는 그 대답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우후후…… 뻔뻔하기도 해라.”

나자르가 그녀를 봤다.

“뭐가 웃겨?”

“네 얼굴?”

“너 원래 그렇게 말해?”

“너는 원래 그렇게 무례하니?”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마.”

시메이라의 미소가 조금 커졌다.

“싫은데?”

그날부터였다.

---

둘은 놀라울 정도로 안 맞았다.

시메이라는 나자르가 너무 빨리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나자르는 시메이라가 쓸데없이 말을 예쁘게 꾸민다고 생각했다.

시메이라는 나자르에게 말했다.

“세상 모든 문제가 언월도로 두드리면 해결되는 줄 아니?”

나자르가 대답했다.

“적어도 네 말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단 빠르지.”

시메이라의 꼬리가 부풀었다.

“우후후……”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 웃음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

나자르는 아슈카리의 화합 방식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분쟁을 축제로 끝내는 것을 보고 말했다.

“끝났으면 끝난 거지 왜 춤을 춰?”

시메이라가 대답했다.

“네가 모르는 문명이란다.”

“싸웠으면 조건 정하고 헤어지면 되잖아.”

“그러니까 네가 친구가 없는 거야.”

“너랑 친구 할 바엔 없어도 돼.”

“어머,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인데?”

---

그렇다고 시메이라가 나자르를 단순한 약탈자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몇 번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자기 행동을 좋게 꾸미지 않았다.

훔쳤으면 훔쳤다고 했다.

싸웠으면 싸웠다고 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인정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그대로 말했다.

시메이라는 그 부분만큼은 싫어하지 않았다.

인정해주지는 않았다.

---

나자르 역시 시메이라를 단순히 말만 많은 여우라고 생각하지는 않게 됐다.

어느 분쟁에서였다.

한 사람이 울면서 말했다.

“다 괜찮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이제 끝났다고 했다.

나자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시메이라가 말했다.

“앉아.”

나자르가 눈을 좁혔다.

“끝났잖아.”

“아직.”

---

시메이라는 웃지 않았다.

상대에게 물었다.

“정말 끝났니?”

사람이 대답했다.

“네.”

“그럼 왜 아까부터 출구만 보고 있어?”

침묵이 흘렀다.

결국 숨겨진 이야기가 하나 더 나왔다.

보복이 두려웠다.

공개적으로는 합의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찾아올까 무서웠다.

나자르는 다시 앉았다.

그날만큼은 시메이라에게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

그리고 얼마 뒤,

둘이 처음으로 같은 편에서 싸울 일이 생겼다.

---

오아시스 스쿠티 외곽에 몬스터 무리가 나타났다.

유리불분지의 열기에 맥류가 뒤틀린 짐승들이었다.

축제를 앞두고 외부 상단이 몰려오던 시기였다.

사람이 많았다.

아이도 많았다.

도망칠 길은 좁았다.

---

경보가 울렸다.

나자르가 가장 먼저 언월도를 잡았다.

시메이라가 혀를 찼다.

“역시 생각보다 칼이 먼저네.”

나자르가 말했다.

“지금 이야기할래?”

“아니.”

시메이라가 쌍곡도를 뽑았다.

“저건 말이 안 통하잖니.”

---

첫 번째 몬스터가 돌진했다.

나자르가 앞으로 나갔다.

언월도가 크게 휘둘러졌다.

시메이라는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말하지 않았다.

나자르가 공격하는 방향을 봤다.

어디가 비는지 바로 알았다.

그쪽으로 들어갔다.

---

두 번째가 나자르의 옆을 노렸다.

시메이라의 사슬이 먼저 날아갔다.

다리를 걸었다.

균형이 무너졌다.

나자르의 언월도가 그 순간 들어갔다.

시메이라가 소리쳤다.

“왼쪽.”

나자르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자루를 뒤로 밀었다.

다가오던 놈의 머리가 꺾였다.

---

나자르가 말했다.

“뒤.”

시메이라도 묻지 않았다.

몸을 낮췄다.

나자르의 언월도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시메이라를 노리던 몬스터가 밀려났다.

그 아래로 시메이라가 파고들었다.

쌍곡도가 움직였다.

---

둘은 한 번도 훈련을 같이 한 적이 없었다.

전투방식도 달랐다.

나자르는 정면을 찢었다.

시메이라는 빈틈을 탔다.

나자르가 크게 움직이면 시메이라가 그 그림자 안으로 들어갔다.

시메이라가 상대의 시선을 빼앗으면 나자르가 가장 짧은 길로 밀고 들어왔다.

말은 거의 필요하지 않았다.

---

싸움이 끝났다.

시메이라는 숨을 골랐다.

나자르도 언월도를 내렸다.

둘이 서로를 봤다.

잠깐 침묵했다.

나자르가 먼저 말했다.

“쓸 만하네.”

시메이라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

“너.”

“우후후……”

시메이라가 곡도를 들었다.

“지금 죽여줄까?”

“방금 살려줬는데?”

“그거랑 이거랑 다르지.”

둘의 관계는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전투호흡만 좋아졌다.

---

그 뒤로도 몇 번 같은 일이 있었다.

평소에는 만나자마자 싸웠다.

“느려.”

“네가 성급한 거란다.”

“쓸데없는 말 줄여.”

“쓸데없는 약탈부터 줄이렴.”

“여우.”

“도마뱀.”

둘 중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

그런데 전투가 시작되면 달랐다.

시메이라가 한마디 했다.

“셋.”

나자르는 셋이 어디 있는지 묻지 않았다.

시메이라의 귀가 이미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자르가 말했다.

“간다.”

시메이라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봤다.

자기가 비워야 할 자리를 알았다.

---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너희 친한 거 아니야?”

시메이라와 나자르가 동시에 대답했다.

“아닌데?”

“아니다.”

둘은 서로를 봤다.

시메이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따라 하지 마.”

나자르가 바로 대답했다.

“네가 따라 했잖아.”

다시 싸웠다.

---

카레나는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하핫! 잘 맞는데?”

시메이라가 바로 말했다.

“카레나.”

“응?”

“그 말 취소해.”

“싫어!”

나자르도 말했다.

“나도 싫다.”

카레나는 더 크게 웃었다.

시메이라가 귀를 눌렀다.

“아, 정말 둘 다 싫어.”

---

잔향지기가 된 뒤 시메이라는 공식적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는 분쟁 당사자를 따로 만났다.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사과인지.

보상인지.

거리인지.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것인지.

그것부터 확인했다.

---

시메이라는 이제 화해라는 말을 쉽게 쓰지 않는다.

누군가 말했다.

“둘이 악수했으니 화해한 거죠?”

시메이라가 웃었다.

“우후후…… 글쎄?”

“악수했잖아요.”

“손 잡았다고 마음까지 붙은 건 아니잖니.”

“그럼 뭐라고 적어요?”

시메이라가 장부를 펼친다.

“오늘 서로 때리지 않기로 합의.”

“그게 끝이에요?”

“그게 오늘 끝난 만큼이란다.”

---

아슈카리 사람들 가운데 시메이라의 방식을 답답해하는 사람도 생겼다.

“왜 끝난 일을 계속 확인해?”

“끝났는지 보려고.”

“끝났다고 했잖아.”

“누가?”

“다들.”

시메이라가 웃었다.

“당사자도?”

그 질문에서 대화가 멈추는 경우가 많았다.

---

시메이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슈카리의 방식이 틀렸다는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아슈카리의 방식은 너무 자주 옳았다.

실제로 사람을 살렸다.

복수를 멈췄다.

원한을 끊었다.

서로 다른 씨족을 같은 자리에 앉혔다.

---

그래서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잘 작동하는 방식은 의심받기 어렵다.

수십 번 사람을 살린 방법이라면,

한 번 누군가를 짓눌렀을 때도 사람들이 말한다.

“그래도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시메이라는 그 말을 이해한다.

그리고 경계한다.

---

어느 해에는 큰 사건이 있었다.

두 집안 사이의 폭행사건이었다.

가해자는 잘못을 인정했다.

보상도 했다.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피해자의 가족도 합의를 받아들였다.

족장들은 축제를 준비했다.

모든 것이 평소처럼 끝날 것 같았다.

---

시메이라는 피해자를 따로 만났다.

“축제에 나올 거니?”

상대가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나가야 하죠.”

시메이라의 귀가 조금 움직였다.

“왜?”

“다 끝났으니까.”

“그건 이유가 아닌데?”

“다들 기다리잖아요.”

시메이라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

“나가기 싫니?”

작은 대답이 돌아왔다.

“네.”

“그 사람 보기 싫고?”

“네.”

“용서는?”

“못 했어요.”

“할 생각은?”

“지금은 없어요.”

---

시메이라는 장부를 덮었다.

“그럼 나오지 마.”

상대가 놀랐다.

“그래도 돼요?”

시메이라가 웃었다.

이번에는 능청스러운 웃음이 아니었다.

“안 될 이유가 있니?”

---

문제가 생겼다.

축제의 의미가 약해진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사자가 참석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화해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시메이라는 대답했다.

“화해 안 했는데?”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합의는 했잖아.”

“응.”

“사과도 받았고.”

“응.”

“그럼?”

시메이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게 용서까지 한 거야?”

---

그날 처음으로 시메이라는 씨족의 오래된 방식에 공개적으로 선을 그었다.

축제는 열렸다.

피해자는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는 불편해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노래는 계속됐다.

사람들은 먹고 마셨다.

분쟁은 다시 시작되지 않았다.

---

시메이라는 그날 하나를 배웠다.

화합에는 반드시 같은 감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같은 식탁에 앉지 않아도 칼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

용서하지 않아도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다시는 만나지 않는 것도 하나의 평화가 될 수 있다는 것.

---

카레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스쿠티까지 찾아왔다.

시메이라가 말했다.

“설마 칭찬하러 왔니?”

“걱정돼서.”

“또?”

“응.”

시메이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넌 나를 너무 약하게 보는 것 같단다.”

카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반대야.”

---

“너 안 약해.”

카레나가 말했다.

“그러니까 계속 혼자 버티잖아.”

시메이라의 미소가 아주 조금 멈췄다.

“그게 왜 걱정인데?”

“강한 놈들이 제일 늦게 도움 청하거든.”

카레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말했다.

시메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

카레나가 덧붙였다.

“힘 남으면 네 것 아니야.”

시메이라가 피식 웃었다.

“그 말 또 하네.”

“네가 남들 짐 들어줄 힘이 있으면 들어줘.”

“이미 그러고 있는데?”

“그래.”

카레나가 시메이라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그럼 네 짐 들 사람한테도 좀 줘.”

시메이라는 그 말을 듣고 한참 아무 말도 못 했다.

---

결국 평소처럼 웃었다.

“우후후…… 꽤 그럴듯한 말이네.”

카레나가 말했다.

“지금 피했지?”

“뭘?”

“또 그러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시메이라.”

“카레나.”

둘은 한참 서로를 봤다.

결국 카레나가 먼저 웃었다.

---

시메이라는 아직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남의 감정을 듣는 일은 쉽다.

자기 감정을 말하는 건 어렵다.

누군가에게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것은 쉽다.

진심으로 당황한 얼굴을 보여주는 건 어렵다.

---

특히 연애 이야기는 더 그렇다.

어느 날 카레나가 시메이라의 방에 들어오려 했다.

“시메이라!”

시메이라가 안에서 소리쳤다.

“잠깐!”

평소와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카레나가 문 앞에서 멈췄다.

“뭐 해?”

“아무것도!”

“왜 소리 질러?”

“소리 안 질렀거든?!”

---

시메이라는 황급히 책을 이불 밑에 넣었다.

표지가 잠깐 보였다.

`왕녀는 사막의 용병을 사랑했다.`

시메이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문밖에서 카레나가 말했다.

“진짜 괜찮아?”

“괜찮다니까!”

“왜 갑자기 말 빨라졌어?”

“안 빨라졌어!”

“지금 엄청 빠른데.”

“가!”

---

다행히 카레나는 들어오지 않았다.

책도 보지 못했다.

시메이라는 한동안 문을 노려봤다.

그리고 이불 밑에서 책을 꺼냈다.

“……큰일 날 뻔했네.”

아무도 듣지 못했다.

아마도.

시메이라는 그렇게 믿는다.

---

나자르에게 이 비밀이 알려지는 것만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시메이라는 확신한다.

죽을 때까지 놀릴 인간…… 아니,

리자드맨이다.

---

나자르와의 관계는 지금도 나쁘다.

아주 나쁘다.

둘이 같은 회의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좌석부터 떨어뜨려 놓는다.

그래도 소용없다.

멀리서도 싸운다.

---

“나자르.”

“왜.”

“그건 계획이 아니라 돌진이라는 거란다.”

“네 건 계획이 아니라 잡담이고.”

“말을 해야 다른 사람이 뭘 원하는지 알지.”

“칼 들고 달려오는 놈한테도 물어볼 거냐?”

“너는 밥 먹기 전에도 언월도한테 허락받니?”

“무슨 소리야?”

“그냥 네가 싫다는 소리.”

“나도.”

---

그러다 경보가 울리면 둘 다 동시에 일어난다.

싸우던 내용도 잊는다.

나자르가 먼저 출구로 간다.

시메이라는 반대쪽 장비함으로 간다.

둘이 누가 어디로 가라고 정한 적은 없다.

그런데 항상 자리가 나뉜다.

---

한 번은 카레나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진짜 왜 그렇게 잘 맞아?”

시메이라가 곡도를 닦으며 말했다.

“전투할 때는 저 도마뱀이 말을 별로 안 하잖니.”

나자르가 옆에서 말했다.

“전투할 때는 저 여우도 필요한 말만 한다.”

둘은 동시에 멈췄다.

서로를 봤다.

시메이라가 먼저 말했다.

“방금 나랑 의견 같았니?”

나자르가 인상을 썼다.

“기분 더럽네.”

“나도.”

카레나는 뒤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

시메이라가 나자르를 싫어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너무 빨리 행동한다.

사람에게 말할 시간이 남아 있는데도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

다른 선택이 있는지 충분히 찾지 않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시메이라는 그것을 위험하게 본다.

---

나자르가 시메이라를 싫어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그녀는 너무 오래 듣는다.

사람이 당장 굶고 있는데도 모두의 마음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정을 미루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피해를 본다.

나자르는 그것을 위험하게 본다.

---

그래서 둘의 싸움은 생각보다 진지하다.

단순히 성격이 안 맞는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가.

언제부터 움직여야 하는가.

상대의 말을 기다리는 동안 잃는 것은 무엇인가.

너무 빨리 행동하면서 놓치는 것은 무엇인가.

둘은 서로 반대편에서 같은 문제를 보고 있다.

본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

현재 시메이라는 스쿠티의 잔향지기다.

축제가 시작되면 가장 화려한 옷을 입는다.

후드와 베일을 두른다.

황금 장식이 흔들린다.

꼬리가 천 사이로 움직인다.

사람들 앞에서는 늘 익숙한 미소를 짓는다.

---

“우후후…… 다 같이 웃었다고 끝난 건 아니란다……”

시메이라는 장부를 펼친다.

“안 웃은 사람이 왜 안 웃었는지도 들어야지?”

그 말투만 들으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다.

어떤 감정도 능숙하게 다룰 것 같다.

---

실제로 남의 감정은 꽤 잘 다룬다.

누군가 울면 기다린다.

누군가 화내면 듣는다.

누군가 말하기 싫다고 하면 강요하지 않는다.

화해하고 싶다고 하면 방법을 찾는다.

화해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것도 기록한다.

---

문제는 자기 차례다.

카레나가 묻는다.

“힘들어?”

시메이라는 웃는다.

“어머, 걱정해주는 거니?”

나자르가 짜증낸다.

“질문에 대답해.”

시메이라가 바로 돌아본다.

“넌 빠져.”

“왜.”

“네 걱정은 필요 없거든.”

“걱정한 적 없어.”

“그럼 더 빠져.”

카레나는 한숨을 쉰다.

---

시메이라는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능청스러운 것도 자신이다.

사람을 놀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자신이다.

화려한 옷을 좋아한다.

자기가 예쁘다는 것도 안다.

상대를 당황시키는 것도 재미있다.

전부 진짜다.

---

다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책 한 권의 고백 장면에 얼굴을 붉히는 것도 시메이라다.

친구가 진심으로 걱정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지는 것도 시메이라다.

누군가 자기 마음을 정확히 짚으면 능숙한 웃음부터 찾는 것도 시메이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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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향지기로 수많은 사람에게 말해왔다.

끝나지 않았으면 끝났다고 말할 필요 없다고.

용서하지 않았으면 용서했다고 웃지 않아도 된다고.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해도 된다고.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그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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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나가 걱정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시메이라는 다른 사람에게는 남아 있는 감정을 허락한다.

자기 감정은 웃음 뒤에 정리해버린다.

남에게는 서두르지 말라고 한다.

자기는 빨리 괜찮은 얼굴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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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메이라도 그 모순을 조금씩 알고 있다.

아직 고치지는 못했다.

어쩌면 고칠 생각이 없는 부분도 있다.

여유로운 시메이라도 진짜 자신이니까.

소녀처럼 당황하는 시메이라도 진짜 자신이고.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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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즘은 아주 가끔,

카레나가 물으면 농담 대신 제대로 대답한다.

“요즘 어때?”

시메이라는 입을 연다.

평소라면 웃었을 순간이다.

잠깐 망설인다.

“……조금 피곤해.”

카레나는 아무 말 없이 물을 건넨다.

시메이라가 받는다.

“그게 끝이야?”

“오늘은.”

카레나가 웃는다.

“그럼 됐어.”

시메이라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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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르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 없다.

절대로.

적어도 시메이라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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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느 전투가 끝난 뒤였다.

시메이라가 팔을 다쳤다.

크게 다친 것은 아니었다.

혼자 붕대를 감으려 했다.

한 손으로는 잘 되지 않았다.

몇 번 실패했다.

뒤에서 나자르가 봤다.

“줘.”

시메이라가 바로 말했다.

“싫어.”

“그럼 계속 그렇게 해.”

나자르가 돌아섰다.

시메이라가 말했다.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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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르가 돌아봤다.

시메이라는 붕대를 내밀었다.

“이상하게 묶으면 죽일 거야.”

“입 다물어.”

“환자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

“손 치워.”

“우후후…… 다정하기도 해라.”

“놔두고 간다.”

“미안.”

나자르의 손이 잠깐 멈췄다.

시메이라도 멈췄다.

자기가 너무 자연스럽게 사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붕대를 다 감은 나자르가 말했다.

“끝.”

시메이라가 팔을 봤다.

의외로 잘 묶였다.

“생각보다 잘하네.”

“다친 놈 많아서.”

“칭찬받았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싫어.”

시메이라가 웃었다.

“그래. 역시 넌 그게 낫다.”

다음 날 둘은 다시 싸웠다.

---

시메이라에게 카레나는 친구다.

자기가 웃음으로 말을 피하는 순간을 알아보는 친구.

시메이라가 남의 짐만 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사람.

그 걱정이 가끔 귀찮다.

그래도 싫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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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르는 싫어하는 사람이다.

지금도 싫다.

말하는 방식도 싫다.

성급한 판단도 싫다.

얼굴만 보면 한마디 하고 싶다.

그런데 등을 맡길 수는 있다.

그게 더 짜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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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슈카리는 시메이라가 사랑하는 씨족이다.

그래서 의심한다.

싫어서가 아니다.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화합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가 자기 감정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남았으면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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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오늘도 열린다.

북소리가 난다.

방울이 울린다.

사람들이 춤춘다.

화해한 사람들이 같은 잔을 든다.

시메이라도 웃는다.

정말 즐거워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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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축제가 끝난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누군가 돌아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낮에는 웃었던 사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괜찮다고 했던 사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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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오면 시메이라는 자리를 내준다.

서두르지 않는다.

장부도 바로 펼치지 않는다.

먼저 웃는다.

“우후후……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니?”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면,

시메이라는 듣는다.

---

노래가 끝났다고 마음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니까.

다 같이 웃었다고 모두가 같은 이유로 웃은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이 물어볼 생각이다.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니?”

그때만큼은 능청스러운 웃음으로 넘기지 않고,

제대로 대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NSH
니샤라 우레구름
안발룽유리불분지-오아시스 스쿠티-아슈카리 씨족-축제호위
“옷 입은 것만 보고 내가 춤만 출 줄 알았어? 그럼 가까이 와 보던지.”
🩸 HP110
💪 공격력75
🧙 마법력5
✨ 신비력1
🛡️ 방어력45
🔗 항마력35
😖 신비저항40
🏃 회피력80
과거 보기
니샤라 우레구름은 어릴 때부터 축제를 좋아했다.

춤도 좋아했다.

음악도 좋아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도 좋아했다.

다만 한 가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춤추는 것보다 싸우는 게 조금 더 재미있었다.

---

니샤라는 유리불분지 중앙의 오아시스 스쿠티에서 태어났다.

아슈카리 씨족의 인간이었다.

부모도 평범한 씨족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축제용 천과 장신구를 만들었고,

아버지는 오아시스를 오가는 상단의 짐과 물을 관리했다.

둘 다 전사는 아니었다.

---

그래서 부모는 어린 니샤라가 싸움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물었다.

“왜 또 싸웠니?”

니샤라가 대답했다.

“이겼어.”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그럼 뭐 물었는데.”

“왜 싸웠냐고.”

니샤라는 잠깐 생각했다.

“걔가 하자고 해서.”

“그럼 싫다고 하면 되잖니.”

“나도 하고 싶었는데.”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

니샤라는 성질이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먼저 약한 아이를 괴롭히지도 않았다.

돈을 빼앗지도 않았다.

사람이 싫어서 때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승부가 좋았다.

달리기.

씨름.

팔씨름.

나무막대 싸움.

모래 위에서 상대를 먼저 넘어뜨리는 놀이.

무엇이든 이기고 지는 것이 분명하면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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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씨름을 좋아했다.

상대가 자기보다 커도 상관없었다.

허리를 잡았다.

중심을 낮췄다.

다리를 걸었다.

넘겼다.

실패하면 자기도 같이 모래를 먹었다.

니샤라는 입안의 모래를 뱉으며 말했다.

“다시.”

상대가 물었다.

“안 아파?”

“아파.”

“그런데 또 해?”

“이번엔 이길 거니까.”

어릴 때부터 그런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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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슈카리에서는 아이들에게 춤도 가르쳤다.

축제 때 모두가 같은 박자를 탈 수 있도록.

니샤라도 배웠다.

못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했다.

발을 옮기는 속도가 빨랐다.

균형감각도 좋았다.

박자를 놓치는 일도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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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선생이 말했다.

“니샤라, 좀 부드럽게.”

니샤라가 발을 멈췄다.

“하고 있는데.”

“너 지금 상대를 걷어찰 것처럼 움직여.”

“안 걷어차잖아.”

“춤이라고.”

“알아.”

“싸움 아니고.”

니샤라는 잠깐 생각했다.

“발 쓰는 건 비슷한데.”

선생은 그날 수업을 조금 일찍 끝냈다.

---

니샤라는 한쪽만 고르지 않았다.

예쁜 옷도 좋아했다.

몸에 장신구를 두르는 것도 싫지 않았다.

축제에서는 친구들과 춤췄다.

음악이 끝나면 훈련장으로 갔다.

겉옷을 걷어 올렸다.

손목을 풀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랑 붙을 사람.”

늘 누군가는 나왔다.

---

니샤라가 사르크 모래바람을 처음 만난 것도 어린 시절이었다.

사르크의 씨족이 스쿠티에 머물던 계절이었다.

그들은 한곳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가축과 짐을 따라 이동했고,

계절에 따라 여러 오아시스를 오갔다.

스쿠티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사르크는 매년 몇 번씩 나타났다.

---

첫 만남은 별로 특별하지 않았다.

니샤라가 간식을 잃어버렸다.

축제 준비를 위해 만들어둔 꿀과자였다.

분명 천막 뒤 상자에 넣어뒀다.

그런데 사라졌다.

니샤라는 주변을 봤다.

아무도 없었다.

---

그때 위에서 소리가 났다.

“푸흐흐.”

니샤라가 고개를 들었다.

천막 지지대 위에 사막토끼 수인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긴 귀.

손에는 니샤라의 꿀과자.

입에는 이미 하나가 들어가 있었다.

---

니샤라가 말했다.

“내놔.”

사르크가 과자를 씹었다.

“싫은데.”

“내 거야.”

“이름 안 써 있었어.”

“상자 안에 있었잖아.”

“그래서?”

니샤라는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지지대를 걷어찼다.

---

사르크가 재빨리 뛰어내렸다.

“야!”

니샤라가 달려들었다.

사르크는 웃으며 도망갔다.

“잡아봐!”

니샤라는 잡으려고 했다.

못 잡았다.

사르크가 너무 빨랐다.

---

니샤라는 끝까지 쫓았다.

광장을 한 바퀴 돌았다.

우물도 돌았다.

염료통을 뛰어넘었다.

상인의 수레 사이를 빠져나갔다.

사르크는 계속 웃었다.

“푸흐흐. 느려!”

니샤라가 이를 악물었다.

“잡히면 죽었어.”

“그럼 안 잡히면 되지.”

---

결국 사르크가 모래 위의 돌에 발을 잘못 디뎠다.

아주 잠깐이었다.

니샤라는 놓치지 않았다.

허리를 잡았다.

둘이 같이 굴렀다.

사르크가 모래를 먹었다.

니샤라도 먹었다.

---

둘이 한동안 엉켜 싸웠다.

사르크가 빨랐다.

니샤라가 힘이 셌다.

사르크가 빠져나갔다.

니샤라가 다시 잡았다.

사르크가 다리를 걸었다.

니샤라가 몸을 틀어 같이 넘어뜨렸다.

결국 둘 다 지쳤다.

---

모래 위에 누운 사르크가 말했다.

“너 진짜 끈질기다.”

니샤라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과자.”

사르크가 남은 과자 하나를 꺼냈다.

반으로 부쉈다.

니샤라에게 내밀었다.

“반.”

니샤라가 받았다.

“다음엔 다 내놔.”

“다음에도 잡으면.”

그날부터 친구가 됐다.

---

둘은 성격이 별로 맞지 않았다.

어릴 때도 그랬다.

사르크는 장난이 많았다.

니샤라는 무뚝뚝했다.

사르크는 몰래 뒤에서 접근해 사람을 놀래키려고 했다.

니샤라는 그런 장난을 싫어했다.

문제는 사르크가 발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한 번은 사르크가 뒤에서 다가왔다.

니샤라는 정말 몰랐다.

사르크가 손을 뻗었다.

니샤라가 갑자기 뒤돌아 팔을 잡았다.

사르크가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몰랐어.”

“그런데 왜 돌아봤어?”

“그냥.”

“뭐야 그게.”

니샤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잡혔잖아.”

사르크는 한참 억울해했다.

---

반대도 있었다.

니샤라가 뒤에서 사르크를 덮치려고 했다.

세 걸음 전부터 긴 귀가 움직였다.

사르크는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니샤라가 손을 뻗는 순간 몸을 숙였다.

니샤라는 앞으로 넘어졌다.

사르크가 웃었다.

“푸흐흐. 다 들렸는데.”

니샤라는 모래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죽인다.”

---

사르크의 씨족이 스쿠티를 떠나면 둘은 헤어졌다.

몇 달 뒤 다시 만났다.

그때마다 하던 일이 있었다.

누가 더 강해졌는지 확인하는 것.

---

사르크가 돌아왔다.

“니샤라!”

니샤라가 고개를 들었다.

“왔네.”

“안 반가워?”

“반가워.”

“표정은 아닌데.”

“원래 이래.”

잠깐 침묵했다.

니샤라가 일어났다.

“붙어.”

사르크가 씩 웃었다.

“역시 반가웠네.”

---

니샤라는 사르크를 거의 이기지 못했다.

잡으면 이겼다.

문제는 잡기가 어려웠다.

사르크는 앞에 있다가 옆에 있었다.

옆에 있다가 뒤로 갔다.

긴 귀는 니샤라가 움직이기 전부터 소리를 들었다.

---

그래서 니샤라도 방법을 바꿨다.

주먹만 휘두르지 않았다.

발을 움직였다.

사르크가 어디로 빠질지를 생각했다.

도망갈 자리를 먼저 막았다.

몸을 낮췄다.

잡았다.

넘겼다.

---

어느 해 처음으로 제대로 이겼다.

사르크가 모래 위에 누웠다.

니샤라가 위에서 내려다봤다.

“내가 이겼어.”

사르크가 귀를 축 늘어뜨렸다.

“한 번.”

“이긴 건 이긴 거야.”

“다시 해.”

“좋아.”

그날 일곱 번 더 했다.

사르크가 여섯 번 이겼다.

니샤라는 첫 번째 것만 이야기한다.

---

니샤라가 격투를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무기를 싫어해서는 아니었다.

칼도 잡아봤다.

창도 잡아봤다.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손이 더 편했다.

---

손에는 항상 무기가 있었다.

팔꿈치도 있었다.

무릎도 있었다.

발도 있었다.

누군가 칼을 빼앗아가도 남았다.

좁은 곳에서도 쓸 수 있었다.

상대를 죽이지 않고 넘어뜨릴 수도 있었다.

니샤라는 그 점을 특히 좋아했다.

---

스쿠티를 지나던 늙은 호위 하나가 니샤라의 싸움을 봤다.

그가 말했다.

“힘으로만 밀지 마.”

니샤라가 대답했다.

“이기는데.”

“너보다 센 놈 만나면?”

“더 세지면 돼.”

노인은 웃었다.

“그럼 평생 고생하겠구만.”

니샤라가 인상을 썼다.

“뭐가 웃겨.”

“발부터 다시 써라.”

---

그에게서 보법을 배웠다.

중심을 읽는 법을 배웠다.

주먹보다 팔꿈치가 짧은 거리에서 빠르다는 것도 배웠다.

무릎으로 몸을 밀어내는 법.

손목을 비틀어 무기를 떨어뜨리는 법.

사람을 넘어뜨린 뒤 더 때리지 않고 움직이지 못하게 잡는 법.

니샤라는 빠르게 배웠다.

---

노인이 물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배우냐?”

니샤라가 말했다.

“이기려고.”

“그것뿐이냐?”

“응.”

그때는 정말 그랬다.

---

니샤라의 생각이 달라진 것은 어느 축제에서였다.

아슈카리 내부의 작은 분쟁이었다.

크게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오래 기억했다.

---

한쪽은 젊은 상인이었다.

다른 한쪽은 나이가 어린 염색공이었다.

상인은 염색공에게 외상으로 여러 천을 맡겼다.

약속한 돈을 제때 주지 않았다.

염색공이 항의했다.

둘이 싸웠다.

상인이 화가 나 염색공을 밀쳤다.

염색공이 다쳤다.

---

큰 상처는 아니었다.

상인은 잘못을 인정했다.

돈도 지급했다.

치료비도 냈다.

사과도 했다.

축제가 열렸다.

모두 보기에는 잘 끝났다.

---

니샤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까지는.

---

며칠 뒤 시장에서 다시 둘을 봤다.

상인이 염색공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염색공이 말했다.

“놓으세요.”

상인이 웃었다.

“왜 또 예민하게 굴어?”

“놓으라고요.”

“우리 화해했잖아.”

---

니샤라가 멈췄다.

상인은 계속 말했다.

“축제까지 했는데 언제까지 그럴 거야?”

염색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도 불편한 표정으로 보기만 했다.

사건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니샤라가 다가갔다.

“손 놔.”

상인이 돌아봤다.

“뭐?”

“놓으랬잖아.”

“너랑 상관없어.”

니샤라는 염색공을 봤다.

“놔줬으면 좋겠어?”

염색공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니샤라는 다시 상인을 봤다.

“들었지.”

---

상인이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말했다.

“우리끼리 해결한 일이야.”

니샤라가 대답했다.

“지금은 안 끝났는데.”

“끝났어.”

“얘가 놔달라잖아.”

“그냥 기분이 좀 남은 거지.”

니샤라는 잠깐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손목을 잡았다.

---

한 번 비틀었다.

팔이 떨어졌다.

상인이 화를 냈다.

“이거 놔!”

니샤라가 바로 말했다.

“싫어.”

“뭐?”

“너도 싫다는데 안 놨잖아.”

상인이 주먹을 휘둘렀다.

니샤라는 피했다.

다리를 걸었다.

바닥에 눕혔다.

그게 끝이었다.

---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른들이 니샤라를 불렀다.

“이미 화해한 사건이었어.”

니샤라가 말했다.

“그래서?”

“네가 다시 싸움을 만들었잖아.”

“쟤가 놔달라고 했어.”

“그렇다고 바로 손부터 쓰면 어떡해.”

“말했는데 안 놨잖아.”

---

한 어른이 말했다.

“조금 더 이야기로 풀 수도 있었지.”

니샤라는 물었다.

“몇 번?”

“뭐?”

“놔달라고 몇 번 말해야 돼?”

어른이 멈췄다.

니샤라가 계속했다.

“한 번?”

“두 번?”

“열 번?”

“몇 번 말해야 싫다는 게 진짜가 되는데.”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

그날 니샤라는 처음으로 아슈카리의 화합을 의심했다.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축제는 여전히 좋았다.

사람들이 싸우지 않는 것도 좋았다.

미워하던 사람들이 다시 같이 사는 것도 좋았다.

---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 “싫다”고 말했는데 상대가 듣지 않는다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계속 말해야 하는가.

계속 기다려야 하는가.

주변 사람들이 납득할 때까지 설명해야 하는가.

---

니샤라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말에는 끝이 있어야 했다.

“싫어.”

“멈춰.”

“놓아.”

그 뒤에도 상대가 계속한다면,

정말 멈추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

---

그 생각은 점점 굳어졌다.

평화는 아무도 싸울 수 없는 상태가 아니다.

싸움을 시작한 사람이 상대의 거절을 무시했을 때, 누군가 그 손을 멈출 수 있는 상태다.

니샤라에게 화합은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화합은 무력함과 같은 말이 아니었다.

---

그래서 니샤라는 씨족의 축제호위를 선택했다.

사람들은 조금 의아해했다.

축제호위는 단순히 취객을 끌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분쟁 중재가 열리는 장소를 지켰다.

결투가 필요하면 규칙을 관리했다.

외부 무장대가 축제에 들어오면 무기를 확인했다.

합의가 끝난 뒤 보복을 시도하는 사람도 막았다.

---

니샤라는 그 일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이 대화할 동안 뒤에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으면 손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선을 넘으면 움직였다.

그 단순함이 좋았다.

---

한 번은 중재 자리에 온 남자가 칼을 숨겨왔다.

니샤라가 발견했다.

“내놔.”

“내 거야.”

“알아.”

“그런데 왜 줘?”

“오늘은 칼 없이 이야기하는 자리니까.”

“못 믿겠는데.”

니샤라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가.”

“협박이야?”

“선택지.”

남자는 결국 칼을 내놓았다.

니샤라는 그걸로 충분했다.

---

시메이라와는 같은 씨족에서 자랐지만 방식이 달랐다.

시메이라는 사람들이 무엇을 남겨두었는지 들었다.

니샤라는 사람들이 어디까지 넘어오지 못하게 할지를 봤다.

---

시메이라가 말했다.

“그 사람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니샤라가 대답했다.

“들어.”

“그런데?”

“들으면서 막으면 되잖아.”

시메이라가 웃었다.

“우후후…… 참 너답구나.”

니샤라가 물었다.

“뭐가.”

“한 손으로 이야기 듣고 다른 손으로 주먹 쥐고 있는 것.”

“필요하면 써야지.”

---

니샤라는 시메이라의 생각을 틀렸다고 보지 않는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용서를 강요하면 안 된다.

끝나지 않은 사람에게 끝났다고 말하게 하면 안 된다.

그건 동의한다.

하지만 거기서 한 문장을 더 붙인다.

“싫다고 했는데 계속 오면 누가 막는데.”

그게 니샤라의 질문이다.

---

사르크가 다시 스쿠티에 왔을 때,

니샤라는 이미 꽤 이름난 싸움꾼이 되어 있었다.

사르크도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전령 일을 맡고 있었다.

씨족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중요한 이야기도 전달했다.

니샤라는 친구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조금 웃겼다.

---

“네가?”

사르크가 귀를 세웠다.

“왜.”

“중요한 말 전달한다고?”

“응.”

“과자 훔치던 애가?”

“언제 적 이야기를 해.”

“내 과자였어.”

“반 돌려줬잖아.”

“반 먹었잖아.”

“그건 맛있어서.”

니샤라가 주먹을 들었다.

사르크가 바로 물러났다.

“푸흐흐. 아직 느리네.”

둘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

그러다가 그 사건이 일어났다.

사르크가 협상 제안을 전달했던 해였다.

니샤라는 스쿠티에 있었다.

사르크는 자기 씨족과 함께 동부로 가 있었다.

둘은 얼마 전까지도 만났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다시 싸우기로 했다.

그 정도였다.

---

소식이 스쿠티에 도착했을 때 처음에는 내용도 정확하지 않았다.

국경에서 전투가 있었다.

여러 안발룽 씨족이 공격받았다.

사상자가 많았다.

협상을 위해 모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침공을 준비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무엇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

니샤라는 가장 먼저 물었다.

“사르크는.”

아무도 몰랐다.

---

그날부터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사흘.

평소 같으면 사르크는 어디서든 소식을 보냈다.

이번에는 없었다.

니샤라는 화가 났다.

누구에게 화가 나는지는 몰랐다.

---

넷째 날 살아남은 사람들이 스쿠티 근처까지 왔다.

부상자가 많았다.

씨족도 서로 달랐다.

가족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니샤라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사막토끼의 긴 귀를 찾았다.

없었다.

---

마지막쯤에야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니샤라.”

고개를 돌렸다.

사르크가 있었다.

피가 말라붙은 옷.

먼지투성이 얼굴.

귀 한쪽이 축 늘어져 있었다.

살아 있었다.

---

니샤라는 다가갔다.

사르크가 평소처럼 웃으려고 했다.

“푸흐—”

니샤라가 주먹으로 어깨를 쳤다.

사르크가 비틀거렸다.

“아파!”

“왜 연락 안 해.”

사르크의 표정이 잠깐 멈췄다.

“정신없었어.”

“죽은 줄 알았잖아.”

사르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니샤라도 더 말하지 않았다.

안았다.

아주 잠깐이었다.

사르크가 말했다.

“너 이런 것도 해?”

니샤라가 바로 놓았다.

“시끄러.”

“푸흐흐.”

웃음이 예전보다 조금 약했다.

니샤라는 모르는 척했다.

---

사르크는 그날 있었던 일을 조금씩 이야기했다.

협상문서를 직접 전달했다.

받았다는 확인도 들었다.

그런데 현장의 기사들은 몰랐다.

협상단의 집결을 침공 준비로 판단했다.

공격했다.

사람들이 죽었다.

---

사르크가 말했다.

“아무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래.”

니샤라는 듣고 있었다.

“편지는 갔어.”

“응.”

“거짓말한 사람도 없었어.”

“응.”

“그런데 다 죽었어.”

니샤라는 한참 말이 없었다.

---

사르크가 물었다.

“이게 뭐야.”

니샤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때려서 멈추는 법은 알았다.

칼을 든 사람의 손을 꺾는 법도 알았다.

하지만 아무도 악의가 없는데 사람들이 죽는 상황을 멈추는 법은 몰랐다.

---

그래서 그냥 말했다.

“모르겠어.”

사르크가 니샤라를 봤다.

“그게 끝?”

“응.”

“도움 안 되네.”

“나도 알아.”

잠깐 뒤 니샤라가 덧붙였다.

“그래도 네 잘못은 아니야.”

사르크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 하지 마.”

니샤라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다.

사르크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간단히 끝내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편지를 전달했다.

자기는 확인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 결과를 자기와 완전히 분리할 수 없었다.

니샤라는 그걸 존중했다.

다시는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

대신 말했다.

“그럼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데.”

사르크가 니샤라를 봤다.

“뭐?”

“다시 그런 편지 맡으면.”

사르크가 잠깐 생각했다.

“받은 놈 이름 확인할 거야.”

“그리고.”

“누구한테 전달할지도 확인하고.”

“그리고.”

사르크의 귀가 조금 올라갔다.

“그 부대가 알았는지도 직접 확인할 거야.”

니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

그날 이후 사르크는 많이 변했다.

예전보다 더 명확해졌다.

위협할 때는 정확히 위협했다.

퇴로를 줄 때는 어느 길로 가라고 말해줬다.

싸우지 않을 거면 상대가 오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니샤라는 그런 사르크를 이해했다.

조금은.

---

성격은 여전히 안 맞았다.

오히려 더 안 맞게 됐다.

사르크는 상대를 겁줘서 싸우기 전에 물러나게 하는 것을 좋아했다.

니샤라는 그 방식을 못마땅해했다.

---

“겁줘서 보내면 끝이야?”

사르크가 말했다.

“안 죽잖아.”

“다음에는?”

“다음에 오면 또 보내.”

“계속?”

“죽이는 것보다 낫지.”

니샤라는 대답했다.

“겁먹은 놈이 다음엔 더 큰 칼 들고 올 수도 있어.”

사르크가 잠깐 조용해졌다.

그 말은 훗날 사르크도 스스로 고민하게 되는 문제가 됐다.

---

반대로 사르크도 니샤라의 방식을 싫어했다.

“너 너무 정면이야.”

니샤라가 말했다.

“그래서?”

“안 맞고 이길 수 있는데 왜 맞을 거리까지 들어가.”

“잡으려고.”

“멀리서 겁주면 되잖아.”

“안 무서워하면?”

“더 무섭게 해야지.”

니샤라가 인상을 썼다.

“귀찮아.”

사르크가 웃었다.

“주먹질은 안 귀찮고?”

“응.”

---

둘은 그렇게 계속 친구였다.

몇 년이 지나도.

소속이 달라져도.

사르크가 이빨연맹의 기동대장이 된 뒤에도.

니샤라가 아슈카리 씨족의 축제호위가 된 뒤에도.

---

주변에서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슈카리의 축제호위.

이빨연맹의 기동대장.

한쪽은 스쿠티의 질서를 지켰다.

한쪽은 국경을 오가며 적을 겁먹게 했다.

성격도 달랐다.

말하는 방식도 달랐다.

그런데 만나면 너무 자연스러웠다.

---

사르크가 스쿠티에 들어왔다.

니샤라가 말했다.

“왔네.”

“응.”

“밥 먹었어?”

“아직.”

“먹어.”

“네가 사?”

“싫어.”

“절친 맞아?”

“네가 돈 더 많잖아.”

“어떻게 알아?”

“지난번에 네 주머니 봤어.”

사르크의 귀가 섰다.

“언제?”

니샤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

사르크는 니샤라가 축제용 옷을 입고 호위를 서는 모습을 처음 보고 한참 웃었다.

“푸흐흐.”

니샤라가 고개를 돌렸다.

“왜.”

“너 싸우는 애 맞지?”

“응.”

“그 옷으로?”

니샤라가 한 걸음 다가갔다.

“해볼래?”

사르크가 즉시 뒤로 물러났다.

“아니.”

“왜.”

“오늘은 쉬는 날이야.”

“겁쟁이.”

“안 맞는 게 똑똑한 거야.”

---

니샤라의 옷은 춤을 추기 위한 옷이면서 싸우기 위한 옷이기도 했다.

겉옷으로는 안까지 다 보이는 투명한 슬립이 흘러내렸다.

그 안에는 몸에 밀착되는 수영복 스타일의 짙은 옷을 입었다.

이 세계의 상식과 비교하면 굉장히 과감한 옷이었고,

겉으로 보면 축제 무희처럼 보였다.

실제로 춤도 출 수 있었다.

하지만 안쪽 옷은 다리를 높이 들고,

구르고,

넘어지고,

상대를 붙잡아도 방해되지 않았다.

니샤라는 그 차림을 마음에 들어 했다.

예쁘고.

편했고.

싸울 수 있었다.

셋이면 충분했다.

---

외부인은 가끔 착각했다.

한 번은 취객이 니샤라를 보고 말했다.

“무희?”

니샤라가 대답했다.

“비슷해.”

“한 곡 춰봐.”

“싫어.”

남자가 웃었다.

“돈 줄게.”

“싫다니까.”

남자가 손을 뻗었다.

니샤라는 그 손을 내려다봤다.

---

“한 번 더 만지면 넘어뜨린다.”

남자가 웃었다.

“이 옷 입고?”

니샤라가 눈썹을 올렸다.

“이 옷 보고 춤만 출 줄 알았어?”

한 걸음 가까이 갔다.

“그럼 가까이 와 보던지.”

남자는 정말 왔다.

몇 초 뒤 바닥에 있었다.

---

니샤라는 싸움을 좋아한다.

지금도 그렇다.

승부욕도 강하다.

결투가 있다면 먼저 구경하러 간다.

자기가 참가할 수 있으면 더 좋아한다.

졌을 때 기분도 나쁘다.

아주 나쁘다.

---

그렇다고 진 상대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규칙대로 싸웠다면 인정한다.

손을 내밀 수 있다.

다음 날 다시 도전할 뿐이다.

---

한 전사가 니샤라를 세 번 연속 이겼다.

니샤라가 말했다.

“내일 또 해.”

“싫은데.”

“왜.”

“내가 세 번 이겼잖아.”

“네 번 이길 수 있잖아.”

“그게 왜 내 목표야?”

니샤라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

사교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니샤라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

축제에서는 잘 어울린다.

술도 마신다.

춤도 춘다.

내기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돈을 올리기도 한다.

다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굳이 말을 많이 걸지 않을 뿐이다.

---

친해지면 말이 조금 늘어난다.

사르크 앞에서는 꽤 많이 늘어난다.

대부분 싸우는 말이다.

---

“사르크.”

“왜.”

“네 귀 잡아도 돼?”

“안 돼.”

“한 번만.”

“왜.”

“옛날부터 궁금했어.”

“뭐가.”

“잡으면 얼마나 화내나.”

“지금 던져봐도 돼?”

사르크 손에 투척칼이 올라왔다.

니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친구네.”

“어디가?”

---

시메이라가 그 모습을 보면 이해하지 못한다.

“너희 정말 친한 거니?”

니샤라가 대답한다.

“응.”

사르크도 말한다.

“절친이지.”

“방금 서로 죽이겠다고 하지 않았니?”

니샤라가 말했다.

“안 죽여.”

사르크가 웃었다.

“푸흐흐. 많이 때릴 뿐이지.”

시메이라는 가끔 두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한다.

---

니샤라가 시메이라와 충돌하는 지점은 화합의 의미다.

시메이라는 사람의 마음이 끝나지 않았다면 끝났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니샤라도 동의한다.

하지만 니샤라는 조금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본다.

마음이 어떻든 행동에는 선이 있어야 한다.

---

미워해도 된다.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화가 나도 된다.

그렇다고 상대를 때릴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다시 빼앗을 권리도 생기지 않는다.

거절을 무시할 권리도 없다.

니샤라는 그 선을 누군가 실제로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한 번은 시메이라가 물었다.

“힘이 있어야 평화로운 거니?”

니샤라가 잠깐 생각했다.

“아니.”

시메이라가 기다렸다.

니샤라가 말을 이었다.

“힘만 있으면 그냥 센 거지.”

“그럼?”

“멈춰야 할 때 멈출 수 있어야지.”

“누구를?”

니샤라가 대답했다.

“상대도.”

잠깐 뒤 자기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도.”

---

그게 니샤라의 신념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힘이 있다는 이유로 항상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힘이 있다면 사용하지 않을 선택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가 물러나면 멈춘다.

넘어졌으면 더 때리지 않는다.

무기를 놓았으면 싸움을 끝낸다.

---

니샤라는 그래서 사르크와도 자주 싸운다.

사르크가 공포로 적을 쫓아내는 방식을 보며 말한다.

“너무 몰아붙이지 마.”

사르크가 대답한다.

“안 죽이잖아.”

“겁먹어서 도망갈 길은 있어?”

사르크의 귀가 움직인다.

“당연하지.”

“없으면?”

“만들어.”

니샤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됐어.”

그 정도면 서로 통한다.

---

사르크도 니샤라를 가끔 멈춘다.

니샤라가 싸우려는 순간 뒤에서 말한다.

“하지 마.”

니샤라가 돌아본다.

“왜.”

“쟤 도망갈 생각이야.”

“어떻게 알아.”

사르크가 긴 귀를 흔든다.

“심장 뛰는 소리까지 들린다니까.”

니샤라는 상대를 본다.

정말 겁먹은 얼굴이다.

주먹을 내린다.

“가.”

상대가 도망간다.

---

사르크가 웃는다.

“착하네.”

니샤라가 바로 주먹을 든다.

“너는 안 무섭지?”

“엄청 무서운데.”

“거짓말.”

“푸흐흐.”

사르크가 도망간다.

니샤라가 쫓는다.

어릴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아슈카리 안에서 니샤라의 방식은 항상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너무 쉽게 물리력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니샤라도 그 지적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는 싸움에 익숙하다.

익숙한 것은 쉽게 선택하게 된다.

---

말로 한 번 더 해결할 수 있었는데,

자기가 너무 빨리 손목을 잡은 적은 없었을까.

상대가 화가 났을 뿐인데 위험하다고 판단한 적은 없었을까.

겁을 먹게 만들지 않고도 끝낼 수 있었는데,

자기가 강하다는 사실부터 보여준 적은 없었을까.

니샤라는 그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

그래서 시메이라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입 밖으로는 잘 말하지 않는다.

시메이라가 너무 좋아할 것 같기 때문이다.

---

한 번은 시메이라가 물었다.

“내가 없으면 어떡할 거니?”

니샤라가 대답했다.

“일하지.”

“아쉽지도 않고?”

“응.”

“우후후…… 너무하네.”

니샤라가 잠깐 생각했다.

“조금 불편하긴 하겠네.”

시메이라의 귀가 쫑긋 섰다.

“어머?”

니샤라는 즉시 후회했다.

“취소.”

“이미 들었단다.”

“사르크보다 귀 좋은 척하지 마.”

---

현재 니샤라는 아슈카리 씨족의 축제호위다.

축제가 열리면 광장을 걷는다.

어깨 아래로 투명한 천이 흘러내린다.

그 안에는 몸에 붙는 전투복이 보인다.

허리의 금속장식이 움직일 때마다 작은 소리를 낸다.

겉으로만 보면 무희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실제로 무희들과 같이 춤출 때도 있다.

누가 끌고 가면 못 이기는 척 들어간다.

한 곡 정도는 춘다.

끝나면 술도 마신다.

사람들이 웃으면 같이 웃는다.

니샤라도 축제를 좋아한다.

진심으로.

---

다만 싸움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음악소리와 다른 소리를 찾는다.

탁자가 넘어지는 소리.

누군가의 고함.

칼집에서 무기가 빠지는 소리.

그 순간 표정이 바뀐다.

걸어간다.

---

“놔.”

상대가 말했다.

“상관하지 마.”

니샤라는 다시 말한다.

“놔.”

두 번째까지는 말한다.

세 번째가 필요한지는 상대가 결정한다.

---

니샤라는 자신이 화합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 거창하다.

그냥 선을 지킨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웃고 싶지 않으면 웃지 않을 선.

누군가 떠나고 싶으면 떠날 수 있는 선.

누군가 싫다고 했으면 더 이상 손대지 않을 선.

그리고 그 선을 누군가 넘어오려 한다면,

몸으로라도 막을 사람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사르크는 가끔 스쿠티에 돌아온다.

관조대에 들어간 뒤에도 기회가 생기면 들른다.

예전보다 훨씬 먼 곳을 돌아다니게 되었지만,

니샤라를 만나면 하는 것은 비슷하다.

---

“살아 있었네.”

니샤라가 말한다.

사르크가 웃는다.

“푸흐흐. 인사가 그게 뭐야.”

“살아 있잖아.”

“반갑다고 해.”

“반가워.”

“영혼이 없는데.”

“그럼 갈래?”

“아니.”

---

잠깐 뒤 니샤라가 묻는다.

“모의결투 한 판?”

사르크가 짐을 내려놓는다.

“나 방금 여행 끝났는데.”

“그래서?”

“좀 봐줘.”

“싫어.”

사르크가 웃는다.

“역시 내 친구네.”

---

둘은 여전히 성격이 맞지 않는다.

사르크는 웃음이 많다.

니샤라는 무뚝뚝하다.

사르크는 상대를 겁줘서 싸움을 피하려 한다.

니샤라는 필요하면 직접 붙잡아서 멈춘다.

사르크는 최대한 맞지 않으려 한다.

니샤라는 필요하면 한 대쯤 맞고 품 안으로 들어간다.

---

그래도 둘은 서로를 안다.

사르크가 평소보다 웃음이 많으면 니샤라는 묻는다.

“뭔데.”

“뭐가?”

“뭐 있었잖아.”

사르크가 웃는다.

“왜 그렇게 생각해?”

“너 오래 봤으니까.”

그 말이면 충분하다.

---

반대로 니샤라가 화가 나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사르크는 옆에 앉는다.

“말 안 해?”

“안 해.”

“왜.”

“하기 싫어.”

“그래.”

그리고 정말 묻지 않는다.

니샤라는 그 점을 좋아한다.

말하지 않는다.

---

니샤라는 사람에게 반드시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 부분에서는 시메이라와 같다.

하지만 자신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이 같은 오아시스에서 살아야 한다면,

서로의 선을 넘지 않을 방법이 있어야 한다.

말로 약속한다.

규칙을 만든다.

그래도 어기면 막는다.

---

그래서 니샤라는 이렇게 생각한다.

**“화합은 서로 좋아하는 게 아니야.”**

**“싫어해도 상대가 그만하라고 했을 때 멈추는 거지.”**

그리고 만약 멈추지 않는다면.

니샤라는 손목을 푼다.

그 다음은 자기 일이다.

---

문제는 니샤라 자신도 승부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이다.

싸워야 할 때와,

싸우고 싶은 때를 언제나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도발하면 눈이 먼저 달라진다.

상대가 강해 보이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

---

시메이라가 가끔 묻는다.

“정말 말로는 안 됐니?”

니샤라가 대답한다.

“안 됐어.”

“정말?”

잠깐 침묵.

“……아마.”

시메이라가 웃는다.

“우후후……”

“웃지 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얼굴이 말했어.”

---

사르크는 더 노골적이다.

“너 싸우고 싶었던 거지?”

“아니.”

“푸흐흐.”

“아니라고.”

“그래.”

“뭐야 그 말투.”

“아무것도.”

니샤라가 주먹을 든다.

사르크가 웃으며 도망간다.

---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기 때문에,

니샤라는 자기 힘을 꽤 믿으면서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힘은 필요하다.

그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힘을 가진 사람이 자기 판단까지 언제나 옳다고 믿는 순간,

그 사람을 막을 또 다른 힘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니샤라는 그것도 안다.

---

그래서 오늘도 축제호위 자리에 선다.

사람들이 춤춘다.

술잔이 부딪친다.

시메이라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니샤라는 그 주변을 걷는다.

---

싸움이 없으면 좋다.

그게 가장 좋다.

니샤라도 쉬고 싶다.

춤추고 싶다.

술도 마시고 싶다.

누군가와 팔씨름도 하고 싶다.

---

그래도 누군가 선을 넘으면 먼저 걸어간다.

말한다.

“그만.”

그 한마디로 끝나면 손을 쓰지 않는다.

그게 가장 좋은 승리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듣지 않는다면,

그때는 자세를 낮춘다.

---

니샤라는 화합을 믿는다.

다만 화합이라는 말을 믿지는 않는다.

그 말을 지킬 사람.

그 말을 거절할 자유.

거절을 무시한 사람을 멈출 규칙.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 규칙을 실제로 지켜낼 힘.

그것까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

아마 그래서 사르크와 지금까지 친구인지도 모른다.

둘은 서로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대가 틀렸다고 간단히 버리지도 않는다.

몇 번이고 싸운다.

몇 번이고 다시 만난다.

그리고 정말 위험한 순간에는 서로의 말을 믿는다.

---

어릴 때 사르크가 훔친 꿀과자의 절반처럼.

처음부터 완벽하게 맞았던 적은 없다.

그래도 남은 절반을 나눠 먹었다.

니샤라에게 친구란 어쩌면 그런 것이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도 등을 돌리지 않는 사람.

그리고 필요할 때는 망설이지 않고 멱살부터 잡을 수 있는 사람.

사르크는 아마 마지막 문장에는 크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니샤라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Roster

생명교황국 세레이온

6명
열세꽃잎성좌회2명
HST
헤스티 드 세레니얼
세레이온세레이온의 대성녀
“아무도 명령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기에 제가 명령합니다.”
🩸 HP60
💪 공격력5
🧙 마법력85
✨ 신비력10
🛡️ 방어력35
🔗 항마력75
😖 신비저항99
🏃 회피력10
과거 보기
헤스티 드 세레니얼의 이야기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뛰어다녔지만 결국 너무 늦었던 날에서 시작된다.

그녀가 아직 대성녀가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열세꽃잎성좌회의 높은 자리에 앉아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성도 세리아의 수많은 말단 성직자 가운데 하나.

배급표를 옮기고,
구호창고의 기록을 정리하고,
환자의 체온을 확인하며,
윗사람의 서명을 받기 위해 복도를 뛰어다니는 젊은 성직자였다.

헤스티는 그때부터 사람을 잘 지나치지 못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일단 멈췄다.

정해진 업무가 끝나지 않아도 환자의 손을 먼저 잡았다.

배급 시간이 지났는데 아이가 굶고 있으면 창고 책임자를 찾아갔다.

규정상 자신이 해줄 수 없는 일이라면,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갔다.

그녀에게 신앙은 거창한 기도보다 그런 행동에 가까웠다.

생명의 여신 세리아가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면,
그 신을 따르는 사람도 눈앞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믿었다.

그때의 헤스티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열심히 하면 된다.

조금 더 뛰면 된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모두에게 손이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그랬다.


어느 날 안발룽에서 사절단이 찾아왔다.

황갈색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들과 몇몇 부족민들이었다.

그들의 옷에는 사막 먼지가 두껍게 붙어 있었다.

사절들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들 가운데 특히 성격이 급한 젊은 리자드맨 하나가 있었다.

나자르 물결바람이었다.

당시 헤스티는 그의 이름을 몰랐다.

그저 매일 창구 앞에 찾아오는,
화를 아주 쉽게 내는 안발룽 사절이라고 기억했다.

그는 처음부터 요구를 분명하게 말했다.

“곡물 필요해.”

담당자가 물었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나자르는 씨족의 인원과 남은 식량을 설명했다.

가뭄이 길어지고 있었다.

가축도 죽고 있었다.

아이들이 굶고 있었다.

헤스티는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당연히 구호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레이온에는 곡물이 있었다.

저들에게는 곡물이 없었다.

그렇다면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씨족 등록을 확인해야 했다.

구호물자가 정말 필요한 집단에게 가는지 증명해야 했다.

과거 허위 씨족명으로 여러 번 구호를 받아간 사례가 있었다.

창고의 곡물은 어느 성직자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세레이온 각지의 농민들이 겨울과 재난을 대비해 바친 비축곡이었다.

대량 반출에는 책임이 필요했다.

그래서 증명이 필요했다.

헤스티는 이유를 이해했다.

나자르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계속 물었다.

“얼마나 걸려.”

처음에는 며칠이라고 대답했다.

헤스티도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씨족 증명서를 확인하는 부서로 뛰었다.

담당자를 찾아갔다.

서류를 가져왔다.

상급자의 서명을 받았다.

그날 밤 늦게까지 남아 기록을 정리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조금이라도 빨리 처리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문제가 생겼다.

등록된 씨족 인원과 실제 구호 요청 인원이 달랐다.

가뭄 동안 다른 소규모 무리가 합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까지 같은 씨족으로 인정할지 확인해야 했다.

헤스티는 다시 뛰었다.


나자르는 매일 찾아왔다.

“됐어?”

“아직입니다.”

헤스티는 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 확인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그랬어.”

“알고 있습니다.”

“언제 돼.”

헤스티는 확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말했다.

“최대한 빨리 하겠습니다.”

진심이었다.

정말로 최대한 빨리 했다.

점심을 거른 날도 있었다.

기도 시간을 줄이고 다른 부서로 달려간 날도 있었다.

자신에게 권한이 없는 서류는 권한이 있는 사람에게 직접 들고 갔다.

운송 허가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으면 운송 담당자를 찾아갔다.

창고 승인 원본이 필요하다고 하면 다시 이전 건물까지 뛰었다.

누군가는 그런 헤스티에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헤스티는 서류를 안은 채 대답했다.

“저분들은 기다리는 동안 굶고 있습니다.”

“그래도 절차가 있습니다.”

“절차를 어기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빨리 밟겠다는 뜻입니다.”


첫 번째 사망 소식이 왔다.

나자르의 둥지형제 한 명이었다.

그날 그는 헤스티가 있는 창구까지 와서 말했다.

“한 명 죽었어.”

헤스티의 손이 멈췄다.

나자르는 물었다.

“그러면 빨라져?”

헤스티는 입을 열지 못했다.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해서 심사 순서를 마음대로 바꿀 권한은 그녀에게 없었다.

긴급 구호 절차가 있었지만,
그 절차를 적용하려면 다시 확인해야 할 항목들이 있었다.

헤스티는 겨우 말했다.

“제가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나자르의 꼬리가 바닥을 쳤다.

“그 말 말고.”

헤스티는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곡물 줄 수 있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헤스티가 자기 마음대로 창고를 열 수는 없었다.

“없습니다.”

나자르가 이를 악물었다.

헤스티는 바로 덧붙였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겠습니다.”

나자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의 헤스티는 그 문장이 얼마나 무력하게 들렸는지 몰랐다.


그녀는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창고로 갔다.

상급 성직자를 찾아갔다.

국경 구호 담당자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정규 배급과 별개로 먼저 보낼 수 있는 식량이 없는지 알아봤다.

자신에게 배정된 식량 일부도 사절단에게 내주었다.

함께 일하던 성직자들에게 부탁해 조금씩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몇 자루였다.

씨족 전체를 살릴 양이 아니었다.

그날도 밤늦게까지 일했다.

등불이 꺼진 관청에서 혼자 서류를 정리했다.

눈이 따가웠다.

손가락에는 잉크가 묻어 있었다.

다음 날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다음 소식에는 이름이 둘이었다.

그다음에는 셋이었다.

헤스티는 점점 사망자의 이름까지 적기 시작했다.

숫자로만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은 수첩에는 안발룽식 이름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도 있었다.

그래도 전부 적었다.

살리지 못했다는 사실만큼은 정확히 기억하고 싶었다.


어느 날 나자르가 책상을 부쉈다.

헤스티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 명 죽었어.”

그가 말했다.

헤스티는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빨라져?”

그 질문에 옆의 관리가 절차를 설명하려 했다.

나자르의 주먹이 책상에 떨어졌다.

나무판이 갈라졌다.

경비병들이 달려왔다.

헤스티는 놀랐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나자르도 싸우지 않았다.

손을 들었다.

“미안하다.”

부서진 책상을 가리켰다.

“저건 내가 갚아.”

그리고 헤스티를 바라봤다.

“대신 빨리 해.”

헤스티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밤은 집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최종 승인은 결국 나왔다.

씨족 자격이 확인되었다.

지원 대상 인원도 인정되었다.

곡물량이 결정되었다.

운송 허가도 내려왔다.

헤스티는 문서를 받아 들고 한동안 웃었다.

드디어 됐다.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

그녀는 직접 사절단을 찾으러 갔다.

하지만 나자르는 이미 없었다.

그들은 전날 밤 곡물창고에서 식량을 훔쳐 안발룽으로 돌아간 뒤였다.

창고 경비병 몇 명이 다쳤다.

곡물이 사라졌다.

관청에서는 난리가 났다.

누군가는 사절단을 범죄자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구호 자체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스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에는 완벽하게 승인된 구호문서가 있었다.

필요한 인장도 전부 찍혀 있었다.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너무 늦었다.


며칠 뒤 피해 상황이 확인되었다.

나자르의 씨족은 훔친 곡물 덕분에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죽은 뒤였다.

그의 둥지형제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헤스티는 자신이 적어두었던 이름들을 다시 봤다.

한 줄씩.

자신이 그들을 죽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살리려고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규정을 만든 사람도 아니었다.

최종 결정권자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책임을 묻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한 상급 성직자는 오히려 위로했다.

“헤스티,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헤스티는 더 괴로웠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했는데도 사람들이 죽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한 명의 선의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곳에 있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헤스티는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품었다.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람이 죽었다면,
그 죽음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서류를 확인한 사람은 자기 일을 했다.

창고 책임자는 맡겨진 곡물을 지켰다.

운송 담당자는 규정을 적용했다.

상급자는 필요한 승인을 검토했다.

헤스티는 그 사이를 뛰었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크게 잘못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죽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누구의 잘못인가’보다 다른 질문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누가 결정해야 하는가.’

책임자가 없다는 이유로 결정까지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마지막에 말해야 했다.

보낸다.

막는다.

연다.

닫는다.

그리고 틀렸다면 그 결정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남겨야 했다.


세월이 지나 헤스티의 신성력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녀는 생명의 여신 세리아의 광휘를 다루었다.

상처를 정화했다.

오염된 맥류를 봉쇄했다.

정화의 불꽃으로 병든 조직과 저주를 태웠다.

그리고 점차 성좌회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헤스티는 여전히 온화했다.

환자에게 말을 걸 때는 손부터 잡았다.

아이에게는 눈높이를 맞췄다.

부탁할 때는 강요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게 조심했다.

하지만 결정에 관한 태도만큼은 이전과 달라졌다.

누구도 결정하지 않아서 사람이 죽는 상황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생각이 훗날 그녀의 가장 큰 선택을 만들었다.


전염병은 세레이온 동부의 한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흔한 열병으로 보였다.

고열.

기침.

피부 아래에 피어나는 검은 반점.

신성력으로 정화하면 잠시 증상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전염 속도가 너무 빨랐다.

한 집에서 시작한 병이 골목 전체로 번졌다.

치료사도 감염되었다.

환자를 옮기던 병사도 쓰러졌다.

문제는 감염자가 증상을 보이기 전에도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였다.

도시 전체가 위험했다.

인근 지역까지 이어지는 길도 있었다.

계산상 그대로 두면 수만 명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감염될 가능성이 있었다.

헤스티는 당시 구호와 정화를 담당하는 성직자 중 하나였다.

이번에도 뛰었다.

치료했다.

밤을 새웠다.

환자를 옮겼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주 빨리 깨달았다.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

감염 속도가 사람의 선의보다 빨랐다.


회의가 열렸다.

감염구역을 완전히 봉쇄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도시의 일부 구역을 성벽과 신성결계로 차단한다.

사람의 출입을 금지한다.

식량과 치료물자는 외부에서 제한적으로 투입한다.

감염자는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문제는 내부에 아직 감염되지 않은 사람도 많다는 것이었다.

봉쇄하면 그들까지 병든 구역에 가두는 셈이었다.

반대가 쏟아졌다.

“구출을 계속해야 합니다.”

“민간인을 안에 두고 문을 닫을 수는 없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헤스티는 그 말들을 들었다.

전부 이해했다.

자신도 같은 마음이었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아이도 있었다.

치료사도 있었다.

자신이 조금 전까지 손을 잡고 이야기했던 환자도 있었다.

그러나 감염 확산 예측을 다시 봤다.

한나절.

그 정도만 더 지나면 외부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졌다.

이번에도 누군가는 결정해야 했다.


상급 성직자가 말했다.

“조금 더 논의합시다.”

그 문장을 듣는 순간 헤스티는 오래전 나자르의 얼굴을 떠올렸다.

‘조금만 더.’

씨족 사람들이 죽는 동안 수없이 들었던 말.

헤스티는 조용히 물었다.

“얼마나 더입니까?”

아무도 정확히 대답하지 못했다.

헤스티는 다시 말했다.

“그 시간 동안 몇 명이 감염됩니까?”

역시 정확한 답은 없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봉쇄하겠습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물었다.

“누구의 권한으로요?”

헤스티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제 이름으로 하겠습니다.”

“헤스티.”

“아무도 명령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기에 제가 명령합니다.”

부탁하듯 온화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결론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헤스티는 직접 봉쇄선에 섰다.

생명의 맥류를 끊는 것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신성술 가운데 하나였다.

신성력을 펼쳐 감염구역의 맥류와 외부 흐름을 분리했다.

광휘의 장벽이 길을 막았다.

성기사들이 문을 닫았다.

안쪽 사람들이 몰려왔다.

“열어주세요!”

“우리는 안 아픕니다!”

“아이만이라도 내보내주세요!”

헤스티는 들었다.

전부 들었다.

그리고 열지 않았다.

한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장벽 앞까지 왔다.

“성녀님.”

당시 헤스티는 아직 그 칭호를 받기 전이었지만 여자는 그렇게 불렀다.

“이 아이는 열이 없습니다.”

헤스티가 아이를 바라봤다.

정말 증상은 없었다.

하지만 이미 감염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문 하나를 열면 봉쇄의 의미가 무너질 수 있었다.

헤스티는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자가 울었다.

“그 말 말고요.”

오래전 나자르가 했던 말과 비슷했다.

헤스티는 이번에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자기가 결정권자였다.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 말을 직접 했다.


봉쇄는 성공했다.

전염병은 도시 전체로 퍼지지 않았다.

인근 농촌과 다른 도시도 보호되었다.

수만 명이 감염을 피했다.

나중의 분석은 헤스티의 판단이 옳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결론 내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그녀를 칭찬했다.

결단력 있는 성직자.

수만 명을 구한 사람.

세리아의 뜻을 실천한 사람.

그 말들은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

봉쇄구역 안에서는 대부분의 주민이 죽었다.

그 사실 역시 완전히 참이었다.

헤스티는 두 사실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서 기억하지 않았다.


봉쇄가 해제된 뒤 헤스티는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정화의 불꽃으로 남은 오염을 태웠다.

시신을 확인했다.

이름을 기록했다.

무너진 집 사이에서 유품을 수습했다.

밖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감사했다.

안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그녀를 저주했다.

어떤 남자는 얼굴에 침을 뱉었다.

성기사가 그를 붙잡으려 했다.

헤스티가 막았다.

“두십시오.”

남자가 소리쳤다.

“내 딸을 죽였어!”

헤스티는 부정하지 않았다.

병이 죽였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자신은 수만 명을 살렸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 결정이 필요했다고 설명할 수도 있었다.

대신 말했다.

“제가 문을 닫았습니다.”

남자가 울었다.

헤스티는 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가 선택한 책임은 그런 것이었다.

결정의 이익만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

그 결정 때문에 죽은 사람 앞에서도 자기 이름을 지우지 않는 것.


그 사건 이후 헤스티는 대성녀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자애롭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렇다.

아픈 사람을 보면 손을 잡는다.

빈민에게는 먼저 말을 건다.

적군의 부상자라도 치료할 수 있다면 치료한다.

생명의 종족과 출신을 따지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동시에 세레이온에서 가장 냉혹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두 모습은 헤스티에게 모순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신념에서 나온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

그러므로 아무도 선택하지 않아 더 많은 생명이 죽게 해서는 안 된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 때문에 버려진 사람들의 이름까지 책임져야 한다.


헤스티는 숫자를 피하지 않는다.

몇 명을 살릴 수 있는가.

몇 명이 위험한가.

치료 자원은 얼마나 남았는가.

어느 지역을 먼저 구호해야 하는가.

회의에서는 아주 냉정하게 묻는다.

“정확히 몇 명입니까?”

누군가 불편해하면 말한다.

“사람을 숫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손가락으로 보고서를 짚는다.

“숫자를 보지 않으면 더 작은 목소리부터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말에도 스스로 완전히 안심하지 못한다.

숫자를 비교하는 순간,
생명의 우선순위가 만들어진다.

백 명과 천 명.

한 마을과 한 도시.

감염자와 비감염자.

오늘 죽을 사람과 다음 달 위험해질 사람.

그리고 그 표의 아래쪽에는 언제나 ‘덜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다.

헤스티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대성녀가 된 뒤에도 그녀는 나자르의 씨족에 관한 기록을 버리지 않았다.

당시 자신이 작성했던 구호문서 사본도 가지고 있다.

사망자 이름을 적은 작은 수첩도 있다.

대성녀의 집무실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물건이다.

한 페이지에는 당시 승인까지 걸린 날짜가 적혀 있다.

옆에는 사망 소식이 도착한 날도 기록되어 있다.

두 날짜를 비교할 때마다 헤스티는 같은 생각을 한다.

절차 하나하나는 필요했다.

하지만 전체가 사람보다 느렸다.

그것은 실패였다.

누구도 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실패를 없애주지 않는다.

오히려 헤스티에게는 그런 실패가 더 위험하다.

악인은 처벌하면 된다.

선량한 사람들이 올바른 절차를 지키다가 사람을 죽게 만드는 구조는,
사람 하나를 바꿔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녀가 된 뒤 긴급구호권한과 임시배급절차를 손보는 데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였다.

완벽한 서류보다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조건.

대신 잘못 사용했을 때 누가 책임지는지도 명확하게 만들었다.

그 마지막 부분까지 항상 포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빨연맹이 세레이온의 곡물지대를 습격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연맹장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나자르 물결바람.

헤스티는 그 이름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

그러다 기록을 찾아 얼굴과 이름을 연결했다.

책상을 부쉈던 리자드맨.

매일 창구에 와서 물었던 사람.

‘얼마나 걸려.’

헤스티는 보고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곡물창고가 털렸다.

농민들이 겨울 비축을 잃었다.

경비대가 다쳤다.

몇몇 습격에서는 종자곡까지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 곡물은 안발룽 남부의 굶주린 씨족에게 갔다.

헤스티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성직자가 물었다.

“성녀님, 강경대응을 요청하시겠습니까?”

헤스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자르의 말을 떠올렸다.

다른 선택을 남겼다면 보여줘라.

그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는 너무 잘 알았다.

헤스티는 그에게 다른 선택을 제때 보여주지 못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자기가 뛰었고,
노력했고,
밤을 새웠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둥지형제들은 죽었다.

그 경험이 지금의 나자르를 만들었다면,
헤스티는 완전히 남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보고서에는 세레이온 농민들의 이름도 있었다.

그들은 나자르의 구호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관청에 있지도 않았다.

자기 가족의 겨울을 위해 곡물을 저장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아이도 굶을 수 있었다.

헤스티는 조용하게 말했다.

“추격은 승인하겠습니다.”

성직자가 고개를 숙였다.

헤스티가 덧붙였다.

“그러나 투항한 자와 물자를 운반하지 않는 민간인은 공격하지 마십시오.”

“예.”

“그리고 안발룽 구호협상도 동시에 시작하십시오.”

성직자가 당황했다.

“습격자를 막으면서 구호를 합니까?”

헤스티는 대답했다.

“습격은 막아야 합니다.”

잠시 뒤 보고서를 덮었다.

“굶주림도 막아야지요.”


헤스티에게 나자르는 불편한 존재다.

미워하기에는 너무 잘 이해한다.

용서하기에는 그가 계속 다른 사람의 식량을 빼앗고 있다.

그를 단순한 약탈자라고 부르면 자기 과거를 외면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피해자를 살리기 위한 행동이라고만 부르면 세레이온 농민들의 고통을 지우게 된다.

아마 나자르 역시 비슷하게 자신을 볼 것이라고 헤스티는 생각한다.

도움을 주려고 했던 성직자.

그리고 결국 도움을 제때 주지 못한 세레이온의 사람.

둘 다 사실이다.

헤스티는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무엇을 말할지 가끔 생각한다.

미안하다고 말할 것인가.

자신은 노력했다고 설명할 것인가.

그의 습격을 비난할 것인가.

아직 정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들이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가져가는 곡물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대화가 평화롭게 끝날지는 헤스티도 모른다.


그녀의 신념은 전염병 이후 더욱 확고해졌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모든 생명을 동시에 구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이 가장 자비로운 행동처럼 보일 수 있다.

헤스티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결정을 미루는 동안에도 결과는 진행된다.

병은 퍼진다.

사람은 굶는다.

전투는 계속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결정해야 한다.

헤스티는 가능하면 자신이 그 자리에 서려고 한다.

누군가에게 잔혹한 명령을 떠넘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한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기에 제가 명령합니다.”

그 말에는 영웅적인 자부심이 거의 없다.

오히려 체념에 가까운 무게가 있다.

명령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명령하는 사람이 없어지는 순간을 두 번이나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스티는 자신의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린다.

논리적으로는 명확하다.

그러면 적은 수의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백 명을 살리기 위해 열 명을 버린다.

천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마을을 봉쇄한다.

도시 전체를 지키기 위해 감염구역을 닫는다.

그 결정이 반복되면,
어떤 사람들은 항상 ‘희생해도 되는 쪽’에 놓이게 될 수 있다.

가난한 사람.

국경의 사람.

외국인.

등록되지 않은 씨족.

정치적으로 목소리가 작은 사람.

헤스티는 바로 그 목록 속에 나자르의 씨족이 있었음을 안다.

누구도 그들을 희생시키자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절차는 그들을 뒤로 밀었다.

그리고 뒤로 밀린 사람들이 먼저 죽었다.

그녀는 자신이 더 많은 생명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헤스티는 결정을 내릴 때 단순히 숫자만 묻지 않으려 한다.

누가 위험한가.

왜 그들이 위험한가.

계속 같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구조는 아닌가.

다른 방법은 정말 없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이 결정을 내가 직접 당하는 사람 앞에서도 설명할 수 있는가.

헤스티는 그 마지막 질문을 중요하게 여긴다.

봉쇄구역 안의 사람을 보지 않은 채 문을 닫는 것과,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닫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결과는 같을 수 있다.

하지만 책임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르다.

헤스티는 자기가 내린 결정을 가능한 한 피해자에게 숨기지 않는다.

누군가 미워한다면 받아들인다.

저주하면 듣는다.

그들이 틀렸다고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결정이 필요했다고 믿는 것과,
그 결정 때문에 미워할 권리가 상대에게 있다는 것은 동시에 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의 헤스티도 비슷하다.

그녀는 전사를 즐겨 상대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필요하면 망설이지 않는다.

생명의 여신 세리아의 신성력이 백금빛 머리카락과 베일 주위로 번진다.

광휘가 전장을 가른다.

정화의 불꽃은 저주와 오염을 태운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것은 생명맥류 봉쇄술이다.

헤스티가 특정 지점의 생명맥류 흐름을 억제하면 상대의 회복과 신체활동이 급격히 둔해진다.

생명을 섬기는 성직자가 생명의 흐름을 막는 기술을 사용한다는 점을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다.

헤스티도 불편하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사용한다.

죽이기 위해 모든 흐름을 끊기보다,
싸움을 지속할 수 없을 만큼만 봉쇄한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항상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정화의 불꽃이 사람을 태우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때 헤스티는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선택했다고 말한다.

세리아의 이름 뒤에 숨지 않는다.


한 젊은 성직자가 물은 적이 있다.

“성녀님께서는 봉쇄 결정을 후회하십니까?”

헤스티는 오래 생각했다.

“후회합니다.”

성직자가 놀랐다.

“하지만 필요한 결정이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후회하십니까?”

헤스티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필요했다는 이유로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 말은 그녀가 자신의 선택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필요했다.

그러므로 했다.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므로 아프다.

둘 가운데 하나를 지운다고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

“그 결정은 정의로웠습니까?”

이번에는 헤스티의 대답이 더 늦었다.

“모르겠습니다.”

“수만 명을 살리셨는데도요?”

헤스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옳았다고도 생각합니다.”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안에서 죽은 분들 앞에서 정의로웠다고 말할 자신은 없습니다.”

그녀는 필요와 정의를 같은 말로 만들지 않으려 한다.

그 둘을 같다고 믿는 순간,
통치자와 성직자는 자신이 희생시킨 사람을 너무 쉽게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헤스티의 집무실에는 두 종류의 기록이 함께 놓여 있다.

자신의 결정으로 살아남은 사람의 수.

그리고 살리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

전염병 봉쇄로 보호받은 지역의 인구.

봉쇄구역 사망자 명단.

안발룽 구호 승인 기록.

승인이 나오기 전에 죽은 나자르의 둥지형제들.

헤스티는 어느 한쪽만 보지 않는다.

더 많은 생명을 살렸다는 숫자만 보면 자신을 너무 쉽게 용서할 것 같다.

죽은 사람의 이름만 보면 다시는 필요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둘 다 본다.

그 사이에서 결정을 내린다.


가끔 밤늦게 수첩을 펼치면 나자르가 했던 질문이 떠오른다.

“그러면 빨라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뒤 그가 물었던 질문.

당시 헤스티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훨씬 많은 권한이 있다.

창고를 열 수 있다.

도시를 봉쇄할 수 있다.

성기사단을 움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두렵다.

예전에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은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두렵다.

한 사람의 서명으로 수천 명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

자신이 ‘더 많은 생명’을 위해 무엇까지 희생시키게 될지 알 수 없다.


헤스티는 모든 생명의 가치가 같다고 믿는다.

그런데 매일 그것들을 비교해야 한다.

그것이 그녀의 가장 깊은 모순이다.

열 명과 백 명의 생명가치가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면 숫자를 보지 않을 수도 없다.

헤스티는 그 선택을 피하는 것이 더 깨끗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아 모두 죽는다면 그것 역시 선택의 결과다.

그래서 결국 결정한다.

그리고 결정할 때마다 마음 한편에서는 두려워한다.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소수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감당 가능한 희생’이라는 항목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은지.

그 두려움이 사라지는 날을 오히려 더 두려워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버릴 수 있게 되는 순간,
자신은 대성녀로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스티는 결정을 내린 뒤에도 반드시 피해를 확인한다.

성공했다는 보고만 받지 않는다.

누가 죽었는지 가져오라고 한다.

누가 집을 잃었는지.

누가 치료받지 못했는지.

누가 자신의 결정을 원망하는지까지 기록한다.

누군가 말했다.

“성녀님께서 직접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헤스티는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직접 결정했으니까요.”

그녀에게 책임이란 벌을 받겠다는 뜻이 아니다.

결정의 나쁜 결과를 부하에게 치우게 두지 않는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의 감사와,
죽은 사람 가족의 증오를 같은 자리에서 받는 것이다.


언젠가 나자르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두 사람은 아마 쉽게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헤스티는 그의 약탈을 멈추라고 할 것이다.

나자르는 굶는 사람에게 다른 길을 보여달라고 할 것이다.

둘 다 근거가 있다.

둘 다 실제로 사람을 살렸다.

그리고 둘 다 다른 사람에게 대가를 떠넘긴 적이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어려운 대화가 될 것이다.

헤스티는 그 만남을 피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변명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달라고 말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노력은 결과를 대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이번에는 정말 다른 선택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굶는 안발룽 사람도 살고,
세레이온 농민의 겨울도 빼앗지 않는 구조.

그것을 만들지 못한다면,
두 사람은 계속 서로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서로의 사람을 희생시킬 것이다.


현재의 헤스티는 스물넷의 젊은 대성녀다.

백색과 황금색 성녀복을 입고,
긴 베일 아래에서 언제나 차분한 표정을 유지한다.

말은 온화하다.

명령조차 부탁처럼 들린다.

“문을 닫아주시겠습니까.”

“병력을 물려주십시오.”

“그분들은 먼저 대피시키도록 하지요.”

그러나 결론이 난 뒤에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누군가 묻는다.

“다시 생각해보시면 안 됩니까?”

헤스티는 그 말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유를 듣는다.

새로운 사실이 있다면 검토한다.

그래도 결론이 달라지지 않으면 조용히 말한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명령을 유지한다.

그녀에게 자애는 결정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결정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까지 마지막에 버리지 않는 것이다.


헤스티는 지금도 세리아에게 기도한다.

모든 생명을 구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그런 힘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안다.

대신 다른 것을 기도한다.

선택해야 할 순간을 외면하지 않게 해달라고.

자기 선택을 정의라는 말로 아름답게 꾸미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자신이 희생시킨 사람을 숫자로만 기억하지 않게 해달라고.

언젠가 그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왕관이나 성좌보다 먼저 자신을 자리에서 내려놓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가 끝나면 다시 보고서를 펼친다.

살릴 수 있는 사람.

위험한 사람.

남은 시간.

필요한 물자.

그리고 선택하지 않았을 때 죽을 사람까지 확인한다.

누구도 결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순간이 오면,
헤스티는 대부분 먼저 입을 연다.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기에 제가 명령합니다.”

그리고 명령이 내려간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결정으로 살아난 사람과,
그 결정 때문에 버려진 사람 모두가 자기 앞에 남을 때까지.

헤스티 드 세레니얼은 그것을 책임이라고 부른다.

그 결정들이 필요했다고는 믿는다.

하지만 정의로웠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직 자신이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BAR
배런 그레이하트
세레이온열세꽃잎성좌회
“많은... 이가... 같은... 확신을... 가졌다는... 것은... 증거가... 아닙니다.”
🩸 HP200
💪 공격력5
🧙 마법력60
✨ 신비력1
🛡️ 방어력90
🔗 항마력60
😖 신비저항80
🏃 회피력5
과거 보기
배런 그레이하트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한 문장을 너무 빨리 믿었던 날에서 시작된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세레이온 동부의 곡창지대 가장자리에 자리한 작은 곤충인간 공동체였다.

인간들은 그들을 카르아라고 부르기도 했다.

공동체에는 여러 계통의 곤충인간이 살았지만,
배런의 가족은 장수풍뎅이를 닮은 외골격과 큰 뿔을 가진 계통이었다.

그들의 마을은 특별히 부유하지 않았다.

농사를 지었고,
나무를 가공했으며,
강한 외골격을 이용해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도 했다.

인근 인간 마을과 장날을 함께 쓰기도 했다.

완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그래도 크게 싸우지는 않았다.

어린 배런은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했다.

길에서 만나면 인사한다.

필요하면 물건을 사고판다.

서로의 마을에 굳이 깊숙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는 알게 된다.

서로 싸우지 않는 것과,
서로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어린 배런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느린 아이였다.

움직임이 둔했다는 뜻은 아니다.

대답이 느렸다.

누군가 질문하면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생각했다.

상대가 무엇을 물었는지.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한참 정리한 뒤에야 말했다.

친구들은 자주 답답해했다.

“배런, 물 마실 거야?”

배런은 물통을 바라봤다.

친구가 기다렸다.

“...마실게.”

“그걸 왜 그렇게 오래 생각해?”

배런은 이해하지 못했다.

결정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말의 뜻에도 유난히 민감했다.

누군가 ‘전부’라고 하면 물었다.

정말 전부인가.

‘항상’이라고 하면 언제부터 언제까지냐고 물었다.

‘모두가 안다’고 하면 누가 확인했느냐고 물었다.

어른들은 그를 피곤한 아이라고 했다.

배런은 그것을 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세레이온 동부에 대규모 해충 피해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작은 벌레였다.

밀밭 가장자리에서 잎이 갉아먹힌 흔적이 발견되었다.

며칠 뒤에는 범위가 넓어졌다.

어린 곡식이 쓰러졌다.

창고에 저장해둔 곡물에서도 유충이 발견되었다.

농민들은 방제에 나섰다.

성직자들도 정화술을 사용했다.

하지만 번식 속도가 빨랐다.

여름이 절반도 지나기 전에 여러 마을의 수확량이 크게 줄었다.

사람들은 불안해졌다.

그해 겨울의 식량이 줄어드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빚을 져야 했다.

누군가는 밭을 팔아야 했다.

잘못하면 굶는 사람도 나올 수 있었다.

두려움에는 이유가 있었다.

문제는 그 두려움이 곧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처음 소문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곤충인간 마을 근처의 밭에서 피해가 먼저 심해졌다는 말이 나왔다.

사실 일부는 맞았다.

그 지역의 밭도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시기에 해충이 발견되고 있었다.

그 사실은 소문보다 느리게 퍼졌다.

다른 이야기가 붙었다.

카르아는 벌레와 이야기할 수 있다.

그들이 해충을 숭배한다.

인간 농지를 빼앗기 위해 일부러 벌레를 풀었다.

밤에 곤충인간들이 밭 주변에서 의식을 벌이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마지막 이야기는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배런의 공동체는 밤에 밭을 돌며 피해를 확인하고 있었다.

일부 곤충인간은 인간보다 밤눈이 좋았다.

그들이 등을 들고 밭을 살피던 모습이,
멀리서 본 사람에게는 수상한 의식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나씩 떼어놓으면 설명할 수 있었다.

모아놓으니 이야기가 되었다.

곤충인간들이 해충을 불렀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믿기 시작했다.


배런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걱정하지 않았다.

“조사하면 알겠지.”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 공동체는 조사에 협조했다.

창고를 열었다.

밭을 보여주었다.

성직자들이 토양과 곡물을 채취하는 것도 허락했다.

배런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우리가... 불렀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조사를 나온 젊은 성직자가 말했다.

“아직 없습니다.”

배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증거가 없으면 죄도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세상을 믿고 있었다.


며칠 뒤 인간 마을에서 대표들이 찾아왔다.

화를 내고 있었다.

그들의 밭이 망가졌다.

가족의 겨울이 위험했다.

그들은 곤충인간 공동체에게 해충을 물리라고 요구했다.

마을 장로가 대답했다.

“우리도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인간 대표가 말했다.

“당신들이 부른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이 봤습니다.”

배런이 그 말을 듣다가 물었다.

“무엇을... 봤습니까?”

인간이 그를 노려보았다.

“밤마다 밭에서 무언가 하고 있었다더군.”

“피해를... 확인했습니다.”

“당신들 말을 어떻게 믿지?”

배런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되물었다.

“그럼... 우리가 불렀다는 것은... 왜 믿습니까?”

상대는 즉시 대답했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그 문장을 배런은 평생 잊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며칠 사이 그 말은 점점 강해졌다.

‘사람들이 의심한다’가
‘사람들이 알고 있다’가 되었다.

‘가능성이 있다’가
‘분명하다’가 되었다.

곤충인간이 해충과 닮았다는 사실까지 근거가 되었다.

어떤 설교자는 공개적으로 말했다.

“창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재앙을 불러들였다.”

그가 정확히 카르아를 지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를 말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말했다.

“왜 하필 저들이 사는 곳에서 시작됐겠는가.”

배런은 기록을 찾아보았다.

피해가 처음 확인된 장소는 하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긴 문장이 필요했다.

소문은 짧았다.

벌레 인간이 벌레를 불렀다.

사람들은 짧은 쪽을 더 쉽게 기억했다.


성직자들의 공식 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첫 번째 폭력이 발생했다.

인간 농민 몇 명이 카르아 상인을 붙잡아 폭행했다.

그의 등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경비병이 막았다.

공동체는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시작했다.

문을 닫았다.

아이들은 집 안에 머물렀다.

배런의 어머니는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밝혀질 거다.”

아버지도 동의했다.

“성좌회가 조사 중이야.”

배런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진실이 확인되면 사람들이 멈출 것이라고.

그러나 사람들이 기다려주지 않았다.


인근 마을의 곡물창고 하나가 해충 때문에 크게 손상되었다.

겨울 비축량 일부가 폐기되었다.

누군가 그날 밤 외쳤다.

“카르아가 또 했다!”

누가 처음 외쳤는지 아무도 몰랐다.

누가 확인했는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모였다.

처음에는 항의하러 간다고 했다.

그다음에는 범인을 잡겠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무기를 들었다.

농기구.

횃불.

낡은 창.

사냥용 활.

그들 중 대부분은 평생 사람을 죽여본 적 없는 농민이었다.

악인들이 모인 군대가 아니었다.

겨울 식량을 잃을까 두려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누가 원인인지 이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확신이 그들을 군대로 만들었다.


배런은 횃불이 오는 것을 보았다.

공동체의 경비가 문을 닫았다.

장로가 밖으로 나가 대화를 시도했다.

“조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돌을 던졌다.

장로의 머리에 맞았다.

사람들이 소리쳤다.

“해충을 불러낸 놈들!”

“우리 아이들을 굶기려 한 놈들!”

배런의 아버지가 앞으로 나섰다.

“우리 창고를 보시오.”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곡물도 썩었다.”

누군가 대답했다.

“속임수겠지!”

배런은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논리로는 닫힌 확신을 열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하면 조작이라고 했다.

피해를 입었다고 하면 위장이라고 했다.

부정하면 거짓말이라고 했다.

침묵하면 죄를 인정한 것이라고 했다.

어떤 행동을 해도 결론은 이미 같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확인이 아니었다.

자기 확신을 완성할 재료였다.


첫 번째 횃불이 지붕 위로 날아왔다.

그 뒤는 빠르게 무너졌다.

경비들은 주민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불이 번졌다.

배런은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데리고 뒤쪽 길로 빠지려 했다.

골목에는 이미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한 남자가 배런을 보고 창을 들었다.

“벌레다!”

배런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 앞에서 말하고 있는 존재는 자신이었다.

이름이 있었다.

가족이 있었다.

말을 알아들었다.

두려움도 느꼈다.

그런데 상대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장수풍뎅이를 닮은 머리.

외골격.

커다란 뿔.

그것만 보였다.

배런은 처음으로 종족이라는 말이 사람의 이름을 지울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날 그의 공동체는 거의 무너졌다.

집이 불탔다.

사람들이 죽었다.

도망치다 짓밟힌 아이도 있었다.

배런의 아버지는 다른 주민들이 빠져나갈 시간을 벌다가 죽었다.

어머니는 등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동생은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다.

배런은 단단한 외골격 덕분에 여러 차례 공격을 견뎠다.

돌을 맞았다.

창끝이 등껍질을 긁었다.

누군가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쳤다.

그래도 쓰러지지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을 몸으로 가렸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배런이 전투에서 공격보다 보호벽을 먼저 선택하게 된 것이.

그날 그는 누구를 쓰러뜨렸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누구 앞에 서 있었는지는 기억했다.


성기사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이 죽은 뒤였다.

폭도는 해산되었다.

주동자 몇 명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공식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곤충인간 공동체가 해충을 불러들였다는 증거 없음.

해충 발생은 넓은 지역의 기후와 생태 변화에 따른 것으로 추정됨.

카르아 공동체 역시 동일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확인됨.

세 문장이었다.

배런은 보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자신들이 범인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증명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불탄 집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죽은 사람들에게 무죄라는 기록을 읽어줄 수도 없었다.

진실은 도착했다.

또 늦었다.


재판도 열렸다.

폭력을 주도한 사람들은 처벌받았다.

직접 살인을 저지른 자는 더 무거운 형을 받았다.

일부 성직자는 잘못된 설교로 공포를 부추긴 책임을 추궁받았다.

보상도 논의되었다.

세레이온의 교회는 유감을 표했다.

배런은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는 복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러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자신의 고향이 바로 그 방식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몇몇 인간이 죽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살인자다.

그 문장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 역시 그날 횃불을 들었던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배런은 그것만큼은 거부했다.


한번은 살아남은 카르아 청년 하나가 말했다.

“인간은 다 똑같아.”

배런은 한참 침묵했다.

청년이 짜증을 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배런은 천천히 대답했다.

“우리를... 죽인 사람도... 인간이었다.”

청년이 말했다.

“그러니까.”

배런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를... 숨겨준 사람도... 인간이었다.”

학살 당시 일부 인근 주민은 카르아 가족들을 자기 창고에 숨겨주었다.

성기사들이 올 때까지 입구를 막고 버틴 인간 농부도 있었다.

부상자를 치료한 성직자들도 인간이었다.

배런은 말했다.

“같지... 않았다.”

청년의 겹눈이 흔들렸다.

“그럼 아버지 죽인 놈들도 용서하라는 거야?”

배런은 다시 오래 생각했다.

“아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했다.

“죽인 사람을... 미워해.”

“횃불을 던진 사람을... 벌해.”

“하지만... 태어나지도 않은 인간에게까지... 그 죄를 넘기지는 마.”

그때부터 배런의 신념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악은 피에 붙는 것이 아니다.

종족의 이름에 붙는 것도 아니다.

행동에 붙는다.

확인된 행동에.


그 사건 뒤 배런은 성직자의 길을 선택했다.

주변에서는 의아해했다.

바로 그 종교의 일부 성직자들이 소문을 부추기지 않았느냐고 했다.

배런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들어갔다.

밖에서 교회를 저주하는 것만으로는 교리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성전의 문장 하나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잘못 쓰이면 사람 전체를 괴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접 봤다.

그는 열세꽃잎성좌회가 사람을 분류하는 언어에 관심을 가졌다.

이단.

사도.

오염.

악.

위험종.

어떤 단어는 필요했다.

실제로 위험한 존재도 있었다.

누군가는 저주를 퍼뜨렸다.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생명을 죽였다.

하지만 그 단어가 한 개인에서 종족 전체로 번지는 순간을 배런은 경계했다.

한 사람의 범죄가,
같은 귀를 가진 사람에게.

같은 뿔을 가진 사람에게.

같은 고향 출신에게까지 이어지는 순간.

그 지점을 막고 싶었다.


배런은 공부했다.

신학을 읽었다.

법을 읽었다.

이전 재판기록도 읽었다.

종족분쟁에 관한 보고서를 모았다.

사람들이 집단을 악으로 규정할 때 어떤 말이 반복되는지도 정리했다.

‘원래 그렇다.’

‘다들 안다.’

‘그 종족은 믿을 수 없다.’

‘예전에도 그랬다.’

배런은 그런 문장을 들을 때마다 물었다.

누가 그랬는가.

언제 그랬는가.

몇 명인가.

확인된 기록이 있는가.

그리고 그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같은 판단을 적용할 근거는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세 번째 질문쯤에서 짜증을 냈다.

배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짜증은 증거가 아니었다.


젊은 성직자 시절,
한 작은 마을에서 고블린 행상인이 아이를 납치했다는 보고가 올라온 적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며칠 전 낯선 고블린이 마을에 들어왔다.

그 다음 날 아이가 사라졌다.

사람들이 말했다.

“분명 그놈입니다.”

배런이 물었다.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이와... 이야기한 것은?”

“모릅니다.”

“그럼 무엇이... 확인됐습니까?”

마을 주민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낯선 고블린이 왔고 아이가 사라졌잖습니까.”

배런은 잠시 생각했다.

“두 사실 사이에... 연결은 아직 없습니다.”

사람들은 분노했다.

아이의 목숨이 위험한데 말장난을 한다고 욕했다.

배런은 조사했다.

결국 아이는 강가의 폐허에서 발견되었다.

친구들과 놀다 낡은 지하창고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고블린 행상인은 아무 관련이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사과했다.

배런은 그 사건을 성공으로 기억했다.

조사를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지켰다.

아이도 살아 있었다.

그때까지는 두 가지를 함께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항상 그렇지는 않았다.

몇 년 뒤,
외딴 농촌마을들이 연이어 습격당하는 사건이 생겼다.

생존자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공격자들이 검은 천을 둘렀다.

일부는 뿔이 있었다.

누군가는 마족이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오크라고 했다.

다른 이는 수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증언은 엇갈렸다.

지역 지휘관은 특정 유목집단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근거는 그들이 최근 인근을 지나갔다는 사실과,
몇몇 생존자의 증언이었다.

즉시 체포대를 보내자는 요구가 나왔다.

배런은 반대했다.

“증언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지휘관이 말했다.

“다섯 명이 같은 집단을 지목했습니다.”

배런은 긴 침묵 뒤 말했다.

“많은... 이가...”

모두가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같은... 확신을... 가졌다는... 것은...”

그의 겹눈에는 아무런 흥분도 없었다.

“증거가... 아닙니다.”

체포는 보류되었다.

추가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또 다른 마을이 공격받았다.


이번에는 사람이 죽었다.

열한 명.

배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집 한 채는 아직 연기를 내고 있었다.

한 남자가 그를 보자 달려왔다.

“당신 때문이야.”

배런은 피하지 않았다.

남자가 그의 예복을 움켜잡았다.

“잡을 수 있었잖아!”

배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이 기다리자고 했어!”

맞았다.

그는 기다리자고 했다.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을 잡지 말자고 했다.

그 결정 덕분에 무고한 사람이 체포되지 않았을 가능성은 높았다.

동시에 진짜 공격자들도 그 시간 동안 자유로웠다.

남자가 소리쳤다.

“우리 가족이 증거가 됐나?”

그 질문에 배런은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며칠 뒤 공격자들이 잡혔다.

처음 지목되었던 유목집단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여러 종족이 섞인 약탈단이었다.

뿔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오크도 있었다.

인간도 있었다.

수인도 있었다.

특정 종족이나 부족의 범죄가 아니었다.

배런의 판단은 그 점에서는 맞았다.

처음 지목된 무고한 사람들은 보호받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두 번째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을 살리지는 못했다.

배런은 처음으로 자신의 신중함도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똑바로 봤다.

성급한 판단은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늦은 판단도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둘 가운데 하나를 피했다고 해서 책임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건 이후 배런은 신중함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신중함과 무행동을 구분하려 했다.

범인을 확정할 증거가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었다.

특정 집단을 범인으로 몰지 않으면서도 마을을 보호할 수 있다.

경비를 늘릴 수 있다.

대피로를 만들 수 있다.

순찰을 확대할 수 있다.

공격 경로를 봉인할 수 있다.

증거를 모으는 동안 잠재적 피해를 줄이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배런의 신성술 역시 그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는 공격 주문보다 보호벽을 익혔다.

땅의 신성술로 길을 막았다.

빛의 봉인진으로 위험지역의 출입을 제한했다.

누군가를 범인이라고 확정하기 전에,
더 이상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만드는 방법을 찾았다.

그것이 지금의 배런이 전투에서 방어에 강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에게 방패는 결론을 내리지 않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결론을 확인할 시간을 벌기 위한 도구다.


배런이 열세꽃잎성좌회에 들어간 뒤 가장 강하게 반대한 것은 ‘종족적 성향’을 교리처럼 다루는 문장이었다.

어떤 종족은 본질적으로 탐욕스럽다.

어떤 종족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다.

어떤 존재는 태생적으로 신성에서 멀다.

그런 문장이 초안에 올라올 때마다 배런은 질문했다.

“근거는... 무엇입니까?”

누군가 역사적 사례를 들었다.

배런은 다시 물었다.

“몇 명의... 행동입니까?”

“그 종족 전체의 역사입니다.”

“전체를... 확인하셨습니까?”

회의가 길어졌다.

사람들은 한숨을 쉬었다.

배런은 책장을 넘겼다.

끝까지 확인했다.

그는 단순히 모든 종족이 선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 말 역시 증거가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도 악할 수 있다.

곤충인간도 악할 수 있다.

엘프도.

오크도.

마족도.

어떤 종족이든 개인은 실제로 잔혹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배런이 반대하는 것은 악을 인정하는 일이 아니었다.

행동을 확인하기 전에 악의 주인을 정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말한다.

“죄에는... 이름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묻는다.

“무슨 뜻입니까?”

배런은 천천히 설명한다.

“종족명이... 아닙니다.”

“행동한... 사람의 이름입니다.”

누가 죽였는가.

누가 명령했는가.

누가 거짓말했는가.

누가 방조했는가.

그리고 무엇이 확인되었는가.

그것을 기록해야 했다.

‘오크가 습격했다’가 아니라,
어느 집단의 누가 어떤 마을을 공격했는지.

‘마족이 사람을 속였다’가 아니라,
어느 개인이 어떤 계약을 어떻게 위반했는지.

‘곤충인간이 해충을 불렀다’가 아니라,
그런 행동을 실제로 한 자가 존재하는지부터 확인하는 것.

배런에게 문장의 정확성은 단순한 학자의 취미가 아니다.

사람을 살리는 장치다.

그의 고향에서는 부정확한 한 문장이 횃불이 되었다.


헤스티가 대성녀가 된 뒤,
배런은 그녀의 부의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성격이 꽤 달랐다.

헤스티는 필요한 순간 결정을 내린다.

배런은 결정하기 전 확인한다.

헤스티가 묻는다.

“몇 명이 위험합니까?”

배런은 먼저 되묻는다.

“위험의... 정의부터... 맞추겠습니다.”

헤스티가 가끔 조용히 웃는다.

“배런님과 회의하면 항상 문장 하나가 길어집니다.”

배런은 대답한다.

“문장이... 짧아서...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헤스티는 그 말에는 웃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배런은 헤스티의 결단력을 존중한다.

특히 자신이 망설일 가능성이 있는 순간에,
헤스티가 책임을 떠안고 결정을 내리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방식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소수를 희생해야 한다는 판단이 나올 때마다 가장 끈질기게 질문하는 사람도 배런이다.

“그 소수는... 왜 소수입니까?”

“다른 선택지는... 정말 없습니까?”

“위험군이라는... 분류가... 행동이 아니라 출신을 기준으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헤스티는 그 질문을 귀찮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자기 결정을 멈춰 세우고 근거를 확인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대로 배런 역시 자신의 질문이 결정 자체를 영원히 미루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둘은 자주 부딪친다.

그러면서 서로가 필요한 이유도 안다.


한번은 국경지역에서 한 마족 집단이 실종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주민들은 즉시 추방을 요구했다.

최근 사라진 사람 세 명 모두 그들의 거주지 근처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지역 성직자도 강제수색을 요청했다.

헤스티가 배런에게 물었다.

“어떻게 보십니까?”

배런은 보고서를 한참 읽었다.

“수색은... 필요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반대할 줄 알았던 것이다.

배런이 계속 말했다.

“그러나... 집단 전체를... 용의자로 규정하지는... 마십시오.”

“차이가 있습니까?”

누군가 물었다.

“큽니다.”

배런은 지팡이를 짚었다.

“실종자를 찾기 위해... 지역을 조사하는 것과...”

잠시 침묵했다.

“마족이므로... 범인이라 가정하고... 사람을 뒤지는 것은... 다릅니다.”

수색은 이루어졌다.

동시에 주민 보호를 위한 결계도 설치했다.

결국 범인은 그 집단과 거래하던 인간 밀수업자였다.

배런은 안도했다.

그러나 그날도 생각했다.

만약 조사가 하루 더 길어졌다면 네 번째 피해자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그 위험은 언제나 남아 있었다.


배런은 자신의 신중함을 미덕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두려움에서 나온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한번 잘못된 판단이 공동체 전체를 죽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누군가를 범인이라고 지목하는 순간 지나치게 많은 가능성을 확인하려 한다.

틀리고 싶지 않다.

정확히는,
자기 말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죽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 두려움 때문에 때때로 필요한 결론까지 늦어진다.

그는 그것도 인정한다.

누군가 회의에서 말했다.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입니까?”

과거의 배런이라면 아마 그렇다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고개를 젓는다.

“아닙니다.”

잠시 뒤 말한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기록하고...”

“그 상태에서 할 수 있는... 보호조치를 해야 합니다.”

그에게 신중함은 이제 기다림만을 뜻하지 않는다.

불확실성을 인정한 채 움직이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 변화는 전투에서도 나타난다.

배런은 싸움을 즐기지 않는다.

거대한 체격과 단단한 외골격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은 전사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가장 먼저 펼치는 것은 공격술이 아니다.

지팡이 끝이 땅에 닿는다.

신성력이 토양을 따라 번진다.

흙과 돌이 솟아 보호벽을 만든다.

빛의 선이 겹치며 봉인진이 완성된다.

적과 아군 사이를 나눈다.

누군가 돌진하면 직접 몸으로 받아내기도 한다.

창이 외골격을 때린다.

도끼가 등에 부딪친다.

배런은 잘 쓰러지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얻는 것이다.

한 번 더 확인할 시간.

대피할 시간.

항복을 제안할 시간.

그리고 정말 싸워야 하는 상대인지 확인할 시간.

하지만 확인이 끝나면 행동한다.

땅의 신성술로 발을 묶고,
빛으로 움직임을 봉하며,
필요하면 공격을 가한다.

그는 결론이 느린 사람이지,
결론을 거부하는 사람은 아니다.


성좌회 안에서 배런이 가장 경계하는 순간은 모두가 같은 말을 할 때다.

회의에서 열두 명이 같은 의견을 낸다.

열세 번째 사람이 침묵한다.

사람들은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배런은 그때 오히려 천천히 주변을 본다.

왜 모두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가.

같은 증거를 보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앞사람의 말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인가.

반대하면 이상하게 보일까 봐 침묵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그는 다수결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수의 수를 증거의 수와 혼동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만든 소문을 천 명이 반복해도 원본은 하나일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 말한다.

“모두 같은 생각입니다.”

배런은 긴 침묵 뒤 대답한다.

“많은... 이가...”

천천히 단어를 고른다.

“같은... 확신을... 가졌다는... 것은...”

그리고 마지막에는 분명하게 말한다.

“증거가... 아닙니다.”


배런은 자신의 고향이 사라진 장소를 아직 방문한다.

예전 집들은 거의 남지 않았다.

일부는 다시 지어졌다.

살아남은 카르아들도 돌아왔다.

인간 가족이 이주해 들어와 함께 사는 곳도 있다.

오래전 학살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같은 시장에서 물건을 산다.

배런은 그 모습을 좋아한다.

하지만 화해했다는 말은 쉽게 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도 아니다.

과거가 없어진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다른 행동을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한번은 인간 아이가 배런의 큰 뿔을 바라보다 물었다.

“만져봐도 돼요?”

배런은 오랫동안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가 불안해졌다.

“싫으면 안 만질게요.”

배런은 느긋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아이가 뿔을 만졌다.

“진짜 딱딱하다.”

배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별것 아닌 순간이었다.

동시에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 아이에게 장수풍뎅이 같은 머리를 가진 존재가 더 이상 소문 속 괴물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배런은 열세꽃잎성좌회의 부의장이다.

두꺼운 책을 들고 회의장에 들어온다.

말은 적다.

누군가 고함을 질러도 서두르지 않는다.

분노한 사람의 말을 중간에 끊지 않는다.

증언자가 울면 기다린다.

다 말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질문한다.

“직접... 보신 것입니까?”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그 부분은... 사실입니까... 추측입니까?”

누군가는 차갑다고 느낀다.

배런은 감정을 무시해서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 때문에 잘못된 대상이 처벌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억울함이 진짜여도 범인이 잘못 지목될 수 있다.

분노가 정당해도 증거는 따로 필요하다.

배런은 그 둘을 구분하려 한다.


그러나 그는 이제 질문만으로 자기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사가 필요하다면 조사한다.

동시에 보호벽도 세운다.

범인이 확실하지 않아도 다음 공격이 예상된다면 경비를 보낸다.

특정 종족을 추방하지 않으면서도 위험지역의 통행을 제한한다.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공포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 공포 역시 실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공포가 곧 유죄판결이 되게 두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배런의 일이다.

그리고 그 균형은 언제나 불편하다.

조금 빨리 움직이면 무고한 사람을 해칠 수 있다.

조금 늦으면 새로운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정확한 선은 없다.

배런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완벽한 확신을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무엇을 아는지와 모르는지를 구분한다.

그 상태에서 가장 되돌릴 수 있는 행동부터 선택하려 한다.

벽을 세울 수 있다면 먼저 벽을 세운다.

체포보다 감시가 충분하다면 감시한다.

그러나 공격이 확인되면 막는다.

그때는 느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끔 헤스티가 결정을 내리기 직전 배런을 바라본다.

“반대하십니까?”

배런은 긴 침묵에 들어간다.

다른 사람들은 초조해한다.

헤스티는 기다린다.

그리고 배런이 말한다.

“결론에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잠시 뒤 책의 한 문장을 짚는다.

“근거의... 이 부분에는... 반대합니다.”

그 차이가 배런에게는 중요하다.

좋은 결과를 원한다고 나쁜 근거까지 허용해서는 안 된다.

오늘 그 근거가 마음에 드는 결론을 만들더라도,
내일 같은 논리가 다른 무고한 사람에게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고향을 불태운 것도 그런 논리였다.

해충이 있다.

곤충인간이 있다.

그러므로 곤충인간이 불렀다.

중간의 빈칸을 확신으로 채운 결과였다.

배런은 평생 그 빈칸을 그냥 두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고 배런이 모든 의심을 나쁘게 보는 것은 아니다.

의심은 필요하다.

자신도 늘 의심한다.

문제는 의심과 판결을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가능성이 있다.”

그 말은 조사할 이유가 된다.

처벌할 이유는 아니다.

“위험할 수 있다.”

그 말은 대비할 이유가 된다.

그 존재의 권리를 빼앗을 이유는 아니다.

배런은 그 구분을 성좌회의 문서에 남기려고 한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다음 세대의 성직자가 특정 종족을 두려워하게 되더라도,
그 두려움만으로 교리가 만들어지지 않도록.

좋은 사람이 지도자가 아니어도 최소한의 절차가 무고한 사람을 지키도록.

그 점에서는 바루의 맹약과도 조금 닮았다.

개인의 선의보다 오래 남는 구조를 원한다.

다만 배런이 만드는 것은 무력의 약속이 아니라 판단의 규칙이다.


배런은 아직도 자신이 너무 느린 것은 아닌지 고민한다.

밤마다 보고서를 읽다가 두 번째 마을의 이름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다.

자신이 체포를 막았다.

무고한 집단은 살았다.

그 결정은 옳았다.

그 사이 실제 약탈단이 다른 마을을 공격했다.

그것도 사실이다.

만약 그때 더 빠르게 다른 보호조치를 내렸다면 어땠을까.

경비대를 먼저 보냈다면.

길을 봉쇄했다면.

조사와 보호를 동시에 시작했다면.

열한 명은 살았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그는 자기 신중함의 면죄부 뒤에 숨기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후배 성직자들에게 말한다.

“모른다는... 것은...”

잠시 말을 고른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르는 채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으십시오.”


배런에게 정의는 빠른 확신이 아니다.

그렇다고 끝없는 유보도 아니다.

확인된 사실만큼만 사람을 판단하고,
확인되지 않은 위험에는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행동과 상황을 기준으로 대비하는 것이다.

그는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정말 악한 일을 한다.

고의로 살인을 한다.

약자를 착취한다.

거짓말로 전쟁을 만든다.

그런 행동에는 단호하게 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다만 그 이름이 혈통을 따라 번지게 두지 않는다.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붙지 않도록.

한 마을의 범죄가 한 종족 전체에게 붙지 않도록.

한 사람의 공포가 수천 명의 유죄판결이 되지 않도록.


가끔 젊은 성직자가 묻는다.

“부의장님은 왜 그렇게 단어 하나하나를 따지십니까?”

배런은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긴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느긋한 미소를 짓는다.

“단어는... 사람을 부르는 데... 쓰이니까요.”

성직자가 고개를 갸웃한다.

배런은 두꺼운 손가락으로 책의 한 줄을 짚는다.

“한 번... ‘해충’이라고 부르면...”

그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낮아진다.

“그다음에는... 죽이는 일이... 쉬워집니다.”

그는 직접 보았다.

이름이 사라지는 과정을.

이웃이 곤충인간이 되고,
곤충인간이 벌레가 되고,
벌레가 해충이 되고,
마지막에는 죽여도 되는 것이 되는 과정을.

그래서 배런은 사람에게 이름을 돌려주려 한다.

누가 무엇을 했는지.

누가 하지 않았는지.

어디까지 확인되었는지.

그것을 끝까지 구분한다.


지금도 열세꽃잎성좌회에서 논쟁이 격해지면 배런은 가장 마지막에 입을 여는 경우가 많다.

한쪽은 즉시 처벌하자고 한다.

다른 쪽은 편견이라고 반발한다.

누군가는 종족의 과거를 꺼낸다.

누군가는 피해자의 분노를 근거로 든다.

배런은 모두 듣는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정리한다.

확인된 행동.

증언.

추측.

두려움.

아직 모르는 것.

그 뒤에야 말한다.

“많은... 이가... 같은... 확신을... 가졌다는... 것은...”

누군가는 이미 다음 문장을 안다.

그래도 배런은 줄이지 않는다.

말을 정확하게 끝낸다.

“증거가... 아닙니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거기에서 멈추지도 않는다.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위험이 있다는... 보고는 있습니다.”

“조사는... 계속하십시오.”

“주민은... 보호하십시오.”

“아직 죄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죄인의 이름을 붙이지 마십시오.”

그것이 지금의 배런 그레이하트다.

무고한 이를 지키기 위해 결론을 늦출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늦추는 동안 다른 누군가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 잊지 않으려는 사람.

그는 아직 완벽한 답을 찾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찾지 못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믿는다.

사람이 두려울 수는 있다.

의심할 수도 있다.

조사하고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만큼은,
그 이름을 감당해야 할 행동이 실제로 있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또 다른 마을에 횃불이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 횃불 앞에서는 누구의 이름도 너무 쉽게 사라질 수 있으니까.


백합성창성기사단2명
MJE
마젤 드 로자리아
세레이온백합성창성기사단-단장
“멍청한 놈.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은, 누군가 대신 죽으라는 뜻일 수 있다.”
🩸 HP180
💪 공격력60
🧙 마법력75
✨ 신비력1
🛡️ 방어력60
🔗 항마력70
😖 신비저항70
🏃 회피력50
과거 보기
마젤 드 로자리아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말은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였다.

그 말 자체가 틀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증거가 부족하다면 확인해야 한다.

마젤도 안다.

문제는 다섯 해 전,
그 문장이 반복되는 동안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그녀의 여동생도 있었다.


마젤은 어릴 때부터 성기사가 되고 싶어 했다.

정확히는,
성기사의 갑옷을 좋아했다.

성도 세리아의 행렬에서 백색과 은색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지나가면 어린 마젤은 길가까지 뛰어나갔다.

곧게 세운 성창.

빛나는 검.

갑옷 위에 새겨진 백합 문양.

그 모든 것이 멋있었다.

여동생은 달랐다.

두 자매는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았지만 성격은 상당히 달랐다.

마젤이 나무칼을 들고 집 안을 돌아다니면,
여동생은 뒤에서 붕대와 약초를 들고 따라다녔다.

“또 누구랑 싸웠어?”

“훈련했어.”

“상대는?”

“담장.”

“담장이 이겼네.”

마젤은 무릎에 난 상처를 감추며 말했다.

“시끄러.”

여동생은 웃었다.

“가만있어. 치료해줄 테니까.”

마젤은 항상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다리를 내밀었다.

그런 관계였다.

마젤은 앞에 서고 싶어 했다.

여동생은 뒤에 남은 사람을 돌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성기사의 길을 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치료사가 되었다.


젊은 마젤은 매우 모범적인 성기사였다.

명령을 잘 따랐다.

규율을 중시했다.

보고체계를 어기는 것을 싫어했다.

독단적인 행동을 영웅심리라고 여겼다.

“상황도 모르면서 뛰어드는 건 용기가 아니야.”

후배가 무리하게 움직이려 하면 자주 그렇게 말했다.

“명령 기다려.”

당시의 마젤에게 조직이란 개인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본 것은 틀릴 수 있다.

정찰 보고도 잘못될 수 있다.

소문을 믿고 군대를 움직였다가 무고한 사람을 공격하면,
그 피해 역시 되돌릴 수 없다.

그러므로 확인한다.

보고한다.

허가를 받는다.

그다음 움직인다.

마젤은 그것을 신중함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 번 맞는 방식이었다.

다섯 해 전까지는.


당시 마젤은 백합성창성기사단의 젊은 지휘관 중 하나였다.

세레이온과 안발룽의 경계에서 충돌이 잦아지고 있었다.

가축 문제.

교역로 문제.

보복성 습격.

곡물창고에 대한 약탈.

양쪽 모두 자기 쪽 피해를 먼저 말했다.

국경에서는 작은 소문 하나가 다음 날이면 공격 보고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세레이온 상부는 경계지역의 보고를 신중하게 다루고 있었다.

특히 이빨연맹의 기동대가 움직인다는 첩보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빠르게 이동했다.

같은 부대가 하루 사이 전혀 다른 곳에서 목격되기도 했다.

일부는 실제 병력이 아니었다.

사르크 모래바람은 적에게 병력이 훨씬 많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전술을 자주 사용했다.

밤에 여러 방향에서 소리를 냈다.

가짜 흔적을 남겼다.

정찰대를 일부러 발견하게 한 뒤 다른 길로 사라졌다.

그래서 보고 하나만으로는 실제 공격인지,
위협인지,
단순 이동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날도 그랬다.


국경의 작은 마을 하나에서 긴급보고가 올라왔다.

안발룽의 무장대가 인근에서 목격되었다.

숫자는 불명확.

목적 불명.

이빨연맹의 표식으로 추정되는 천 조각이 발견됨.

마을 쪽으로 접근 중일 가능성 있음.

보고는 거기까지였다.

확실한 공격 징후는 없었다.

마젤은 그 보고를 읽자마자 출동을 요청했다.

“기사단 한 개 중대만 보내주십시오.”

상급 성직자가 물었다.

“확정된 공격 보고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약탈 흔적은요?”

“아직 없습니다.”

“그렇다면 국경 순찰일 가능성도 있겠군요.”

마젤은 잠시 침묵했다.

“가능합니다.”

그녀는 그때까지는 자신의 말에 자신이 있었다.

사실과 추측을 구분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상급자가 말했다.

“추가 정찰을 기다립시다.”

마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지연이었다.


몇 시간 뒤 두 번째 보고가 왔다.

인근 도로에서 여행자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멀리서 불빛이 목격되었다.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는 증언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확실하지 않았다.

불빛이 마을 화재인지 야영지인지 알 수 없었다.

실종된 여행자들이 습격당했다는 증거도 없었다.

마젤은 다시 출동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강했다.

“직접 확인하겠습니다.”

상부에서는 국경 긴장을 이유로 반대했다.

성기사단이 대규모로 움직이면 안발룽 쪽에서는 세레이온이 먼저 병력을 투입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잘못된 정보에 반응해 무장병력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전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논리는 있었다.

마젤도 이해했다.

그래서 다시 기다렸다.


그 마을에는 그녀의 여동생이 있었다.

몇 달 전부터 국경지역 치료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전투와 약탈 때문에 치료사가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자원했다.

마젤은 처음부터 반대했다.

“왜 하필 거기야.”

여동생이 말했다.

“다친 사람이 많으니까.”

“다른 치료사도 있어.”

“그럼 언니 말대로면 다들 다른 사람이 가면 되겠네.”

마젤은 얼굴을 찌푸렸다.

“말을 꼭 그렇게 해?”

여동생은 웃었다.

“걱정하는 건 알겠어.”

“걱정 안 해.”

“응.”

“진짜야.”

“알았어.”

“뭘 알아.”

그것이 출발 전에 나눈 마지막 긴 대화였다.


세 번째 보고가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내용은 짧았다.

마을 외곽의 감시초소 하나가 응답하지 않음.

마젤은 문서를 들고 상부 회의실에 들어갔다.

“출발하겠습니다.”

상급자가 말했다.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감시초소가 끊겼습니다.”

“통신장애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확인하러 가겠습니다.”

“마젤 경.”

상대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확인이 아닙니다. 군사행동입니다.”

마젤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 정찰대만이라도.”

“이미 보냈습니다.”

“언제 돌아옵니까?”

“기다려야 합니다.”

또 그 말이었다.

기다린다.

마젤은 결국 물러났다.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그날 밤까지는.


새벽이 가까워졌을 때 정찰병 하나가 돌아왔다.

말에서 거의 굴러떨어졌다.

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

자기 피는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마을이 공격받았습니다.”

마젤은 더 이상 허가를 묻지 않았다.

검을 챙겼다.

“출동 준비.”

누군가 말했다.

“상부 승인부터...”

마젤이 돌아봤다.

“이미 늦었어.”

그 말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이빨연맹의 기동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사르크의 방식답게 오래 머물지 않았다.

마을 방어대를 압도적으로 흔들었다.

보초가 쓰러졌다.

몇 곳에 동시에 투척무기가 날아왔다.

퇴로라고 생각한 길에서 또 다른 기동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포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목적은 빠른 붕괴였던 것으로 보였다.

방어대가 싸움을 포기하면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고 빠진다.

길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피한다.

나중의 조사에서 마젤은 그렇게 판단했다.

문제는 마을 사람들이 그 의도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갑자기 사방에서 공격이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가족이 있었다.

창고가 있었다.

도망가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저항했다.

전투가 길어졌다.

사르크가 의도했던 짧은 공포는,
그 마을에서는 짧게 끝나지 않았다.


마젤은 치료소에서 여동생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백색 치료복이 피와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무너진 벽 아래쪽에 몸의 절반이 깔려 있었다.

주변에는 환자들이 있었다.

여동생은 마지막까지 치료소를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마젤은 돌을 들어냈다.

손으로도 밀었다.

기사 둘이 도왔다.

몸을 끌어냈다.

이미 차가웠다.

마젤은 손목을 잡았다.

맥박이 없었다.

신성술을 사용했다.

빛이 손끝에서 번졌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다시 했다.

옆에 있던 성직자가 조용히 말했다.

“마젤 경.”

그녀가 고함쳤다.

“입 닥쳐.”

한 번 더.

아무것도 없었다.

마젤은 그제야 멈췄다.


여동생의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자기가 다쳐서 감은 것이 아니었다.

죽은 환자 하나의 팔을 붙잡은 채였다.

마젤은 그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손가락이 굳어 잘 펴지지 않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담장과 싸우고 돌아온 자신에게 여동생이 했던 말.

‘가만있어. 치료해줄 테니까.’

마젤은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울지도 않았다.

소리치지도 않았다.

그냥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늦게 말했다.

“멍청한 년.”

목소리가 떨렸다.

“도망갔어야지.”

답은 없었다.


사망자 명단이 만들어졌다.

마을 주민.

방어대.

치료사.

여행자.

안발룽 전사도 몇 명 죽어 있었다.

이빨연맹 역시 아무 피해 없이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마젤은 보고서를 읽었다.

그리고 공격을 지휘한 이름을 처음 정확히 확인했다.

사르크 모래바람.

사막토끼수인.

이빨연맹 기동대 지휘관.

마젤은 그 이름을 외웠다.

당시에는 죽이고 싶었다.

정말로.

찾으면 검으로 베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증오의 대상은 사르크 하나가 아니었다.

출동을 늦춘 상부도 미웠다.

‘확실하지 않다’고 말한 성직자들도 미웠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따랐던 자기 자신은 더 싫었다.


사후조사가 시작되었다.

마젤은 모든 기록을 읽었다.

누가 첫 보고를 받았는지.

왜 출동이 보류되었는지.

당시 안발룽 병력에 대한 정보가 얼마나 불완전했는지.

세레이온 병력이 먼저 움직였을 때 예상되던 정치적 위험.

그 과정에서 그녀가 원하지 않았던 사실도 보였다.

상부의 판단에는 이유가 있었다.

무능해서만 늦춘 것이 아니었다.

며칠 전 다른 지역에서는 잘못된 약탈 보고 때문에 성기사단이 출동했고,
평범한 안발룽 상단을 포위해 충돌 직전까지 간 일이 있었다.

상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성기사단의 출동 자체가 국경전쟁을 시작할 가능성을 걱정했다.

그들은 사람을 죽게 두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오판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마젤은 그 사실을 이해했다.

용서하지는 못했다.


사르크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처음에는 약점을 찾으려고 했다.

어디에서 움직이는지.

어떤 전술을 쓰는지.

어떻게 죽일 수 있는지.

그러다 그녀의 과거까지 알게 되었다.

평화협상을 위한 씨족 집결지.

전달되지 않은 정보.

상황을 모르던 세레이온 성기사단의 공격.

몰살된 씨족.

살아남은 젊은 전령.

사르크였다.

마젤은 그 기록을 처음 읽었을 때 책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펼쳤다.

몇 번이나 반복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사르크가 사람 죽이는 것을 즐기는 잔혹한 약탈자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워하기 쉬웠다.

하지만 사르크가 왜 모호함을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적이 싸울 생각 자체를 잃을 만큼 압도적인 공포를 처음부터 보여주려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르크 역시 ‘상대도 알고 있겠지’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을 잃었다.

그 후에는 오해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마젤은 그 논리를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은 그 논리 속에서 죽었다.


그녀는 그 사실 때문에 사르크를 더 복잡하게 증오하게 되었다.

이해한다고 용서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때로는 더 화가 났다.

“네가 그런 일을 겪었으면 더 잘 알았어야지.”

사르크가 없는 곳에서 혼자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공포가 어떻게 사람을 움직이는지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같은 공포를 남겼다.

그러나 마젤 자신도 곧 비슷한 문제에 빠졌다.

여동생이 죽은 뒤 그녀의 판단은 극단적으로 빨라졌기 때문이다.


마젤은 보고가 들어오면 먼저 병력을 움직였다.

“확인 후 출동하겠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인상을 찌푸렸다.

“출동하면서 확인해.”

“하지만 오보고라면...”

“검을 뽑지 말고 가면 돼.”

그녀에게 보호와 공격은 다른 일이었다.

위험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일단 성기사단을 보낸다.

주민을 대피시킨다.

방어선을 만든다.

그다음 사실을 확인한다.

이 방식으로 실제로 사람을 살린 적이 있었다.

한 마을에서 약탈대가 접근한다는 불완전한 보고가 들어왔을 때였다.

확실한 정보는 없었다.

마젤은 즉시 부대를 보냈다.

성기사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보호진을 전개했다.

몇 시간 뒤 실제 습격이 시작되었다.

이미 방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민간인 사망자는 없었다.

사람들은 마젤의 판단을 칭찬했다.

그녀 역시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 성공이 오히려 다음 실수를 만들었다.


몇 달 뒤 또 다른 보고가 들어왔다.

무장한 안발룽인 수십 명이 세레이온 국경으로 접근 중.

수레 여러 대 동반.

정찰병은 무기와 긴 창을 확인했다.

목적은 불명확했다.

마젤은 즉시 출동했다.

이번에는 직접 선두에 섰다.

멀리서 수레가 보였다.

무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과거의 기억이 너무 빠르게 연결되었다.

이빨연맹.

약탈.

곡물창고.

늦은 대응.

여동생.

마젤은 명령했다.

“진형 전개.”

성기사들이 길을 막았다.

상대도 당황해 무기를 들었다.

마젤의 검에 신성력이 실렸다.

한 걸음만 더 왔다면 공격했을 것이다.

그때 뒤에서 통역사가 소리쳤다.

“잠깐만요!”

수레의 천막을 걷어보니 안에는 부상자들이 있었다.


약탈대가 아니었다.

안발룽에서 세레이온 치료시설로 이동하던 환자와 호위대였다.

국경 성직자와 미리 협의된 이동이었다.

다만 정보 전달이 늦었다.

마젤은 검을 내렸다.

상대 호위대장은 분노했다.

“우릴 죽일 생각이었나?”

마젤은 변명할 수 있었다.

보고가 불완전했다.

안발룽과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었다.

무장대가 접근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전부 사실이었다.

마젤은 말했다.

“그래.”

주변 성기사들이 놀랐다.

마젤은 상대를 바라봤다.

“한 걸음 더 왔으면 쳤을 거다.”

호위대장이 이를 드러냈다.

마젤은 검을 완전히 집어넣었다.

“내 오판이다.”

그리고 길을 비켰다.

“통과해.”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늦은 판단만 사람이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너무 빠른 확신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마젤은 그 뒤로 며칠 동안 기분이 나빴다.

부관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멀쩡해.”

“계속 보고서를 거꾸로 들고 계십니다.”

마젤이 종이를 바로 돌렸다.

“시끄러.”

부관이 웃음을 참았다.

마젤이 노려봤다.

“웃어?”

“아닙니다.”

“웃었잖아.”

그녀는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여동생을 잃은 뒤 세운 원칙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움직인다.

기다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원칙 역시 잘못 사용하면 누군가의 여동생을 죽일 수 있었다.

자기가 사르크를 원망한 바로 그 방식으로.


그때부터 마젤은 문장을 바꾸었다.

‘확실하지 않아도 먼저 공격한다.’

그것이 아니었다.

‘확실하지 않아도 먼저 보호한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달랐다.

위험 보고가 들어오면 병력을 움직인다.

그 원칙은 그대로였다.

다만 첫 번째 명령이 달라졌다.

“적을 찾아.”가 아니라,
“사람부터 빼.”

“포위해.”가 아니라,
“길부터 지켜.”

“선제타격 준비.”가 아니라,
“보호진 전개.”

마젤은 행동을 늦추지 않았다.

대신 되돌리기 어려운 행동을 뒤로 미뤘다.

사람을 대피시키는 것은 나중에 오보고였다고 밝혀져도 되돌릴 수 있다.

방어벽을 세우는 것도 그렇다.

사람을 베는 것은 아니다.

그 차이를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전투 방식 역시 그 철학을 닮아갔다.

마젤의 한손검에는 신성력이 흐른다.

강한 광휘를 검날에 집중하면 단순한 금속 갑옷뿐 아니라 저주와 봉인까지 함께 가를 수 있다.

저주받은 갑주를 절단한다.

사람을 옭아맨 사술의 연결을 베어낸다.

필요하면 사람 자체도 벤다.

망설이지 않는다.

하지만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는 성경을 펼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심판술보다 먼저 보호진을 전개한다.

빛의 선이 주민과 전투지역 사이에 벽을 만든다.

그 뒤에야 검을 든다.

후배 하나가 물었다.

“단장님, 예전에는 바로 돌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젤이 대답했다.

“예전의 내가 멍청했으니까.”

“그렇게까지...”

“뭐.”

“아닙니다.”

마젤은 성경으로 후배의 투구를 한 번 쳤다.

“훈련이나 해.”


그렇다고 그녀가 신중한 지휘관이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결단은 빠르다.

오히려 성기사단 안에서는 너무 빠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위험이 불확실해도 보호해야 할 사람이 분명하다면 즉시 움직인다.

한 번은 국경마을에서 괴한이 목격되었다는 보고만으로 심야에 기사단을 출동시킨 적이 있었다.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

부하들이 밤새 주민 대피를 돕고 돌아왔다.

한 성기사가 투덜거렸다.

“허탕이었습니다.”

마젤은 갑옷을 벗으며 말했다.

“그래서?”

“아무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잘됐네.”

성기사가 말을 잃었다.

마젤은 물을 마셨다.

“사람 안 죽고 우리만 피곤한 허탕이면 싼 거야.”

그것이 지금의 마젤이다.

틀릴 수 있다.

그러니 틀렸을 때 피해가 작은 행동부터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쪽은 쉽게 선택하지 않는다.


배런 그레이하트와는 그래서 자주 부딪친다.

배런은 증거를 확인한다.

단어의 정의부터 맞춘다.

확인된 사실과 추측을 분리한다.

마젤은 그 태도가 필요한 것을 안다.

그래도 회의가 길어지면 이마에 혈관이 선다.

“배런 부의장.”

“예.”

“결론.”

배런은 침묵한다.

마젤의 눈썹이 움직인다.

배런이 천천히 말한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그건 이미 들었어.”

“끝까지... 들으십시오.”

마젤은 이를 악문다.

그래도 듣는다.

배런은 자신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종류의 말을 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자신이 반드시 곁에 둬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성급한 확신이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배런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다.


한번은 배런이 말했다.

“마젤 단장께서는... 행동과 공격을... 자주 같은 것으로... 생각하십니다.”

마젤이 즉시 반박했다.

“요즘은 아니야.”

배런은 잠시 침묵했다.

“예전보다... 덜 그렇습니다.”

마젤이 노려봤다.

“칭찬하는 거야?”

“평가입니다.”

“기분 나쁘게 잘하네.”

배런은 느긋하게 웃었다.

마젤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가 검토한 보고서는 끝까지 읽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욕하면서도 다시 확인한다.

부하가 물었다.

“싫어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마젤은 즉시 말했다.

“누가.”

“배런 부의장님이요.”

“안 싫어해.”

잠시 뒤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가끔 싫긴 한데.”

그게 마젤식 존중이다.


헤스티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

둘 다 결정을 피하지 않는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헤스티는 가능한 생명 전체를 계산한 뒤 결론을 내리는 편이고,
마젤은 지금 보호해야 할 사람이 보이면 먼저 움직이는 편이다.

마젤은 헤스티의 냉정함을 존경한다.

동시에 가끔 불편해한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린다는 건 알겠습니다.”

공식석상에서는 존댓말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 계산이 끝날 때까지 눈앞의 사람이 죽는다면요?”

헤스티는 대답한다.

“그래서 계산을 빨리 해야겠지요.”

마젤은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한다.

표정으로는 티를 내지 않는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 정도만 말한다.


사르크와는 아직 직접 긴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몇 차례 전장에서 멀리서 본 적은 있다.

긴 모래색 귀.

가볍게 웃는 얼굴.

사각을 파고드는 움직임.

마젤은 처음 사르크를 발견했을 때 검을 너무 강하게 쥐어 장갑 안의 손바닥이 아플 정도였다.

부관이 물었다.

“추격할까요?”

마젤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르크의 기동대는 이미 후퇴하고 있었다.

추격하면 전투가 길어진다.

자기 쪽 부상자도 있었다.

마젤은 검을 내렸다.

“아니.”

부관이 놀랐다.

마젤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왜. 내가 원수 보이면 아무 생각 없이 뛰어갈 줄 알았냐?”

부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젤이 노려봤다.

“대답 안 하는 게 더 열받네.”

그날 그녀는 사르크를 보내주었다.

용서해서가 아니었다.

전투를 더 이어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판단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다섯 해가 걸렸다.


마젤은 가끔 사르크를 만나면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한다.

검부터 뽑을까.

여동생 이야기를 할까.

왜 그 마을을 공격했는지 물을까.

사르크는 아마 변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그렇다.

필요했다고 생각하면 필요했다고 말할 것이다.

사망자를 줄이기 위한 전술이었다고 설명할지도 모른다.

마젤은 그 말을 들으면 화가 날 것이다.

그리고 이해도 할 것이다.

그 점이 가장 싫다.

이해할 수 없는 악인을 미워하는 것은 쉽다.

자신과 비슷한 이유로 잘못된 결정을 내린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마젤 역시 이제는 안다.

사르크도 자기 사람을 지키려고 했다.

자신도 자기 사람을 지키려고 한다.

그 두 사람이 서로를 적으로 확신하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의 여동생이 죽을 수 있다.

그 사실 때문에 마젤은 아직 검을 뽑지 않았다.


하지만 용서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 사르크에 대해 말했다.

“그 사람도 피해자입니다.”

마젤은 즉시 얼굴을 굳혔다.

“그래서?”

상대가 당황했다.

“아니, 그러니까 어느 정도 이해를...”

“이해해.”

마젤은 잘라 말했다.

“그 여자가 왜 그렇게 싸우는지도 알아.”

그리고 성경을 덮었다.

“내 동생은 그래도 죽었어.”

피해자였다는 사실은 가해한 행동을 지우지 않는다.

마젤은 그 점에서는 단호하다.

자기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

여동생을 잃었다고 해서 잘못된 선제공격이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상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면죄부는 아니다.


그녀는 상부의 성직자들도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다.

몇몇은 아직 열세꽃잎성좌회와 교회 행정에서 일하고 있다.

마젤은 회의에서 그들을 마주친다.

예의를 지킨다.

공식 호칭도 사용한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이 나오면 과거를 숨기지 않는다.

한 성직자가 말했다.

“확실한 공격이 확인될 때까지 병력을 보류하는 편이...”

마젤이 말을 끊었다.

“아닙니다.”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마젤이 보고서를 가리켰다.

“공격은 보류할 수 있습니다.”

“보호까지 보류할 이유는 없습니다.”

상대가 말했다.

“병력 이동 자체가 긴장을...”

마젤은 대답했다.

“그러면 비무장 구호대를 먼저 보내십시오.”

“보호진 담당 성직자를 보내십시오.”

“대피명령을 준비하십시오.”

“감시를 강화하십시오.”

하나씩 방법을 말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신중함이 아닙니다.”


그녀는 후배들에게도 자주 같은 말을 한다.

젊은 성기사 하나가 훈련 중 말했다.

“하지만 잘못 움직였다가 문제가 생기면요?”

마젤이 즉시 대답했다.

“그러니까 생각하고 움직여.”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마젤의 눈썹이 올라갔다.

“멍청한 놈.”

성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마젤은 검끝을 내렸다.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은,”

잠시 후배를 바라봤다.

“누군가 대신 죽으라는 뜻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덧붙인다.

“그렇다고 아무나 베라는 뜻도 아니야.”

후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젤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 둘을 구분 못 하면 갑옷 벗어.”

조금 뒤 작게 덧붙인다.

“다치기 전에.”

후배가 웃는다.

마젤이 다시 노려본다.

“왜 웃어.”

“걱정해주신 것 같아서요.”

“아니거든.”


마젤은 단장이 된 뒤 기사단의 출동 규칙도 바꾸었다.

위험 보고를 세 단계로 나누었다.

확인되지 않은 위험이라도 민간인이 명백히 노출되어 있다면 보호부대가 먼저 움직인다.

공격 명령은 별도다.

정찰과 구조는 동시에 할 수 있다.

피난로 확보는 범인이 확인되지 않아도 가능하다.

상대와 접촉했을 때는 가능한 한 먼저 신분과 의도를 확인한다.

그러나 공격이 시작되면 즉시 대응한다.

마젤은 이 규칙을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첫 장에 문장을 하나 적었다.

‘정보의 불완전함은 보호하지 않을 이유가 아니다.’

뒤에는 또 하나를 붙였다.

‘정보의 불완전함은 공격 대상을 마음대로 정할 이유도 아니다.’

두 번째 문장은 나중에 추가되었다.

안발룽 환자 수송대를 거의 공격할 뻔한 뒤였다.

마젤은 그것을 지우지 않았다.

자기가 틀렸다는 흔적도 규정 안에 남겨두었다.


그녀는 여동생의 유품 가운데 작은 치료용 가위를 가지고 있다.

성기사단장의 방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다.

검과 성경이 놓인 서랍 안쪽에 들어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가끔 긴 작전을 앞두고 서랍을 열어본다.

여동생이 왜 죽었는지 생각한다.

사르크가 죽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녀의 기동대가 마을을 공격했다.

상부가 죽였다고도 할 수 있다.

출동을 늦췄다.

자기가 죽였다고 느끼는 날도 있다.

명령을 따랐으니까.

하지만 마젤은 이제 책임 하나만 찾아 모든 것을 거기에 걸어두려 하지 않는다.

여러 결정이 겹쳤다.

여러 사람이 자기 이유를 가지고 움직였다.

그리고 사람이 죽었다.

그 사실을 단순하게 만들면 다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여동생을 생각하면 가끔 아주 단순한 사람이 된다.

사르크가 밉다.

상부가 밉다.

자기 자신도 밉다.

그런 날에는 훈련장에 오래 남는다.

검을 휘두른다.

신성력이 검날을 따라 흐른다.

갑옷 모형이 잘린다.

저주를 흉내 낸 훈련용 봉인이 함께 갈라진다.

몇 시간 뒤 부관이 찾아온다.

“단장님.”

“왜.”

“저녁 드셔야 합니다.”

“안 먹어.”

부관은 익숙하게 도시락을 내려놓는다.

“그러실 줄 알고 가져왔습니다.”

마젤이 노려본다.

“누가 시켰어.”

“제가 알아서 했습니다.”

마젤은 한동안 말이 없다.

그리고 투덜거린다.

“멋대로 하지 마.”

그러면서 먹는다.

그녀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고맙다는 말보다 잔소리가 먼저 나온다.

걱정할수록 더 틱틱댄다.


부하가 다치면 더 심하다.

치료소에 직접 찾아간다.

“멍청하게 왜 맞아.”

부하가 웃는다.

“단장님이 앞에 나가지 말라고 하셔서 대신 막았습니다.”

마젤의 얼굴이 굳는다.

“내가 언제 대신 맞으랬어.”

“보호하라고 하셨습니다.”

“보호랑 맞아주는 거랑 같냐?”

“단장님은 자주 그러시던데요.”

마젤은 말을 잃는다.

잠시 뒤 과일 바구니를 침대 옆에 내려놓는다.

“먹어.”

“이거 단장님이 사오셨습니까?”

“기사단 예산이야.”

실제로는 사비다.

부관은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


현재의 마젤은 백합성창성기사단을 이끈다.

전투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전장을 확인한다.

민간인의 위치.

퇴로.

치료소.

적의 숫자는 그다음이다.

성경을 펼쳐 보호진을 전개한다.

백색과 황금빛 선이 땅을 따라 이어진다.

그 안쪽으로 사람들을 보낸다.

그제야 검을 뽑는다.

한손검에 신성력이 집중된다.

갑옷을 가르고,
저주를 가르고,
필요하면 사람도 벤다.

결정을 내린 뒤에는 핑계를 대지 않는다.

작전이 실패하면 말한다.

“내 명령이다.”

정보가 틀렸다고 부하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다.

정찰병의 보고가 불완전했더라도,
그 보고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지휘관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마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늦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늦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너무 빨라지는 것이다.

위험한 사람과 낯선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는 순간.

무장한 사람과 공격하려는 사람을 같은 것으로 보는 순간.

안발룽 사람을 보고 약탈대를 먼저 떠올리는 순간.

사르크를 증오한다는 이유로,
그녀와 같은 긴 귀나 같은 천 장식을 한 사람까지 적으로 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때 자신은 배런이 평생 경계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확신을 증거보다 먼저 놓는 사람.

마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성급함을 완전히 없애려고 하지는 않는다.

대신 방향을 바꾸려고 한다.

위험이 불확실하면 먼저 달려간다.

하지만 검을 누구에게 겨눌지는 확인한다.

그 짧은 차이가 사람 하나의 생사를 가를 수 있다고 믿는다.


언젠가 정말 사르크와 마주 앉아 이야기할 날이 올 수도 있다.

마젤은 그날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아직 모른다.

아마 친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가 내 동생 죽였어.”

먼저 그렇게 말할 가능성이 높다.

사르크는 아마 웃지 않을 것이다.

혹은 평소처럼 가볍게 웃다가 마젤의 표정을 보고 멈출 수도 있다.

그다음 사르크가 무엇을 말하든,
마젤은 들으려고 할 것이다.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음에는 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사르크가 자신의 씨족이 몰살당한 날을 이야기한다면 그것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이해해.”

잠시 뒤 이를 악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화나.”

그것이 가장 마젤다운 대답일 것이다.


마젤은 이제 행동하지 않은 책임을 행동한 책임만큼 중요하게 본다.

검을 잘못 휘두른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동시에 검을 들어야 할 때 들지 않은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을 수 있다.

문을 닫은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도움이 필요한데 문을 열지 않은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원칙은 위험하다.

무엇이든 하지 않은 것을 죄로 만들기 시작하면,
모든 망설임이 비겁함이 되고 모든 신중함이 방조가 될 수 있다.

마젤은 그 선을 찾는 중이다.

배런 같은 사람이 필요한 이유도 그것이다.

헤스티 같은 사람이 필요한 이유도.

그리고 언젠가는 어쩌면 사르크 같은 사람의 말까지 필요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기분은 더럽지만.


오늘도 긴급보고가 들어온다.

“단장님.”

부관이 문서를 내민다.

“국경마을 북쪽에서 무장집단이 목격됐습니다.”

마젤이 문서를 받아 든다.

“정체는?”

“불명입니다.”

“숫자.”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전의 마젤이라면 그 마지막 문장에서 이미 화를 냈을 것이다.

지금도 표정은 좋지 않다.

그러나 묻는다.

“민간인은?”

“마을에 이백 명가량 있습니다.”

마젤은 문서를 접는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보호중대 먼저 출발시켜.”

“교전 허가는요?”

“아직 없어.”

“적이면 어떻게 합니까?”

마젤은 검을 허리에 찬다.

“확인하면 그때 벤다.”

“적이 아니면요?”

마젤이 노란 리본을 다시 묶으며 짜증스럽게 대답한다.

“그럼 인사하고 돌아오면 되잖아, 멍청아.”

몇 걸음 가다가 멈춘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덧붙인다.

“치료사도 붙여.”

부관이 고개를 끄덕인다.

“예.”

“많이.”

이번에는 목소리가 아주 조금 낮다.

다섯 해 전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마젤은 다시는 그 광경을 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먼저 움직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먼저 움직이는 것과,
먼저 적을 만드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그 차이를 잊지 않는 것.

그것이 현재의 마젤 드 로자리아가 성기사 된 이후에도 자신의 검보다 더 어렵게 배우고 있는 성기사의 의무다.


RIE
리엣 레드토파즈
세레이온백합성창성기사단-단원
“성인인지 악인인지는 나중에 봐. 지금은 내 방패 뒤에 서.”
🩸 HP260
💪 공격력30
🧙 마법력45
✨ 신비력1
🛡️ 방어력70
🔗 항마력75
😖 신비저항60
🏃 회피력45
과거 보기
리엣 레드토파즈가 방패를 믿게 된 것은 성기사가 된 뒤의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광산에서 자랐다.

드워프에게 돌은 단순히 발밑에 깔린 것이 아니다.

어떤 돌은 집이 되고,
어떤 돌은 식량을 살 돈이 되며,
어떤 돌은 수백 년 전 조상이 남긴 곡괭이 자국을 품고 있다.

어린 리엣은 벽을 두드리는 소리만 듣고도 안쪽이 비었는지 대강 알아맞혔다.

어른들이 광맥을 이야기하면 옆에 쪼그려 앉아 들었다.

어느 갱도가 오래됐는지.

어느 지층은 물을 많이 품는지.

천장에서 작은 돌조각이 떨어질 때 무엇을 먼저 봐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아주 일찍 배웠다.

그러면서 한 가지도 함께 배웠다.

광산은 강한 사람부터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

좁은 길을 넓힐 때도.

무너진 지지대를 세울 때도.

문제가 생긴 갱도를 확인할 때도.

힘이 있는 사람이 먼저 들어갔다.

어린 리엣은 그것을 특별한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당연한 순서라고 생각했다.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앞에 선다.

그것뿐이었다.


리엣은 말이 많지 않은 아이였다.

정확히는 필요한 말만 했다.

누군가 넘어지면 위로보다 손부터 내밀었다.

“일어나.”

다친 친구가 아프다고 울면 말했다.

“울어.”

친구가 놀라서 그녀를 바라봤다.

“왜.”

“아픈데 참으면 안 아파져?”

“아니.”

“그럼 울어.”

그리고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런 성격이었다.

다정한 말을 잘하지는 못했다.

대신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면 투덜거리면서도 마지막까지 남았다.

“진짜 귀찮게 하네.”

그렇게 말하면서 가장 무거운 짐을 자기가 들었다.

나중에 성기사가 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리엣이 생명의 여신 세리아를 믿게 된 계기도 거창하지 않았다.

어느 날 광산에서 작은 사고가 있었다.

광부 하나가 다리를 다쳤다.

당시 근처를 지나던 세레이온 성직자가 치료를 도왔다.

기도는 짧았다.

설교도 없었다.

그 성직자는 피가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부목을 대고,
상처를 씻고,
환자가 운반될 때까지 곁에 있었다.

어린 리엣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물었다.

“신이 시켜서 하는 거야?”

성직자는 웃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왜 해?”

성직자는 잠시 생각했다.

“아프잖아요.”

리엣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이유가 짧았기 때문이다.

아프다.

그러니 돕는다.

그 정도라면 믿을 만한 신앙이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된 리엣은 백합성창성기사단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신학에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성경 문장을 외우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긴 설교를 들으면 졸았다.

교관이 물었다.

“레드토파즈 수련기사.”

리엣이 눈을 떴다.

“안 잤어.”

“제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계속해.”

벌점이 쌓였다.

하지만 실전 훈련에서는 달랐다.

누군가를 보호하라는 과제가 주어지면 놀랄 만큼 끈질겼다.

몸집은 다른 종족의 기사들보다 작았다.

하지만 드워프의 단단한 몸과 낮은 중심은 대형방패와 잘 맞았다.

방패를 땅에 박으면 쉽게 밀리지 않았다.

돌진하는 상대를 받아냈다.

뒤의 사람에게 공격이 닿지 않게 했다.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지면 짧은 메이스를 휘둘렀다.

화려한 검술은 없었다.

갑옷이든 뼈든,
맞혀야 할 곳을 짧고 무겁게 때렸다.

리엣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성기사단에 들어온 뒤 그녀가 가장 자주 들은 말은 ‘대의를 보라’였다.

국경 전체를 보라.

교황국 전체를 보라.

더 많은 신자를 생각하라.

작전 전체를 보라.

리엣은 이해했다.

한 명을 구하겠다고 부대 전체를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다.

한 마을 때문에 도시를 버릴 수는 없다.

지휘관은 더 넓게 봐야 한다.

그 논리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리엣에게는 항상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넓게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눈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

보고서에서는 한 명이었다.

전장에서는 숨을 쉬고 있었다.

리엣은 그 차이를 잘 잊지 못했다.


그녀의 인생을 바꾼 광산 붕괴는 성기사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일어났다.

세레이온의 한 광산에서 대규모 붕괴가 발생했다.

지하 깊은 곳의 지지층이 무너졌다.

첫 붕괴 직후 갱도 세 곳이 막혔다.

광부 수십 명이 안쪽에 갇혔다.

백합성창성기사단은 구조 지원을 위해 파견되었다.

리엣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천장에서 계속 작은 돌이 떨어졌다.

땅 아래에서 둔탁한 진동이 올라왔다.

광산에서 자란 드워프에게는 익숙한 경고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더 무너질 수 있었다.

그런데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돌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세 번.

멈춤.

다시 세 번.

생존 신호였다.

리엣이 바로 말했다.

“살아 있어.”


구조가 시작되었다.

기사들과 광부들이 무너진 돌을 치웠다.

리엣은 대형방패로 불안정한 천장을 받치며 안쪽까지 들어갔다.

틈이 생기면 광부들이 돌을 빼냈다.

신성술을 사용하는 성직자들은 부상자를 치료했다.

몇 시간 동안 사람들을 꺼냈다.

다섯 명.

열 명.

열일곱 명.

시간이 갈수록 진동은 커졌다.

광산 감독관이 말했다.

“두 번째 붕괴가 올 수 있습니다.”

현장 지휘관이 갱도 상태를 확인했다.

지지대 여러 개가 이미 휘어 있었다.

구조대가 더 들어가면 구조자까지 매몰될 가능성이 높았다.

안쪽에 아직 사람이 있었다.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었다.

리엣은 귀를 벽에 대었다.

희미하게 들렸다.

두드리는 소리.

아직 있었다.


지휘관이 명령했다.

“구조 중단.”

리엣이 돌아봤다.

“뭐?”

“전원 철수한다.”

“안에 살아 있어.”

“안다.”

“그런데?”

지휘관의 얼굴도 좋지 않았다.

“지금 더 들어가면 구조대까지 죽는다.”

“확실해?”

“가능성이 높다.”

리엣은 벽을 다시 두드렸다.

안쪽에서 답이 왔다.

똑.

똑.

똑.

아주 약했다.

리엣이 말했다.

“들리잖아.”

지휘관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더 어렵다.”

“그럼 들어가.”

“명령이다.”

리엣의 표정이 굳었다.

“싫어.”


그녀는 명령을 어겼다.

혼자 가려고 했다.

정확히는 혼자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 목숨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다고 여겼다.

방패를 들었다.

통로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났다.

동료 성기사 둘이 따라왔다.

리엣이 돌아봤다.

“뭐 해.”

한 명이 말했다.

“구조.”

“난 혼자 갈 거야.”

다른 기사가 웃었다.

“네가 방패 하나로 돌 다 들 거냐?”

“죽을 수도 있어.”

“알아.”

리엣은 인상을 찌푸렸다.

“돌아가.”

첫 번째 기사가 말했다.

“싫어.”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리엣은 욕을 했다.

세 사람은 들어갔다.


갱도 안쪽은 계속 무너지고 있었다.

리엣이 방패로 작은 낙석을 받아냈다.

동료들이 지지대를 세웠다.

광산 구조를 알고 있는 리엣이 길을 골랐다.

완전히 막힌 중심통로 대신 옆의 오래된 작업갱도를 돌아 들어갔다.

좁았다.

갑옷이 벽에 긁혔다.

몇 번이나 멈춰 돌을 치워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을 발견했다.

열두 명이었다.

광부 아홉.

운반 인부 둘.

십 대 견습광부 하나.

몇 명은 다리를 다쳤다.

한 사람은 의식이 희미했다.

리엣은 말했다.

“일어날 수 있는 놈부터 일어나.”

누군가 울면서 물었다.

“구조대입니까?”

“보면 몰라?”

“살 수 있습니까?”

리엣은 잠시 천장을 봤다.

또 진동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모르지.”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나가자.”


돌아가는 길은 들어올 때보다 더 위험했다.

부상자 때문에 속도가 느렸다.

리엣은 가장 뒤에 섰다.

큰 방패를 머리 위로 기울여 낙석을 막았다.

동료 하나가 앞에서 부상자를 부축했다.

다른 하나는 무너지는 지지대를 임시로 고정했다.

절반쯤 나왔을 때 첫 번째 큰 붕괴가 일어났다.

굉음이 났다.

리엣이 외쳤다.

“엎드려!”

돌이 쏟아졌다.

방패 위로 충격이 떨어졌다.

팔이 저렸다.

무릎이 바닥에 박혔다.

그래도 버텼다.

뒤쪽의 광부들은 살았다.

한 동료가 웃었다.

“그 방패 비싼 이유 있네.”

리엣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가면 네가 닦아.”

“명령 위반한 사람이 닦아야지.”

그게 그와 나눈 마지막 농담이었다.


두 번째 붕괴는 예고 없이 왔다.

이번에는 옆벽이 무너졌다.

지지대를 붙잡고 있던 동료 한 명이 먼저 깔렸다.

리엣이 돌아갔다.

“가지 마!”

다른 기사가 소리쳤다.

리엣은 이미 돌을 들어내고 있었다.

깔린 기사의 팔이 보였다.

움직였다.

살아 있었다.

리엣은 방패를 버리고 양손으로 돌을 밀었다.

“야.”

안쪽에서 신음이 들렸다.

“듣고 있지?”

대답이 없었다.

“대답해.”

희미한 목소리가 나왔다.

“광부부터...”

리엣이 욕을 했다.

“시끄러.”

“리엣.”

“나와서 직접 말해.”

그 순간 다시 천장이 울렸다.

함께 있던 다른 기사가 리엣을 뒤에서 붙잡았다.

“가야 해!”

“놔!”

“다 죽어!”

“살아 있어!”

“알아!”

그 한마디에 리엣의 몸이 잠깐 굳었다.

상대도 알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을.

그래도 가야 했다.


리엣은 끌려가듯 이동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통로가 무너졌다.

깔린 동료는 나오지 못했다.

남은 한 명도 출구가 보이기 직전 큰 돌에 맞았다.

리엣은 그를 업었다.

갑옷까지 입은 성기사의 무게는 엄청났다.

그래도 들었다.

광부들이 도우려고 했다.

리엣이 소리쳤다.

“너희는 나가!”

견습광부 하나가 울면서 말했다.

“같이...”

“나가라고!”

그들이 먼저 빠져나갔다.

리엣은 동료를 등에 업고 마지막 통로를 걸었다.

출구에서 성기사들이 달려왔다.

둘을 끌어냈다.

동료의 숨은 아직 붙어 있었다.

치료사가 달라붙었다.

리엣은 옆에 서 있었다.

몇 분 뒤 치료사가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 동료도 죽었다.


구조된 사람은 많았다.

리엣이 명령을 어기고 들어가지 않았다면 죽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광부들은 그녀를 영웅이라고 불렀다.

가족들이 울면서 손을 잡았다.

견습광부의 어머니는 몇 번이나 머리를 숙였다.

리엣은 그 감사가 불편했다.

자신이 구한 사람을 보면서도,
뒤에서는 동료 두 명의 시신이 옮겨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옳은 일을 하셨습니다.”

리엣은 대답하지 않았다.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들어갈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다면 동료 둘의 죽음은 무엇이 되는가.

옳은 선택에 필요한 대가였다고 말하면 되는가.

리엣은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징계도 받았다.

구조중단 명령 불복종.

구조대원 추가 위험 노출.

지휘체계 위반.

리엣은 전부 인정했다.

심문관이 물었다.

“명령을 들었습니까?”

“응.”

“위험성도 이해했습니까?”

“응.”

“그럼에도 불복종했습니까?”

“응.”

“후회합니까?”

그 질문에서 처음으로 오래 침묵했다.

리엣은 대답했다.

“모르겠어.”

심문관이 눈을 들었다.

“사람을 구한 건 후회 안 해.”

잠시 손을 꽉 쥐었다.

“둘 데려간 건...”

말이 멈췄다.

정확히는 자신이 데려간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자기 판단으로 따라왔다.

하지만 리엣이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면 따라올 일도 없었다.

그 사실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내 책임도 있어.”

그 정도만 말했다.


죽은 동료의 가족을 찾아가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한 동료에게는 배우자가 있었다.

다른 한 명에게는 늙은 아버지가 있었다.

리엣은 둘 다 직접 찾아갔다.

기사단에서는 굳이 갈 필요 없다고 했다.

공식 통보는 이미 끝난 뒤였다.

리엣은 갔다.

첫 번째 집에서는 얼굴을 맞았다.

동료의 배우자가 그녀의 뺨을 때렸다.

리엣은 피하지 않았다.

“왜 데려갔어?”

리엣은 말했다.

“내가 데려간 건 아니야.”

상대의 얼굴이 더 굳었다.

리엣은 바로 말을 고쳤다.

“근데 내가 들어가니까 따라왔어.”

그게 더 정확했다.

“사람은 살렸다고 들었어.”

“응.”

“그러면 잘한 일이야?”

리엣은 대답하지 못했다.

오래 침묵하다 말했다.

“살린 건 잘했어.”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 사람 죽은 게 잘한 건 아니고.”

둘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지 않았다.


두 번째 동료의 아버지는 그녀를 때리지 않았다.

오히려 술을 한 잔 내놓았다.

리엣은 더 불편했다.

노인이 물었다.

“걔가 따라가겠다고 했지?”

“응.”

“말렸나?”

“말렸어.”

“안 들었고.”

“응.”

노인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걔 선택도 걔 거다.”

리엣의 눈이 움직였다.

노인이 덧붙였다.

“네가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

리엣이 투덜거렸다.

“내가 먼저 들어갔잖아.”

“그래.”

“그럼 내 책임도 있지.”

“있지.”

노인은 쉽게 부정하지 않았다.

“다 네 책임은 아니고.”

리엣은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렸다.


광산 붕괴 이후 리엣은 구조 명령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예전보다 사람을 덜 구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눈앞에 사람이 있으면 여전히 들어간다.

다만 이제 자기가 위험을 선택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위험까지 마음대로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

“난 들어갈 거야.”

그렇게 말한 뒤 덧붙인다.

“넌 상황 봐.”

부하가 묻는다.

“같이 들어가면 안 됩니까?”

리엣은 예전처럼 무조건 돌아가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설명한다.

어디가 무너질 수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왜 위험한지.

그리고 정말 필요한 인원만 데려간다.

구조를 위한 희생이 자동으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들어가는 사람도 생명이다.

그 사실을 무시하면 구조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소모하게 된다.


그 뒤 리엣은 기사단 안에서도 현장구조와 민간인 보호에 특화된 성기사가 되었다.

대형방패를 바꿨다.

예전보다 더 넓고 두꺼운 것으로.

사람 한두 명은 완전히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

기동성은 떨어졌다.

동료들이 놀렸다.

“그거 문짝 아닙니까?”

리엣이 대답했다.

“문짝은 사람 막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이건 화살 막아.”

“무겁지 않습니까?”

“너보다 가벼워.”

“저 그렇게 무겁지 않습니다.”

“말이.”

그 뒤로 아무도 묻지 않았다.


마젤이 성기사단장이 된 뒤 리엣은 그녀와 꽤 잘 맞았다.

둘 다 현장을 먼저 보는 편이었다.

위험 보고가 들어오면 마젤은 보호부대를 먼저 움직였다.

리엣은 그런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한번은 마젤이 말했다.

“민간인부터 빼.”

리엣이 바로 방패를 들었다.

“알았어.”

옆의 젊은 기사가 눈을 크게 떴다.

“단장님께 반말하십니까?”

리엣이 그를 바라봤다.

“왜.”

“단장님이신데요.”

“알아.”

마젤의 눈썹이 올라갔다.

리엣이 물었다.

“싫어?”

마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작전 중에만 좀...”

리엣이 말했다.

“빨리 말하라며.”

마젤은 한숨을 쉬었다.

“됐어.”

그 뒤로 거의 포기했다.


리엣은 계급 자체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니다.

명령도 대체로 따른다.

하지만 사람의 지위 때문에 말투가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대성녀 앞에서도 할 말은 한다.

헤스티가 한 작전에서 민간인 철수보다 감염 차단을 우선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그랬다.

리엣이 물었다.

“안에 몇 명 남아?”

주변 성직자가 얼굴을 굳혔다.

“대성녀님께 말버릇이...”

헤스티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직접 숫자를 말했다.

리엣은 잠시 생각했다.

“구할 시간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가 얼마인데.”

헤스티는 정확한 시간을 설명했다.

리엣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도 결론이 맞다고 판단하면 따른다.

다만 나중에 반드시 확인한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그때 안에 남아 있던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리엣에게 숫자는 사람을 잊기 위한 것이 아니다.

찾아가기 위한 숫자다.


그녀의 신앙 역시 점점 단순해졌다.

젊은 성직자들이 세리아의 뜻에 대해 길게 토론하면 리엣은 대부분 듣기만 한다.

그러다 누군가 묻는다.

“리엣 경께서는 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리엣은 자기 방패를 두드린다.

“이거.”

상대가 당황한다.

“방패 말씀이십니까?”

“응.”

“비유적인 의미로...”

“아니.”

리엣이 방패를 다시 두드린다.

“진짜 방패.”

그리고 말한다.

“신앙이 사람 살리라고 떠드는 거면 뭐 해.”

“화살 날아올 때 앞에 세울 게 없는데.”

그녀에게 신앙은 높은 제단에서 말하는 선언보다 행동이었다.

공격받는 사람 앞에 서는 것.

가능하면 자신이 맞는 것.

그리고 살아남은 뒤에야 누가 옳았는지 따지는 것.


그 신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건은 국경의 작은 충돌에서였다.

안발룽 습격대와 세레이온 경비대가 싸운 뒤였다.

전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 안발룽 전사 하나가 크게 다쳤다.

무기를 떨어뜨렸다.

다리에도 부상을 입었다.

도망갈 수 없는 상태였다.

세레이온 주민들은 그를 죽이라고 소리쳤다.

그 습격으로 사람이 다쳤다.

창고도 불탔다.

누군가 외쳤다.

“저놈들이 먼저 왔어!”

리엣은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 전사는 습격대 소속일 가능성이 높았다.

방금 전까지 싸우고 있었다.

손에는 피도 묻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주민 하나가 창을 들고 다가갔다.

리엣이 방패를 사이에 세웠다.

“비켜.”

주민이 소리쳤다.

“저놈이 우리 사람 죽였어!”

리엣이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왜 막아!”

“지금 못 싸우잖아.”


주민들은 분노했다.

성기사까지 약탈자를 감싼다고 했다.

리엣은 듣지 않은 척했다.

상처 입은 전사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무기를 발로 멀리 밀었다.

손목도 묶었다.

그리고 치료사를 불렀다.

전사가 힘겹게 말했다.

“왜...”

리엣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끄러.”

“난 네 적이다.”

“알아.”

“사람도 죽였다.”

“그건 나중에 확인해.”

전사가 그녀를 바라봤다.

리엣은 방패를 세워 날아오는 돌 하나를 막았다.

그리고 말했다.

“성인인지 악인인지는 나중에 봐.”

주변이 조용해졌다.

“지금은 내 방패 뒤에 서.”

그 말은 그 뒤 리엣을 상징하는 문장이 되었다.


그 전사는 살아남았다.

조사 결과 실제 습격대의 일원이었다.

민간인 살해에 직접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창고 약탈에는 참여했다.

재판을 받았다.

형도 선고받았다.

리엣은 그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살려줬다고 풀어줘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보호와 무죄는 같은 말이 아니었다.

살아 있게 만드는 것.

그 뒤 책임을 묻는 것.

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몇 년 뒤 생겼다.

그 전사가 형을 마치고 안발룽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리고 다시 무장집단에 들어갔다.

몇 달 뒤 국경 충돌에서 세레이온 경비병 한 명이 죽었다.

그 전사가 포함된 부대였다.

직접 죽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리엣에게는 충분히 불편한 소식이었다.


한 젊은 성기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때 죽게 두었어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리엣은 즉시 말했다.

“아니.”

“하지만 다시 싸웠습니다.”

“응.”

“그 사람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리엣의 얼굴이 굳었다.

그 가능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 생각한 문제였다.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그때 죽여?”

성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나쁜 짓 할지도 모르니까?”

“그런 뜻은...”

“그럼 언제부터 사람 죽여도 돼.”

리엣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할지도 모르면?”

“할 것 같으면?”

“그렇게 생겼으면?”

성기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리엣도 그것으로 논쟁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건은 그녀에게 새로운 문제를 남겼다.

오늘 사람 하나를 구한다.

그 사람은 내일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구조는 내일의 피해에 책임이 있는가.

리엣은 쉽게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결과는 연결되어 있다.

자신이 살린 사람이 다시 무기를 들었다면,
그 사실까지 완전히 모른 척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눈앞에서 피 흘리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둘 수도 없다.

미래의 죄를 미리 판결하기 시작하면,
구조와 처형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래서 리엣은 원칙을 바꾸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를 더 붙였다.

살린다.

그리고 필요하면 막는다.

치료한다.

그리고 무기를 빼앗는다.

방패 뒤에 들인다.

그리고 책임을 확인한다.

리엣에게 자비는 방면이 아니다.

생명을 살려둔 채 판단할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포로를 보호할 때도 매우 단호하다.

아군이 보복하려 하면 방패로 막는다.

포로가 다시 공격하려 하면 메이스로 때려눕힌다.

양쪽 모두에게 비슷하게 말한다.

“내 방패 뒤에 있다고 착각하지 마.”

포로가 묻는다.

“무슨 뜻이지?”

“네 편이라는 뜻 아니야.”

리엣은 메이스를 어깨에 얹는다.

“지금 죽게 안 둔다는 뜻이지.”

그것이 그녀의 보호다.

조건 없는 신뢰도 아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도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불필요하게 생명이 끝나지 않게 하는 것.

그다음 문제는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해결하는 것.


마젤은 그런 리엣의 방식을 대체로 존중한다.

하지만 가끔 충돌한다.

위험인물의 구조를 두고 판단이 갈릴 때가 그렇다.

한번은 저주받은 마법사가 전투 중 크게 다친 채 발견되었다.

그가 깨어나면 다시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마젤이 말했다.

“봉인부터 해.”

리엣이 대답했다.

“치료부터.”

“깨어나면?”

“네가 있잖아.”

마젤의 표정이 굳었다.

“왜 그게 내 일이야.”

“단장이잖아.”

“이럴 때만 단장 취급하지.”

리엣은 치료사를 불렀다.

마젤은 투덜거리면서 직접 봉인진을 전개했다.

결국 둘 다 했다.

그런 식으로 맞춰간다.


리엣은 헤스티의 결정을 보면서 더 큰 규모의 문제도 생각하게 되었다.

눈앞의 생명을 먼저 본다.

그게 자신의 방식이다.

하지만 대성녀는 때때로 눈앞의 사람보다 아직 보이지 않는 수천 명을 먼저 봐야 한다.

전염병 봉쇄처럼.

리엣은 헤스티의 과거를 알고 있다.

그녀가 문을 닫았고,
그 안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도 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리엣은 솔직하게 말했다.

“난 못 했을 거야.”

헤스티가 물었다.

“문을 열었을까요?”

“아마.”

“그러면 더 많은 분이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리엣은 한숨을 쉬었다.

“알아.”

헤스티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제가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리엣은 오래 생각했다.

“아니.”

그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더 싫어.”

어떤 상황에는 정말 좋은 선택이 없다는 사실이 싫었다.


헤스티 역시 리엣을 필요로 했다.

대성녀가 숫자를 보고 결정을 내릴 때,
리엣은 숫자 안의 사람을 다시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희생 예상 인원 오십입니다.”

회의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리엣이 묻는다.

“누구.”

“예?”

“어떤 놈들인데.”

“국경지대 주민입니다.”

“아이 있어?”

“있습니다.”

“못 걷는 사람은?”

그 질문들은 결정 전체를 바꾸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리엣은 묻는다.

‘오십’이라는 숫자가 너무 편한 말이 되지 않도록.

그 사람들이 실제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가족이 있고,
겁을 먹는 존재라는 사실이 회의장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리엣은 자신이 대단한 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좌회의 복잡한 교리 논쟁에 들어가면 머리가 아프다고 말한다.

한번은 배런이 그녀에게 긴 설명을 한 적이 있었다.

개인의 행동과 집단적 귀속을 구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배런이 한참 이야기했다.

리엣은 듣고 있었다.

마침내 배런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리엣이 대답했다.

“맞는 말 같아.”

배런이 기다렸다.

리엣이 눈썹을 찌푸렸다.

“뭘 더 말해.”

“아닙니다.”

“길게 말한다고 더 맞는 말 돼?”

배런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느긋하게 웃었다.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리엣은 그를 꽤 좋아한다.

말이 너무 느린 것만 빼면.


광산 붕괴에서 살아난 견습광부는 훗날 성인이 되어 리엣을 찾아온 적이 있다.

등이 굽고 손이 굵어진 드워프였다.

이제는 자기 아이도 있었다.

그가 말했다.

“기억합니까?”

리엣이 한참 쳐다봤다.

“누구더라.”

남자의 표정이 무너졌다.

리엣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그런 농담 하시는 분 아니셨잖습니까.”

“나도 늙어.”

“드워프가 아흔여섯에 그런 말씀을...”

“용건.”

남자는 웃었다.

그리고 아이를 앞으로 데려왔다.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리엣은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그녀의 방패보다도 작았다.

남자가 말했다.

“그날 성기사님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 아이는 없습니다.”

리엣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구한 한 생명 뒤에 또 다른 생명이 이어져 있었다.


그날 저녁 리엣은 죽은 동료들의 묘지를 찾았다.

두 사람 모두 같은 곳에 묻혀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 곳씩 따로 찾아갔다.

첫 번째 무덤에는 꽃을 놓았다.

두 번째에는 술을 조금 부었다.

그리고 말했다.

“걔 애 생겼더라.”

대답은 없었다.

리엣은 묘비 옆에 주저앉았다.

“봐.”

“사람 살린 건 맞잖아.”

잠시 침묵했다.

“근데 너희도 죽었고.”

그녀는 아직도 두 사실을 하나로 계산하지 못한다.

열두 명을 살리고 두 명을 잃었다.

숫자로만 보면 이익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리엣은 그런 계산을 싫어한다.

열두 명은 열두 명이다.

두 명은 두 명이다.

살아남은 사람이 많다고 죽은 두 사람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을 잃었다고 열두 명을 구한 일이 잘못이 되는 것도 아니다.

둘 다 남는다.

리엣은 그 무게를 그냥 들고 간다.

답을 억지로 만들지 않는다.


그 경험 때문에 그녀는 영웅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 말했다.

“목숨을 걸고 사람을 구한 영웅이시잖습니까.”

리엣은 얼굴을 찌푸렸다.

“같이 들어간 둘도 목숨 걸었어.”

“하지만 리엣 경께서 결단하지 않으셨다면...”

“그러니까.”

리엣이 말을 끊는다.

“내가 결단해서 둘도 들어온 거잖아.”

그녀는 자신의 용기를 미화하지 않는다.

용감한 결정은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다.

지도자의 용기는 특히 그렇다.

자기가 목숨을 걸겠다고 외치는 순간,
자기를 믿는 사람까지 따라올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의 리엣은 위험한 일을 할 때 한 번 더 주변을 본다.

자신이 누구를 함께 끌고 들어가는지.

그 사람이 정말 선택하고 있는지.

혹은 자기 때문에 선택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아닌지.


그럼에도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면 몸이 먼저 움직인다.

그건 고쳐지지 않았다.

아마 고칠 생각도 없다.

불타는 집이 있으면 들어간다.

화살이 날아오면 방패를 든다.

다친 적이 있으면 무기부터 치우고 치료사를 부른다.

상부에서 신분 확인부터 하라고 해도 피가 너무 많이 나면 먼저 지혈한다.

그리고 나중에 혼난다.

마젤이 말했다.

“또 명령 순서 바꿨지.”

리엣이 대답했다.

“살았잖아.”

“그게 다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알아.”

“아는 얼굴이 아닌데.”

“네 얼굴도 항상 화나 보여.”

“리엣.”

“왜.”

결국 마젤이 먼저 한숨을 쉰다.

둘은 꽤 자주 그런다.


리엣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누구를 보호해야 하는가.’

그녀의 본능은 간단하다.

공격받는 사람.

다친 사람.

지금 죽을 사람.

그런데 세상은 계속 다음 질문을 붙인다.

그 사람이 살인자라면?

내일 다시 무기를 든다면?

살려둔 한 사람이 나중에 열 명을 죽인다면?

리엣은 그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래를 확신할 수도 없다.

그래서 현재의 행동과 미래의 책임을 나누려고 한다.

지금은 살린다.

위험하면 구속한다.

죄가 확인되면 재판한다.

다시 공격하면 막는다.

필요하면 그때는 싸운다.

아직 하지 않은 일을 이유로 지금 죽게 두지는 않는다.

그것이 그녀가 찾아낸 임시적인 답이다.

완벽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곱 깃발 원정대에 합류할 사람으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도 리엣은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다.

“내가 왜.”

성기사단의 담당자가 설명했다.

대륙 각지를 돌며 기록한다.

분쟁과 재난을 직접 본다.

서로 다른 나라와 종족의 증언을 듣는다.

리엣은 얼굴을 찌푸렸다.

“기사한테 기록하라고?”

“기록 담당자는 따로 있습니다.”

“그럼 난.”

“현장에서 사람을 보호할 성기사입니다.”

그 말에서 리엣은 조금 조용해졌다.

그리고 일곱 깃발 원정대가 누구를 심판하거나 전쟁에 개입하는 조직은 아니라는 설명을 들었다.

보고,
듣고,
기록한다.

어느 나라의 잘못도 숨기지 않는다.

리엣은 한참 생각했다.

“리벨리온도 가?”

“예.”

“안발룽도.”

“예.”

“우리 나라 잘못도 쓰고.”

“그렇습니다.”

리엣은 짧게 대답했다.

“갈게.”

그녀에게는 직접 보는 일이 중요했다.

멀리서 누가 선하고 악한지 듣는 것보다,
현장에서 누가 실제로 공격받고 있는지를 보는 편을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곱 깃발 원정대의 원칙과 리엣의 성격은 완전히 잘 맞는 것은 아니다.

원정대는 정치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전쟁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는 조직도 아니다.

리엣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규칙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맞고 있는데 기록만 하라고 하면 참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출발 전에도 그 부분을 여러 번 확인했다.

“누가 절벽에서 떨어지면?”

“구해도 됩니다.”

“강도가 사람 찌르면?”

설명이 길어졌다.

리엣은 듣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원정대의 정치적 중립과,
여행 중 눈앞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이 언제 충돌하는지 생각해야 했다.

그녀는 아직 완전히 자신 없다.

다만 하나는 알고 있다.

자기가 정치적 결론을 대신 내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중립’이라는 말 뒤에 숨겨 외면하고 싶지도 않다.

그 경계는 앞으로 그녀가 직접 걸으며 배워야 할 것이다.


리엣은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성기사라는 직함도 생명을 구할 권리를 특별히 주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저 방패를 들 수 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잘 버틸 수 있다.

그러니 앞에 선다.

그 정도다.

누군가 물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을 구하려다 언젠가 정말 구하면 안 되는 사람을 구하면요?”

리엣은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그 사람이 나중에 누군가를 해치면요?”

리엣은 한동안 방패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그때 내가 막아.”

상대가 답답해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알아.”

리엣도 안다.

자기가 언제나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살린 사람의 모든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답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현재의 그녀가 가진 대답은 그것뿐이다.

아직 죄를 짓지 않은 미래의 사람을 미리 죽이지 않는다.

지금 죽는 사람을 먼저 살린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의 다음 선택까지 가능한 한 책임 있는 세상 속에 놓는다.


광산에서 죽은 두 동료는 지금도 꿈에 나온다.

항상 무너진 갱도다.

리엣이 방패를 들고 있다.

안쪽에서는 광부들이 두드린다.

뒤에는 동료 둘이 서 있다.

이번에는 리엣이 말한다.

“오지 마.”

둘은 대답한다.

“싫어.”

그다음 장면은 늘 같다.

리엣이 깨어난다.

꿈에서는 아직도 누구도 살리지 못했다.

그럴 때면 방패를 확인한다.

갑옷을 입지는 않는다.

그냥 손을 얹는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자기 선택으로 따라왔다는 사실과,
자신이 그 선택의 원인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함께 생각한다.

둘 중 하나만 고르지 않는다.

그것이 그날 이후 배운 책임이다.


현재의 리엣은 여전히 가장 위험한 자리에서 방패를 든다.

화살이 오면 막는다.

칼이 오면 받아낸다.

적이 밀어붙이면 짧은 다리를 땅에 단단히 박고 버틴다.

방패 뒤에서는 사람들이 움직인다.

민간인이 빠져나간다.

치료사가 부상자를 옮긴다.

동료가 자세를 다시 잡는다.

리엣은 그것을 좋아한다.

자기 방패 뒤에서 누군가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는 순간.

그녀에게 신앙은 거기에 있다.

누군가가 성경 구절을 읊으며 물은 적이 있다.

“세리아의 자비는 누구에게까지 미쳐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리엣이 바로 대답했다.

“몰라.”

성직자가 당황했다.

리엣은 방패를 어깨에 걸었다.

“그건 높은 사람들이 오래 고민해.”

그리고 쓰러진 사람 하나를 가리켰다.

“난 저거부터 들게.”


그녀는 여전히 거대한 명분보다 현장을 먼저 본다.

그 때문에 언젠가 더 큰 판단을 놓칠 수도 있다.

오늘 살린 사람이 내일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을 구하려다가 동료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

광산에서 이미 그렇게 했다.

그래서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 하나를 눈앞에 두고 그 사람을 숫자와 가능성으로만 바꾸는 순간을 경계한다.

‘위험할 수도 있다.’

‘적일 수도 있다.’

‘나중에 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 말들만으로 지금 죽어도 되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살려놓고 판단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한다.

막아놓고 확인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한다.

방패 하나로 시간을 벌 수 있다면 벌어본다.

그 시간 안에서 사람이 성인인지 악인인지 밝혀지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누군가 리엣의 방패 뒤에 들어오면,
그 순간만큼은 신분을 따지지 않는다.

인간이든.

오크든.

리자드맨이든.

언데드든.

마족이든.

아군이든 포로든.

지금 공격받고 있고,
아직 살아 있다면 먼저 막는다.

그 뒤에 묻는다.

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를 해쳤는지.

무기를 다시 들 것인지.

필요하면 그때는 같은 사람이 다시 리엣의 메이스를 보게 될 수도 있다.

그것도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려야 할 때 살리는 것과,
막아야 할 때 막는 것은 같은 신앙 안에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어느 순간이 어느 쪽인지 언제나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리엣은 그 어려움을 알고 있다.

그래도 눈앞의 사람이 쓰러지면 대부분 같은 선택을 한다.

방패를 든다.

앞에 선다.

그리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일단 들어와.”

상대가 망설이면 더 크게 말한다.

“성인인지 악인인지는 나중에 봐.”

거대한 방패가 땅에 박힌다.

“지금은 내 방패 뒤에 서.”

리엣 레드토파즈에게 신앙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누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먼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때까지 사람이 살아 있도록 버티는 것.

그리고 그 선택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짊어져야 할 위험까지 잊지 않는 것.

그녀는 아직도 그 두 가지를 완벽하게 함께 해내지는 못한다.

그래도 방패를 놓지는 않는다.


해변도시 린가트 - '청록빛 소리' 여관 2명
SMR
서머린
세레이온 해변도시 린가트-'청록빛 소리' 여관-주인·어부
“신이 챙겨줄지는 내가 모르지. 근데 네가 지금 굶은 건 보이잖아. 일단 먹어.”
🩸 HP 120
💪 공격력 50
🧙 마법력 5
✨ 신비력 1
🛡️ 방어력 40
🔗 항마력 30
😖 신비저항 55
🏃 회피력 40
과거 보기
서머린은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태어났다.

정확히는,

창문을 열면 바다가 보였고,

문을 열면 비린내가 먼저 들어오는 집이었다.

린가트의 오래된 어부 구역.

새벽이면 사람들이 배를 밀었고,

저녁이면 젖은 그물과 생선 상자가 골목을 가득 채우는 곳이었다.

서머린에게 바다는 특별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냥 항상 거기에 있는 것이었다.

아침에는 일을 주고,

저녁에는 사람을 돌려주고,

가끔은 돌려주지 않는 것.

어린 서머린에게 바다는 그 정도였다.

---

서머린의 가족도 세리아를 믿었다.

린가트에서는 그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쪽이 이상했다.

출항 전에는 작은 성표를 만졌다.

풍랑이 거세지면 세리아에게 무사귀환을 빌었다.

새 생명이 태어나면 감사기도를 올렸고,

누군가 죽으면 그 생명이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서머린도 어릴 때는 그대로 믿었다.

배가 돌아오면 세리아가 지켜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면 감사했다.

아버지가 출항할 때면 두 손을 꼭 모았다.

“오늘도 아빠 돌려보내주세요.”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오면 정말 기도가 통했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에게 세상은 그 정도로 단순했다.

---

처음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열 살 무렵이었다.

린가트에 한동안 심한 열병이 돌았다.

항구를 오가는 사람들과 화물이 많았던 탓에 병은 빠르게 퍼졌다.

성직자들도 뛰어다녔다.

신성술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밤낮없이 환자를 돌봤다.

약재도 풀렸다.

임시 병상도 만들어졌다.

아무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

모든 환자에게 성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모든 집에 약을 나눠줄 수도 없었다.

누구를 먼저 치료할지 정해야 했다.

서머린의 어머니도 그때 병에 걸렸다.

---

처음에는 심하지 않았다.

기침을 조금 했다.

열이 올랐다.

어머니는 며칠 쉬면 나을 거라고 말했다.

“사람이 맨날 멀쩡할 수 있냐.”

서머린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열은 내려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성당에 갔다.

치유를 부탁했다.

성직자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더 위급한 환자가 많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성직자들은 거의 쓰러질 정도로 일하고 있었다.

서머린은 성당 복도에서 봤다.

옷에 피가 묻은 성직자가 다음 환자에게 뛰어가는 것을.

손을 떨면서도 성법을 쓰는 사람을.

의자에 앉은 채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사람을.

누구도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계속 아팠다.

---

서머린은 매일 기도했다.

평소보다 더 오래 했다.

정확하게 해야 들을 것 같아서 배운 기도문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외웠다.

“생명을 품으시는 세리아님.”

“제발 엄마를 살려주세요.”

“제가 말 잘 들을게요.”

“생선 손질도 안 빼먹을게요.”

“아빠한테 짜증도 안 낼게요.”

어린 서머린은 자기가 뭔가를 약속하면 거래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지는 몰랐다.

그래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전부 말해봤다.

어머니는 결국 죽었다.

---

장례식에서 한 성직자가 서머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다.

정말로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세리아께서 네 어머니를 품으셨단다.”

서머린은 울다가 물었다.

“왜요?”

성직자가 말을 멈췄다.

“왜 우리 엄마를요?”

“그건…….”

“엄마가 뭐 잘못했어요?”

“그런 뜻이 아니란다.”

“그러면 왜 데려갔어요?”

성직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아주 흔한 말을 했다.

“우리에게는 알 수 없는 뜻이 있으실 거야.”

서머린은 그 말을 싫어하게 되었다.

---

어머니가 죽은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신비한 이유가 아니었다.

병이 심해졌다.

치료가 늦었다.

약이 부족했다.

치유술을 쓸 수 있는 성직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더 위급한 환자가 먼저 치료받았다.

그중에는 살아난 사람도 있었다.

서머린의 어머니에게 차례가 왔을 때는 너무 늦었다.

누군가의 악의도 아니었다.

신관들이 게을렀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 부족했다.

약이 부족했다.

시간이 부족했다.

그게 전부였다.

서머린에게는 오히려 그 설명이 이해하기 쉬웠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거기에 신의 뜻을 붙였다.

누가 살아남으면 은총이라고 했다.

누가 죽으면 품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어린 서머린은 이해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에 무엇이 그렇게 달랐는지.

---

그렇다고 그날 당장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린아이에게 평생 믿어온 것을 하루 만에 버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기도는 계속했다.

다만 예전처럼 믿지는 않았다.

출항 전에 성표를 만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반드시 밧줄의 매듭을 직접 확인했다.

아버지가 말했다.

“기도도 했는데 뭘 그렇게 또 보냐.”

서머린은 대답했다.

“기도가 매듭 묶어주는 건 아니잖아.”

아버지는 잠시 딸을 바라봤다.

그리고 같이 매듭을 확인했다.

---

나이가 들면서 서머린은 점점 바다에 나갔다.

처음에는 작은 일을 했다.

통을 옮겼다.

그물을 정리했다.

물고기를 분류했다.

돛줄을 잡았다.

노를 저었다.

성인이 될 무렵에는 웬만한 어부보다 배 위에서 움직이는 것이 익숙해졌다.

그 과정에서 또 하나를 배웠다.

바다는 사람의 신앙심을 구별하지 않았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어부도 손가락을 잃었다.

성당에 거의 가지 않는 술꾼도 폭풍에서 살아 돌아왔다.

착한 사람이 익사했다.

성질 더러운 사람이 운 좋게 떠내려온 나무판자를 잡았다.

파도는 누구에게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서머린은 그것이 차라리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

어부들은 여전히 출항 전에 기도했다.

서머린은 막지 않았다.

누군가 성표를 만지는 동안 기다렸다.

기도가 끝나면 말했다.

“됐지?”

“응.”

“그럼 밧줄 봐.”

“또?”

“기도가 잘됐어도 썩은 줄은 끊어져.”

처음에는 불경하다는 말도 들었다.

서머린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욕했다고 세리아가 배 뒤집으면 그건 그거대로 쪼잔한 신이지.”

그 말을 듣고 옆의 어부가 황급히 성표를 그었다.

서머린은 웃었다.

---

그리고 스무 살이 되기 전,

서머린의 신앙은 완전히 끝났다.

그날도 바다에 나갔다.

평범한 조업이었다.

예보된 바람도 심하지 않았다.

하늘도 출항할 때는 맑았다.

하지만 바다는 갑자기 변했다.

먼바다에서 생긴 돌풍이 예상보다 빠르게 들어왔다.

파도가 높아졌다.

배가 크게 기울었다.

돛대가 부러졌다.

누군가 소리쳤다.

물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퍼냈다.

다시 파도가 왔다.

배가 뒤집혔다.

---

서머린은 물에 빠졌다.

위아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귀에는 물소리만 들렸다.

겨우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배는 이미 반쯤 부서져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떠 있었다.

누군가는 나무판자를 잡았다.

누군가는 밧줄에 매달렸다.

누군가는 보이지 않았다.

서머린은 한동안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젖은 옷이 몸을 끌어내렸다.

몇 번이나 물을 먹었다.

그때 같은 배를 타던 나이 든 어부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작은 부유판 하나를 잡고 있었다.

둘이 붙잡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 사람도 알고 있었다.

서머린도 알고 있었다.

---

그가 부유판을 서머린에게 밀었다.

서머린은 받지 않았다.

“뭐 해!”

“잡아.”

“같이 잡아!”

“둘이면 가라앉아.”

“그러니까 같이 다른 거 찾으면 되잖아!”

파도가 두 사람 사이를 덮쳤다.

서머린은 다시 물을 먹었다.

올라왔을 때 그 사람이 더 가까이 있었다.

그는 부유판을 서머린의 가슴으로 밀었다.

“잡으라고.”

“싫어.”

“서머린.”

그가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닥치고 잡아.”

---

서머린은 그 사람의 얼굴을 아직 기억한다.

용감한 얼굴이 아니었다.

웃지도 않았다.

평온하지도 않았다.

무서워하고 있었다.

입술이 떨렸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사람도 죽기 싫었다.

서머린은 그것을 분명히 봤다.

그럼에도 그는 손을 놓았다.

부유판을 서머린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파도에 멀어졌다.

서머린은 따라가려고 했다.

한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았다.

다음 파도가 왔다.

그 뒤로는 보이지 않았다.

---

서머린은 살아남았다.

구조선이 왔다.

몇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

몇 사람은 돌아오지 못했다.

린가트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부두에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울었다.

누군가는 서머린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누군가 말했다.

“세리아께서 널 살려주셨구나.”

서머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정말 기적이야.”

그 순간 서머린은 토할 것 같았다.

---

기적이 아니었다.

서머린은 알고 있었다.

자기를 살린 것이 무엇인지.

신이 부유판을 내려준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잡고 있었다.

신이 자신을 골라 물 밖으로 밀어낸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밀었다.

그 사람은 무서워했다.

살고 싶어 했다.

그래도 놓았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이었다.

서머린은 그 마지막 선택에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

장례식에서는 더 견디기 힘들었다.

성직자는 좋은 뜻으로 말했다.

“세리아께서 한 생명을 거두시고 또 다른 생명을 남기셨습니다.”

서머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돌아봤다.

“아니.”

성직자가 말을 멈췄다.

“서머린?”

그녀는 손을 떨고 있었다.

“그 사람이 살렸어.”

“무슨…….”

“내가 봤어.”

서머린의 목소리가 커졌다.

“살고 싶어 했어.”

“무서워했다고.”

“근데 나한테 줬어.”

장례식장은 조용했다.

“그걸 왜 세리아가 한 일이 되는데?”

---

누구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서머린이 충격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신앙을 찾을 거라고 했다.

그러지 않았다.

그날 이후 서머린은 기도하지 않았다.

성표도 걸지 않았다.

누군가 물으면 그냥 말했다.

“안 믿어.”

“세리아께서 실제로 기적을 보이시는데도?”

“성법은 봤지.”

“그럼 어떻게 안 믿습니까?”

서머린은 대답했다.

“마법 본다고 마법사가 내 인생 계획 짜준다고 믿진 않잖아.”

---

서머린은 성법을 부정하지 않았다.

성직자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봤다.

병을 정화하는 것도 봤다.

신성한 광휘가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것도 봤다.

그걸 가짜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 힘이 존재한다는 것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죽음과 생존에 어떤 위대한 뜻이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살아남으면 신의 사랑.

누군가 죽으면 신의 뜻.

서머린에게 그런 설명은 너무 편리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틀리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사람이 한 선택이 흐려질 때가 있었다.

서머린은 그게 싫었다.

---

그렇다고 신앙인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기도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다.

성당에 가고 싶으면 갔다 오라고 했다.

배를 타기 전 기도하는 사람도 기다려줬다.

다만 기도가 끝나면 말했다.

“이제 구명줄 확인해.”

누군가 물었다.

“신을 안 믿으면서 왜 성직자가 오면 잘 대해줘?”

서머린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사람이잖아.”

“그게 끝이야?”

“뭐가 더 필요한데?”

---

서머린은 한동안 자신을 살린 사람 때문에 바다를 떠나려고 했다.

배에 올라가면 그날이 생각났다.

파도가 조금만 높아도 손이 굳었다.

젖은 나무 냄새가 나면 숨이 막혔다.

누군가 부유판을 옮기는 것만 봐도 그 손이 떠올랐다.

몇 달 동안은 작은 배에도 타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해했다.

그만둬도 된다고 했다.

서머린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두에서 젊은 어부 하나가 밧줄을 잘못 묶는 것을 봤다.

서머린은 지나가려 했다.

세 걸음 갔다.

멈췄다.

돌아왔다.

“야.”

“왜?”

“그거 다시 묶어.”

“괜찮아.”

“안 괜찮아.”

결국 직접 고쳐줬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부두에 나왔다.

---

서머린은 거창한 결심을 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몫까지 살겠다고도 하지 않았다.

다시는 누구도 죽게 하지 않겠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약속은 싫었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사람은 죽는다.

병으로도 죽는다.

사고로도 죽는다.

아무리 조심해도 죽을 때가 있다.

서머린은 모두를 살릴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꿈을 꾸고 싶지도 않았다.

모두를 구하겠다는 사람은 언젠가 자신이 구하지 못한 사람을 숫자로 세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삶은 자기 것이 아니었다.

---

대신 아주 작은 기준을 하나 만들었다.

눈앞에 있으면 본다.

손이 닿으면 잡는다.

밥을 줄 수 있으면 먹인다.

밧줄을 던질 수 있으면 던진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게 끝이었다.

누군가 물었다.

“그러면 못 보는 데서 죽는 사람은?”

서머린은 대답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도 세상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엄청 많잖아.”

“알아.”

“그 사람들은?”

서머린은 한숨을 쉬었다.

“다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더 미친 소리 아니냐?”

---

그 말은 냉정하게 들렸다.

서머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항상 같은 말이 붙었다.

“근데 내 앞에 있는 놈은 다르지.”

“왜?”

“봤잖아.”

“…….”

“보고도 모른 척하면 그건 내가 선택한 거니까.”

서머린에게 책임은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시작됐다.

---

몇 년이 지나자 서머린은 다시 능숙한 어부가 되었다.

예전보다 겁이 많아졌다.

그래서 더 꼼꼼해졌다.

날씨를 확인했다.

구명도구를 확인했다.

밧줄을 확인했다.

신참이 있으면 두 번 확인하게 했다.

누군가 귀찮아하면 말했다.

“귀찮은 놈은 살아서 귀찮아해.”

“죽고 나서 조용해지지 말고.”

사람들은 욕하면서도 따랐다.

---

그러면서 조금씩 돈도 모았다.

크게 벌지는 못했다.

어부의 벌이는 바다 상태에 따라 달랐다.

그래도 먹고살 만큼은 됐다.

서머린은 바다만 바라보고 늙을 생각은 없었다.

특히 폭풍이 심한 날에는 배를 못 띄웠다.

그런 날에도 먹고살 방법이 하나쯤 있었으면 했다.

그러다 항구 안쪽에 오래 비어 있던 작은 여관을 발견했다.

벽은 낡았다.

지붕은 조금 샜다.

계단은 밟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값은 싸지 않았다.

서머린은 한참 건물을 보다가 말했다.

“씨발.”

그리고 샀다.

---

여관 이름은 ‘청록빛 소리’가 되었다.

입구 처마에는 바닷물에 닳은 청록색 유리조각들이 달려 있었다.

바람이 불면 서로 부딪치며 작은 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이전 주인이 두고 간 것이었다.

서머린은 떼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첫날 밤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그냥 놔뒀다.

“나쁘진 않네.”

그게 이유의 전부였다.

---

서머린은 여관 주인에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손님에게 웃지 않았다.

아부도 못했다.

술 취한 손님이 시비를 걸면 그대로 밖으로 내던졌다.

“손님한테 이래도 됩니까?”

“싫으면 다른 데 가.”

“장사하기 싫어요?”

“진상 받으면서 할 정도로 하고 싶진 않아.”

그런데 묘하게 단골은 늘었다.

밥은 많이 줬다.

방값도 정직했다.

어부가 돈이 모자라면 외상을 적어줬다.

폭풍 때문에 배를 잃은 사람이 있으면 며칠 재워줬다.

다만 반드시 장부에 적었다.

“공짜예요?”

“아니.”

“그럼 언제 갚죠?”

“돈 생기면.”

“안 생기면?”

“그때 생각하고.”

---

사람들은 서머린이 정이 많다고 했다.

서머린은 부정했다.

“그냥 내가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굶은 사람이 앞에 있으면 신경 쓰였다.

젖은 사람이 떨고 있으면 담요를 줬다.

다친 사람이 있으면 치료사를 불렀다.

그게 착한 일인지 아닌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눈에 보였다.

그래서 했다.

반대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찾아다니며 사람을 구할 생각도 없었다.

구호단체를 만들지도 않았다.

전 재산을 나눠주지도 않았다.

“내가 여관 망하면 다음 놈 밥은 누가 주는데.”

그게 서머린의 계산이었다.

---

한 번은 항구에 큰 화재가 났다.

집 몇 채가 탔다.

사람들이 숙소를 잃었다.

서머린은 빈 방을 열었다.

창고도 비웠다.

식탁을 붙여 사람들이 잘 수 있게 했다.

처음 며칠은 괜찮았다.

그다음부터 식량이 부족해졌다.

돈도 빠르게 줄었다.

다른 지역에서 피난민까지 몰려왔다.

서머린은 계속 들이려 했다.

그러다 주방에서 일하던 사람이 말했다.

“이러다 여관 문 닫아요.”

서머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 그랬다.

---

그날 서머린은 처음으로 사람을 돌려보냈다.

방이 없었다.

먹을 것도 부족했다.

앞에 선 가족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여기서는 못 재워.”

아이 하나가 서머린을 올려다봤다.

기분이 더러웠다.

그래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대신 다른 임시숙소 위치를 알려줬다.

거기까지 갈 마차비를 줬다.

그들이 떠난 뒤 한참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날 다시 배웠다.

손이 닿는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손이 어디까지 닿는지도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

그 뒤로 서머린은 함부로 “다 해줄게”라고 말하지 않았다.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먹였다.

재울 수 있는 만큼만 재웠다.

빌려줄 수 있는 만큼만 빌려줬다.

바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구조할 수 없는 상황이면 혼자 뛰어들지 않았다.

다른 배를 불렀다.

밧줄을 던졌다.

할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았다.

죽을 각오로 뛰어드는 것만이 도움은 아니었다.

서머린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은 사람 하나를 평생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

그래서 서머린은 영웅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말했다.

“그래도 누님은 사람 많이 도와주잖아요.”

“그래서?”

“좋은 사람이죠.”

“몰라.”

“본인은 모르겠어요?”

서머린은 생선 내장을 긁어내며 말했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배고픈 놈한테 중요한가?”

“…….”

“밥 나오는지가 중요하지.”

---

오레인을 만난 것도 그런 날이었다.

서머린은 새벽 조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항구 근처 골목을 지나는데 누군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술 취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냥 지나갔다.

두 걸음.

세 걸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서머린이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젊은 여자애였다.

옷은 평범하게 입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었지만 어딘가 어색했다.

신발도 항구를 돌아다니기에는 지나치게 깨끗한 종류였다.

그리고 울고 있었다.

아주 처량하게.

---

서머린이 다가갔다.

“야.”

여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갰다.

“……네?”

“왜 울어.”

“안 웁니다.”

서머린은 잠깐 바라봤다.

“눈에서 물 나오는데.”

“이건…….”

여자가 급하게 눈을 닦았다.

“조금 상황이 좋지 않아서요.”

서머린은 주변을 봤다.

짐은 거의 없었다.

“돈 떼였냐?”

여자의 눈에 다시 물이 차올랐다.

서머린은 확신했다.

“떼였네.”

---

나중에 들어보니 한 번도 아니었다.

숙소를 소개해주겠다는 사람에게 돈을 줬다.

사기였다.

그 돈을 돌려받게 해주겠다는 사람에게 또 돈을 줬다.

그것도 사기였다.

마지막에는 일자리를 알아봐준다며 보증금까지 냈다.

당연히 사기였다.

서머린은 이야기를 다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서머린이 말했다.

“어떻게 세 번을 당하냐.”

여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저도 압니다!”

그리고 다시 울었다.

서머린은 한숨을 쉬었다.

---

“밥은?”

여자가 눈물을 닦다 멈췄다.

“네?”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젠데.”

“……어제 아침이요.”

서머린의 표정이 굳었다.

“씨발.”

여자가 놀라서 바라봤다.

서머린은 몸을 돌렸다.

“따라와.”

“어디를요?”

“밥 먹으러.”

“하지만 제가 지금 돈이…….”

서머린이 뒤를 돌아봤다.

“돈 얘기 한 번만 더 하면 진짜 바다에 처넣는다.”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오레인은 처음 ‘청록빛 소리’에 들어왔다.

---

서머린은 밥 한 끼만 먹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룻밤 재운 뒤 집에 보내려고 했다.

다음 날 말했다.

“날 밝았다.”

“네.”

“집에 가.”

오레인은 잠깐 침묵했다.

“못 갑니다.”

“왜.”

“사정이 있습니다.”

서머린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사고 쳤냐?”

“아닙니다.”

“빚?”

“아니에요.”

“사람 죽였어?”

오레인이 벌떡 일어났다.

“절대 아닙니다!”

“그럼 됐고.”

---

서머린은 어디서 왔는지 더 묻지 않았다.

누구 집 딸인지도 묻지 않았다.

돌아가기 싫은 이유도 캐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그럼 뭐 할 건데.”

오레인이 바로 대답했다.

“일하겠습니다.”

“뭘 할 줄 알아.”

“글을 읽고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산도 잘합니다.”

“접시 닦아봤냐.”

침묵.

“침대보 갈아봤어?”

침묵.

“생선 손질은.”

더 긴 침묵.

서머린이 말했다.

“존나 쓸모없네.”

오레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배우면 됩니다.”

---

서머린이 눈썹을 올렸다.

“배우면?”

“네.”

“힘들다고 도망 안 가고?”

“안 갑니다.”

“손님이 진상 부려도?”

오레인이 잠깐 망설였다.

“……최대한 참겠습니다.”

“그건 나도 못 하는데.”

오레인이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그렇게 오레인은 청록빛 소리의 접객원이 되었다.

---

처음에는 사고가 많았다.

물을 엎었다.

침대보를 이상하게 접었다.

생선을 손질하다 비늘을 부엌 전체에 튀겼다.

손님에게 너무 반듯하게 말했다.

“그 행동을 즉시 중단하십시오.”

취객이 눈을 깜빡였다.

서머린도 눈을 깜빡였다.

손님이 나간 뒤 물었다.

“너 어디 기사단장이라도 했냐?”

“아, 아닙니다.”

“말투가 왜 그따위야.”

“죄송합니다.”

“사과하라는 게 아니고.”

서머린은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캐묻지 않았다.

---

오레인은 대신 정말 빠르게 배웠다.

장부를 처음 본 날 서머린의 계산 실수를 세 개 찾았다.

“여기 금액이 안 맞는데요.”

“맞아.”

“안 맞습니다.”

“그럴 리가.”

오레인이 계산을 보여줬다.

서머린이 한동안 장부를 봤다.

“……씨발.”

다음 달부터 장부는 오레인에게 넘어갔다.

---

오레인이 일을 익히자 서머린은 다시 바다에 나가는 시간이 늘어났다.

낮에는 조업을 했다.

저녁에 돌아오면 여관 상황을 확인했다.

오레인은 손님을 받았다.

방을 정리했다.

장부를 썼다.

서머린이 없는 동안 작은 문제는 스스로 해결했다.

어느 날 서머린이 돌아오자 오레인이 말했다.

“오늘은 별일 없었습니다.”

“좋네.”

“술 취한 손님 한 분을 내보낸 것 말고는요.”

서머린이 멈췄다.

“네가?”

“네.”

“뭐라고 했는데.”

오레인이 조금 망설였다.

“퇴장을 명했습니다.”

서머린은 한참 웃었다.

---

둘의 가장 큰 차이는 신이었다.

오레인은 세리아를 믿었다.

아주 깊이.

서머린은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레인이 식사 전에 기도하면 기다렸다.

성표를 숨겨두는 것도 모른 척했다.

그러다 어느 날 오레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님은 기도하지 않으시네요.”

“응.”

“세리아님을…… 믿지 않으세요?”

“응.”

오레인은 숟가락을 놓칠 뻔했다.

세레이온에서 그 대답은 꽤 드물었다.

---

“정말로요?”

“두 번 물으면 믿게 되냐?”

“아니, 그게 아니라…….”

오레인은 한동안 말을 고르다가 물었다.

“성법은 보셨잖아요.”

“봤지.”

“기적도요?”

“봤어.”

“그런데 어떻게…….”

서머린은 생선을 뒤집었다.

“불도 봤어.”

“네?”

“불 있다고 불이 날 사랑한다고 믿어야 돼?”

오레인이 입을 다물었다.

서머린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

한참 뒤에야 오레인은 서머린의 이야기를 조금 들었다.

어머니 이야기.

병 이야기.

바다에서 죽은 어부 이야기.

서머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오레인은 끝까지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머린이 물었다.

“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하지 마.”

“그래도…….”

오레인은 한참 생각했다.

“그분의 선택을 세리아님의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으신 거군요.”

서머린의 손이 잠깐 멈췄다.

“……뭐, 그런 거지.”

그날 이후 서머린은 오레인의 기도를 조금 덜 귀찮아했다.

---

오레인도 서머린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행동했다.

아픈 손님이 있으면 밤늦게까지 지켜봤다.

굶은 아이가 오면 자기 식사를 나눴다.

남부 출신 사람이 세레이온 기사단을 욕해도 먼저 이유를 들었다.

서머린은 그런 오레인을 보면서 가끔 생각했다.

신앙이 전부 나쁜 것은 아니라고.

정확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뭘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어느 날 말했다.

“너 같은 놈들만 있었으면 나도 교회 좀 다녔겠다.”

오레인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싫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얼굴이 이미 전도 중이야.”

---

서머린은 아직 오레인의 진짜 이름을 모른다.

오레이노 드 그루커스.

현 교황의 딸.

교황 후계자.

그런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다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한다.

법을 너무 잘 안다.

행정 절차도 이상하게 잘 안다.

기사단의 계급장도 한눈에 알아본다.

가끔 말하다가 이상한 표현을 쓴다.

“그 요청은 허가할 수…….”

오레인이 멈춘다.

“……아니, 그건 곤란할 것 같습니다.”

서머린이 바라본다.

“너 뭐 허가하는 사람이었냐?”

“아닙니다.”

“수상한 년.”

그걸로 끝이다.

---

서머린은 사람이 과거를 말하지 않을 때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기도 자기 이야기를 아무에게나 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레인에게도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 일을 잘한다.

돈을 훔치지 않는다.

손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누가 쓰러지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서머린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하다.

“사람 죽인 거 아니라며.”

“네.”

“그럼 나중에 말하고 싶을 때 해.”

오레인은 그 말에 조금 복잡한 얼굴을 한다.

---

서머린은 여전히 모두를 구할 생각이 없다.

누군가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하면 먼저 술이나 마시라고 한다.

“세상을 어떻게 다 챙겨.”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레인이 묻는다.

서머린은 어깨를 으쓱한다.

“그건 너 같은 애들이 해.”

“저 같은 사람이라니요?”

“쓸데없이 책임감 많은 애들.”

“사장님도 그렇잖아요.”

“난 아니야.”

오레인이 청록빛 소리 안을 바라본다.

외상 장부가 있다.

다친 어부가 쉬는 방이 있다.

돈이 부족해 며칠째 묵고 있는 여행자가 있다.

그리고 자신도 있다.

오레인이 다시 서머린을 본다.

“네.”

“왜 그 표정인데.”

“아무것도 아닙니다.”

---

서머린에게 정말로 세상은 너무 크다.

세레이온 전체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안발룽과의 분쟁도 모른다.

교단 정치도 모른다.

수십만 명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피곤하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되고 싶지도 않다.

세상을 구하는 일은 꿈도 꾸기 싫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새벽 골목에서 우는 애 하나는 그냥 못 지나간다.

부두에서 잘못 묶인 밧줄 하나도 그냥 못 지나간다.

굶은 손님이 있으면 밥부터 준다.

바다에 사람이 떠 있으면 배를 돌린다.

---

누군가는 그것도 결국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서머린은 싫어한다.

“구한다는 말 좀 쉽게 쓰지 마.”

“왜?”

“밥 한 끼 줬다고 인생 구한 거 아니잖아.”

“그럼 뭐라고 해?”

서머린은 생각하다 말한다.

“그냥 밥 줬다고 해.”

그게 더 정확하다.

그날 필요한 밥을 줬다.

젖은 사람에게 담요를 줬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밧줄을 던졌다.

그 다음 삶까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서머린은 그 거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

가끔 밤늦게 여관 문을 닫고 나면 서머린은 혼자 술을 한 잔 마신다.

처마 밖에서는 청록색 유리조각이 흔들린다.

작은 소리가 난다.

그럴 때 오래전 바다가 생각난다.

차가운 물.

떨리던 손.

부유판을 밀던 사람.

서머린은 여전히 그 사람이 왜 자신을 골랐는지 모른다.

더 어렸기 때문인지.

더 살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인지.

그냥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인지.

물어볼 수도 없다.

그 사람은 죽었다.

---

그래서 서머린은 자신의 방식이 그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은 아닌지 가끔 생각한다.

그도 모두를 구하지 못했다.

부유판은 하나였다.

사람은 여럿이었다.

결국 바로 앞에 있던 서머린에게 건넸다.

그게 옳았는지도 모른다.

서머린 자신이 살 가치가 더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이 선택했고,

그 선택 때문에 한 사람이 살아남았다.

어쩌면 자기 삶의 방식은 그날 그 손을 계속 흉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 손에 있는 것을,

지금 닿는 사람에게 건네는 것.

---

그 생각을 하면 조금 불편하다.

자신이 평생 죽은 사람에게 빚을 갚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죽은 놈한테 평생 빚진 척하는 것도 지랄이지.”

혼자 그렇게 말한다.

그 사람은 서머린에게 살아남으라고 했지,

평생 죄책감을 품으라고 한 적은 없었다.

아마 그런 말을 했다면 욕부터 했을 것이다.

서머린은 그렇게 생각한다.

---

신에 대해서도 가끔 같은 질문을 한다.

정말 없다고 확신하는가.

아니다.

서머린은 그것까지 확신하지 않는다.

어쩌면 있을 수도 있다.

세리아라는 존재가 정말 어딘가에서 세계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성법의 근원에 실제 의지가 있을 수도 있다.

서머린은 모른다.

그래서 믿지 않는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누군가 묻는다.

“만약 세리아님이 정말 계시면 어떡하려고?”

서머린은 대답한다.

“있으면 있나 보지.”

“벌받을 수도 있잖아.”

“그럼 죽고 나서 만나겠네.”

“무섭지 않아?”

서머린은 잠깐 생각한다.

“조금?”

“그런데도 안 믿어?”

“무섭다고 믿는 척하면 그게 믿는 거냐?”

상대는 대개 대답하지 못한다.

---

서머린이 정말 싫어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신에게 밀어버리는 순간이다.

배가 새고 있는데 기도만 하는 것.

굶은 사람이 있는데 위로만 하는 것.

사고가 났는데 ‘뜻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그럴 때면 서머린은 거의 반드시 끼어든다.

“뜻은 나중에 찾고.”

그리고 필요한 것을 가리킨다.

“지금 저거부터 해.”

---

한 번은 여관 앞에서 사람이 쓰러졌다.

누군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려 했다.

서머린이 소리쳤다.

“기도는 하면서 해!”

“뭘요?”

“다리 들어!”

사람들이 환자를 옮겼다.

오레인은 치료사를 불렀다.

환자는 살아났다.

나중에 가족이 울며 말했다.

“세리아께서 도우셨습니다.”

서머린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 가족에게는 그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

대신 뒤에서 오레인에게 말했다.

“치료사한테 돈 제대로 줘.”

오레인은 웃었다.

“네.”

---

서머린은 조금 변했다.

신을 믿게 된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믿을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신에게 기대는 이유를 전보다 잘 안다.

자기도 어릴 때 그랬으니까.

어머니가 죽지 않기를 바라며 밤새 기도했다.

절박한 사람에게 설명보다 기도가 쉬울 때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군가 기도한다고 비웃지 않는다.

다만 자신은 하지 않을 뿐이다.

---

그리고 오늘도 새벽이면 바다로 나간다.

오레인에게 여관을 맡긴다.

“장부 틀리지 말고.”

“제가 사장님보다 정확합니다.”

“말대꾸도 늘었네.”

“누구에게 배웠겠습니까?”

서머린이 오레인을 본다.

오레인이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피한다.

서머린은 피식 웃는다.

“점심은 먹어.”

“네.”

“손님 많다고 굶지 말고.”

“알겠습니다.”

“진짜 먹어.”

“사장님.”

“왜.”

“얼른 가세요.”

---

서머린은 문을 나선다.

처마의 청록색 유리가 바람에 흔들린다.

작은 소리가 난다.

항구에는 이미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

누군가는 성표를 잡고 기도한다.

누군가는 술이 덜 깬 얼굴로 그물을 나른다.

누군가는 배를 밀고 있다.

서머린은 자기 배에 오른다.

밧줄을 확인한다.

구명도구를 확인한다.

날씨를 확인한다.

그리고 출항한다.

---

세상 어딘가에서는 오늘도 사람이 죽을 것이다.

서머린은 그걸 막을 수 없다.

막겠다고 약속하지도 않는다.

세상 모든 불행을 자기 책임으로 끌어안고 살 생각도 없다.

그런 건 너무 크다.

너무 무겁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짓말이다.

자기는 그런 힘이 없다.

하지만 배를 몰고 가다 물 위에 손 하나가 보이면,

아마 방향을 돌릴 것이다.

여관 문 앞에서 굶은 사람이 쓰러져 있으면,

밥을 내올 것이다.

누군가 울고 있는데 이유를 물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다면,

귀찮아하면서도 멈출 것이다.

---

서머린에게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선행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다.

위대한 신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 눈에 들어온 것을 못 본 척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물으면 서머린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 전부?”

“미쳤냐. 꿈도 꾸기 싫어.”

그리고 손에 든 밥그릇을 상대 앞으로 밀어놓는다.

“근데 넌 지금 내 앞에 있잖아.”

“그러니까 먹어.”

ORE
오레인
세레이온 해변도시 린가트-'청록빛 소리' 여관-접객원
“부디..옳은 일을 했다는 말로 끝내지 마세요. 그 옳은 일 때문에 누가 울었는지도 알아야 하니까.”
🩸 HP 90
💪 공격력 15
🧙 마법력 50
✨ 신비력 5
🛡️ 방어력 25
🔗 항마력 75
😖 신비저항 85
🏃 회피력 45
과거 보기
오레인의 어린 시절에는 모르는 것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배운 것은 아주 많았다.

하지만 직접 본 것은 거의 없었다.

성전의 역사.

세레이온의 법률.

성직자의 계율.

구호 행정.

곡물 배급.

기사단의 지휘체계.

외교 의례.

생명의 여신 세리아에 대한 수많은 신학적 해석.

오레인은 어린 시절부터 그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대부분 아주 잘했다.

---

오레인의 아버지는 현 세레이온 교황 메르빈 드 크루커스였다.

엄격한 사람이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오레인이 기도문 한 구절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외우게 했다.

법률 조항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책을 덮지 못하게 했다.

어린 딸이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아도 쉽게 수업을 끝내주지 않았다.

“교황의 실수는 혼자 끝나지 않는다.”

메르빈은 자주 그렇게 말했다.

“네가 언젠가 잘못 기억한 문장 하나가 수천 명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

오레인은 그 말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

그렇다고 메르빈이 딸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아꼈다.

오레인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가장 먼저 의사를 불렀다.

식사가 늦으면 직접 시종에게 이유를 물었다.

딸이 잠든 뒤에도 방의 난방이 적절한지 확인했다.

생일이면 반드시 직접 선물을 골랐다.

문제는 그 사랑의 방식이었다.

메르빈에게 오레인은 딸이면서 동시에 다음 시대의 교황이었다.

다쳐서는 안 됐다.

납치되어서도 안 됐다.

불필요한 위험에 노출되어서도 안 됐다.

그래서 오레인은 좀처럼 가문과 대성당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

성도 세리아의 시장은 창문 너머로 보았다.

축제는 높은 테라스에서 내려다봤다.

빈민가에 관한 것은 보고서로 배웠다.

농민의 삶은 교재로 배웠다.

남부 국경에서 사람이 죽으면 사망자 수가 적힌 문서를 읽었다.

흉년이 들면 곡물 부족량을 계산했다.

오레인은 그 숫자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진심으로 슬퍼했다.

사망자가 백 명이라고 적혀 있으면 백 명 모두를 안타까워했다.

굶는 사람이 있다는 보고를 읽으면 식사를 남기지 않았다.

어린 오레인은 정말 착한 아이였다.

그래서 오히려 문제가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몰랐다.

---

오레인이 열다섯 살 무렵이었다.

구호 정책을 배우던 중 교사가 물었다.

“비축곡이 부족합니다.”

“동부와 남부 두 지역에서 동시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어느 쪽에 먼저 보내시겠습니까?”

오레인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둘 다 보내면 됩니다.”

교사가 말했다.

“둘 다 보낼 양이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곳에서 더 가져오면 됩니다.”

“어디에서요?”

“여유가 있는 곳에서요.”

“그곳의 겨울 비축량을 줄여야 합니다.”

오레인은 조금 당황했다.

“그러면 상인에게 사면 됩니다.”

“가격이 세 배로 올랐습니다.”

“교단의 재정을 사용하면…….”

“그만큼 다른 구호사업을 줄여야 합니다.”

오레인은 입을 다물었다.

---

수업이 끝난 뒤 오레인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일부러 사람을 포기해야 하는 문제만 내는 거예요?”

메르빈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일부러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둘 다 살릴 방법도 있을 수 있잖아요.”

“있을 수도 있지.”

오레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메르빈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찾아야 한다.”

“그렇죠.”

“하지만 찾지 못했을 때도 결정해야 한다.”

오레인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그럴 때까지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

메르빈은 잠시 딸을 바라봤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사람은 굶는다.”

오레인은 그 대답을 좋아하지 않았다.

---

그때의 오레인은 믿었다.

충분히 착하고,

충분히 현명하고,

충분히 열심히 노력한다면,

분명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누군가를 버려야 한다는 말은 어른들이 너무 빨리 포기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의를 가지고 끝까지 방법을 찾으면 된다.

대화를 하면 된다.

조금씩 양보하면 된다.

더 가진 사람이 조금 더 내놓으면 된다.

오레인에게 세상은 아직 그렇게 움직였다.

왜냐하면 그녀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대부분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다.

---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누군가 가져다주었다.

책이 부족하면 더 구해왔다.

추우면 난로에 장작이 들어갔다.

몸이 아프면 치료사가 왔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항상 주변에 있었다.

오레인은 그것을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세상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오레인은 처음으로 몰래 담을 넘었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답답했다.

그게 전부였다.

매일 같은 복도.

같은 기도.

같은 수업.

같은 경비병.

창문 밖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웃었다.

악사가 연주했다.

거리에서는 음식 냄새가 올라왔다.

오레인은 한참 내려다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그 생각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

시녀에게 평범한 옷을 빌렸다.

머리를 묶었다.

장신구를 전부 빼놓았다.

경비 교대시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성당 내부 구조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도망치는 일 자체는 놀랄 만큼 쉬웠다.

오레인은 자신이 굉장히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거리로 나오기 전까지는.

---

시장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시끄러웠다.

냄새도 많았다.

누군가는 생선을 팔았다.

누군가는 과일을 외쳤다.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마차가 바로 옆을 지나갔다.

어떤 사람은 길 한가운데 침을 뱉었다.

오레인은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너무 즐거웠다.

책에 적혀 있지 않은 것들이 사방에 있었다.

그날 오레인은 처음으로 길거리 음식을 먹었다.

너무 맵게 만들어진 고기꼬치였다.

눈물을 흘리며 다 먹었다.

---

그리고 길을 잃었다.

완벽하게.

대성당의 첨탑은 보이는데 어느 골목으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 같은 길을 돌았다.

그러다 길가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과 마주쳤다.

낡은 망토를 입은 사람이었다.

몸집이 컸다.

머리는 거의 희끗희끗했다.

무릎 옆에는 오래 사용한 창이 세워져 있었다.

오레인은 한눈에 알아봤다.

성기사였다.

정확히는,

성기사였던 세월이 아주 긴 사람이었다.

---

노인이 오레인을 쳐다봤다.

오레인도 쳐다봤다.

노인이 먼저 말했다.

“길 잃었냐.”

“아닙니다.”

“그럼 왜 같은 골목을 세 번째 도는데.”

오레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확인 중이었습니다.”

“뭘.”

“길을요.”

노인이 웃었다.

“그걸 길 잃었다고 하는 거야.”

오레인은 그 노인이 조금 싫어졌다.

---

그래도 도움은 받았다.

노인은 대성당 근처까지 데려다줬다.

오레인은 입구가 보이는 곳에서 멈췄다.

“감사합니다.”

노인이 물었다.

“거기 사냐?”

오레인이 굳었다.

“아닙니다.”

“그래.”

노인은 더 묻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오레인은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성기사시죠?”

“아직은.”

“아직은요?”

“곧 은퇴하거든.”

노인이 자기 무릎을 두드렸다.

“얘가 먼저 은퇴하자고 하네.”

오레인은 웃었다.

---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오레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탈출했다.

이번에는 길을 외웠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벤치에 다시 갔다.

노인이 있었다.

“또 길 잃었냐.”

“오늘은 안 잃었습니다.”

“아쉽네.”

“뭐가요?”

“놀릴 게 줄었잖아.”

오레인이 눈을 흘겼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가끔 만났다.

---

노년의 성기사는 임무 때문에 성도 세리아를 자주 왕래하고 있었다.

오래전에는 국경에서 싸웠다.

재난지역의 호위도 했다.

순례자를 지켰다.

구호물자를 옮겼다.

몬스터 토벌에도 나갔다.

남부 사람들과 싸운 적도 있었다.

반대로 남부 사람들과 함께 싸운 적도 있었다.

오레인은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보고서에 적힌 사건이 아니라,

그 안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였다.

---

오레인은 어느 순간부터 노인을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할아버지.”

“왜.”

“성기사는 아무나 할아버지라고 불러도 됩니까?”

“이미 부르고 나서 묻냐?”

“싫으세요?”

노인이 잠깐 생각했다.

“아니.”

그 뒤로는 계속 할아버지였다.

---

오레인은 질문이 많았다.

“도적은 왜 도적이 돼요?”

“사람마다 다르지.”

“나쁜 사람이니까 되는 것 아닌가요?”

“나쁜 놈도 있고.”

“그럼요?”

“먹을 게 없어서 훔치는 놈도 있고.”

“그래도 훔치면 안 되잖아요.”

“안 되지.”

“그럼 잡아야죠.”

“잡아야 할 때도 있지.”

오레인이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왜 전부 그렇게 대답하세요?”

“어떻게?”

“항상 ‘그럴 때도 있다’고.”

노인이 웃었다.

“살다 보니 확실한 말이 줄더라.”

---

오레인은 그게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든 질문에는 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옳은 것.

잘못된 것.

구해야 하는 사람.

막아야 하는 사람.

법을 지킨 사람.

법을 어긴 사람.

세리아의 가르침은 분명했다.

생명은 귀하다.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

불필요한 죽음을 막아야 한다.

오레인은 그것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면 된다고 믿었다.

---

어느 날 물었다.

“할아버지는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 적이 있어요?”

노인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있지.”

오레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많이요?”

“세다 말았어.”

오레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도 성기사일 수 있어요?”

노인은 화내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냐.”

“싸우지 않았을 거예요.”

“상대가 먼저 공격하면?”

“막고 설득했겠죠.”

“설득하는 동안 옆 사람이 죽으면?”

오레인은 잠깐 침묵했다.

“그래도 죽이지 않는 방법을 찾았을 거예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레인이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노인이 말했다.

“그 마음은 버리지 마라.”

그리고 덧붙였다.

“다만 찾지 못했을 때 네가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둬.”

---

그 말은 아버지가 했던 말과 비슷했다.

그래서 오레인은 조금 짜증이 났다.

“어른들은 왜 자꾸 사람을 못 구하는 상황부터 생각해요?”

노인이 웃었다.

“우리가 많이 못 구해봐서 그렇겠지.”

오레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그 노인의 얼굴에 깊게 팬 흉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

그 뒤로 할아버지는 멋진 이야기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구호물자를 지키려다 주민과 싸운 일.

도적을 쫓다가 무관한 집을 잘못 수색한 일.

인질을 구하려 너무 빨리 돌입했다가 사람이 죽은 일.

반대로 협상을 오래 끌다가 더 많은 사람이 다친 일.

명령을 따랐다가 후회한 일.

명령을 어겼다가 후회한 일.

오레인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했어요?”

노인은 자주 대답했다.

“모르지.”

오레인은 그 대답이 제일 싫었다.

---

“할아버지는 거기 있었잖아요.”

“있었지.”

“그런데도 몰라요?”

“있었으니까 더 모를 때도 있어.”

오레인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이 말했다.

“멀리서 보면 길이 두 개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 가면?”

“길이 백 개가 보여.”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문제는 어느 게 절벽으로 가는지도 같이 안 보인다는 거지.”

---

오레인은 조금씩 궁금해졌다.

자기가 배우지 못한 세상이 얼마나 많은지.

보고서에 적히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곡물 지원 요청’이라는 문장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국경 충돌’이라고 적힌 다섯 글자 사이에서 누가 울었는지.

왜 규정을 어긴 사람이 모두 악인은 아닌지.

왜 선의를 가진 사람끼리 싸우는지.

왜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데도 누군가는 죽는지.

처음에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자기 이상을 깨뜨린다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반대로 생각했다.

자신의 이상이 정말 옳다면,

현실에서도 버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

오레인의 탈출은 점점 능숙해졌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이었다.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 번쯤 빠져나왔다.

물론 매번 성공하지는 않았다.

한 번은 돌아오다 시녀에게 들켰다.

오레인은 두 손을 모았다.

“제발 아버지께는…….”

시녀가 한숨을 쉬었다.

“소교황님.”

“...아직 아니에요.”

“아직은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결국 그 시녀는 모른 척해주었다.

대신 다음부터 외출할 때 빵이라도 챙기라고 잔소리했다.

---

할아버지는 오레인의 정체를 꽤 일찍 알아챘던 것 같다.

오레인은 나중에서야 그것을 의심했다.

평범한 집 아이가 교황청 내부 규정을 너무 잘 알았다.

기사단 계급장을 보고 이름까지 맞혔다.

세레이온 고위 성직자의 이름을 줄줄 외웠다.

돈을 쓸 때 물가를 몰랐다.

무엇보다 말투가 지나치게 반듯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오레인도 자기 이름을 그냥 오레인이라고만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정도의 거짓말이 있었다.

---

어느 날 할아버지가 말했다.

“나 곧 그만둔다.”

오레인의 표정이 굳었다.

“뭘요?”

“성기사.”

“왜요?”

노인이 자기 무릎을 두드렸다.

“얘가 최종명령을 내렸어.”

오레인은 웃지 않았다.

“그러면 세리아에 계속 계시면 되잖아요.”

“싫어.”

“왜요?”

“평생 돌아다녔는데 은퇴해서까지 성당 옆에 붙어 살긴 싫다.”

“그럼 어디 가세요?”

“몰라.”

오레인이 인상을 썼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있지.”

“편지는요?”

“귀찮은데.”

“할아버지.”

“알았다, 알았어.”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주소는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

마지막으로 만난 날,

둘은 늘 앉던 벤치에 있었다.

오레인은 평소보다 말이 적었다.

할아버지가 물었다.

“왜 똥 씹은 얼굴이냐.”

“말을 좀 예쁘게 하세요.”

“이제 못 들을 텐데 미리 많이 들어둬.”

오레인은 더 기분이 나빠졌다.

한참 침묵하다 말했다.

“저는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노인이 웃었다.

“그건 좋은 생각이네.”

“칭찬 아닙니다.”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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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인은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저는 그래도 모두를 구하고 싶어요.”

“그래.”

“웃지 마세요.”

“안 웃었는데.”

“속으로 웃었잖아요.”

“조금.”

오레인이 노려봤다.

노인이 결국 웃음을 거뒀다.

“그 마음 버리라는 말은 안 한다.”

오레인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응.”

노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

그리고 한참 뒤 말했다.

“대신 하나만 기억해.”

“뭔데요?”

“네가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보다 중요해지는 순간을 조심해.”

오레인이 이해하지 못했다.

“구해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노인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네가 아직 애라는 거야.”

“저 스물한 살이에요.”

“나한텐 애야.”

“할아버지.”

“들어.”

노인은 평소와 달리 진지했다.

---

“사람을 살리고 싶어 하는 건 좋은 일이다.”

“근데 네가 그 사람 대신 뭘 잃을지 결정하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져.”

오레인은 조용히 들었다.

“누군가를 지킨다고 집을 빼앗을 수도 있고.”

“굶기지 않겠다고 일할 자유를 막을 수도 있고.”

“전쟁을 막겠다고 무기를 빼앗았다가 그 사람이 자기 가족을 지킬 방법까지 없앨 수도 있어.”

“그래도 결과적으로 살면…….”

오레인이 말하려 했다.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이 제일 무서운 거야.”

오레인의 입이 닫혔다.

---

“선의는 네 거다.”

“대가는 다른 사람이 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언젠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면.”

노인은 잠깐 오레인을 바라봤다.

오레인은 그 시선 때문에 순간 숨을 멈췄다.

그가 자기 정체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하지만 노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말했다.

“네가 옳다고 생각한 일 때문에 누가 우는지 봐.”

“그래도 해야 한다면 해.”

“다만 울고 있는 사람한테 네가 선했다고 설명하지는 마.”

---

오레인은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작게 말했다.

“그래도 전 모두를 구하고 싶어요.”

노인이 웃었다.

이번에는 놀리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래.”

“해봐.”

“할 수 있을까요?”

“몰라.”

오레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노인이 웃었다.

“마지막까지 그 대답은 마음에 안 드네.”

“나중에는 좋아질 거야.”

“왜요?”

“네가 직접 살아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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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식으로 은퇴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사람도 있었다.

서쪽으로 여행을 떠났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레인은 전부 찾아봤다.

확인되는 것은 없었다.

정말로 홀연히 사라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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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 오레인은 얌전히 지냈다.

수업을 들었다.

기도했다.

교황 후계자로서 보고서를 읽었다.

그런데 이전과 달랐다.

‘남부 국경 충돌 사망자 17명.’

예전에는 슬픈 숫자였다.

이제는 궁금했다.

누구였을까.

왜 싸웠을까.

먼저 공격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서로 어떤 말을 했을까.

저 열일곱 명에게도 가족이 있었을까.

‘곡물 운송 지연.’

왜 늦었을까.

‘치안 불안.’

누구에게 불안한 걸까.

기사는 도적이 무섭다고 썼다.

도적이라고 불린 사람은 무엇이 무서웠을까.

보고서는 갑자기 너무 얇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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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인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현장을 직접 보고 싶어요.”

메르빈은 대답했다.

“때가 되면 보게 될 것이다.”

“언제요?”

“준비가 끝나면.”

“저는 계속 준비만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아직 살아 있는 거다.”

오레인은 답답했다.

“저는 미래의 교황인데 백성이 어떻게 사는지도 모릅니다.”

“네가 백성 틈에서 생활해야만 통치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고서만 봐서는 모르는 것도 있잖아요.”

메르빈이 딸을 바라봤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오레인은 입을 다물었다.

---

그날 밤,

오레인은 결심했다.

돌이켜보면 상당히 충동적이었다.

본인은 아주 치밀한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여비를 챙겼다.

평범한 옷을 준비했다.

성표 하나만 옷 안쪽에 숨겼다.

후계자를 나타내는 물건은 전부 두고 갔다.

편지는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세 번 썼다가 전부 찢었다.

무슨 말을 써도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허락받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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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이었다.

오레인은 대성당을 빠져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외운 경비 교대시간을 처음으로 이런 용도에 사용했다.

벽을 넘었다.

골목을 달렸다.

새벽에 성도를 떠나는 교역 짐수레에 몰래 올라탔다.

짐 사이에 몸을 숨겼다.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성당의 첨탑이 조금씩 멀어졌다.

오레인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무서웠다.

그런데 웃음이 났다.

처음으로 자기 삶을 자기 손으로 선택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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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린가트였다.

항구도시.

상인과 선원과 여행자가 끊이지 않는 곳.

동부와 남부의 이야기가 함께 흘러드는 곳.

오레인은 생각했다.

거기라면 진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떻게 사는지 배운다.

그리고 언젠가 돌아간다.

조금 더 훌륭한 교황이 되어 있을 것이다.

모두를 이해하고,

모두를 돕고,

아버지보다도 더 좋은 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희망찬 계획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계획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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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가트에 도착한 첫날,

오레인은 사기를 당했다.

친절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처음 오셨죠?”

오레인은 경계했다.

나름대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린가트 사람은 항구에서 그렇게 두리번거리지 않거든요.”

남자는 좋은 숙소를 싸게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오레인은 감사했다.

소개비도 냈다.

주소를 받아 찾아갔다.

그런 숙소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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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인은 분노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정도는 예상 가능한 일입니다.”

혼자 중얼거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곧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사정을 듣더니 안타까워했다.

“그놈 유명한 사기꾼입니다.”

오레인의 눈이 커졌다.

“아십니까?”

“알죠. 돈 돌려받을 방법도 있습니다.”

오레인은 그 사람에게 수고비를 선불로 줬다.

그 사람도 사라졌다.

---

두 번째부터는 정말 화가 났다.

“어떻게 사람이 곤란한 사람을 상대로 또 사기를 칠 수 있죠?”

주변 사람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지나가면서 쳐다만 봤다.

오레인은 남은 돈을 세었다.

아직 조금 있었다.

그러면 일자리를 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곧 일자리 알선업자를 만났다.

숙식이 제공되는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했다.

다만 고용 보증금이 필요했다.

오레인은 이번에는 의심했다.

계약서까지 확인했다.

문장도 꼼꼼히 읽었다.

인장도 있었다.

완벽했다.

위조문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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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사기까지 당한 뒤,

오레인은 가진 돈을 거의 전부 잃었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법률을 잘 안다고 사기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계약서를 읽을 줄 알아도 인장이 가짜인지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람이 친절하게 웃는다고 선한 사람인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기가 생각보다 세상물정에 굉장히 어둡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오레인은 그게 제일 서러웠다.

---

그날 저녁,

오레인은 항구 골목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배가 고팠다.

숙소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정확히는 돌아가면 됐다.

자기 이름을 밝히기만 하면 됐다.

가장 가까운 성당에 들어가 말하면 된다.

‘저는 교황의 딸입니다.’

몇 시간 안에 보호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엄청나게 혼나겠지만,

따뜻한 침대도 있을 것이다.

오레인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울었다.

---

“이렇게 돌아가면…….”

할아버지에게 뭘 배웠다고 할 수 있을까.

사흘도 제대로 못 버티고 돌아간다.

사기 세 번 당했다.

거리에서 굶었다.

오레인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바보야…….”

스스로 중얼거렸다.

눈물이 났다.

“진짜 바보야…….”

그때 누군가 말했다.

“야.”

오레인이 고개를 들었다.

---

햇볕에 그을린 여자가 서 있었다.

거친 흑갈색 머리.

어깨에는 조업 도구가 걸려 있었다.

표정은 썩 친절해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물었다.

“왜 울어.”

오레인은 황급히 얼굴을 닦았다.

“안 웁니다.”

여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눈에서 물 나오는데.”

“…….”

“돈 떼였냐?”

오레인은 다시 울었다.

그 여자가 서머린이었다.

---

나중에 오레인이 사정을 설명하자 서머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사기.

두 번째 사기.

세 번째 사기.

서머린이 물었다.

“잠깐.”

“네.”

“세 번?”

오레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

“같은 날에?”

“네.”

서머린은 이마를 짚었다.

“대단하다.”

“칭찬하지 마세요.”

“칭찬 아니야.”

오레인은 또 울 것 같았다.

---

서머린은 한숨을 쉬었다.

“밥은.”

“네?”

“언제 먹었어.”

“어제 아침이 마지막입니다.”

서머린의 표정이 굳었다.

“씨발.”

오레인이 움찔했다.

“따라와.”

“어디를요?”

“밥 먹으러.”

“하지만 돈이…….”

“그 얘기 한 번만 더 하면 바다에 처넣는다.”

그렇게 오레인은 ‘청록빛 소리’에 들어갔다.

---

원래는 하룻밤만 있을 예정이었다.

서머린은 다음 날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오레인은 거절했다.

“일하겠습니다.”

“뭘 할 줄 아는데.”

“글을 읽고 쓸 수 있습니다.”

“그건 나도 해.”

“계산도 잘합니다.”

“접시는?”

“…….”

“침대보는?”

“…….”

“생선 손질.”

오레인은 침묵했다.

서머린이 말했다.

“너 진짜 뭘 배우고 산 거냐.”

오레인은 억울했다.

교단법과 고대 세레이온어와 종교행정과 외교학을 배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결국 말했다.

“배우면 됩니다.”

---

정말로 배웠다.

처음에는 처참했다.

접시를 깨뜨렸다.

물을 쏟았다.

침대보를 반대로 씌웠다.

생선 비늘을 부엌 천장까지 날렸다.

취객에게 말했다.

“그 행동을 즉시 중단하십시오.”

취객도 멈췄다.

서머린도 멈췄다.

나중에 물었다.

“너 어디서 그런 말투 배웠냐?”

“……집에서요.”

“집이 군부대냐?”

오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

그 대신 장부는 놀라울 정도로 잘했다.

며칠 만에 여관의 수입과 지출을 다시 정리했다.

서머린이 몇 달째 틀리게 계산한 항목도 찾아냈다.

“여기 계산이 잘못됐습니다.”

“아닌데.”

“잘못됐어요.”

“내가 몇 년을 했는데.”

오레인이 계산서를 내밀었다.

서머린은 한참 봤다.

“……씨발.”

그날부터 장부는 오레인의 일이 되었다.

---

청록빛 소리는 오레인이 처음으로 가까이서 세상을 보는 장소가 되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어부.

선원.

상인.

성직자.

기사.

순례자.

남부에서 온 여행자.

일자리를 찾는 사람.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집을 잃은 사람.

오레인이 교재에서 보았던 모든 분류가 실제 얼굴을 갖기 시작했다.

---

처음에는 자꾸 이상한 실수를 했다.

어느 날 늙은 어부가 외상으로 술을 달라고 했다.

오레인은 장부를 확인했다.

이미 외상이 꽤 많았다.

그래도 얼굴이 힘들어 보였다.

술을 줬다.

다음 날도 줬다.

그다음 날에는 식사비까지 대신 내줬다.

며칠 뒤 그 사람이 술에 취해 작업에 나갔다가 사고를 냈다.

동료 한 명이 다쳤다.

서머린이 물었다.

“왜 계속 술 줬어.”

오레인은 당황했다.

“힘들어 보였으니까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편해졌으면 해서…….”

서머린이 한숨을 쉬었다.

“착한 마음으로 술 줬다고 저 새끼가 덜 취하냐?”

---

오레인은 그 말을 듣고 상처받았다.

“그럼 힘든 사람을 모른 척해야 하나요?”

“아니.”

“그런데 왜 제가 잘못한 것처럼 말하세요?”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서머린은 다친 어부가 누운 방을 가리켰다.

“네가 뭘 도와준 건지는 보라는 거야.”

오레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처음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과 도움이 되었다는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

다른 날에는 굶은 가족이 찾아왔다.

오레인은 여관 식량을 많이 내줬다.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머린이 돌아와 창고를 보고 물었다.

“이거 어디 갔어.”

오레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 가족에게 드렸습니다.”

“얼마나.”

오레인이 말했다.

서머린의 얼굴이 굳었다.

“그거 내일 배 타는 애들 식량이야.”

오레인의 미소가 사라졌다.

“하지만 저분들은 지금 굶고 있었어요.”

“알아.”

“그러면 잘한 것 아닌가요?”

“그걸 왜 네가 정해.”

오레인이 멈췄다.

---

서머린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무서웠다.

“네 음식이면 다 줘도 돼.”

“네 돈이면 다 줘.”

“근데 저건 다른 놈들이 내일 바다에서 먹을 거야.”

“…….”

“남의 몫까지 네가 착해질 권리는 없어.”

그 문장은 오레인에게 오래 남았다.

그날 오레인은 자기 돈으로 부족한 식량을 다시 샀다.

생활비 대부분이 날아갔다.

서머린은 도와주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직접 치러야 할 값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오레인은 조금씩 달라졌다.

사람을 돕기 전에 묻게 됐다.

“무엇이 필요하세요?”

예전에는 자기가 필요한 것을 판단했다.

이제는 먼저 들었다.

물론 언제나 잘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다치면 여전히 자기 판단부터 앞섰다.

굶은 아이를 보면 장부를 잊었다.

불공평한 일을 보면 참지 못했다.

사람들이 “됐습니다”라고 말해도 정말 괜찮은지 몇 번씩 확인했다.

선의는 여전히 넘쳤다.

다만 아주 조금씩 방향을 배우고 있었다.

---

남부 사람들을 처음 가까이서 만난 것도 청록빛 소리였다.

안발룽에서 올라온 상인 몇 명이었다.

옷에는 모래가 묻어 있었다.

세레이온 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도 있었고,

거의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레인은 처음에는 조금 긴장했다.

교재에서 남부 부족과의 충돌 사례를 수도 없이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손님이었다.

술을 마셨다.

생선값을 흥정했다.

고향 이야기를 했다.

한 사람은 아들에게 줄 조개껍데기를 골랐다.

오레인은 그 모습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

며칠 뒤 동부 기사단 사람들이 여관에 묵었다.

국경 쪽에서 충돌이 있었다고 했다.

기사는 말했다.

“남부 놈들이 또 넘어왔어.”

오레인은 익숙한 설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구석에 앉아 있던 남부 출신 노동자가 조용히 말했다.

“내 형도 거기 있어.”

오레인이 돌아봤다.

남자는 술잔만 보고 있었다.

“기사단과 싸웠습니까?”

“응.”

오레인은 무심코 말했다.

“하지만 기사단은 세레이온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말이 끝나기 전에 남자가 말했다.

“알아.”

오레인이 멈췄다.

남자는 술을 마셨다.

“우리 형도 자기 사람 지키려고 싸웠어.”

---

오레인은 그날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기사단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습격을 당한 세레이온 사람들이 있었다.

다친 사람도 있었다.

남부 쪽에도 이유가 있었다.

가축이 죽었다.

식량이 부족했다.

오래된 통행로와 방목지를 두고 다툼이 있었다.

그렇다고 습격이 정당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기사단이 그들을 몰아내면서 또 다른 사람이 죽었다.

오레인은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괴로웠다.

---

며칠 뒤에는 반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남부 출신 무장집단이 실제로 외곽 상단을 습격했다.

린가트까지 부상자가 들어왔다.

어린 상인의 팔이 크게 다쳤다.

오레인은 치료를 도왔다.

아이는 울면서 말했다.

“우린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오레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부 사람들의 사정을 알게 되면 갈등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정이 있다고 해서 피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해와 용서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유와 정당화도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 구분을 오레인은 조금씩 배워갔다.

---

그래도 오레인은 여전히 대화를 믿었다.

한 번은 여관에서 기사와 남부 상인이 크게 싸웠다.

서로의 가족이 국경 충돌에 휘말린 사람들이었다.

욕설이 오갔다.

의자가 밀렸다.

서머린은 주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둘 다 나가.”

오레인이 막았다.

“잠깐만요.”

“왜.”

“대화하면 풀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서머린이 두 사람을 봤다.

다시 오레인을 봤다.

“지금?”

“네.”

“쟤네 둘 다 술 취했는데?”

“그래도 서로의 입장을 들으면…….”

다음 순간 잔 하나가 날아갔다.

서머린이 오레인의 머리를 눌러 피하게 했다.

“일단 내보내.”

그날 대화는 실패했다.

---

오레인은 억울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야기해야 하잖아요.”

서머린이 대답했다.

“맞아.”

“그런데요?”

“언제가 지금은 아니었던 거지.”

오레인은 그 말도 기억했다.

좋은 방법도 잘못된 순간에 사용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었다.

---

오레인은 점점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메르빈이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왜 모든 결정에 조건을 붙이는지 몰랐다.

왜 선한 정책에도 실패했을 경우를 묻는지 몰랐다.

왜 항상 숫자를 확인하는지 몰랐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한 사람을 도우면 다른 사람의 몫이 줄 수도 있었다.

지금 좋은 일이 내일 다른 문제를 만들 수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결과를 만들었다.

세상은 오레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

그렇다고 아버지가 전부 옳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메르빈은 보고서를 잘 읽었다.

수치를 확인했다.

최악의 경우를 계산했다.

그런데 보고서에는 없는 것이 있었다.

사람의 목소리.

말을 하다 멈추는 순간.

자기가 잘못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억울해하는 표정.

피해를 입었지만 상대를 미워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는 사람.

나라를 사랑하면서도 기사단을 욕하는 사람.

규정을 어겼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

오레인은 그런 것까지 통치자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그래서 작은 수첩을 하나 만들었다.

처음에는 여관 장부 옆에 끼워둔 평범한 수첩이었다.

오레인은 거기에 질문을 적었다.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

‘누가 대가를 치렀는가.’

‘그 대가를 본인은 알고 있었는가.’

‘선택할 다른 방법은 있었는가.’

‘도움을 받은 사람도 이것을 도움이라고 생각하는가.’

맨 마지막에는 항상 같은 문장을 적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

어느 날 서머린이 수첩을 봤다.

“뭐냐 이거.”

오레인이 황급히 닫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연애일기냐?”

“아닙니다!”

“그럼 뭔데.”

“그냥…… 생각을 적는 겁니다.”

서머린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장부만 제대로 써.”

오레인은 안도했다.

서머린은 그 수첩이 언젠가 한 나라의 통치 원칙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

오레인은 여전히 자기 정체를 숨기고 있다.

서머린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여관 사람들에게는 그냥 집안이 답답해서 나온 아가씨 정도로 알려져 있다.

가끔 위험한 순간에는 티가 난다.

어느 날 취객이 칼을 뽑았다.

오레인의 목소리가 즉시 바뀌었다.

“무기를 내려놓으세요.”

평소의 접객원 목소리가 아니었다.

짧고,

단정하고,

명령에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취객이 잠깐 얼었다.

서머린도 바라봤다.

오레인은 뒤늦게 깨닫고 덧붙였다.

“……부탁드립니다.”

서머린이 중얼거렸다.

“수상한 년.”

---

신성술도 최대한 숨긴다.

정식 교단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능숙하다.

하지만 아직 젊다.

대성녀나 고위성직자처럼 압도적인 힘을 가진 것은 아니다.

상처를 안정시키고,

작은 오염을 정화하고,

결계를 만들어 공격을 막는 정도가 중심이다.

그래도 평범한 여관 접객원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능숙하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순간에만 사용한다.

---

한 번은 크게 다친 선원이 여관으로 실려왔다.

치료사가 오기에는 시간이 걸렸다.

피가 계속 흘렀다.

오레인은 망설였다.

신분이 들킬 수도 있었다.

그래도 손을 뻗었다.

희미한 빛이 손끝에 모였다.

출혈이 조금씩 멎었다.

선원은 살아남았다.

서머린은 모든 일이 끝난 뒤 물었다.

“그거 어디서 배웠어.”

오레인이 잠시 침묵했다.

“집에서요.”

“대체 무슨 집이야.”

“……조금 엄격한 집입니다.”

서머린은 한참 쳐다봤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그걸로 끝이었다.

---

그 태도는 오레인에게 이상했다.

교황의 후계자로 살 때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고 싶어 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성직자를 신뢰하는지.

어떤 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미래에 어떤 교황이 될 것인지.

오레인의 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가졌다.

서머린은 달랐다.

“일 잘하면 됐지.”

그게 전부였다.

오레인은 그 단순함이 좋았다.

---

가끔은 신앙 문제로 다퉜다.

오레인은 서머린이 세리아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성법이 실제로 존재하잖아요.”

“응.”

“기적도 보셨잖아요.”

“봤지.”

“그런데 어떻게 안 믿으세요?”

서머린이 대답했다.

“불 있다고 불이 날 사랑한다고 믿진 않잖아.”

오레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앙을 논리로 반박당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

서머린의 과거를 들은 뒤에는 더 복잡해졌다.

어머니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은 이야기.

조난에서 한 어부가 자기 부유판을 넘겨준 이야기.

사람들이 그 선택을 세리아의 기적이라고 불렀던 이야기.

오레인은 처음에는 반박하고 싶었다.

세리아의 은총이 그 사람의 선택을 통해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네가 옳다고 생각한 일 때문에 누가 우는지 봐.’

서머린은 그 해석 때문에 상처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기 신앙을 설명하는 것이 정말 도움일까.

---

오레인은 대신 말했다.

“그분이 선택한 것이었군요.”

서머린이 잠깐 손을 멈췄다.

“응.”

“무서웠는데도.”

“응.”

“그래도 직접.”

서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레인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신앙을 설명하지 않는 것도 신앙을 지키는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오레인은 아직 멀었다.

여전히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

사기에는 예전보다 잘 안 당하지만,

사람이 진심으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경계가 약해진다.

누군가 살려달라고 하면 먼저 손이 나간다.

상대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려 들 때도 있다.

서머린이 가끔 말한다.

“또 네가 대신 결정했지.”

오레인은 반박한다.

“위험했잖아요.”

“알아.”

“그러면 도와야죠.”

“도와.”

서머린이 말한다.

“근데 도움받을 놈 입도 좀 쓰게 해줘.”

오레인은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

오레인은 아직 모두를 구하고 싶다.

이 부분만큼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서머린이 물었다.

“진짜로?”

“네.”

“한 명도 안 빼고?”

“가능하다면요.”

“적도?”

오레인은 잠깐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사람 죽인 놈도?”

이번에는 더 오래 생각한다.

“살려두고 책임을 묻는 방법이 있다면요.”

서머린은 혀를 찬다.

“피곤하게 산다.”

오레인은 웃는다.

“알아요.”

---

그녀에게 이상은 아직 포기해야 할 것이 아니다.

현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냉정해지는 것이 성숙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현실이 어렵다는 이유로 너무 빨리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그 마음을 버리지 말라고 했던 것도 기억한다.

그래서 오레인은 아직 방법을 찾는다.

하나를 버리는 계산이 나오면 둘 다 살릴 방법을 한 번 더 찾는다.

전쟁이 필요하다고 하면 협상을 한 번 더 생각한다.

누군가 구제할 가치가 없다고 하면 정말 그런지 묻는다.

그 집요함이 언젠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

하지만 같은 이유로 위험하다.

모두를 구하겠다는 마음은 아직 현실에서 완전히 시험받지 않았다.

지금까지 오레인이 만난 실패는 작았다.

돈을 잃었다.

식량 배분을 잘못했다.

사람의 마음을 잘못 짐작했다.

대화가 실패했다.

누군가 다쳤다.

그래도 대부분 다시 고칠 수 있었다.

사과할 수 있었다.

다시 계산할 수 있었다.

다음 날이 있었다.

---

언젠가는 그렇지 않은 선택이 올 것이다.

한쪽을 구하면 다른 쪽이 죽는 순간.

기다리면 모두가 죽고,

움직이면 누군가는 반드시 희생되는 순간.

선의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려 드는 순간.

사람을 구하려 만든 제도를 사람이 악용하는 순간.

도와준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을 해치는 순간.

누군가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순간.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는 것이 몬스터나 악마가 아니라 다른 인간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오레인은 아직 그 벽 앞에 서본 적이 없다.

---

그때도 모두를 구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처음으로 누군가를 버릴까.

한 번 버린 뒤에는 두 번째가 쉬워질까.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구할 가치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나누기 시작하지는 않을까.

반대로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더 많은 힘과 권한만 있으면 모두를 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지는 않을까.

선의를 강제로 집행하기 시작하지는 않을까.

지금의 오레인은 그런 자신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 점이 가장 위험하다.

---

가끔 밤이 깊으면 청록빛 소리의 창가에 앉는다.

린가트 항구의 불빛이 보인다.

대성당의 높은 창문에서 내려다보던 성도 세리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술 취한 선원의 노래.

생선값을 두고 싸우는 상인.

아이가 우는 소리.

배가 들어왔다는 외침.

남부 억양.

세레이온 기사의 웃음소리.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같은 거리에서 산다.

오레인은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본다.

---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

그 사실은 알고 있다.

오레인은 평생 여관 접객원으로 살 수 없다.

오레이노 드 그루커스라는 이름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현 교황의 딸.

다음 교황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

언젠가 다시 대성당으로 돌아가면,

보고서를 받게 될 것이다.

사망자 38명.

난민 211명.

구호 필요지역 7곳.

기사단 피해 16명.

남부 부족 피해 추산 불명.

다시 숫자가 될 것이다.

오레인은 그것이 두렵다.

---

그래서 지금 많이 보려고 한다.

이름을 외운다.

얼굴을 기억한다.

누가 어떤 생선을 싫어하는지도 기억한다.

어느 어부가 술을 마시면 사고를 치는지도 안다.

어느 남부 상인이 딸 이야기를 하면 목소리가 커지는지도 안다.

어느 기사가 전투 이야기를 할 때 꼭 죽은 동료 부분에서는 말을 줄이는지도 안다.

이런 것들이 통치에 필요하냐고 물으면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기억하고 싶다.

백성이라는 단어 안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

어느 날 서머린이 물었다.

“요즘 왜 그렇게 사람들 쳐다보냐.”

오레인이 말했다.

“기억하려고요.”

“뭘.”

“사람들을요.”

서머린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쓸데없는 짓 하네.”

오레인이 웃었다.

“그럴지도요.”

서머린이 생선 상자를 들었다.

“기억은 나중에 하고 이것부터 들어.”

오레인은 바로 달려가 상자 반대편을 들었다.

“무겁네요.”

“현실이지.”

“그 말을 꼭 그렇게 쓰셔야 합니까?”

“잘 어울리잖아.”

---

가끔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오레인은 그가 마지막에 했던 말을 자주 떠올린다.

‘네가 옳다고 생각한 일 때문에 누가 우는지 봐.’

처음에는 이상한 충고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이해한다.

옳은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다.

누군가 울었다는 이유로 아무 결정도 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었다.

자기 선의를 면죄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

오레인은 아직 완전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예전보다 모르는 것이 많아졌다.

어릴 때는 좋은 교황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생각했다.

백성을 사랑한다.

사람을 구한다.

전쟁을 막는다.

굶는 사람이 없게 한다.

악한 사람을 벌한다.

선한 사람을 돕는다.

지금은 그 문장마다 질문이 붙는다.

누가 백성인가.

무엇이 구원인가.

평화를 위해 누가 대가를 치르는가.

곡물을 어디에서 가져오는가.

악하다는 판단은 누가 내리는가.

도움받는 사람도 그것을 도움이라고 생각하는가.

---

그래도 한 가지는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

오레인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교황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모든 선택에서 칭찬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조금씩 안다.

누군가는 자신의 결정을 미워할 것이다.

어쩌면 증오할 것이다.

그래도 그 목소리를 없애고 싶지는 않다.

자기가 백성을 위해 결정했다는 이유로,

그 결정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에게 감사까지 요구하는 교황은 되고 싶지 않다.

---

그래서 어느 날 수첩에 새로운 문장을 적었다.

‘옳은 일을 했다는 말로 끝내지 말 것.’

잠시 생각했다.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었다.

‘그 옳은 일 때문에 누가 울었는지도 확인할 것.’

오레인은 그 문장을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할아버지가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제 조금 사람 말 같네.’

오레인은 분명 화냈을 것이다.

---

아직 오레인은 이상주의자다.

모두를 구할 방법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사람은 결국 서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대화와 충분한 선의가 있다면 대부분의 비극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

현실은 이미 몇 번이나 그렇지 않다고 보여줬다.

그럼에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오레인의 가장 좋은 점일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가장 많은 사람을 다치게 만들 약점일지도 모른다.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오레인 자신도.

---

오늘도 청록빛 소리에서 손님을 받는다.

“어서 오세요.”

방을 안내한다.

술을 나른다.

장부를 정리한다.

서머린이 바다에서 돌아오면 생선 상자를 함께 옮긴다.

가끔 기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남부에서 온 여행자에게 고향이 어떤 곳인지 묻는다.

싸움이 나면 말리려고 든다.

서머린에게 먼저 내보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수첩에 몇 줄을 더 적는다.

---

언젠가 다시 오레이노 드 그루커스로 돌아가야 한다.

왕관 대신 성관을 쓰고,

여관 장부 대신 나라의 보고서를 펼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에도 지금처럼 사람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른다.

수백 명의 죽음을 앞에 두고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였을 때,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도 아직 모른다.

그래서 오레인의 이야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지금의 오레인은 그저 배우고 있다.

좋은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그렇다고 좋은 마음이 쓸모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사람을 구하려면 먼저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들어야 한다는 것을.

누군가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말하기 전에 그 책임의 대가가 어디로 가는지 봐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통치자는 백성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자신의 결정 때문에 누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를 끝까지 확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

다만 아직도 가끔 서머린에게 말한다.

“그래도 전 모두를 구하고 싶어요.”

서머린은 생선을 손질하다 대답한다.

“그래, 해봐.”

오레인이 눈을 크게 뜬다.

“비웃지 않으시네요?”

“비웃는다고 네가 안 할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

서머린은 칼을 내려놓는다.

“대신.”

“네?”

“다 못 구했다고 미쳐버리지만 마.”

오레인은 잠시 말이 없다.

그리고 웃는다.

“그럴 일 없습니다.”

서머린은 대답하지 않는다.

오레인은 아직 모른다.

그 약속이 언젠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Roster

자유왕국 까까몰리

6명
천익항로조합2명
PIA
피아나 슬립굿
까까몰리항로조합-조합장
“서명했다고 동의한 게 아니야. 제대로 설명했는지부터 보자!”
🩸 HP50
💪 공격력5
🧙 마법력5
✨ 신비력1
🛡️ 방어력15
🔗 항마력20
😖 신비저항30
🏃 회피력20
과거 보기
피아나 슬립굿은 아주 오래도록 하늘을 자유라고 생각했다.

까까몰리에서 자란 아이치고 특별한 생각은 아니었다.

바람고리군도의 섬들은 바다로만 이어져 있지 않았다.

섬과 섬 사이로 비행선이 날았고,
짐을 실은 비행마수가 구름 아래를 오갔다.

멀리 떨어진 항구에서 출발한 편지가 다음 날 다른 섬에 도착했다.

곡물이 날아왔다.

약이 날아왔다.

사람도 날아왔다.

까까몰리에서 하늘길은 길 이상의 것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하나의 나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혈관이었다.

피아나는 그 길을 사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따라 비행선을 탔다.

갑판 난간보다도 키가 작아 발판 위에 올라서야 밖을 볼 수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묶고,
너무 큰 비행고글을 이마에 올린 채 바람을 맞았다.

“엄마! 저기 섬!”

“봤어.”

“저건?”

“구름.”

“저건?”

“또 구름.”

“저건?”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피아나야. 하늘에 구름이 많단다.”

“알아! 모양이 다르잖아!”

피아나는 모든 것이 궁금했다.

바람에는 왜 길이 있는지.

비행마수는 어떻게 방향을 찾는지.

비행선의 날개는 어느 각도에서 가장 잘 바람을 받는지.

선원은 왜 출항 전에 같은 밧줄을 세 번씩 확인하는지.

부모는 귀찮아하지 않았다.

둘 다 천익항로조합과 계약을 맺고 일하는 항로 선원이었다.

어머니는 항로 판독과 비행마수 관리를 맡았고,
아버지는 비행선의 와이어와 돛을 관리했다.

피아나는 둘이 세상에서 하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부모는 안전규칙에 엄격했다.

출항 전에는 반드시 바람기록을 확인했다.

비행마수가 이상하게 귀를 세우거나 날개를 떨면 이유를 찾았다.

와이어 하나가 조금만 닳아도 교체했다.

어린 피아나는 그런 절차를 답답해했다.

“아직 안 가?”

어머니가 말했다.

“안전 확인 중.”

“아까 했잖아.”

“또 해.”

“왜?”

“아까 멀쩡했다고 지금도 멀쩡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피아나는 볼을 부풀렸다.

아버지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헝클었다.

“하늘에서 제일 위험한 말이 뭔지 알아?”

피아나가 바로 대답했다.

“떨어진다?”

“아니.”

“폭풍?”

“아니.”

“뭔데?”

아버지가 말했다.

“아마 괜찮겠지.”

피아나는 그 말을 듣고 깔깔 웃었다.

당시에는 그냥 아버지의 잔소리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평생 잊지 못하는 문장이 되었다.


피아나의 부모가 사고를 당한 해,
까까몰리의 항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계절풍이 평년보다 일찍 틀어졌다.

푸른고리해 위의 상승기류가 불안정했다.

몇몇 정규 항로에는 비행 제한이 걸렸다.

배달은 밀렸다.

상단은 불평했다.

섬마다 필요한 물자가 쌓여 있었다.

특히 한 교역항에서는 약재와 보존식량을 빠르게 옮겨야 했다.

정규 항로를 이용하면 며칠을 돌아가야 했다.

더 짧은 길이 하나 있었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고고도 항로였다.

구름갈고리고원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해상기류가 교차하는 구간.

항로 지도에는 사용할 수 있는 길로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경험 많은 조종사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특정 계절에는 바람이 갑자기 뒤집혔다.

고도 하강이 너무 빨랐고,
비행마수가 방향감각을 잃는 일도 있었다.

몇 년 전 작은 사고도 있었다.

큰 인명피해가 없어서 공식적으로 폐쇄되지는 않았다.

천익항로조합 내부에는 위험 보고가 쌓여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모든 선원에게 똑같이 알려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합 일부 관리자는 그 항로를 ‘주의 필요 항로’로만 분류했다.

운항 금지까지 할 근거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항로를 완전히 막으면 운송비가 크게 올라갔다.

계약 지연에 따른 손해도 발생했다.

그래서 항로 사용은 선장과 선원의 판단에 맡겨졌다.

형식적으로는 선택할 수 있었다.

짧고 위험할 가능성이 있는 항로.

길지만 상대적으로 안전한 항로.

문서에는 둘 다 적혀 있었다.

피아나의 부모는 짧은 항로를 선택했다.

그것이 사고 뒤 조합이 가장 많이 반복한 말이었다.

‘선원이 스스로 선택한 항로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실제로 받은 설명은 훨씬 짧았다.

예정보다 기류 변화가 심할 수 있음.

숙련된 항해사 권장.

운항 여부는 선장 판단.

그 정도였다.

최근 몇 달 사이 그 항로에서 비행마수 세 마리가 방향을 잃었다는 기록.

와이어 두 개가 기류 충격으로 파단되었다는 보고.

항로감시원이 ‘당분간 우회가 바람직하다’고 남긴 의견.

그런 정보는 첨부되지 않았다.

관리자들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기록들은 확정된 사고 예측이 아니었다.

기상은 언제나 변한다.

숙련된 선원이라면 통과할 수도 있었다.

괜히 위험을 과장하면 아무도 그 길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운송은 멈춘다.

그들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피아나는 훗날 그 이유를 전부 읽었다.

그래도 부모는 죽었다.


출항 전날 밤,
피아나는 부모와 저녁을 먹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이번엔 넌 안 데려가.”

피아나가 즉시 반발했다.

“왜!”

“일이야.”

“전에도 일이었잖아.”

아버지가 말했다.

“이번에는 빨리 갔다 와야 해.”

피아나는 입을 삐죽였다.

“나도 빨라.”

“넌 배에서 뛰지 말라고 하면 더 빨리 뛰잖아.”

“안 뛸게.”

두 부모가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

피아나는 잠시 침묵했다.

“조금만 뛸게.”

어머니가 웃었다.

“안 돼.”

그날 피아나는 부모의 주머니에 작은 방울 하나씩을 몰래 넣었다.

돌아오면 찾아내는 사람이 간식을 사주기라는 장난이었다.

둘 다 그 방울을 가지고 떠났다.

돌아오지는 못했다.


사고는 항로 중간에서 일어났다.

당시 살아남은 선원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문제가 없었다.

바람도 예상 범위였다.

비행마수들도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다 구름층 아래에서 기류가 갑자기 반대로 꺾였다.

비행선이 옆으로 밀렸다.

선체를 붙들던 주요 와이어 하나가 끊어졌다.

아버지가 와이어를 다시 고정하려 했다.

어머니는 비행마수를 진정시키며 고도를 유지하려 했다.

두 번째 돌풍이 왔다.

선체가 크게 기울었다.

날개 일부가 접혔다.

추락은 완전한 수직 낙하는 아니었다.

선원들은 끝까지 고도를 줄이려고 했다.

그 덕분에 몇 명은 살아남았다.

피아나의 부모는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 없었다.


피아나는 사고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어디 병원인데?”

전달자가 대답하지 못했다.

피아나가 다시 물었다.

“어디 있어?”

“피아나.”

“그래서 어디 있냐고.”

평소처럼 빠른 말투였다.

목소리도 아직 밝았다.

상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제야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둘 다?”

침묵.

“둘 다 죽었어?”

아주 작은 고개 끄덕임.

그날 피아나는 울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자리에서는 울지 않았다.

사고 보고서를 보여달라고 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물었다.

왜 그 항로를 탔는지 물었다.

누가 허가했는지 물었다.

그리고 보상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슬퍼하기 전에 질문부터 했다.

아마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보상 심사가 열렸다.

조합은 기본적인 장례비와 일정 금액의 위로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중대한 안전관리 과실에 따른 추가보상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명확했다.

해당 항로는 공식 폐쇄 항로가 아니었다.

운항계약에는 항로 선택에 따른 기상 위험이 명시되어 있었다.

선장과 선원은 위험 가능성에 동의하고 서명했다.

최종적으로 항로를 선택한 것도 선원들이었다.

피아나는 계약서를 받았다.

부모의 서명이 있었다.

분명했다.

그녀는 한참 종이를 바라보다 물었다.

“이거 설명한 사람 누구야?”

조합 직원이 말했다.

“설명이라니요?”

“서명할 때.”

“표준계약입니다.”

“그래서 누가 설명했는데.”

직원이 기록을 찾았다.

담당자의 이름이 나왔다.

피아나는 다시 물었다.

“그 항로에서 최근에 사고 난 거 말했어?”

상대가 잠시 멈췄다.

“모든 운항기록을 개별 선원에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왜?”

“필수 고지사항이 아니니까요.”

피아나의 표정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항로 기록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내부 자료라고 했다.

피아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찾아갔다.

“보여줘.”

“안 됩니다.”

“왜?”

“조합 내부 자료입니다.”

“우리 부모 죽은 길인데?”

“안타까운 것은 압니다.”

“안타깝다는 얘기 말고.”

그녀는 계약서를 흔들었다.

“위험 알고 골랐다며.”

“그렇습니다.”

“뭘 알았는지 봐야 될 거 아냐.”

그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유가족 자격으로 일부 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피아나는 며칠 동안 기록실에 틀어박혔다.

기류도표.

항로사고 보고서.

비행마수 이상행동 기록.

와이어 파손.

감시원 권고.

하나씩 읽었다.

그리고 부모가 계약할 당시 전달받은 문서와 비교했다.

차이는 명백했다.


피아나는 다시 조합으로 갔다.

회의실 탁자 위에 두 종류의 문서를 펼쳤다.

“여기.”

작은 손가락으로 사고 기록을 짚었다.

“이건 조합이 알고 있었어.”

다음에는 부모의 계약서를 짚었다.

“이건 우리 부모가 받은 거고.”

한 관리가 말했다.

“위험 가능성은 명시되어 있습니다.”

“어디.”

관리자가 문장을 읽었다.

‘기류 및 기상상태에 따라 운항 위험이 증가할 수 있으며 운항자는 이를 인지하고 항로를 선택한다.’

피아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 최근 세 번이나 이상기류 보고 나온 것도 알았다는 뜻이야?”

“그 항목은 일반적인 위험을...”

“아니.”

피아나가 말을 끊었다.

“우리 부모가 그걸 알았냐고.”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비행마수 방향상실 세 건.”

“와이어 파단 두 건.”

“항로감시원 우회 권고.”

하나씩 말했다.

“이거 알고 골랐어?”

아무도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피아나는 그날 처음으로 자신의 신념이 될 문장을 말했다.

“그럼 고른 게 아니잖아.”


조합 측에서는 반박했다.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항로 하나에도 수십 년의 기록이 있다.

모든 사고 가능성을 계약서에 적으면 아무도 내용을 읽지 않는다.

기류는 시시각각 달라진다.

위험평가 자체에도 불확실성이 있다.

그리고 부모는 숙련된 선원이었다.

짧은 항로를 선택할 이유도 있었다.

물자를 기다리는 지역이 있었다.

지연에 따른 손실도 컸다.

피아나는 그 말을 전부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문제가 거짓말 하나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부모에게 ‘안전하다’고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저 알고 있던 위험의 구체적인 크기를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서명을 가리켰다.

본인이 선택했다.

본인이 동의했다.

그러니 책임도 본인에게 있다.

피아나는 그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명했다고 동의한 게 아니야.”

회의장에서 누군가가 한숨을 쉬었다.

“피아나 양.”

“양 아니야. 쉰 넘었어.”

하플링의 외모 때문에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도 당시부터 싫어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피아나는 계약서를 다시 펼쳤다.

“이걸 읽었다는 거랑 이해했다는 건 다르잖아.”

“그리고 위험하다고 한 줄 쓰는 거랑 어느 정도 위험한지 말하는 것도 다르고.”

관리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설명해야 한다는 겁니까?”

피아나는 즉시 대답하려다 멈췄다.

처음으로 어려운 질문이었다.

모든 기록을 다 읽어줄 수는 없다.

사소한 가능성까지 나열하면 오히려 중요한 정보가 묻힐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반드시 알려야 하는가.

피아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선택이 바뀔 만한 거.”

“예?”

“그걸 알면 안 탔을 수도 있는 정보.”

잠시 뒤 더 분명하게 말했다.

“그건 숨기면 안 돼.”


피아나는 그 뒤 천익항로조합의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목적은 싸우기 위해서였다.

밖에서 항의하면 조합은 늘 규정을 이야기했다.

그러면 규정을 직접 알아야 했다.

운항계약을 공부했다.

보험 규정도 읽었다.

항로등급 기준도 배웠다.

바람과 기류를 공부했다.

비행선 정비도 배웠다.

비행마수의 행동도 익혔다.

피아나는 원래 호기심이 많았다.

한번 파고들기 시작하자 누구보다 빠르게 배웠다.

그리고 곧 알게 되었다.

안전규정은 귀찮게 만들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누군가 다친 뒤 생겼다.

비행고글 착용.

와이어 이중고정.

비행마수 교대시간.

악천후 출항 제한.

모든 규정 뒤에는 사고 하나씩이 있었다.

피아나는 규정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좋아하게 되었다.


조합원이 된 뒤 그녀는 계약서를 들고 선원들을 쫓아다녔다.

“읽었어?”

“예.”

“진짜?”

“예.”

“3조 4항 뭐야?”

선원이 침묵했다.

피아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안 읽었네.”

“아니, 읽긴 읽었는데...”

“그럼 다시.”

“시간이 없습니다.”

“추락하면 시간 더 없어.”

그녀는 직접 설명했다.

이번 항로의 예상 기류.

최근 사고율.

대체항로.

임금 차이.

운항을 거부했을 때 불이익이 있는지.

비행마수가 어떤 위험에 노출되는지.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지는지.

처음에는 선원들이 귀찮아했다.

그러다 피아나가 사소한 조항까지 끝없이 확인하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여기 서명.”

“하면 끝입니까?”

“아니.”

“또 뭡니까?”

“네가 뭘 서명했는지 나한테 설명해봐.”

선원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피아나는 활짝 웃었다.

“헤헤. 틀리면 다시 설명해줄게!”


그녀가 가장 먼저 바꾸려 한 것은 항로 위험등급이었다.

예전의 등급은 조합 내부 운항관리용에 가까웠다.

선원과 화주는 최종 등급만 보는 경우가 많았다.

피아나는 세부 근거를 공개하게 만들었다.

최근 기류 이상 빈도.

사고 기록.

비행마수 손실.

정비 부담.

예상 운항시간.

우회로와 비교한 위험 차이.

숫자만 적지 않았다.

“위험도 4.”라고 쓰면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해석했다.

그래서 구체적인 문장을 붙였다.

‘강풍 시 선체 측면충격 위험이 높음.’

‘비행마수 단독 운항 금지 권고.’

‘최근 30회 운항 중 4회 긴급우회.’

피아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감당할 위험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비로소 선택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만든 것이 계약철회권이었다.

예전에는 운항계약에 서명한 뒤 선원이 출항을 거부하면 계약불이행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출항 직전에 위험정보가 새로 생겨도 마찬가지였다.

피아나는 그것을 바꿨다.

기류등급이 일정 수준 이상 변하면 재동의를 받아야 했다.

중대한 정비 문제가 발견되면 기존 서명은 효력을 잃었다.

비행마수 상태가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선원은 새 정보를 들은 뒤 다시 선택할 수 있었다.

누군가 반대했다.

“그렇게 하면 출항 직전에 계약을 깨는 사람이 생깁니다.”

피아나가 말했다.

“응.”

“운송 일정이 망가집니다.”

“응.”

“손실은 누가 책임집니까?”

피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 죽는 것보다 싸잖아?”

상대가 한숨을 쉬었다.

피아나는 계약서를 다시 흔들었다.

“처음에 고른 조건이 바뀌었으면 다시 고르게 해야지.”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반발했다.

일부 조합원도 피아나가 항로를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까까몰리는 운송으로 먹고사는 나라였다.

모든 위험을 이유로 항로를 닫으면 교역 자체가 멈출 수 있었다.

피아나는 항로를 닫자는 것이 아니라고 반복했다.

“위험하면 못 간다는 게 아니야.”

“그럼 뭡니까?”

“위험한 걸 알고 가야 된다고.”

“결국 갈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응.”

피아나는 웃었다.

“네 목숨이니까 네가 고르는 거지.”

그러다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근데 조합이 아는 걸 숨겨놓고 네가 골랐다고 하면 안 돼.”

그 선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피아나는 점점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

사람을 잘 사귀었다.

섬마다 아는 사람이 생겼다.

선원 이름을 잘 기억했다.

비행마수에게도 하나씩 별명을 붙였다.

성격이 사나운 비행마수는 ‘왕성질’.

밥을 너무 많이 먹는 녀석은 ‘창고도둑’.

착륙할 때마다 꼭 한쪽으로 기우는 녀석은 ‘삐딱이’.

조련사가 항의했다.

“정식 이름이 있습니다.”

“알아.”

“그런데 왜 매번 이상한 이름으로 부릅니까?”

피아나가 삐딱이의 목을 쓰다듬었다.

“얘는 이게 더 어울려.”

비행마수가 낮게 울었다.

“봐. 좋아하잖아.”

“싫어서 그러는 겁니다.”

“그건 네 해석이고.”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와도 금방 친해졌다.

하지만 안전문제만 나오면 웃으면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조합장이 된 뒤에는 출항을 직접 멈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은 대형 상단이 급한 화물을 실어달라고 요청했다.

기류는 나쁘지 않았다.

비행선도 정상이었다.

그런데 비행마수 한 마리가 출항 전부터 이상하게 날개를 떨었다.

조련사는 피로 때문이라며 운항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상단 대표도 출항을 재촉했다.

피아나는 비행마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한참 봤다.

그리고 말했다.

“안 가.”

상단 대표가 소리쳤다.

“계약은 이미 체결했습니다!”

“응.”

“그럼 이행하십시오!”

피아나는 계약서를 펼쳤다.

“7조 2항.”

상대가 입을 다물었다.

피아나가 빠르게 읽었다.

“비행마수 건강상태가 운항 전 검사와 달라질 경우 선장·조련사·승무원 중 한 명이라도 안전상 이의를 제기하면 재검사 전까지 출항 중단.”

그리고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내가 이의.”

“조합장님은 승무원이 아니시잖습니까!”

“맞네.”

피아나는 옆의 선원에게 물었다.

“너 불안하지?”

선원이 난처하게 웃었다.

“조금...”

피아나가 손뼉을 쳤다.

“좋아. 이제 승무원 이의.”

상단 대표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결국 검사를 다시 했다.

비행마수의 날개 관절에서 작은 염증이 발견되었다.

출항은 하루 미뤄졌다.

피아나는 그날 하루 종일 자랑했다.


하지만 피아나는 위험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늘은 위험했다.

바람은 변했다.

기계는 부서졌다.

비행마수는 살아 있는 생명이라 언제든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완전히 안전한 항로만 허용한다면 까까몰리의 많은 섬은 서로 단절될 것이다.

폭풍이 잦은 계절에는 약도 전달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피아나는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 자체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그 선택이 정말 그 사람의 선택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무슨 위험이 있는지 안다.

대안이 무엇인지 안다.

받게 될 보상이 무엇인지 안다.

거부했을 때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도 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안 뒤에도 하겠다고 말한다.

그 정도라면 피아나는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그 믿음을 흔든 사람은 젊은 하플링 선원이었다.

이름은 토빈이었다.

작은 화물선에서 와이어 관리를 맡았다.

손이 빨랐다.

성격도 밝았다.

피아나는 그를 꽤 좋아했다.

어느 날 위험도가 높은 항로 운항 신청이 들어왔다.

평소보다 임금이 두 배 가까이 높은 계약이었다.

피아나는 규정대로 승무원들에게 직접 설명했다.

“지금부터 중요한 거.”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여기서 돌풍 가능성 높아.”

“비행마수 피로도도 평소보다 빨리 올라갈 수 있고.”

“우회로 있어. 대신 하루 반 더 걸려.”

“이쪽 가면 위험수당 붙어.”

선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아나는 하나씩 확인했다.

“모르면 물어.”

질문도 받았다.

사고기록도 보여줬다.

마지막에는 분명히 말했다.

“안 간다고 해도 다음 계약에서 불이익 없어.”

“지금 철회해도 돼.”

토빈은 서명했다.

피아나는 만족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을 알려줬다.

진짜 동의라고 생각했다.


출항 전날 피아나는 우연히 토빈이 돈을 빌리는 모습을 보았다.

친한 선원에게 작은 주머니를 받아 들고 있었다.

피아나가 물었다.

“뭐 해?”

토빈이 놀랐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돈이잖아.”

“예.”

“왜 빌려?”

토빈은 한참 머뭇거렸다.

집세가 밀렸다고 했다.

어머니가 병이 났다.

약값도 필요했다.

지난달에 동생이 일하던 비행선이 정비에 들어가면서 집안 수입도 줄었다.

그래서 위험항로 수당이 필요했다.

피아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위험수당 아니었으면 안 갔어?”

토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겠죠.”

“위험한 거 알지?”

“조합장님이 세 번 설명하셨잖습니까.”

“철회 가능한 것도 알고.”

“예.”

“그럼 왜 안 해?”

토빈이 말했다.

“철회하면 약값은 누가 냅니까?”

피아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항해는 무사히 끝났다.

누구도 죽지 않았다.

사고도 없었다.

토빈은 위험수당을 받았다.

어머니의 약을 샀다.

계약만 보면 완벽했다.

모든 위험이 공개되었다.

대체항로도 알려줬다.

철회권도 있었다.

강제로 서명시키지도 않았다.

그런데 피아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토빈에게 정말 선택지가 있었던가.

문서상으로는 있었다.

위험항로를 거절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는 거절하면 어머니의 약을 사지 못했다.

그것을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피아나는 처음으로 자기 제도의 한계를 보았다.

정보가 없으면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정보만 있으면 자유로운 선택이 되는가.

그건 확실하지 않았다.


피아나는 토빈을 다시 불렀다.

“너 그때 계약 후회해?”

토빈이 웃었다.

“안 죽었는데요.”

“죽었으면?”

“후회할 시간도 없겠죠.”

“진지하게.”

피아나가 드물게 웃지 않았다.

토빈도 표정을 고쳤다.

“제가 선택했습니다.”

피아나가 물었다.

“진짜?”

“예.”

“돈 필요했잖아.”

“그래서 선택한 겁니다.”

“안 필요했으면 안 갔을 거고.”

“그것도 맞습니다.”

피아나는 답답한 얼굴을 했다.

“그럼 그게 자유로운 거야?”

토빈은 오히려 웃었다.

“조합장님.”

“왜.”

“배고프면 밥 먹는 것도 자유로운 선택 아닙니까?”

피아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토빈이 덧붙였다.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선택하는 일이 있습니까?”

그 질문은 그녀가 기대한 것보다 어려웠다.


피아나는 그 뒤 위험계약에 관한 규정을 또 손봤다.

위험수당을 너무 낮게 책정하지 못하도록 했다.

같은 사람이 고위험 항로를 연속해서 타는 횟수도 제한했다.

생활고 때문에 반복적으로 위험계약을 선택하는 선원에게는 조합의 긴급대출이나 생활지원 제도를 연결했다.

부상자가 생기면 개인의 선택이었다는 이유로 보상에서 제외하지 못하도록 했다.

비행마수의 손실 역시 단순 장비 손실처럼 처리하지 못하게 했다.

휴식시간을 늘렸다.

과로 운항을 금지했다.

조련사 하나가 말했다.

“조합장님 규정집이 해마다 두꺼워집니다.”

피아나가 활짝 웃었다.

“좋지?”

“안 좋습니다.”

“왜?”

“들고 다니기 무겁습니다.”

피아나가 잠시 생각했다.

“그럼 작은 글씨로 인쇄할까?”

“읽기 힘들어집니다.”

“그것도 안 되네.”

다음 판에는 두 권으로 나뉘었다.

선원들은 더 싫어했다.


하지만 피아나는 지원제도를 만들어놓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조합이 모든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까까몰리에는 언제나 급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

빚.

병.

가족.

망한 장사.

배상금.

다른 선택이 아무리 존재해도 너무 느리거나 너무 적으면,
사람은 결국 가장 위험하면서 가장 많은 돈을 주는 길을 택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막아야 할까.

피아나는 그것도 쉽게 하지 못했다.

“위험하니까 넌 못 가.”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의 선택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빼앗는 셈이 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피아나 자신은 위험을 감수하는 항해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런 길을 좋아했다.

누군가는 높은 보수를 위해 기꺼이 탔다.

누군가는 위험한 항로를 개척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들까지 가난한 사람과 같은 이유로 막을 수는 없었다.


한 회의에서 이 문제가 크게 터졌다.

젊은 조합원이 제안했다.

“고위험 항로는 일정 재산이나 비상저축이 있는 선원만 계약할 수 있게 하면 어떻습니까?”

피아나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안 돼.”

“생활고 때문에 위험계약을 받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하면 위험수당도 못 벌게 해?”

“그렇지 않으면 경제적으로 강요된 선택이 됩니다.”

피아나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논리는 이해했다.

자기가 고민하던 문제였다.

그래도 이상했다.

“돈 없으면 네 선택은 진짜 선택 아니니까 우리가 대신 결정해줄게.”

피아나는 천천히 그 문장을 반복했다.

“그거 되게 이상하지 않아?”

회의가 조용해졌다.

“가난해서 선택지가 좁은 건 문제야.”

“근데 그걸 해결한다고 남은 선택까지 우리가 빼앗으면?”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피아나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것은 금지가 아니라 선택지를 늘리는 쪽이었다.

고위험 항로를 거부해도 일정 기간 기본근무를 보장한다.

긴급생활자금을 무이자 또는 낮은 비용으로 빌릴 수 있게 한다.

부양가족이 있는 선원의 위험계약을 특별관리한다.

같은 사람이 반복적으로 고위험 운항을 신청하면 먼저 이유를 확인한다.

원한다면 그래도 탈 수 있다.

다만 ‘돈이 없어서 이것밖에 없다’는 상황 자체를 줄이려고 한다.

피아나는 그것이 완벽한 해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합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도움을 받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빚을 지는 것보다 위험을 택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가족에게 생활고를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다.

피아나는 점점 더 자주 묻는다.

“그래서 넌 왜 이 계약 하려고 해?”

그 질문은 계약서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


피아나는 계약을 설명할 때 아주 귀찮은 사람이 되었다.

“이 항로 위험도 읽었지?”

“응.”

“우회로 있는 것도?”

“응.”

“운항 철회 가능한 거?”

“응.”

“철회하면 임금 어떻게 되는지?”

“기본급만.”

“비행마수 교대기준?”

“피아나.”

“왜.”

“언제 끝나?”

“네가 다 이해하면.”

“나 항해보다 계약 설명 듣다가 늙겠다.”

피아나는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나 봐.”

상대가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바라봤다.

“안 늙어 보여.”

“그건 하플링이라 그래!”

잠깐 투덜거린 뒤 다시 계약서를 펼친다.

“자, 11조부터.”

상대가 신음한다.


그녀는 선원뿐 아니라 비행마수도 계약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비행마수는 문서에 서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더 신경 써야 한다고 본다.

날개가 상한 마수를 억지로 출항시키는 것을 싫어한다.

먹이를 줄이면서 운항횟수를 늘리는 상단과는 크게 싸운 적도 있다.

상인이 말했다.

“짐승 하나 때문에 계약 전체를 취소하겠다는 겁니까?”

피아나의 미소가 사라졌다.

“짐승 하나?”

“비행마수 말입니다.”

“네 화물은 날개 있어?”

“없습니다.”

“그럼 얘 없으면 못 날지?”

“그건 그렇지만...”

피아나는 아픈 비행마수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럼 네가 올라타서 날아.”

계약은 취소되었다.

그날 이후 그 상인은 피아나와 거래할 때 비행마수 관리기록부터 준비해왔다.


피아나가 전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다.

싸움은 너무 많은 선택지를 너무 빨리 없앤다.

칼이 뽑히면 협상의 가능성이 줄어든다.

한 사람이 죽으면 철회할 수 없다.

그래서 가능하면 먼저 말을 건다.

공중에서 정체불명의 비행선과 마주쳐도 바로 쏘지 않는다.

신호탄을 쏜다.

정지 신호를 보낸다.

항로를 비키라고 경고한다.

그래도 공격해오면 그때 움직인다.

소형 석궁으로 사람보다 와이어를 노린다.

돛의 연결부를 끊는다.

추락시키더라도 완전히 자유낙하하지 않도록 보조줄을 걸려고 한다.

비행마수가 공격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면 기수를 떨어뜨리거나 고삐를 끊어 이탈시키려 한다.

전투력이 강한 편은 아니다.

본인도 잘 안다.

“싸움은 잘하는 놈한테 시켜.”

누군가 물었다.

“그러면 조합장님은요?”

피아나가 신호탄을 흔든다.

“난 싸움 안 하게 만드는 거 할래.”


그렇다고 피아나가 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높은 곳은 좋아하지만 추락은 무섭다.

특히 갑자기 기류가 꺾이는 순간에는 몸이 굳을 때가 있다.

부모가 죽은 사고와 비슷한 소리가 난다.

와이어가 팽팽하게 떨리는 소리.

금속이 한번 크게 튕기는 소리.

그 소리가 들리면 웃음이 사라진다.

손부터 움직인다.

고정점을 확인한다.

선원 숫자를 센다.

비행마수를 본다.

그런 뒤 모든 것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해야 다시 웃는다.

사람들은 피아나가 안전규칙에 지나치게 집착한다고 말한다.

맞다.

그녀도 인정한다.

다만 자신이 두려워서 모든 사람에게 위험을 금지하려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것 역시 다른 방식으로 자유를 빼앗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사고가 난 항로는 지금도 존재한다.

완전히 폐쇄되지는 않았다.

기류가 안정된 계절에는 사용된다.

다만 위험등급이 크게 올라갔다.

실시간 기류측정이 의무화되었다.

비행마수 두 마리 이상을 교대로 운용해야 한다.

와이어도 특정 규격 이상의 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계약서 첫 장에 굵은 글씨로 적힌다.

‘본 항로는 계절성 급강하·측면돌풍 발생 가능성이 높음.’

그 아래에는 최근 사고기록이 붙는다.

우회항로도 함께 표시된다.

피아나는 가끔 그 문서를 직접 확인한다.

사람들이 묻는다.

“조합장님 부모님 일 때문에 아직도 그렇게 신경 쓰십니까?”

피아나는 대답한다.

“응.”

숨기지 않는다.

그러다 덧붙인다.

“근데 부모님 일 아니었어도 해야 되는 거잖아.”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번은 젊은 선원이 그 항로에 자원했다.

피아나는 평소처럼 전부 설명했다.

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피아나가 물었다.

“왜 가려고 해?”

선원이 웃었다.

“가보고 싶어서요.”

“돈 때문 아니고?”

“돈도 좋죠.”

“빚 있어?”

“없습니다.”

“가족 병원비?”

“없습니다.”

“누가 강요했어?”

“아뇨.”

“정말?”

선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합장님.”

“왜.”

“저 하늘 좋아합니다.”

피아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자신도 어릴 때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래.”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럼 가.”

선원이 서명했다.

피아나는 막지 않았다.

위험을 알고도 선택하는 사람의 자유 역시 지켜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토빈 같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다시 흔들린다.

사람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계약을 이해했다.

철회할 수도 있다.

그런데 철회하면 가족이 굶는다.

그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피아나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어떤 날에는 말한다.

“선택지가 하나면 선택 아니지.”

다른 날에는 생각한다.

두 번째 선택지를 국가나 조합이 대신 만들어줄 수 없는 상황도 있다.

그렇다면 선택 자체를 금지해야 하는가.

그 사람이 감수하겠다는 위험까지 지도자가 빼앗아도 되는가.

피아나는 그런 결정을 내릴 권한을 지금 가지고 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과거에는 조합이 부모에게서 선택할 정보를 빼앗았다.

자신은 선원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선택 그 자체를 빼앗고 싶지 않다.


그래서 피아나는 요즘 ‘동의’라는 말을 쉽게 쓰지 않는다.

누군가 계약서를 내밀며 말한다.

“전원 동의했습니다.”

피아나는 바로 묻는다.

“어떻게 확인했어?”

“서명받았습니다.”

“그건 서명.”

“예?”

“동의랑 서명은 달라.”

상대가 한숨을 쉰다.

피아나는 손가락으로 계약서 아래를 두드린다.

“제대로 설명했어?”

“예.”

“위험도?”

“예.”

“대안?”

“예.”

“거절했을 때 불이익?”

“없습니다.”

“진짜 없어?”

“없습니다.”

“사실상 강요되는 사정 있는지도 봤어?”

상대가 멈춘다.

피아나가 씩 웃는다.

“자,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익숙한 말을 한다.

“서명했다고 동의한 게 아니야.”

계약서를 활짝 펼친다.

“제대로 설명했는지부터 보자!”


천익항로조합장이 된 지금도 피아나는 항구를 자주 돌아다닌다.

집무실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한다.

새로 들어온 비행선을 구경한다.

선원에게 말을 건다.

비행마수의 먹이를 몰래 한 조각 더 준다.

조련사에게 들키면 도망간다.

“조합장님!”

“한 개뿐이야!”

“식단표가 있습니다!”

“얘가 배고프대!”

“말 못 합니다!”

“눈으로 말했어!”

그런 식으로 웃고 다닌다.

처음 보는 사람은 그녀를 조합장이라고 잘 믿지 않는다.

어린아이 같은 얼굴.

널널한 여행복.

큰 주머니.

이마 위의 비행고글.

그러다 계약 문제가 나오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피아나는 상대가 귀찮아할 정도로 끝까지 묻는다.

누가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무엇을 모르고 있었는지.

누가 설명했는지.

거절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거절하면 실제로 무엇을 잃게 되었는지.

그 마지막 질문은 규정집에 완벽하게 담기지 않는다.

그래서 더 자주 직접 묻는다.


피아나는 부모의 계약서를 아직 보관하고 있다.

낡았다.

모서리가 닳았다.

두 사람의 서명은 여전히 선명하다.

처음에는 그 서명이 싫었다.

조합이 모든 책임을 떠넘길 때마다 그것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본인이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본다.

부모가 잘못해서 죽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선택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선택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다 주지 않았던 시대의 기록이다.

서명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서명 앞에 무엇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설명.

이해.

대안.

철회할 가능성.

그리고 가능하다면 강요되지 않은 조건.

피아나는 그 마지막 항목 앞에서 늘 멈춘다.

‘가능하다면.’

세상을 살다 보니 그것이 가장 어려운 말이었다.


부모의 유품 가운데 작은 방울 하나도 남아 있다.

두 개를 넣어줬지만 하나만 발견되었다.

추락한 비행선 잔해에서 나온 것이었다.

찌그러져서 소리가 맑지 않다.

피아나는 그것을 집무실 서랍에 두고 있다.

가끔 꺼내 흔든다.

딸랑거리는 대신 둔한 금속음이 난다.

그 소리를 들으면 출항 전날 부모와 했던 장난이 떠오른다.

그리고 아버지가 했던 말도.

‘하늘에서 제일 위험한 말은 아마 괜찮겠지다.’

피아나는 지금도 그 말을 좋아한다.

다만 하나를 더 붙이고 싶어 한다.

‘네가 골랐잖아’라는 말도 위험할 수 있다고.

상대가 무엇을 알고 골랐는지 확인하지 않았다면.


피아나는 자유를 좋아한다.

까까몰리도 그래서 좋아한다.

누구든 배를 타고 떠날 수 있다.

상인이 될 수 있다.

선원이 될 수 있다.

자기 항로를 개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유라는 말이 책임을 떠넘기는 편리한 문장이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네가 선택했다.’

그 말만 하면 조합은 책임이 없는가.

‘싫으면 안 하면 됐다.’

그 말을 하기 전에 정말 안 할 수 있었는지는 봤는가.

피아나는 아직 그 질문의 끝을 찾지 못했다.

모든 위험을 공개해도 가난은 남는다.

모든 계약을 설명해도 절박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철회권이 있어도 철회했을 때 굶는다면 사람은 서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합이 해야 할 일은 어디까지인가.

정보를 주는 것까지인가.

다른 선택지를 만드는 것까지인가.

아니면 아예 선택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순간도 있는가.

피아나는 아직 모른다.


그녀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하나다.

모른 채 선택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사소해 보이는 위험이라도 선택을 바꿀 정도라면 알려준다.

새로운 정보가 생기면 다시 묻는다.

마음이 바뀌었다고 비겁하다고 하지 않는다.

출항 직전에 돌아서도 된다.

서명한 뒤 철회해도 된다.

그 때문에 계약이 깨지고 상단이 화를 내더라도,
사람의 목숨과 비행마수의 생명이 계약문장보다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 정말 모든 것을 알고도 위험한 하늘을 택한다면,
그 결정도 함부로 빼앗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자유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다만 요즘은 그 사람의 주머니가 비어 있는지도 한번 본다.

그 사람에게 정말 다른 길이 있었는지도.


오늘도 몰리코의 항구에서는 수십 척의 비행선이 출항을 준비한다.

선원들이 와이어를 확인한다.

비행마수가 날개를 펼친다.

상인들이 빨리 출발하라고 재촉한다.

피아나는 항로지도를 품에 끼고 그 사이를 돌아다닌다.

“4번선! 오늘 북서기류 바뀐 거 확인했어?”

“했습니다!”

“재동의 받았어?”

“예!”

“진짜 설명하고?”

“예!”

“몇 시에?”

“조합장님!”

피아나는 깔깔 웃는다.

다른 비행선으로 달려간다.

“7번선! 삐딱이 오늘 쉬는 날이야! 태우지 마!”

조련사가 소리친다.

“정식 이름으로 좀 부르십시오!”

“삐딱이가 더 귀여운데!”

그녀는 여전히 밝다.

사람을 좋아한다.

하늘도 좋아한다.

위험한 항로를 개척하고 돌아온 선원의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보다 신나 한다.

위험 그 자체를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택할 자유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 자유를 가장 엄격하게 의심한다.


출항 직전 한 젊은 선원이 계약서를 들고 온다.

“조합장님, 서명 끝났습니다.”

피아나는 종이를 받는다.

첫 장을 본다.

마지막 장을 본다.

그리고 선원을 본다.

“위험도 설명 들었어?”

“네.”

“우회항로?”

“네.”

“철회권?”

“네.”

“오늘 안 가도 다음 계약 불이익 없는 거?”

“네.”

피아나는 잠시 멈춘다.

예전에는 여기서 끝냈을 것이다.

지금은 하나를 더 묻는다.

“근데 왜 이 항로 골랐어?”

선원이 의아한 얼굴을 한다.

피아나는 웃는다.

“그냥 궁금해서.”

대답이 무엇이든 먼저 듣는다.

돈 때문일 수도 있다.

모험 때문일 수도 있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이유를 들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계약서의 서명 하나로 사람 전체를 이해했다고 착각하지는 않게 된다.

피아나가 가장 두려워하는 실수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선택했다는 책임만 주는 것.

그래서 그녀는 오늘도 계약서를 다시 펼친다.

밝게 웃으면서도 한 줄도 대충 넘기지 않는다.

“자, 다시 확인하자.”

상대가 한숨을 쉰다.

피아나가 커다란 눈을 반짝인다.

“왜? 중요한 거잖아.”

그리고 부모의 사고 이후 단 한 번도 가볍게 말한 적 없는 문장을 꺼낸다.

“서명했다고 동의한 게 아니야.”

계약서와 항로지도를 나란히 펼친다.

“제대로 설명했는지부터 보자!”

피아나 슬립굿에게 자유란 아무 규칙도 없는 하늘이 아니다.

자기가 어디로 날아가는지 알고,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돌아설 수 있다는 것도 안 채로 스스로 날개를 펴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한 가지를 배우는 중이다.

사람이 정말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때로는 위험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MST
미스트랄
까까몰리천익항로조합-기류관측관
“후후, 안전을 위해 모든 바람을 길들이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바람이 갈 곳도 없어져.”
🩸 HP70
💪 공격력1
🧙 마법력80
✨ 신비력1
🛡️ 방어력1
🔗 항마력99
😖 신비저항1
🏃 회피력90
과거 보기
미스트랄에게는 태어난 마을이 없다.

부모도 없다.

어린 시절 살았던 집도 없다.

정령에게 그런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 기억하는 것은 바람이었다.

바람고리군도의 높은 절벽 사이를 빠져나가던 바람.

햇빛을 받아 따뜻해진 바다가 하늘로 밀어 올리던 상승기류.

비구름보다 먼저 섬에 도착하던 차가운 바람.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흘러가던 자기 자신.

그때의 그녀에게는 이름도 없었다.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바람은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불고,
흩어지고,
다시 어딘가에서 모인다.

어린 정령에게 세상이란 그런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까까몰리의 섬 사이로 비행선이 지나갔다.

비행마수가 날개를 펼쳤다.

선원들은 돛을 조정하며 바람의 방향을 읽었다.

가끔 누군가는 그녀를 보았다.

구름 옆에서 하늘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떠다니는 작은 형체.

선원이 손을 흔들면 그녀도 손을 흔들었다.

그게 전부였다.

어느 날 한 비행선의 선원이 소리쳤다.

“바람 아가씨! 오늘 순풍 좀 줘!”

정령은 그 말을 듣고 한참 웃었다.

그리고 일부러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싫어!”

선원들이 야유했다.

그녀는 더 크게 웃었다.

그때부터 가끔 사람들과 말을 섞기 시작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했다.

언제 돌아오느냐고 하면 그것도 모른다고 했다.

왜 계속 떠도느냐는 질문에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바람인데 왜 멈춰?”

그녀에게 자유는 어려운 철학이 아니었다.

그냥 자신의 존재방식이었다.


그녀가 처음 사람을 살린 날도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폭풍이 지나간 다음 날이었다.

구름 아래에는 아직 불안정한 바람이 남아 있었다.

미스트랄은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뒤집히는 기류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재미있는 날이었다.

갑자기 올라가는 바람.

곧바로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

서로 다른 방향에서 부딪쳐 소용돌이를 만드는 공기.

정령에게는 놀이와 비슷했다.

그러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누구 없어요!”

처음에는 갈매기 소리인 줄 알았다.

다시 들렸다.

“살려줘!”

미스트랄은 소리가 오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작은 화물선 하나가 바위섬의 절벽 아래에 걸려 있었다.

한쪽 날개가 부서져 있었다.

비행마수 한 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선원들은 선체에 밧줄을 걸고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 항로는 멀었다.

폭풍 직후라 지나가는 배도 거의 없었다.

한 선원이 미스트랄을 보았다.

“정령?”

미스트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응.”

“말 알아들어?”

“응.”

선원의 얼굴이 밝아졌다.

“사람 좀 불러줘!”

미스트랄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왜?”

선원이 잠시 말을 잃었다.

미스트랄에게는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배가 부서졌다.

그러면 다른 곳으로 가면 되는 것 아닌가.

바람은 그렇게 했다.

한 길이 막히면 다른 틈으로 흘렀다.

선원은 다급하게 말했다.

“우린 너처럼 못 날아!”

미스트랄은 그제야 아래를 보았다.

사람들에게는 날개가 없었다.

배가 없으면 갈 곳도 없었다.

절벽 아래의 파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알았어.”


미스트랄은 사람을 업고 날 수 없었다.

정령이라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몸은 바람에 가까웠고,
사람 하나를 붙잡고 멀리 운반하기에는 너무 가벼웠다.

그래서 목소리를 가져갔다.

“사람 좀 불러줘!”

선원의 외침을 기억했다.

공기를 모았다.

목소리가 흩어지지 않도록 바람을 가늘게 묶었다.

그리고 멀리 항로를 따라 불어가던 기류에 그것을 실었다.

처음에는 실패했다.

소리가 구름 속에서 흩어졌다.

두 번째에는 너무 높이 올라갔다.

세 번째에는 바다 쪽으로 빠졌다.

미스트랄은 짜증을 냈다.

“아, 가만히 좀 있어!”

바람에게 화를 냈다.

자기도 바람이면서.

네 번째에는 성공했다.

멀리 지나가던 순찰선 갑판 위에서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 좀 불러줘!”

순찰선이 방향을 바꾸었다.

조난자들은 살아남았다.

미스트랄은 사람들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까지 좋아하는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그것이 처음이었다.

자신이 바람을 움직인 결과를 기다려본 것은.


며칠 뒤 이상한 하플링이 그녀를 찾아왔다.

피아나 슬립굿이었다.

당시는 아직 지금처럼 조합 전체를 움직이는 위치는 아니었지만,
사고기록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으로 이미 유명했다.

피아나는 절벽 위에 떠 있는 미스트랄을 발견하자마자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지?”

미스트랄도 피아나를 가리켰다.

“너 뭐야?”

“내가 먼저 물었잖아.”

“나도 물었는데?”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피아나가 먼저 웃었다.

미스트랄도 따라 웃었다.

피아나는 사고기록을 펼쳤다.

“이 목소리 보낸 거 너야?”

“응.”

“어떻게 했어?”

미스트랄이 손을 휘저었다.

“바람으로.”

“그건 나도 알아!”

“알면서 왜 물어?”

피아나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한참 웃었다.

그날 두 사람은 해가 질 때까지 이야기했다.


피아나가 마지막에 물었다.

“그래서 이름이 뭐야?”

미스트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없어?”

“응.”

“불편하지 않아?”

“왜?”

“불러야 되잖아.”

미스트랄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바람 불러서 뭐 하게?”

피아나는 잠깐 고민했다.

“다시 만나려고?”

미스트랄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그녀는 이전까지 이름을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떠나면 끝이었다.

어제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날 이유도 없었다.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피아나와는 조금 더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피아나는 항해용어 몇 개를 늘어놓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미스트랄이었다.

오래된 항해사들이 특정한 바람을 부르던 말.

피아나가 말했다.

“이건 어때?”

정령은 몇 번 소리 내어 말했다.

“미스트랄.”

“응.”

“미스트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곧 피아나를 노려봤다.

“네가 지어주는 건 아니야.”

피아나가 눈을 깜빡였다.

“응?”

“내가 고른 거야.”

피아나가 씩 웃었다.

“알았어.”

그날부터 그녀는 미스트랄이 되었다.

누군가가 준 이름이 아니라,
자기가 듣고 마음에 들어 고른 이름이었다.

그 차이를 미스트랄은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천익항로조합에 들어가는 과정은 조금 더 복잡했다.

피아나는 미스트랄에게 기류관측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미스트랄은 바로 말했다.

“싫어.”

“왜?”

“매일 같은 데 있어야 하잖아.”

“매일 다른 데 가는데?”

미스트랄이 멈췄다.

“정말?”

“항로가 몇 개인데.”

“섬도 돌아다녀?”

“응.”

“폭풍도 봐?”

“그건 안 보는 게 좋은데.”

“볼 수는 있지?”

피아나는 한숨을 쉬었다.

며칠 뒤 미스트랄은 조합원이 되어 있었다.

계약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처음에는 서명할 손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았다.

기분이 들뜨면 손가락 끝이 바람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피아나는 계약서를 붙잡고 말했다.

“집중해.”

“하고 있어.”

“손 없어졌잖아.”

“다시 만들면 되지.”

“잉크 마르기 전에 만들어!”

미스트랄은 깔깔 웃었다.

그렇게 첫 계약이 끝났다.


기류관측관으로서 미스트랄은 놀라울 정도로 유능했다.

사람들이 풍향계와 마력계로 숫자를 읽을 때,
그녀는 그냥 하늘을 보았다.

조금 날아올랐다.

머리카락 끝이 어느 방향으로 흩어지는지 느꼈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 오후에는 서쪽 길 막아.”

관리자가 물었다.

“근거는?”

미스트랄이 하늘을 가리켰다.

“바람이 이상해.”

“수치로 말씀해주십시오.”

“이상한 걸 어떻게 숫자로 말해?”

“그래야 보고서에 씁니다.”

미스트랄은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기록을 싫어했다.

바람은 계속 변하는데 사람들이 숫자를 적어놓고 그것을 진짜 바람처럼 다루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몇 번의 사고를 막고 나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자신이 없는 날에도 사람들이 그 기록을 보고 피할 수 있었다.

자신은 한 장소에 머무르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자신이 본 바람의 흔적은 남았다.

미스트랄은 조금씩 기록법을 배웠다.

정확하지는 않았다.

보고서에 가끔 이런 문장이 들어갔다.

‘오후 3시경 북서기류 성질 나쁨.’

피아나가 빨간 펜으로 고쳤다.

‘성질 나쁨이 뭐야!’

미스트랄은 그 아래 다시 썼다.

‘엄청 성질 나쁨.’

두 사람은 한동안 싸웠다.


조합은 미스트랄의 관측을 활용해 항로를 더 안전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사고가 줄었다.

위험한 돌풍이 반복되는 구간에는 마력중계기가 설치되었다.

바람을 분산시키는 장치도 놓였다.

특정 항로에서는 마법사가 정기적으로 기류를 안정시켰다.

미스트랄도 처음에는 좋아했다.

사람이 떨어지지 않았다.

비행마수가 다치지 않았다.

부서진 배를 찾으러 구조대가 나가는 횟수도 줄었다.

피아나가 통계를 보여주며 말했다.

“봐! 사고 줄었어!”

미스트랄은 자기가 한 일처럼 뿌듯해했다.

“내가 알려줬으니까!”

“그래, 그래.”

“더 칭찬해.”

“싫어.”

평화로운 시기였다.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처음 알아챈 것은 비 냄새였다.

미스트랄은 어느 섬을 지나가다 멈췄다.

분명 그 계절이면 남쪽 바다에서 습한 바람이 올라와야 했다.

그런데 흐름이 달랐다.

바람이 항로를 피해 돌아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계속 안정시킨 길을 중심으로 주변 기류 전체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작은 차이였다.

사람의 풍향계에는 정상 범위였다.

하지만 미스트랄에게는 이상했다.

그녀는 며칠 동안 주변을 돌아다녔다.

이듬해에도 왔다.

비가 조금 줄었다.

또 다음 계절에는 철새 떼가 예전 경로로 오지 않았다.

작은 바람정령 몇이 사라졌다.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미스트랄은 조합으로 돌아왔다.

“이거 멈춰.”

담당자가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바람 잡는 거.”

“기류안정화 시설 말입니까?”

“응.”

“왜요?”

미스트랄이 말했다.

“바람이 못 가잖아.”

상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항로의 바람을 안정시키는 장치입니다.”

“그러니까 못 가잖아.”

“사고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알아.”

“그러면 무엇이 문제죠?”

미스트랄은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바람은 흘러야 했다.

한쪽을 막으면 다른 쪽으로 간다.

한쪽을 억누르면 주변의 흐름이 달라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사망자 수.

파손된 비행선 수.

운항 중단 횟수.

그 숫자는 분명 줄었다.

미스트랄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피아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오래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지금 장치 없애면 어떻게 돼?”

“원래대로 불지.”

“사고는?”

“늘 수도 있고.”

“몇 명 죽어?”

미스트랄이 인상을 썼다.

“몰라.”

“정말 몰라?”

“바람이 사람 세면서 불어?”

피아나는 잠시 침묵했다.

미스트랄도 침묵했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자유’가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조합은 즉시 시설을 철거하지 않았다.

대신 장기간 조사를 시작했다.

미스트랄은 화가 났다.

사람들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바람을 붙잡고 있었다.

“왜 안 멈춰?”

피아나가 말했다.

“진짜 문제인지 봐야 돼.”

“내가 봤다니까.”

“알아.”

“나 바람정령이야.”

“그것도 알아.”

“그럼 왜 안 믿어?”

피아나는 한숨을 쉬었다.

“안 믿는 게 아니라, 멈췄을 때 생길 것도 봐야 돼.”

그 문장이 미스트랄을 화나게 했다.

“사람들은 꼭 그래.”

“뭐가?”

“자기들 위험하면 다 묶어.”

피아나의 표정도 굳었다.

“사람 죽는 일이니까.”

“바람도 죽여.”

“바람은 안 죽잖아.”

미스트랄이 처음으로 피아나에게 정말 화를 냈다.

“사라지는 거랑 뭐가 달라!”

회의실의 종이가 전부 날아갔다.

그날 둘은 끝까지 결론을 내지 못했다.


조사 결과 미스트랄의 관측은 맞았다.

기류안정화 시설 하나가 세상을 망가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항로에서 장기간 같은 방향의 바람을 억제하면서 주변 순환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시기가 달라졌다.

일부 철새의 경로가 이동했다.

바람정령들이 모이던 장소도 변했다.

조합은 시설 운용방식을 바꾸었다.

항상 켜두지 않았다.

위험도가 높은 시간대에만 작동시켰다.

주변 기류를 정기적으로 관측했다.

일정 기간마다 일부 항로를 자연 상태로 돌렸다.

미스트랄은 만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하지도 않았다.

처음으로 타협이라는 것을 배웠다.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그 뒤 한동안 미스트랄은 사람들을 자주 놀렸다.

“바람도 휴일 생겼네.”

피아나가 물었다.

“좋잖아?”

“누가 쉬게 해달랬어?”

“그럼 계속 일해.”

“싫어.”

“어쩌라는 거야!”

미스트랄은 웃었다.

겉으로는 예전과 비슷했다.

하지만 생각 하나가 생겼다.

안전을 위해 바람을 길들이는 것이 언제까지 허용되는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잠깐 바람을 바꾸는 것.

항로 하나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매일 바람을 눌러놓는 것.

섬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계절풍 자체를 돌리는 것.

그 셋은 같은 일인가.

다르다면 어디서부터 다른가.

미스트랄은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 그 질문이 훨씬 잔인한 형태로 돌아왔다.


몇 년 뒤,
바람고리군도 북부에 강한 폭풍이 접근했다.

기록상 예상보다 빠른 폭풍이었다.

두 항로의 비행선이 귀항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중 한 척에는 승객도 타고 있었다.

조합은 미스트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항로 열 수 있어?”

미스트랄은 하늘을 보았다.

가능했다.

정확히는,
바람을 없앨 수는 없었다.

한쪽으로 밀어낼 수는 있었다.

문제는 밀려난 바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북쪽으로 돌리면 작은 섬 하나가 폭풍의 가장자리에 들어갔다.

남쪽으로 돌리면 어선들이 모여 있는 해역의 파도가 높아질 수 있었다.

그대로 두면 비행선이 위험했다.

피아나가 물었다.

“할 수 있어?”

미스트랄은 처음으로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는 있어.”

“그럼 해줘.”

“다른 데로 가.”

“뭐가?”

“바람.”

피아나도 입을 다물었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비행선의 신호가 점점 약해졌다.

미스트랄은 계산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에 몇 명이 사는지.

어느 쪽 피해가 더 클지.

얼마나 많은 바람을 옮겨야 하는지.

그동안 그런 숫자는 다른 사람들이 결정했다.

자신은 바람만 보았다.

그날은 달랐다.

바람을 움직이는 손이 자기 것이었다.

“미스트랄.”

피아나가 불렀다.

평소 같으면 재촉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바람을 움직였다.

폭풍 중심부의 일부 기류를 위로 들어 올렸다.

옆에서 밀어오는 공기를 남쪽으로 흘렸다.

짧은 길 하나가 열렸다.

비행선 두 척은 그 틈을 따라 빠져나왔다.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미스트랄은 웃지 않았다.

남쪽을 보고 있었다.


그날 밤 남부 해역에 예상보다 큰 파도가 일었다.

작은 어선 몇 척이 파손되었다.

대부분 항구로 돌아왔다.

한 척은 돌아오지 못했다.

선원 세 명 가운데 두 명은 구조되었다.

한 명은 실종되었다.

미스트랄은 보고를 들은 뒤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말했다.

“당신 잘못은 아닙니다.”

폭풍이었다.

원래도 위험한 날이었다.

그 파도가 미스트랄 때문에 커졌는지 완벽하게 증명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 설명을 전부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바꿨어.”

누군가 다시 말했다.

“비행선 사람들을 살렸잖습니까.”

미스트랄이 물었다.

“그럼 하나는 괜찮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처음으로 미스트랄은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들의 고민을 이해했다.

한쪽을 살리기 위해 바람을 움직이면,
그 바람은 다른 어디엔가 도착한다.


며칠 뒤 실종된 선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미스트랄은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녀는 그날 혼자 사고가 난 해역으로 갔다.

바다는 평온했다.

바람도 평범했다.

자신이 움직였던 흐름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미스트랄은 그것이 싫었다.

사람은 죽었는데 바람에는 흔적이 없었다.

그녀가 소리쳤다.

“너희는 왜 아무렇지도 않아!”

대답은 없었다.

바람은 그냥 불었다.

예전의 미스트랄이라면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람은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의 그녀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자신은 그냥 바람인가.

아니면 자신이 움직인 바람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인가.

이름을 가진 뒤 처음 생긴 질문이었다.


피아나는 며칠 뒤 그녀를 찾아왔다.

“왜 숨어 있어?”

“안 숨어.”

“그럼 왜 조합 안 와?”

“가기 싫어서.”

피아나는 옆에 앉았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스트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움직였으면 비행선 사람들이 죽었을 수도 있어.”

“응.”

“움직였더니 다른 사람이 죽었어.”

“응.”

“그럼 어떻게 해야 돼?”

피아나가 말했다.

“몰라.”

미스트랄이 고개를 돌렸다.

“너 조합장이잖아.”

“조합장은 세상 정답 아는 사람이 아니야.”

“쓸모없네.”

“그러게.”

둘은 잠깐 웃었다.

그러다 미스트랄이 다시 물었다.

“다음에도 똑같은 일 생기면?”

피아나는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또 봐야지.”

“뭘?”

“전부.”

그 대답은 미스트랄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래 남았다.


그 후 미스트랄의 관측 방식은 달라졌다.

예전에는 항로의 바람만 보았다.

이제는 그 바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본다.

어디로 빠져나갈지도 본다.

항로 아래의 섬을 본다.

바다를 본다.

철새의 이동을 본다.

다른 정령이 머무는 곳도 확인한다.

사람들이 물었다.

“왜 거기까지 봅니까?”

미스트랄은 대답했다.

“바람은 거기까지 가니까.”

그녀는 여전히 안전을 위해 모든 바람을 고정하는 것을 싫어한다.

기류를 통제하면 그 비용이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반드시 묻는다.

하지만 자연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위험을 방치하지도 않는다.

자연적인 폭풍도 사람을 죽인다.

자연적인 기류도 비행마수를 절벽에 내던진다.

‘자연스러우니까 괜찮다’는 말이 죽은 사람에게 아무 위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전투에서도 비슷하다.

미스트랄은 상대를 베기보다 바람을 움직인다.

화살의 궤도를 밀어낸다.

투사체를 비튼다.

압축한 공기로 상대를 넘어뜨린다.

동료가 빠져나갈 길을 연다.

싸움이 길어지면 자신부터 높이 떠오르며 소리친다.

“여기 열렸어! 빨리 빠져!”

누군가 적을 끝까지 추격하려 하면 짜증을 낸다.

“길 생겼으면 나가면 되잖아!”

그러나 동료가 정말 죽을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순간에는 농담을 멈춘다.

바람이 무거워진다.

주변의 공기가 한 방향으로 압축된다.

미스트랄은 자신이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싫어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 역시 결과를 남긴다는 것을 이제 알고 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공격한다.

그리고 끝난 뒤에는 자신이 무엇을 움직였는지 다시 확인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갑자기 신중하고 무거운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여전히 제멋대로다.

회의 도중 창문으로 나간다.

누군가 물으면 대답한다.

“답답해서.”

“회의 중입니다!”

“바람은 회의 안 해.”

“당신은 조합원입니다!”

“그건 맞네.”

잠시 뒤 다시 창문으로 들어온다.

관측리본을 관리하는 사람에게는 매번 혼난다.

머리에 달린 리본까지 관측용 리본과 섞어놓기 때문이다.

풍향계 모양 귀걸이가 실제 관측장비라고 우긴 적도 있다.

피아나가 말했다.

“그거 그냥 귀걸이잖아.”

“방향 따라 움직여.”

“네 머리가 움직이니까!”

미스트랄은 한참 웃었다.

그런 사람이지만 위험한 바람을 느끼는 순간에는 바로 달라진다.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진다.

떠들던 입도 멈춘다.

머리카락 끝에서 흘러나오던 옅은 안개가 한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다.

그리고 짧게 말한다.

“내려.”

누군가 이유를 물으면 더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

그때만큼은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다.


미스트랄은 정령이라는 이유로 가끔 이상한 기대를 받는다.

바람의 뜻을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폭풍이 왜 생겼는지 물어본다.

이번 계절풍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묻는다.

바람에게 의지가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미스트랄은 대부분 코웃음을 친다.

“바람이 무슨 생각을 해.”

상대가 그녀를 바라본다.

“당신도 바람정령 아닙니까?”

“나는 생각하지.”

“그 차이가 뭡니까?”

미스트랄은 잠깐 생각한다.

“이름?”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녀에게는 중요한 차이다.

바람이 모여 형태를 만들었다.

기억이 생겼다.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자기가 한 일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택한 결과를 후회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단순한 바람과 미스트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생겼다.


그래서 그녀는 이름을 좋아한다.

피아나가 장난으로 별명을 붙이면 바로 반박한다.

“오늘부터 안개머리.”

“싫어.”

“왜? 귀여운데.”

“내 이름 있어.”

“미스트랄.”

“응.”

“내가 추천해준 거잖아.”

미스트랄이 바로 정정한다.

“내가 골랐어.”

83년을 살아도 그 부분만큼은 한 번도 양보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을 고른 것.

어디에 머물지를 고른 것.

천익항로조합에서 일하기로 고른 것.

언젠가 떠나고 싶으면 떠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들이 그녀에게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누구도 바람을 소유할 수 없다.

누구도 정령에게 머물라고 명령할 수 없다.

자기가 남아 있는 것은 남고 싶어서다.


하지만 요즘 미스트랄은 자유라는 말도 예전처럼 쉽게 쓰지 못할 때가 있다.

그녀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돈이 없어도 된다.

배도 필요 없다.

국경검문에 막힐 일도 거의 없다.

먹을 것도 많이 필요하지 않다.

폭풍 속에서도 사람보다 훨씬 오래 버틸 수 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누구든 원하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는 사람은 그냥 남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익항로조합에서 수십 년을 보내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배가 없어서 못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운임이 없었다.

가족이 있었다.

병든 사람이 있었다.

자기가 떠나면 무너지는 가게가 있었다.

위험한 항로밖에 선택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피아나가 그 문제를 붙잡고 고민하는 모습을 아주 오래 보았다.

미스트랄은 이제 가끔 생각한다.

자신이 말하는 자유는 날 수 있는 존재에게만 쉬운 말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자유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다만 예전처럼 단순하지 않을 뿐이다.

“바람은 자유지!”

누군가가 미스트랄에게 말한다.

“또 시작이네.”

그녀는 웃으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다.

머리끝이 옅은 안개처럼 흩어진다.

풍향계 귀걸이가 흔들린다.

“내가 어디로 갈지는 내가 정해!”

양팔을 활짝 펼친다.

“누구도 묶어놓을 수 없다는 말이야, 후후!”

그러다 잠시 하늘을 본다.

예전이라면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지금은 가끔 한마디를 더한다.

“대신.”

상대가 본다.

미스트랄의 목소리가 조금 차분해진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서 뭐가 날아갔는지는 봐야겠지.”


현재도 그녀는 매일 항로를 돌아다닌다.

정해진 출근시간을 자주 어긴다.

대신 누구보다 먼저 폭풍을 발견한다.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고 며칠 사라졌다가 대륙 반대편 기류자료를 들고 돌아오기도 한다.

피아나는 화를 낸다.

“연락 좀 해!”

미스트랄은 당당하게 대답한다.

“바빴어.”

“뭘 했는데?”

“바람 따라갔어.”

“그게 네 일이기는 한데!”

“그럼 잘했네.”

피아나는 머리를 감싸쥔다.

미스트랄은 웃는다.

둘은 그렇게 수십 년을 알고 지냈다.

피아나는 사람이 바람을 이용하면서도 선택권을 잃지 않는 방법을 고민한다.

미스트랄은 사람이 안전해지면서도 바람이 흐를 자리를 잃지 않는 방법을 고민한다.

둘 다 아직 답은 없다.

그래서 자주 싸운다.

그리고 계속 같이 일한다.


미스트랄에게 가장 어려운 순간은 위험한 기류를 발견했을 때가 아니다.

그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경고한다.

항로를 닫는다.

필요하면 직접 날아가 사람을 빼낸다.

가장 어려운 것은 바람을 바꾸면 누군가는 살고,
그 바람이 다른 곳으로 가면 누군가는 위험해질 수 있을 때다.

그럴 때마다 오래전 폭풍을 떠올린다.

살아 돌아온 비행선.

남쪽 해역에서 돌아오지 못한 어선.

누구도 그녀에게 그 선택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누구도 옳았다고 확신해주지도 못했다.

미스트랄도 이제는 그런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본다.

어디서 바람을 가져오는지.

어디로 보내는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정말 그 결과까지 감당할 생각이 있는지.


바람은 여전히 자유롭다.

미스트랄도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자유로운 것은 결과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자신이 움직인 뒤 남은 일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도 아니다.

그녀는 아직 자연의 흐름을 지키고 싶다.

사람이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계절풍을 길들이고,
폭풍을 없애고,
정령이 다니는 길까지 항로표에 맞춰 잘라내는 세상은 싫다.

동시에 이제는 안다.

자신에게는 아름다운 돌풍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가족이 돌아오지 않는 저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미스트랄은 어느 쪽도 쉽게 정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안전을 위해 모든 바람을 길들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자연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죽음을 바라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 둘 사이에서 무엇을 움직이고 무엇을 그대로 둘 것인지.

83세가 된 지금도 그 답을 찾는 중이다.


오늘도 바람고리군도 위로 수십 척의 비행선이 지나간다.

그 사이를 하늘색 머리카락의 정령 하나가 빠르게 가로지른다.

머리끝에서는 옅은 안개가 길게 흘러나온다.

관측리본이 펄럭인다.

한 선원이 위를 올려다보며 소리친다.

“미스트랄! 오늘 바람 어때?”

그녀가 뒤로 날며 대답한다.

“좋아!”

선원이 안도한다.

미스트랄이 웃으며 덧붙인다.

“내 기준으로는!”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서 생각해!”

깔깔 웃으며 멀어지던 그녀가 갑자기 멈춘다.

머리카락 끝의 안개가 한쪽으로 길게 당겨진다.

관측리본도 동시에 방향을 바꾼다.

미스트랄의 웃음이 사라진다.

하늘을 바라본다.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행선을 향해 손을 든다.

“잠깐.”

선원들도 표정을 바꾼다.

미스트랄이 먼 구름을 바라본 채 말한다.

“오늘은 돌아가.”

“위험해?”

그녀는 잠시 생각한다.

예전처럼 단순히 바람이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바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움직이는지,
다른 항로에는 어떤 영향을 줄지까지 한 번 더 느껴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응.”

짧은 대답이다.

하지만 이제 그 한마디 뒤에는 수십 년 동안 본 수많은 하늘과 사고와 선택이 들어 있다.

미스트랄은 다시 바람 속으로 몸을 던진다.

길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람이 어디로 가는지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어느 길을 선택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필요하다면,
무엇을 움직였을 때 그 대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끝까지 지켜보기 위해서.

그것이 이름 없는 바람이었던 미스트랄이,
지금은 자신의 이름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유다.


자유모험가 길드 트리모니아 2명
EST
에스텔 브란
까까몰리 자유모험가 길드 트리모니아-하급 모험가
“약초 열 묶음이면 됐지? 하하, 그럼 오늘은 아무도 안 죽었네.”
🩸 HP 180
💪 공격력 80
🧙 마법력 20
✨ 신비력 1
🛡️ 방어력 75
🔗 항마력 50
😖 신비저항 50
🏃 회피력 60
과거 보기
에스텔이 처음부터 기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꿈은 훨씬 평범했다.

오빠와 같은 마을에서 살고, 적당한 사람과 결혼하고, 가끔 가족끼리 싸우더라도 다음 날이면 같은 식탁에 앉는 삶.

그 정도였다.

검을 잡아본 적도 없었다.

기사라는 사람들은 이야기책이나 지나가는 행렬에서나 보는 존재였다.

말을 타고 나타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악당을 쓰러뜨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채 다시 길을 떠나는 사람들.

어린 에스텔에게 기사는 그런 존재였다.

현실의 기사도 그러리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시작된 날은, 그녀의 가족이 죽은 날이었다.

---

도적단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에스텔은 오빠와 함께 집을 비운 상태였다.

별다른 이유도 아니었다.

심부름이었다.

두 사람은 돌아오는 길에 연기를 보았다.

오빠가 먼저 뛰었다.

에스텔도 뒤따랐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집은 무너져 있었고, 부모도 다른 가족들도 살아 있지 않았다.

에스텔은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울지도 않았다.

그저 오빠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며칠 뒤에야 울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처음으로 말했다.

“기사가 될 거야.”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청 강한 기사.”

“……왜?”

“다시는 이런 일 없게.”

오빠는 어린 동생의 말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스텔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륙에서 제일 강한 기사가 될 거야.”

“그렇게 강해져서 뭘 하게?”

에스텔은 망설이지 않았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릴 거야.”

그것이 처음 세운 신념이었다.

아주 단순했다.

강하면 사람을 구할 수 있다.

더 강하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보다 강해지면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에스텔은 그 계산에 틀린 곳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오빠는 달랐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영웅이 아니었다.

남아 있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는 에스텔에게 평범하게 살자고 했다.

다른 마을로 가자고 했다.

작은 가게라도 열자고 했다.

돈을 모으면 집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에스텔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또 생기면?”

“그걸 네가 어떻게 다 막아.”

“강해지면 돼.”

“에스텔.”

“내가 더 강했으면 엄마도 아빠도 안 죽었잖아.”

그 말 이후 오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스텔은 훗날 그 말을 수없이 후회했다.

오빠 역시 가족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장 아픈 곳을 붙잡고 상대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둘은 몇 년 동안 같은 문제로 다퉜다.

오빠는 동생이 살아 있기를 바랐다.

에스텔은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둘 다 상대를 사랑했기에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에스텔이 떠났다.

작별은 좋지 않았다.

“난 갈 거야.”

“그러다 너까지 죽으면?”

“안 죽어.”

“어떻게 알아?”

에스텔은 검을 들었다.

아직 제대로 된 검술조차 배우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강해질 거니까.”

오빠는 끝내 배웅하지 않았다.

---

에스텔은 남부로 향했다.

기사단에 들어갈 신분도, 추천장도, 돈도 없었다.

결국 하급 용병이 되었다.

현실은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처음 맡은 일은 상단 경비였다.

다음은 창고 불침번.

그다음은 술 취한 상인을 여관까지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기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검을 배울 수 있었다.

에스텔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천재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지독했다.

같은 동작을 수천 번 반복했다.

손바닥이 찢어지면 천을 감았다.

팔을 들 수 없으면 발놀림을 연습했다.

검을 휘두르지 못하는 날에는 다른 용병들의 싸움을 봤다.

이유는 하나였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었다.

그 목표만큼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

몇 년 뒤, 남부의 한 야만인 부락이 습격당했다.

습격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바실리스크였다.

그 일대에서 이름까지 붙어 있던 네임드 몬스터.

하급 용병들이 상대할 존재가 아니었다.

에스텔이 속한 용병대에도 명령이 떨어졌다.

퇴각.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당연한 판단이었다.

싸우면 죽는다.

그때 에스텔은 부락 쪽에서 아이들을 봤다.

도망치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에스텔은 멈췄다.

용병 하나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미쳤어? 가!”

“애들이 있어.”

“알아!”

“그럼 데리고 가야지.”

“우리도 죽어!”

에스텔은 잠깐 아이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동료의 손을 떼어냈다.

“먼저 가.”

그날 에스텔은 처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검을 들었다.

바실리스크를 이길 생각은 없었다.

이길 수도 없었다.

아이들이 도망칠 시간만 벌 생각이었다.

방패가 깨졌다.

왼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독기에 시야가 흐려졌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 걸음만 더.

아이들이 한 걸음 더 멀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버텼다.

죽기 직전까지.

---

그녀를 구한 것은 우연히 그 지역을 지나던 델피로 귀족의 기사단이었다.

바실리스크는 기사들의 협공으로 쓰러졌다.

에스텔은 며칠 뒤 야전병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구한 기사단의 주인을 만났다.

귀족은 물었다.

“왜 남았지?”

에스텔은 대답했다.

“애들이 있었으니까요.”

“죽을 걸 알고도?”

“네.”

“네가 죽으면 다음 사람은 누가 구하지?”

에스텔은 대답하지 못했다.

귀족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기사에게 필요한 건 죽을 용기만이 아니다.”

그 말은 에스텔에게 강하게 남았다.

그녀는 기사단에 들어갔다.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

처음 몇 년은 정말 행복했다.

갑옷을 받았다.

제대로 된 검을 받았다.

훈련을 받았다.

전술을 배웠다.

말을 타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을 구했다.

산적에게 포위된 상단.

홍수에 고립된 마을.

몬스터에게 습격당한 농가.

에스텔은 언제나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민간인을 찾았다.

퇴각할 때는 마지막에 나왔다.

동료들은 그녀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후배 기사들은 그녀의 뒤에 붙으면 살아서 돌아온다고 말했다.

에스텔은 강해졌다.

정말로 강해졌다.

어린 시절의 꿈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

기사단의 일은 몬스터를 죽이고 사람을 구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두 마을이 물을 두고 분쟁을 벌였다.

한쪽의 수로를 그대로 두면 아래쪽 마을이 말라 죽는다.

수로를 돌리면 위쪽 마을의 농지가 망가진다.

기사단의 주인은 결정을 내렸다.

수로를 개방한다.

위쪽 마을은 반발했다.

무기를 들었다.

에스텔은 처음으로 농민에게 검을 겨눴다.

그들은 악당이 아니었다.

자기 가족이 굶어 죽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이었다.

에스텔도 알았다.

그래도 길을 열어야 했다.

그대로 두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전투가 벌어졌다.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아래쪽 마을은 살아남았다.

사람들은 기사단에 감사했다.

에스텔은 감사 인사를 받으며 자신이 죽인 농민의 얼굴을 생각했다.

---

비슷한 일은 계속됐다.

분쟁의 씨앗이 될 사람을 제거하라는 명령.

한 사람을 살려두면 두 세력이 충돌할 가능성이 높았다.

죽이면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에스텔은 처음에는 반대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사단의 주인이 말했다.

“알고 있다.”

“그런데 죽입니까?”

“그가 살아 있으면 수천 명이 죽을 가능성이 높다.”

“가능성이잖아요.”

“그렇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에스텔은 이를 악물었다.

“그럼 어떻게 죽입니까?”

귀족은 한참 침묵했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면 이 일이 훨씬 쉬웠겠지.”

그는 즐거워하지 않았다.

명령을 가볍게 내리지도 않았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구하려 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악한 주인이었다면 떠나면 됐다.

하지만 에스텔은 알고 있었다.

그의 판단으로 실제 수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다.

---

어느 순간부터 에스텔은 명령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가장 끔찍했다.

이 마을을 포기하면 세 마을을 지킬 수 있다.

이 다리를 끊으면 적의 진격을 막을 수 있다.

이 사람을 죽이면 보복전쟁을 피할 수 있다.

이 부대를 미끼로 남기면 민간인들이 빠져나갈 시간을 벌 수 있다.

숫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매번 반박했다.

나중에는 반박하면서도 답을 알고 있었다.

더 나중에는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자신이 먼저 같은 결론을 냈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자신이 아주 훌륭한 기사가 되어 있었다.

전장에서 빠르게 판단했다.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았다.

누구를 살릴지 결정했다.

누구를 포기할지도 결정했다.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도 결정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다.

그녀가 어린 시절 꿈꾸었던 그대로였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기사.

그런데 그 기사에게는 너무 많은 사람의 피가 묻어 있었다.

---

에스텔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못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숫자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선택해야 했다.

한 사람과 열 사람.

열 사람과 백 사람.

백 사람과 천 사람.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었다.

자신이 검을 놓으면 누군가 대신 들어야 했다.

자신이 명령을 거부하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계속했다.

“이번만.”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에도 같은 생각을 했다.

또 다음에도.

어느 순간부터 ‘이번’이 몇 번째인지 세지 않았다.

---

그녀의 검술도 변했다.

처음에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배운 검이었다.

상대의 무기를 쳐낸다.

길을 막는다.

아군을 보호한다.

시간을 번다.

그러나 전쟁과 분쟁을 반복하면서 더 효율적인 방법을 배웠다.

어디를 베면 사람이 가장 빨리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지.

어떤 자세에서 목이 열리는지.

갑옷 사이의 틈이 어디인지.

상대가 공격하기 직전에 어떤 근육이 움직이는지.

한 명을 쓰러뜨린 뒤 다음 사람에게 이동하는 가장 짧은 동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강해지고 싶었던 소녀는 사람을 죽이는 데 누구보다 능숙한 기사가 되어갔다.

사람들은 그녀를 칭찬했다.

“에스텔이 있으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열 명을 죽이면 백 명이 살았다.

그녀가 백 명을 죽이면 천 명이 살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도 그녀를 살인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영웅이라고 불렀다.

에스텔은 그 말이 점점 싫어졌다.

---

그럼에도 떠나지 않았다.

떠나는 것이 더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견디기 싫다는 이유로 검을 놓으면 누군가가 죽는다.

그렇다면 견뎌야 했다.

악몽을 꾸면 견뎠다.

사람을 죽인 손으로 다음 날 아이를 구했다.

아이의 부모가 울면서 감사하면 웃었다.

“당연한 일을 했습니다.”

그날 밤에는 자신이 죽인 사람의 가족도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음 날 다시 갑옷을 입었다.

그녀는 점점 감정을 전투와 분리하는 법을 배웠다.

판단.

거리.

위험.

우선순위.

생존 가능성.

목표.

그것만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 사람을 더 많이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수록 에스텔은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서 멀어졌다.

---

오빠와 다시 만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우연에 가까웠다.

에스텔의 부대가 임무를 마치고 지나가던 도시에서 오빠가 살고 있었다.

오빠는 정말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에스텔이 한때 이해하지 못했던 삶이었다.

작은 집.

평범한 직업.

이웃과 인사를 나누는 생활.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삶.

둘은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봤다.

오빠가 먼저 웃었다.

에스텔도 웃었다.

“오랜만이네.”

“그러게.”

둘은 식사를 했다.

에스텔은 일부러 기사단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오빠도 묻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죽은 가족 이야기도 조금 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러다 식당 밖에서 접시가 깨졌다.

큰 소리가 났다.

에스텔의 손이 움직였다.

생각보다 먼저.

한 손으로 오빠를 자신의 뒤로 밀었다.

다른 손은 검 손잡이에 올라갔다.

시선은 출입구.

창문.

주변 사람들의 손.

도주로.

위협 가능성이 있는 사람.

세 걸음 안에 죽일 수 있는 사람.

전부 확인했다.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냥 접시가 깨진 것이었다.

에스텔은 손을 내렸다.

“미안.”

오빠가 웃었다.

“기사라 그런가 보네.”

말투는 평범했다.

표정도 거의 평범했다.

하지만 에스텔은 알아챘다.

아주 짧은 순간.

자신이 검에 손을 올렸을 때.

오빠가 자신을 보고 두려워했다.

---

그날 밤 에스텔은 거의 잠들지 못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기사가 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 가족이 자신을 무서워했다.

오빠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다.

에스텔도 화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해했다.

그게 더 아팠다.

거울을 봤다.

몸에는 흉터가 늘어 있었다.

손은 검을 잡은 모양으로 굳어 있었다.

방에 누가 들어오면 무의식적으로 거리부터 계산했다.

창가에 앉으면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를 골랐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무기부터 확인했다.

사람이 열 명 모이면 싸움이 났을 때 누구부터 제압해야 할지 생각했다.

자신은 살아 있었다.

많은 사람을 구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

며칠 뒤 기사단으로 돌아간 에스텔은 평소처럼 임무를 수행했다.

명령도 잘 따랐다.

사람도 구했다.

적도 죽였다.

아무도 그녀가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 임무를 마친 뒤 장비를 정리했다.

기사단 인식표를 손에 들었다.

오랫동안 바라봤다.

버리지는 않았다.

자신이 했던 일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식으로 사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맡은 책임도 있었다.

그래서 탈영했다.

어쩌면 그녀가 평생 저지른 행동 가운데 가장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그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더 많은 사람’을 계산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 한 사람을 위해 선택했다.

서쪽으로 갔다.

까까몰리로.

---

까까몰리에 도착한 뒤 에스텔은 모험가 길드에 들어갔다.

접수원이 물었다.

“경력은?”

“용병 조금.”

거짓말은 아니었다.

“전투 경험은?”

“조금.”

이건 꽤 심한 축소였다.

“특기는?”

에스텔은 잠시 생각했다.

검술이라고 하면 귀찮아질 것 같았다.

호위라고 하면 다시 누군가를 지켜야 할 것 같았다.

토벌이라고 하면 다시 죽여야 할 것 같았다.

게시판 한쪽에 붙은 의뢰가 눈에 들어왔다.

<약초 채집>

에스텔이 말했다.

“채집?”

접수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해본 적 있어?”

“배우면 되지.”

그렇게 대륙에서도 손꼽힐 만한 기사가 하급 모험가가 되었다.

---

처음 약초를 캐러 간 날에는 세 시간을 허비했다.

전투 흔적은 읽을 수 있었다.

몬스터 발자국도 찾을 수 있었다.

매복 위치도 알았다.

그런데 약초가 어떻게 생겼는지 헷갈렸다.

길드에서 받은 그림과 풀을 번갈아 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게 맞나?”

전쟁터에서는 수십 명의 생사를 몇 초 만에 판단하던 사람이 풀 한 포기 앞에서 십 분을 고민했다.

이상하게 즐거웠다.

잘못 골라도 사람이 죽지 않았다.

조금 늦어도 마을이 불타지 않았다.

판단을 틀려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에스텔은 약초 열두 묶음을 가져왔다.

필요한 것은 열 묶음이었다.

접수원이 말했다.

“두 묶음 많네.”

에스텔은 약초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아주 조금 웃었다.

“그럼 오늘은 아무도 안 죽었네.”

“뭐?”

“아무것도 아니야.”

---

그 뒤로도 쉬운 의뢰만 골랐다.

약초 채집.

분실물 찾기.

짐 운반.

길 잃은 가축 데려오기.

마을 주변 순찰.

길드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에스텔은 하급치고 위험지역을 너무 편하게 돌아다녔다.

몬스터가 자주 나오는 숲에서도 상처 하나 없이 돌아왔다.

길을 잃지도 않았다.

도적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날에도 멀쩡했다.

“도적은?”

“갔어.”

“그냥?”

“응.”

“어떻게?”

“얘기 좀 했어.”

실제로는 도적 여섯 명의 무기를 몇 초 만에 전부 떨어뜨린 뒤 다시는 근처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한 것이었다.

에스텔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

가끔 다른 하급 모험가와 파티를 짜기도 한다.

그럴 때 에스텔은 일부러 뒤에 선다.

“나 검은 별로 못해.”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 누군가 앞에 선다.

에스텔은 따라간다.

실수도 조금 한다.

너무 노골적이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진짜 위험이 나타나면 달라진다.

몬스터가 숲에서 뛰쳐나온다.

어린 모험가가 얼어붙는다.

그 순간 에스텔의 목소리가 바뀐다.

“엎드려.”

낮고 짧다.

누구도 반문하지 않는다.

“둘은 왼쪽. 붙어서 움직여.”

검이 뽑힌다.

“뒤 보지 마.”

한 걸음.

“내 뒤에 붙어.”

그 순간만큼은 하급 모험가 에스텔이 사라진다.

오랫동안 수백 명의 생사를 계산하며 싸웠던 기사가 돌아온다.

싸움은 대개 오래 걸리지 않는다.

---

그리고 끝나면 다시 검을 집어넣는다.

“……다친 사람?”

사람들이 멍하니 바라본다.

“너.”

“응?”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에스텔은 잠깐 생각한다.

그리고 대답한다.

“약초 캐는 사람.”

“지금 그걸 믿으라고?”

“안 믿어도 돼.”

에스텔은 상대의 상처를 확인한다.

“다친 데부터 보여줘.”

그녀는 자신의 힘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검술 자체가 악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힘으로 실제 많은 사람을 구했다.

다만 다시 그 힘이 자신의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한 번 검을 들면 자신은 너무 쉽게 답을 찾아버린다.

누구를 먼저 쓰러뜨려야 하는지.

누구를 포기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피해가 가장 적은지.

그 답들이 너무 빠르게 나온다.

그리고 대부분 맞는다.

바로 그것이 두렵다.

---

에스텔은 아직도 사람을 구하고 싶다.

그 꿈을 버린 적은 없다.

어린 시절의 자신이 틀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다는 마음은 지금도 같다.

달라진 것은 하나다.

예전에는 강해지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강하다고 해서 답을 정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백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죽이는 선택.

천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마을을 버리는 선택.

그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도 안다.

자신은 실제로 그런 선택으로 사람들을 살렸다.

그래서 단순히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옳았다고 말하는 순간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숫자가 되어버린다.

에스텔은 그것만큼은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아직 답을 내리지 않았다.

---

오빠에게는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리지 않았다.

몇 번 편지를 쓰려고 했다.

잘 지낸다고.

이제 기사도 아니라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마지막 문장을 쓸 수 없었다.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지 자신도 몰랐다.

무엇보다 오빠에게 용서받고 싶은 건지,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

자신이 아직 예전의 에스텔이라는 확인을 받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보내지 않았다.

대신 기사단 인식표와 함께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

낡은 천으로 몇 번이나 싸서 가방 가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다.

버리지도 않는다.

다시 달지도 않는다.

---

가끔 에스텔은 생각한다.

만약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백 명이 죽는다.

자신만이 그 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때도 검을 들지 않을 것인가.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아마 들 것이다.

그 사실 때문에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동시에 그것 때문에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한다.

에스텔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다시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니다.

필요하다면 죽일 수 있다.

이미 너무 잘한다.

두려운 것은 그다음이다.

또 한 번 사람을 죽여 백 명을 살리고,

다음에는 열 명을 죽여 천 명을 살리고,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그것이 당연해지는 것.

사람의 얼굴보다 숫자를 먼저 보게 되는 것.

오빠가 두려워했던 그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

그래서 지금은 약초를 캔다.

한 묶음.

두 묶음.

세 묶음.

약초는 누구를 희생시켜야 자라는지 묻지 않는다.

아픈 사람에게 가져다주면 된다.

길 잃은 아이를 발견하면 집에 데려다주면 된다.

무너진 울타리가 있으면 고치면 된다.

짐이 무거운 사람이 있으면 들어주면 된다.

너무 작은 일들이다.

과거의 에스텔이라면 이런 것으로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에스텔은 오히려 그래서 좋아한다.

세상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눈앞의 한 사람만 도우면 된다.

그 한 사람을 위해 다른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평생 찾아다닌 가장 단순한 형태의 구원이 거기에 있었다.

---

어느 날 길드의 어린 모험가가 물었다.

“에스텔.”

“응?”

“왜 맨날 쉬운 의뢰만 해?”

에스텔은 채집한 약초를 묶고 있었다.

“편하잖아.”

“거짓말.”

“왜?”

“너 강하잖아.”

손이 잠깐 멈췄다.

“누가 그래?”

“다 알아. 말만 안 하는 거지.”

에스텔은 피식 웃었다.

“그럼 모르는 척해줘.”

“왜?”

잠깐 침묵했다.

예전이라면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은 조금 달랐다.

“강하면 자꾸 어려운 일을 맡게 되거든.”

“좋은 거 아냐?”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럼 지금은?”

에스텔은 약초 한 묶음을 가방에 넣었다.

“쉬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꽤 좋은 일이더라.”

---

그녀의 검은 아직 무뎌지지 않았다.

매일 새벽 아무도 없는 곳에서 훈련한다.

그만두었다면서도 검을 놓지는 못했다.

동작 하나하나는 여전히 정확하다.

베기.

막기.

찌르기.

회피.

전진.

한 치의 낭비도 없다.

훈련을 끝내면 에스텔은 늘 검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아직 연습하지?

다시 싸우고 싶어서?

아니다.

강한 자신을 포기하기 싫어서?

그것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언젠가 정말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서 죽으려 할 때,

그 사람을 구할 힘이 없다는 변명만큼은 다시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아직도 같은 사람이다.

한 명이라도 더 구하고 싶었던 어린 소녀.

다만 이제는 그 꿈의 무게를 알고 있을 뿐이다.

---

에스텔은 자신을 기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영웅이라는 말은 더 싫어한다.

그렇다고 자신을 살인자라고만 부르는 것도 거부한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

자신이 구한 사람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둘 중 하나만 진실인 척하지 않는다.

그녀의 과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에스텔은 아직 답을 찾는 중이다.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구원이고 어디부터가 오만인지.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강한 사람일 수 있는지.

검을 들지 않는 것이 평화인지, 단지 책임을 피하는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작은 것부터 한다.

오늘 필요한 약초를 캔다.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 먼저 괜찮냐고 묻는다.

싸움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한다.

누군가 위험해지면 결국 검을 뽑는다.

그리고 싸움이 끝나면 반드시 살아 있는 사람부터 확인한다.

“다친 데 없어?”

“괜찮아.”

“다행이네.”

그 말을 들으면 에스텔은 아주 조금 웃는다.

과거에는 전투가 끝나면 피해 규모부터 확인했다.

사망자 몇 명.

부상자 몇 명.

민간인 피해 몇 명.

구조 인원 몇 명.

지금은 숫자를 세기 전에 얼굴을 본다.

한 사람씩.

살아 있는 사람을 한 명씩 확인한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에스텔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반항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숫자로 보던 기사였던 자신에 대한.

그리고 언젠가 다시 거대한 선택 앞에 서더라도,

적어도 그 숫자 하나하나가 사람이었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기 위한.

에스텔은 오늘도 길드 게시판 앞에 선다.

토벌 의뢰를 지나친다.

호위 의뢰도 지나친다.

한참 아래 붙어 있는 종이를 떼어낸다.

<서부 구릉지 약초 채집 / 열 묶음>

접수원이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묻는다.

“또 약초?”

“응.”

“좀 더 높은 등급 의뢰 받아도 된다니까.”

“싫어.”

“왜?”

에스텔은 의뢰서를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는다.

“오늘도 아무도 안 죽는 일이 하고 싶어서.”

그녀는 검을 허리에 찬 채 길드 밖으로 걸어나간다.

대륙 최강의 기사가 되겠다는 꿈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다만 지금의 에스텔은 그 꿈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강해서 많은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도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먼저 찾을 것.

그 방법이 정말 존재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는다.

평생 검으로 너무 많은 답을 너무 빨리 내렸으니까.

이제는 조금 느리게 살아도 괜찮다고,

에스텔은 그렇게 믿어보는 중이다.

MEI
메이라
까까몰리 자유모험가 길드 트리모니아-음유시인
“아따, 씨벌. 그 재밌는 이야기를 니 혼자 처먹고 있었단 말이가? 앉아봐라. 처음부터 싹 불어.”
🩸 HP 60
💪 공격력 10
🧙 마법력 55
✨ 신비력 1
🛡️ 방어력 15
🔗 항마력 45
😖 신비저항 40
🏃 회피력 65
과거 보기
메이라는 어려서부터 같은 이야기가 사람마다 전혀 다르게 변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 시작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메이라의 아버지는 레흐니티 출신의 엘프였다.

정확히 말하면,

레흐니티에서 탈영한 엘프였다.

그가 왜 군복을 벗고 숲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본인은 명령이 싫어서 나왔다고 했다.

메이라의 어머니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저 인간 말 반만 믿어. 겁나서 튄 것도 있응께.”

그러면 아버지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겁이 났던 것과 명령이 잘못됐다고 생각한 건 동시에 사실일 수 있잖아.”

어머니는 다시 대꾸했다.

“그럼 처음부터 그라고 말하면 되제.”

메이라는 그 싸움을 아주 좋아했다.

같은 사건을 두 사람이 전혀 다르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둘 중 누구도 완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

아버지가 레흐니티를 떠난 뒤 어디에서 어머니를 만났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여러 개였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운명이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길을 잃은 멍청한 엘프 하나를 주워준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길을 잃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어머니는 사흘 동안 같은 언덕을 두 번이나 지나친 인간이 할 소리는 아니라고 했다.

아버지는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엘프라고 정정했다.

어머니는 그 부분만큼은 더 열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국 같이 살았다.

메이라는 그런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엘프 아버지와 하플링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체격과 생활양식은 어머니 쪽을 훨씬 많이 닮았다.

작은 키.

둥근 얼굴.

밤색 곱슬머리.

그리고 한번 말문이 터지면 좀처럼 멈추지 않는 입까지.

아버지는 가끔 말했다.

“적어도 입은 나를 안 닮아서 다행이구나.”

그러면 어린 메이라는 바로 받아쳤다.

“아부지는 탈영까지 해놓고 입이라도 조용해야제.”

어머니가 배를 잡고 웃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까지 삐져 있었다.

---

세 사람의 집은 세레이온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 있었다.

성도 세리아와는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순례자도 드물었고 대규모 교역로에서도 살짝 벗어나 있었다.

마을 사람 대부분은 농사를 짓거나 작은 가축을 길렀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조용한 마을이었다.

아버지에게는 그런 곳이 필요했다.

레흐니티에서 나온 뒤의 과거를 굳이 캐묻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곳을 좋아했다.

밭을 조금 빌릴 수 있었고,

옆집에서 채소를 받으면 다음 날 음식을 만들어 돌려주는 정도의 관계가 있었다.

메이라에게는 조금 심심했다.

그래서 외지인이 마을에 나타나면 거의 반드시 붙잡았다.

상인.

순례자.

용병.

약초꾼.

떠돌이 사제.

행상인.

길을 잘못 든 여행객.

누구든 상관없었다.

“어디서 왔노?”

“거긴 뭐가 있노?”

“몬스터 큰 거도 있나?”

“진짜로?”

“에이 씨벌, 그건 구라 같은데.”

그러면 멀리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메이라! 욕 좀 작작 해라!”

메이라는 바로 외쳤다.

“엄마한테 배운 건디!”

“내가 언제!”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괜히 증인이 되었다가는 어느 쪽 편을 들어도 손해였다.

---

메이라가 처음 음유시인을 본 것도 그 마을에서였다.

열두 살 무렵이었다.

낡은 류트를 등에 멘 여행자가 여관에 머물렀다.

돈이 부족했던 그는 저녁값 대신 노래를 불렀다.

북부 프라그모의 눈보라.

남쪽 안발룽의 끝없는 모래.

델피로의 황금빛 도시.

까까몰리의 하늘을 오가는 비공선.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선원.

몬스터를 쓰러뜨리고 마을을 구한 이름 없는 모험가.

메이라는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들었다.

노래가 끝나자 가장 먼저 달려갔다.

“아재.”

음유시인이 눈썹을 찌푸렸다.

“아재라니.”

“그럼 뭐라 부르까?”

“선생님 정도는 어때.”

메이라는 잠깐 생각했다.

“그건 좀 재수 없는디.”

그날 음유시인은 메이라에게 처음으로 류트를 가르쳐주었다.

메이라는 첫날부터 줄 하나를 끊었다.

음유시인은 다음 날 떠났다.

하지만 메이라에게는 작은 불씨 하나가 남았다.

노래 하나면 자기가 가보지 못한 곳도 볼 수 있었다.

죽은 사람의 이름도 다시 불릴 수 있었다.

어쩌면 이야기는 사람보다 오래 살 수도 있었다.

메이라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

처음 만든 노래는 끔찍했다.

내용이 너무 길었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았다.

운율도 엉망이었다.

무엇보다 메이라는 들은 이야기를 하나도 버리지 못했다.

한 사건을 세 사람에게 들으면 세 명의 말을 전부 노래에 넣었다.

어머니가 끝까지 들어보려다가 말했다.

“야.”

“와.”

“이거 노래 맞나?”

“그럼 뭐고?”

“장부 아니가?”

메이라는 억울했다.

“사람 말 빼면 안 되잖아.”

옆에서 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듣는 사람이 먼저 죽으면 그것도 기록해야겠구나.”

메이라는 그날 처음으로 노래를 줄이는 법을 고민했다.

재미있는 부분을 앞에 놓았다.

같은 이야기는 합쳤다.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부분은 잘랐다.

멋진 사람에게는 별명을 붙였다.

사람들이 기억하기 좋은 후렴도 만들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메이라는 신났다.

이야기를 잘 다듬으면 더 멀리 보낼 수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무조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

시간이 흘렀다.

메이라는 집을 바로 떠나지는 않았다.

부모가 싫지도 않았다.

마을이 싫지도 않았다.

오히려 사이가 너무 좋았다.

아버지와는 계속 옛날 이야기를 놓고 말다툼했고,

어머니와는 시장에서 들은 소문을 가지고 누가 더 말이 되는지 떠들었다.

가끔 마을 축제가 열리면 메이라가 류트를 연주했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쳤다.

아버지는 틀린 음을 정확하게 찾아냈다가 딸에게 욕을 먹었다.

그렇게 오래 살았다.

메이라가 독립한 것은 서른여섯 살 때였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었다.

대단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느 저녁,

메이라가 밥을 먹다가 말했다.

“나 이제 좀 나가볼란다.”

아버지가 숟가락을 멈췄다.

“여행?”

“아니. 아예.”

어머니는 메이라를 한번 보고는 밥을 계속 먹었다.

“그래.”

메이라가 오히려 당황했다.

“끝이가?”

“뭐 더 해줘?”

“아니, 보통 딸이 집 나간다 카면 좀 말리고 그런 거 없나?”

어머니가 코웃음을 쳤다.

“서른여섯 처먹은 딸내미 독립한다는데 뭔 놈의 가출이여.”

“아, 씨벌. 말 좀 예쁘게 해라.”

“니가 할 소리는 아니제.”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용히 물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니?”

메이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몰라?”

“그래서 나가는 긴데.”

아버지가 이마를 짚었다.

어머니는 웃었다.

“저거 아부지 딸 맞네.”

“어떤 부분이?”

“길도 모르고 나가는 거.”

아버지는 항의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

독립은 싸움도 절연도 아니었다.

그냥 메이라의 삶이 부모의 집보다 넓어진 날이었다.

아버지는 여행용 망토를 손질해주었다.

어머니는 돈을 한 주머니에 다 넣지 말라고 했다.

“세 군데 나눠놔.”

“와?”

“한 번 털려도 두 군데 남잖아.”

“역시 경험자의 말은 다르네.”

“내가 언제 털렸다 카더나?”

“아니면 왜 이렇게 잘 아노?”

어머니가 대답하지 않았다.

메이라는 그날부터 어머니에게도 숨겨진 과거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떠나는 날 아버지는 몇 번이나 말했다.

“편지는 보내라.”

“알았다.”

“도착하면 보내고.”

“알았다니까.”

“위험한 곳에 가면—”

“아부지.”

“응?”

“나 마흔 다 돼간다.”

아버지는 잠깐 침묵했다.

“그래도 내 딸이잖니.”

메이라는 대꾸하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의 옆구리를 한번 툭 쳤다.

그리고 말했다.

“안 뒤지고 돌아올 테니까 걱정 마라.”

어머니가 뒤에서 소리쳤다.

“그게 걱정 말라는 말이가, 이년아!”

그것이 10년 전이었다.

---

독립한 메이라는 본격적으로 유랑음유시인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어느 한 나라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마을에서 노래하고,

상단과 함께 이동하고,

항구의 술집에서 이야기 하나를 얻기 위해 밤새 술잔을 붙잡기도 했다.

돈 대신 이야기를 받는 일도 있었다.

“밥값이 없는데.”

“그라믄 이야기 하나 내놔라.”

“무슨 이야기?”

“니 인생에서 제일 병신 같았던 날.”

“그게 왜 궁금합니까?”

“사람은 잘난 얘기 할 때보다 병신짓 얘기할 때 더 솔직하거든.”

이상하게도 효과가 좋았다.

메이라는 사람들의 멋진 이야기만 좋아하지 않았다.

실수한 이야기.

도망친 이야기.

후회한 이야기.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선택.

그런 이야기를 더 오래 기억했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탓인지도 몰랐다.

사람 하나의 행동에는 이유 하나만 붙어 있지 않았다.

---

그러다 메이라는 까까몰리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잠깐 머물 생각이었다.

하지만 까까몰리는 음유시인에게 너무 좋은 장소였다.

사람이 끊임없이 오갔다.

선원.

상인.

비공선 조종사.

항로 노동자.

모험가.

이민자.

난민.

밀수꾼이라고 의심받는 사람.

자기가 밀수꾼이라고 자랑하는 바보.

한 술집에만 앉아 있어도 대륙 여러 곳의 이야기가 들어왔다.

메이라는 며칠 만에 생각을 바꿨다.

“아따.”

항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여긴 씨벌, 가만있어도 이야기가 굴러오네.”

결국 까까몰리는 그녀의 새로운 생활거점이 되었다.

부모의 집이 고향이라면,

까까몰리는 메이라가 자기 손으로 고른 삶의 장소였다.

---

그곳에서 메이라는 한 선장을 만났다.

당시 여러 항구에서 조금씩 유명해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배는 거대한 폭풍 속에서 침몰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왔다.

사람들은 이미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부러진 키를 끝까지 붙잡았다.

선원들을 독려했다.

화물을 버리고 사람을 살렸다.

구명정이 떠날 때까지 마지막으로 갑판에 남았다.

완벽한 영웅담이었다.

메이라는 바로 달려갔다.

“선장 양반.”

“뭐지?”

“니 폭풍에서 안 뒤지고 살아왔다매?”

선장이 웃었다.

“말버릇이 상당하군.”

“노래는 잘 만드니까 걱정 마라.”

선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말 멋졌다.

폭풍.

절망.

용기.

희생.

귀환.

사람들이 좋아할 모든 것이 있었다.

---

메이라는 며칠 동안 노래를 만들었다.

폭풍을 가르는 배.

부러진 키를 잡는 선장.

겁먹은 선원들에게 끝까지 버티라고 외치는 목소리.

새벽빛 아래 항구로 돌아오는 만신창이의 배.

후렴은 특히 잘 나왔다.

사람들이 한 번만 듣고도 따라 불렀다.

노래는 항구에서 항구로 퍼졌다.

다른 음유시인들이 따라 불렀다.

선장의 이름은 더 유명해졌다.

메이라의 이름도 조금씩 알려졌다.

그녀는 기뻤다.

자기가 한 사람의 이야기를 죽지 않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 노래가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지 기대했다.

---

몇 달 뒤,

메이라는 다른 항구에서 그 노래를 다시 불렀다.

노래가 끝났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딱 한 사람만 치지 않았다.

늙은 선원이었다.

그가 메이라에게 다가왔다.

“그 이야기 누구한테 들었냐.”

“그 선장한테.”

노인은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메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와. 뭐 문제 있나?”

선원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노래는 참 멋지네.”

“그치?”

“그래서 더 좆같다.”

메이라는 처음으로 웃음을 멈췄다.

---

노래에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

폭풍 자체는 자연재해였다.

하지만 배가 그 폭풍에 들어간 과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출항 전부터 기상이 불안정하다는 보고가 있었다.

몇몇 선원은 출항을 늦추자고 했다.

항로를 바꾸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일정이 늦어지면 계약상 손실이 컸다.

선장은 출항을 결정했다.

결과적으로 배는 폭풍에 들어갔다.

그 뒤 선장은 정말 용감하게 행동했다.

자기 목숨을 걸었다.

선원들을 구했다.

마지막까지 배에 남았다.

그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만 사실인 것은 아니었다.

죽은 선원들이 있었다.

몇 명은 침수된 하부갑판에 남아 화물을 버렸다.

그들이 배를 가볍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메이라의 노래에서는 그 사람들이 단 한 줄이었다.

‘용감한 선원들이 폭풍에 쓰러졌네.’

이름도 없었다.

누가 남으라고 했는지도 없었다.

왜 그들이 죽었는지도 없었다.

---

메이라는 처음에는 반박했다.

“잠깐만.”

“왜?”

“그 선장이 사람 버리고 도망친 건 아니잖아.”

“그래.”

“진짜 사람 구했잖아.”

“그래.”

“마지막까지 배에 있었고.”

“그것도 맞지.”

메이라는 답답해졌다.

“그라믄 내 노래가 틀린 건 아니잖아.”

늙은 선원이 대답했다.

“안 틀렸지.”

메이라는 잠깐 안도했다.

노인은 이어 말했다.

“근데 네 노래만 남으면 나머지는 다 틀린 이야기가 되잖아.”

메이라의 입이 닫혔다.

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

노래가 거짓말이어서가 아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

메이라는 그 뒤 살아남은 선원들을 찾아다녔다.

죽은 사람의 가족도 찾았다.

그리고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한 사람은 선장을 증오했다.

“출항하지 않았으면 아무도 안 죽었어.”

다른 사람은 선장을 옹호했다.

“그래도 폭풍이 온 뒤에는 그 사람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누군가는 죽은 선원들이 자원해서 아래로 내려갔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명령을 거부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고 했다.

누군가는 선장이 탐욕스러웠다고 했다.

누군가는 당시 계약을 어겼다면 선원 모두가 일자리를 잃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 사람은 선장을 영웅이라고 했다.

한 사람은 살인자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둘 다 아닐까요.”

메이라는 머리를 긁었다.

“아따, 씨벌.”

노래 하나로는 도저히 안 됐다.

---

그래서 처음에는 반대쪽 노래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선장을 무모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위험을 알고도 출항한 사람.

자기 판단 때문에 선원을 죽음으로 끌고 간 사람.

노래를 완성한 뒤 메이라는 처음부터 다시 불러봤다.

그리고 류트를 내려놓았다.

“이것도 아닌디.”

이번에는 반대쪽의 사실이 사라졌다.

폭풍이 닥친 뒤 실제로 선장이 사람들을 살렸던 일.

마지막까지 남았던 일.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의 명령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말했던 일.

메이라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한쪽 살리면 한쪽이 뒤지고, 저쪽 살리면 이쪽이 뒤지네.”

한참 침묵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굳이 하나여야 하나?

---

메이라는 결국 같은 사건을 세 곡으로 만들었다.

첫 번째는 선장의 이야기였다.

폭풍이 시작된 뒤 끝까지 사람을 살리려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

두 번째는 죽은 선원들의 이야기였다.

배가 살아 돌아오기 위해 이름 없이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의 이야기.

세 번째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선장을 원망하면서도 그 사람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세 노래는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메이라는 고치지 않았다.

공연을 시작할 때 오히려 말했다.

“이 세 개 전부 같은 배 이야기여.”

누군가 웃었다.

메이라는 류트를 튕겼다.

“웃지 마라. 씨벌, 타고 있던 자리마다 바다가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니까.”

그 뒤 세 곡을 차례대로 불렀다.

---

그 사건은 메이라의 방식을 완전히 바꿨다.

이제 한 사람의 말만 듣고 노래를 완성하지 않았다.

당사자를 찾았다.

목격자를 찾았다.

가족을 찾았다.

명령한 사람과 명령받은 사람을 따로 만났다.

손해 본 사람에게도 물었다.

이득 본 사람에게도 물었다.

“니는 어떻게 기억하는데?”

상대가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이미 들으셨잖아요.”

메이라는 바로 대답했다.

“그래서 니한테 묻는 기다.”

“누가 맞는지 확인하려고요?”

“그것도 필요하면 하지.”

메이라는 류트 줄을 튕겼다.

“근데 일단 니 말까지 들어야 될 거 아이가.”

“왜요?”

메이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니 이야기 없어지면 좆같잖아.”

---

그러나 유랑음유시인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돈이었다.

이야기를 찾으러 다니는 데도 돈이 들었다.

숙박비.

식비.

배삯.

위험지역에 들어갈 때 필요한 장비.

무엇보다 실제 사건의 당사자를 만나려면 평범한 음유시인 신분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곳도 많았다.

그 무렵 메이라는 까까몰리의 자유모험가 길드 트리모니아를 알게 되었다.

돈을 벌면서 직접 현장에 갈 수 있었다.

각지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상인과 주민과 모험가의 이야기가 한곳에 모였다.

메이라에게는 너무 좋은 장소였다.

가입신청서를 받아든 접수원이 물었다.

“가입 목적은?”

메이라는 대답했다.

“돈도 벌고 이야기거리도 처먹고.”

접수원이 펜을 멈췄다.

“……조금 다르게 적어드려도 되겠습니까?”

“와?”

“공식 서류니까요.”

결국 가입 목적에는 이렇게 적혔다.

‘현장 경험 및 창작 소재 수집.’

메이라는 한참 바라봤다.

“아따, 존나 재미없게 써놨네.”

그렇게 메이라는 트리모니아의 모험가가 되었다.

---

트리모니아에서 메이라가 에스텔을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은 별것 아니었다.

조용한 여자였다.

길드 게시판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좋은 보수의 토벌 의뢰도 있었다.

호위 의뢰도 있었다.

위험수당이 붙은 몬스터 수색 의뢰도 있었다.

에스텔은 그것들을 전부 지나쳤다.

그리고 맨 아래에 붙은 약초 채집 의뢰를 떼었다.

메이라는 옆에서 그걸 보고 있었다.

“야.”

에스텔이 돌아봤다.

“응?”

메이라가 에스텔의 허리에 찬 검을 가리켰다.

“그거 장식이가?”

에스텔이 검을 한번 내려다봤다.

“아니.”

“근데 약초를 캐러 간다고?”

“응.”

메이라는 잠시 에스텔을 위아래로 훑었다.

서 있는 자세가 이상했다.

정확히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무게중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검이 달린 쪽으로 몸이 기울지도 않았다.

출입구와 주변 사람을 무심하게 확인하는 눈도 보였다.

메이라는 수많은 용병과 모험가를 봐왔다.

적어도 검을 별로 못 쓰는 사람의 몸은 아니었다.

“수상한 년이네.”

에스텔이 피식 웃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할 말이야?”

“나는 원래 처음 보는 사람한테 더 솔직혀.”

그게 두 사람의 첫 대화였다.

---

메이라는 처음부터 에스텔의 과거를 캐묻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몇 번 캐물으려다가 멈췄다.

“옛날에 뭐 했노?”

“용병 조금.”

“그 검술은 용병 조금 수준이 아닌 것 같은디.”

“그래?”

“그래.”

“그럼 내가 재능이 있나 보지.”

“아따, 씨벌. 뻔뻔하기도 해라.”

에스텔은 웃었다.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메이라는 알아챘다.

숨기는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같지 않았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더 물었을지도 몰랐다.

지금의 메이라는 한 발 물러났다.

“알았다.”

에스텔이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안 물어봐?”

“니가 말하기 싫다는데 뭘.”

“음유시인 아니야?”

“음유시인이면 남의 인생 강제로 까도 되나?”

메이라는 혀를 찼다.

“그라믄 내가 십 년 전에 배운 게 아무것도 없게.”

그 뒤 에스텔은 메이라를 조금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

둘이 처음 같은 의뢰를 받은 것은 약초 채집이었다.

메이라가 일부러 따라간 것이었다.

“음유시인이 약초를 왜 캐?”

에스텔이 물었다.

메이라는 류트를 등에 메며 대답했다.

“약초 캐는 노래 만들라고.”

“거짓말.”

“맞다. 심심해서 따라가는 기다.”

에스텔은 한숨을 쉬었다.

“마음대로 해.”

처음 몇 시간은 평화로웠다.

메이라는 풀 이름을 계속 틀렸다.

에스텔도 사실 약초에 아주 능숙한 편은 아니었다.

둘은 길드에서 받은 그림과 실제 풀을 번갈아 봤다.

메이라가 말했다.

“이거 맞나?”

“아닌 것 같은데.”

“니도 모르잖아.”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근거가 뭐고?”

“느낌.”

“씨벌, 내가 오늘 대륙 최강의 약초 전문가랑 왔네.”

에스텔이 웃었다.

---

문제는 돌아오는 길에 생겼다.

숲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큰 개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근처에 신참 모험가 몇 명이 있었다.

한 명이 놀라 넘어졌다.

메이라가 류트를 들기도 전이었다.

에스텔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엎드려.”

짧았다.

낮았다.

그 말을 들은 신참이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을 숙였다.

“둘은 왼쪽으로.”

에스텔이 검을 뽑았다.

“붙어서 움직여.”

다음 순간 몬스터의 공격이 빗나갔다.

에스텔은 이미 그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움직임에 낭비가 없었다.

검이 어디로 갈지 고민하지도 않았다.

상대가 움직이기 전에 다음 위치를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몇 번의 공방 뒤 전투는 끝났다.

메이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스텔이 검을 닦으며 돌아봤다.

“왜 그렇게 봐?”

메이라는 한참 에스텔을 봤다.

그리고 말했다.

“용병 조금?”

에스텔이 잠시 침묵했다.

“……조금 오래 했어.”

메이라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 존나 조금 오래 했겠네.”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

그날 밤 메이라는 노래를 하나 만들 수 있었다.

하급 모험가로 숨어 지내던 정체불명의 검사가,

위기의 순간 놀라운 실력을 드러내 사람들을 구했다.

음유시인이라면 좋아할 소재였다.

반전도 있었다.

멋진 전투도 있었다.

후렴을 붙이기도 쉬웠다.

메이라는 류트를 들었다.

두 소절 정도 만들었다.

그리고 멈췄다.

에스텔이 옆에서 물었다.

“왜 안 해?”

“뭘?”

“아까부터 노래 만들고 있었잖아.”

메이라는 류트 줄에서 손을 뗐다.

“니 이야기잖아.”

“그래서?”

“니가 말하라 한 적 없잖아.”

에스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메이라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응?”

“방금 본 것만으로 니가 어떤 년인지 노래 만들면 또 같은 짓 하는 거잖아.”

에스텔이 물었다.

“무슨 짓?”

“사람 하나를 장면 하나로 다 설명하는 거.”

에스텔은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성격은 전혀 달랐다.

메이라는 시끄러웠다.

에스텔은 조용했다.

메이라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질문을 쏟아냈다.

에스텔은 먼저 묻기보다 기다리는 편이었다.

메이라는 술집 한가운데 앉는 것을 좋아했다.

에스텔은 출입구가 보이는 구석 자리를 골랐다.

메이라는 그것도 눈치챘다.

하지만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항상 같은 자리를 비워뒀다.

“여기 앉아라.”

에스텔이 자리를 보고 말했다.

“일부러 잡았어?”

“뭘?”

“문 보이는 자리.”

메이라는 술을 마셨다.

“헛소리 말고 앉아.”

에스텔은 웃었다.

---

에스텔도 메이라의 노래를 항상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전투 이야기를 지나치게 멋지게 만드는 것을 경계했다.

어느 날 메이라가 오래된 용병전의 노래를 불렀다.

칼이 부딪치는 장면.

마지막까지 버틴 병사.

죽음을 각오한 돌격.

관객들은 환호했다.

공연이 끝난 뒤 에스텔이 물었다.

“그 사람들 몇 명 죽었어?”

메이라가 대답했다.

“서른둘.”

“노래에는 세 명밖에 안 나오던데.”

메이라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에스텔은 화내지 않았다.

그저 말했다.

“멋있게 부르지 말라는 건 아니야.”

“응.”

“그런데 너무 멋있으면 죽는 게 쉬워 보여.”

메이라는 반박하지 않았다.

오래전 선장의 노래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메이라는 전투 노래를 만들 때 죽은 사람의 숫자를 한 번 더 확인하게 되었다.

가능하면 이름도 찾았다.

---

반대로 메이라는 에스텔의 사고방식을 가끔 견제했다.

에스텔은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을 숫자로 계산하는 버릇이 남아 있었다.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누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

퇴로가 하나라면 누구부터 보내야 하는지.

어디를 포기해야 피해가 줄어드는지.

판단은 지나치게 빨랐다.

어느 의뢰에서 에스텔이 말했다.

“이쪽 길은 버려야 해.”

메이라가 물었다.

“와?”

“저쪽으로 돌리면 열두 명은 살릴 수 있어.”

“이쪽은?”

에스텔이 잠시 침묵했다.

“세 명.”

메이라는 바로 말했다.

“그 세 명 이름은?”

에스텔의 표정이 굳었다.

메이라는 덧붙였다.

“니 판단이 틀렸다 카는 게 아니다.”

“…….”

“근데 버릴 거면 적어도 누굴 버리는지는 알고 버리자.”

에스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 세 사람의 이름을 직접 확인했다.

결정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에스텔은 그 이름들을 기억했다.

메이라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두 사람은 서로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메이라가 에스텔에게 과거의 살인을 용서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에스텔이 메이라에게 모든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대신 서로가 너무 쉬운 답을 내릴 때 한마디씩 끼어든다.

에스텔이 사람을 숫자로만 보려 하면 메이라가 이름을 묻는다.

메이라가 이야기를 지나치게 멋진 노래로 만들려 하면 에스텔이 누가 빠졌는지를 묻는다.

둘에게는 그것이 꽤 잘 맞는다.

물론 표현 방식은 조금 다르다.

“야, 또 계산질부터 하지 마라.”

“계산은 해야지.”

“알아. 근데 사람 이름도 같이 처넣으라고.”

“그럼 너도 노래에 사람 좀 덜 죽여.”

“내가 언제 죽였노?”

“너 노래 들으면 전쟁이 너무 멋있어 보여.”

“……그건 좀 아프네.”

이런 식이다.

---

모험가가 된 뒤 메이라는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사건이 끝난 뒤 듣는 이야기와,

사건 안에서 직접 듣는 이야기는 달랐다.

몬스터 토벌 하나만 해도 그랬다.

앞에서 싸운 사람은 몬스터의 이빨을 기억했다.

후방에서 부상자를 옮긴 사람은 동료의 비명을 기억했다.

마을 주민은 불타는 집을 기억했다.

의뢰주는 계약의 성공 여부를 기억했다.

길드 직원은 사망자와 부상자 숫자를 적었다.

근처 농부는 토벌대가 자기 밭을 짓밟은 일을 가장 먼저 말했다.

모두 같은 사건에 있었다.

하지만 같은 사건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메이라는 그것이 점점 더 재미있어졌다.

동시에 무서워졌다.

누구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남느냐에 따라 사건 자체가 다른 모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

전투에서는 류트와 바람마법을 함께 사용한다.

메이라는 강한 전사가 아니다.

대신 주변 사람의 움직임을 맞춘다.

노래의 박자에 맞춰 호흡을 정리한다.

달리는 동료의 보폭을 맞춘다.

공포로 몸이 굳은 사람에게 일정한 리듬을 들려준다.

적에게는 바람을 실은 음파를 날려 감각을 흐트러뜨린다.

문제는 전투 중에도 입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왼쪽 온다, 이 등신들아!”

“거기 혼자 처나가지 마!”

“니 뒤! 뒤 보라고 씨벌!”

어느 신참이 소리쳤다.

“응원 맞아요?!”

메이라는 류트를 뜯으며 대답했다.

“안 뒤졌으면 응원 맞지!”

이상하게도 효과는 좋다.

같이 싸워본 모험가들은 메이라의 욕설이 들리고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는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메이라는 그 평가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한다.

에스텔은 조금 다르게 평가한다.

“지시는 정확해.”

메이라가 웃는다.

“역시 알아보는 년은 다르네.”

에스텔이 덧붙인다.

“욕만 절반으로 줄이면 더 잘 들릴 것 같고.”

“취소해라.”

---

트리모니아에서 생활한다고 해서 부모와 멀어진 것은 아니다.

메이라가 독립한 지도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부모는 여전히 세레이온 변두리의 그 작은 마을에서 산다.

아버지는 밭과 작은 과수원을 돌본다.

어머니는 이웃들과 음식을 나누며 마을의 소문 대부분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낸다.

메이라는 틈날 때마다 편지를 보낸다.

편지의 절반은 여행 이야기다.

나머지 절반은 욕이다.

아버지는 답장할 때마다 마지막에 같은 문장을 쓴다.

‘몸조심하렴.’

어머니는 조금 다르다.

‘잘 처먹고 다녀라.’

메이라는 둘 다 같은 뜻이라고 생각한다.

---

몇 달에 한 번씩 시간이 나면 직접 찾아가기도 한다.

집 문을 열자마자 어머니가 말한다.

“왔나, 이 욕쟁이 년아.”

메이라는 짐을 내려놓으며 대답한다.

“엄마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디.”

아버지는 안쪽에서 나온다.

“왔니?”

“어. 안 뒤지고 왔다.”

“그 표현은 꼭 그렇게 해야겠니?”

“엄마한테 물어봐.”

어머니가 말한다.

“내 탓 하지 마라.”

세 사람의 관계는 1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메이라에게 그 집은 돌아가야만 하는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장소다.

그 차이를 메이라는 좋아한다.

---

한 번은 메이라가 에스텔에게 부모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길드에서 술을 마시던 날이었다.

메이라가 자랑하듯 말했다.

“우리 아부지는 탈영병이다.”

에스텔의 손이 잠깐 멈췄다.

메이라는 바로 알아챘다.

“왜.”

“아니.”

“니도 탈영했나?”

에스텔이 메이라를 바라봤다.

메이라도 바라봤다.

잠깐 침묵했다.

에스텔이 결국 웃었다.

“진짜 눈치 빠르네.”

메이라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뭐, 말하기 싫으면 말지 마라.”

“안 물어봐?”

“우리 아부지도 지 입으로 말할 때마다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니라고 한 번에 다 나오겠나.”

에스텔은 그 말에 조금 웃었다.

그날 처음으로 자신이 기사단에서 탈영했다는 사실만큼은 메이라에게 말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메이라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

훗날 메이라는 부모의 집에 에스텔을 한번 데려가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왜?”

에스텔이 물었다.

“탈영 선배한테 상담 좀 받아라.”

에스텔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봤다.

“무슨 상담.”

“탈영하고도 사십 년 넘게 멀쩡히 살아가는 법.”

“네 아버지 싫어하실 것 같은데.”

“아부지는 싫다 하면서 다 해준다.”

에스텔은 잠시 생각했다.

“언젠가는.”

메이라는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래. 니가 가고 싶을 때 가자.”

그게 두 사람 사이의 방식이었다.

---

아버지의 탈영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메이라는 오히려 더 자세히 묻는다.

“아부지.”

“왜?”

“그래서 진짜 왜 튄 건데?”

“또 그 이야기니?”

“전에 한 이야기 말고.”

아버지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어떤 이야기?”

메이라는 턱을 괴고 바라본다.

“남들한테 하는 이야기 말고.”

“…….”

“아부지 혼자 있을 때 생각나는 이야기.”

그러면 아버지의 답은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어떤 날은 명령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떤 날은 그냥 무서웠다고 한다.

어떤 날은 남겨두고 온 동료들에게 아직도 미안하다고 한다.

또 어떤 날은 탈영하지 않았다면 아내도 딸도 만나지 못했을 테니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전의 메이라라면 그중 진짜 이유를 찾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전부 진짜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 번에 하나의 이유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이미 오래전에 가르쳐준 사실이었다.

본인은 가르칠 생각이 없었겠지만.

---

어머니는 그런 메이라에게 어느 날 말했다.

“니 아부지가 영웅은 아니다.”

“알제.”

“그렇다고 겁쟁이 하나로 끝나는 인간도 아니고.”

“그것도 알제.”

어머니는 마늘을 다듬으며 말했다.

“사람이 원래 그런 기다.”

메이라는 한참 어머니를 바라봤다.

“엄마.”

“와.”

“방금 좀 멋있었다.”

어머니가 손을 멈췄다.

“뭐?”

메이라는 류트를 집었다.

“잠깐만. 후렴 나오겠다.”

“확 뒤질래?”

메이라는 도망쳤다.

노래는 그날 완성되지 못했다.

---

메이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제 거짓말이 아니다.

거짓말은 오히려 다루기 쉽다.

증거와 맞지 않으면 반박할 수 있다.

다른 증언을 찾을 수도 있다.

거짓말을 한 사람이 말을 바꿀 수도 있다.

메이라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아름답게 만들어진 진실이다.

거짓은 없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실제로 용감했던 사람이다.

실제로 누군가를 구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만 지나치게 잘 만들어져 있다.

노래하기 좋다.

기억하기 좋다.

영웅과 악당이 명확하다.

아이도 한번 들으면 외울 수 있다.

그런 이야기는 아주 오래 살아남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른 목소리가 하나씩 사라진다.

마지막에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만 남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메이라는 자기가 한 번 직접 그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무섭다.

---

에스텔은 그런 메이라가 가장 경계하는 종류의 이야기가 얼마나 쉽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전직 기사.

강한 검사.

수많은 사람을 구한 사람.

기사단을 탈영한 사람.

현재는 약초나 캐는 하급 모험가.

어느 부분만 골라도 훌륭한 노래가 된다.

영웅으로 만들 수도 있다.

비겁한 탈영병으로 만들 수도 있다.

피 묻은 살인자로 만들 수도 있다.

상처 입은 구원자로 만들 수도 있다.

메이라는 그중 어떤 노래도 만들지 않는다.

아직 에스텔이 자기 이야기를 모두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에스텔이 물었다.

“내 이야기 노래로 만들고 싶어?”

메이라는 대답했다.

“존나.”

에스텔이 웃었다.

“그런데 왜 안 만들어?”

메이라는 잠깐 생각했다.

“니가 아직 끝까지 안 불었잖아.”

“다 말하면?”

“그때 니한테 물어보고.”

“싫다고 하면?”

“안 만들지.”

에스텔은 한동안 메이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언젠가는 말해줄지도 모르겠다.”

메이라는 웃었다.

“천천히 해라.”

“나 기다리는 건 잘혀.”

그 말은 거짓이었다.

메이라는 기다리는 걸 아주 못한다.

그래도 그 이야기만큼은 기다릴 생각이다.

---

가끔 누군가는 묻는다.

“그래도 진실은 하나 아닙니까?”

메이라는 대답한다.

“그럴 수도 있제.”

“그러면 결국 하나를 찾아야 하잖아요.”

“찾으면 좋지.”

“그런데 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전부 남깁니까?”

메이라는 잠깐 생각한다.

그리고 류트를 툭 친다.

“내가 뭐 신도 아니고.”

“…….”

“뭐가 마지막 진실인지 지금 내가 어떻게 아노?”

상대가 대답하지 못하면 메이라는 웃는다.

“진실이 하나라면 언젠가 누군가는 제대로 부르겠지.”

“나는?”

“응.”

“일단 전부 남길란다.”

---

그렇다고 모든 증언을 똑같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메이라는 오히려 꽤 집요하다.

“직접 봤나?”

“몇 시였노?”

“니 옆에는 누가 있었고?”

“아까 말이랑 지금 말 다른데?”

“그건 니 생각이가, 아니면 누가 말했다는 기가?”

평소에는 농담과 욕설을 섞는다.

하지만 누군가 고의로 죽은 사람의 말을 바꾸거나,

자기 책임을 숨기기 위해 이야기를 꾸민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메이라의 말이 짧아진다.

욕도 줄어든다.

오히려 그쪽이 더 무섭다.

“야.”

상대가 돌아본다.

“죽은 사람은 와서 니 말 반박 못 한다.”

메이라는 상대를 똑바로 본다.

“그렇다고 니 편한 대로 입 빌려 쓰면 안 되제.”

그럴 때만큼은 노래를 만들지도 않는다.

먼저 사실을 확인한다.

---

트리모니아에서는 이제 메이라의 습관을 대부분 안다.

의뢰가 끝나면 곧바로 묻는다.

“니는 뭐 봤노?”

“저 사람은?”

“마을 주민 말은 들었나?”

“몬스터가 먼저 덤빈 건 맞고?”

어떤 모험가는 질려서 말한다.

“그냥 의뢰 성공이라고 쓰면 안 됩니까?”

메이라가 대답한다.

“안 된다.”

“왜요?”

“성공했다는 말은 의뢰주 이야기잖아.”

“그럼요?”

“다친 놈한테도 성공인지 물어봐야제.”

그녀의 기록에는 그래서 이상할 정도로 이름이 많다.

의뢰인.

동료 모험가.

현지 주민.

부상자.

구조된 사람.

문제가 생겼다면 반대편 당사자까지.

그 모든 것을 노래로 만들지는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노래보다 기록으로 남기는 편이 낫다는 것도 배웠다.

중요한 것은 모두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지워버리지 않는 것이다.

---

평소의 메이라는 여전히 시끄럽다.

동료가 넘어지면 먼저 웃는다.

“아따, 방금 꼬라지 존나 좋았다.”

“도와주기나 해!”

“잠깐만. 후렴만 적고.”

“메이라!”

“아 씨벌, 알았어!”

일으켜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정말 노래를 만든다.

하지만 상대가 진심으로 싫다고 하면 다시 부르지 않는다.

“그거 부르지 마.”

“진짜 싫나?”

“응.”

메이라는 바로 류트를 내려놓는다.

“알았다.”

그걸로 끝이다.

이야기를 남길 자유가 있다고 해서,

타인의 삶을 마음대로 공연할 권리까지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메이라는 지금도 오래전 폭풍 노래를 부른다.

첫 번째 영웅담도 없애지 않았다.

그것 역시 당시 자신이 들었고,

믿었고,

만들었던 이야기다.

대신 혼자 부르지 않는다.

선장의 노래가 끝나면 죽은 선원들의 노래를 부른다.

그다음에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노래를 부른다.

세 곡을 다 들은 청중의 반응은 늘 다르다.

“그래도 선장은 영웅이네.”

“아니지. 애초에 출항한 게 잘못이지.”

“난 모르겠다.”

세 번째 대답이 나오면 메이라는 가끔 웃는다.

판단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판단하기 전에 조금 더 들어보라는 뜻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

요즘 메이라는 또 하나의 노래를 만들고 있다.

아주 작은 이야기다.

전쟁도 없다.

왕도 없다.

몬스터도 나오지 않는다.

레흐니티에서 탈영한 엘프 하나가 있다.

그리고 입이 험한 하플링 여자가 있다.

둘이 우연히 만나,

세레이온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딸 하나를 키우고,

그 딸이 서른여섯이 되어 집을 떠난 뒤에도 계속 자기들끼리 싸우고,

밭에 물을 주고,

저녁을 먹고,

조금씩 늙어가는 이야기다.

아버지는 처음 듣자마자 말했다.

“굳이 내 탈영 이야기까지 넣어야 하니?”

메이라는 대답했다.

“핵심인데.”

“내 인생의 핵심이 탈영은 아니야.”

어머니가 옆에서 말했다.

“내 만난 게 핵심이제.”

메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건 좀 괜찮네.”

아버지가 억울해졌다.

“내 이야기는 내가 정하면 안 되니?”

메이라가 류트를 멈췄다.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웃었다.

“맞네.”

아버지가 놀란다.

메이라가 말했다.

“그럼 아부지 버전 하나 더 만들자.”

어머니가 바로 끼어들었다.

“내 것도.”

“엄마도?”

“니 아부지만 입 있나?”

메이라는 한숨을 쉬었다.

“아따, 씨벌.”

류트를 다시 들었다.

“이 집구석은 노래 하나 만들라 카면 세 곡이 나오네.”

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만든 거 아니니?”

메이라는 반박하지 못했다.

---

그리고 다시 까까몰리로 돌아온다.

세레이온의 부모 집은 여전히 그녀의 고향이다.

하지만 현재 메이라가 살아가는 곳은 까까몰리다.

자유모험가 길드 트리모니아의 의뢰판을 보고,

동료 모험가들과 술을 마시고,

항구에서 흘러들어오는 이야기를 듣고,

류트를 등에 멘 채 다음 의뢰로 떠난다.

10년 전 부모의 집을 나온 뒤 메이라는 자기 삶을 그렇게 만들어왔다.

부모를 버리고 떠난 것도 아니다.

돌아가지 못해서 떠도는 것도 아니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삶은 자신의 장소에서 살기로 한 것이다.

메이라는 그것도 꽤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모든 독립에는 싸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여행자에게 비극적인 고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부모가 있고,

잘 지내는 고향이 있고,

그래도 떠날 수 있다.

그리고 떠난 뒤에도 사랑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는 영웅담보다 덜 극적이다.

그래서 더 쉽게 사라진다.

메이라는 그런 것도 남기고 싶다.

---

트리모니아에서 에스텔과 보내는 시간도 이제 그런 작은 이야기 중 하나가 되었다.

둘이 같이 거창한 토벌을 하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약초를 캐고,

잃어버린 가축을 찾아주고,

길드 창고의 물건을 옮기고,

돌아오는 길에 술집에 들르는 날이 더 많다.

메이라는 그런 날의 이야기도 적어둔다.

에스텔이 약초를 두 종류 헷갈린 이야기.

메이라가 류트 줄을 끊어 욕한 이야기.

둘이 비를 피하려 들어간 폐창고에서 밤새 쥐와 싸운 이야기.

누구도 죽지 않는다.

나라의 운명도 바뀌지 않는다.

영웅도 없다.

메이라는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번은 에스텔이 물었다.

“그런 것도 노래가 돼?”

메이라가 대답했다.

“왜 안 돼?”

“아무 일도 없었잖아.”

“그래서 좋은 거지.”

에스텔이 메이라를 봤다.

메이라는 웃었다.

“사람 안 죽는 이야기도 좀 오래 살아야 될 거 아이가.”

에스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조금 웃었다.

“그건 마음에 드네.”

---

오늘도 트리모니아에서 새로운 의뢰서를 하나 집어 든다.

동료가 묻는다.

“이번에는 어디예요?”

메이라는 의뢰서를 펼친다.

잠깐 읽는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호오.”

“왜요?”

“의뢰주 말이랑 현지 보고가 벌써 다르네.”

동료가 한숨을 쉰다.

“싫은 예감이 드는데.”

“난 좋은데?”

“또 사람들 붙잡고 하루 종일 물어볼 거죠?”

메이라는 깃털모자를 눌러쓴다.

“당연하지.”

류트를 등에 멘다.

“사건 하나에 이야기가 두 개면?”

문을 연다.

“둘 다 들어야제.”

“세 개면요?”

“세 개.”

“열 개면?”

메이라가 뒤를 돌아본다.

아주 즐겁다는 얼굴이다.

“아따.”

“그건 존나 재밌겠네.”

그리고 길드 밖으로 나간다.

가끔은 옆에서 에스텔이 약초 채집 의뢰서를 들고 따라 나온다.

메이라가 묻는다.

“또 풀 캐러 가냐?”

“응.”

“세상에는 씨벌 몬스터도 많고 보물도 많은데 넌 맨날 풀이네.”

에스텔이 대답한다.

“사람 안 죽잖아.”

메이라가 잠깐 멈춘다.

그리고 웃는다.

“그건 그렇네.”

둘은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

누군가의 영웅담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가 옳은지 대신 결정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너무 커져,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는 일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다.

메이라는 여전히 아름다운 노래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따라 부르는 후렴도 좋아한다.

박수도 좋아한다.

술도 좋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아름다운 노래일수록 무엇을 빼버렸는지 한 번 더 봐야 한다는 것을.

류트 줄을 한번 튕긴다.

“자.”

그리고 언제나처럼 묻는다.

“니 이야기는 어떤데?”

낙석도시 바르 - 낙하회수조합 돌메아리 2명
HUM
휴밀
까까몰리 낙석도시 바르-낙하회수조합 돌메아리-조합장
“하아암… 아직 안 끝났어어. 밑에 하나 더 있거든.”
🩸 HP 160
💪 공격력 20
🧙 마법력 30
✨ 신비력 1
🛡️ 방어력 80
🔗 항마력 80
😖 신비저항 70
🏃 회피력 15
과거 보기
휴밀에게 땅속은 어두운 곳이 아니다.

적어도 인간들이 말하는 의미로는 그렇다.

빛은 없다.

색도 거의 없다.

대신 다른 것이 있다.

무게.

압력.

흐르는 지하수.

아주 천천히 벌어지는 암석의 틈.

수십 년 동안 몇 손가락만큼 이동하는 지층.

돌과 돌이 서로를 밀어내는 작은 진동.

휴밀에게 세상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

휴밀이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본인도 모른다.

사람들이 나이를 물으면 대충 대답한다.

“삼백칠십쯤……?”

“쯤이요?”

“으응…….”

“본인 나이잖아요.”

“매년 세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아……?”

인간에게는 별로 설득력 없는 대답이다.

휴밀에게는 충분하다.

---

처음부터 휴밀이라는 이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아주 오래전에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다.

땅속 어딘가에 머물다가,

비가 오래 오면 조금 위로 올라왔고,

지하수가 길을 바꾸면 따라 움직였으며,

맥류가 암반 사이에 고이면 그 근처에서 잠들었다.

잠이라고 부르지만 인간의 잠과는 조금 달랐다.

며칠.

몇 달.

가끔은 몇 년.

움직이지 않은 채 땅의 변화만 느끼는 시간이었다.

휴밀은 그걸 좋아했다.

---

그래서 지금도 잠이 많다.

정확히는,

인간 기준으로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별로 없으면 자는 편이다.

회의 중에도 하품한다.

보고를 받다가 눈을 감는다.

조합원들이 말한다.

“조합장.”

“으응…….”

“자죠?”

“안 자아…….”

“눈 감았는데요.”

“땅 보고 있어어…….”

“눈 감고요?”

“눈으로 땅 봐아……?”

대부분 여기서 조합원이 포기한다.

---

휴밀이 처음 인간을 본 것은 지금의 바르가 도시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던 시절이었다.

절벽 아래에 작은 채석장이 있었다.

사람들이 돌을 잘랐다.

수레에 실었다.

다른 곳으로 가져갔다.

휴밀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땅에서 돌을 떼어냈다가,

굳이 다른 곳에 쌓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집을 만들었다.

휴밀에게는 꽤 이상한 일이었다.

---

한번은 채석공이 암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휴밀이 뒤에서 한참 바라봤다.

채석공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속 망치를 휘둘렀다.

휴밀이 말했다.

“거기 치면 무너져어…….”

채석공이 비명을 질렀다.

망치도 떨어뜨렸다.

휴밀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애…….”

“누, 누구야!”

“나아……?”

“어디서 나왔어!”

휴밀은 자기가 나온 벽을 가리켰다.

채석공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

그날 휴밀은 인간이 돌벽 안에서 사람이 걸어 나오면 싫어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다음부터는 가능하면 입구로 다녔다.

항상 지키지는 않았다.

귀찮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휴밀을 땅의 정령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은 제물을 가져왔다.

휴밀은 받았다.

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과일은 꽤 마음에 들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했다.

휴밀은 조금 곤란했다.

“저기이…….”

“위대한 대지의 정령이시여.”

“나 그런 거 아닌데에…….”

“부디 올해도 채석장을 지켜주소서.”

휴밀은 한참 생각했다.

“안 무너지게 하라는 거야아……?”

“예.”

“그건 너희가 잘 파야지이…….”

기도는 별 효과가 없었다.

---

시간이 흐르면서 채석장 주변에 사람이 늘었다.

집이 생겼다.

길이 생겼다.

절벽 위에도 건물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단단한 바위를 깎아 층을 만들었다.

그 위에 또 집을 지었다.

다리를 놓았다.

계단을 만들었다.

광산을 팠다.

오래된 갱도를 더 깊게 연결했다.

도시는 위로도 자랐고,

아래로도 자랐다.

그렇게 바르가 되었다.

---

휴밀은 그 과정을 거의 전부 보았다.

정확히는 느꼈다.

사람들이 망치를 치는 진동.

말뚝을 박는 진동.

수레바퀴가 지나가는 진동.

사람 수천 명의 발걸음.

처음에는 시끄러웠다.

휴밀은 몇 번이나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올라왔다.

오래 듣다 보니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

인간의 도시는 땅처럼 느리지 않았다.

어제 없던 집이 오늘 생겼다.

십 년이면 길이 바뀌었다.

사람은 태어났다가,

휴밀이 잠깐 길게 자고 일어나면 늙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름을 외우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령님, 저 기억하세요?”

“으음…….”

“열다섯 해 전에 여기서 일하던 로안입니다.”

휴밀은 한참 바라봤다.

“작았던 애애……?”

“맞습니다!”

“왜 이렇게 늙었어어…….”

“열다섯 해 지났으니까요.”

“빠르네에…….”

---

바르에는 낙석이 많았다.

도시의 별명도 괜히 낙석도시가 아니었다.

절벽을 깎아 만든 도시였고,

광산과 채석장이 곳곳에 있었다.

비가 많이 오면 작은 돌이 떨어졌다.

겨울이 지나면 암반 틈이 벌어졌다.

무거운 화물을 잘못 옮기면 오래된 길이 무너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익숙했다.

낙석 경보가 울리면 벽 쪽으로 붙지 않았다.

아이들도 위를 보는 습관이 있었다.

휴밀에게는 그것도 조금 신기했다.

---

사람들은 종종 휴밀에게 물었다.

“어디가 위험합니까?”

휴밀은 땅에 발을 붙였다.

조금 기다렸다.

“저쪽…….”

“어느 쪽이요?”

“저기이…….”

“손가락으로 좀 가리켜주세요.”

“귀찮아아…….”

결국 가리켜줬다.

그곳을 파보면 실제로 금이 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

하지만 휴밀은 도시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바르 사람이 위험하다고 해서 언제나 나서지도 않았다.

땅의 정령에게 무너짐은 악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산은 깎인다.

절벽은 떨어진다.

강은 땅을 파낸다.

돌은 부서지고 다시 흙이 된다.

휴밀은 수백 년 동안 그것을 봤다.

무너짐도 땅의 일부였다.

---

사람이 만든 건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세웠다가 무너진다.

다시 세운다.

또 무너진다.

휴밀에게는 그저 조금 빠른 변화였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울었다.

휴밀은 왜 그렇게까지 슬픈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집은 다시 지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건은 다시 만들면 됐다.

사람도 언젠가는 죽었다.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그러던 어느 해였다.

바르에 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비 자체는 특별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전 몇 년 동안 도시 아래쪽에서 채굴이 크게 늘어난 것이었다.

오래된 갱도 위로 새로운 길이 놓였다.

그 위에는 창고가 지어졌다.

창고 위쪽 절벽에는 다시 주택이 들어섰다.

각각만 보면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땅 아래에서는 조금씩 무게가 쌓이고 있었다.

---

휴밀도 이상한 진동을 느꼈다.

깊은 곳에서 돌이 갈라졌다.

아주 조금.

다시 조금.

하루 뒤 또 조금.

휴밀은 잠에서 깼다.

발을 땅에 붙였다.

“으음…….”

평소와 다른 소리였다.

---

휴밀은 근처 작업장으로 갔다.

현장감독에게 말했다.

“아래 이상해애…….”

감독이 물었다.

“어디가요?”

“많이이…….”

그건 인간에게 별로 유용한 설명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기술자를 불렀다.

몇 곳을 조사했다.

눈에 띄는 균열은 발견되지 않았다.

며칠 뒤 다시 확인하기로 했다.

휴밀도 확신하지 못했다.

땅은 항상 움직였다.

모든 움직임이 붕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

다음 날 새벽이었다.

휴밀은 땅 아래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는 아주 컸다.

휴밀이 눈을 떴다.

“아.”

그리고 바르의 한 구역이 내려앉았다.

---

처음에는 길 하나가 꺼졌다.

그 아래 오래된 갱도가 무너졌다.

지지력을 잃은 창고 바닥이 내려앉았다.

창고 벽이 옆 건물을 밀었다.

위쪽 절벽 일부가 갈라졌다.

돌과 목재와 흙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하층의 집들이 묻혔다.

다리 하나가 끊어졌다.

사람들이 뛰었다.

낙석 경보가 뒤늦게 울렸다.

도시 전체가 진동했다.

---

휴밀에게 그 순간은 굉장히 시끄러웠다.

수천 개의 돌이 서로 부딪쳤다.

기둥이 부러졌다.

바닥이 갈라졌다.

사람들이 달렸다.

무거운 건물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휴밀은 잠깐 귀를 막듯 두 손을 머리에 올렸다.

물론 귀를 막는다고 땅의 진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끄러워어…….”

그리고 그 소리가 멈췄다.

---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부터 작은 진동들이 들렸다.

쿵.

쿵.

긁는 소리.

돌을 두드리는 소리.

잔해 아래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진동.

휴밀은 가만히 섰다.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곧 알았다.

사람이었다.

---

지상에서는 구조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삽을 가져왔다.

곡괭이를 가져왔다.

밧줄을 묶었다.

가족들이 울면서 잔해 쪽으로 달려들었다.

경비대가 막았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우리 애가 안에 있어요!”

“추가 붕괴 위험이 있습니다!”

“살아 있다고요!”

누구도 정확히 어디를 파야 하는지 몰랐다.

---

휴밀은 한동안 그것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듣고 있었다.

땅 아래에서 돌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두 번.

잠깐 쉬고.

세 번.

다시 두 번.

그 작은 진동이 계속 반복됐다.

휴밀은 결국 걸어갔다.

---

구조대원 하나가 무너진 벽을 파고 있었다.

휴밀이 말했다.

“거기 아니야아…….”

남자가 돌아봤다.

“뭐라고요?”

휴밀이 옆을 가리켰다.

“저쪽.”

“왜요?”

“안에 비었어어…….”

“뭐가요?”

“방 같은 거어…….”

남자가 이해하지 못했다.

휴밀은 하품을 했다.

“하아암…… 사람도 있어.”

그제야 모두가 멈췄다.

---

“살아 있습니까?”

휴밀은 고개를 기울였다.

“몰라아.”

“방금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사람 크기 움직이는 게 있다고 했지이…… 살아 있는지는 올라가봐야 알잖아아…….”

그 설명 역시 썩 친절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휴밀이 가리킨 곳을 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틈이 나왔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섯 명이 있었다.

넷은 걸어서 나왔다.

둘은 들것에 실렸다.

모두 살아 있었다.

---

그날부터 구조대는 휴밀을 따라다녔다.

“정령님, 여기 아래는 어떻습니까?”

“잠깐만…….”

휴밀이 맨발을 바닥에 댔다.

“이쪽 비어 있어어.”

“사람이 있습니까?”

“작은 거 하나 움직여어…….”

“어디로 들어가죠?”

“저 벽은 건드리지 마아…….”

“왜요?”

“무너지니까아.”

“그걸 먼저 말씀해주셔야죠!”

“지금 했잖아아…….”

---

휴밀의 마법은 강하지 않았다.

커다란 절벽을 들어올릴 수도 없었다.

도시 전체를 받쳐 세울 수도 없었다.

무너진 수백 톤의 암석을 한 번에 치워버리는 힘도 없었다.

대신 단단했다.

아주 단단했다.

돌이 떨어지면 맞았다.

먼지가 걷히면 다시 일어났다.

마력이 뒤엉킨 잔해에서도 잘 버텼다.

작은 암반을 밀어내고,

흔들리는 지반을 잠시 고정하고,

사람 한 명이 지나갈 틈을 유지하는 정도라면 할 수 있었다.

---

구조대원이 물었다.

“안 아픕니까?”

휴밀이 자기 어깨에 박힌 작은 돌조각을 뽑았다.

“아파아…….”

“그런데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요?”

“아프다고 크게 말하면 덜 아파아……?”

“……아뇨.”

“그럼 됐네에…….”

---

사흘 동안 구조는 계속됐다.

살아 있는 사람이 나왔다.

죽은 사람도 나왔다.

첫날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더 많았다.

둘째 날에는 비슷했다.

셋째 날부터는 죽은 사람이 더 많아졌다.

구조대의 움직임도 느려졌다.

다친 사람도 늘었다.

잔해 아래의 지반은 계속 불안정했다.

---

휴밀은 어느 구역 앞에서 멈췄다.

아래에 공간이 있었다.

작았다.

이미 많이 찌그러져 있었다.

그 안에 사람 크기의 무언가가 여럿 있었다.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휴밀은 말했다.

“여기 파자아…….”

구조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왜애……?”

“위쪽 지반이 내려앉고 있습니다.”

“알아아.”

“들어가면 구조대까지 매몰됩니다.”

휴밀은 다시 아래를 느꼈다.

“그래도 있어어.”

“압니다.”

---

휴밀이 처음으로 그 사람을 똑바로 봤다.

“알면서 왜 안 가아……?”

구조대장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뒤를 가리켰다.

지친 구조대원들이 있었다.

손에 붕대를 감은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눈을 뜨고 서 있기도 힘든 사람.

“저 사람들까지 묻으면 누가 다음 구역을 팝니까.”

휴밀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내가 갈게에…….”

---

혼자 들어갔다.

작은 틈을 넓혔다.

돌 하나를 밀었다.

다른 돌을 받쳤다.

몸으로 천장을 버텼다.

한 걸음씩 앞으로 갔다.

휴밀은 인간보다 훨씬 단단했다.

마력에 대한 저항도 강했다.

그러니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층은 사람 한 명과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

왼쪽을 받치면 오른쪽이 내려앉았다.

아래를 밀면 위의 무게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깨진 갱도 안으로 지하수가 들어왔다.

잔해 사이의 모래가 흘렀다.

휴밀의 힘으로 잠시 늦출 수는 있었다.

멈출 수는 없었다.

결국 등 뒤에서 큰 균열이 열렸다.

휴밀도 멈췄다.

앞으로 한 번 더 가면 돌아오기 어려웠다.

---

그녀는 한참 서 있었다.

바로 앞에는 매몰된 공간이 있었다.

몇 걸음 정도.

인간에게는 멀었다.

휴밀에게도 그날만큼은 멀었다.

그녀는 결국 뒤로 돌아왔다.

---

밖으로 나오자 구조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찾았습니까?”

휴밀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으응…….”

“생존자는요?”

“모르겠어어.”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까?”

휴밀은 뒤를 바라봤다.

지반이 한 번 더 울렸다.

“지금은 안 돼애…….”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며칠 뒤 구조는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더 이상 생존 가능성이 낮았다.

추가 붕괴 위험이 너무 컸다.

도시는 다른 구역의 안전까지 확보해야 했다.

사람들은 울었다.

화냈다.

항의했다.

그러다 조금씩 돌아갔다.

휴밀만 남았다.

---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휴밀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텅 빈 공간.

무너진 가구.

금속 조각.

나무 상자.

사람 크기의 형태.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씩 땅과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빈 곳에 흙이 들어갔다.

나무가 썩었다.

돌이 조금씩 내려앉았다.

휴밀에게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원래라면.

---

그런데 그때는 이상하게 싫었다.

땅이 무너지는 게 싫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죽는 게 처음이라서도 아니었다.

휴밀은 이미 수백 년을 살았다.

죽음도 많이 봤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이 위치를 알고 있었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알면서 그대로 묻혀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

며칠 뒤 사람 몇 명이 돌아왔다.

도시 관리와 상인들이었다.

무너진 구역의 복구를 논의하러 왔다.

지도를 펼쳤다.

어디를 다시 파낼지 표시했다.

휴밀도 옆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누워 있었다.

한 관리가 말했다.

“상층 창고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거긴 고가 화물이 많이 묻혔습니다.”

“하층 주택가는요?”

“생존자 수색은 종료됐습니다.”

“유해 수습은?”

잠깐 침묵이 있었다.

---

“가능한 구역만 진행하죠.”

“위험도가 너무 높습니다.”

“비용도 큽니다.”

“남은 물품 대부분도 가치가 낮을 겁니다.”

휴밀이 눈을 떴다.

“가치가 낮아아……?”

사람들이 그녀를 봤다.

“예.”

“어떻게 알아아……?”

“하층의 일반 주택입니다.”

“그래서어……?”

관리들은 잠깐 서로를 바라봤다.

---

“귀중품이 있을 가능성이 낮다는 뜻입니다.”

휴밀은 조금 생각했다.

“사람 뼈는?”

“그것은…….”

“비싸아……?”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럼 뭐가 비싼지 누가 정해애……?”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

휴밀에게는 이상했다.

땅 아래에서는 모두 비슷했다.

금화도 무게가 있었다.

숟가락도 무게가 있었다.

왕관도 돌에 눌리면 찌그러졌다.

아이의 장난감도 똑같이 묻혔다.

땅은 어느 쪽이 더 귀한지 몰랐다.

휴밀도 몰랐다.

그런데 사람들은 꺼내기도 전에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

휴밀은 다음 날 혼자 하층으로 갔다.

위험한 곳은 피했다.

갈 수 있는 곳부터 팠다.

공격마법이 강한 정령은 아니었다.

그래서 빨리 파지도 못했다.

돌 하나를 옮겼다.

흙을 조금 밀었다.

다시 잤다.

일어났다.

또 팠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

처음 발견한 것은 금도 보석도 아니었다.

찌그러진 주전자였다.

휴밀은 한참 바라봤다.

“이건…….”

누가 찾을지 몰랐다.

그래도 들고 올라왔다.

사람이 말했다.

“그걸 왜 가져왔습니까?”

휴밀이 대답했다.

“몰라아…….”

“버릴까요?”

“왜애……?”

“값이 없잖아요.”

휴밀은 주전자를 다시 봤다.

“네 거야아……?”

“아뇨.”

“그럼 왜 네가 정해애……?”

---

주전자는 사흘 뒤 주인을 찾았다.

나이 든 여자가 찾아왔다.

주전자를 보는 순간 울었다.

휴밀은 조금 당황했다.

“이거 비싼 거야아……?”

여자가 울면서 웃었다.

“아뇨.”

“그런데 왜 울어어……?”

“남편이 결혼할 때 사준 겁니다.”

휴밀은 주전자를 봤다.

다시 여자를 봤다.

“남편은?”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휴밀은 더 묻지 않았다.

---

다음에는 부러진 목제 인형이 나왔다.

한쪽 팔이 없었다.

얼굴의 칠도 벗겨졌다.

누군가 말했다.

“그건 진짜 버려도 되지 않습니까?”

휴밀은 이제 익숙하게 대답했다.

“네 거야아……?”

“아뇨.”

“그럼 둬어…….”

일주일 뒤 아이 하나가 찾아왔다.

인형을 끌어안고 울었다.

---

어떤 물건은 아무도 찾지 않았다.

낡은 숟가락.

한 짝만 남은 장갑.

깨진 안경.

이름 없는 열쇠.

젖어 글자가 번진 편지.

휴밀은 전부 한쪽에 모았다.

사람들은 점점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씩 도와주기 시작했다.

---

처음 온 사람은 광부였다.

“거기 혼자 파면 한 달 걸립니다.”

휴밀이 하품했다.

“한 달이면 되네에…….”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뭐가 문제야아……?”

광부는 말없이 곡괭이를 들었다.

그날부터 둘이 팠다.

---

다음에는 석공이 왔다.

“그 받침 그렇게 세우면 다시 무너집니다.”

휴밀이 말했다.

“안 무너지는데에…….”

“정령님이 붙잡고 있으니까 그렇죠.”

“으응…….”

“계속 붙잡고 있을 겁니까?”

휴밀이 잠깐 생각했다.

“그건 귀찮은데에…….”

석공이 제대로 된 지지대를 만들었다.

---

밧줄을 잘 다루는 사람이 왔다.

절벽을 타는 사람이 왔다.

유품을 정리하던 서기가 왔다.

시신을 확인할 줄 아는 사람이 왔다.

누군가는 돈을 받고 일했다.

누군가는 가족을 찾기 위해 왔다.

누군가는 그냥 도왔다.

휴밀은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사람이 늘었다.

---

문제도 생겼다.

휴밀은 안전규칙을 잘 몰랐다.

자기가 버틸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광부가 소리쳤다.

“거기 들어가면 안 됩니다!”

“왜애……?”

“천장이 무너질 수 있어요!”

“받치면 되는데에…….”

“정령님은 받칠 수 있겠죠!”

“으응.”

“우리는 깔리면 죽습니다!”

휴밀이 멈췄다.

그건 꽤 중요한 차이였다.

---

휴밀은 인간의 구조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밧줄 하나에 몇 명까지 매달릴 수 있는지.

목재 지지대는 어떤 각도로 세워야 하는지.

구조대는 몇 시간마다 교대해야 하는지.

먼지가 많은 곳에서 얼마나 오래 작업하면 안 되는지.

비가 온 뒤에는 어떤 갱도를 먼저 닫아야 하는지.

휴밀에게는 대부분 귀찮았다.

하지만 외웠다.

사람이 죽으면 다음 작업이 더 귀찮아진다는 것도 곧 알게 됐다.

---

한 번은 젊은 구조원이 무리해서 잔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가족의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다.

휴밀이 말했다.

“가지 마아…….”

“왜요?”

“무너져어.”

“조금만 들어갔다 오겠습니다.”

“안 돼애…….”

“제 형이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휴밀은 잠깐 말이 없었다.

---

예전 같으면 같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뒤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그 젊은 사람을 기다리는 동료들이 있었다.

휴밀은 오래전 구조대장의 말을 기억했다.

저 사람들까지 묻으면 누가 다음 구역을 파느냐고.

휴밀은 젊은 사람의 어깨를 잡았다.

“오늘은 안 돼애.”

“조합장.”

“비 그치고 다시 와아.”

“형이 안에 있다고요!”

휴밀의 목소리는 여전히 느렸다.

“알아아.”

“알면서 어떻게—”

“너까지 넣으면 둘 찾아야 되잖아아…….”

젊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휴밀도 그 말을 하고 나서 한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철수 명령을 취소하지 않았다.

사흘 뒤 비가 그쳤다.

지지대를 세웠다.

다시 들어갔다.

유해를 찾았다.

젊은 사람은 형의 인식표를 받아 들었다.

휴밀은 옆에서 하품했다.

그 사람은 울었다.

휴밀은 그냥 기다렸다.

---

사람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이름이 필요해졌다.

한 관리가 물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무슨 단체입니까?”

휴밀은 대답했다.

“몰라아…….”

광부가 말했다.

“조합장님이 시작했으니 조합장님이 정하시죠.”

“싫어어…….”

“왜요?”

“이름 생각하는 거 귀찮아아…….”

모두가 한숨을 쉬었다.

---

그 무렵 휴밀은 구조할 곳을 찾을 때 작은 돌망치로 벽을 두드리는 버릇이 있었다.

똑.

잠깐 기다린다.

다시 똑.

돌 속으로 울림이 들어간다.

빈 공간이 있으면 돌아오는 느낌이 달랐다.

어느 서기가 그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돌에서 메아리 찾는 사람들이네요.”

휴밀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으응…….”

“돌메아리 어때요?”

“괜찮네에…….”

“진짜 그걸로 합니까?”

“이미 물어봤잖아아…….”

그렇게 이름이 정해졌다.

---

낙하회수조합 돌메아리.

처음부터 거창한 조직은 아니었다.

작은 창고 하나를 빌렸다.

밧줄 몇 묶음.

곡괭이.

도르래.

지지대용 목재.

그리고 주인을 찾지 못한 물건들이 있었다.

휴밀은 조합장이 되었다.

본인은 싫어했다.

---

“왜 내가 조합장이야아…….”

광부가 말했다.

“정령님 때문에 시작됐잖습니까.”

“너 하면 안 돼애……?”

“싫습니다.”

“왜애……?”

“귀찮으니까요.”

휴밀이 잠깐 그를 봤다.

“그건 이해돼애…….”

결국 자기가 했다.

---

돌메아리는 점점 일이 많아졌다.

낙석으로 묻힌 사람을 찾았다.

절벽 아래로 떨어진 화물을 회수했다.

무너진 집 안에서 유품을 꺼냈다.

폐광에서 실종자를 찾았다.

위험한 암반을 제거했다.

시신도 수습했다.

주인을 찾지 못한 물건은 기록했다.

누군가는 그들을 구조대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유실물 조합이라고 불렀다.

휴밀은 둘 다 상관없다고 했다.

---

어느 날 부유한 상인이 찾아왔다.

절벽 아래로 금고가 떨어졌다고 했다.

돈을 많이 주겠다고 했다.

같은 날 다른 의뢰도 들어왔다.

오래된 하층 주택이 무너졌고,

그 안에서 죽은 노동자의 유품을 찾아달라는 요청이었다.

보수는 거의 없었다.

조합원이 물었다.

“어느 쪽 먼저 갑니까?”

휴밀이 하품했다.

“위험도부터 봐아…….”

“금고가 더 비싸긴 합니다.”

휴밀이 눈을 떴다.

“그래서어……?”

---

“돈을 많이 줍니다.”

“으응.”

“조합 운영에도 도움이 되고요.”

“그렇지이…….”

“그러면 금고부터?”

휴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이.”

“왜요?”

“둘 다 의뢰잖아아.”

“그건 그렇지만.”

“돈 많은 쪽을 먼저 하면 돈 없는 사람 물건은 계속 뒤로 가잖아아…….”

휴밀은 잠깐 생각했다.

“그건 좀 이상해애.”

---

그렇다고 항상 가난한 사람을 먼저 돕는 것도 아니다.

휴밀은 그런 기준도 만들지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이 매몰되어 있으면 그쪽이 먼저다.

추가 붕괴가 임박한 곳이 있으면 먼저 처리한다.

오늘 들어갈 수 있지만 내일은 못 들어갈 장소가 있으면 그곳부터 간다.

그 뒤에 들어온 순서를 본다.

물건의 가격은 마지막에 본다.

휴밀에게 회수의 우선순위와 물건의 시장가치는 다른 문제였다.

---

한 상인이 화를 낸 적도 있다.

“내 금고 안에 얼마가 들었는지 알아?”

휴밀이 대답했다.

“몰라아.”

“저 낡은 상자 천 개보다 비쌀 거야!”

휴밀은 옆에 놓인 낡은 상자를 봤다.

“그럴 수도 있지이…….”

“그럼 왜 저걸 먼저 회수해!”

“먼저 떨어졌거든.”

“돈을 두 배로 주지!”

“으음…….”

휴밀은 잠깐 고민했다.

“돈은 좋긴 한데에…… 순서 바꾸면 저 상자 주인한테 물어봐야지이.”

상인은 어이가 없었다.

---

휴밀에게 중요한 것은 공평함이라는 거창한 말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저 이해가 안 됐다.

남의 것을 찾으러 온 사람이,

그 물건을 꺼내보기도 전에,

“이건 가치가 없다”고 결정하는 것이.

휴밀에게 땅은 그런 결정을 하지 않는다.

금화를 더 부드럽게 묻어주지도 않는다.

쓰레기를 더 깊게 삼키지도 않는다.

전부 그냥 떨어진다.

전부 그냥 묻힌다.

---

그래서 휴밀은 자주 말한다.

“일단 꺼내애.”

“그다음에?”

“주인 찾고오…….”

“주인을 못 찾으면요?”

“기록하고오…….”

“그래도 아무도 안 오면?”

휴밀이 하품한다.

“그때 버릴지 생각해애…….”

“몇 년 뒤에요?”

“몰라아…….”

서기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답이다.

---

당연히 모든 물건을 영원히 보관할 수는 없었다.

돌메아리 창고가 꽉 찼다.

두 번째 창고도 꽉 찼다.

세 번째 창고 계약서를 보고 회계담당자가 휴밀을 찾아왔다.

“조합장.”

“으응…….”

“이제 진짜 버려야 합니다.”

“싫은데에…….”

“돈 없습니다.”

“으음…….”

“건물도 없습니다.”

“바닥에 놓으면…….”

“바르 길바닥에 유실물 쌓아놓을 생각입니까?”

휴밀은 포기했다.

---

그 뒤 규칙이 만들어졌다.

일정 기간 주인을 찾는다.

중요한 특징을 기록한다.

가능하면 그림도 남긴다.

문서와 편지는 읽을 수 있는 만큼 보존한다.

그 뒤에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처분한다.

휴밀은 처음에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도 받아들였다.

땅 위의 공간은 땅 아래처럼 무한하지 않았다.

조합을 유지해야 다음 것을 꺼낼 수 있었다.

---

휴밀은 그렇게 인간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모든 것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

모든 곳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모든 물건을 보관할 수 없다는 것.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

철수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

그리고 포기와 보류는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

---

지금의 돌메아리에서는 휴밀이 철수 명령을 내린다.

처음 온 조합원들은 의외라고 생각한다.

가장 오래 찾는 사람이 휴밀이기 때문이다.

하루가 지나도 찾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기록을 지우지 않는다.

십 년 전에 사라진 물건도 새로운 단서가 나오면 다시 찾아본다.

그런 휴밀이 현장에서는 가장 먼저 말할 때가 있다.

“여기까지이…….”

---

“조합장, 아직 아래에 있습니다.”

“알아아.”

“조금만 더 파면 됩니다.”

“아니이.”

“왜요?”

휴밀이 발밑을 느낀다.

아래에서 암반이 천천히 밀린다.

“십 분 안에 내려앉아아.”

“그럼 서두르면—”

“안 돼애.”

평소와 같은 느린 말투다.

그래서 오히려 조합원들은 안다.

결정이 끝났다는 것을.

---

누군가 따지기도 한다.

“조합장님은 안 죽잖습니까!”

휴밀은 고개를 기울인다.

“나도 죽을 수 있어어…….”

“우리보다 훨씬 잘 버티잖아요.”

“그건 맞아아.”

“그러면 조합장님만 들어가면—”

“싫어어.”

휴밀은 아주 간단하게 거절한다.

“왜요?”

“내가 깔리면 다음 현장 누가 땅 봐아…….”

그것도 구조를 계속하기 위해 배운 계산이다.

---

휴밀은 아직도 무너진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무너짐 자체를 싫어하지 않는다.

땅은 무너진다.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아무리 잘 지어도 영원히 버티는 건물은 드물다.

휴밀은 그 사실을 인간보다 훨씬 잘 안다.

그래서 바르를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도시로 만들 생각도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

대신 무너진 뒤에 무엇을 할지는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찾는다.

물건을 찾는다.

시신을 찾는다.

찾은 것을 기록한다.

주인이 있으면 돌려준다.

가족이 있으면 인계한다.

아무도 없으면 한동안 기다린다.

그리고 정말 놓아야 할 때가 오면,

적어도 무엇을 놓았는지는 남긴다.

---

누군가 휴밀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합니까?”

휴밀은 한참 생각했다.

하품을 했다.

“하아암…….”

상대는 기다렸다.

휴밀은 여전히 생각했다.

“땅은 모르거든…….”

“뭘요?”

“뭐가 귀한지이…….”

상대가 이해하지 못했다.

휴밀은 발밑을 툭툭 두드렸다.

“금화 떨어뜨려도 묻고오…… 숟가락 떨어뜨려도 묻어어.”

“그렇죠.”

“사람도 똑같아아.”

“…….”

“그러니까 우리가 대신 정하면 이상하잖아아.”

---

“무엇을요?”

휴밀이 대답한다.

“꺼낼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이.”

그것이 휴밀이 돌메아리를 만든 이유에 가장 가까운 대답이다.

---

그녀는 모두를 구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모든 시신을 반드시 찾겠다고도 하지 않는다.

모든 물건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겠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실제로 불가능하다.

휴밀은 그 사실을 이미 오래전에 배웠다.

하지만 가능하지 않다는 것과,

처음부터 가치 없다고 정해버리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

그래서 돌메아리의 기록에는 이상한 물건들이 많다.

‘황동 단추 하나.’

‘깨진 찻잔 세 조각.’

‘이름 불명의 남성 유골.’

‘글자가 지워진 편지.’

‘검은색 아동용 신발 한 짝.’

‘잠금장치가 파손된 상인 금고.’

모두 같은 장부에 들어간다.

시장가격은 따로 적힌다.

기록 자체의 크기는 비슷하다.

휴밀이 그렇게 만들었다.

---

바예나가 돌메아리에 들어온 뒤에는 현장이 조금 더 시끄러워졌다.

표범 수인인 바예나는 빠르다.

아주 빠르다.

휴밀과는 거의 모든 면에서 반대다.

“조합장! 오른쪽 통로 갈 수 있어?”

“잠깐만아…….”

“빨리!”

“땅은 네가 소리친다고 빨라지지 않아아…….”

“내 속은 터진다고!”

“그건 내가 못 고쳐어…….”

이런 대화를 자주 한다.

---

그래도 둘은 현장에서 잘 맞는다.

휴밀이 땅을 읽는다.

바예나가 내려간다.

휴밀이 말한다.

“오른쪽 세 걸음 뒤에 벽 있어어…….”

바예나는 이미 움직이고 있다.

“그 뒤는?”

“아래로 빈 공간.”

“사람?”

“사람만 해애…….”

“살아 있어?”

“모른다니까아…….”

“알았어. 보고 올게!”

밧줄이 팽팽해진다.

휴밀은 그 진동을 느끼면서 기다린다.

---

조합원들은 가끔 휴밀이 감정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시신을 발견해도 목소리가 변하지 않는다.

“둘 찾았어어…….”

“생존자입니까?”

“아니이. 죽었어어.”

너무 담담하다.

누군가는 처음 들으면 당황한다.

하지만 오래 일한 사람들은 안다.

휴밀은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특별한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

사람은 죽는다.

집은 무너진다.

물건은 부서진다.

휴밀에게는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죽었다고 해서 없었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부서졌다고 해서 주인이 없었던 물건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

가끔 가족이 찾아온다.

“아버지 시신을 꼭 찾아주세요.”

휴밀은 쉽게 약속하지 않는다.

“찾아볼게에…….”

“꼭 찾아주셔야 합니다.”

“꼭은 못 해애.”

상대가 상처받은 얼굴을 한다.

휴밀은 그래도 말을 바꾸지 않는다.

“못 들어가는 데면 못 들어가아.”

“…….”

“대신 갈 수 있게 되면 다시 갈게에.”

그것이 휴밀이 할 수 있는 약속이다.

---

어떤 가족은 화를 낸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이 너무 냉정하다고 한다.

휴밀은 변명하지 않는다.

예전의 자신도 아래에 사람이 있다고 해서 무작정 들어갔다.

그리고 결국 돌아섰다.

돌아올 수 없는 약속을 하는 것보다,

갈 수 있을 때 다시 가겠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배웠다.

---

돌메아리 창고 한쪽에는 아직도 최초의 대붕괴에서 나온 물건들이 남아 있다.

주인을 찾지 못한 것들이다.

대부분은 기록으로만 남기고 처분되었다.

하지만 몇 개는 휴밀이 직접 보관을 요청했다.

그중 하나가 찌그러진 작은 금속표다.

이름도 거의 지워졌다.

누구 것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휴밀은 가끔 그것을 본다.

---

누군가 물었다.

“그건 왜 안 버려요?”

휴밀이 대답했다.

“몰라아…….”

“조합장님도 이유 없이 보관하는 게 있네요.”

“으응.”

“그럼 가치가 있는 건가요?”

휴밀은 한참 생각한다.

“나한테는 그런가 봐아…….”

그 대답을 하고 본인이 조금 놀란다.

---

수백 년을 살았지만 휴밀도 아직 인간에게서 배우는 것이 있다.

가치는 물건 안에 붙어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

같은 물건도 누구에게는 쓰레기고,

누구에게는 다시 볼 수 없는 한 사람의 흔적일 수 있다는 것.

그걸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바르의 대붕괴 이후였다.

그래서 휴밀은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적어도 자기 것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

오늘도 바르 어딘가에서 경보가 울린다.

낙석이다.

돌메아리 본부가 시끄러워진다.

사람들이 밧줄을 챙긴다.

갈고리를 챙긴다.

도르래와 지지대를 수레에 싣는다.

바예나가 문을 열어젖힌다.

“조합장! 일어났어?”

구석에서 휴밀이 몸을 일으킨다.

“방금까지 잘 자고 있었는데에…….”

“알았으니까 빨리 와!”

“하아암…… 어디 무너졌는데에…….”

---

현장에 도착하면 휴밀은 신발부터 벗는다.

맨발을 땅에 댄다.

눈을 감는다.

주변 사람들은 조용해진다.

몇 초.

조금 더.

휴밀의 발끝으로 아주 작은 진동이 올라온다.

금이 간 암반.

흘러내리는 흙.

잔해 아래의 빈 공간.

그리고 어딘가에서,

톡.

아주 작은 울림 하나가 돌아온다.

---

휴밀이 하품한다.

“하아암…….”

바예나가 참지 못하고 묻는다.

“뭐 있어?”

휴밀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킨다.

“으응…… 저 아래.”

“사람?”

“아마아…….”

“얼마나 깊어?”

휴밀은 잠깐 더 듣는다.

그리고 느릿하게 말한다.

“많이는 아니야아.”

바예나는 이미 밧줄을 묶고 있다.

---

휴밀은 그 모습을 바라본다.

수백 년 전에는 인간이 왜 무너진 돌더미를 다시 파헤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돌은 다시 흙이 되고,

사람도 언젠가 죽는데.

지금은 조금 안다.

땅속으로 들어갔다고 모든 것이 땅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떨어진 것에는 아직 돌아갈 곳이 있을 수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휴밀이 정하지 않는다.

돌메아리도 정하지 않는다.

일단 꺼낸다.

그리고 묻는다.

---

“이거 네 거야아……?”

누군가 그렇다고 하면 돌려준다.

아니라고 하면 다음 사람을 찾는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면 기록한다.

아직 꺼낼 수 없다면 위치를 남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간다.

휴밀에게 돌메아리는 세상을 구하기 위한 조직이 아니다.

모든 것을 보존하기 위한 조직도 아니다.

땅이 삼킨 것의 가치를 땅 대신 정해버리지 않기 위한 조직이다.

---

그래서 누군가 값싼 물건 하나를 들고 묻는다.

“조합장, 이거 정말 보관할 필요 있어요?”

휴밀은 대개 하품부터 한다.

“하아암…….”

그리고 똑같이 묻는다.

“네 거야아……?”

“아뇨.”

“그럼 네가 왜 정해애…….”

BYN
바예나
까까몰리 낙석도시 바르-낙하회수조합 돌메아리-선임회수원
“내려가는 건 아무나 해. 데리고 올라와야 일이 끝나는 거지.”
🩸 HP 130
💪 공격력 60
🧙 마법력 5
✨ 신비력 1
🛡️ 방어력 45
🔗 항마력 30
😖 신비저항 45
🏃 회피력 85
과거 보기
바예나는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이 없다.

정확히는,

태어났을 때 누군가 이름을 지어주었는지는 모른다.

기억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혼자였기 때문이다.

부모의 얼굴도 모른다.

목소리도 모른다.

왜 버려졌는지도 모른다.

누가 처음 자신을 발견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프라그모의 추위였다.

---

영원도시 프라그모.

북부의 눈과 얼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도시.

불멸기록원이 수백 년 된 문서를 보존하고,

서리성벽군단이 북쪽의 위험을 막으며,

오래된 건물과 이름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곳.

하지만 모든 것이 보존되는 도시에서도,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 사람은 있었다.

바예나는 그중 하나였다.

---

그녀가 자란 곳은 프라그모의 뒷골목이었다.

햇빛이 오래 머물지 않는 좁은 길.

눈이 내리면 가장 늦게 치워지는 곳.

난방비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한 방에 모여 자는 곳.

아침이 되면 누군가 사라져도 이유를 묻지 않는 곳.

바예나는 거기에서 이름 없이 자랐다.

---

아무도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야.”

“너.”

“점박이.”

“고양이.”

가끔은 욕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누가 자신을 계속 찾아야 할 일도 없었다.

학교에 간 적도 없었다.

출생을 등록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라고 부를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이름이 필요할 이유도 없었다.

---

어린 바예나는 그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교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있는 아이를 보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녁이 되면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이.

누군가가 늦었다고 화를 내준다는 것이.

밥을 먹었는지 묻는다는 것이.

바예나에게는 전부 낯선 일이었다.

---

대신 그녀에게는 타고난 것이 있었다.

표범 수인의 몸.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속도.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벽도 발 디딜 곳만 있으면 올라가는 등반 능력.

어린아이의 몸이라고 믿기 힘든 힘.

균형감각.

그리고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봐도 떨리지 않는 배짱.

---

그 능력들은 뒷골목에서 꽤 유용했다.

먹을 것을 훔쳤을 때.

상점 주인이 소리치면 달렸다.

큰길이 막히면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 끝이 막혀 있으면 벽을 탔다.

지붕에 올라갔다.

다른 지붕으로 뛰었다.

경비가 계단으로 올라올 때는 이미 반대편 건물 아래에 있었다.

---

한 번은 빵을 훔치다 붙잡힐 뻔했다.

상점 주인이 바예나의 팔을 잡았다.

“잡았다, 이 도둑년!”

바예나는 손목을 비틀었다.

남자의 손이 풀렸다.

빵을 입에 문 채 옆 건물 벽을 뛰어올랐다.

“야!”

세 걸음.

창틀.

배수관.

처마.

지붕.

몇 초 뒤였다.

바예나는 위에서 남자를 내려다봤다.

“올라와 봐.”

남자가 욕을 했다.

바예나는 빵을 뜯어먹었다.

---

다른 아이들은 바예나와 싸우기를 꺼렸다.

덩치가 큰 아이보다 힘이 셌다.

무엇보다 잡기가 어려웠다.

바예나는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보다,

싸움 자체를 자기에게 유리한 장소로 옮기는 방법을 먼저 배웠다.

평지에서 세 명이 둘러싸면 벽을 탔다.

좁은 골목에서는 가장 큰 놈을 밀어 길을 막았다.

잡히면 물었다.

할퀴었다.

차고 도망갔다.

명예 같은 것은 없었다.

살아남으면 그만이었다.

---

그래서 바예나는 지금도 정면에서 오래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 묻는다.

“힘도 센데 왜 계속 피하면서 싸워?”

바예나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한다.

“맞으면 아프잖아.”

“그래도 이길 수 있잖아.”

“안 맞고 이기면 되잖아.”

그녀에게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

겨울은 가장 힘들었다.

프라그모의 추위는 가난한 사람에게 더 오래 남았다.

바예나는 폐창고에 들어가 잤다.

굴뚝 근처의 따뜻한 벽을 찾아다녔다.

어떤 날은 버려진 천을 몸에 감았다.

어떤 날은 남의 집 외벽에 붙어 있는 난방관 옆에서 웅크렸다.

잠들면 얼어 죽을 것 같은 날에는 아예 밤새 걸었다.

---

그녀는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굶어서.

추워서.

싸움 때문에.

잘못 훔친 사람에게 잡혀서.

그러나 살아남았다.

바예나에게 살아남는다는 건 특별한 의지가 아니었다.

그냥 매일 해야 하는 일이었다.

---

조금 더 자라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어린아이가 먹을 것을 훔치면 운이 좋을 때는 쫓아내는 것으로 끝났다.

몸이 커지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그녀를 아이가 아니라 범죄자로 보기 시작했다.

경비가 잡으려고 했다.

상인들은 몽둥이를 들었다.

뒷골목의 조직들은 바예나를 데려가려고 했다.

힘 좋고 빠른 표범 수인은 쓸모가 많았다.

바예나는 그들이 무슨 일을 시키고 싶은지 대충 알았다.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

어느 겨울,

함께 지내던 아이 하나가 사라졌다.

며칠 뒤 소문이 들렸다.

어느 조직의 운반책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 뒤로 다시 보지 못했다.

죽었는지도 몰랐다.

도망갔는지도 몰랐다.

바예나는 찾지 않았다.

찾을 방법도 없었다.

그날 처음으로 생각했다.

자기도 계속 여기 있으면 어느 날 그렇게 사라질 것이라고.

---

대단한 꿈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부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매일 먹을 것을 훔치지 않아도 됐으면 했다.

겨울에 잠들어도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는 방이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일을 했으면 돈을 받았으면 했다.

그 정도였다.

---

그 무렵 프라그모의 한 귀족가에서 사용인을 모집했다.

지원 조건은 까다롭지 않았다.

힘이 좋을 것.

높은 곳의 작업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명령을 잘 따를 것.

숙식 제공.

정기 급여.

바예나는 마지막 두 줄을 여러 번 읽었다.

---

지원하러 갔을 때 문제가 생겼다.

접수 담당자가 물었다.

“이름.”

바예나는 잠깐 멈췄다.

“없는데.”

“뭐?”

“없다고.”

담당자는 바예나를 한참 바라봤다.

결국 서류 한쪽에 임시 표식만 적었다.

출신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가족도 없었다.

추천인도 없었다.

---

그래도 시험은 통과했다.

무거운 상자를 들었다.

두 사람이 옮기던 짐을 혼자 옮겼다.

높은 창고 선반에 올라가라는 말을 듣자 사다리를 쓰지 않았다.

기둥을 잡고 그대로 올라갔다.

감독이 소리쳤다.

“사다리 써!”

바예나는 위에서 내려다봤다.

“이게 더 빠른데.”

“떨어지면?”

“안 떨어져.”

그날 합격했다.

---

귀족가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처음에는.

아침마다 음식이 나왔다.

잠잘 방이 있었다.

작지만 자기 침대도 있었다.

비가 와도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겨울에도 얼어 죽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급여도 정해진 날에 들어왔다.

바예나는 그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

일은 힘들었다.

하지만 뒷골목에서 살아남는 것보다는 쉬웠다.

석탄을 날랐다.

창고를 정리했다.

높은 곳의 창문을 닦았다.

지붕의 눈을 치웠다.

무거운 가구를 옮겼다.

주인이 떨어뜨린 물건을 찾아오기도 했다.

시키는 일을 하면 됐다.

대가도 있었다.

바예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

다른 사용인들이 물었다.

“힘들지 않아?”

바예나는 상자를 들고 대답했다.

“돈 주잖아.”

“그래도 주인 성격 더럽잖아.”

“돈 주잖아.”

“일 너무 많잖아.”

“돈 주잖아.”

당시의 바예나에게 고용관계는 단순했다.

일을 한다.

돈을 받는다.

서로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면 된다.

---

그 집의 귀족도 처음에는 바예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힘 좋은 사용인.

높은 곳에 잘 올라가는 수인.

그 정도였다.

바예나도 주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하지도 않았다.

급여를 주는 사람이었다.

그뿐이었다.

---

몇 년이 지났다.

바예나는 성년이 되었다.

몸도 완전히 자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주인의 시선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복도를 지나갈 때 오래 쳐다봤다.

가까이서 할 필요가 없는 심부름을 시켰다.

다른 사용인을 보내도 되는 일에 바예나만 불렀다.

---

어느 날 주인이 손을 잡았다.

필요 이상으로 오래 잡고 있었다.

바예나는 손을 빼냈다.

“왜.”

귀족이 웃었다.

“사용인이 주인의 손을 그렇게 뿌리치나?”

“일 끝났잖아.”

“말버릇도 여전하군.”

바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은 그렇게 끝났다.

---

그다음부터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어깨에 손을 올렸다.

허리를 만지려고 했다.

가까이 오라고 했다.

바예나는 매번 피했다.

노골적으로 밀쳐내지는 않았다.

일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녀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었다.

귀족가에서 나오면 다시 뒷골목이었다.

겨울.

배고픔.

훔치고 도망치는 생활.

바예나는 그곳으로 돌아가기 싫었다.

그래서 참았다.

선을 넘기 직전에 피했다.

다음에는 조금 더 멀리 서 있었다.

혼자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

다른 사용인에게 말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주인이 나를 이상하게 봐.”

그래서 어쩌라고.

자기 머릿속에서는 그런 대답이 먼저 나왔다.

귀족은 집의 주인이었다.

바예나는 출신도 가족도 이름도 제대로 없는 사용인이었다.

누가 누구의 말을 믿을지 생각하기 어렵지 않았다.

---

무엇보다 바예나는 평생 문제를 남에게 해결해달라고 해본 적이 없었다.

배가 고프면 훔쳤다.

쫓기면 달렸다.

맞으면 때렸다.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았다.

도움을 요청한다는 선택지가 그녀의 머릿속에는 거의 없었다.

---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주인이 바예나를 불렀다.

침실이었다.

바예나는 잠깐 망설였다.

가지 않으면 문제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갔다.

---

“부르셨어?”

주인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평소보다 많이 마신 것 같았다.

탁자 위에 잔이 여러 개 있었다.

“문 닫아.”

바예나는 문을 닫았다.

“뭔데.”

대답 대신 문이 잠겼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바예나는 알았다.

---

그 뒤의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예나는 빠르게 피하려 했다.

귀족은 놓아주지 않았다.

밀쳤다.

다시 잡혔다.

바예나는 손을 떼어냈다.

귀족이 화를 냈다.

“네가 누구 덕분에 여기서 사는 줄 알아?”

바예나는 처음으로 주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말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

누구 덕분에.

밥을 줬다.

방을 줬다.

돈을 줬다.

그러니까 다른 것도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바예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자기가 생각했던 계약과,

저 사람이 생각했던 계약이 달랐다는 것을.

---

바예나는 다시 문으로 갔다.

막혔다.

귀족이 붙잡았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하다고 느꼈다.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이 사라졌다.

일자리.

돈.

방.

내일.

전부 사라졌다.

남은 것은 하나였다.

살아남아야 했다.

---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가장 익숙한 판단이었다.

바예나는 몸을 틀었다.

팔을 뿌리쳤다.

귀족을 밀쳤다.

상대가 다시 달려들었다.

침실 안의 가구가 넘어졌다.

잔이 깨졌다.

둘이 뒤엉켰다.

---

귀족은 바예나보다 크지 않았다.

강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바예나가 얼마나 힘이 센지 몰랐다.

사용인이 무거운 상자를 드는 모습은 봤어도,

그 힘이 자기에게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것이 마지막 착각이었다.

---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귀족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예나는 바닥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손이 떨렸다.

한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죽이려고 들어간 방은 아니었다.

죽일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죽었다.

자기가 죽였다.

---

바예나는 시체를 바라봤다.

그리고 문을 봤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몰랐다.

한 가지는 알았다.

여기에 있으면 잡힌다.

---

바예나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북부의 밤공기가 들어왔다.

침실은 높은 층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뛰어내리지 못할 높이였다.

바예나는 창틀에 발을 올렸다.

아래를 봤다.

벽의 돌출부.

배수관.

아래층의 좁은 처마.

갈 수 있었다.

---

뒤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바예나는 뛰었다.

벽을 잡았다.

아래로 내려갔다.

처마를 밟았다.

옆 건물로 뛰었다.

뒤에서 비명이 들린 것은 그다음이었다.

---

그날 밤,

바예나는 다시 뒷골목의 아이가 되었다.

달렸다.

숨어들었다.

지붕을 탔다.

경비대가 큰길을 막기 전에 골목을 빠져나갔다.

귀족가의 옷은 버렸다.

창고에서 낡은 외투 하나를 훔쳤다.

돈은 거의 챙기지 못했다.

몇 년 동안 모았던 것도 대부분 방에 두고 나왔다.

---

다음 날부터 수배가 시작됐다.

귀족 살해.

사용인 도주.

젊은 여성 표범 수인.

강한 완력.

등반에 능숙함.

도망 중일 가능성 높음.

특징이 너무 많았다.

바예나는 수배문을 직접 봤다.

---

종이 한가운데 자기 얼굴과 비슷한 그림이 있었다.

그 아래에 이름을 적는 칸이 있었다.

`신원불명.`

바예나는 그 글자를 한동안 바라봤다.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평생 이름이 없어서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그날만큼은 조금 도움이 됐다.

---

수배령은 북부 곳곳으로 퍼졌다.

프라그모 주변의 검문이 강화됐다.

길을 이용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바예나는 길로 가지 않았다.

---

경비대가 다리를 지키면 절벽을 내려갔다.

길목을 막으면 산비탈을 탔다.

눈 위의 흔적을 쫓아오면 바위지대로 올라갔다.

말을 탄 추적대가 나타나면 숲으로 들어갔다.

배가 고프면 훔쳤다.

밤에는 폐광이나 버려진 창고에서 잤다.

---

한 번은 경비대가 거의 따라잡았다.

“멈춰!”

바예나는 뒤를 돌아봤다.

세 명.

앞은 끊어진 절벽길이었다.

경비 하나가 말했다.

“끝이다!”

바예나는 절벽 아래를 봤다.

그리고 옆을 봤다.

얼어붙은 암벽이 있었다.

---

경비가 소리쳤다.

“거긴 못 간다!”

바예나는 대답했다.

“너는.”

그리고 벽으로 뛰었다.

발톱이 얼음 사이의 틈을 잡았다.

한 손.

다음 손.

몸을 끌어올렸다.

몇 초 뒤에는 경비들이 따라갈 수 없는 곳에 있었다.

---

도망치는 동안 바예나는 수없이 생각했다.

자수할까.

설명하면 믿어줄까.

자기는 살려고 그런 것뿐이라고.

먼저 손을 댄 것은 그쪽이었다고.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그러나 결국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다.

---

믿지 못해서였다.

정확히는,

믿어도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잡힐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바예나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확인할 수 없는 선의보다,

자기가 붙잡을 수 있는 벽 하나를 더 믿었다.

---

얼마나 도망쳤는지는 정확히 세지 않았다.

북부를 벗어났을 때는 몸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옷은 찢어졌다.

손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그래도 살아 있었다.

그걸로 됐다.

---

바예나는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프라그모에서 멀어질수록 검문은 줄었다.

수배문도 잘 보이지 않았다.

눈도 줄었다.

바람의 냄새가 달라졌다.

그리고 어느 날 처음으로 까까몰리의 비행선을 봤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선체였다.

바예나는 한참 올려다봤다.

“별게 다 날아다니네.”

그것이 까까몰리에 대한 첫 감상이었다.

---

까까몰리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취직할 곳을 찾는 것이었다.

도망치는 데도 돈이 들었다.

먹는 데도 돈이 들었다.

잠잘 곳도 필요했다.

바예나는 다시 사용인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절대로.

---

어느 상점의 창고 일을 알아봤다.

접수원이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작성하세요.”

바예나는 읽었다.

출신.

나이.

경력.

그리고 맨 위에 있었다.

이름.

---

바예나는 펜을 멈췄다.

접수원이 물었다.

“왜요?”

“이름 꼭 써야 돼?”

“당연하죠.”

“왜?”

“월급을 누구에게 줬는지 기록해야 하니까요.”

그 말에는 반박하기 어려웠다.

---

“없는데.”

접수원이 웃었다.

“네?”

“이름.”

“……농담이죠?”

“아니.”

“그러면 하나 만드세요.”

바예나가 눈을 찌푸렸다.

“지금?”

“네.”

“아무거나?”

“본인이 앞으로 쓸 이름인데 아무거나 정하시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바예나는 잠깐 생각했다.

---

그리고 말했다.

“바예나.”

접수원이 고개를 들었다.

“바예나요?”

“응.”

“성은요?”

“없어.”

“……알겠습니다.”

접수원이 종이에 적었다.

`바예나.`

그것이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공식적인 종이에 적은 것은.

---

그 이름에는 특별한 뜻이 없었다.

죽은 부모에게 받은 것도 아니었다.

고향의 언어에서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소중한 사람이 지어준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필요해서 만들었다.

월급을 받으려면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바예나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

그러나 첫 취업은 실패했다.

경력을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어디에서 일하셨습니까?”

“프라그모.”

“어떤 곳이요?”

“귀족집.”

“가문명은요?”

바예나는 입을 다물었다.

“퇴직 사유는?”

“개인 사정.”

“추천서는 있습니까?”

“없어.”

“신분 증명은요?”

“없어.”

결과는 뻔했다.

---

그 뒤로도 몇 군데를 돌아다녔다.

비슷했다.

힘을 보여주면 좋아했다.

벽을 타면 놀랐다.

하지만 서류를 보자 표정이 바뀌었다.

바예나는 점점 짜증이 났다.

“일 시켜보고 못하면 자르면 되잖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 다들 간단한 걸 복잡하게 만들어.”

---

그날도 일자리를 못 구했다.

바예나는 까까몰리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주머니에 남은 돈은 많지 않았다.

다시 훔치고 살 생각은 없었다.

못할 것은 없었다.

하기 싫었다.

겨우 뒷골목에서 빠져나왔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

그러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건물 앞을 지나갔다.

자유모험가 길드 트리모니아의 본부였다.

건물 밖에는 여러 장의 의뢰서와 공고가 붙어 있었다.

바예나는 모험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몬스터를 죽이고 돌아다니는 일에 특별한 관심도 없었다.

그냥 일자리 공고가 있을까 해서 게시판을 봤다.

---

호위.

약초 채집.

몬스터 토벌.

분실물 수색.

상단 경비.

바예나는 하나씩 넘겼다.

그러다 게시판 가장자리의 조금 낡은 종이를 발견했다.

트리모니아의 의뢰서가 아니었다.

외부 조직의 채용 공고였다.

---

`낙하회수조합 돌메아리 현장 조합원 모집.`

바예나는 읽었다.

`고소작업 가능자 우대.`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등반 능력자 우대.`

한 줄 더 읽었다.

`중량물 운반 가능자 우대.`

바예나는 종이에 조금 가까이 갔다.

`위험지역 수당 별도 지급.`

그녀는 마지막 줄을 두 번 읽었다.

---

“이거 괜찮은데.”

사람을 구하는 조직이라는 설명은 그 아래에 있었다.

바예나는 대충 읽었다.

매몰자 구조.

추락자 회수.

유실물 수색.

붕괴지역 작업.

별 감흥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월급.

위험수당.

숙련도 수당.

---

바예나는 공고를 뜯었다.

그리고 바르로 향했다.

---

돌메아리 본부에 처음 들어갔을 때,

조합장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사람들에게 물었다.

“조합장 있어?”

한 조합원이 방 한쪽을 가리켰다.

바예나는 따라 봤다.

바닥에 누워 있는 여자가 있었다.

맨발이었다.

눈도 감고 있었다.

바예나가 물었다.

“저거?”

조합원이 대답했다.

“네.”

“죽은 거 아니고?”

“조합장님, 손님 왔습니다.”

여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으응…….”

바예나는 첫인상부터 좋지 않았다.

---

휴밀은 몸을 일으켰다.

하품부터 했다.

“하아암…… 왜 왔어어……?”

바예나가 공고를 내밀었다.

“이거.”

“으응…….”

“사람 뽑는다며.”

“그랬나아…….”

바예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가 붙였잖아.”

“나는 안 붙였는데에…….”

옆의 조합원이 말했다.

“제가 붙였습니다.”

“아.”

휴밀이 다시 하품했다.

바예나는 그 자리에서 돌아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

그래도 월급이 아까웠다.

휴밀이 물었다.

“왜 여기 들어오고 싶어어……?”

바예나는 바로 대답했다.

“돈 많이 주던데.”

옆에 있던 사람들이 잠깐 조용해졌다.

휴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중요하지이.”

바예나가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뭐야. 사람 구하고 싶다는 말 같은 거 해야 되는 줄 알았는데.”

“왜애……?”

“이런 데니까.”

휴밀이 고개를 기울였다.

“일 잘하면 되지이…….”

바예나는 처음으로 휴밀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아주 조금이었다.

---

시험은 간단했다.

휴밀이 바깥 절벽을 가리켰다.

“저기 올라갈 수 있어어……?”

바예나가 봤다.

높았다.

표면도 거칠었다.

하지만 발을 걸 곳은 많았다.

“얼마나 빨리?”

“안 떨어지면 돼애…….”

“그럼 쉬운데.”

바예나는 뛰었다.

---

첫 발이 벽에 닿았다.

다음 순간 이미 사람 키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손가락이 틈을 잡았다.

다리를 끌어올렸다.

몸을 틀었다.

한 번 크게 도약했다.

몇 초 뒤 절벽 중간의 돌출부에 서 있었다.

아래에서 누군가 감탄했다.

휴밀은 하품했다.

“내려와아…….”

---

바예나는 그대로 뛰어내렸다.

중간의 돌을 한 번 밟았다.

벽을 잡았다.

속도를 죽였다.

바닥에 착지했다.

“됐어?”

휴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합격.”

“끝?”

“뭐 더 하고 싶어어……?”

“아니.”

그렇게 바예나는 돌메아리에 들어왔다.

---

첫 출근날,

바예나는 자기 선택을 조금 후회했다.

생각보다 일이 더러웠다.

먼지가 많았다.

무거웠다.

위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휴밀이 느렸다.

---

“조합장.”

“으응…….”

“출발해야 된다는데.”

“알아아…….”

“안 일어나잖아.”

“일어날 거야아…….”

“언제.”

“조금 있다가아…….”

바예나는 휴밀의 발목을 잡았다.

“뭐 해애……?”

“끌고 간다.”

“조합장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에…….”

“그럼 일어나.”

휴밀이 일어났다.

그날부터 이상한 관계가 시작됐다.

---

처음 몇 달 동안 바예나는 사람을 구한다는 일에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현장에 간다.

밧줄을 맨다.

내려간다.

찾는다.

끌어올린다.

돈을 받는다.

그게 일이었다.

---

휴밀이 말했다.

“아래 사람 있어어…….”

바예나는 밧줄을 확인했다.

“살아 있어?”

“몰라아…….”

“맨날 모르지.”

“내가 생명정령은 아니잖아아…….”

“알았어. 위치나 말해.”

그리고 내려갔다.

---

첫 번째로 살아 있는 사람을 직접 업고 나온 것은 채석장 붕괴현장이었다.

젊은 노동자 하나가 절벽 중간의 갈라진 공간에 갇혀 있었다.

발목을 다쳤다.

혼자서는 올라올 수 없었다.

휴밀이 위에서 말했다.

“네 오른쪽 두 걸음…… 아래에 틈 있어어…….”

바예나는 몸을 돌렸다.

“보인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있었다.

---

“살았네.”

남자가 바예나를 봤다.

“구조대입니까?”

“비슷해.”

“다리가…….”

“보여.”

바예나는 몸을 낮췄다.

“업혀.”

남자가 밖을 봤다.

“둘 다 못 올라갑니다.”

바예나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가 너보다 힘 세.”

“그래도—”

“업히라고.”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

사람 하나를 등에 업고 오르는 것은 혼자 오르는 것과 전혀 달랐다.

무게중심이 달라졌다.

몸을 크게 뻗을 수 없었다.

평소라면 뛰어넘을 공간을 천천히 건너야 했다.

남자는 계속 말했다.

“죄송합니다.”

“왜.”

“무겁잖습니까.”

“그건 맞아.”

“죄송합니다.”

“계속 말하면 진짜 무거워지니까 입 다물어.”

남자는 조용해졌다.

---

마지막 벽을 올라왔을 때,

위에서 사람들이 달려왔다.

누군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한 여자가 울면서 그를 끌어안았다.

바예나는 밧줄을 풀며 그 모습을 봤다.

이상했다.

자기는 그냥 일을 했을 뿐이었다.

---

남자의 어머니가 바예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바예나가 인상을 썼다.

“돈 받고 하는 일이야.”

“그래도 감사합니다.”

“알았어.”

“정말 감사합니다.”

“……알았다니까.”

바예나는 도망치듯 장비를 정리했다.

---

휴밀이 옆으로 왔다.

“어때애……?”

“뭐가.”

“사람 구한 거어…….”

바예나가 휴밀을 노려봤다.

“힘들어.”

“그거 말고오…….”

“뭐.”

휴밀이 느릿하게 웃었다.

“나쁘지는 않지이……?”

바예나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월급 밀리지만 마.”

휴밀은 더 웃었다.

“왜 웃어.”

“그냥아…….”

“짜증나게.”

---

그 뒤로도 바예나는 자신이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이었다.

그리고 일을 잘하고 싶었다.

그게 먼저였다.

---

신입이 매듭을 이상하게 묶으면 바로 풀었다.

“누가 이렇게 하랬어.”

“교육 때 배웠는데요.”

“잘못 배웠어.”

“그래도 교본에는—”

“그 매듭에 네 목 걸 수 있어?”

신입이 침묵했다.

“없으면 다시 묶어.”

직접 보여줬다.

---

현장에서 사람을 등에 업고 몇 번 오르다 보니,

내려갈 때와 올라올 때 필요한 힘이 얼마나 다른지도 알게 됐다.

그래서 바예나는 자주 말했다.

“내려가는 건 아무나 해.”

“올라오는 게 문제지.”

누군가 물었다.

“혼자 올라오는 거요?”

바예나가 대답했다.

“아니.”

밧줄을 어깨에 걸었다.

“데리고.”

---

시간이 지나면서 바예나는 선임회수원이 됐다.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일도 훨씬 잘했다.

사람을 어디에 묶어야 덜 다치는지 알았다.

부상자를 업을 때 어느 쪽으로 무게를 받아야 하는지 알았다.

좁은 암벽에서 두 사람이 지나가는 법도 알았다.

언제 속도를 내야 하고,

언제 느려져야 하는지도 배웠다.

---

사람을 다루는 법도 조금 배웠다.

겁에 질린 사람은 구조대를 보고도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한 번은 매몰된 여자가 바예나가 손을 뻗자 몸을 뒤로 뺐다.

“오지 마세요.”

바예나는 멈췄다.

“안 나오게?”

여자가 떨면서 말했다.

“만지지 마세요.”

바예나는 잠깐 침묵했다.

---

예전 같았으면 그냥 끌어냈을지도 몰랐다.

살리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예나는 손을 거뒀다.

“알았어.”

여자가 바예나를 봤다.

“대신 지금 여기 오래 못 있어.”

바예나는 밧줄을 보여줬다.

“내가 허리 묶어야 빨리 나갈 수 있어.”

“…….”

“싫으면 다른 방법 찾을게.”

“시간은요?”

“별로 없어.”

“……묶어주세요.”

그제야 바예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

왜 그렇게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날 밤의 침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자기 몸에 손을 대는데,

싫다는 말을 해도 아무 의미가 없던 순간을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바예나는 이제 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과,

자기 몸이 자기 것이라는 사실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이 허락하는 한,

그 몇 초 정도는 남겨두려고 한다.

---

프라그모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누가 출신을 물으면 대충 대답한다.

“북쪽.”

“프라그모?”

“응.”

“왜 까까몰리까지 왔어?”

“춥잖아.”

대개 그렇게 끝낸다.

---

가끔 더 캐묻는 사람도 있다.

“가족은?”

“없어.”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셨어?”

“내가 지었는데.”

“정말?”

“취업하려고.”

상대는 보통 농담이라고 생각한다.

바예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는다.

---

이제는 바예나라는 이름에 익숙하다.

누가 멀리서 부른다.

“바예나!”

자연스럽게 돌아본다.

처음에는 계약서의 빈칸을 채우려고 만든 말이었다.

지금은 조합원들이 부른다.

구조된 사람들이 부른다.

휴밀도 부른다.

아주 느리게.

“바예나아…….”

대부분 귀찮은 부탁이 뒤따른다.

---

반대로 바예나도 휴밀을 가장 많이 부르는 사람 중 하나다.

“휴밀.”

“으응…….”

“일어나.”

“싫어어…….”

“현장 들어왔어.”

“다른 사람 보내애…….”

“지반감지 누가 하는데.”

“내가아…….”

“그러니까 일어나.”

“논리적이네에…….”

“알면 움직여.”

---

휴밀은 늘어진다.

바예나는 성질이 급하다.

휴밀은 회의를 미룬다.

바예나는 의자를 끌어온다.

휴밀이 바닥에서 자면 바예나는 발로 옆구리를 툭툭 건드린다.

“야.”

“조합장한테 야라고 하면 안 돼애…….”

“그럼 조합장처럼 굴어.”

“너무 어려운 요구야아…….”

---

결국 조합원들 사이에서 별명이 생겼다.

`휴밀 억제기.`

처음 들었을 때 바예나는 인상을 썼다.

“뭘 억제하는데.”

조합원이 대답했다.

“조합장님의 게으름?”

“그건 억제가 아니라 제거해야 되는 거 아니야?”

멀리서 휴밀이 말했다.

“다 들려어…….”

“들리면 일어나.”

“하아암…….”

조합원들이 웃었다.

---

처음 돌메아리에 들어온 이유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돈이 필요했다.

월급이 괜찮았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들어왔다.

바예나는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누군가 묻는다.

“사람을 구하고 싶어서 구조원이 된 거 아니에요?”

바예나는 바로 대답한다.

“아니.”

“그럼 왜요?”

“돈.”

“지금도요?”

“당연하지.”

---

그렇다고 예전과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다.

급여일이 아니라도 실종자가 생기면 신경이 쓰인다.

자기 휴일에도 구조인원이 부족하다고 하면 욕을 하면서 나온다.

“오늘 나 쉬는 날인 거 알지?”

“압니다.”

“두 배로 쳐.”

“네.”

“사람은 몇 명인데.”

“둘입니다.”

그 순간부터 장비를 챙긴다.

---

가끔 구조한 사람이 나중에 다시 찾아온다.

술을 가져온다.

빵을 가져온다.

감사하다고 말한다.

바예나는 아직도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다.

“이런 거 안 줘도 되는데.”

“받아주세요.”

“조합에 돈 냈잖아.”

“그래도 바예나 씨가 내려와주셨잖아요.”

바예나는 한참 선물을 본다.

결국 받는다.

“다음부터는 떨어지지 마.”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말에 가깝다.

---

바예나는 자기가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시끄러운 사람을 싫어한다.

귀찮은 사람도 싫어한다.

감동적인 연설은 더 싫어한다.

영웅이라고 부르면 바로 얼굴을 찌푸린다.

“일한 거야.”

그 말을 반복한다.

---

그래도 이제는 안다.

자기 혼자 살아서 벽을 올라오는 것과,

누군가를 등에 업고 같이 올라오는 것은 다르다.

어릴 때의 바예나는 자기 몸 하나만 건지면 됐다.

프라그모를 탈출할 때도 그랬다.

누가 기다리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를 데리고 갈 필요도 없었다.

잡히지 않으면 됐다.

---

지금은 밧줄 아래에 사람이 하나 더 있다.

그 사람의 무게까지 계산한다.

그 사람이 다쳤는지 본다.

겁먹었는지 본다.

자기 혼자라면 잡지 않을 작은 돌출부까지 확인한다.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둘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찾는다.

바예나는 그 차이를 꽤 마음에 들어 한다.

입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

어느 날 휴밀이 물었다.

“계속 여기 있을 거야아……?”

바예나는 장비를 정리하다 손을 멈췄다.

“왜.”

“그냥아…….”

“쫓아내려고?”

“아니이.”

휴밀이 하품했다.

“처음에는 돈 때문에 왔다며어…….”

“지금도 돈 때문에 있어.”

“으응.”

“왜.”

“아무 말도 안 했는데에…….”

“표정이 짜증나.”

“나 졸린 표정인데에…….”

---

휴밀이 다시 물었다.

“돈 더 많이 주는 데 생기면 갈 거야아……?”

바예나는 바로 대답하려 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돈을 더 주면 간다고.

원래 그런 관계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

휴밀이 기다렸다.

바예나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몰라.”

휴밀이 조금 웃었다.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아…….”

“진짜 짜증나는 정령이네.”

“월급 주는 정령인데에…….”

“그건 인정.”

---

바예나는 아직 자기 삶에 거창한 의미를 붙이지 않는다.

프라그모에서 살아남은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귀족을 죽인 일을 정의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돌메아리에 들어온 일을 구원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살아남았다.

도망쳤다.

이름을 만들었다.

취직했다.

그리고 지금도 일한다.

그 정도다.

---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누군가 절벽 아래에서 소리친다.

“사람 있어요!”

바예나는 더 이상 자기 일이 끝날 시간부터 계산하지 않는다.

먼저 장비를 확인한다.

밧줄을 당긴다.

매듭을 확인한다.

휴밀을 부른다.

“야, 조합장.”

“왜애…….”

“아래 봐.”

“졸린데에…….”

“사람 있다잖아.”

휴밀이 몸을 일으킨다.

---

맨발이 땅에 닿는다.

휴밀이 눈을 감는다.

“왼쪽 아래아…….”

“거리.”

“열다섯 걸음쯤…….”

“통로 살아 있어?”

“좁아아…….”

“나 지나가?”

“너는.”

“그럼 됐어.”

바예나는 밧줄을 허리에 건다.

---

누군가 묻는다.

“바예나, 왜 항상 본인이 먼저 내려가요?”

바예나는 절벽 아래를 본다.

예전이라면 답은 간단했다.

자기가 제일 잘하니까.

돈 받고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틀린 대답은 아니다.

지금도 중요한 이유다.

---

그래서 바예나는 그렇게 대답한다.

“내가 제일 빠르잖아.”

그리고 잠깐 뒤 덧붙인다.

“……그리고.”

상대가 기다린다.

바예나는 밧줄을 당겨본다.

“내려갔으면 데리고 올라와야지.”

그 말을 끝으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

한때 바예나에게 자신의 빠른 다리와 강한 팔은 오직 하나를 위해 존재했다.

도망치기 위해서.

잡히지 않기 위해서.

자기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도 그 능력은 같다.

바뀐 것은 사용법이다.

이제 바예나는 아래로 내려간다.

누군가를 찾는다.

등에 업는다.

그리고 다시 올라온다.

---

그것을 사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정의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라서 한다는 말은 더 싫어한다.

그저 자기 일이 예전보다 조금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살아서 돌아왔고,

가끔은 자기 말고 한 사람쯤 더 같이 돌아오니까.

Roster

영원도시 프라그모

5명
불멸기록원1명
ERR
에리두 김
프라그모불멸기록원-원장
“기록은 거짓말하지 않아. 기록한 자가 거짓말할 뿐이지.”
🩸 HP160
💪 공격력5
🧙 마법력10
✨ 신비력70
🛡️ 방어력70
🔗 항마력40
😖 신비저항30
🏃 회피력30
과거 보기
에리두 김은 글자가 얌전히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어린 시절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도깨비에게 이름은 이상한 물건이었다.

사람들은 이름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이에 쓰면 더 단단해졌다고 믿는다.

문서에 도장을 찍으면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행동한다.

에리두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 믿음이 재미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글자는 실제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작은 손가락으로 종이 위를 짚으면,
한 글자가 옆줄로 옮겨갔다.

이름 두 개의 위치를 바꿀 수도 있었다.

간판에 적힌 글자 하나를 잠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장난도 쳤다.

어느 날은 술집 간판의 ‘술’을 옆 떡집의 ‘떡’과 바꾸었다.

한동안 술집에는 ‘떡 한 잔’이라고 적혔고,
떡집에는 ‘술 두 접시’라고 적혔다.

사람들이 한참 웃었다.

에리두도 제일 크게 웃었다.

주인들은 별로 웃지 않았다.

그날 그녀는 귀를 잡혀 집까지 끌려갔다.

“다시는 남의 글자 건드리지 마.”

어른이 말했다.

에리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리고 다음 날 다른 간판을 건드렸다.

그때의 그녀에게 글자는 장난감이었다.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에 적혀 있든,
조금 옮긴다고 세상이 정말 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알게 된다.

글자 하나가 사람의 집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름 한 줄이 가족 전체의 삶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에리두가 기록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처음에는 꽤 불순했다.

오래된 문서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도 그 사람이 쓴 글자가 남아 있었다.

백 년 전에 누가 누구에게 화를 냈는지.

어느 관리가 숫자를 틀렸는지.

어떤 상인이 물건값을 떼먹었는지.

어느 병사가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편지에 적었는지.

기록을 읽으면 죽은 사람이 잠시 다시 떠드는 것 같았다.

에리두는 그것을 좋아했다.

도깨비의 신비술을 사용하면 오래된 기록에 남은 사건의 잔상을 아주 희미하게 끌어낼 수도 있었다.

완전한 과거가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종이에 남은 흔적.

강한 감정이 찍힌 순간.

붓을 눌러쓴 손의 움직임.

그 정도였다.

그래도 에리두에게는 충분히 재미있었다.

젊은 시절의 그녀는 기록관 창고 구석에서 몰래 오래된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사건의 잔상을 불러내곤 했다.

상급 기록관에게 들키면 혼났다.

“허가 없이 기록 잔상 열지 마십시오.”

에리두가 웃었다.

“죽은 사람도 사생활 있어?”

“있습니다.”

“까다롭네.”

“기록원에서 가장 까다로워야 하는 게 그겁니다.”

당시에는 그 말도 잔소리라고 생각했다.


에리두에게는 아주 가까운 친구가 하나 있었다.

프라그모의 기록보조원으로 함께 일하던 사람이었다.

에리두와 달리 조용하고 성실했다.

규칙을 잘 지켰다.

에리두가 장난을 치면 늘 뒤처리를 했다.

“이번엔 뭘 바꿨어?”

친구가 물었다.

에리두는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에리두.”

“두 글자.”

“어디.”

“이미 돌려놨어.”

친구는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 크게 사고 친다.”

에리두는 웃었다.

“그럼 네가 고쳐줘.”

그 말은 훗날 그녀에게 농담으로 남지 않았다.


문제는 겨울 구호물자가 사라진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프라그모 외곽의 저장소에서 식량과 연료 일부가 빼돌려졌다.

양이 적지 않았다.

그해 북부는 특히 추웠다.

식량과 난방연료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한 절도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겨울을 견디지 못할 수도 있었다.

조사가 시작되었다.

장부가 확인되었다.

반출명령서가 발견되었다.

그 문서에 친구의 이름이 있었다.

허가 담당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서명도 비슷했다.

누군가는 그가 물자를 빼돌린 상단과 연결되어 있다고 증언했다.

에리두는 믿지 않았다.

친구는 계속 말했다.

“난 안 했어.”

에리두가 물었다.

“증명할 수 있어?”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그날 자기가 어디 있었는지는 기억했다.

하지만 증인이 없었다.

반대로 문서는 있었다.

이름이 있었다.

서명이 있었다.

기록은 친구를 범인이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당시 에리두는 지금처럼 기록의 오류를 차분히 추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친구를 믿었다.

그러면 기록이 틀린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고치면 되잖아.”

친구가 얼굴을 들었다.

“뭘.”

“이름.”

친구는 한동안 에리두를 바라봤다.

“안 돼.”

“네가 안 했잖아.”

“그래도 안 돼.”

“그럼 잡혀가게?”

친구는 입을 다물었다.

조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유죄판결이 내려지면 재산이 몰수될 가능성이 높았다.

당사자뿐 아니라 같은 가구에 등록된 가족도 오랫동안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다.

에리두는 친구의 가족을 알고 있었다.

늙은 어머니도 있었다.

어린 조카도 있었다.

그 사람들이 한 사건 때문에 함께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친구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름만 바로잡으면 된다.

그때의 에리두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밤에 기록보관실로 들어갔다.

봉인된 조사기록을 열었다.

자신의 도술을 사용했다.

문서 한쪽에는 친구의 이름이 있었다.

다른 기록에는 사건 과정에서 한 번 언급된 다른 직원의 이름이 있었다.

별다른 혐의가 없는 보조관리였다.

에리두는 두 이름의 위치를 바꾸었다.

종이를 찢지도 않았다.

먹을 덧칠하지도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적혀 있었던 것처럼 이름만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신비술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에리두는 친구의 이름이 사라진 자리를 보고 안도했다.

“됐다.”

아주 작게 말했다.

그녀는 새로 들어간 이름의 주인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사를 다시 하면 진짜 범인이 밝혀질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은 그저 친구가 억울하게 먼저 처벌받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했다.

며칠이면 끝날 문제라고 여겼다.

그 며칠이 다른 가족의 인생을 무너뜨렸다.


수정된 기록에 따라 새로운 혐의자가 체포되었다.

그 사람은 결백을 주장했다.

가족도 항의했다.

하지만 공식문서에는 이름이 있었다.

관련 장부의 여러 페이지에도 동일한 이름이 연결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기록을 믿었다.

에리두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직위를 잃었다.

재산 일부가 동결되었다.

가족도 주거지를 떠나야 했다.

특히 그의 배우자는 같은 가구에 속했다는 이유로 다른 공공업무 계약에서 제외되었다.

아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도둑의 가족이라는 말을 들었다.

에리두는 일이 그렇게까지 번질 줄 몰랐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진짜 조사 결과가 나오면 된다.

그러면 모두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런데 조사는 수정된 기록을 출발점으로 진행되었다.

기록이 증거였고,
그 증거를 따라 새로운 증거가 해석되었다.

한 번 바뀐 이름은 다음 문서를 만들었다.

다음 문서는 또 다른 기록의 근거가 되었다.

거짓 한 줄이 혼자 있지 않았다.

주변에 새로운 진실처럼 보이는 문장들을 만들어냈다.


에리두는 결국 견디지 못했다.

자기가 바꿨다고 자백했다.

기록관 전체가 뒤집혔다.

친구는 석방되었다.

대신 에리두가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름이 바뀌어 들어갔던 무고한 사람도 풀려났다.

법적으로는 어느 정도 복구가 이루어졌다.

몰수 절차도 중단되었다.

직위도 나중에는 회복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 가족은 이미 집을 옮겼다.

배우자는 일자리를 잃었다.

가족 사이에도 큰 싸움이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기억은 공식 정정보다 느렸다.

“처음에 잡혀갔던 그 집.”

“뭔가 있으니까 조사받은 것 아니냐.”

그런 말은 남았다.

에리두는 그 가족을 찾아갔다.

문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평소 같으면 농담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날은 웃지 못했다.


문을 연 사람은 에리두가 이름을 바꿔 넣었던 당사자의 배우자였다.

그녀는 에리두를 알아봤다.

“왜 왔습니까?”

에리두는 말했다.

“내가 했어.”

“알고 있습니다.”

“미안해.”

상대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에리두는 변명하려고 했다.

친구가 억울했다.

기록이 틀려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사람 하나를 구하고 싶었다.

모두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말하지 않았다.

상대가 물었다.

“당신 친구는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풀려났어.”

“잘됐네요.”

말은 축하였지만 목소리는 아니었다.

여자가 말했다.

“우리 가족이 대신 들어갔지만.”

에리두는 고개를 숙였다.

그 문장을 반박할 방법은 없었다.


그날 이후 에리두는 기록을 대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기록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

문제는 그래서 고쳐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틀린 기록을 지우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바꾸면 더 좋은 기록이 된다고 믿었다.

그 생각을 버렸다.

원래 문장은 남긴다.

그 옆에 새 기록을 붙인다.

‘당시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후속 조사에서 이 부분은 잘못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사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반대 증언은 이렇다.’

‘현재 확인 가능한 사실은 여기까지다.’

틀렸다면 틀렸다는 사실까지 역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과거에 무엇을 잘못 믿었는지 역시 남겨야 했다.

그것을 지워버리면,
왜 잘못된 판단이 내려졌는지를 다음 사람이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물었다.

“잘못된 기록이면 없애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에리두는 대답했다.

“없애면 누가 틀렸는지도 없어져.”

“그럼 거짓이 남지 않습니까?”

“거짓이라고 써.”

“혼란스럽습니다.”

에리두가 피식 웃었다.

“원래 세상이 좀 그래.”

그리고 기록 두 개를 나란히 펼쳤다.

“정답 하나 만들어서 깔끔하게 정리하면 보기 좋긴 하지.”

잠시 웃음이 사라졌다.

“근데 누군가는 그 깔끔함 아래 묻혀.”

그녀에게 기록은 그때부터 정답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게 되었다.

충돌하는 문장을 함께 남기는 일이 되었다.


에리두는 자신의 도술 사용법도 바꾸었다.

예전에는 문서 속 이름을 직접 움직였다.

지금은 원본 기록에 그런 도술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기록의 위치를 관리하는 데 쓴다.

한 사건의 증언이 어느 두루마리와 연결되는지.

어떤 이름이 다른 기록에서 다시 등장하는지.

흩어진 문서의 관계를 찾아내는 데 사용한다.

필요하면 오래된 사건의 잔상을 불러온다.

하지만 그것도 절대 완전한 사실이라고 기록하지 않는다.

잔상은 잔상이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일부만 남을 수 있다.

그래서 기록에는 반드시 구분한다.

직접 관찰.

당사자 증언.

타인의 증언.

문서 기록.

도술로 확인한 잔상.

해석.

추정.

에리두는 그 경계를 섞는 것을 거의 병적으로 싫어하게 되었다.


그녀가 불멸기록원에서 점점 높은 자리에 오른 이유도 그런 집요함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에리두를 이상한 기록관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웃었다.

농담했다.

보고서 여백에 재미없는 낙서라도 발견하면 혼자 웃었다.

하지만 누군가 기록의 문장을 슬쩍 바꾸려고 하면 얼굴이 바로 달라졌다.

“그 표현 좀 완화합시다.”

어느 관리가 말했다.

에리두가 물었다.

“왜?”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이 틀렸어?”

“그건 아닙니다.”

“그럼 옆에 해명 붙여.”

“문장 자체를 바꾸면 안 됩니까?”

에리두의 웃음이 사라졌다.

“안 돼.”

그 한마디에는 협상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기록원 안에서도 논쟁은 많았다.

한 사건을 어떻게 요약할 것인가.

전쟁의 원인을 누구에게 둘 것인가.

누가 먼저 공격했는가.

어떤 증언을 더 신뢰할 것인가.

에리두는 특히 ‘결론문’을 싫어했다.

누군가 보고서를 가져왔다.

‘이번 분쟁은 델피로 측의 탐욕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에리두가 읽었다.

“탐욕은 어떻게 확인했어?”

“행동을 보면...”

“행동을 써.”

다른 기록.

‘안발룽 부족의 호전성 때문에 충돌이 확대되었다.’

에리두가 다시 물었다.

“호전성 측정하는 자 있어?”

“그건 표현상...”

“그럼 빼.”

“너무 건조하지 않습니까?”

에리두가 웃었다.

“기록은 원래 좀 말려놔야 오래 가.”

평소에는 농담처럼 말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반드시 덧붙였다.

누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록하라.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기록하지 마라.

마음을 기록하려면 당사자의 증언이라고 분명히 써라.


에리두가 불멸기록원의 중심부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무렵,
대륙 전체를 돌아다니며 기록을 수집하는 일곱 깃발 원정대 역시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여러 나라를 방문한다.

역사와 문화.

분쟁.

재난.

환경 변화.

마나의 이상.

그리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증언을 모은다.

약 십 년을 걷는다.

그리고 프라그모로 돌아온다.

다음 십 년에는 다른 사람들이 떠난다.

에리두는 그 원정대의 지원을 맡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자 담당에 가까웠다.

지도.

빈 기록지.

방수 종이.

먹.

밀랍과 봉인도구.

기억석.

번역석.

마나 측정기.

천막.

밧줄.

약.

식량.

북부의 추위를 견딜 장비.

에리두는 하나씩 확인했다.

그리고 출발하는 사람들에게 늘 같은 말을 했다.

“종이 부족하면 사람 기억 믿고 버티지 마.”

“사람 기억이 왜요?”

“잘 틀려.”

잠시 웃었다.

“특히 자기한테 유리하게.”


그렇게 백 년이 흘렀다.

십 년마다 다른 사람들이 불멸기록원에 모였다.

에리두는 열 차례에 걸쳐 서로 다른 일곱 깃발 원정대의 집결과 출발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모두 낯선 얼굴이었다.

십 년 뒤에는 다른 얼굴이 되어 돌아왔다.

어떤 사람은 처음보다 말이 많아졌다.

어떤 사람은 말이 줄었다.

어떤 사람은 한쪽 다리를 절었다.

어떤 사람은 원정 전에 가장 싫어하던 나라의 음식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원정 내내 싸우던 동료와 마지막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 돌아왔다.

반대로 출발할 때 절친했던 둘이 귀환할 때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 에리두는 빈 자리를 기록했다.

사망이 확인된 사람.

실종된 사람.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

확실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적었다.

‘죽었을 것이다’라고 쓰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백 년 동안 에리두는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출발 전날은 늘 시끄러웠다.

누가 짐을 너무 많이 챙겼다.

누가 방한화를 잊었다.

누군가는 기록지보다 술을 더 많이 넣으려고 했다.

그럴 때 에리두는 대체로 압수했다.

“원장님은 술 안 드십니까?”

누군가 물은 적이 있었다.

에리두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기록원장은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지.”

그날 밤 직원 하나가 원장실 책장 뒤에서 작은 술병을 발견했다.

다음 날 그 직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리두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매우 훌륭한 기록되지 않은 합의가 생겼다.


일곱 깃발 원정대가 돌아오면 일이 더 많아졌다.

수백 권의 기록.

수천 개의 증언.

기억석.

지도에 표시된 변화.

현지에서 받은 문서 사본.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들.

같은 사건을 두고 한 나라에서는 승전이라 기록했고,
다른 나라에서는 학살이라 기록한 경우도 있었다.

한 마을 사람은 군대가 자신들을 지켰다고 말했다.

옆 마을 사람은 같은 군대가 자신들의 식량을 빼앗았다고 말했다.

둘 다 사실일 수도 있었다.

에리두는 그런 기록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좋아한다기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세상이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했다.

“원장님, 어느 쪽이 진실입니까?”

에리두는 기록 두 개를 흔들었다.

“둘 다일 수도 있지.”

“모순됩니다.”

“사람이 원래 그래.”

“그럼 결론은요?”

에리두가 웃었다.

“왜 그렇게 결론을 좋아해?”


그러나 에리두는 아무 증언이나 같은 무게로 두지는 않았다.

관찰한 사실과 소문은 다르다.

직접 본 사람의 증언과 열 사람을 거쳐온 이야기도 다르다.

서로 다른 증언을 모두 남기는 것과,
모든 주장이 똑같이 믿을 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래서 젊은 기록원에게 반복해서 가르쳤다.

“중립은 아무 의견도 갖지 않는 게 아니야.”

에리두가 기록판을 두드렸다.

“사실과 증언, 해석과 변명을 구분해.”

직원들이 받아 적었다.

에리두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네가 틀릴 가능성도 숨기지 말고.”

잠시 뒤 마지막 문장을 말했다.

“누구도 기록을 자기 나라의 소유물로 만들게 두지 마.”

그 원칙은 에리두에게 특히 중요했다.

자신이 한때 기록을 자기 친구를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다.

선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래서 더 위험했다.


일곱 깃발 원정대가 돌아올 때마다 각국의 관심도 커졌다.

델피로는 델피로에 관한 기록을 먼저 보고 싶어 했다.

세레이온은 교회 관련 증언을 사전에 검토하고 싶어 했다.

안발룽은 자기 씨족의 이야기가 외부인 시각으로 왜곡되지 않았는지 확인하려 했다.

다른 나라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 이유가 있었다.

외교문제가 될 수 있었다.

잘못된 기록 하나가 전쟁의 명분이 될 수도 있었다.

국가 입장에서는 자기 관련 기록을 미리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에리두는 거절했다.

“같은 날.”

사절이 말했다.

“우리 부분만 하루 먼저라도...”

“안 돼.”

“오해가 있을 경우 수정할 기회를...”

“반론 보내.”

“원본을 먼저 보여주시면...”

“싫어.”

에리두는 웃으며 차를 마셨다.

“너희만 먼저 보면 다른 나라에도 먼저 보여줘야 되잖아.”

“그것이 문제입니까?”

“그럼 누가 제일 먼저 볼지 가지고 또 싸우겠지.”

잠시 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아무도 먼저 안 봐.”


그 원칙은 불멸기록원의 중요한 규칙이 되었다.

일곱 깃발 원정대가 귀환한다.

기록이 정리된다.

그리고 각국에 같은 시점에 같은 기록이 전달된다.

어느 왕도 먼저 보지 않는다.

어느 교회도 먼저 보지 않는다.

어느 상단도 돈을 주고 사전 열람권을 얻지 않는다.

기록은 거래품이 아니었다.

한 나라가 소유하는 정보도 아니었다.

에리두는 그 규칙을 지키기 위해 여러 번 욕을 먹었다.

외교적으로 무례하다는 말도 들었다.

고집스럽다는 평가도 받았다.

에리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말했다.

“일곱 나라가 전부 나한테 불만 있으면 공평하게 잘하고 있는 거 아닐까?”

직원이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에리두는 잠시 생각했다.

“아니.”

그리고 웃었다.

“그냥 기분은 좋아.”


사람들은 일곱 깃발 원정대를 평화의 상징이라고 불렀다.

에리두는 그 표현을 들으면 약간 비틀어 설명했다.

“일곱 깃발 원정대가 평화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모두가 서로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젊은 원정대원이 그녀를 바라봤다.

에리두가 웃었다.

“자기들이 한 일이 다른 나라와 다음 세대에게 그대로 알려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

기록은 군대가 아니었다.

사람을 체포하지도 않았다.

전쟁을 멈추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각국은 관조단의 존재를 신경 썼다.

오늘의 명령이 십 년 뒤 기록에 남을 수 있었다.

자국민에게만 들려주던 이야기가 다른 나라의 증언과 나란히 놓일 수 있었다.

승전보 옆에 피난민의 증언이 붙을 수도 있었다.

자선사업 기록 옆에 그 사업 때문에 밀려난 사람의 기록이 붙을 수도 있었다.

에리두에게 기록의 힘은 거기 있었다.

칼보다 느리지만,
일단 남으면 오래 간다.


어느 원정대원이 물었다.

“그래도 기록한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에리두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녀는 오래전 자기가 이름을 바꿨던 가족을 생각했다.

“맞아.”

조용히 대답했다.

“기록이 죽은 사람을 살리지는 못해.”

그리고 상대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죽음을 없던 일로 만들려는 사람과는 싸울 수 있어.”

그것이 에리두가 백 년 동안 일곱 깃발 원정대를 떠나보낸 이유이기도 했다.

원정대가 모든 비극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 되기도 했다.

그들은 각국의 전쟁과 정치에 개입하는 군대가 아니었다.

다만 보았다.

물었다.

들었다.

그리고 남겼다.

누군가 나중에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할 때,
다른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에리두는 원정대원들에게 한 가지를 특히 강조했다.

자기 고향의 잘못을 기록하라고.

외국의 악행만 수집하는 사람은 기록자가 아니라 선전원이라고 말했다.

한번은 젊은 원정대원이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나라의 군대가 했다는 증언인데 확실하지 않습니다.”

에리두가 물었다.

“증언한 사람은 있어?”

“예.”

“그럼 증언은 있었던 거네.”

“사건이 사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맞아.”

에리두가 기록지를 내밀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써.”

‘사건이 있었다’가 아니라,
‘사건이 있었다고 증언한 사람이 있다.’

둘은 전혀 다른 문장이었다.

“나중에 다른 증거 나오면?”

원정대원이 물었다.

에리두는 즉시 답했다.

“붙여.”

“원래 기록은요?”

“남겨.”

“틀린 걸로 밝혀져도?”

에리두의 웃음이 사라졌다.

“특히 그럴 때.”


그녀는 삭제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과거에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믿었는지를 없애는 삭제를 싫어했다.

정정은 해야 한다.

거짓은 거짓이라고 표시해야 한다.

날조도 밝혀야 한다.

하지만 원본을 없애버리면 누가 날조했는지도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불멸기록원에는 이상한 문서들이 많이 남았다.

명백히 틀린 보고서.

후대에 조작으로 밝혀진 기록.

당시의 편견이 그대로 담긴 문장.

그 옆에는 두꺼운 정정 기록이 붙어 있었다.

에리두는 그것을 부끄러운 유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끄러워해야 할 기록일 수는 있다.

그래도 유산은 맞았다.

자기 조상이 무엇을 잘못 믿었는지 아는 사람만 같은 방식으로 덜 틀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원칙 때문에 그녀는 불멸기록원의 수많은 정치적 요구와 충돌했다.

어떤 왕국은 오래된 학살 기록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현 세대와 관계없는 사건이라 국가 관계에 방해가 된다고 했다.

에리두는 말했다.

“그럼 현 세대랑 관계없다고 옆에 써.”

“삭제는 불가능합니까?”

“응.”

다른 나라는 자기 왕조가 세운 구호사업 기록을 더 크게 다뤄달라고 요청했다.

에리두가 물었다.

“왜?”

“역사적 공적입니다.”

“그럼 한 일을 기록하지.”

“공적이라는 평가도...”

“평가는 네가 써서 보내.”

“기록원에서는 판단하지 않습니까?”

에리두가 웃었다.

“판단하지.”

사절이 의아해했다.

“근데 네가 원하는 판단을 해준다는 뜻은 아니야.”


에리두는 기록자가 감정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 자신도 감정이 많다.

좋아하는 나라도 있다.

싫어하는 관리도 있다.

읽다가 욕이 나오는 기록도 있다.

어떤 증언을 들으면 화가 난다.

어떤 사람을 보면 처음부터 믿음이 간다.

그것 자체를 없앨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더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판단의 근거까지.

‘본 기록자는 이 증언을 신뢰함.’

그렇게만 쓰지 않는다.

왜 신뢰하는지.

서로 독립된 증언이 몇 개인지.

물적 증거가 있는지.

반대되는 기록은 무엇인지.

어느 부분이 여전히 불명확한지.

그리고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도 남긴다.

에리두에게 객관성은 아무 감정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자기 감정이 사실인 척하지 못하게 만드는 훈련에 가깝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에리두는 자신이 만든 원칙 안에도 또 다른 위험이 있다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기록의 독점을 반대했다.

어느 나라에도 먼저 보여주지 않았다.

기록을 삭제하지 않았다.

반론도 남겼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불멸기록원의 문을 여닫는 사람은 누구인가.

에리두였다.

수천 건의 기록 가운데 어떤 묶음이 먼저 정리되는지.

어떤 미확인 증언에 얼마나 긴 설명이 붙는지.

어느 사건을 별도 권으로 묶을 만큼 중요하다고 판단할지.

귀환한 원정대 기록이 언제 ‘정리 완료’ 상태가 되어 일곱 나라에 동시에 배포될지.

그 결정에는 기록원장의 판단이 들어갔다.

아무 나라가 기록을 독점하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그 기록의 문 앞에는 자신이 서 있었다.

그 사실이 에리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한번은 원정대가 대규모 학살 의혹에 관한 증언을 가져온 적이 있었다.

증언자는 많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책임 주체를 두고 진술이 갈렸다.

한쪽은 지방군을 지목했다.

다른 쪽은 위장한 약탈대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양쪽이 모두 현장에 있었다.

피해 규모조차 차이가 컸다.

몇몇 기록원은 즉시 공개하자고 했다.

“사람들이 알아야 합니다.”

다른 쪽은 반대했다.

“지금 공개하면 사실이 확인되기 전에 국경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에리두는 양쪽 말을 모두 들었다.

그리고 추가 정리를 명령했다.

증언은 없애지 않았다.

해당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도 숨기지 않았다.

다만 서로 다른 증언의 관계와 확인된 사실을 구분할 때까지 공식 배포본 정리를 조금 늦췄다.

결국 같은 기록이 모든 나라에 동시에 전달되었다.

‘학살이 확정되었다’가 아니라,
‘학살을 주장하는 다수의 증언이 있으며 책임 주체에 관해서는 상충하는 진술이 존재한다’고 명시했다.

에리두는 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며칠 동안 공개가 늦어진 것도 자기 판단이었기 때문이다.


젊은 기록관 하나가 물었다.

“원장님께서 공개 시점을 결정하시는 건 기록의 독점 아닙니까?”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다른 직원은 질문한 사람을 말리려고 했다.

에리두가 손을 들어 막았다.

“좋은 질문인데 왜.”

그리고 의자에 기대었다.

잠시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거뒀다.

“맞아.”

직원들이 그녀를 바라봤다.

“완전히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지.”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열쇠를 하나 들어 올렸다.

“문을 잠근 사람이 없다고 해도.”

열쇠를 내려놓았다.

“언제 열지 정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권력이 있어.”

그 말은 자신에게 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래서 에리두는 자기 권한 역시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왜 공개가 늦어졌는지.

왜 특정 분류를 선택했는지.

어떤 반대의견이 있었는지.

최종 결정자가 누구였는지.

가능하면 함께 남겼다.

자기 판단도 후대의 조사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멸기록원장이 기록 바깥에 서서는 안 되었다.

누군가 물었다.

“원장님의 결정까지 굳이 남길 필요가 있습니까?”

에리두가 말했다.

“왜 없어?”

“기록원 내부 행정 아닙니까?”

“기록 공개를 늦춘 것도 역사야.”

“후대에 원장님이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에리두가 웃었다.

“그럼 읽을 거리가 늘겠네.”

농담처럼 말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자기가 틀렸다면 나중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했다.


백 년 동안 열 차례의 일곱 깃발 원정대를 지켜보며 에리두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출발 전에는 늘 농담한다.

“유언 쓸 사람은 지금 써.”

신입이 얼굴을 굳히면 웃는다.

“농담이야.”

잠시 생각한 뒤 덧붙인다.

“반쯤.”

사람들은 질색한다.

에리두는 즐거워한다.

하지만 출발하는 사람의 이름은 한 명도 대충 적지 않는다.

장비 지급 내역.

건강상태.

가져간 기록도구.

출발 날짜.

모두 확인한다.

십 년 뒤 누가 돌아왔는지 비교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이름을 ‘없음’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한 원정대의 출발 전날,
젊은 대원이 물었다.

“원장님은 저희가 무슨 기록을 가져왔으면 좋겠습니까?”

에리두는 잠시 생각했다.

“네가 보기 싫은 거.”

“예?”

“네 나라가 잘못한 거.”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틀린 거.”

“네가 싫어하는 사람이 맞는 거.”

대원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에리두는 계속 말했다.

“그런 거 갖고 와.”

“왜 그런 것만...”

“쉬운 건 누구나 적어.”

그리고 웃었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실 적는 게 어렵지.”


이번 원정대가 불멸기록원에 모였을 때도 에리두는 비슷했다.

어제 처음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아직 서로를 완전히 알지 못했다.

출신도 달랐다.

성격도 달랐다.

델피로의 기사는 말이 많았다.

레흐니티의 수호단원은 과묵했다.

세레이온의 성기사는 원칙주의자였다.

안발룽의 기동대 지휘관은 냉소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간에 곤란한 듯이 서 있는... 어느 국가의 왕실이나 교회, 상단, 군대에도 깊이 묶이지 않은 기록담당자.

에리두는 그들을 하나씩 봤다.

이미 백 년 동안 비슷한 광경을 열 번이나 보았다.

그래도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늘 새로 시작해야 한다.

기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이전 원정대의 결론을 다음 원정대가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십 년 전의 마을은 지금 다른 마을일 수 있다.

십 년 전의 적은 지금 동맹일 수 있다.

십 년 전의 피해자는 지금 권력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다시 보고,
다시 묻고,
다시 기록해야 했다.


출발 준비물은 언제나 비슷했다.

지도.

빈 노트.

방수지.

먹과 봉랍.

기억석.

번역석.

마나 측정기.

천막.

밧줄.

약품.

식량.

방한장비.

에리두는 하나씩 확인했다.

“기억석.”

“있습니다.”

“예비.”

“있습니다.”

“방수지.”

“있습니다.”

“잉크.”

“있습니다.”

에리두가 기록담당자를 바라봤다.

“네 고집.”

상대가 잠시 멈췄다.

“그것도 필요합니까?”

에리두가 웃었다.

“제일 많이.”


그녀는 떠나는 사람들에게 기록 기술보다 먼저 태도를 가르친다.

누가 울면서 증언한다고 무조건 믿지 마라.

누가 차분하게 말한다고 거짓말이라고 하지 마라.

권력자가 말했다고 사실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말했다고 자동으로 옳아지는 것도 아니다.

증언자의 처지를 기록하라.

그 말이 나올 이유도 기록하라.

하지만 이유가 있다고 거짓이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틀린 기억이라고 그 사람이 겪은 고통까지 가짜가 되는 것도 아니다.

구분하라.

에리두는 그 말을 가장 많이 한다.

구분하라.

사실과 증언.

증언과 해석.

해석과 변명.

잘못과 악의.

모르는 것과 없는 것.

그 차이를 문장 속에서 지켜내는 것이 기록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항상 마지막에는 한 가지를 더 확인한다.

“누가 너희한테 자기 기록 먼저 보여달라고 하면?”

대원이 대답한다.

“거절합니다.”

“왕이면?”

“거절합니다.”

“교황이면?”

“거절합니다.”

“돈 많이 주면?”

누군가 농담으로 말했다.

“얼마나 많이...”

에리두가 웃었다.

그리고 그 대원의 앞에 두루마리 하나를 툭 내려놓았다.

“지금 유언 써.”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에리두도 웃었다.

그러다 잠시 뒤 다시 진지해졌다.

“아무도 기록을 먼저 가지면 안 돼.”

“너희가 가지고 돌아온 건 어느 나라 전리품도 아니야.”

“불멸기록원 것도 아니고.”

“다 같이 보라고 가져오는 거야.”


그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마다 에리두는 자기 자신도 포함해서 생각한다.

불멸기록원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기록원장인 자신 것도 아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권한은 여전히 그녀에게 있다.

무엇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는지 판단한다.

어느 증언을 추가로 확인할지 결정한다.

배포 준비가 언제 끝났는지 승인한다.

문을 여는 열쇠를 들고 있다.

에리두는 그 열쇠를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관리해야 한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

다만 열쇠를 가진 사람이 자기가 문 자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기 결정도 기록한다.

반대 의견도 남긴다.

후임자가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자료까지 보존한다.

그것이 지금 그녀가 찾은 불완전한 답이다.


가끔 아주 늦은 밤,
불멸기록원에 아무도 없을 때 에리두는 오래전 사건기록을 다시 펼친다.

친구의 이름이 잘못 들어갔던 원본.

자신이 이름을 바꿨다는 자백.

무고한 가족이 입은 피해.

그 뒤의 정정기록.

모두 남아 있다.

에리두는 자기 기록도 삭제하지 않았다.

한때는 없애고 싶었다.

젊은 시절의 가장 큰 잘못이었다.

기록원장이 된 뒤 그것이 알려지면 권위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그래도 남겼다.

오히려 교육용 사례로 열람할 수 있게 했다.

직원 하나가 물었다.

“부끄럽지 않습니까?”

에리두는 한참 문서를 바라봤다.

“부끄럽지.”

그리고 웃었다.

“그래서 남겨.”

부끄러운 기록을 지우기 시작하면,
기록원에는 곧 자랑스러운 기록만 남게 된다.

에리두는 그런 기록원을 누구보다 싫어한다.


한번은 젊은 기록원이 그 사건을 읽고 물었다.

“친구분은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에리두는 잠시 침묵했다.

“살았어.”

“지금도 친하십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더 늦었다.

“한동안은.”

친구는 에리두를 용서하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

자기 때문에 다른 가족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에리두에게 왜 자기 말을 듣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

처음부터 기록을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에리두는 반박하지 못했다.

둘은 오래 멀어졌다.

나중에는 다시 편지를 주고받았다.

예전과 같은 사이는 아니었다.

그것도 에리두는 기록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사과했다고 관계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잘못이 정정되었다고 피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에리두는 유쾌한 기록원장이다.

회의가 지나치게 심각해지면 농담을 한다.

사절들이 서로 자기 나라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다투면 말한다.

“좋아. 둘 다 틀렸을 가능성부터 시작하자.”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린다.

에리두는 즐거워한다.

그러다 누군가 원본을 삭제하자고 하면 웃음을 멈춘다.

누군가 불리한 증언을 뒤로 빼달라고 요청하면 눈빛이 달라진다.

누군가 국가의 명예를 이유로 기록을 고치려 하면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때는 농담도 없다.

“안 돼.”

짧다.

그리고 필요하면 두루마리를 직접 봉인한다.

도깨비의 신비력이 글자 사이로 흐른다.

기록을 훔치려는 사람이 있다면 두루마리의 공간 자체에 가둬버릴 수도 있다.

전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기록을 없애려는 행동만큼은 거의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대표적인 말도 그런 순간에 나왔다.

어느 고위 관리가 오래된 문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기록은 사실과 다릅니다.”

에리두가 대답했다.

“그럴 수 있지.”

“그렇다면 폐기해야 합니다.”

“왜?”

“잘못된 기록이니까요.”

에리두는 정정문을 옆에 놓았다.

“이게 있잖아.”

관리의 표정이 굳었다.

“사람들은 원본만 보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에리두가 말했다.

“그럼 같이 읽게 만들어.”

“기록 자체가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에리두의 웃음이 사라졌다.

초록빛 눈이 상대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니.”

아주 조용한 목소리였다.

“기록은 거짓말하지 않아.”

그녀가 원본 문서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기록한 자가 거짓말할 뿐이지.”

잘못된 기록도 자신이 잘못 만들어졌다는 사실까지 그대로 남긴다.

그것을 숨기는 순간 또 다른 거짓말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에리두는 자신이 완전히 공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없다고 본다.

자신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친구를 위해 기록을 바꿨던 과거도 있다.

그래서 오히려 제도가 필요하다.

어느 한 사람의 선함을 믿어서 기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편파적이어도 흔적을 숨기기 어렵게 만드는 규칙이 필요하다.

원본을 남긴다.

정정도 남긴다.

반대 의견도 남긴다.

기록원의 결정도 남긴다.

그리고 일곱 나라에 같은 날 같은 기록을 보낸다.

에리두는 자신조차 믿지 않기 위해 그런 규칙을 만들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꽤 중요한 일이다.


이번 일곱깃발원정대가 첫 출발을 준비하는 아침에도 에리두는 평소처럼 기록원 안을 돌아다닌다.

짐을 확인한다.

봉랍을 더 넣는다.

기억석 하나가 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교체한다.

방한복의 수량을 다시 센다.

사람들은 그녀가 백 년 동안 열 번이나 같은 일을 했으니 이제 대충 할 거라고 생각한다.

반대다.

열 번 보냈기 때문에 더 확인한다.

무엇이 부족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이미 봤으니까.

누군가 묻는다.

“원장님, 긴장되십니까?”

에리두가 웃는다.

“내가 왜.”

잠시 뒤 물자목록을 한 번 더 본다.

“너희가 긴장해야지.”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책상 아래 작은 술병을 더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아무도 못 본 척한다.


출발 직전,
에리두는 원정대원들을 한 번 둘러본다.

백 년 동안 비슷한 장면을 여러 번 봤다.

그래도 익숙해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이 사람들이 십 년 뒤 어떤 얼굴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것.

누가 살아 돌아올지.

누가 생각을 바꿀지.

누가 자기 나라를 미워하게 될지.

누가 예전의 적을 이해하게 될지.

에리두는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를 만들지 않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빈 기록지를 건네는 일이다.

그리고 말한다.

“가능하면 많이 써.”

누군가 웃는다.

“무엇을요?”

에리두도 웃는다.

“네가 나중에 지우고 싶어질 것들.”

상대가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에리두는 계속 말한다.

“그게 제일 중요한 경우가 많거든.”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록담당자를 부른다.

목소리는 여전히 가볍다.

“잘 듣고 와.”

“예.”

“네가 싫어하는 말도.”

“예.”

“서로 말이 안 맞으면 둘 다 적어.”

“알겠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써.”

“예.”

에리두가 잠시 웃는다.

그러다 표정이 가라앉는다.

“그리고 누구도 기록을 자기 나라의 소유물로 만들게 두지 마.”

그 문장은 농담이 아니다.

자신에게도 하는 명령이다.

왕에게도.

교회에게도.

상인에게도.

군대에게도.

그리고 불멸기록원에게도.


에리두는 기록을 믿는다.

하지만 기록자를 믿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기록자도 사람이다.

사랑한다.

미워한다.

두려워한다.

자기 사람을 구하고 싶어 한다.

그 마음 때문에 글자를 바꾸기도 한다.

에리두 자신이 그 증거다.

그래서 그녀가 지키려는 것은 완벽한 기록자가 아니다.

틀린 기록자를 나중에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다.

한 사람의 문장이 다른 사람의 증언을 지워버리지 못하게 하는 구조다.

누군가 정답을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기록원이다.

그리고 바로 그 구조의 문 앞에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그녀의 가장 큰 숙제다.


가끔 밤에 불멸기록원의 불이 모두 꺼진 뒤,
에리두는 혼자 서고 사이를 걷는다.

백 년 동안 돌아온 일곱깃발원정대의 기록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서로 싸우는 증언들.

같은 일을 다르게 기억하는 사람들.

정정된 기록.

끝내 확인되지 않은 사건.

왕의 변명.

병사의 후회.

농민의 욕설.

아이의 그림.

죽은 사람의 마지막 편지.

그것들을 바라보면 에리두는 가끔 생각한다.

진실이라는 것은 아마 아주 거대한 두루마리일지도 모른다고.

누구도 한 번에 다 펼쳐볼 수 없는 두루마리.

자기 손에 잡힌 한 귀퉁이를 전부라고 착각하는 순간부터 거짓말이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그녀는 하나의 문장을 마지막 답으로 만들지 않으려 한다.

새 증언이 오면 붙인다.

틀렸다면 정정한다.

모르면 빈칸을 남긴다.

그리고 누군가 그 빈칸을 마음대로 채우려고 하면 막는다.


그녀가 오래전 바꾸었던 이름 두 개 역시 아직 기록원 어딘가에 남아 있다.

원본.

조작.

정정.

피해자의 증언.

에리두 자신의 자백.

모두 함께.

그것이 그녀에게 가장 아픈 기록이며,
가장 없애고 싶지 않은 기록이다.

그 문서가 남아 있는 한 에리두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잊기 어렵다.

친구를 구하려는 선한 마음으로도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는 사람.

진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밀어낼 수 있는 사람.

기록의 독점을 반대하면서도 기록의 문을 지키는 권력을 가진 사람.

그래서 에리두는 자기 자신까지 기록 바깥에 두지 않는다.

언젠가 후대의 기록원장이 자신의 판단을 읽고 말할 수 있도록.

‘에리두는 여기서 틀렸다.’

그 문장이 남을 수 있는 기록원을 만드는 것.

에리두는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 원정대가 문을 나서는 순간,
언제나처럼 손을 흔든다.

“잘 다녀와.”

웃으며 말한다.

“살아서 돌아오면 더 좋고.”

누군가 질색한다.

에리두가 웃는다.

그러다 그들의 뒷모습이 기록원 문 너머로 사라지면,
잠시 웃음을 멈춘다.

그리고 출발기록 마지막 줄에 날짜를 적는다.

이름을 하나씩 확인한다.

한 글자도 바꾸지 않는다.

이제 그녀에게 이름은 움직여도 되는 장난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에리두 김은 그 증거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워지게 두지 않는다.


서리성벽군단2명
CHE
첼키아 이바노프
프라그모서리성벽군단-군단장
“귀하, 정신 차리도록 한다. 선조의 방식으로 죽으면 선조들이 기뻐할 것 같나?”
🩸 HP130
💪 공격력80
🧙 마법력10
✨ 신비력1
🛡️ 방어력50
🔗 항마력60
😖 신비저항70
🏃 회피력60
과거 보기
첼키아 이바노프는 전통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서리성벽군단에서 백 년 넘게 불러온 행군가도 알고 있고,
첫눈이 내리는 날 성벽의 화로에 불을 붙이는 의식도 빠뜨리지 않는다.

선임이 후임에게 낡은 장갑이나 칼집을 물려주는 풍습도 좋아한다.

지금 그녀가 사용하는 장거리 저격총도 최신식 무기가 아니다.

총몸에는 오래된 흠집이 있고,
개머리판 한쪽에는 여러 번 덧댄 흔적이 있다.

방아쇠울 안쪽에는 오래전에 새겨진 이름 하나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런 첼키아가 군단에서 가장 자주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옛날부터 했다는 건 이유가 아니야.”

누군가 당황해서 묻는다.

“군단장님도 구식 총을 쓰시지 않습니까?”

첼키아는 자기 총을 한번 내려다본다.

“이건 아직 잘 맞는다.”

그리고 상대의 낡은 장비를 가리킨다.

“그건 안 맞고.”

그녀에게 전통은 오래됐다는 사실로 보호받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계속 살아 있게 만들기 때문에 남는 것이다.

그 생각을 가지게 되기까지,
첼키아는 고향 하나와 가족 대부분을 눈 속에 묻어야 했다.


첼키아가 태어난 곳은 프라그모 북부의 작은 정착지였다.

서리성벽보다 더 북쪽으로 나간 감시초소와 광산촌 사이에 자리한 마을이었다.

겨울이 길었다.

눈이 오지 않는 날보다 오는 날이 많았다.

아이들은 걸음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눈 위에서 넘어지는 법부터 배웠다.

북극곰수인인 첼키아에게 추위는 특별한 적이 아니었다.

두꺼운 흰 털이 있었고,
어릴 때부터 얼음 위를 뛰어다녔다.

다른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 때 첼키아는 눈벽을 쌓았다.

친구가 물었다.

“왜 성벽을 만들어?”

어린 첼키아가 대답했다.

“눈사람은 안 막아주잖아.”

“뭘?”

“몰라.”

잠시 생각했다.

“아무거나.”

어릴 때부터 그런 아이였다.

쓸모가 있어야 마음에 들었다.

장식보다 구조를 좋아했다.

멋있는 말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묻는 것을 좋아했다.


그 마을에는 오래된 겨울 규칙이 많았다.

첫 번째 서리가 내리는 날에는 창문 틈을 막는다.

북풍이 사흘 연속 불면 외곽창고의 식량을 안쪽으로 옮긴다.

눈이 특정 높이까지 쌓이면 지붕을 비운다.

어느 달의 어느 별자리가 북쪽 능선 위에 올라오면 장거리 이동을 멈춘다.

대부분은 이유가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남으면서 만든 규칙이었다.

첼키아의 할아버지는 자주 말했다.

“기록을 믿어라.”

마을에는 기상기록부가 있었다.

언제 눈폭풍이 왔는지.

얼음이 언제 갈라졌는지.

어느 계절에 식량이 부족했는지.

세대가 바뀌어도 남아 있었다.

첼키아는 그 기록을 좋아했다.

과거의 사람이 지금의 사람에게 남긴 경고처럼 느껴졌다.

어린 시절에는 그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기록되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첼키아가 열네 살이던 겨울이었다.

그해는 오히려 평온했다.

기록상으로도 큰 눈폭풍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은 시기였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같은 계절에 치명적인 폭풍이 온 사례는 없었다.

바람도 나쁘지 않았다.

기온은 낮았지만 프라그모 북부에서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마을의 노인들도 말했다.

“이번 주는 괜찮다.”

외곽작업을 계속했다.

사냥꾼들은 나갔다.

광부들도 평소처럼 교대했다.

대피준비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첼키아의 아버지는 창고 일을 맡고 있었다.

어머니는 마을의 방한복과 가죽장비를 수선했다.

남동생은 아직 어렸다.

그날 저녁에도 가족은 평소와 같이 식사를 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내일 눈 온다던데.”

아버지가 대답했다.

“조금 온대.”

첼키아는 창밖을 보았다.

하늘이 이상하게 낮아 보였다.

“바람 이상해.”

아버지가 웃었다.

“네가 언제부터 기상관측관이었어?”

첼키아가 코를 찡그렸다.

“그냥 이상하다고.”

그 말은 그날 밤 아무 결정도 바꾸지 못했다.


폭풍은 새벽에 왔다.

처음에는 바람이었다.

지붕이 울렸다.

창문이 흔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이 완전히 사라졌다.

눈이 내린다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옆집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눈을 수평으로 던졌다.

이미 쌓인 눈까지 다시 들어 올려 사람 얼굴 높이로 날렸다.

마을의 경보종이 울렸다.

대피 명령이 내려졌다.

너무 늦은 뒤였다.

외곽 주택 몇 곳은 이미 출입구가 막혔다.

사람들은 줄을 묶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눈보라 속에서는 몇 걸음 떨어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첼키아의 가족도 대피소로 향했다.

아버지가 앞에 섰다.

어머니가 남동생을 안았다.

첼키아는 뒤에서 밧줄을 잡았다.

“놓지 마.”

아버지가 말했다.

첼키아는 대답했다.

“알아.”


폭풍 한가운데에서는 방향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

표지판은 눈에 묻혔다.

길의 경계도 없어졌다.

오랫동안 사용하던 눈기둥 몇 개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사람들은 기억을 따라 걸었다.

평소라면 맞는 방식이었다.

우물에서 북동쪽으로 스무 걸음.

낮은 돌담을 지나 왼쪽.

그다음에는 대피소.

하지만 눈폭풍이 지형 자체를 바꾸고 있었다.

눈더미가 담을 덮었다.

바람에 밀려 사람의 걸음이 조금씩 옆으로 틀어졌다.

첼키아는 처음으로 자신들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

대답이 들렸다.

“왜.”

“길 틀렸어.”

“맞아.”

“아니야.”

첼키아는 자기 발밑을 보았다.

원래라면 이 지점에 단단한 얼음길이 있어야 했다.

지금은 깊은 눈이었다.

아버지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그 짧은 멈춤 사이에 더 큰 돌풍이 왔다.


밧줄이 팽팽해졌다.

누군가 넘어졌다.

첼키아도 눈 속으로 굴렀다.

손에서 밧줄이 빠질 뻔했다.

급하게 다시 잡았다.

그런데 앞쪽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밧줄이었다.

“엄마!”

첼키아가 소리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뛰었다.

몇 걸음.

열 걸음.

아무도 없었다.

바람 소리가 모든 목소리를 먹어버렸다.

첼키아는 계속 소리쳤다.

“아버지!”

“엄마!”

“대답해!”

누군가 대답한 것 같았다.

그쪽으로 갔다.

없었다.

다시 소리가 났다.

다른 방향이었다.

그녀는 움직였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것은 가족의 목소리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바람이 건물 사이를 통과하는 소리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열네 살의 첼키아는 그것을 따라갔다.

그리고 가족에게서 더 멀어졌다.


얼마나 걸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손가락 감각이 사라졌다.

북극곰수인이라도 견딜 수 있는 추위에는 한계가 있었다.

털 안쪽까지 눈이 녹아들었다가 다시 얼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첼키아는 결국 낮은 눈더미 뒤에 웅크렸다.

자기가 죽는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너무 추우면 무서워하는 것도 귀찮아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멀리서 총성이 들렸다.

한 번.

잠시 뒤 다시 한 번.

일정한 간격이었다.

첼키아가 눈을 떴다.

또 한 번.

신호였다.

서리성벽군단이 사용하는 방향유도 총성이었다.

그녀는 소리가 오는 쪽으로 몸을 끌었다.

몇 번 넘어졌다.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검은 형체 하나가 나타났다.

노병이었다.


노병은 서리성벽군단의 퇴역 직전 병사였다.

이름은 미하일이었다.

나이가 많았다.

왼쪽 무릎이 좋지 않았다.

수염에는 얼음이 붙어 있었다.

등에는 오래된 장거리 저격총을 메고 있었다.

그는 정규 구조대가 아니었다.

인근 초소에서 폭풍을 확인한 뒤 몇 명과 함께 마을 쪽으로 들어왔다.

첼키아를 발견하자 욕부터 했다.

“이런 미친.”

그리고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걸을 수 있나?”

첼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걸음 걷고 넘어졌다.

미하일이 한숨을 쉬었다.

“거짓말도 못하는군.”

그는 첼키아를 등에 업었다.

총은 앞으로 돌려 멨다.

몇 분마다 총을 하늘로 쏘았다.

다른 구조대와 위치를 맞추기 위한 신호였다.

폭풍 속에서 첼키아가 마지막으로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총의 소리였다.


첼키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임시 대피소였다.

가족을 찾았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며칠 뒤 발견되었다.

어머니와 남동생도 찾았다.

세 사람 모두 살아 있지 않았다.

마을의 다른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

집 여러 채가 무너졌다.

창고가 눈에 묻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른 정착지로 옮겨졌다.

고향은 사실상 사라졌다.

사후조사가 시작되었다.

첼키아는 기록을 읽었다.

가족이 죽은 이유를 알고 싶었다.

누가 대피명령을 늦췄는지.

왜 더 빨리 알지 못했는지.

그리고 이상한 결론과 마주쳤다.

규정 위반은 거의 없었다.

기록상 해당 시기의 대규모 눈폭풍 발생 가능성은 낮았다.

기존 관측자료에서는 긴급대피를 명령할 충분한 징후가 확인되지 않았다.

마을 책임자는 정해진 절차를 따랐다.

경보도 규정상 지나치게 늦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웠다.

모두가 기록대로 했다.

그리고 마을은 죽었다.


첼키아는 보고서를 몇 번이나 읽었다.

화가 났다.

“기록에 없었다.”

그 문장이 특히 싫었다.

기록에 없었으니 예측하기 어려웠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첼키아에게는 이상하게 들렸다.

기록에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가.

과거에 없었으면 앞으로도 없어야 하는가.

어머니가 죽기 전날 바람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다른 사냥꾼도 평소와 다른 구름을 봤다고 했다.

비행하는 새들이 남쪽으로 급하게 이동했다는 증언도 나중에 나왔다.

하지만 그런 정보는 공식 관측기록에 포함되지 않았다.

근거가 약했다.

개인의 감각이었다.

기존 규정에서 경보를 발령할 정보가 아니었다.

첼키아는 거기서 다른 문제를 보았다.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기록만 보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미하일은 그녀가 회복하는 동안 몇 번 찾아왔다.

첼키아는 처음에는 그에게도 화를 냈다.

“왜 더 일찍 안 왔어.”

열네 살 아이의 말이었다.

미하일은 화내지 않았다.

“몰랐다.”

첼키아의 귀가 뒤로 눕었다.

“다 몰랐대.”

“그래.”

“그럼 끝이야?”

미하일은 잠시 생각했다.

“아니다.”

그 말 때문에 첼키아가 처음으로 그를 똑바로 봤다.

노병이 말했다.

“몰랐으면 다음에는 알 방법을 만들어야지.”

첼키아는 그 문장을 오래 기억했다.

누구를 처벌할 것인가보다,
다음에는 무엇을 볼 것인가.

그 질문이 처음 생겼다.


몇 년 뒤 첼키아는 서리성벽군단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가족 때문이었다.

다시는 비슷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군단에 들어가자 예상보다 많은 전통과 규정을 만났다.

북부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조직답게 규칙이 많았다.

어떤 규칙은 훌륭했다.

폭설 시 두 명 이상이 한 조로 움직인다.

장거리 순찰에는 예비 식량을 이틀분 더 가져간다.

총의 금속부품을 맨손으로 잡지 않는다.

눈 속에 쓰러진 사람을 바로 뜨거운 물에 넣지 않는다.

첼키아는 전부 배웠다.

이유가 있는 전통은 오히려 남들보다 철저하게 지켰다.

문제는 이유가 사라진 규칙이었다.


신병 시절 한 교관이 말했다.

“겨울 순찰대는 이 경로를 따른다.”

첼키아가 지도를 봤다.

“왜.”

교관이 그녀를 바라봤다.

“뭐?”

“왜 이 길로 가.”

“오래 사용한 안전경로다.”

첼키아가 지도의 표시를 짚었다.

“여기 작년에 얼음층 갈라졌어.”

“우회로는 검증되지 않았다.”

“이쪽은 이제 위험한데.”

교관의 얼굴이 굳었다.

“선배들이 수십 년 동안 사용한 길이다.”

첼키아가 말했다.

“작년에는 안 갈라져 있었잖아.”

벌점을 받았다.

며칠 뒤 다른 순찰대가 같은 구간에서 얼음 붕괴를 겪었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둘이 다쳤다.

첼키아는 그날부터 더 노골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왜.”

군단에서 그녀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되었다.


그녀의 질문은 반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유가 있으면 따랐다.

오히려 누구보다 정확히 따랐다.

그러나 답이 ‘원래 그랬다’뿐이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지금도 그래야 할 이유.”

일부 선임은 그녀를 싫어했다.

전통을 무시한다고 말했다.

첼키아는 그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전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통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지 기억하고 싶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사람을 죽이는 순간 바뀌어야 했다.

그녀에게 선조를 존중한다는 것은 선조가 했던 동작을 그대로 흉내 내는 일이 아니었다.

선조가 왜 그 동작을 시작했는지 이해하는 일이었다.


미하일은 첼키아가 군단에 들어온 뒤에도 살아 있었다.

이미 현역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첼키아에게 사격을 가르쳤다.

당시에도 그가 사용하는 총은 낡은 물건이었다.

새로운 총보다 무거웠다.

장전도 느렸다.

대신 긴 총열과 안정적인 구조 덕분에 극한의 추위에서도 명중률이 잘 무너지지 않았다.

미하일이 말했다.

“좋은 총이 뭔지 아나?”

첼키아가 대답했다.

“잘 맞는 총.”

“틀렸다.”

첼키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필요할 때 잘 맞는 총.”

미하일은 총열을 닦았다.

“훈련장에서 열 발 다 맞아도 눈보라에서 얼어붙으면 장식품이다.”

첼키아는 그 말을 마음에 들어 했다.

성능표보다 현장에서 작동하는가.

기록보다 지금 눈앞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점점 같은 원칙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첼키아는 저격에 재능이 있었다.

호흡이 안정적이었다.

추위 속에서도 손이 잘 떨리지 않았다.

눈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이는 점 하나를 오래 볼 수 있었다.

거리를 재고,
바람을 읽고,
표적보다 조금 다른 곳에 조준했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표적 옆을 쏴.”

미하일이 대답했다.

“바람 있으니까.”

“표적은 저기 있잖아.”

“총알이 네 말 듣고 직선으로 가나?”

첼키아는 다시 쐈다.

이번에는 맞았다.

그 경험도 그녀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

목표가 한곳에 있다고,
그곳을 바로 겨눈다고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바람을 계산해야 했다.

전통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목적은 같을 수 있다.

공동체를 지킨다.

그러나 시대의 바람이 달라졌다면 조준점도 달라져야 한다.


미하일이 완전히 퇴역하던 날,
그는 총을 첼키아에게 건넸다.

첼키아가 말했다.

“구식인데.”

미하일이 웃었다.

“안 받을 건가?”

첼키아는 바로 받아 들었다.

“받아.”

“구식이라며.”

“잘 맞잖아.”

미하일이 웃었다.

첼키아는 총을 살펴봤다.

“개량해도 돼?”

미하일의 웃음이 멈췄다.

“뭘.”

“조준기부터.”

“귀하.”

이번에는 미하일이 군대식으로 불렀다.

“선물 받자마자 뜯어고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

첼키아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더 잘 맞으면 됐지.”

미하일은 한참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게 맞다.”


첼키아는 실제로 총을 조금씩 손봤다.

총 자체의 기본구조는 유지했다.

극저온에서의 안정성은 새 무기보다 오히려 뛰어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조준기를 바꿨다.

거리 측정용 눈금을 추가했다.

장갑을 낀 손으로도 조작하기 쉽게 일부 부품을 넓혔다.

냉기탄에 맞게 총열과 약실을 보강했다.

낡았다는 이유로 버리지 않았다.

오래됐다는 이유로 보존하지도 않았다.

쓸모 있는 것은 남겼다.

나쁜 부분은 바꿨다.

그 총은 첼키아가 생각하는 전통 그 자체와 비슷해졌다.

오래된 총몸.

새로운 장치.

그리고 목적은 처음부터 같다.

필요한 순간 사람을 지키는 것.


첼키아가 군단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사격보다 관측체계 개편 때문이었다.

그녀는 과거 기록을 버리자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기록하자고 했다.

문제는 과거만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말했다.

“기록 옆에 현재를 붙여.”

전초기지마다 기온을 측정하게 했다.

풍향과 풍속을 더 자주 기록했다.

눈의 밀도와 적설량을 관측했다.

얼음층의 균열을 표시했다.

현지 사냥꾼과 운송인의 보고도 모았다.

마나 흐름 측정기도 시험적으로 들여왔다.

전통적인 기상기록 담당자들은 불편해했다.

“수백 년 동안 이 방식으로 충분했습니다.”

첼키아가 대답했다.

“내 마을에도 그 기록 있었어.”

그 뒤에는 아무도 쉽게 같은 말을 하지 못했다.


새 장비가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 마나 측정기는 추위에 오작동했다.

풍향계가 얼어붙었다.

한 관측탑은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졌다.

병사들은 뒤에서 말했다.

“역시 옛날 방식이 낫다.”

첼키아는 그 말을 듣고 장비를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실패를 감추지도 않았다.

“망가진 이유 찾아.”

부하가 물었다.

“계속 씁니까?”

“고쳐서.”

“또 실패하면?”

“또 고쳐.”

“그래도 안 되면요?”

“버려.”

부하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첼키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신기술도 신앙 아니야.”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것도 아니었다.

현장에서 작동해야 했다.

그녀는 전통과 혁신을 같은 기준으로 판단했다.

사람을 살리는가.

아니면 죽게 만드는가.


그 판단이 빛을 본 것은 몇 년 뒤의 눈폭풍이었다.

기존 기록만 보면 위험도가 높지 않은 시기였다.

과거의 첼키아가 살던 마을과 비슷했다.

그러나 새 관측망에서 이상한 정보가 연이어 들어왔다.

서쪽 초소의 기압 급변.

북부 마나 흐름의 비정상적인 저하.

사냥꾼들이 보고한 동물 이동.

두 개 초소에서 동시에 관측된 고층운 변화.

각각만 보면 대피명령을 내릴 정도는 아니었다.

함께 보면 이상했다.

당시 첼키아는 아직 군단장이 아니었다.

지역 지휘관에게 대피를 건의했다.

“근거 부족이다.”

상관이 말했다.

첼키아는 예상결과를 설명했다.

“오판이면 하루 작업 중단.”

“맞으면 정착지 세 곳 생존.”

상관이 침묵했다.

첼키아가 덧붙였다.

“비용 차이 크다.”

결국 선제대피가 승인되었다.

그날 밤 눈폭풍이 왔다.

세 정착지는 비어 있었다.

사망자는 없었다.


사람들이 첼키아를 칭찬했다.

그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가 특별한 예언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보가 있었다.

사람들이 모았다.

그것을 보고 움직였다.

그게 전부였다.

한 병사가 말했다.

“군단장님이라면 예전에도 알아보셨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군단장도 아니었다.

첼키아는 대답했다.

“아니.”

“왜요?”

“열네 살 때도 바람 이상하다고만 했어.”

그리고 관측기록을 가리켰다.

“느낌을 정보로 바꿔야 쓸 수 있다.”

그녀는 개인의 직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직감만으로 수백 명을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현장의 감각을 수집한다.

측정한다.

서로 비교한다.

틀렸다면 다음 기록에 남긴다.

그렇게 다음 사람의 판단을 조금 더 빠르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첼키아가 지휘관이 된 뒤 서리성벽군단의 겨울 대피규칙은 크게 바뀌었다.

과거 기록은 기준 중 하나가 되었다.

절대적인 답은 아니었다.

정찰병에게도 재량이 늘었다.

현장에서 규정과 다른 위험을 발견하면 즉시 보고하고 일시 철수할 수 있게 했다.

예전에는 지휘관 승인 없이 순찰경로를 바꾸면 징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첼키아는 그것을 수정했다.

“왜 바꿨는지만 남겨.”

한 장교가 우려했다.

“병사들이 제멋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첼키아가 말했다.

“그래서 기록하게 하는 거다.”

“결과가 틀리면요?”

“검토.”

“규정대로 움직이지 않았잖습니까.”

첼키아의 푸른회색 눈이 상대를 향했다.

“규정 지키려고 죽는 군대 만들 생각 없어.”


그녀는 명령을 내릴 때 이유를 같이 말한다.

병사들이 모든 전략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전투 중에는 설명할 시간도 없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최소한 왜 하는지는 알려준다.

“남쪽 초소 철수.”

“왜입니까?”

“얼음층 균열 증가. 두 시간 안에 보급로 끊길 가능성 높다.”

“초소를 포기합니까?”

“사람 먼저 뺀다. 날씨 안정되면 다시 간다.”

또 다른 날에는 말했다.

“오늘 사격훈련 취소.”

신병이 안도했다.

“눈 때문입니까?”

“아니.”

첼키아가 그를 봤다.

“귀하들 손 상태가 개판이다. 이대로 쏘면 총보다 손가락 먼저 망가진다.”

신병들이 장갑을 확인했다.

첼키아는 덧붙였다.

“장비 점검하고 오후에 다시.”

안도하던 얼굴들이 무너졌다.


전통 문제로 가장 크게 충돌했던 것은 서리성벽의 동계 행군훈련이었다.

오래된 군단 관습이었다.

신병은 혹한기에 일정 거리를 완전군장으로 걸어야 했다.

선조들도 그렇게 했다.

겨울을 모르는 병사는 북부를 지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첼키아도 취지에는 동의했다.

문제는 기후가 달라진 어느 해였다.

예상보다 기온이 급격히 내려갔다.

풍속도 올라갔다.

관측장교가 훈련 취소를 건의했다.

고참 장교들이 반대했다.

“이 정도 추위는 예전에도 견뎠습니다.”

첼키아가 물었다.

“예전 자료.”

기록이 나왔다.

첼키아는 지금 수치와 비교했다.

바람이 훨씬 강했다.

체감조건도 나빴다.

“취소.”

한 고참이 말했다.

“군단장님, 선조들도 이런 훈련으로 단련되었습니다.”

첼키아가 고개를 들었다.

“귀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정신 차리도록 한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선조의 방식으로 죽으면 선조들이 기뻐할 것 같나?”


훈련은 다음 날로 연기되었다.

일부에서는 첼키아가 군단의 전통을 약화시킨다고 비판했다.

첼키아는 그 말을 듣고 다음 회의에 오래된 훈련기록을 가져왔다.

초기 서리성벽군단의 기록이었다.

당시에는 동계행군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짧았다.

병사 손실이 커지면서 여러 세대에 걸쳐 수정되어 현재 형태가 된 것이었다.

첼키아가 책을 탁자 위에 놓았다.

“봐.”

“선조들도 바꿨어.”

누군가 말했다.

“시대가 달랐으니까요.”

첼키아가 대답했다.

“지금도 달라.”

그녀에게 그것으로 논쟁은 끝이었다.

전통을 바꾸는 것이 전통을 배신하는 일이 아니라,
전통이 처음 했던 일을 계속하는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동체를 살린다.

살아남은 사람이 다시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

형식보다 그것이 중요했다.


군단장이 된 첼키아는 관측망을 더 확장했다.

서리성벽 밖의 무인 관측소를 늘렸다.

장거리 신호탑을 세웠다.

마나 측정기와 기상측정기를 함께 설치했다.

정찰병의 장비도 개선했다.

장거리 저격대의 탄약에는 냉기탄을 더 많이 배치했다.

눈보라 속에서도 운용할 수 있는 통신수단을 시험했다.

이 변화들은 실제로 사람을 살렸다.

눈사태를 먼저 발견했다.

빙하 이동을 예측했다.

보급대가 끊기기 전에 길을 바꿨다.

실종된 순찰대를 신호 기록으로 찾아냈다.

첼키아는 만족했다.

문제는 서리성벽 안에서 보는 모습과,
밖에서 보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델피로 북부에서는 다른 보고가 올라왔다.

프라그모가 북부 관측초소를 늘리고 있다.

장거리 사격이 가능한 저격부대가 전진 배치되고 있다.

새로운 마나 관측장비가 국경 방향을 감시한다.

신호탑이 증설되고 있다.

병력의 이동속도가 빨라졌다.

첼키아가 보기에는 전부 생존을 위한 장치였다.

눈폭풍이 오기 전에 알아야 했다.

사고가 나면 빨리 구조해야 했다.

북부빙벽로를 지나는 민간 수송대도 보호해야 했다.

하지만 델피로의 장교가 보는 지도에서는 달랐다.

감시망.

장거리 화력.

빠른 통신.

전진기지.

전쟁 준비와 거의 같은 그림이었다.


델피로에서 사절이 왔다.

“최근 서리성벽군단의 북서부 관측활동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첼키아가 말했다.

“맞아.”

“목적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기상 관측.”

“장거리 저격대도 기상을 관측합니까?”

첼키아는 상대를 바라봤다.

“구조대 보호한다.”

“냉기탄까지 필요합니까?”

“괴물과 위험생물 나온다.”

사절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첼키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때 처음으로 상대의 입장에서 자기 군단을 보려고 했다.

설명 하나하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전체를 모아보면 의심할 만했다.

자신이라도 국경 너머에 같은 장비가 늘어나면 관측했을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를 준비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첼키아는 군사기밀을 모두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관측목적과 기상정보를 주변국과 공유하기 시작했다.

특히 민간 교역로와 연결된 정보는 더 적극적으로 공개했다.

폭풍 예상.

빙벽 붕괴 위험.

북부빙벽로 통제.

일부 초소 증설 목적.

한 장교가 반대했다.

“상대가 우리 관측범위를 알게 됩니다.”

첼키아가 대답했다.

“안 알려주면 더 넓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정보를 악용하면요?”

“공개할 것과 숨길 것 구분한다.”

그녀는 모든 경계를 없애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군단은 군대였다.

적이 실제로 온다면 싸워야 했다.

다만 자신에게 방어인 것이 상대에게 공격준비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 역시 현장관측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자기 성벽 안에서만 보면 세계의 절반만 보인다.


더 까다로운 문제는 북쪽의 백색 드래곤 레다스였다.

레다스는 인간 국가의 국경이나 군단의 정치적 목적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었다.

프라그모를 보호하지도 않았다.

델피로를 적대하지도 않았다.

누가 전쟁에서 이기는지도 관심 밖이었다.

그 백색 드래곤이 움직이는 이유는 하나였다.

북부의 냉기와 얼음,
그리고 그곳을 통과하는 마나의 흐름이 지나치게 무너질 때 균형을 맞추는 것.

첼키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드래곤과 자기 관측망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새로 설치한 마나 관측기 일부가 백색정지분지에 가까워지면서 시작되었다.

관측기는 흐름을 읽기 위해 아주 약한 자극을 맥류에 되돌려보내는 방식이었다.

인간 기준으로는 무시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감지하는 규모는 달랐다.


어느 날 북부 관측소에서 이상 보고가 올라왔다.

하늘에 거대한 흰 형체가 나타났다.

공격은 없었다.

포효도 없었다.

레다스는 단지 관측탑 위를 크게 선회했다.

병사들은 공포에 질렸다.

일부는 그것을 경고라고 해석했다.

“드래곤이 우리 관측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보고가 올라왔다.

첼키아는 문장을 읽고 바로 고쳤다.

“위협했다는 근거.”

장교가 말했다.

“관측탑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그건 나타난 거고.”

“우리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건 본 거고.”

“군단장님.”

첼키아가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드래곤 마음 추측하지 마.”

그녀는 직접 북쪽으로 갔다.


레다스와의 만남은 첼키아가 예상한 것보다 조용했다.

거대한 백색 드래곤은 얼어붙은 평원 위에 있었다.

주변의 눈발이 이상할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첼키아는 총을 등에 멘 채 가까이 갔다.

호위대는 멀리 남겨두었다.

레다스가 먼저 말했다.

“작은 장치들이 얼음 아래를 두드리고 있다.”

첼키아는 바로 이해했다.

“관측기다.”

“안다.”

“문제 있나.”

레다스는 한동안 그녀를 보았다.

“아직은 작다.”

첼키아가 물었다.

“그러면 괜찮다는 뜻인가.”

드래곤은 대답했다.

“너희의 괜찮음은 내 기준이 아니다.”

첼키아의 귀가 조금 움직였다.

레다스는 국경도,
군사적 긴장도 말하지 않았다.

총을 내려놓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프라그모의 병력배치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얼음 아래의 흐름을 말했다.

“그 장치가 읽기만 한다면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흐름을 바꾼다면?”

“흐름을 원래의 균형으로 되돌린다.”

첼키아가 잠시 침묵했다.

그것은 협박이 아니었다.

레다스에게는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말과 비슷했다.


첼키아가 물었다.

“우리 군단이 늘어난 건 신경 쓰지 않나.”

레다스가 말했다.

“너희가 서로 죽이는 숫자는 내가 셀 것이 아니다.”

차갑지만 드래곤답게 명확한 답이었다.

“총이 어느 나라를 향하는지도?”

“아니다.”

“관측탑은.”

“얼음의 흐름을 바꾸면 본다.”

첼키아는 그제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들은 레다스가 프라그모의 군사화를 경계한다고 해석했다.

실제 레다스가 경계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장치가 자연의 냉기 맥류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가.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첼키아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자기 장비가 인간끼리의 오해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 설계하면 정말 세계의 균형에 손을 댈 수도 있었다.


돌아온 첼키아는 관측장비의 규정을 또 바꿨다.

백색정지분지 주변에서는 맥류에 되돌려 보내는 자극의 세기를 제한했다.

관측만으로 충분한 장비를 우선 배치했다.

새로운 기계를 설치할 때는 주변 냉기 흐름 자체가 변하는지 별도 확인하게 했다.

장교 하나가 말했다.

“드래곤 눈치를 봐야 합니까?”

첼키아가 대답했다.

“아니.”

“그런데 왜 규정을...”

“세계 망가뜨리기 싫어서.”

상대가 입을 다물었다.

첼키아는 레다스를 동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프라그모가 위기에 처해도 레다스가 사람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럴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더더욱 인간이 자기 안전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드래곤이 세계를 지킨다고 해서 마을 하나를 지켜주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첼키아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녀의 전투방식도 그런 사고방식과 닮았다.

가능하면 적이 가까이 오기 전에 끝낸다.

설원은 숨을 곳이 적다.

대신 거리감각이 무너지기 쉽다.

첼키아는 그것을 이용한다.

눈 위에 엎드린다.

바람을 읽는다.

숨을 멈춘다.

오래된 저격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냉기탄이 먼 설원을 가른다.

기계 부품을 얼려 움직임을 멈춘다.

무기를 든 상대의 손 주변을 얼린다.

실제로 제거해야 하는 적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치명점을 노린다.

그녀는 저격을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이 아군에게 닿기 전에 끝낼 수 있다면 그 편이 낫다.

하지만 적이 가까이 오면 피하지도 않는다.

총검을 단다.

큰 체격과 북극곰수인의 완력을 그대로 사용한다.

총몸으로 받아치고,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린다.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총을 버리지 않는다.

쓰던 도구가 여전히 쓸모 있으면 끝까지 쓴다.


첼키아는 병사의 목숨을 낭비하는 지휘관을 싫어한다.

용맹이라는 단어를 특히 조심한다.

어느 전투에서 젊은 장교가 말했다.

“이 지점을 지키다 전멸하더라도 후퇴할 수 없습니다.”

첼키아가 지도를 봤다.

“왜.”

“서리성벽군단은 이곳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전술적 가치.”

“예?”

“지금 이곳의 전술적 가치.”

장교가 말을 잃었다.

보급로는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민간인도 대피한 뒤였다.

그 지점을 지킬 이유는 상징밖에 없었다.

첼키아는 즉시 명령했다.

“철수.”

“하지만 군단의 명예가...”

첼키아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죽은 병사한테 명예 먹일 건가.”

부대는 철수했다.

며칠 뒤 더 유리한 지형에서 방어선을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존 중심 사고가 항상 좋은 결과만 낳는 것도 아니다.

첼키아는 위험을 발견하면 대비한다.

관측망을 늘린다.

무기를 배치한다.

보급선을 확보한다.

신호체계를 강화한다.

그 행동이 자기 눈에는 책임이다.

상대에게는 다른 의미가 된다.

프라그모가 우리를 관측한다.

프라그모가 장거리 저격수를 늘린다.

프라그모가 빠른 동원망을 만든다.

프라그모가 전쟁을 준비한다.

첼키아는 그 해석이 틀렸다고 화내기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자신도 반대편에서 같은 것을 보면 대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도가 방어니까 믿어라.”

그것은 군사적으로 설득력이 약한 말이었다.

총은 방어용이라고 적어놓는다고 사정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관측망은 폭풍도 볼 수 있지만 병력도 볼 수 있다.

통신망은 구조에도 쓰이지만 공격에도 쓰일 수 있다.

그 이중성을 없앨 수는 없었다.


한번은 부관이 물었다.

“그러면 군비를 줄이시겠습니까?”

첼키아는 바로 대답했다.

“아니.”

“주변국이 경계합니다.”

“알아.”

“그런데도 유지합니까?”

“눈폭풍도 우리 사정을 봐주진 않아.”

그녀는 지도 위 북부 초소를 가리켰다.

“여기 관측망 없애면 대피가 늦어진다.”

다음에는 저격대 위치를 짚었다.

“여기 병력 빼면 구조대가 위험해진다.”

부관이 물었다.

“그럼 방법이 없습니까?”

첼키아는 잠시 침묵했다.

“방법 찾아야지.”

그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생존장비를 없애서 상대를 안심시키는 것도 답이 아니다.

상대가 무서워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안전을 유지하면서 오해를 줄이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쉽지 않다.

그래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첼키아는 최근 군단 훈련의 일부를 공개하기도 한다.

민간 구조훈련 일정.

대규모 기상대피훈련.

빙벽로 통제훈련.

주변국 연락관이 참관할 수 있는 구간도 만들었다.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럴 이유도 없다.

하지만 상대가 모르는 부분을 전부 공격준비라고 상상하지 않도록 어느 정도의 창을 열어놓는다.

군단 내부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서리성벽의 방식을 외국인에게 왜 보여줍니까?”

첼키아가 대답했다.

“상대가 겁먹고 먼저 무장하면 우리도 더 무장하게 돼.”

“그게 문제입니까?”

“계속하면 전쟁 된다.”

짧고 단순했다.

그녀는 평화를 이상으로 말하지 않는다.

서로 오해한 군대가 잘못 움직이면 병사가 죽는다.

그게 싫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첼키아는 자신이 점점 더 많은 것을 관측하려 한다는 사실에 가끔 불안을 느낀다.

고향을 잃었을 때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이제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한다.

바람.

눈.

마나.

얼음.

병력 이동.

국경의 불빛.

낯선 발자국.

가능하면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관측은 쉽게 감시가 된다.

안전을 위해 설치한 망원경이 상대 마을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

기상용 관측탑이 군사적 이동도 기록한다.

위험을 놓치지 않겠다는 집착이,
상대를 한순간도 믿지 않겠다는 태도로 바뀔 수도 있다.

첼키아는 그 경계를 아직 완벽하게 찾지 못했다.


한 후배 장교가 물었다.

“군단장님은 기록을 믿지 않으십니까?”

첼키아가 말했다.

“믿어.”

“그런데 매번 현장관측을 강조하시잖습니까.”

“기록도 누가 현장 봐서 만든 거다.”

첼키아는 창밖의 눈을 봤다.

“옛날 사람이 본 걸 존중하면.”

잠시 뒤 덧붙였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도 존중해야지.”

그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전통이다.

선조가 남긴 결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선조처럼 자기 시대를 관찰하고,
자기 시대에 맞는 답을 남겨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것.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통은 살아 있는 지혜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습관이 된다.


미하일은 오래전에 죽었다.

전투에서 죽은 것은 아니다.

아주 늙어서 침대에서 죽었다.

첼키아는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갔다.

노병은 자기 옛 총을 보고 말했다.

“아직도 쓰나.”

“응.”

“구식인데.”

첼키아가 말했다.

“잘 맞아.”

미하일이 희미하게 웃었다.

“더 뜯어고쳤군.”

“조금.”

“조금?”

“많이.”

노병은 총의 새 조준기를 한동안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잘했다.”

첼키아의 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미하일이 덧붙였다.

“내 총으로 살지 말고 네 총로 만들어.”

첼키아는 대답했다.

“이미 그랬어.”

“알아.”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 중 하나였다.


미하일의 장례 뒤 첼키아는 총몸 안쪽에 있던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자기 이름을 새기지도 않았다.

그대로 두었다.

누군가 물었다.

“왜 남겨두십니까?”

첼키아는 대답했다.

“누가 줬는지 기억하려고.”

“그게 전통입니까?”

첼키아는 잠시 생각했다.

“아마.”

그녀에게 전통은 그런 것이다.

총을 미하일이 쓰던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왜 이 총을 골랐는지 기억하는 것.

혹한에서도 작동했기 때문에.

사람을 찾는 신호탄을 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어느 눈폭풍 속에서 열네 살짜리 아이 하나를 살려냈기 때문에.

그 목적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면 형태는 바뀌어도 된다.


현재의 첼키아는 스물아홉의 젊은 군단장이다.

나이에 비해 너무 큰 지휘권을 쥐었다는 말을 듣는다.

본인은 관심 없다.

명령이 먹히는가는 나이보다 결과와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병사들에게 무조건 복종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 명령할 때 가능한 한 이유를 붙인다.

“동쪽 능선 철수.”

“적 때문입니까?”

“아니. 적설층 불안정.”

“진지를 버립니까?”

“눈사태 오면 진지도 없어져.”

다른 날에는 말한다.

“저격대 전진.”

“목적.”

“구조대 사거리 밖 위험생물 제거.”

“교전범위.”

“표식 확인된 대상만.”

명령을 이해하면 병사는 상황이 바뀌었을 때 판단할 수 있다.

첼키아는 그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지휘관이 사라져도 부대가 왜 움직였는지 알아야 한다.

전통과 마찬가지다.

이유를 모르면 형태만 남는다.


그녀는 지금도 눈폭풍이 오는 밤에는 잠을 깊게 자지 못한다.

특히 예보에 없던 바람이 불면 직접 관측보고를 확인한다.

부관이 말했다.

“군단장님, 당직장교가 있습니다.”

“알아.”

“주무십시오.”

“잘 거야.”

“보고서 다 읽고요?”

“응.”

부관은 한숨을 쉰다.

첼키아도 자기 행동이 완전히 합리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열네 살의 눈보라가 아직 남아 있다.

관측자료가 충분하면 다시는 가족을 잃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세상의 모든 위험을 먼저 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도 한다.

그럴 때 자신에게 말한다.

기록은 미래가 아니다.

관측도 미래가 아니다.

다만 더 나은 결정을 위한 정보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가장 어렵다.


때로는 고향이 있던 곳을 찾아간다.

지금은 정착지가 없다.

건물 흔적 몇 개만 얼음 아래 남아 있다.

첼키아는 가족의 무덤 앞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다.

총을 옆에 세워둔다.

눈을 턴다.

그리고 가끔 보고한다.

“관측초소 늘렸어.”

잠시 침묵한다.

“대피시간 평균 줄었고.”

또 잠시.

“작년에는 눈폭풍 두 번 먼저 잡았어.”

누군가 들으면 이상한 추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첼키아에게는 그것이 맞는 방식이다.

죽은 가족에게 슬픔보다 결과를 보고한다.

그들이 죽은 일이 그냥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러다 마지막에는 아주 작게 말한다.

“더 바꿀 거야.”


그녀는 선조의 방식을 존중한다.

가족이 남긴 기억도.

미하일의 총도.

서리성벽군단의 오래된 규율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살아 있는 사람보다 위에 놓지는 않는다.

전통 때문에 병사가 죽는다면 전통을 바꾼다.

신기술 때문에 병사가 죽는다면 신기술을 버린다.

기록이 현재와 맞지 않으면 새 기록을 붙인다.

그리고 자기 판단이 틀렸다면 다음 사람이 반복하지 않도록 실패까지 남긴다.

그것이 그녀가 찾은 답이다.

전통은 과거를 복제하는 일이 아니다.

과거 사람들이 살고 싶어서 만든 지혜를,
현재의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형태로 다시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첼키아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살아남기 위해 더 멀리 본다.

더 빨리 알기 위해 관측망을 넓힌다.

구조대를 지키기 위해 총을 배치한다.

긴급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통신과 동원을 빠르게 만든다.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사람을 살린다.

동시에 주변국은 그것을 공격 준비라고 볼 수 있다.

백색정지분지 가까이 설치된 장치가 잘못 작동하면 레다스가 지키는 냉기와 얼음의 흐름까지 건드릴 수 있다.

자신을 보호하려 만든 체계가,
다른 존재에게 더 위험한 대비를 하게 만들 수 있다.

그 결과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며 더 많이 무장한다면,
자기가 만든 안전망은 언젠가 전쟁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

첼키아는 그 가능성을 모른 척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 지도 위에 관측범위뿐 아니라
‘상대가 이걸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항목까지 적는다.

옛날의 자신이라면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안다.

현장을 본다는 것은 자기 쪽 현장만 본다는 뜻이 아니어야 한다.


한 젊은 장교가 얼마 전 물었다.

“군단장님.”

“말해.”

“전통을 지킨다는 게 정확히 뭡니까?”

첼키아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창밖을 봤다.

서리성벽 너머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등에 미하일의 오래된 저격총이 있었다.

총몸은 낡았다.

조준기는 새것이었다.

탄약도 달랐다.

사용하는 사람도 달랐다.

첼키아가 말했다.

“내일도 사람이 여기 있게 하는 거.”

장교가 눈을 깜빡였다.

“그게 전부입니까?”

“응.”

첼키아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를 더 붙였다.

“다음 사람이 또 바꿀 수 있게 남겨두는 것까지.”

그녀는 자신이 만든 규칙도 언젠가는 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세운 관측탑도.

자기가 고른 총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방식도.

그날이 오면 후임자가 바꿔야 한다.

첼키아는 그것을 배신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기 전통이 제대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누군가가 낡은 규정을 손에 들고 말한다.

“하지만 선조들은 이렇게 했습니다.”

첼키아는 총을 어깨에 걸친다.

푸른회색 눈으로 상대를 본다.

“귀하.”

짧은 침묵.

“정신 차리도록 한다.”

상대의 어깨가 굳는다.

첼키아는 기록과 현재 관측치를 나란히 펼친다.

“선조의 방식으로 죽으면 선조들이 기뻐할 것 같나?”

그녀는 과거를 버리자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가 남긴 목적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살아남을 것.

다음 겨울에도 공동체가 있을 것.

다음 세대가 다시 자기 시대의 바람을 측정할 수 있을 것.

첼키아 이바노프에게 서리성벽의 전통은 바로 그것이다.

벽을 같은 모양으로 유지하는 일이 아니라,
그 벽 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속 살아 있도록 만드는 것.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 생존을 위해 만든 총과 관측탑이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쟁을 예고하는 그림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까지 함께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NGS
아루닝그손
프라그모서리성벽군단-부군단장
“서두른 선택은 한 세대를 살린다. 잘못된 선택은 열 세대를 묻는다.”
🩸 HP300
💪 공격력80
🧙 마법력20
✨ 신비력1
🛡️ 방어력70
🔗 항마력60
😖 신비저항80
🏃 회피력5
과거 보기
아루닝그손은 오래 사는 법과 영원히 사는 법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너무 늦게 배웠다.

서리거인에게 인간의 백 년은 길지 않다.

아이 하나가 태어나 늙어 죽는 동안에도 빙하의 균열 하나가 몇 걸음밖에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산맥의 눈선이 조금 내려간다.

강 하나가 방향을 바꾼다.

바위에 난 금이 넓어진다.

아루닝그손이 어렸을 때 그의 장로들은 그런 변화를 보고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은 조급하다.

눈은 녹았다가 다시 언다.

강은 넘쳤다가 다시 줄어든다.

한 해의 이상을 보고 터전을 버리는 것은 짧게 사는 종족이나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어린 아루닝그손도 그 말을 믿었다.

자신들의 고향은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오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그는 오래되었다는 것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같은 뜻으로 알고 있었다.


그의 고향은 프라그모에서도 훨씬 북쪽,
거대한 빙하와 얼음절벽이 겹쳐진 지역에 있었다.

서리거인들은 그곳을 이름보다 방향으로 기억했다.

큰 얼음벽 아래의 집.

푸른 틈 옆의 사냥터.

겨울별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계곡.

그들에게 땅은 소유물이 아니었다.

조상의 몸이 묻힌 장소였고,
세대가 바뀌어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억이었다.

아이들은 걷기 시작하면 먼저 빙하의 소리를 배웠다.

얼음이 천천히 눌리는 소리.

멀리서 갈라지는 소리.

눈 아래 물이 흐르는 소리.

그리고 위험한 소리.

아루닝그손은 특히 그것을 잘 들었다.

거대한 몸을 바닥에 눕히고 귀를 얼음에 대면,
한참 아래에서 움직이는 압력을 느낄 수 있었다.

어른들은 그를 칭찬했다.

“오래 보는 아이구나.”

서리거인에게 그것은 좋은 말이었다.

성급하지 않다.

눈앞의 하루보다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아루닝그손은 그 평가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서리거인의 회의는 느렸다.

한 가지 안건을 두고 사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누군가 말을 하면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밤을 보내고,
다음 날 다시 와서 말했다.

어떤 결정은 한 계절 뒤에야 내려졌다.

그들에게는 이상하지 않았다.

백 년을 살아야 보이는 변화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린 아루닝그손도 그렇게 배웠다.

“오늘 편한 선택보다 백 년 뒤에도 남는 선택을 해라.”

장로가 말했다.

“한 번 움직인 빙하는 손으로 되돌릴 수 없다.”

그 말도 맞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맞는 말은 잘못된 상황에서도 오래 살아남는다.


아루닝그손이 백 살을 조금 넘겼을 때부터 고향의 빙하가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징후였다.

여름에 녹는 물의 양이 늘었다.

예전에는 겨울이면 다시 닫히던 균열이 완전히 메워지지 않았다.

사냥터 아래쪽의 얼음이 얇아졌다.

오래된 얼음동굴 하나가 무너졌다.

젊은 거인들이 말했다.

“남쪽으로 옮겨야 합니다.”

장로들은 대답했다.

“한 세대의 변화다.”

다른 젊은이가 말했다.

“십 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장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십 년은 빙하에게 짧다.”

맞는 말이었다.

그때까지는.


아루닝그손은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다.

그는 관찰했다.

얼음의 두께를 쟀다.

균열 위치를 기억했다.

여름 물길을 따라갔다.

수십 년 전의 흔적과 비교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 움직이면 돌아올 수 없을 수도 있었다.

고향을 버린다는 것은 집 몇 채를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묘지를 두고 가야 했다.

아이들이 배우는 바위 이름도 사라졌다.

수백 년 동안 쌓은 기억이 끊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더 봐야 한다.

더 기다려야 한다.

아루닝그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결정도 결국 하나의 결정이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결정.


몇십 년이 더 지났다.

빙하의 변화는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겨울에도 얼음 아래 물소리가 들렸다.

아루닝그손은 장로회의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말했다.

“옮겨야 한다.”

한 장로가 물었다.

“언제.”

아루닝그손은 오래 침묵했다.

그 질문이 어려웠다.

지금 당장인가.

다음 여름인가.

아이와 노인을 먼저 보낼 것인가.

식량을 얼마나 옮길 것인가.

남쪽의 어디로 갈 것인가.

다른 종족의 땅에 들어가도 되는가.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 떠나면 이동 중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준비부터 한다.”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또 시간이 생겼다.


준비는 느렸다.

서리거인은 물건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이 많았다.

어떤 돌을 가져갈 것인가.

어느 조상의 묘표를 옮길 것인가.

아이들에게 어떤 노래부터 가르칠 것인가.

어느 길로 이동할 것인가.

장로들은 하나씩 논의했다.

아루닝그손도 참여했다.

그는 여전히 신중했다.

조급하게 움직였다가 겨울 한가운데서 전멸하는 것보다,
한 해 더 준비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 한 해가 오지 않았다.


붕괴는 여름 끝에 시작되었다.

먼저 소리가 났다.

아루닝그손이 평생 들었던 어떤 빙하음과도 달랐다.

깊었다.

산 전체가 안쪽에서 갈라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는 즉시 일어났다.

지면에 손을 댔다.

진동이 있었다.

아주 강했다.

아루닝그손은 처음으로 생각하지 않고 외쳤다.

“나가.”

거인들이 그를 바라봤다.

“남쪽으로.”

장로 하나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아루닝그손이 다시 말했다.

“빙하가 무너진다.”

이번에는 누구도 그에게 근거를 묻지 않았다.

이미 땅이 답하고 있었다.


얼음절벽이 갈라졌다.

수백 년 동안 서 있던 빙벽이 기울었다.

거대한 얼음조각이 아래로 떨어졌다.

땅이 흔들렸다.

고향 한쪽이 눈과 얼음 아래로 사라졌다.

서리거인들은 달렸다.

거대한 몸이었지만 모두가 빠른 것은 아니었다.

노인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있었다.

이미 다친 사람도 있었다.

아루닝그손은 어린 거인 둘을 양팔에 들고 이동했다.

다른 아이 하나는 등에 올라탔다.

그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장로들이 아직 남아 있었다.

묘역의 돌을 옮기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루닝그손이 소리쳤다.

“버려.”

한 장로가 고개를 저었다.

“조상이다.”

아루닝그손은 다시 외쳤다.

“죽은 자는 여기 남아도 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장로에게 명령했다.

“살아 있는 자부터 데려가.”


모두를 데려가지는 못했다.

빙하는 기다리지 않았다.

두 번째 붕괴가 일어났다.

거대한 얼음층이 미끄러지며 정착지 절반을 덮었다.

수십 명의 서리거인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일부 장로도 그 안에 있었다.

아루닝그손은 돌아가려고 했다.

아이 하나가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가지 마.”

아루닝그손이 멈췄다.

얼음 아래에는 자신의 가족도 있었다.

부모.

친족.

오랜 친구.

그가 수십 년 동안 함께 빙하를 관찰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는 살아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루닝그손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날 처음으로 그는 고향보다 사람을 선택했다.

너무 늦은 뒤였다.


살아남은 서리거인 대부분은 어렸다.

장로보다 아이가 많았다.

청년 몇 명과 중년 거인들이 남았다.

사라진 공동체를 그대로 복원하기에는 사람이 너무 적었다.

누군가 말했다.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른 이가 말했다.

“조상의 땅을 버릴 수 없다.”

아루닝그손은 그 말을 들었다.

예전 같으면 오래 고민했을 것이다.

며칠.

어쩌면 몇 달.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남쪽으로 간다.”

누군가 항의했다.

“우리 땅은 저기다.”

아루닝그손이 무너진 빙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사람은 여기 있다.”

그 한 문장이 이주를 결정했다.


아루닝그손은 살아남은 어린 거인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쉽지 않았다.

서리거인은 추위에는 강했지만 장거리 이동에 익숙한 종족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지쳤다.

먹을 것이 부족했다.

익숙한 사냥터도 없었다.

길을 잃은 날도 있었다.

아루닝그손은 아이들보다 앞서 걸었다.

낮에는 길을 찾았다.

밤에는 가장 바깥에 누웠다.

눈보라가 오면 자기 몸을 벽처럼 세웠다.

한 아이가 물었다.

“어디로 가?”

아루닝그손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짧게 사는 아이가 긴 대답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프라그모.”

“거기 우리 집 있어?”

이번에는 조금 침묵했다.

“아직 없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했다.

“만들 거다.”

그때부터 아루닝그손은 짧은 수명의 종족과 어린 존재에게는 결론을 먼저 말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자신에게 한 시간의 숙고가 다른 존재에게는 견디기 힘든 기다림일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그모에 도착했을 때 서리거인들을 환영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대한 몸집.

낯선 언어.

엄청난 식량 소비량.

힘이 센 종족.

사람들은 경계했다.

어떤 이는 그들을 북부의 괴물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프라그모에는 기록이 있었다.

과거에도 서리거인과 교류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지성종이라는 기록.

교역기록.

서로 도왔던 기록.

완전히 평화롭지만은 않았던 충돌의 기록도 있었다.

아루닝그손은 처음으로 다른 종족의 기록이 자기 사람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불멸기록원을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기록 자체를 별로 믿고 싶지 않았다.

자기 고향에도 기록이 있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죽었다.

하지만 기록이 땅을 대신할 수는 없어도,
사람이 누구였는지 이어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서리거인들은 프라그모 주변에 정착했다.

아이들은 자랐다.

일부는 다시 북쪽으로 갔다.

일부는 인간과 드워프, 수인들과 함께 일했다.

누군가는 서리성벽군단의 운반대에 들어갔다.

누군가는 빙하 관측을 도왔다.

아루닝그손은 한동안 어디에도 깊이 속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정착시킨 뒤 북부로 돌아갔다.

무너진 고향 근처에서 오래 살았다.

은둔이라고 부르는 편이 맞았다.

그는 빙하를 관찰했다.

수십 년.

백 년.

얼음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았다.

고향을 무너뜨린 변화가 특별한 한 번의 재난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빙하는 계속 움직였다.

새로운 물길이 생겼다.

옛 정착지는 더 이상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 아니었다.

아루닝그손은 그제야 완전히 인정했다.

돌아갈 고향은 없었다.

그렇다고 서리거인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이 살아 있었으니까.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말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조상들의 이야기를 새로운 곳에서 다시 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그의 신념이 천천히 바뀌었다.

영원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한 장소를 붙잡는 것도 아니다.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살아남는 것.

살아남아서 의미와 기억을 다음 존재에게 넘기는 것.

고향이 사라져도 고향을 기억하는 사람이 남을 수 있다.

노래의 가사가 조금 바뀌어도 노래가 이어질 수 있다.

아이들이 다른 종족의 말을 배우더라도 서리거인이라는 이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루닝그손은 세상과 거리를 두었다.

인간의 왕이 바뀌었다.

군단장이 바뀌었다.

도로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에게는 모두 빠른 일이었다.

굳이 그 속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첼키아 이바노프를 만났다.


그들의 첫 만남은 몇 년 전 북부 설원이었다.

아루닝그손에게는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다.

수명이 짧은 종족에게는 인생의 큰 부분일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당시 첼키아는 아직 지금의 군단장이 아니었다.

젊은 서리성벽군단 장교였다.

새로운 관측장비를 북부에 설치하기 위해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아루닝그손은 멀리서 그들을 봤다.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다.

인간과 수인들이 또 작은 기계를 얼음에 박고 있었다.

몇십 년 지나면 녹슬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뒤 같은 사람들이 장비를 다시 뜯어내고 있었다.

아루닝그손은 이상해서 가까이 갔다.

거대한 그림자가 설원 위로 드리워지자 병사들이 무기를 들었다.

첼키아도 총을 들었다.

하지만 쏘지는 않았다.

아루닝그손이 물었다.

“왜... 뽑나.”

첼키아가 대답했다.

“네가 크니까.”

아루닝그손은 한참 그녀를 바라봤다.

꽤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솔직했다.


그는 땅에서 뽑아낸 관측기 하나를 가리켰다.

“왜... 버리나.”

첼키아가 대답했다.

“틀렸어.”

“새것인데.”

“그래서?”

아루닝그손은 잠시 침묵했다.

첼키아가 설명했다.

장비가 극저온에서 측정치를 잘못 내고 있었다.

본부 기록에는 정상으로 올라간다.

그대로 두면 잘못된 기상판단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회수한다.

수정해서 다시 설치한다.

아루닝그손이 말했다.

“인간들은... 새것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첼키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마다 달라.”

“새것도 틀리면 버린다.”

“옛것은.”

“맞으면 쓴다.”

그녀의 등에 미하일에게 물려받은 오래된 저격총이 있었다.

아루닝그손은 총과 관측기를 번갈아 봤다.

“이상한 인간이군.”

첼키아의 북극곰 귀가 움직였다.

“수인이야.”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그렇다고.”

아루닝그손은 처음으로 아주 조금 웃었다.


그 만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첼키아는 아루닝그손이 북부 빙하를 오래 관찰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질문을 시작했다.

어느 빙벽이 최근 움직였는지.

어느 골짜기의 눈이 예전보다 늦게 얼기 시작했는지.

백색정지분지 주변 냉기가 수십 년 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아루닝그손은 처음에는 천천히 대답했다.

한 질문에 너무 오래 생각하자 첼키아가 말했다.

“결론부터.”

아루닝그손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결론은... 오래 생각한 뒤에 나온다.”

“나 며칠 뒤 내려가.”

“그래서.”

“네가 삼 년 고민하면 난 여기 없어.”

아루닝그손은 잠시 멈췄다.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서리거인에게 삼 년은 짧다.

첼키아에게 삼 년은 인생의 상당한 부분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짧은 수명의 종족에게 이야기할 때 결론을 먼저 주려고 했다.

“북동쪽 빙벽은... 위험하다.”

첼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유.”

그다음에야 아루닝그손은 길게 설명했다.


두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잘 맞았다.

생각하는 속도는 전혀 달랐다.

첼키아는 현장의 정보를 보고 빠르게 움직였다.

아루닝그손은 수십 년의 변화를 한꺼번에 봤다.

첼키아는 물었다.

“다음 겨울 위험해?”

아루닝그손은 말했다.

“다음 겨울보다... 삼십 년 뒤가 더 문제다.”

첼키아가 대답했다.

“삼십 년 뒤 문제도 듣고.”

지도를 짚었다.

“이번 겨울부터.”

아루닝그손은 그 태도가 흥미로웠다.

짧게 사는 종족이라고 해서 오늘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오늘 해야 할 일을 빠르게 골랐다.

반대로 자신처럼 오래 사는 존재는 먼 미래를 본다는 이유로 오늘을 너무 쉽게 미룰 수 있었다.

그 사실이 불편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무너져가는 오래된 얼음다리를 함께 조사했다.

아루닝그손은 말했다.

“십 년 안에... 무너진다.”

첼키아가 바로 물었다.

“올해는?”

“아마... 견딘다.”

“아마?”

아루닝그손은 얼음을 보았다.

“일곱에서... 아홉 해 정도.”

첼키아가 지도에 표시했다.

“그럼 올해부터 우회로 만든다.”

아루닝그손이 물었다.

“왜.”

“무너진 다음 만들면 늦으니까.”

“아직 쓸 수 있다.”

“그래.”

첼키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쓰는 동안 다음 걸 준비하는 거야.”

그 문장은 아루닝그손에게 오래 남았다.

그의 고향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완전히 떠날지 결정하기 전에 피난처부터 만들었어야 했다.

고향을 버리기 싫더라도 아이들을 먼저 남쪽에 보내둘 수 있었다.

최종 결론이 없더라도 되돌릴 수 있는 준비는 할 수 있었다.

그는 그 가능성을 너무 늦게 이해했다.


아루닝그손은 첼키아에게 자기 고향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준 적이 있다.

말하는 데 거의 하루가 걸렸다.

첼키아는 중간에 몇 번 식사를 했다.

아루닝그손은 거의 쉬지 않았다.

마지막에 말했다.

“우리는... 오래 생각했다.”

첼키아가 대답했다.

“너무 오래.”

아루닝그손은 화내지 않았다.

“그래.”

그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첼키아가 물었다.

“다시 그때면 어떻게 해.”

아루닝그손은 아주 오래 침묵했다.

첼키아가 기다렸다.

이번에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루닝그손이 말했다.

“아이부터 보낸다.”

“그다음.”

“새 터전을 찾는다.”

“완전히 떠날지는?”

“나중에 결정한다.”

첼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루닝그손은 그때 자신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정을 미루더라도 준비까지 미룰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에게 꽤 큰 발견이었다.


첼키아와의 만남 이후 아루닝그손은 은둔생활을 줄였다.

처음에는 서리성벽군단의 관측에 조언만 했다.

빙하의 오래된 흐름을 설명했다.

어느 얼음층이 수십 년 단위로 움직이는지 알려줬다.

관측탑을 세우면 안 되는 지점도 알려줬다.

병사들은 그를 처음에는 어려워했다.

덩치가 너무 컸다.

말도 너무 느렸다.

한 신병이 질문 하나를 하고 답을 기다리다 자세를 세 번 바꾼 적도 있었다.

아루닝그손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신병의 표정이 밝아졌다.

“여기... 위험하다.”

“왜요?”

“이제부터... 설명한다.”

설명은 십 분 넘게 이어졌다.

그 뒤 군단에서는 아루닝그손에게 질문할 때 식량이나 물을 먼저 준비하라는 농담이 생겼다.

본인도 알고 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가 본격적으로 군단에 들어간 계기는 대규모 빙하 붕괴 예측이었다.

아루닝그손은 오래전부터 한 계곡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아주 조금씩 압력이 바뀌었다.

인간의 짧은 관측기록만 보면 특별한 이상이 아니었다.

아루닝그손에게는 달랐다.

그는 해당 얼음절벽이 이전 세대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첼키아에게 말했다.

“결론.”

그녀가 먼저 말했다.

아루닝그손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 보급로... 바꿔라.”

첼키아가 바로 지도에 손을 올렸다.

“언제까지?”

“세 해.”

첼키아가 그를 바라봤다.

“세 해 안에 무너져?”

“모른다.”

“그럼.”

“십 년 안에는... 가능성이 높다.”

첼키아는 잠시 계산했다.

그리고 말했다.

“올해부터 새 길 만든다.”

아루닝그손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첼키아가 물었다.

“왜.”

“전에 들은 말이라서.”

“뭐.”

“쓸 수 있을 때... 다음 걸 준비한다.”


예측은 실제로 맞았다.

몇 년 뒤 얼음절벽이 무너졌다.

옛 보급로 일부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새 길은 이미 사용 중이었다.

보급대가 매몰되지 않았다.

고립된 초소도 없었다.

사람들은 아루닝그손의 긴 안목을 칭찬했다.

그는 칭찬을 받고도 별말하지 않았다.

첼키아가 말했다.

“군단 들어와.”

아루닝그손은 침묵했다.

한참.

첼키아가 말했다.

“오늘 안에 대답해.”

아루닝그손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이런 결정은... 오래 생각해야 한다.”

“얼마나.”

“몇 달.”

“안 돼.”

“왜.”

“자리 비어 있어.”

아루닝그손은 또 침묵했다.

첼키아가 먼저 말했다.

“결론부터.”

그는 결국 대답했다.

“들어간다.”

첼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유는 나중에 생각해.”

그렇게 아루닝그손은 수백 년의 은둔을 끝내고 서리성벽군단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부단장이 된 것은 아니었다.

군대라는 조직은 그에게 낯설었다.

명령은 빠르게 내려왔다.

상황은 몇 분 만에 바뀌었다.

아루닝그손이 생각하는 동안 다음 보고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답답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부대 이동 허가 바랍니다.”

장교가 말했다.

아루닝그손은 지도를 봤다.

침묵.

장교가 기다렸다.

침묵.

“아루닝그손님?”

“생각 중이다.”

“적이 이동 중입니다.”

“안다.”

“곧 도착합니다.”

“안다.”

뒤에서 첼키아가 말했다.

“결론부터.”

아루닝그손이 대답했다.

“철수.”

장교는 바로 뛰어갔다.

아루닝그손은 그제야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듣는 사람은 첼키아밖에 남지 않았다.

“이유는.”

“적보다... 눈사태가 먼저 온다.”

첼키아는 지도를 접었다.

“좋아.”

그렇게 서로 맞춰갔다.


아루닝그손이 부단장이 된 이유는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강했다.

거대한 주먹으로 얼어붙은 바위를 부쉈다.

빙하조각을 들어 무기처럼 던졌다.

지면을 내리치면 충격이 얼음 아래까지 퍼졌다.

절벽 위의 불안정한 눈과 얼음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려 길을 막을 수도 있었다.

근접전에서는 갑옷을 입은 병사 몇 명이 붙어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첼키아가 그를 가까이 둔 이유는 다른 쪽에 있었다.

아루닝그손은 인간 장교들이 보지 못하는 시간을 보았다.

이 진지를 올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십 년 뒤에도 유지할 가치가 있는지.

이 보급로가 한 세대 뒤에도 안전할지.

눈밭 아래 흐르는 물이 수십 년 뒤 어디로 나갈지.

그 질문을 했다.

첼키아는 오늘을 빨리 본다.

아루닝그손은 멀리 본다.

둘은 서로의 부족한 쪽을 메웠다.


아루닝그손은 첼키아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

부단장이 된 뒤에도 반대할 때는 반대한다.

한번은 첼키아가 북부 관측초소를 더 늘리려 했다.

아루닝그손은 말했다.

“반대한다.”

첼키아가 물었다.

“이유.”

“지금은... 안전하다.”

“그럼 왜.”

아루닝그손이 지도 한쪽을 가리켰다.

“삼십 년 뒤... 얼음이 이쪽으로 움직인다.”

“초소가 위험해?”

“초소보다... 초소를 유지하려 만든 길이 문제다.”

그는 설명했다.

도로를 만들기 위해 얼음을 깎는다.

보급을 위해 열원을 설치한다.

사람이 늘어난다.

당장은 편하다.

하지만 장기간 누적되면 주변 빙층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첼키아는 한참 들었다.

그리고 계획을 바꿨다.

그럴 때 아루닝그손은 군단에 들어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수백 년 동안 혼자 빙하를 바라봤을 때보다,
지금은 자신의 긴 시간이 짧은 시간 속에서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첼키아가 그를 막아주는 일도 있다.

어느 겨울 북부 정착지에 식량 부족이 예상되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다른 지역으로 일부 주민을 옮기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아루닝그손은 이주계획을 제안했다.

첼키아가 물었다.

“이번 겨울 식량은.”

“부족하다.”

“얼마나.”

아루닝그손이 설명을 시작하려 했다.

첼키아가 끊었다.

“결론.”

“두 달 뒤... 부족.”

“그럼 수송대 지금 보낸다.”

아루닝그손이 말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그건 다음 회의에서.”

“식량 수송에 비용이 크다.”

첼키아가 그를 봤다.

“두 달 뒤 죽을 사람한테 십 년 계획 보여줄 거야?”

아루닝그손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날 식량수송은 승인되었다.

이주논의도 동시에 시작되었다.

아루닝그손은 또 하나를 배웠다.

장기적인 옳음이 오늘의 응급처치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다.

아루닝그손은 여전히 오래 생각한다.

쉽게 바뀌지 않을 결정을 특히 오래 고민한다.

새 정착지.

대규모 군사시설.

빙하를 건드리는 공사.

민족 전체의 이동.

한 번의 판단이 수십 년 뒤 어떤 결과를 만들지 보려 한다.

그 태도 덕분에 많은 실수를 피했다.

눈앞의 이익 때문에 미래의 땅을 망치지 않았다.

한 세대만 편하게 살려고 다음 세대의 물길을 끊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아루닝그손이 열 해 뒤를 계산하는 동안,
인간 병사 한 명에게 열 해는 너무 길다.

시민의 아이는 자란다.

부상자는 죽는다.

식량은 떨어진다.

적은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고향에서 이미 한 번 그 대가를 봤다.

그래도 본성처럼 남아 있는 신중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어느 작전에서 그 갈등은 다시 크게 나타났다.

눈사태 때문에 북부 초소 하나가 고립되었다.

구조대를 보내면 위험했다.

두 번째 눈사태 가능성이 높았다.

기다리면 날씨가 안정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초소에는 부상자가 있었다.

식량도 하루 반 정도뿐이었다.

아루닝그손은 지형을 오래 봤다.

바람.

눈층.

낙빙 가능성.

여러 경로.

첼키아가 물었다.

“결론.”

아루닝그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루닝그손.”

그가 말했다.

“기다리면... 구조대는 더 안전하다.”

“초소는.”

“위험하다.”

“몇 명.”

“열둘.”

첼키아가 말했다.

“그럼 기다리는 것도 위험한 선택이네.”

아루닝그손은 그 문장을 듣고 오래전 장로회의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중립처럼 생각했던 시간.

빙하가 무너질 때까지 기다렸던 시간.


그는 결국 구조대를 보냈다.

다만 무작정 보내지 않았다.

자신이 함께 갔다.

가장 위험한 구간에서 선두에 섰다.

빙하조각을 들어 임시 벽을 만들었다.

지면을 내리쳐 불안정한 눈층 일부를 미리 떨어뜨렸다.

그 뒤 구조대가 움직였다.

초소 사람들은 살아 돌아왔다.

구조대에서도 부상자가 나왔다.

사망자는 없었다.

작전이 끝난 뒤 한 병사가 말했다.

“부단장님이 빨리 결정해서 살았습니다.”

아루닝그손은 대답했다.

“빠르지 않았다.”

병사가 웃었다.

“부단장님 기준으로는요.”

아루닝그손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그날 이후 그는 결정에 세 가지 시간을 나누기 시작했다.

지금 해야 하는 것.

며칠 안에 정해야 하는 것.

세대 단위로 고민해야 하는 것.

모든 문제를 같은 속도로 다루는 것이 신중함이 아니라는 것을 배운 것이다.

부상자의 지혈은 지금 한다.

눈사태 위험 마을의 대피도 지금 한다.

새 보급로의 위치는 충분히 조사한다.

대규모 빙하 공사는 몇 년을 보더라도 괜찮다.

그리고 어떤 문제는 임시조치를 먼저 하고 최종결정을 나중에 내린다.

아루닝그손에게는 혁명적인 방식이었다.

첼키아가 들었을 때 말했다.

“이제 사람처럼 생각하네.”

아루닝그손이 천천히 그녀를 봤다.

“난... 원래 사람이다.”

첼키아의 귀가 움직였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수인도... 사람이라 하지 않았나.”

첼키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걸 아직 기억해?”

“몇 년밖에 안 됐다.”

그 말에 첼키아가 한숨을 쉬었다.

둘 사이에서는 종종 그런 시간감각의 차이가 농담이 되었다.


아루닝그손은 짧게 사는 종족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예전에는 조금 그랬을지도 모른다.

너무 빨리 태어나고,
너무 빨리 늙고,
너무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첼키아를 비롯한 수많은 인간과 수인, 드워프 병사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짧은 삶은 얕은 삶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짧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더 빠르게 배우고,
더 빨리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아루닝그손에게는 한 번의 실패를 곱씹을 시간이 백 년 있다.

인간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을 수 있다.

그래서 글을 남긴다.

규칙을 만든다.

후임에게 가르친다.

아루닝그손은 그것도 영원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몸이 오래 사는 것만이 영원은 아니었다.

의미가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면,
짧은 삶도 긴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서리성벽군단의 젊은 병사들과 이야기할 때는 일부러 결론부터 말한다.

“부단장님, 북쪽 길 사용해도 됩니까?”

“안 된다.”

병사가 즉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 뒤 아루닝그손이 설명한다.

“사흘 전보다... 얼음 아래 물이 많다.”

“두 번째 층이... 비었다.”

“무거운 수레가 지나면... 내려앉을 수 있다.”

다른 질문.

“이 마을 옮겨야 합니까?”

아루닝그손은 대답한다.

“당장은 아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풀린다.

그리고 이어간다.

“하지만 십 년 안에... 준비해야 한다.”

그는 짧은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 자신의 긴 침묵을 강요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 역시 배려라고 생각한다.


전투에서는 전혀 느려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결정이 끝난 뒤의 아루닝그손은 빠르다.

거대한 주먹이 지면을 내려친다.

충격파가 눈과 얼음을 밀어낸다.

적의 진형이 흔들린다.

절벽 위에 매달린 얼음덩어리를 떨어뜨려 길을 차단한다.

손에 잡히는 빙하조각은 그대로 무기가 된다.

거대한 몸 때문에 정교한 움직임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는 지형을 오래 본다.

어디를 치면 얼음이 갈라질지 안다.

어디는 건드리면 안 되는지도 안다.

힘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조심한다.

한 번 잘못 내리친 주먹이 적뿐 아니라 아군의 길도 무너뜨릴 수 있다.

그에게 힘은 결정과 비슷하다.

내리기 전에는 오래 본다.

한 번 내렸다면 결과를 감당한다.


젊은 병사들이 그의 전투를 보고 감탄하면 아루닝그손은 대개 반응이 없다.

한 병사가 말했다.

“부단장님이면 혼자 성문도 부수시겠습니다.”

아루닝그손이 천천히 대답했다.

“가능하다.”

병사의 눈이 빛났다.

“정말요?”

“하지만... 보통은 안 한다.”

“왜요?”

“성문 뒤에...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뒤 덧붙였다.

“문은 다시 만들기 귀찮다.”

병사들이 웃었다.

아루닝그손도 아주 조금 웃었다.

그는 농담을 자주 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이 농담인지 알아차리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아루닝그손이 가장 불편해하는 칭찬은 ‘현명하다’는 말이다.

수명이 길다는 이유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 말을 들으면 고향의 장로들이 떠오른다.

그들도 오래 살았다.

많이 알았다.

어리석은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고향을 떠나는 결정을 너무 늦게 내렸다.

아루닝그손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길게 본다는 능력이 언제나 올바른 결론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멀리 보느라 발밑의 균열을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 말한다.

“부단장님은 저희보다 수백 년을 더 사셨으니 더 잘 아시겠지요.”

아루닝그손은 대답한다.

“더 오래 봤을 뿐이다.”

“같은 뜻 아닙니까?”

“아니다.”

그는 짧게 결론을 준다.

“오래 틀릴 수도 있다.”


가끔 살아남은 서리거인 아이들이 이제 늙어가는 모습을 본다.

아루닝그손에게는 여전히 그들이 아이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자기 손자를 두었다.

프라그모식 이름을 가진 아이도 있다.

다른 종족과 함께 살아가는 가족도 있다.

옛 고향의 말과 지금 사용하는 말이 조금씩 섞였다.

옛 장로가 봤다면 변질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아루닝그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 있다.

아이들에게 옛 노래를 가르친다.

새로운 노래도 만든다.

과거 고향의 빙하를 직접 본 적 없는 세대도 그 이름을 안다.

그것이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 장소를 지키지 못했다고 서리거인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장소를 버렸기 때문에 기억이 살아남았다.


그는 지금도 가끔 무너진 고향을 찾는다.

옛 정착지는 얼음 아래 더 깊이 묻혀 있다.

어디가 집이었는지 정확히 찾기도 어렵다.

아루닝그손은 오래 서 있다.

어릴 때 들었던 빙하의 소리를 듣는다.

예전과 완전히 다르다.

그가 한때 영원하다고 생각했던 땅이 계속 움직이고 있다.

그곳에서 아루닝그손은 장로들을 미워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왜 떠나지 않았느냐고.

왜 아이들을 먼저 보내지 않았느냐고.

왜 조상의 땅을 산 사람보다 중요하게 만들었느냐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분노만 남지는 않았다.

그들도 고향을 지키려 했다.

자기들이 배운 방식으로 공동체를 이어가려 했다.

문제는 그 방식이 공동체를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의도가 기억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루닝그손은 장로들을 악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틀렸다고 부른다.

자신도 포함해서.


서리성벽군단에서 그의 책상은 첼키아의 것보다 훨씬 단순하다.

장식이 거의 없다.

지도 몇 장.

빙하 변화기록.

큰 글씨로 적힌 일정표.

그리고 작은 모래시계 하나가 있다.

첼키아가 놓고 간 것이다.

처음에는 왜 주는지 몰랐다.

“회의할 때 써.”

“왜.”

“네가 너무 오래 생각하니까.”

아루닝그손이 모래시계를 내려다봤다.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에... 결정하라는 건가.”

“아니.”

첼키아가 대답했다.

“결론부터 말하라는 신호야.”

아루닝그손은 지금도 가끔 그것을 사용한다.

회의에서 사람들이 초조해하면 모래시계를 본다.

그리고 말한다.

“결론부터.”

그 뒤에 자신의 긴 생각을 설명한다.

수백 년을 살아온 거인이 스물아홉의 군단장에게 배운 습관이다.

그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나이가 많다고 다음 세대에게 배울 것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아루닝그손이 가장 자주 첼키아와 충돌하는 문제는 속도다.

첼키아는 위험이 분명하면 움직인다.

아루닝그손은 그 움직임이 십 년 뒤 무엇을 만들지 본다.

첼키아가 말한다.

“지금 초소 필요해.”

아루닝그손은 답한다.

“십 년 뒤... 철거해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 필요하면 세워.”

“비용이 크다.”

“사람 죽는 것보다?”

아루닝그손은 침묵한다.

반대로 그가 말한다.

“이곳 주민은... 이주해야 한다.”

첼키아가 묻는다.

“언제.”

“이십 년 안.”

“그럼 올해 뭘 해야 하는데.”

아루닝그손이 생각한다.

첼키아가 탁자를 두드린다.

“그걸 먼저 말해.”

둘은 자주 그렇게 싸운다.

그리고 대체로 두 사람의 결론 사이 어딘가에서 실제 계획이 만들어진다.


아루닝그손은 첼키아보다 훨씬 오래 살 가능성이 높다.

그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서리성벽군단장이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첼키아도 늙는다.

아루닝그손에게는 너무 빠르게 느껴질 것이다.

예전의 그였다면 그래서 짧게 사는 사람과 가까워지는 일을 피했을지도 모른다.

떠나가는 것을 오래 지켜봐야 하니까.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떠난다고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미하일의 총이 첼키아에게 남았듯,
첼키아의 방식도 누군가에게 남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남는다.

‘결론부터.’

그 짧은 말 하나만으로도 이미 그렇다.

영원은 같은 사람이 영원히 남는 일이 아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넘긴 뒤 다음 사람이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이어가는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이 지금 아루닝그손이 믿는 영원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느림을 완전히 고치지 못했다.

어쩌면 고쳐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십 년 뒤를 봐야 한다.

누군가는 한 세대 뒤 얼음이 어디로 움직일지 생각해야 한다.

오늘의 안전을 위해 만든 구조물이 다음 세대의 재앙이 되지 않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 역할은 자신에게 잘 맞는다.

문제는 그 긴 시야를 핑계로 현재의 사람을 희생하지 않는 것이다.

아루닝그손은 그 선을 아직 찾고 있다.

그래서 요즘 어떤 보고를 받으면 먼저 스스로 묻는다.

이 문제는 몇 년을 생각해도 되는가.

아니면 지금 누군가 죽고 있는가.

후자라면 자신의 긴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려 한다.


한 젊은 병사가 최근 그에게 물었다.

“부단장님은 왜 그렇게 오래 고민하십니까?”

아루닝그손은 평소처럼 잠시 침묵했다.

병사가 기다렸다.

그는 먼저 결론을 말했다.

“두렵기 때문이다.”

병사의 눈이 커졌다.

아루닝그손 같은 거인이 두렵다는 말을 할 줄 몰랐던 것이다.

“무엇이요?”

“내가 옳다고 생각한 일이...”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희가 죽은 뒤에도 남아 있을 수 있다.”

정책.

도로.

군사시설.

이주.

빙하를 깎은 흔적.

그런 것들은 명령을 내린 사람이 죽은 뒤에도 영향을 준다.

그래서 오래 본다.

하지만 잠시 뒤 아루닝그손은 덧붙였다.

“그리고... 너무 오래 고민하는 것도 두렵다.”

병사가 물었다.

“왜요?”

아루닝그손의 맑은 눈이 아주 잠깐 멀어졌다.

“이미... 한 번 늦었으니까.”


그의 대사도 그 경험에서 나왔다.

어느 회의에서 젊은 장교들이 새로운 북부 방어시설을 즉시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첼키아는 필요성 자체에는 동의했다.

아루닝그손은 위치를 반대했다.

한 장교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 적이 올 수 있습니다. 십 년 뒤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아루닝그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장교가 뜻밖이라는 얼굴을 했다.

아루닝그손은 먼저 결론을 말했다.

“임시 방어선은 오늘 만든다.”

그리고 지도의 다른 지점을 짚었다.

“영구시설은 여기다.”

“왜 두 번 일을 합니까?”

아루닝그손은 천천히 말했다.

“서두른 선택은 한 세대를 살린다.”

잠시 모두를 둘러봤다.

“잘못된 선택은 열 세대를 묻는다.”

그는 서두르지 말자고 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필요한 행동과 오래 남을 결정을 구분하자는 뜻이었다.

그 차이를 배우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현재의 아루닝그손은 서리성벽군단 부단장으로서 첼키아의 곁에 선다.

군단장은 빠르게 변하는 날씨와 현장을 본다.

부단장은 그 변화가 이어질 시간을 본다.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첼키아만 있다면 오늘은 살리지만 너무 먼 내일의 비용을 놓칠 수 있다.

아루닝그손만 있다면 내일을 지키려다 오늘의 사람이 죽을 수 있다.

그래서 서로를 귀찮게 한다.

첼키아는 그에게 결론을 재촉한다.

아루닝그손은 그녀에게 한 번 더 멀리 보라고 한다.

가끔은 언성이 높아진다.

정확히는 첼키아 쪽만 높아진다.

아루닝그손의 말은 화가 나도 여전히 느리다.

“군단장.”

“왜.”

“귀하는... 너무 빠르다.”

“넌 너무 느려.”

“안다.”

“알면 빨리 말해.”

아루닝그손은 잠시 침묵한다.

첼키아가 노려본다.

그가 결국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겠다.”

그 순간만큼은 첼키아의 표정이 조금 풀린다.


아루닝그손은 이제 고향을 잃었다고 말하지 않을 때도 있다.

정확히는 장소를 잃었다고 말한다.

고향의 사람들은 일부 살아남았다.

기억도 살아 있다.

다른 땅에서 새로운 집을 만들었다.

서리거인 아이들이 프라그모의 아이들과 함께 자란다.

옛 노래를 부른다.

새로운 말을 섞는다.

그리고 아루닝그손 자신은 한때 관심 없던 인간과 수인의 군단에서 부단장으로 일하고 있다.

젊은 북극곰수인에게 명령을 받고,
그녀와 논쟁하고,
그녀가 만든 관측표를 읽는다.

수백 년 전의 장로들이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루닝그손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결국 서리거인이 살아가는 일이었을 테니까.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다.


그는 이제 영원을 이렇게 이해한다.

얼음은 영원하지 않다.

산도 움직인다.

도시는 무너진다.

군단도 언젠가는 이름이 바뀔 수 있다.

사람은 죽는다.

거인도 죽는다.

남길 수 있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 형태가 아니다.

왜 그것을 지켰는지.

누구를 위해 만들었는지.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배웠는지.

그 의미를 다음 사람이 다시 자기 시대의 방식으로 이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아루닝그손은 조상의 땅을 떠난 일을 더 이상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늦게 떠난 것을 후회한다.

살아 있는 사람을 데리고 이동했기 때문에 조상의 기억도 함께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긴급보고가 들어오면 그는 여전히 잠깐 눈을 감는다.

몇십 년 뒤까지 생각하려는 습관이 먼저 움직인다.

하지만 이제 그 전에 한 가지를 묻는다.

“지금... 위험한 사람은.”

장교가 대답한다.

“민간인 서른둘입니다.”

아루닝그손의 눈이 열린다.

“결론.”

이번에는 스스로 먼저 말한다.

“대피시켜라.”

“장기대책은요?”

“그다음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거대한 몸이 회의실의 빛을 가린다.

“오늘 살아야...”

천천히 말을 잇는다.

“십 년 뒤도 있다.”

그리고 조금 뒤에는 반드시 다음 질문을 한다.

이 대피를 매년 반복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마을을 옮겨야 하는가.

옮긴다면 어디가 다음 세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가.

오늘과 내일을 둘 다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아루닝그손은 아직 그 둘을 완벽하게 맞추지 못한다.

어쩌면 남은 수백 년 동안도 완벽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기다림 자체를 지혜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리고 빠른 선택 자체를 어리석음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

어떤 결정은 지금 내려야 한다.

어떤 결정은 오래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 차이를 잘못 판단하면 사람이 죽는다.

그 사실을 자신의 고향으로 배웠다.

그리고 첼키아를 만나 다시 배웠다.

그래서 지금의 아루닝그손은 오래 생각한다.

다만 예전보다 먼저 말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의 생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잔불공동관리회2명
VER
베라 모르겐슈테른
프라그모잔불공동관리회-화로장
“모두를 못 살린다는 건 알아. 그래서 계속 만드는 거야.”
🩸 HP140
💪 공격력60
🧙 마법력30
✨ 신비력5
🛡️ 방어력60
🔗 항마력45
😖 신비저항50
🏃 회피력30
과거 보기
베라 모르겐슈테른의 이야기는 그녀가 처음으로 망치를 잡았던 날보다, 처음으로 밸브를 잠갔던 날에서 시작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물론 그녀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무언가를 만들고 고치는 법을 알고 있었다.

프라그모 자치구에서 태어난 베라는 인간 아버지와 드워프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오래된 난방관과 온수 설비를 고치는 기술자였다.

어머니는 금속을 다루는 드워프 장인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물건을 보고도 늘 다른 말을 했다.

아버지는 말했다.

“오늘 밤 돌아가기만 하면 돼.”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내일 또 터질 걸 왜 오늘 붙여놓기만 해?”

그러면 아버지가 대꾸했다.

“오늘 얼어 죽으면 내일 고칠 사람도 없으니까.”

어머니는 결국 망치를 들었다.

“그래서 임시로 붙인 다음 제대로 다시 만드는 거다.”

베라는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자랐다.

드워프식으로 오래 버티는 구조를 배우고, 인간 기술자들이 가진 현장식 임기응변을 배웠다.

어릴 때의 그녀는 어느 쪽이 옳은지 고민하지 않았다.

둘 다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튼튼하게 만들 수 있으면 튼튼하게 만들고.

그럴 시간이 없다면 지금 있는 것으로 일단 살려놓는다.

베라에게 기술은 처음부터 이론보다 그런 것이었다.

사람이 오늘 밤을 넘기게 만드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같은 일이 내일 반복되지 않게 만드는 것.

---

베라가 혼혈이라는 사실은 집 안에서 특별한 문제가 아니었다.

드워프 친척들 사이에 가면 그녀는 조금 컸고, 인간 아이들 사이에서는 조금 작았다.

팔과 어깨는 또래 인간보다 훨씬 단단했고, 얼굴선은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닮았다.

가끔 처음 보는 사람이 물었다.

“드워프냐?”

베라는 대답했다.

“반쯤.”

“그럼 인간이냐?”

“그것도 반쯤.”

조금 더 집요한 사람이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어린 베라는 귀찮다는 얼굴로 자기 손에 들린 공구를 들어 보였다.

“배관 고칠 때 그게 중요해?”

대부분의 질문은 거기서 끝났다.

베라는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증명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가 알려준 방식으로 쇠를 두드리다가 아버지가 알려준 방식으로 고무 패킹을 끼웠다.

그게 잘 작동하면 됐다.

그녀가 더 관심을 가진 것은 프라그모의 오래된 난방망이었다.

자치구 아래에는 수없이 많은 관이 지나갔다.

뜨거운 물이 흐르는 관.

증기가 흐르는 관.

오래전에 폐쇄되어 지도에도 제대로 남지 않은 관.

누군가 벽을 증축하면서 안쪽으로 묻혀버린 밸브.

다른 시대에 다른 기술자가 손댄 흔적.

베라는 그것들을 좋아했다.

깨끗한 새 기계보다 수십 년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살아남은 설비를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어느 나사가 원래 것이고 어느 부품이 나중에 덧붙여진 것인지 맞히곤 했다.

아버지는 그런 딸을 데리고 현장을 다녔다.

“이걸 봐.”

녹슨 관을 두드리며 말했다.

“겉만 보면 멀쩡하지.”

베라가 귀를 댔다.

안쪽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근데 속에서 새고 있네.”

아버지가 웃었다.

“사람도 기계도 겉으로 멀쩡하다고 믿으면 안 돼.”

베라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다만 훗날에는 조금 다르게 사용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도시 역시 안에서는 계속 새고 있을 수 있다는 뜻으로.

---

열다섯 살 무렵부터 베라는 정식으로 현장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맡은 일은 대단하지 않았다.

공구를 나르고.

부품 번호를 읽고.

얼어붙은 나사를 녹이고.

좁은 관로 안으로 기어들어가 안쪽 상태를 확인했다.

작은 체격은 그런 일에는 오히려 편했다.

베라는 금방 능숙해졌다.

문제는 성격이었다.

선배가 지시한 방법보다 빠른 방법이 보이면 바로 손을 댔다.

“그거 뜯지 마.”

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볼트를 풀었다.

결과적으로 고쳐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더 고쳐지지 않았다.

혼날 때마다 대답은 같았다.

“됐잖아.”

그러면 선배가 화를 냈다.

“됐다고 다냐?”

베라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안 되는 것보다 낫잖아?”

그녀는 실패를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달랐다.

베라는 실패를 싫어했다.

다만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더 싫어했다.

배관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추위도 승인 서류를 읽지 않았다.

설비가 터지면 그 순간부터 사람이 추워졌다.

그 단순한 사실이 베라의 판단을 언제나 빠르게 만들었다.

때로는 지나치게 빠르게.

---

스무 살이 넘어갈 무렵 베라는 자치구 곳곳의 난방 설비를 혼자 맡길 수 있는 기술자가 되었다.

당시에는 지금의 잔불공동관리회처럼 체계적인 조직도 없었다.

지역마다 난방 담당자가 따로 있었고, 겨울이 심해지면 주민들이 서로 장작과 연료를 나눴다.

어느 구역에 문제가 생기면 근처 기술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한 집이 얼어붙으면 옆집의 화로를 같이 썼다.

누군가 장작이 부족하면 조금씩 나누었다.

그렇게 프라그모 사람들은 오래 살아남았다.

하지만 도시가 커질수록 그런 방식에는 한계가 생겼다.

배관망은 복잡해졌다.

주민 수가 늘었다.

한 구역에서 사용한 연료가 다른 구역의 배급량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선의로 밸브 하나를 열었다가 다른 지역의 압력을 떨어뜨리는 일도 있었다.

예전에는 집 두세 채의 문제였던 고장이 이제 수백 명의 문제로 이어졌다.

베라는 현장에서 그것을 가장 먼저 체감한 사람 중 하나였다.

어느 겨울에는 동시에 세 곳에서 난방관이 터졌다.

기술자는 부족했고 예비 부품도 모자랐다.

베라는 오전에는 학교 난방관을 고쳤다.

점심도 먹지 않고 노인 거주구역으로 갔다.

저녁에는 진료소 지하에 들어갔다.

새벽이 되었을 때 네 번째 신고가 들어왔다.

누군가 말했다.

“내일 가도 되지 않겠어?”

베라는 외투를 다시 입었다.

“오늘 밤 얼면 내일은 사람이 없을 수도 있어.”

그런 겨울이 반복됐다.

처음에는 베라도 조금 더 열심히 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술자를 늘리면 된다.

배관을 교체하면 된다.

저장고를 늘리면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다른 문제를 보기 시작했다.

고장보다 더 큰 문제였다.

아무것도 고장 나지 않아도 열이 부족한 날이 있었다.

---

그 겨울은 평년보다 훨씬 길었다.

연료 저장량은 예상보다 빠르게 줄었다.

외부에서 들어오기로 한 연료 수송도 폭설 때문에 늦어졌다.

자치구의 난방망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문제는 정상적으로 작동해도 모두에게 보낼 열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술자들은 처음에는 사용량을 조금씩 줄였다.

작업장의 난방을 낮췄다.

창고 일부를 폐쇄했다.

주민들에게 실내 온도를 낮춰달라고 요청했다.

그래도 부족했다.

결국 어디에 열을 보내고 어디를 줄일지 결정해야 했다.

회의가 열렸다.

진료소.

아이들이 있는 공동보육소.

식량창고.

일반 주거구역.

모두 이유가 있었다.

진료소의 난방을 끄면 환자가 죽을 수 있었다.

보육소에는 추위에 약한 아이들이 있었다.

식량창고가 얼어붙으면 저장품이 망가질 수 있었다.

주거구역에는 수백 명이 살았다.

누군가 말했다.

“조금씩 나누면 어떻습니까?”

베라는 계산표를 봤다.

조금씩 나누면 어느 곳도 필요한 온도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그 말은 모두에게 조금씩 춥게 하자는 뜻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뜻이었다.

회의는 길어졌다.

누군가는 진료소를 우선해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는 아이들이 먼저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식량을 잃으면 다음 달에 더 많은 사람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베라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벽에 걸린 압력계를 계속 봤다.

수치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결정해야 해.”

누군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결정하려고 회의 중이잖아.”

베라는 압력계를 가리켰다.

“저건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아.”

그날 그녀가 처음 말했다.

“추위도 마찬가지고.”

---

회의가 끝나기 전에 진료소 쪽 난방관 압력이 위험 수준까지 떨어졌다.

베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지하 밸브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동쪽 주거구역으로 가는 열수관 일부를 잠갔다.

그 열이 진료소와 보육소로 돌아갔다.

압력은 회복됐다.

진료소는 살아났다.

보육소도 필요한 온도를 유지했다.

대신 동쪽 구역의 난방이 빠르게 떨어졌다.

주민들이 대피했다.

몇몇 가정은 공동화로가 있는 시설로 옮겨야 했다.

오래된 주택 몇 채에서는 수도관까지 얼었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집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음 날 주민들이 관리소로 몰려왔다.

누가 밸브를 잠갔느냐고 물었다.

회의에서 결정된 일이 아니었다.

베라는 앞으로 나왔다.

“내가 잠갔다.”

한 사람이 소리쳤다.

“우리한테 한마디도 안 하고?”

베라는 대답했다.

“안 잠갔으면 진료소까지 얼었으니까.”

“그래서 우리 집은 얼어도 된다는 거야?”

베라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니까 욕할 거면 나한테 해.”

손가락으로 뒤쪽 배관도를 가리켰다.

“밸브한테 하지 말고.”

그 말은 이후 오랫동안 베라를 따라다녔다.

어떤 사람은 그녀가 옳았다고 했다.

누군가는 진료소 환자들을 살렸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권한도 없이 수백 명의 난방을 끊은 사람이라고 했다.

둘 다 사실이었다.

---

당시의 베라는 자신이 그 결과를 감당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징계를 받으라고 하면 받았다.

수리비를 물으라고 하면 임금에서 떼라고 했다.

주민들이 욕하면 피하지 않았다.

자기가 결정했으니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어느 날 나이가 많은 관리 기술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네가 책임진다는 게 정확히 뭔데?”

베라는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한 일이니까 내가 책임진다고.”

“얼어붙은 집에서 쫓겨난 사람 대신 네가 잤어?”

베라는 입을 다물었다.

“터진 수도관 대신 네 방이 망가졌나?”

대답할 수 없었다.

노인은 말했다.

“책임진다는 말은 쉽다.”

“네가 욕을 먹고 네 월급이 깎인다고 해서 남이 치른 대가가 네 것이 되는 건 아니야.”

베라는 화가 났다.

“그럼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모른다.”

그 대답은 더 화가 났다.

“모르면서 왜 나한테 뭐라고 해?”

노인은 담담했다.

“네 선택이 틀렸다고 한 적은 없다.”

“그럼?”

“네가 책임진다고 말했으니 남들한테 묻지 않아도 됐다고 생각하지는 말라는 거다.”

그 문장은 베라에게 오래 남았다.

완전히 받아들이는 데에는 훨씬 더 오래 걸렸다.

---

그 겨울 이후 자치구의 난방 체계는 조금씩 바뀌었다.

지역마다 따로 움직이던 기술자와 연료 담당자들이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던 공동화로와 비축창고도 하나의 연락망으로 연결되었다.

어느 구역이 얼마나 남았는지.

어디에 아이와 환자가 많은지.

어느 배관이 낡았는지.

어떤 건물은 대피시설로 사용할 수 있는지.

각자 알고 있던 것을 한곳에 모았다.

처음에는 임시 대책이었다.

다음 겨울에는 해산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다음 겨울에도 필요했다.

그다음 겨울에도 필요했다.

조금씩 주민들의 회비가 모였다.

공동 연료창고가 생겼다.

노후 배관을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긴급 대피소를 관리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렇게 이름 없던 겨울 공동체는 결국 하나의 조직이 되었다.

잔불공동관리회.

이름은 거창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불씨관리회가 더 낫다고 했고, 누군가는 자치난방조합 같은 이름을 제안했다.

베라는 회의 끝에 말했다.

“뭐든 상관없는데 빨리 정해.”

누군가 물었다.

“화로장 후보가 이름에 의견이 없으면 어떡합니까?”

베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 화로장 한다고 한 적 없는데.”

그날 투표에서 베라는 화로장이 됐다.

찬성표가 압도적이었다.

본인이 넣은 반대표 한 장을 제외하면.

---

화로장이 된 뒤 베라의 생활은 기술자일 때보다 더 복잡해졌다.

배관만 보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연료 장부를 봐야 했다.

주민 요청을 들어야 했다.

공동창고를 관리해야 했다.

어느 시설을 먼저 수리할지 결정해야 했다.

재료가 모자라면 무엇을 미룰지도 정해야 했다.

베라는 서류를 싫어했다.

하지만 서류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누가 무엇을 가져갔는지 남기지 않으면 다음 사람이 같은 실수를 했다.

어느 관이 몇 번 터졌는지 기록하지 않으면 계속 임시수리만 하게 됐다.

베라는 장부에 글씨를 휘갈기면서 욕을 했다.

“기계는 말이라도 안 하지.”

그러면서도 한 장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자치구의 난방망 전체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집 아래 어떤 관이 지나가는지.

어느 밸브를 잠그면 어디가 식는지.

어디에서 압력을 돌리면 몇 분 뒤 다른 곳이 영향을 받는지.

사람들은 베라가 배관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베라는 점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관 하나가 연결된 곳에 몇 명이 사는지 함께 떠올렸다.

밸브 하나를 보면 그것을 잠갔을 때 추워질 집들을 생각했다.

기계와 사람의 구분이 그녀 머릿속에서는 점점 흐려졌다.

난방망은 도시의 장기처럼 보였다.

어디 하나를 살리기 위해 다른 곳을 죽여서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곳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

사람들은 잔불공동관리회가 생긴 뒤 프라그모 자치구의 겨울이 나아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동파 사고는 줄었다.

고립된 주민을 발견하는 시간도 빨라졌다.

연료가 남는 구역과 모자라는 구역 사이의 이동도 체계적이 되었다.

예전이라면 얼어 죽었을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베라는 그런 보고를 좋아했다.

하지만 동시에 싫어하는 보고도 매년 올라왔다.

발견이 늦었던 독거노인.

대피를 거부했던 주민.

연료가 도착하기 전에 난방이 멈춘 외곽주택.

폭설 때문에 구조팀이 닿지 못한 집.

모든 규칙을 지키고.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하고.

설비가 예정대로 움직였는데도 죽는 사람이 있었다.

베라는 그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현장에 직접 갔다.

누군가는 화로장까지 올 필요 없다고 했다.

베라는 듣지 않았다.

어디가 잘못됐는지 봐야 했다.

배관이 문제였는지.

연료 배정이 문제였는지.

신고체계가 문제였는지.

사람이 문제였는지.

그리고 가끔은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결론을 가장 싫어했다.

잘못이 있으면 고치면 됐다.

나사가 잘못됐으면 바꾼다.

사람이 판단을 잘못했으면 절차를 바꾼다.

그런데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사람이 죽었다면 무엇을 고쳐야 하는가.

베라는 그 질문 앞에서 자주 침묵했다.

---

어느 겨울에는 저장된 연료가 정말로 부족했다.

부정도 없었다.

횡령도 없었다.

예측을 심하게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겨울이 예상보다 길었다.

바람이 예상보다 강했다.

외부 수송이 예상보다 늦었다.

잔불공동관리회는 가능한 모든 것을 했다.

공동화로를 늘렸다.

주민을 한곳으로 모았다.

필요 없는 건물을 폐쇄했다.

산업용 열 일부를 주거구역으로 돌렸다.

베라는 며칠 동안 거의 자지 않았다.

그래도 부족했다.

회의실 벽에는 지역별 예상 생존 가능 시간이 적혀 있었다.

열두 시간.

열아홉 시간.

하루 반.

이틀.

베라는 숫자를 바라봤다.

누군가 말했다.

“모두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베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그것도 알고 있었다.

베라는 한참 후에 물었다.

“왜?”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뜻입니까?”

베라는 지도를 가리켰다.

“왜 우리는 매년 이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냐고.”

“추우니까요.”

누군가 너무 당연한 대답을 했다.

베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유가 아니야.”

그날부터 그녀는 프라그모의 난방 문제를 고장 난 설비가 아니라 고장 난 방식으로 보기 시작했다.

---

현재의 난방은 무언가를 태워야 했다.

연료를 운반해야 했다.

열을 만들어 관에 밀어 넣어야 했다.

열은 이동하면서 손실됐다.

멀리 보낼수록 더 많이 필요했다.

한 지역에 더 보내면 다른 지역에서 줄여야 했다.

마법을 사용하면 해결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베라는 그런 말을 가장 싫어했다.

마법 역시 공짜가 아니었다.

맥류에서 힘을 끌어오면 다른 곳의 흐름에 영향을 주었다.

지속적으로 큰 열을 만들려면 그만큼의 흐름과 부담이 필요했다.

어딘가에서 빼앗아 다른 곳에 옮기는 것에 가까웠다.

방법이 달라질 뿐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베라는 수많은 난방 장치를 뜯어봤다.

마석 난로도 봤다.

마법진을 이용한 순환기도 봤다.

지맥의 열을 끌어오는 실험장치도 봤다.

모두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 한계가 있었다.

지나치게 많이 끌어오면 한쪽이 말랐다.

흐름이 불안정하면 장치가 깨졌다.

맥류가 달라지면 같은 구조가 작동하지 않았다.

베라는 밤마다 설계도를 그렸다.

한동안은 새로운 열원을 찾았다.

그다음에는 더 효율적인 저장법을 찾았다.

또 다른 때에는 열 손실을 줄이는 구조를 연구했다.

전부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베라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연료를 두 배 덜 쓰는 화로가 아니었다.

겨울이 한 달 길어진다고 해서 누구를 포기할지 다시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었다.

그런 것은 없었다.

적어도 당시에는.

---

람파스를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오래된 난방관 하나가 파열된 날이었다.

베라는 뜨거운 물이 뿜어져 나오는 관 앞에서 보조 밸브를 찾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말했다.

“저거 얼리면 안 돼요?”

베라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관 주변이 얼었다.

누수가 멈췄다.

베라는 관을 한 번 보고.

하늘색 바니걸 차림의 얼음 정령을 한 번 보고.

다시 관을 봤다.

그날 베라의 첫 생각은 감탄이 아니었다.

저걸 안쪽까지 얼렸으면 관이 더 터진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첫마디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너 뭐냐.”

“람파스요!”

“그걸 물은 게 아닌데.”

그 뒤의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람파스는 잔불공동관리회에 들어왔다.

배급구역을 돌아다녔다.

주민들에게 말을 걸었다.

베라가 숫자로 알고 있던 사람들을 이름으로 불렀다.

베라는 처음에는 그것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집 하나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쓸데없는 질문을 많이 했다.

밥을 먹었는지.

혼자 사는지.

어디가 아픈지.

그런데 람파스가 찾아낸 문제들이 있었다.

장부에는 나타나지 않는 문제였다.

괜찮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연료가 없는 사람.

옆집이 더 어렵다며 배급을 거부하는 사람.

난방이 고장 났지만 신고 비용이 들까 봐 숨기는 사람.

베라는 람파스를 보며 오래전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겉이 멀쩡하다고 속까지 멀쩡한 건 아니다.

배관도 그랬다.

사람도 그랬다.

도시도 그랬다.

---

람파스와 일하면서 베라는 자신의 오래된 버릇도 자주 마주하게 되었다.

긴급상황이 생기면 여전히 먼저 손을 움직였다.

누군가의 승인을 기다리는 것을 싫어했다.

자신이 잘못하면 자기가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있었다.

한 번은 북쪽 구역의 열수관이 터졌다.

압력을 낮추지 않으면 수리할 수 없었다.

베라는 주변 주택 공급을 바로 끊으려 했다.

람파스가 물었다.

“거기 사람들한테 말했어요?”

“말할 시간 없어.”

“몇 분 걸리는데요?”

“그 몇 분 동안 더 터질 수 있어.”

람파스는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제가 뛰어갈게요.”

“뭐?”

“베라는 잠가요. 제가 먼저 가서 문 두드릴게요.”

베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없던 선택이었다.

잠그지 않거나.

잠그고 욕을 먹거나.

항상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람파스는 세 번째 방법을 찾았다.

완벽하지 않았다.

모든 집에 알릴 시간도 없었다.

그래도 몇 명은 미리 난방이 끊길 것을 알고 준비할 수 있었다.

베라는 그날 이후 람파스에게 배급 장부뿐 아니라 긴급 차단구역 지도도 보여주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밸브를 잠가야 했다.

누군가는 그 밸브 뒤에 있는 사람에게 달려가야 했다.

두 가지가 함께 필요했다.

---

그럼에도 근본적인 문제는 남았다.

베라와 람파스가 아무리 뛰어도 겨울 전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연료가 부족하면 부족했다.

자치구의 모든 집을 동시에 따뜻하게 할 방법은 없었다.

베라는 그것을 매년 확인했다.

그리고 어느 해 봄, 예상하지 못한 물건 하나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자연사한 드래곤의 유해에서 나온 소재였다.

드래곤을 사냥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죽인 것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한 드래곤이 생을 마친 뒤 남은 조직 일부가 여러 경로를 거쳐 연구용 소재로 정리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비늘이나 뼈의 강도에 관심을 가졌다.

일부 마법사는 잔류하는 힘을 조사했다.

베라는 처음에는 그 소재를 살 생각이 없었다.

가격도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런데 작은 골편 하나를 살펴보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죽은 지 오래되었는데도 주변의 맥류가 아주 미세하게 골편 표면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힘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흐름이 부딪히지 않았다.

한쪽으로 몰리지 않았다.

들어온 만큼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가 다시 주변으로 흘러나갔다.

베라는 한참 그것을 바라봤다.

상인이 물었다.

“구매하시겠습니까?”

베라는 가격표를 봤다.

다시 골편을 봤다.

그리고 욕을 했다.

결국 샀다.

몇 달 동안 모아둔 개인 저축이 거의 사라졌다.

그날 저녁 람파스가 물었다.

“왜 저녁 안 먹어요?”

“돈 없어.”

“뭐 샀는데요?”

“비싼 쓰레기.”

당시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며칠 뒤부터 베라는 퇴근하지 않았다.

---

처음에는 단순한 재료 실험이었다.

골편을 금속판 사이에 놓았다.

미약한 마력을 흘렸다.

흐름을 측정했다.

일반 금속에서는 특정 지점에 힘이 집중됐다.

드래곤 소재에서는 달랐다.

힘이 여러 방향으로 퍼졌다.

그렇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주변 흐름에 섞였다.

베라는 측정기를 바꿨다.

결과는 비슷했다.

다른 방향에서 힘을 흘렸다.

또 달랐다.

소재 자체가 하나의 고정된 마법진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들어오는 흐름에 맞추어 반응했다.

베라는 밤새 도면을 그렸다.

다음 날 작업장 바닥에는 수십 장의 종이가 떨어져 있었다.

람파스가 문을 열려고 했지만 잠겨 있었다.

“베라!”

안에서 대답이 왔다.

“가.”

“밤샜죠?”

“안 샜어.”

“지금 아침인데요?”

잠깐 침묵.

“그러니까 가.”

베라는 문 안쪽에서 다시 골편을 들여다봤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드래곤의 힘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 힘을 버티는 구조가 특별한 것이 아닐까.

---

드래곤은 막대한 힘을 몸에 품고도 살아간다.

맥류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자신이 지나가는 곳마다 흐름을 찢어놓지 않는다.

베라는 그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술자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날부터 관점이 바뀌었다.

“드래곤은 마력이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야.”

혼자 중얼거렸다.

“안 터지는 게 중요한 거지.”

엄청난 흐름이 지나가는데도 몸이 유지된다.

그렇다면 이유가 있어야 했다.

골격.

혈관.

비늘.

조직 사이의 배열.

맥류를 받아들이고 분산시키고 다시 밖으로 돌려보내는 어떤 구조.

만약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드래곤의 힘을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공학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면.

프라그모 주변에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열과 맥류를 지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곳에서 억지로 뽑아내는 대신 여러 흐름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과잉을 다른 곳으로 보내고.

필요할 때 연결하고.

흐름이 바뀌면 장치도 함께 조절된다면.

베라는 처음으로 자신이 찾고 있던 것이 새로운 연료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화로도 아니었다.

새로운 방식의 순환이었다.

---

물론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첫 번째 실험장치는 사흘 만에 터졌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작업대 한쪽이 날아갔다.

베라는 날아간 나사를 찾아 주웠다.

“왜 터졌지.”

두 번째 장치는 터지지 않았다.

대신 들어온 힘을 전부 한쪽 금속판에 집중시켰다.

판이 녹았다.

세 번째는 너무 잘 분산했다.

열이 필요한 곳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네 번째는 주변의 냉기까지 흡수해 작업실 벽에 성에를 만들었다.

베라는 노트에 적었다.

‘망함.’

옆에 이유를 적었다.

다섯 번째 장치 아래에는 더 크게 썼다.

‘아주 크게 망함.’

그다음 줄에는 다시 계산식이 이어졌다.

실패할 때마다 그만둘 이유는 늘어났다.

동시에 다음에 바꿀 것도 늘어났다.

베라는 그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패했다는 것은 안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지금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적어도 아직은.

---

연구가 조금씩 커지면서 베라는 문제 하나를 마주했다.

혼자 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그렇다고 공개하기도 어려웠다.

드래곤 소재라는 말만으로도 관심을 가질 사람이 많았다.

누군가는 난방보다 무기를 먼저 생각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실제 가능성을 확인하기 전에 거대한 투자를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베라 자신도 원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잘못 연결하면 주변 맥류를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틀 수 있었다.

난방망 하나가 터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자치구의 일부를 따뜻하게 하려다 다른 지역의 흐름을 말려버릴 수도 있었다.

베라는 그 가능성을 계산했다.

낮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를 숨겼다.

잔불공동관리회 공식 예산도 쓰지 않았다.

개인 돈과 폐부품을 사용했다.

공공 난방망에는 절대 연결하지 않았다.

실험은 폐쇄된 작은 순환장치 안에서만 했다.

그리고 노트 첫 장에 이름을 적었다.

‘魔工學.’

한참 바라보다 그 아래에 썼다.

‘마공학.’

마법을 쓰는 기계라는 뜻은 아니었다.

기계가 맥류의 흐름 자체를 받아들이고 조율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학문이었으므로 이름도 자신이 정했다.

그 아래에 작은 글씨를 더했다.

‘임시 명칭. 더 좋은 이름 생각나면 바꿀 것.’

몇 달 뒤 그 문장을 줄로 지웠다.

옆에 새로 썼다.

‘생각 안 남. 그냥 이걸로 할 것.’

그것이 현재까지도 마공학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는 이유다.

---

베라는 자신이 하는 일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잘 안다.

작은 오류가 무엇을 만드는지 평생 봐왔다.

잘못 조인 볼트 하나가 관 하나를 터뜨린다.

관 하나가 터지면 건물 하나가 식는다.

건물 하나가 식으면 사람이 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도시 전체의 맥류를 다루는 장치는 얼마나 위험할까.

계산할수록 무서워졌다.

베라는 겁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실험을 시작하기 전에 손이 멈추는 날도 있었다.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 많이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다른 것도 떠올렸다.

겨울 회의실 벽에 적혀 있던 시간.

열두 시간.

열아홉 시간.

하루 반.

이틀.

그 숫자 끝에 있던 사람들.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는데도 죽었던 주민들.

그리고 다음 겨울에도 같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

베라는 다시 공구를 들었다.

누군가 성공할 가능성을 물었다면 솔직하게 대답했을 것이다.

“낮아.”

그럼 왜 하느냐고 물으면 답 역시 정해져 있었다.

“안 하면 성공할 확률은 0이니까.”

---

하지만 베라에게는 연구 자체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다.

자신이 이 기술을 어디까지 시험할 권리가 있는가.

과거의 베라는 밸브를 잠그고 말했다.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지금도 그 성격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자신의 손이 날아가는 실험이라면 망설임이 적다.

자기 작업실이 터지는 것도 감수할 수 있다.

자기 돈을 잃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하지만 마공학이 정말 프라그모 난방망과 연결되는 날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실패하면 베라 혼자 다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위험해진다.

그 사람들이 연구에 동의한 적이 없다면.

베라가 아무리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해도.

그 위험을 대신 선택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베라는 아직 공개 실험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때로는 그것이 신중함인지 두려움인지 자신도 모른다.

조금 더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확실해질 수 없는 기술을 계속 혼자 붙잡고 있는 것이 더 무책임한가.

누군가에게 알려야 하는가.

알린다면 누구에게 먼저 말해야 하는가.

에리두처럼 기록과 책임을 따지는 사람인가.

첼키아처럼 실제 위험을 판단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 기술의 실패를 직접 감수할 주민들인가.

베라는 아직 답을 정하지 못했다.

---

람파스는 베라가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베라가 밤늦게까지 작업실에 남는다는 것만 안다.

가끔 잠긴 문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금속이 울리는 소리.

마력 측정기가 진동하는 소리.

한 번은 작은 폭발음도 났다.

람파스가 문을 두드렸다.

“베라!”

“왜.”

“방금 뭐 터졌죠?”

“안 터졌어.”

“연기 나오는데요?”

잠깐 침묵했다.

“조금 터졌어.”

람파스가 문을 열라고 했지만 베라는 열지 않았다.

“위험해.”

“베라도 안에 있잖아요!”

“그래서 너까지 들어오면 둘이 위험하잖아.”

람파스는 한참 문 앞에 서 있었다.

결국 문 옆에 차 한 잔을 놓고 갔다.

“식기 전에 마셔요!”

베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시간 뒤 문을 열었을 때 차는 이미 차가웠다.

베라는 그래도 마셨다.

그런 밤이 반복되었다.

언젠가는 람파스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 ‘아직’이 얼마나 길어져도 괜찮은지는 자신도 모른다.

---

베라는 때때로 람파스가 주민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을 멀리서 본다.

얼음 정령이 된 뒤에도 사람을 좋아하는 아이.

한 번 죽었으면서도 자꾸 다른 사람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

베라는 람파스의 과거를 모두 들은 뒤에도 위로다운 위로를 하지 못했다.

언니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아버지의 빚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설원에서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잠깐 손을 멈췄을 뿐이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서 네가 난방에 집착하는 거구나.”

람파스가 웃었다.

“베라도잖아요.”

베라는 대꾸하지 못했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둘의 이유는 다르다.

람파스는 한 번 난방 밖으로 밀려난 사람의 삶을 알고 있다.

베라는 누군가를 난방 밖으로 밀어내는 결정을 내려본 사람이다.

그래서 둘 다 잔불공동관리회에 남았다.

한 사람은 문을 두드린다.

한 사람은 밸브를 잡는다.

그리고 베라는 그 밸브 자체가 필요 없는 미래를 만들려고 한다.

---

마공학 연구는 아직 성공이라고 부를 단계가 아니다.

베라가 만든 장치 중 가장 오래 버틴 것도 겨우 몇 시간이다.

작은 열원을 받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안정적으로 나누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흐름이 크게 변하면 구조가 흔들린다.

드래곤 소재를 그대로 사용하면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그것으로는 의미가 없다.

자연사한 드래곤의 유해는 한정되어 있다.

그걸 도시 곳곳에 박아 넣는 것은 새로운 학문이 아니라 희귀한 재료에 의존하는 기술일 뿐이다.

베라가 원하는 것은 소재 자체가 아니다.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금속과 마석과 인공 구조물만으로 같은 원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누구나 고칠 수 있다.

그래야 부품을 교체할 수 있다.

그래야 프라그모 하나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드래곤 한 마리가 더 죽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베라는 골편을 실험대 위에 올려놓을 때마다 그것을 재료보다 교본에 가깝게 본다.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하나의 구조.

답을 적어놓은 물건이 아니라 문제를 보여주는 물건.

아직 그녀는 그 문제를 풀지 못했다.

---

가끔 베라는 자신이 너무 멀리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원래 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했다.

난방관을 고치는 일.

얼어붙는 집을 줄이는 일.

연료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쓰는 일.

그런 사람이 어느 순간 드래곤의 신체 구조를 뜯어보며 새로운 학문 이름까지 만들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다.

어느 밤에는 노트를 읽다가 혼잣말했다.

“미쳤네.”

잠깐 뒤에 계산식을 하나 더 적었다.

미쳤다는 사실과 계산이 틀렸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베라는 언제나 그렇게 생각한다.

누군가 위험하다고 말하면 위험한 이유를 묻는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무엇 때문에 불가능한지 묻는다.

실패할 거라고 말하면 몇 퍼센트인지 묻는다.

그리고 실패 확률이 높다는 답을 들어도 그다음 질문을 한다.

“낮출 방법은?”

그것이 베라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다.

---

그렇다고 그녀가 실패를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하면 사람이 다친다.

그 사실을 모르는 기술자는 위험하다.

베라는 작업장에서 가장 먼저 안전밸브를 확인한다.

자기 장비보다 대피로부터 본다.

실험 전에 장치가 터졌을 때 파편이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지 계산한다.

마공학 노트에는 성공한 실험보다 실패했을 때 멈추는 방법이 더 많이 적혀 있다.

그녀에게 용기는 안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위험이 어디 있는지 최대한 많이 알아낸 뒤에도 필요하다면 손을 대는 것이다.

그래서 후배가 무턱대고 장치에 손을 대면 가장 크게 화낸다.

“겁 없는 척하지 마.”

“화로장님도 맨날 위험한 거 하시잖습니까.”

“난 어디가 터지는지 계산하고 해.”

“그러다 계산 틀리면요?”

베라는 바로 대답한다.

“그러니까 두 번 하는 거야.”

그리고 잠깐 뒤 덧붙인다.

“세 번 해도 되고.”

---

베라의 머리 위에 늘 올라가 있는 황동 고글도 오래된 물건이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사용하던 작업용 고글의 부품을 가져와 어머니와 함께 다시 만든 것이었다.

렌즈는 여러 번 바뀌었다.

가죽끈도 몇 번이나 끊어져 덧댔다.

황동테에는 작은 흠집이 가득하다.

새것을 살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잔불공동관리회 사람들이 몇 번이나 바꿔주겠다고 했다.

베라는 거절했다.

“잘 보이는데 왜 바꿔.”

그 이유면 충분했다.

생각할 때면 고글을 이마 위로 올리고 렌즈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버릇이 있다.

마공학 계산이 막힐 때도 똑같다.

툭.

툭.

툭.

그러다 갑자기 뭔가 떠오르면 고글을 내려쓰고 실험대로 간다.

람파스는 그 소리를 들으면 가끔 작업실 밖에서 외친다.

“또 뭐 하려고 그러죠?”

베라는 대답한다.

“좋은 거.”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했잖아요!”

“지난번 것도 좋았어.”

“폭발했는데요!”

“좋은 데이터가 나왔잖아.”

람파스는 그 말을 싫어한다.

베라는 좋아한다.

---

잔불공동관리회 사람들은 화로장을 거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베라는 말투를 부드럽게 만들 생각이 별로 없다.

잘못 조립했으면 잘못했다고 말한다.

위험하면 위험하다고 말한다.

불가능하면 지금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괜찮지 않은 상황에서 괜찮다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하지만 같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베라를 찾는다.

한밤중에 난방관이 터졌을 때.

아무도 어느 밸브를 잠가야 할지 모를 때.

규정에는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베라는 투덜거리면서도 온다.

잠옷 위에 외투만 걸치고 오는 날도 있다.

고글을 머리에 올리고 공구상자를 든다.

현장을 한 번 본다.

그리고 말한다.

“좋아.”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본다.

“뭐가 좋습니까?”

“뭐가 망가졌는지는 알겠으니까.”

그 말이 나오면 사람들은 조금 안심한다.

베라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해결할 것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정말 싫어하는 것은 해결할 것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다.

---

그래서 마공학은 베라에게 단순한 연구가 아니다.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문제에 처음으로 생긴 손잡이에 가깝다.

프라그모의 추위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맥류에서 무한한 열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모든 대가를 없애는 기계도 만들 수 없다.

베라도 그런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지금보다 대가를 덜 치르는 방식이다.

버려지던 흐름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한곳에 몰리는 힘을 분산시키고.

다른 곳을 말려버리지 않으면서 필요한 곳에 열을 연결하는 것.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라 지금보다 나은 구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천 명 중 아홉백 명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을 두고 모두를 못 살리니 실패라고 말하면 베라는 화를 낼 것이다.

동시에 아홉백 명을 살렸으니 나머지 백 명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화를 낼 것이다.

아홉백 명을 살리고.

다음에는 구백십 명을 살리고.

왜 백 명이 남았는지 계속 묻는 것이 기술자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발전은 완벽해지는 일이 아니다.

포기해야 하는 사람의 수를 하나씩 줄이는 일이다.

---

베라는 자신이 언젠가 틀릴 것을 안다.

이미 여러 번 틀렸다.

너무 빨리 밸브를 잠근 적도 있다.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 장치를 완전히 망가뜨린 적도 있다.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않고 먼저 행동한 적도 있다.

결과가 좋았다는 이유로 과정까지 옳았다고 믿은 적도 있다.

그런 실수들을 부끄러워하지만 숨기지는 않는다.

후배가 과거의 동쪽구역 차단 사건을 물으면 말한다.

“내가 잠갔어.”

“잘한 일이었습니까?”

베라는 예전처럼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그때는 필요했다고 생각했어.”

“지금은요?”

잠시 생각한다.

“지금도 잠글 것 같긴 해.”

후배가 당황한다.

베라는 덧붙인다.

“대신 먼저 사람 보낼 거야.”

그 정도가 베라가 변한 방식이다.

선택 자체를 피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말 하나로 다른 사람의 몫까지 가져오려 하지는 않는다.

아직 완전히 고친 버릇은 아니다.

그래서 계속 배운다.

---

어느 늦은 밤 베라는 마공학 실험장치 앞에 혼자 앉아 있었다.

작은 순환관 안에서 열이 움직였다.

한쪽에서 들어온 흐름이 세 갈래로 나뉘었다.

측정기는 안정적이었다.

십 분.

삼십 분.

한 시간.

두 시간.

처음으로 예상보다 오래 버텼다.

베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숫자를 봤다.

세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장치 한쪽이 흔들렸다.

압력이 올라갔다.

베라는 즉시 안전밸브를 열었다.

열이 빠졌다.

장치는 멈췄다.

성공은 아니었다.

그래도 폭발하지 않았다.

베라는 노트를 펼쳤다.

‘2시간 51분.’

잠깐 생각한 뒤 그 아래 적었다.

‘전보다 34분 증가.’

그리고 아주 작은 글씨로 적었다.

‘가능성 있음.’

그 순간 작업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베라!”

람파스였다.

베라는 노트를 덮었다.

“왜.”

“또 퇴근 안 했죠?”

“했어.”

“어디로요?”

“여기로.”

“그건 퇴근이 아니잖아요!”

베라는 고글을 이마 위로 밀어 올렸다.

문을 열었다.

람파스가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서 있었다.

머리 위의 얼음 토끼 귀가 살짝 기울어 있었다.

베라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간다.”

---

작업장을 나오자 프라그모의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람파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추위였다.

베라는 외투 깃을 올렸다.

멀리 자치구 창문마다 작은 불빛이 보였다.

어떤 집은 따뜻했다.

어떤 집은 연료를 아끼느라 불을 줄이고 있을 것이다.

어떤 집은 잔불공동관리회의 배급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베라는 그 불빛들을 오랫동안 봐왔다.

자신이 고친 관 끝에서 켜진 불도 있었다.

자신이 밸브를 잠가 꺼진 불도 있었다.

그 사실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는다.

마공학이 성공하더라도 모두를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수십 년을 연구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

베라는 그런 가능성을 알고 있다.

그래도 다음 날이면 다시 작업장으로 간다.

배관을 고친다.

연료 장부를 본다.

주민들과 싸운다.

후배를 혼낸다.

그리고 모두가 돌아간 뒤에는 잠긴 문 안에서 다시 드래곤 골편을 들여다본다.

완벽한 해결책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겨울은 온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추워진다.

베라는 그것을 너무 오래 봤다.

그래서 실패가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실패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언젠가 누군가 그녀의 노트를 발견한다면 첫 장에 이상한 이름 하나가 적혀 있을 것이다.

마공학.

아직 아무도 인정하지 않은 학문.

아직 제대로 작동하는 장치 하나 없는 학문.

그 아래에는 수없이 많은 실패 기록이 이어진다.

터졌다.

녹았다.

흐름 불안정.

재설계 필요.

다시 시도.

그리고 가장 마지막 장 어딘가에는 베라가 자신에게 쓰듯 남긴 문장이 있다.

“모두를 못 살린다는 건 알아.”

잠깐 글씨가 끊긴다.

그다음 줄은 조금 더 진하다.

“그래서 계속 만드는 거야.”

베라 모르겐슈테른은 오늘도 그 문장 다음에 새로운 도면을 그린다.

언젠가 프라그모의 겨울에서 누군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덜 당연해지도록.

그리고 자신이 그날까지 살아 있든 아니든, 다음 기술자가 이 실패들 위에서 한 번 더 앞으로 갈 수 있도록.

NVI
람파스
프라그모잔불공동관리회-배급·구호담당
“세상이 이렇게 예쁜데, 사는 것까지 꼭 아파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 HP90
💪 공격력10
🧙 마법력65
✨ 신비력70
🛡️ 방어력20
🔗 항마력70
😖 신비저항85
🏃 회피력55
과거 보기
람파스의 이야기는 아직 그녀가 추위를 싫어하던 인간이었을 때부터 시작된다.

프라그모 자치구의 겨울은 누구에게나 길었지만, 어린 람파스에게 집 안의 겨울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집은 넓지 않았다.

하지만 난방관은 제때 돌아갔고, 식탁에는 세 사람이 먹고도 조금 남을 만큼의 음식이 올라왔다.

아버지는 사업가였다.

크게 성공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여러 작업장과 상점에 자재를 대고, 남는 물건을 다른 구역에 중개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람파스에게 아버지는 늘 장부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

외투 주머니에는 접힌 영수증이 들어 있었고, 손가락에는 잉크가 묻어 있었다.

밤늦게 돌아온 날에도 두 딸이 아직 깨어 있으면 작은 과자 하나쯤은 내밀었다.

언니는 그런 아버지를 닮아 계산이 빨랐다.

람파스는 언니와 달리 숫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창문에 붙어서 서리 무늬가 달라지는 것을 구경했고, 난방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 정령이 안에 들어간 것 아니냐며 귀를 대곤 했다.

정말로 작은 정령이 근처를 맴도는 날도 있었다.

람파스는 그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냉기 정령이 창틀에 내려앉으면 손가락으로 인사를 했고, 정령이 사라지면 다음 날 다시 오겠거니 했다.

그녀는 자신이 유난히 정령들에게 호감을 사는 아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저 세상이 원래 그런 줄 알았다.

가족이 있고, 따뜻한 방이 있고, 창밖에는 아름다운 눈이 내리고, 가끔 이름 모를 작은 것들이 찾아오는 세계.

어린 람파스에게 프라그모는 그런 곳이었다.

---

처음 달라진 것은 아버지가 저녁 식탁에서 말이 줄어든 때였다.

사업이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거래처 하나가 대금을 늦췄고, 뒤이어 다른 거래처가 문을 닫았다.

창고에 들여놓은 물건은 팔리지 않았고, 팔리지 않은 물건에도 보관료와 운송비가 붙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괜찮다고 말했다.

사업이라는 건 원래 오르내리는 거라고 했다.

다음 달이면 회복된다고 했다.

그다음에는 겨울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람파스는 자세한 사정을 몰랐다.

하지만 집 안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볼 수 있었다.

먼저 비싼 찻잔이 없어졌다.

그다음에는 장식장이 비었다.

아버지가 아끼던 시계가 사라졌고, 언니가 성인이 되면 물려받기로 했던 외투도 전당포로 갔다.

그래도 아버지는 사업을 접지 않았다.

지금 멈추면 지금까지 넣은 돈을 전부 잃는다고 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믿기 위해 그는 대출을 받았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처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더 비싼 돈을 빌리는 날도 생겼다.

언니는 몇 번이나 아버지에게 그만두자고 말했다.

작은 집으로 옮기고, 남은 것을 정리하고, 셋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두 딸에게 빚만 남길 수는 없다고 말했다.

결국 그 말을 지키지 못했다.

사업은 무너졌다.

창고는 넘어갔고, 거래권도 사라졌다.

남은 장부에는 받을 돈보다 갚아야 할 돈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생을 끝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람파스는 처음에는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언니가 울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는 사람들을 만나고, 서류를 받고, 장례 절차를 밟고, 남은 채무를 확인했다.

울 시간이 없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람파스는 언니가 괜찮은 줄 알았다.

장례가 끝난 밤이 되어서야 언니가 부엌 바닥에 앉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우는 것을 보았다.

그때 람파스는 처음으로 알았다.

괜찮아 보이는 것과 괜찮은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

아버지가 죽어도 빚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정리할 재산은 거의 없었고, 집에는 담보가 잡혀 있었다.

두 자매가 당장 길거리로 쫓겨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달 갚아야 할 돈은 남았다.

언니는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찾았다.

람파스도 학교에 다니는 시간을 줄이고 일을 시작했다.

아침에는 가게에서 물건을 정리했다.

점심에는 주방에서 그릇을 닦았다.

저녁에는 작업장 바닥을 쓸거나 짐을 날랐다.

일이 없는 날에는 눈을 치웠다.

손에 잡히는 일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불철주야로 움직이면 당장 먹을 것과 난방비 정도는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빚은 거의 줄지 않았다.

상환한 돈만큼 다른 비용이 생겼다.

집의 난방관이 고장 나면 수리비가 들었다.

몸살로 하루를 쉬면 그날 품삯이 사라졌다.

가끔은 이자만 내고 한 달이 끝났다.

람파스는 처음으로 숫자가 사람을 지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아무리 오래 일해도 장부 마지막 줄이 변하지 않았다.

언니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새로운 일을 구했다고 말했다.

외지에서 온 모험가들이 많이 들르는 술집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했지만 급여가 셌다.

팁도 많다고 했다.

람파스는 걱정했다.

언니는 웃었다.

“술 나르고 주문 받는 일이야.”

“그것만?”

“그것만.”

언니는 새로 지급받은 작업복도 보여주었다.

토끼 귀 장식이 달린 머리띠.

몸에 붙는 옷.

밝은 리본과 스타킹.

당시의 람파스는 그 옷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예쁘다고 생각했다.

평소 늘 낡은 작업복만 입던 언니가 반짝이는 옷을 입은 모습이 신기했다.

람파스는 웃으며 말했다.

“언니, 진짜 예뻐!”

언니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람파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응!”

“그럼 됐네.”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람파스는 아주 나중에야 생각하게 된다.

---

술집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로 언니가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대신 가지고 오는 돈은 많아졌다.

빚은 처음으로 아주 조금씩 줄었다.

람파스는 희망을 가졌다.

이대로 몇 년만 버티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여전히 웃었다.

피곤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람파스에게 먹을 것을 챙겼고, 쉬는 날이면 함께 시장을 걸었다.

하지만 며칠에 한 번씩 이상한 흔적이 생겼다.

볼에 화장이 두꺼운 날이 있었다.

팔목까지 올라오는 장갑을 벗지 않는 날도 있었다.

여름인데도 목이 높은 옷을 입고 돌아오기도 했다.

람파스가 이유를 물으면 언니는 웃었다.

술병 상자를 옮기다 부딪혔다고 했다.

계단에서 미끄러졌다고 했다.

손님이 넘어지는 것을 잡아주다 같이 넘어졌다고 했다.

람파스는 믿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언니는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적어도 그때의 람파스는 언니가 자신에게 어떤 표정을 숨기는지 알 만큼 자라지 못했다.

가끔 집에 돌아온 언니는 바니걸 복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갈아입을 기운도 없는 날이었다.

토끼 귀는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리본은 풀려 있었다.

람파스는 그런 언니를 보면 담요를 가져왔다.

“안 추워?”

“추워.”

“그러니까 갈아입고 자.”

“조금만 있다가.”

그러면 람파스는 옆에 앉았다.

언니가 잠들면 토끼 귀 머리띠를 조심스럽게 벗겨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은 람파스에게 아주 평범한 밤의 기억이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옷 아래에 멍이 있다는 것도.

언니가 람파스가 잠든 뒤 혼자 얼음주머니를 팔에 대고 있었다는 것도.

손님에게 맞아도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빚이었다는 것도.

람파스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언니가 웃던 얼굴을.

조금 구겨진 토끼 귀를.

그리고 자신이 아무것도 몰랐던 것을.

---

그날 밤에도 언니는 늦었다.

처음에는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술집이 바쁜 날이면 새벽 가까이 돌아오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람파스는 작은 불을 켜두고 기다렸다.

한 번 졸았다가 깨어났다.

창밖을 보니 거리는 이미 조용했다.

언니는 오지 않았다.

람파스는 외투를 입었다.

그동안 언니가 일하는 술집에 찾아간 적은 거의 없었다.

언니가 싫어했기 때문이다.

“거긴 너 올 데 아니야.”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하지만 그날은 기다리는 것이 더 무서웠다.

람파스는 혼자 거리로 나갔다.

술집 근처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문 앞에는 사람이 몇 명 서 있었다.

누군가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깨진 유리 조각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람파스는 그 틈을 지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멈췄다.

언니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자는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넘어져 있는 줄 알았다.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부어 있었다.

여기저기 검붉은 멍이 올라와 있었다.

한쪽 팔은 사람이 팔을 두는 방향과 다르게 꺾여 있었다.

머리 위에 쓰고 있어야 할 토끼 귀는 멀리 떨어진 바닥에 놓여 있었다.

람파스는 언니에게 다가갔다.

누군가 말렸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는 바닥에 앉았다.

언니의 손을 잡았다.

차갑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이 아직 따뜻한데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당시의 람파스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언니.”

대답이 없었다.

“집 가자.”

대답이 없었다.

“나 왔어.”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람파스는 울지 않았다.

울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언니 옆에 앉아 있었다.

얼마 뒤 뒤쪽에서 무거운 군화 소리가 들렸다.

서리성벽군단 병사였다.

병사는 무릎을 굽혀 람파스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한참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결국 아주 짧게 말했다.

언니를 때린 모험가는 달아났다고.

이미 추적 중이라고.

반드시 찾겠다고.

람파스는 그 말을 듣고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언니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에서 람파스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피가 아니다.

부러진 팔도 아니다.

바닥에 떨어진 토끼 귀다.

늘 집에 돌아오던 언니의 머리 위에 있던 것이.

그날만큼은 언니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

범인은 결국 잡혔다.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려다 추적대에게 발견되었다.

저항했고, 붙잡혔고, 끝내 첼키아 이바노프가 직접 사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주변 사람들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이제 언니도 편히 눈을 감을 거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람파스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범인이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은 편이 낫다고 생각했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화가 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이 언니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하지만 범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에도 집은 조용했다.

언니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탁자 위에는 두 사람이 갚아야 할 장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냄비에는 한 사람분의 음식만 끓었다.

정의가 이루어졌다는 말은 그런 것들을 바꾸지 않았다.

람파스는 그때 두 번째로 알았다.

나쁜 사람에게 벌을 주는 일과 남겨진 사람을 살게 하는 일은 같은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범인을 잡아야 했다.

누군가는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일을 모두 해도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그다음 날이 왔다.

그다음 날의 식비가 필요했다.

난방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빚을 갚아야 했다.

람파스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전보다 더 많이 했다.

한 사람의 몫으로 두 사람의 빚을 갚으려 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언니가 했던 일을 자신이 그만두면 언니가 버틴 시간까지 헛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손이 갈라져도 일했다.

열이 나도 일했다.

잠을 줄였다.

그러나 숫자는 사람보다 오래 버텼다.

---

언니가 죽은 뒤 약 1년이 지났다.

람파스는 스무 살이 되었다.

축하해주는 사람은 몇 명 있었다.

가게 주인이 남은 빵을 하나 건넸고, 같이 짐을 나르던 사람이 뜨거운 차를 사주었다.

람파스는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에는 채권 관련 통지서가 도착했다.

더는 집을 유지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람파스는 여러 번 읽었다.

이미 알고 있던 결론이었다.

놀랍지도 않았다.

집에 남아 있던 물건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부 몇 권.

언니가 쓰던 컵.

낡은 담요.

그리고 서랍 깊은 곳에 들어 있던 토끼 귀 머리띠 하나.

람파스는 그것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무엇을 챙겨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결국 작은 가방 하나만 들었다.

토끼 귀 머리띠도 넣지 않았다.

그 물건을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문을 닫고 나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집은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다.

람파스는 갈 곳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겠지만,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해야 하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잠깐만 재워달라고 해야 할까.

돈을 빌려달라고 해야 할까.

일을 더 달라고 해야 할까.

그동안 너무 오래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법만 생각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걸었다.

자치구를 지나 외곽으로 나갔다.

성벽 너머의 설원까지 갔다.

딱히 죽으러 간 것은 아니었다.

살려고 간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발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갔다.

슬퍼할 기력조차 없었다.

---

설원은 이상할 만큼 맑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 표면이 얇게 흩날렸다.

멀리 보이는 얼음 언덕은 저녁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람파스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던 프라그모를 아름답다고 생각할 여유가 거의 없었다.

눈은 치워야 하는 것이었다.

추위는 견뎌야 하는 것이었다.

얼음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니 설원은 너무 아름다웠다.

람파스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죽었다.

언니도 죽었다.

집도 사라졌다.

자신은 스무 살이 되었는데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세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조금 뒤에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예쁜데.”

목소리가 바람에 묻혔다.

람파스는 다시 말했다.

“세상은 이렇게 예쁜데.”

왜 그 위에서 사는 사람들의 인생은 이렇게 아파야 할까.

누군가는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했다.

아버지도 열심히 일했다.

언니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자신도 그랬다.

그런데 아무도 그 노력만으로 살아남지 못했다.

람파스는 처음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거창하게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나쁜 사람이 전부 없어져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추운 사람에게 따뜻한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친 사람이 잠깐이라도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도움을 청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가 있다면 누군가 먼저 문을 두드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삶도 아주 조금쯤은 아름다워도 되지 않을까.

그 생각이 람파스가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붙잡은 생각이 되었다.

---

몸은 이미 오래전에 한계를 넘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다.

잠도 부족했다.

두꺼운 방한복도 없었다.

걷는 동안 손끝의 감각이 먼저 사라졌다.

그다음에는 발이 무거워졌다.

람파스는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돌아갈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몇 걸음 더 걸었다.

무릎이 눈에 닿았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람파스는 이상하게도 크게 무섭지 않았다.

피곤했다.

너무 오랫동안 피곤했다.

눈 위에 몸을 눕히자 차갑다는 감각조차 조금씩 멀어졌다.

눈송이가 얼굴에 내려앉았다.

어린 시절 창문에서 보던 작은 냉기 정령 하나가 시야 끝에 나타났다.

람파스는 흐릿하게 웃었다.

“너 또 왔네.”

정령이 가까이 왔다.

그 뒤로 하나가 더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하나.

람파스는 그것을 제대로 세지 못했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마지막으로 언니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했다.

웃는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토끼 귀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던 밤의 모습이었다.

람파스는 그 얼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

인간 람파스는 그날 설원에서 죽었다.

---

죽음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 람파스는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오히려 주변에 있던 작은 냉기 정령들이다.

정령들은 람파스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창틀에 손가락을 올려 인사했던 것도.

겨울날 작업장 뒤편에서 얼어붙은 작은 정령을 불 가까이에 두려다가 오히려 정령이 도망쳤던 것도.

눈 속에 희미한 빛이 보이면 밟지 않으려고 돌아가던 것도.

람파스는 그런 행동을 특별한 친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령들은 다르게 기억했다.

그들은 인간처럼 법을 만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좋아하는 존재에게는 놀랄 만큼 솔직했다.

람파스가 죽자 작은 정령들이 모였다.

하나의 정령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람파스의 육체를 되살릴 수도 없었다.

이미 멈춘 생명을 다시 움직이는 힘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흩어져 가는 람파스의 자아와 기억이 맥류 속으로 완전히 풀리기 전, 그것을 붙잡는 일은 가능했다.

하나가 붙잡았다.

다른 하나가 그 옆에 붙었다.

또 다른 정령이 냉기의 흐름을 끌어왔다.

설원의 얼음과 서리, 밤공기 속의 차가운 맥류가 작은 정령들의 움직임을 따라 모였다.

수많은 하급 정령이 제각기 가진 미약한 힘을 하나의 방향으로 겹쳤다.

그 중심에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람파스.

그녀가 기억하던 자신.

아버지의 딸.

언니의 동생.

스무 살까지 살아온 인간.

그 기억을 중심으로 냉기가 형태를 만들었다.

죽은 육체가 되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시체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한 인간의 영혼과 자아를 붙잡은 냉기 맥류가 새로운 정령의 몸을 만든 것이었다.

작은 정령들은 자신들이 정확히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람파스가 사라지는 것이 싫었다.

그 이유만으로 한 달 가까이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

람파스가 눈을 뜬 것은 약 한 달 뒤였다.

처음 느낀 것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춥지 않았다.

숨이 막히지도 않았다.

가슴이 오르내리지 않았다.

람파스는 한참 누워 있다가 손을 들어보았다.

분명 자신의 손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간의 손과는 감각이 달랐다.

손가락 사이로 냉기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피부 위에 맺힌 서리를 의식하자 서리가 움직였다.

람파스는 손을 흔들었다.

주변에 있던 작은 정령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어?”

정령들이 그녀 주변을 돌았다.

람파스는 몸을 일으켰다.

한 달 전이라면 죽을 만큼 차가웠을 바람이 맨살을 지나갔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 안 추워.”

정령 하나가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나 죽었었지?”

대답 대신 작은 빛이 깜빡였다.

람파스는 잠깐 조용해졌다.

손을 가슴에 올렸다.

심장이 뛰지 않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려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눈물도 인간일 때와는 조금 다르게 맺혔다.

그녀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주변에 모여 있는 정령들을 바라봤다.

“너희가 한 거야?”

정령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람파스는 웃었다.

“고마워.”

그것이 정령 람파스가 처음으로 한 감사였다.

---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바로 괜찮아진 것은 아니었다.

람파스는 프라그모로 돌아가는 길을 한동안 망설였다.

자신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이 한 달 뒤 걸어서 돌아오면 누가 믿어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돌아가도 집은 없었다.

언니도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설원과 자치구 외곽을 떠돌았다.

작은 정령들이 함께했다.

람파스는 그들과 지내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조금씩 이해했다.

정령은 인간과 기억하는 방식이 달랐다.

어떤 정령은 어제 일과 십 년 전 일을 같은 거리에서 말했다.

어떤 정령은 자신이 오래 머물던 장소는 정확히 기억하면서도 함께 있던 인간의 이름을 잊었다.

또 어떤 정령은 기억보다 감정만 남겼다.

좋았다.

싫었다.

따뜻했다.

무서웠다.

누가 왜 그랬는지는 사라지고 느낌만 남아 있었다.

람파스는 처음에는 그것을 재미있어했다.

“너 그 사람 이름도 기억 안 나?”

정령이 빙글 돌았다.

“그럼 뭘 기억해?”

정령은 람파스의 손바닥 위에서 기분 좋다는 듯 흔들렸다.

람파스는 웃었다.

그러다 어느 날 웃지 못했다.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한다.

언니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언니가 컵을 잡던 손도 기억한다.

토끼 귀가 한쪽으로 기울던 모습도 기억한다.

하지만 백 년 뒤에도 기억할까.

정령에게 백 년은 인간에게만큼 긴 시간이 아닐 수도 있었다.

자신도 언젠가 언니의 이름부터 잊고, 단지 누군가를 좋아했다는 느낌만 남기는 것은 아닐까.

람파스는 그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죽은 것은 참을 수 있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게 된 것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언니를 잊는 것만은 싫었다.

그날부터 람파스에게 기억은 고집이 되었다.

---

람파스가 다시 자치구로 들어온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예전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창문의 커튼도 바뀌어 있었다.

문을 두드리지는 않았다.

한참 길 건너에서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다음에는 자신과 언니가 일하던 거리들을 걸었다.

가게 몇 곳은 그대로였고, 몇 곳은 사라졌다.

람파스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유령을 본 것처럼 놀랐다.

람파스는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웃으며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일단 정령이 됐어요.”

대부분은 더 혼란스러워했다.

람파스는 그 반응도 조금 재미있었다.

그리고 언니가 일했던 술집 앞까지 갔다.

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들어갈까 말까 고민했다.

끝내 들어갔다.

내부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탁자가 놓여 있었고, 술 냄새가 났다.

다른 종업원들이 주문을 받고 있었다.

몇몇은 토끼 귀가 달린 복장을 입고 있었다.

람파스는 그 옷을 보는 순간 발을 멈췄다.

좋은 기억과 끔찍한 기억이 동시에 떠올랐다.

언니가 처음 그 옷을 보여주던 날.

자신이 예쁘다고 말했던 날.

집에 돌아와 소파에 쓰러지던 언니.

몰래 가리고 있던 멍.

그리고 마지막 밤.

바닥에 떨어진 토끼 귀.

람파스는 그제야 자신이 어릴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전부 이해했다.

언니는 그 옷이 좋아서 입었던 것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그 일을 좋아해서 웃었던 것도 아닐 수 있었다.

자신을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웃었을 가능성이 더 컸다.

람파스는 한참 서 있다가 술집을 나왔다.

그날 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정령 몸에 옷을 만들었다.

---

정령인 람파스에게 옷은 인간일 때와 같은 의미가 없었다.

추위를 막을 필요가 없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한 두꺼운 외투도 필요하지 않았다.

냉기를 응축하면 몸의 일부처럼 장식과 천의 형태를 만들 수도 있었다.

람파스는 오래 고민했다.

그리고 기억 속 언니의 옷을 만들었다.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자신의 냉기가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색은 얼음처럼 옅은 하늘빛이 되었다.

리본 주변에는 눈 결정이 생겼다.

토끼 귀도 천보다 얼음 결정에 가까운 모양이 되었다.

람파스는 완성된 모습을 얼음 표면에 비춰보았다.

어린 시절 자신이 언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짜 예뻐.

람파스는 웃었다.

그 뒤로 그 옷을 계속 입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봤다.

프라그모 한복판에서 방한복도 없이 바니걸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정령이니 당연했다.

“안 추워요?”

라는 질문을 수없이 들었다.

람파스는 매번 밝게 대답했다.

“네!”

그러면 상대는 잠깐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이니까 그렇겠네요.”

람파스는 그것도 재미있어했다.

하지만 누군가 왜 하필 그 옷을 입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조금 달라졌다.

“언니가 입던 옷이에요.”

“언니가 좋아하던 옷이었어요?”

람파스는 그 질문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몰라요.”

그리고 웃었다.

“좋아했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잠깐 토끼 귀 끝을 만졌다.

“그냥 제가 언니를 제일 많이 본 모습이 이거였어요.”

람파스는 언니의 고통을 예쁜 추억으로 바꾸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그 고통 때문에 언니의 모든 모습을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입었다.

언니가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언니가 웃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이 그때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까지 잊지 않기 위해.

정령이 되어 수많은 것을 잃더라도 이것만은 놓치지 않겠다는, 조금 고집스러운 방식이었다.

---

정령이 된 뒤의 람파스는 이전보다 훨씬 밝아졌다.

고통을 잊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 번 죽고 나니 살아 움직이는 하루가 이상하게 신기했다.

아침이 오면 정말로 아침이 왔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눈 결정 모양이 달라지면 사람을 붙잡고 보여주었다.

길에서 작은 냉기 정령을 만나면 한참 따라다녔다.

따뜻한 음식은 몸에 꼭 필요하지 않았지만 냄새가 좋아서 자주 먹었다.

뜨거운 차를 마시면 입 안에서 금세 미지근해지는 것도 재미있어했다.

자신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난처해했다.

“저 지금 꽤 재밌게 살고 있는데요?”

라고 말하면 상대가 더 난처해졌다.

람파스는 자신이 겪은 일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다.

다만 그 일들 때문에 앞으로의 모든 표정까지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언니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억지로 웃는 것은 아니었다.

웃고 싶을 때 웃었다.

궁금하면 물었다.

좋으면 좋다고 말했다.

정령들이 자신을 붙잡아준 이유 역시 복잡한 의무가 아니었다.

그들이 자신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람파스는 그 단순한 호의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돕는 데 언제나 거대한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좋아해서.

걱정돼서.

추워 보여서.

혼자 있어서.

그 정도 이유로 손을 내밀어도 된다고 믿었다.

---

베라 모르겐슈테른을 만난 것은 그보다 조금 뒤였다.

자치구 오래된 난방관 하나가 터진 날이었다.

압력이 올라간 관이 갈라지면서 뜨거운 증기와 물이 골목으로 쏟아졌다.

주민들이 대피했고, 잔불공동관리회 사람들이 밸브를 찾으러 뛰어다녔다.

람파스는 구경하려고 간 것이 아니었다.

작은 정령들이 시끄럽게 몰려가는 것을 보고 따라갔다.

현장 한가운데에는 머리 위에 황동 고글을 걸친 여자가 있었다.

베라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질러가며 지시했다.

“동쪽 밸브 잠가!”

“거긴 아니고 그 옆!”

“누가 그걸 망치로 때리래!”

람파스는 한동안 구경했다.

배관의 갈라진 틈에서는 계속 물이 뿜어져 나왔다.

베라는 보조관을 연결하려 했지만 손을 대기 어려울 만큼 뜨거웠다.

람파스가 물었다.

“저거 얼리면 안 돼요?”

베라가 고개를 돌렸다.

“뭐?”

람파스는 손을 들었다.

“저기요.”

“잠깐, 너 누구—”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람파스가 냉기를 모았다.

파열된 관 주변만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물이 멈췄다.

현장이 조용해졌다.

베라는 얼어붙은 배관을 바라봤다.

그다음 람파스를 봤다.

다시 배관을 봤다.

“너 뭐냐.”

람파스가 활짝 웃었다.

“람파스요!”

“그걸 물은 게 아니야.”

“얼음 정령이에요!”

“그건 보면 알아.”

베라는 한숨을 쉬고 얼어붙은 관을 두드렸다.

“너무 얼렸어.”

람파스의 웃음이 잠깐 멈췄다.

“아.”

“아 하지 마. 안쪽까지 얼면 다시 터져.”

“그럼 조금 녹일까요?”

“넌 얼리는 애잖아.”

“맞네요.”

베라는 그날 처음으로 람파스를 보고 웃었다.

아주 짧았지만 람파스는 놓치지 않았다.

---

수리가 끝난 뒤 베라는 람파스를 작업장으로 데려갔다.

왜 그런 힘을 가지고 자치구를 돌아다니고 있는지 물었다.

어디 소속인지도 물었다.

람파스는 둘 다 없다고 대답했다.

베라는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럼 먹고사는 건?”

“안 먹어도 돼요.”

“자는 데는?”

“안 자도 괜찮아요.”

“돈은?”

“별로 안 써요.”

베라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정령 편하네.”

“그렇죠?”

람파스는 자랑처럼 대답했다.

그러다 벽에 걸린 자치구 난방 지도를 봤다.

붉은 선과 파란 선이 복잡하게 이어져 있었다.

어느 구역에 연료가 부족한지, 어느 배관이 오래되었는지, 어떤 시설을 우선해야 하는지 표시되어 있었다.

람파스는 한참 지도를 바라봤다.

“여기는 뭐 하는 데예요?”

베라가 말했다.

“사람 안 얼어 죽게 하는 데.”

람파스는 바로 베라를 봤다.

“저 여기서 일할래요.”

“뭐?”

“일할래요.”

“방금 처음 왔잖아.”

“그래도 하는 일은 들었잖아요.”

베라는 의심스럽다는 듯 람파스를 위아래로 봤다.

토끼 귀.

바니걸 복장.

맨살.

작은 눈송이가 주변에 떠다니고 있었다.

“일단 옷부터 좀—”

“저 안 추운데요?”

베라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알았다.”

그렇게 람파스는 잔불공동관리회에 들어갔다.

면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짧았고, 베라는 나중에 그 결정을 몇 번이나 후회하는 척했다.

실제로는 한 번도 내보내지 않았다.

---

람파스가 맡은 일은 배급과 구호 쪽이었다.

처음에는 베라가 단순한 현장 보조로 쓰려고 했다.

얼어붙은 관을 안정시키고, 위험 구역을 지나가고, 냉기를 이용해 임시 봉합을 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람파스는 자꾸 다른 일을 했다.

배급표를 들고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다.

“몇 명 사세요?”

“아이 있어요?”

“아픈 사람은요?”

“연료 얼마나 남았어요?”

그것까지는 업무였다.

그런데 질문이 계속 늘어났다.

“밥은 드셨어요?”

“혼자 계세요?”

“어제도 기침하셨죠?”

“창문 틈으로 바람 들어오는데 이거 막아드릴까요?”

한 집에서 너무 오래 머물다 다음 구역 일정이 늦어지는 일도 있었다.

베라는 몇 번이나 말했다.

“배급조사하라고 했지 친구 만들라고 안 했어.”

람파스는 장부를 들고 대답했다.

“친구 되면 더 잘 말해줘요.”

“뭘?”

“진짜 얼마나 힘든지요.”

베라는 반박하려다가 멈췄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람파스는 자신이 과거에 도움을 청하지 못했던 것을 기억했다.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괜찮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언니가 그랬다.

그래서 람파스는 장부에 적힌 숫자만 보고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의 온도를 봤다.

아이의 손을 봤다.

주인이 괜찮다고 말하면서 빈 장작통을 발로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봤다.

때로는 쓸데없이 참견했다.

그 참견 덕분에 발견된 사람도 있었다.

며칠째 밖에 나오지 않던 노인.

난방관이 막혔는데 신고할 돈이 들까 봐 참던 가족.

자신보다 옆집이 더 어렵다며 배급을 양보하려던 사람.

람파스는 그런 사람들에게 먼저 말했다.

“도와달라고 해도 돼요.”

그 말을 할 때만큼은 평소보다 조금 천천히 말했다.

자신도 인간일 때 듣지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

람파스는 일을 잘했지만 완벽한 직원은 아니었다.

사람을 쉽게 좋아했다.

사연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렸다.

배급량이 정해져 있는데도 한 집에 조금 더 주고 싶어 했다.

베라는 그런 람파스를 자주 막았다.

“여기 더 주면 저쪽이 모자라.”

“조금만요.”

“그 조금이 열 집이면 한 집 분량이야.”

람파스는 입을 다물었다.

“둘 다 추운데 반씩 주면 안 돼요?”

“반씩 주면 둘 다 얼어.”

람파스는 그런 말을 싫어했다.

하지만 틀렸다고 우길 수도 없었다.

잔불공동관리회에는 충분한 것이 거의 없었다.

연료도.

인력도.

시간도.

한 곳의 난방을 살리려면 다른 곳의 공급을 줄여야 할 때가 있었다.

람파스는 처음으로 선의만으로는 선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다고 선의를 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이 돌아다녔다.

한 집이라도 덜 위험한 곳을 찾으면 배급 우선순위를 바꿀 여지가 생겼다.

창문 하나를 막아 열 손실을 줄이면 다른 곳에 연료를 조금 더 보낼 수 있었다.

정령들을 부탁해 얼음이 새는 틈을 찾아냈다.

자신의 몸에는 필요 없는 휴식 시간까지 다른 집을 확인하는 데 썼다.

베라는 그런 람파스를 보며 가끔 말했다.

“너 그러다 또 쓰러진다.”

람파스는 웃었다.

“저 이제 안 얼어 죽어요.”

“그게 자랑이냐?”

“조금은요.”

베라는 대답 대신 머리 위 토끼 귀를 한 번 잡아당겼다.

람파스가 항의하면 그제야 놓아주었다.

---

두 사람은 자주 싸웠다.

베라는 지금 당장 얼고 있는 사람부터 살려야 한다고 했다.

람파스도 기본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람파스는 그 과정에서 사람이 숫자로만 남는 것을 싫어했다.

베라가 지도 위에 선을 긋고 어느 구역 공급을 줄일지 계산하면 람파스는 이름을 말했다.

“거기 12번 집에 아이 둘 있어요.”

“알아.”

“17번 집 할아버지는 다리 아파서 대피 못 해요.”

“그것도 알아.”

“그런데 잠그려고요?”

베라는 한참 계산하다 대답했다.

“안 잠그면 진료소가 얼어.”

람파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순간에는 아버지의 장부가 떠올랐다.

숫자가 사람보다 오래 버티던 시절.

하지만 지금의 숫자는 달랐다.

베라는 숫자로 사람을 지우려고 계산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를 살릴 수 있는지 찾기 위해 계산했다.

람파스는 그것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둘은 역할을 나눴다.

베라가 밸브를 결정하면 람파스가 공급이 줄어드는 구역으로 먼저 달려갔다.

대피할 사람을 찾았다.

남은 연료를 모았다.

작은 정령들을 보내 동파가 빠른 집을 확인했다.

베라가 결정을 내리는 동안 그 결정으로 버려질 수 있는 사람을 람파스가 붙잡았다.

둘 중 하나만 있어서는 부족했다.

베라도 그것을 알았다.

람파스도 알았다.

그래서 싸운 뒤에도 다음 현장에는 함께 갔다.

---

베라에게는 가끔 이상한 밤이 있었다.

모두 퇴근한 뒤에도 작업장 불이 꺼지지 않았다.

문이 잠겨 있었고, 안에서는 금속을 자르는 소리가 들렸다.

람파스가 문을 두드리면 베라는 대개 나오지 않았다.

“베라!”

“가.”

“뭐 해요?”

“일.”

“무슨 일?”

“네 일 아닌 일.”

람파스는 입을 삐죽였다.

처음에는 몰래 들어가 보려고도 했다.

작은 정령에게 안을 보고 오라고 부탁하려다 멈췄다.

베라가 말하지 않겠다고 한 것을 정령을 이용해 훔쳐보는 건 싫었다.

그래서 대신 문 앞에 차를 놓고 갔다.

베라가 마시면 어차피 식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음 날 컵이 비어 있으면 람파스는 만족했다.

베라가 무엇을 연구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베라가 현재의 방식으로는 구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싫어한다는 것은 안다.

람파스 역시 같은 것을 싫어한다.

둘의 방법이 다를 뿐이다.

베라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려고 한다.

람파스는 오늘 빠져나가는 사람을 하나라도 더 붙잡으려고 한다.

그리고 아직 서로 말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베라에게는 잠긴 작업실이 있다.

람파스에게는 자신이 언젠가 언니를 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둘 다 평소에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

람파스는 자신이 정령이 된 것을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기적이라고 하기에는 아버지도 언니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만 살아난 것을 운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급 정령들이 자신을 불쌍히 여겼고, 좋아했고, 그래서 붙잡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 단순함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종종 람파스에게 묻는다.

“다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

람파스는 조금 생각한다.

“잘 모르겠어요.”

인간이었을 때 좋아했던 것이 많다.

심장이 뛰는 감각.

추운 날 이불 속에 들어가는 느낌.

언니와 한 컵의 차를 나눠 마시던 일.

지금은 다시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정령이 되어 얻은 것도 있다.

작은 정령들의 목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다.

누군가 얼어 죽을 만한 추위 속에도 들어갈 수 있다.

밤새 구조 작업을 해도 추위 때문에 쓰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한 번 끝났던 삶의 뒤를 살아보고 있다.

람파스는 어느 쪽을 더 좋은 삶이라고 비교하지 않는다.

“인간일 때도 저였고, 지금도 저니까요.”

그 정도로 정리한다.

그러다 상대가 철학적인 질문을 더 하면 곧 지친다.

“그건 에리두 원장님한테 물어보면 안 돼요?”

라고 떠넘기는 경우도 있다.

람파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으로 분류되는가보다 오늘 누구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다.

---

다만 기억에 대해서만은 농담으로 넘기지 못한다.

가끔 언니의 목소리가 예전보다 흐리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정확히 어떤 높이였는지.

웃을 때 숨을 먼저 들이마셨는지, 내쉬었는지.

어느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세부가 생길 때마다 람파스는 잠깐 무서워진다.

그래서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베라에게도 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했다.

작은 정령들에게도 수없이 했다.

“우리 언니가요.”

라는 말로 시작한다.

언니가 요리를 못했다는 이야기.

잠버릇이 나빴다는 이야기.

돈이 없는데도 람파스 생일에는 작은 빵을 사왔다는 이야기.

술집에서 일했다는 이야기.

멍을 숨겼다는 이야기.

그리고 죽었다는 이야기.

좋은 기억만 고르지 않는다.

나쁜 기억만 남기지도 않는다.

전부 언니였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왜 그렇게 아픈 일을 계속 말하느냐고 묻는다.

람파스는 대답한다.

“말하면 한 번 더 기억하잖아요.”

그리고 자신의 토끼 귀를 가리킨다.

“이것도 같은 거예요.”

정령에게 옷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하루마다 다른 모양을 만들어도 된다.

그런데 람파스는 바꾸지 않는다.

하늘빛 바니걸 복장.

얼음으로 된 토끼 귀.

언니의 것과 완전히 같지도 않은 옷.

바로 그렇기 때문에 람파스의 옷이다.

언니를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언니를 잊지 않겠다는 자신의 고집이 형태를 얻은 것이다.

---

언젠가 베라가 그 옷을 오래 바라본 적이 있었다.

평소처럼 놀리려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거 불편하지 않냐?”

“안 불편해요.”

“매일 똑같은 거 만들기도 귀찮을 텐데.”

람파스는 웃었다.

“이제 생각 안 해도 만들어져요.”

“습관이네.”

“네.”

잠깐 조용해졌다.

람파스가 먼저 말했다.

“언니가 입던 옷이었어요.”

베라는 더 묻지 않았다.

람파스가 스스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린 자신은 그 옷이 예쁘다고 생각했다고.

언니가 왜 그 일을 해야 했는지 몰랐다고.

멍도 몰랐다고.

나중에서야 알았다고.

그리고 자신이 정령이라 언젠가 많은 것을 잊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그래서 그냥 계속 입으려고요.”

베라가 물었다.

“옷 입는다고 안 잊어?”

람파스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죠.”

“그럼?”

람파스는 토끼 귀를 손가락으로 세웠다.

“잊기 싫다고 매일 한 번씩 고집부리는 거예요.”

베라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공구를 다시 집었다.

“그럼 튼튼하게 만들어.”

람파스가 웃었다.

“얼음인데요?”

“깨지면 다시 만들든가.”

그게 베라다운 위로였다.

람파스는 마음에 들었다.

---

현재의 람파스는 프라그모 자치구에서 꽤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다.

한겨울에 바니걸 옷을 입고 골목을 뛰어다니는 얼음 정령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아이들은 그녀를 보면 작은 정령들이 따라오는지부터 확인한다.

노인들은 들어오라며 쓸데없이 따뜻한 차를 내준다.

람파스는 자기가 안 추운 것을 알면서도 화롯가에 앉는다.

“왜 거기 앉아 있어?”

라는 말을 들으면 대답한다.

“따뜻한 데는 기분 좋잖아요.”

몸은 더 이상 따뜻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은 필요로 한다.

따뜻한 방.

사람이 있는 식탁.

누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불빛.

람파스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집에서 그것을 보면 좋아한다.

자신이 잃은 것을 빼앗고 싶어서가 아니다.

누군가는 아직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 때문이다.

잔불공동관리회에서 일하는 이유도 결국 거기에 있다.

난방은 단순히 온도를 올리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아이가 내일 아침 눈을 뜨게 하는 일이다.

가족이 식탁에 한 번 더 앉게 하는 일이다.

람파스에게 그것은 숫자로 표시되는 연료량보다 훨씬 구체적인 의미를 가진다.

---

그렇다고 람파스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사람을 믿었다가 속기도 한다.

거짓 사정을 말해 배급을 더 받아가려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 번은 그것 때문에 정말 필요한 집의 공급이 줄어든 적도 있었다.

베라는 크게 화를 냈다.

람파스도 변명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미안하면 끝이야?”

“아뇨.”

“그럼 다음에는?”

람파스는 한참 생각했다.

“확인할게요.”

그 뒤로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과 모든 말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구분하려고 한다.

의심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의심부터 시작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거짓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먼저 말을 듣는다.

언니가 자신에게 거짓말했던 것도 떠올린다.

멍이 든 이유를 숨겼다.

괜찮다고 말했다.

그 거짓말은 람파스를 해치려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람파스는 거짓말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왜 숨겼는지 묻는다.

무엇이 두려웠는지 묻는다.

그 과정 때문에 일이 느려질 때도 있다.

베라는 답답해한다.

그럼에도 람파스를 배급과 구호에서 빼지 않는다.

누군가는 숫자 뒤에 있는 이유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

람파스는 아직 자신의 신념을 거창한 문장으로 부르지 않는다.

누군가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길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저 자신이 설원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풍경을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날.

그런데 눈이 너무 예뻤던 날.

자신이 그것을 보며 이상하다고 느꼈던 순간.

그리고 말한다.

“세상이 이렇게 예쁜데, 사는 것까지 꼭 아파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 말은 모든 고통을 없애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람파스도 이제는 안다.

연료는 부족하다.

사람은 서로를 해친다.

좋은 사람도 잘못된 선택을 한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기다려달라고 해야 할 때도 있다.

세상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런데 람파스는 그 사실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는 않는다.

복잡하면 더 많이 물어보면 된다.

부족하면 더 잘 나누면 된다.

한 번 실패하면 다음에는 확인하면 된다.

그리고 혼자 버티는 사람이 보이면 먼저 문을 두드리면 된다.

그 정도의 고집은 가져도 된다고 믿는다.

---

가끔 아주 늦은 밤, 일이 끝난 뒤 람파스는 혼자 설원으로 나간다.

자신이 죽었던 정확한 장소는 이제 찾을 수 없다.

눈은 계속 쌓이고 녹고 다시 얼었다.

바람은 흔적을 지웠다.

작은 냉기 정령들만 주변을 따라온다.

람파스는 눈 위에 앉아 하늘을 본다.

춥지 않다.

숨도 하얗게 나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아직도 가끔 신기하다.

“나 아직 기억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정령들도 안다.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한다.

언니의 얼굴을 기억한다.

집의 창문을 기억한다.

토끼 귀를 벗겨 탁자 위에 올려놓던 손을 기억한다.

그날 술집 바닥에 떨어져 있던 토끼 귀도 기억한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서로 섞여 있다.

람파스는 둘 중 하나를 지우지 않는다.

언젠가 일부는 흐려질 것이다.

어쩌면 정말 많은 것을 잊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알고 있다.

그래서 다음 날에도 같은 옷을 입는다.

같은 이름을 쓴다.

언니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의 집 문을 두드린다.

오늘 추운 사람이 없는지 묻는다.

자신을 붙잡아준 작은 정령들처럼, 거창한 이유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돕는다.

람파스는 한 번 죽었다.

그렇다고 두 번째 삶을 죽은 사람의 기억만 지키는 데 쓰고 싶지는 않다.

언니를 잊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사람을 좋아하고 싶다.

과거를 붙잡으면서도 오늘을 즐기고 싶다.

그 둘이 서로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은 차갑지만 아름답다.

자신도 이제 차가운 얼음으로 이루어졌지만 웃을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베라가 일을 너무 오래 하면 작업실 문을 두드린다.

“베라!”

안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왜.”

“퇴근해요!”

“먼저 가.”

“싫어요!”

“왜!”

람파스는 웃는다.

“혼자 남아 있으면 안 되니까요!”

잠시 뒤 문이 열린다.

베라는 투덜거리며 고글을 머리 위로 밀어 올린다.

람파스는 먼저 골목으로 뛰어나간다.

작은 눈송이들이 그 뒤를 따라간다.

프라그모의 밤은 여전히 춥다.

잔불공동관리회가 관리할 수 있는 불은 여전히 한정되어 있다.

모두를 따뜻하게 할 수 없는 날도 있다.

그래도 람파스는 다음 집의 문을 두드린다.

한 번 더 확인한다.

한 사람이라도 혼자 견디고 있지 않도록.

세상이 아름답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모욕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언젠가 자신의 기억이 흐려지는 날이 오더라도, 지금의 자신이 무엇을 위해 움직였는지만큼은 남을 수 있도록.

그리고 오늘도 머리 위의 얼음 토끼 귀를 바로 세운다.

언니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자신이 다시 얻은 삶을 아프기만 한 것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Roster

초월왕국 리벨리온

6명
칠흑왕좌의회1명
GUR
구라방 에드밀 몬테스
리벨리온칠흑왕좌의회-의회장
“가능하다는 사실은 실행할 이유가 아니며, 금지는 포기할 이유도 아니오.”
🩸 HP120
💪 공격력5
🧙 마법력85
✨ 신비력20
🛡️ 방어력35
🔗 항마력70
😖 신비저항89
🏃 회피력50
과거 보기
구라방 에드밀 몬테스가 살아 있던 시절,
그는 위험한 마법을 싫어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위험한 마법과 무책임한 마법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은 위험하다.

칼도 위험하다.

치료술조차 잘못 쓰면 사람을 죽인다.

그렇다면 어떤 기술이 위험하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을 금지할 수는 없다.

젊은 구라방은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영역에 대해서만 예외가 있었다.

죽음.

시체.

영혼.

그리고 네크로맨시.

그 시절의 구라방에게 죽음마법은 다른 위험과 달랐다.

칼은 살아 있는 사람이 쥔다.

불은 끌 수 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영혼과 육신을 건드리는 연구는 한 번 잘못되면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죽은 사람은 두 번째 동의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죽음마법만큼은 엄격한 금지와 처벌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훗날 그 자신이 백골의 몸으로 왕좌에 앉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생전의 구라방은 법률가였다.

마법사이기도 했다.

전투를 위한 화려한 마법보다 마법의 구조를 해체하고 분석하는 데 뛰어났다.

한 주문이 어디에서 힘을 끌어왔는지.

어느 부분에서 비용이 발생하는지.

실패하면 피해가 어디로 전이되는지.

그런 것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법도 비슷했다.

법은 선언문이 아니었다.

누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떤 조건에서 허용되는가.

실패하면 누가 책임지는가.

그 구조를 만드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부터 말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 회의에서 말했다.

“이 연구는 너무 위험합니다.”

구라방이 물었다.

“위험의 종류를 구분하십시오.”

상대가 멈칫했다.

“폭발 위험입니까.”

“정신오염입니까.”

“맥류 손상입니까.”

“혹은 단지 불쾌하다는 뜻입니까.”

그는 감정적인 표현을 싫어하지 않았다.

다만 감정과 근거를 같은 말로 쓰는 것을 싫어했다.


생전의 구라방은 인간이었다.

살아 있는 인간답게 두려움도 있었다.

죽는 것도 무서웠다.

가족을 잃는 것도.

병드는 것도.

그리고 자신의 판단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 것은 특히 싫어했다.

그래서 절차를 믿었다.

한 사람의 감정과 직감은 흔들릴 수 있다.

법은 적어도 같은 상황에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증거가 있는가.

피해가 예상되는가.

당사자는 동의했는가.

다른 방법이 있는가.

책임자는 누구인가.

그 질문을 반복하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충동보다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오십이 넘을 때까지 그 믿음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한 네크로맨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네크로맨서의 이름은 세브란이었다.

죽음 원소와 기억의 잔향을 이용해 말기 환자의 생체 기능을 임시로 유지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완전히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연구는 아니었다.

죽음으로 기울어가는 맥류를 붙잡아,
의식과 신체가 무너지기 전 약간의 시간을 더 만드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위험성이었다.

죽음 원소를 살아 있는 신체에 정밀하게 연결해야 했다.

실패하면 환자의 죽음이 빨라질 수 있었다.

정신에 잔향이 남을 수도 있었다.

심하면 주변의 생명맥류까지 교란할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법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죽음 원소를 직접 결속하는 의료행위를 금지하고 있었다.

세브란은 그 법을 어겼다.

구라방은 사건 담당자로 배정되었다.


처음 기록을 읽었을 때 구라방의 결론은 빨랐다.

불법이다.

위험하다.

중단시켜야 한다.

그는 연구실 압수수색을 승인했다.

연구자료를 봉인했다.

세브란을 체포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었다.

환자들의 진술이었다.

강제로 실험당했다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제가 부탁했습니다.”

한 환자가 말했다.

구라방은 물었다.

“위험을 설명받았습니까.”

“받았습니다.”

“사망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예.”

“치료효과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것도.”

“예.”

“다른 치료법은.”

“없었습니다.”

구라방은 기록을 내려다봤다.

환자는 웃었다.

“그러니까 받은 겁니다.”


다른 환자도 비슷했다.

기존 치료법으로는 몇 주 이상 살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은 사람이었다.

세브란의 시술을 받고 몇 달을 더 살았다.

그 기간 동안 가족과 함께 지냈다.

재산을 정리했다.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죽기 전 스스로 하고 싶었던 일을 했다.

구라방은 물었다.

“그 기간을 위해 사망시점이 오히려 앞당겨질 위험까지 감수했다는 말입니까.”

환자는 대답했다.

“예.”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까.”

“제 선택이 합리적인지 판사님이 정합니까?”

구라방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당시 그의 직함은 정확히 판사는 아니었지만,
환자에게는 비슷하게 보였을 것이다.

구라방은 질문을 바꿨다.

“후회하십니까.”

환자가 말했다.

“아니요.”


세브란 역시 변명하지 않았다.

“법을 어겼습니까.”

구라방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금지된 죽음마법을 환자에게 사용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실패 가능성을 알고 있었습니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했습니까.”

세브란은 말했다.

“환자들이 원했으니까요.”

구라방의 표정이 굳었다.

“원한다고 모든 것을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세브란은 계속 말했다.

“그래서 설명했습니다.”

“기록했습니다.”

“가족이 아니라 환자 본인에게 물었습니다.”

“중간에 철회할 수 있게 했습니다.”

“실패 사례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구라방은 그 서류들을 이미 봤다.

실제로 있었다.

허술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시 많은 합법적인 의료시술보다 동의기록이 자세했다.

그 점이 구라방을 더 불편하게 했다.


재판에서 핵심은 환자들의 동의가 아니었다.

당시 법은 해당 연구 자체를 금지하고 있었다.

죽음 원소를 살아 있는 자에게 의료 목적으로 결속하는 행위.

중대한 위법이었다.

피해가 없었다고 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실제로 실패한 환자도 있었다.

몇 명은 시술 도중 사망했다.

한 사례에서는 신체에 남은 죽음 원소가 폭주해 주변 치료사들까지 다쳤다.

구라방은 모든 자료를 검토했다.

좋은 결과만 볼 수는 없었다.

환자들이 동의했다는 사실도 봤다.

실패했다는 사실도 봤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법을 봤다.

그 법 아래에서 가능한 판결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구라방은 세브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판결문은 길었다.

세브란이 환자에게 위험을 설명했다는 사실도 기록했다.

강제실험의 증거가 없다는 점도 적었다.

일부 환자가 실제로 생존기간을 연장했다는 사실도 남겼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허용되지 않은 죽음마법을 살아 있는 자에게 사용했다.

다수의 생명과 주변 맥류에 중대한 위험을 발생시켰다.

개인의 동의는 사회 전체에 전가되는 위험까지 승인할 권한을 주지 않는다.

당시의 구라방은 이 문장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환자가 자기 죽음을 감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주변 사람이 함께 위험해지는 것까지 대신 동의할 수는 없다.

논리는 지금의 구라방이 보아도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판결이 완전히 잘못된 논리였다면 버리기 쉬웠을 것이다.

문제는 옳은 부분이 많은 결정이 더 큰 실패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처형 전날 구라방은 세브란을 만났다.

세브란이 요청한 면담이었다.

둘 사이에는 쇠창살이 있었다.

세브란이 말했다.

“판결을 번복해달라고 부른 건 아닙니다.”

구라방은 대답했다.

“그럴 권한도 이미 제한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세브란은 잠시 침묵했다.

“연구자료는 어떻게 됩니까?”

“금지술 관련 자료로 봉인됩니다.”

“폐기됩니까?”

“일부는 폐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브란의 얼굴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자기 목숨보다 그 대답에서 더 크게 반응했다.

“환자 기록은 남겨주십시오.”

“법정기록은 남습니다.”

“아니요.”

그가 고개를 저었다.

“실패한 방법까지.”

“어떤 용량에서 죽었는지.”

“어떤 결속이 불안정했는지.”

“다음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죽이지 않게.”

구라방은 대답했다.

“금지된 연구입니다.”

세브란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다음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죽이겠군요.”


구라방은 그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려고 했다.

법에는 이유가 있었다.

위험한 지식을 남기면 다른 사람이 재현할 수 있었다.

자료 폐기는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세브란은 예정대로 처형되었다.

연구실은 폐쇄되었다.

자료 대부분이 봉인되었다.

일부 위험한 술식은 폐기되었다.

관련 연구자들은 해산했다.

환자들은 기존 치료체계로 돌아갔다.

구라방은 사건을 끝난 것으로 처리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그다음 해 같은 질환으로 죽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 자체는 세브란의 처형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었다.

원래 존재하던 병이었다.

기존 치료법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세브란의 연구에서 이미 발견했던 단서 몇 개까지 함께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한 치료사가 구라방을 찾아왔다.

“그 연구자료를 열람하게 해주십시오.”

“금지되어 있습니다.”

“죽음마법을 그대로 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부분을 사용하려는 겁니까.”

“환자의 맥류가 사망 직전에 어떻게 무너지는지에 관한 자료입니다.”

구라방은 관련 기록을 찾았다.

없었다.

정확히는 요약은 남아 있었다.

실제 수치와 실험기록 일부는 폐기된 뒤였다.

세브란이 어떤 시행착오를 거쳤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연구해야 했다.

처음부터.


몇 년 동안 환자들이 죽었다.

누구 하나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었다.

질병이 죽였다.

치료법이 없어서 죽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라방은 점점 숫자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세브란의 연구가 살아 있었다면 몇 명을 더 살릴 수 있었는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연구가 실패했을 수도 있었다.

더 큰 사고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연구 자체를 없애면서 실패에서 배울 가능성까지 없앴다.

구라방이 내린 판결은 한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었다.

그 판결을 근거로 지식의 계보도 끊었다.

그 책임을 어디까지 자기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그 질문이 생겼다.


구라방은 법을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판결이 잘못되었는지 확인하려 했다.

법 적용에는 큰 오류가 없었다.

당시 법대로라면 세브란은 유죄였다.

절차도 지켰다.

증거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더 컸다.

사람이 법을 잘못 적용한 것이 아니라,
법이 위험을 다루는 방법 자체가 지나치게 단순했던 것이다.

위험하다.

그러므로 금지한다.

금지했다.

그러므로 연구하지 않는다.

연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패도 없어진다.

실패는 줄었다.

가능성도 함께 사라졌다.

구라방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금지가 위험을 없앤 것이 아니라,
위험을 다른 쪽으로 옮겼을 수도 있다고.


그가 특히 괴로워했던 것은 세브란의 환자들이었다.

몇몇은 아직 살아 있었다.

한 사람을 다시 만났다.

예전에 법정에서 증언했던 환자였다.

병은 악화되어 있었다.

구라방이 말했다.

“당시 연구가 계속되었다면 지금의 결과가 더 나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환자는 웃었다.

“여전히 그렇게 말하는군요.”

“단정할 수 없는 것은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알아요.”

환자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런데 판사님.”

“말씀하십시오.”

“우리가 선택할 가능성까지 없앤 건 맞잖아요.”

구라방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문장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자신은 위험한 선택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한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그 선택을 할 권리 자체를 없앴다.


그렇다고 구라방이 반대편 극단으로 넘어간 것은 아니다.

모든 연구를 허용하자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동의했다고 무엇이든 해도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세브란의 연구에도 실제 피해자가 있었다.

죽은 환자도 있었다.

주변 치료사가 다친 사고도 있었다.

그것을 낭만적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구라방이 찾기 시작한 질문은 달랐다.

금지와 방임 사이에 다른 구조를 만들 수 있는가.

위험을 숨기지 않는다.

당사자의 동의를 받는다.

동의하지 않은 제3자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한다.

실패를 기록한다.

실패 비용을 연구자가 떠넘기지 못하게 한다.

중단 기준을 정한다.

사고가 나면 책임자를 특정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하면 위험한 연구도 통제하면서 남겨둘 수 있는가.

그 질문이 구라방을 서서히 리벨리온으로 이끌었다.


당시의 리벨리온은 다른 나라가 금지하거나 두려워하는 연구자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언데드.

마족.

흡혈귀.

인간 마법사.

호문클루스 연구자.

다른 나라에서는 연구대상 자체가 금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구라방은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불편했다.

길을 걷는 언데드를 봤다.

백골이 장부를 들고 있었다.

흡혈귀 연구자가 낮을 피해 천막 아래에서 동료와 논쟁하고 있었다.

마족과 인간이 같은 실험실에서 계약서를 검토했다.

그에게 익숙한 질서와 달랐다.

하지만 무질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서류가 많았다.

위험 연구 승인서.

실험대상자 동의서.

주변 피해보증.

사고 발생 시 중단절차.

연구자 책임범위.

구라방은 처음으로 조금 흥미를 느꼈다.


그가 리벨리온에서 가장 먼저 본 실험 중 하나는 저주받은 마법사의 치료였다.

기존 방식으로는 저주를 제거할 수 없었다.

연구자는 죽음 원소를 사용해 저주가 붙잡고 있는 생체 맥류 일부를 일시적으로 끊겠다고 했다.

구라방은 바로 물었다.

“실패 가능성은.”

“사망 18퍼센트로 추정.”

“추정 근거.”

자료가 나왔다.

“대체 치료.”

“없음.”

“치료하지 않을 경우.”

“석 달 내 사망 가능성 90퍼센트 이상.”

“환자는.”

환자가 직접 말했다.

“하겠습니다.”

구라방이 물었다.

“위험을 이해했습니까.”

“예.”

“거부해도 현재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까.”

“예.”

“연구자에게 빚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가족이 강요했습니까.”

“아닙니다.”

구라방은 그제야 승인서에 서명했다.

환자는 살아남았다.

그 결과가 구라방의 생각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성공 한 건은 체계의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대신 절차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구라방은 리벨리온에 남았다.

처음에는 법률 자문이었다.

그다음에는 연구윤리 심사에 참여했다.

점점 더 많은 규정을 만들었다.

리벨리온의 연구자들은 그를 싫어하기도 했다.

“몬테스 씨가 온 뒤 서류가 세 배가 됐습니다.”

구라방이 말했다.

“사망자보다 종이가 늘어나는 편이 낫습니다.”

“연구가 느려집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발전이 늦어집니다.”

“그 역시 비용입니다.”

연구자가 답답해했다.

“그러면 금지와 뭐가 다릅니까?”

구라방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금지는 시도할 수 없게 합니다.”

서류를 한 장 넘겼다.

“본 절차는 책임지고 시도하게 합니다.”

그 차이가 구라방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그는 위험연구를 허용할 때 세 가지를 특히 집요하게 봤다.

동의.

외부 피해.

실패 책임.

연구대상자가 위험을 모르면 안 된다.

연구대상자가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이 자기 몸의 위험에 동의했다고 주변 사람까지 위험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연구가 실패했을 때 ‘예상하지 못했다’는 한마디로 책임자가 사라져서도 안 된다.

그래서 연구계획에는 항상 실패했을 때의 절차가 들어가야 했다.

누가 중단시키는가.

누가 구조하는가.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가.

누가 피해를 배상하는가.

어떤 기록을 남기는가.

구라방은 성공계획보다 실패계획을 먼저 읽었다.

그에게 좋은 연구란 성공할 연구가 아니었다.

실패해도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해진 연구였다.


그렇게 수년을 보낸 뒤 구라방 자신의 몸에 문제가 생겼다.

나이가 쉰을 넘었다.

병도 있었다.

처음에는 치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태가 악화되었다.

당시 의학으로는 오래 살기 어렵다는 진단이 나왔다.

구라방은 그 결과를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생전의 그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환자의 동의서를 읽었다.

수많은 사람에게 위험을 이해했느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자신에게 같은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리벨리온에는 선택지가 하나 있었다.

자발적 언데드 전환.

죽은 뒤에도 기억과 자아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고위험 의식이었다.

성공한다고 예전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생명은 끝난다.

신체도 달라진다.

감정도 달라질 수 있다.

실패하면 단순한 죽음보다 더 나쁜 결과가 생길 가능성도 있었다.

구라방은 자료를 요청했다.


그가 자신의 언데드 전환을 심사하는 장면은 리벨리온 연구자들 사이에서 오래 회자되었다.

연구자가 말했다.

“성공률은 약 71퍼센트입니다.”

구라방이 물었다.

“자아 연속성이 충분히 유지되는 비율.”

“그중 89퍼센트입니다.”

“감정 손실.”

“개체마다 다릅니다.”

“정신공격 저항.”

“대체로 크게 상승합니다.”

“실패 시.”

“완전 소멸, 기억 파편화, 불완전한 언데드화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라방은 전부 적었다.

그리고 물었다.

“중단 가능 시점.”

“의식 시작 전까지입니다.”

“의식 중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시작을 동의의 최종시점으로 기록하십시오.”

연구자가 말했다.

“본인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더 정확해야 합니다.”


한 동료가 물었다.

“정말 하시겠습니까?”

구라방은 대답했다.

“그 질문의 의미를 구분하십시오.”

“죽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는 뜻이라면 두렵습니다.”

“연구 때문에 망설이느냐는 뜻이라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 하시는 겁니까?”

구라방은 잠시 생각했다.

“제가 만든 규칙이 실제로 당사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

“아닙니다.”

“살고 싶습니다.”

아직 인간이었던 구라방은 그렇게 말했다.

그 감정은 분명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세브란 사건 이후 다시 세우기 시작한 법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욕망이 자기 동의를 왜곡하는지도 함께 기록했다.

‘당사자는 생존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으며, 이것이 위험을 과소평가하게 할 가능성이 있음.’

자기 서류에 직접 그렇게 썼다.

훗날 언데드가 된 그가 가장 자주 잊게 되는 문장이었다.


의식은 성공했다.

구라방의 생명은 끝났다.

심장은 멈췄다.

살은 사라졌다.

마지막에는 완전한 백골만 남았다.

푸른 안광이 빈 안와 안에서 켜졌다.

그가 처음 다시 움직였을 때 연구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라방은 자기 손을 보았다.

피부가 없었다.

혈관도 없었다.

숨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한 것을 느꼈다.

정확히는 느끼지 못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져 있었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었을 때처럼 가슴이 조여오지 않았다.

동료가 물었다.

“구라방.”

그가 고개를 들었다.

“기억하십니까?”

구라방은 자기 이름을 말했다.

생년.

가족.

세브란의 사건.

자신이 처형판결을 내렸다는 사실.

전부 기억했다.

“기억합니다.”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건조했다.


며칠 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변화를 발견했다.

감정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희미해졌다.

기쁨도 있었다.

불쾌함도 있었다.

분노도 생겼다.

하지만 어느 선을 넘으면 마치 스스로 눌리는 것처럼 격해지지 않았다.

정신을 흔드는 마법도 거의 통하지 않았다.

공포를 증폭시키는 술식에 노출되어도 판단력이 잘 흐려지지 않았다.

살아 있는 존재가 생존을 위해 보이는 본능적인 공포도 크게 줄었다.

대신 다른 것이 선명해졌다.

책임.

절차.

구조.

구라방은 그것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언데드는 생명을 유지하려는 본능 대신 각자 다른 개념을 자기 존재의 중심에 두는 경우가 있었다.

구라방에게 남은 중심은 책임이었다.

누가 결정했는가.

누가 위험을 알았는가.

누가 동의했는가.

누가 실패를 부담하는가.

그 질문이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어쩌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는 그 성질만 더 또렷하게 남은 것인지도 몰랐다.


언데드가 된 구라방은 다시 자기 전환 기록을 검토했다.

생전의 자신이 남긴 문장이 보였다.

‘살고 싶다.’

그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이해는 했다.

기억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절박함을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었다.

‘죽기 싫다’는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은 하지만,
지금 자신을 압박하지 않았다.

그는 그 차이를 기록했다.

‘전환 후 당사자는 전환 전 생존공포의 강도를 정서적으로 재현하기 어려움.’

당시에는 단순한 관찰이라고 생각했다.

훗날 그것이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이 될 것이라고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언데드가 된 뒤 구라방의 영향력은 빠르게 커졌다.

그는 죽음마법을 직접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이론으로만 연구하던 때와 달랐다.

죽음 원소가 어디에 걸리는지 느낄 수 있었다.

영혼구속술의 위험도 직접 알게 되었다.

뼈창을 만들 때 주변의 죽음 맥류가 어떻게 끌려오는지 이해했다.

다른 마법사가 짜놓은 술식은 구조를 읽어 해체했다.

전투에서도 그의 방식은 정확했다.

필요한 만큼만 사용했다.

뼈창 하나면 충분한 곳에 열 개를 만들지 않았다.

마법 하나를 해체할 수 있는데 주변 전체를 폭발시키지 않았다.

영혼을 구속해야 한다면 대상과 범위를 구분했다.

그에게 전투도 연구윤리와 비슷했다.

가능한 힘의 크기보다 필요한 힘의 크기를 먼저 봤다.


리벨리온의 연구문화에도 구라방의 흔적이 깊어졌다.

그는 전면금지 대신 등급을 만들었다.

개인에게만 위험한 연구.

주변인에게 위험이 확장될 수 있는 연구.

맥류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연구.

자아나 영혼의 지속성에 영향을 주는 연구.

각 등급마다 필요한 동의와 감독이 달랐다.

고위험 연구는 제9문연구회에서도 별도 승인을 받게 했다.

연구자가 자기 자신에게 실험하는 경우에도 면제하지 않았다.

누군가 말했다.

“제 몸입니다.”

구라방이 대답했다.

“그 사실은 귀하가 자신의 위험에 동의할 권리를 준다는 뜻이지, 실험실 폭발로 이웃까지 죽일 권리를 준다는 뜻은 아니오.”

또 다른 연구자가 말했다.

“아무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면 연구를 포기해야 합니까?”

구라방은 말했다.

“현재 조건에서는 그렇소.”

“그럼 금지와 같지 않습니까?”

“아니오.”

푸른 안광이 상대를 향했다.

“조건을 개선하면 다시 가능하오.”

그리고 그가 자주 하는 말을 덧붙였다.

“가능하다는 사실은 실행할 이유가 아니며, 금지는 포기할 이유도 아니오.”


그 말은 리벨리온의 연구자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할 수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위험하다고 영원히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조건을 바꾼다.

위험을 줄인다.

격리한다.

동의를 얻는다.

실패에 대비한다.

그 뒤 다시 묻는다.

실행할 이유가 충분한가.

구라방은 세브란 사건 이후 평생과 사후를 들여 그 구조를 만들었다.

한 연구자의 목을 베고 지식까지 없애버렸던 사람이,
이제는 연구를 없애기 전에 어떻게 책임지게 만들 것인지부터 고민했다.


그의 법은 리벨리온을 바꾸었다.

위험한 연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고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나라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을 연구가 계속 이루어졌다.

언데드의 자아 지속 연구.

악마와의 제한적 접촉 연구.

죽음 원소를 이용한 저주 해체.

호문클루스의 자율의식 연구.

흡혈귀의 생존조건과 혈액대체 연구.

모두 위험했다.

구라방은 그것을 숨기지 않았다.

리벨리온이 안전한 연구만 하는 나라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대신 말했다.

위험이 있으면 기록한다.

실패하면 책임자를 숨기지 않는다.

피해자가 나오면 연구의 공적을 이유로 피해를 축소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패했다고 모든 연구를 태워버리지도 않는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남긴다.

세브란의 마지막 부탁을 백 년이 지나서야 국가의 원칙으로 만든 셈이었다.


구라방이 칠흑왕좌의회에 들어간 뒤에는 연구윤리만 다루지 않게 되었다.

도시.

세금.

외교.

국방.

언데드와 생명종 사이의 법적 차이.

악마 계약.

재산권.

죽은 뒤에도 자아가 지속되는 존재의 상속.

새로운 문제가 끝없이 생겼다.

특히 언데드의 법적 지위를 정하는 문제는 복잡했다.

생전의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

재산을 그대로 가질 수 있는가.

배우자와의 혼인은 지속되는가.

생전의 빚도 이어지는가.

구라방은 자기 경험 때문에 더 조심했다.

“기억이 이어진다는 사실만으로 동일인이라 단정할 수는 없소.”

누군가 물었다.

“국왕 폐하께서는 본인을 생전의 구라방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구라방이 대답했다.

“법적 질문과 개인적 확신을 구분하십시오.”

그는 자기 사례를 법의 기준으로 만들지 않으려 했다.


시간이 흘러 구라방은 칠흑왕좌의회의 의회장이 되었고,
마침내 리벨리온의 국왕이 되었다.

그의 왕권은 다른 나라의 왕과 조금 달랐다.

리벨리온에서 왕이라는 이름은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자리를 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종적으로 책임자가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한 자리라는 해석을 구라방 자신이 강하게 밀었다.

회의가 실패했을 때 누구도 결정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게 한다.

국가가 승인한 연구가 재난을 일으켰을 때 연구자 한 명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지 못하게 한다.

의회가 승인했다면 의회도 책임진다.

왕이 최종 승인했다면 왕의 이름도 남는다.

구라방은 왕관 대신 높은 깃의 검은 마법사복을 입는 날이 많았다.

완전한 백골의 몸에 장신구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칠흑왕좌의회 문장만 있으면 충분했다.

누군가 화려한 왕관을 제작하자고 제안했을 때는 물었다.

“기능이 있소?”

“왕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이미 왕좌가 있지 않소.”

그 제안은 한동안 보류되었다.


국왕이 된 뒤에도 그의 태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소리쳐도 흔들리지 않았다.

협박도 잘 통하지 않았다.

정신계 마법으로 압박하려는 시도도 거의 의미가 없었다.

언데드인 그의 정신은 살아 있는 존재와 다르게 움직였다.

분노가 생겨도 격해지기 전에 억제되었다.

공포를 느껴도 생존본능이 판단을 집어삼키지 않았다.

외교 협상에서는 강점이었다.

상대가 고함을 질러도 그는 문서를 본다.

“폐하께서는 지금 우리 국민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십니까?”

구라방이 대답한다.

“분노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해하오.”

“그 정도란 말입니까?”

“그 분노가 요구하는 조치가 무엇인지 말씀하십시오.”

상대는 더 화가 난다.

구라방은 그대로다.

그는 감정에 굴복하지 않는 왕이었다.

문제는 때때로 감정이 정보를 담고 있다는 사실까지 약하게 보는 왕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 약점은 처음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구라방의 동의제도는 이전보다 훨씬 정교했다.

위험을 고지한다.

문서로 남긴다.

철회권을 준다.

다른 선택지를 설명한다.

연구자의 직접적인 강요를 금지한다.

보상을 명시한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인간 노동자가 고위험 연구 참여 중 크게 다쳤다.

실험은 승인되어 있었다.

동의서도 완벽했다.

설명기록도 있었다.

당사자가 직접 서명했다.

연구자가 거짓말한 흔적도 없었다.

구라방은 사고 심사를 시작했다.

처음 결론은 단순했다.

예측된 위험이 현실화된 사고.

절차상 중대한 위반 없음.

연구자는 계약된 보상과 치료비를 부담해야 함.

그 정도였다.

그때 피해자의 배우자가 회의장에 찾아왔다.


여자는 말했다.

“동의한 게 아닙니다.”

구라방이 문서를 펼쳤다.

“서명이 존재합니다.”

“서명한 건 압니다.”

“위험설명 기록도 있습니다.”

“그것도 들었습니다.”

구라방의 푸른 안광이 조금 움직였다.

“그러면 무엇을 의미하시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시오.”

여자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 일을 안 하면 우리 가족이 굶었습니다.”

구라방은 침묵했다.

실험 참여자는 가난했다.

빚이 있었다.

일반 노동보다 고위험 연구의 보상이 훨씬 높았다.

연구자가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거절한다고 처벌받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일자리가 법적으로 막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장 가족의 식비를 마련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여자가 말했다.

“선택지가 있었습니까?”

구라방은 대답하려 했다.

법적으로는 있었다.

그 문장이 목구멍 없는 백골의 몸 어딘가에서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구라방은 관련 자료를 다시 봤다.

동의서에는 문제가 없었다.

위험도 명확했다.

보상도 적혀 있었다.

철회도 가능했다.

형식만 보면 자신이 평생 만들고 싶었던 제도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세브란의 환자들이 떠올랐다.

그들도 절박했다.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다른 치료법이 없었다.

구라방은 당시 그들의 동의를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보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판단을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자신은 같은 질문을 충분히 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구라방에게 죽음의 공포가 너무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생전에 쓴 전환동의서를 다시 찾았다.

거기에는 자기 손으로 적은 문장이 있었다.

‘당사자는 생존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으며, 이것이 위험을 과소평가하게 할 가능성이 있음.’

구라방은 그 문장을 아주 오래 바라봤다.


언데드가 된 그는 공포를 기억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공포 속에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기는 어려워졌다.

배가 고픈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먹지 않아도 된다.

추위 때문에 굶주림이 더 심해지는 감각도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에서 이번 계약을 거절하면 내일 무엇을 먹을지 모르는 압박도 직접 느끼지 않는다.

죽음이 눈앞에 왔을 때 ‘무엇이든 하겠다’고 생각하는 생명의 본능도 희미해졌다.

그에게는 그것들이 점점 조건표의 한 항목처럼 보이고 있었다.

빈곤.

공포.

질병.

부양가족.

채무.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에게 그것들은 단순한 항목이 아니었다.

판단 전체를 누르는 무게였다.

구라방은 그 차이를 인정해야 했다.


칠흑왕좌의회에서 이 문제를 놓고 긴 논쟁이 벌어졌다.

어떤 의원은 말했다.

“가난한 사람의 동의를 무효라고 보기 시작하면 가난한 사람에게서 선택권을 빼앗게 됩니다.”

구라방은 대답했다.

“그 우려는 타당하오.”

다른 의원이 말했다.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은 고위험 연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구라방이 말했다.

“그 역시 자동으로 정당화되지 않소.”

“왜입니까?”

“재산이 적다는 사실을 판단능력 결여로 취급하기 때문이오.”

회의가 조용해졌다.

누군가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라방은 오래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동의서 항목을 하나 더 추가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의를 받기 전에 선택지를 만들어야 하오.”

그가 말했다.


그 뒤 리벨리온의 연구동의 절차에는 새로운 제도가 추가되었다.

고위험 연구의 보상만이 당사자의 즉각적인 생존수단이 되는 경우,
별도의 상담과 유예기간을 두었다.

가능하다면 기본적인 치료와 숙식은 연구 참여 여부와 분리했다.

연구에 참여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의료지원을 잃지 않게 했다.

채무자에게 채권자가 직접 연구 참여를 권유하는 것은 제한했다.

고용주가 부하 직원에게 자기 연구의 실험대상이 되라고 제안하는 경우에도 별도 검토를 받게 했다.

보상금이 지나치게 높아 위험 자체를 가리는 유인이 되지 않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구라방은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유인이고 어디부터 강요인가.

돈이 필요한 사람이 높은 보상을 보고 위험을 택하는 것을 국가가 막을 권리가 있는가.

절박함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판단을 가짜라고 불러도 되는가.

명확한 답은 없었다.

구라방은 그 사실을 불편해했다.

그는 명확한 조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 의원이 말했다.

“폐하께서 생명종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문제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이 긴장했다.

국왕에게 꽤 직접적인 말이었다.

구라방은 화내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이 높소.”

상대가 오히려 당황했다.

구라방은 계속 말했다.

“정확히는 과거에 이해했던 감정의 일부를 현재 같은 강도로 재현하기 어렵소.”

“그렇다면 연구동의 판단에서 폐하께서 빠지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구라방은 잠시 생각했다.

“일부 사안에서는 그럴 수 있소.”

그는 자기 권한을 줄이는 것을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한계를 확인했다면 절차가 그것을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명종 당사자가 포함된 고위험 연구 심사에는 살아 있는 구성원의 참여를 의무화했다.

특히 공포와 고통,
빈곤,
질병 같은 조건이 동의에 영향을 주는 사안에서는 언데드만으로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감정적 안정성이 오히려 맹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도로 인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구라방은 종종 실수한다.

누군가 공포 때문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기다리는 대신 질문을 정리하려 한다.

“선택지는 세 가지요.”

상대는 울고 있다.

구라방은 계속한다.

“첫째, 연구에 참여하지 않고 기존 치료를 받는 것.”

옆의 보좌관이 조용히 말한다.

“폐하.”

“무엇이오.”

“지금은 조금 기다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구라방은 상대를 본다.

그리고 울고 있는 사람을 다시 본다.

예전 같으면 정보제공을 계속했을 것이다.

지금은 멈춘다.

“알겠소.”

그 한마디를 하고 기다린다.

그에게는 작은 변화다.

하지만 매우 어려운 변화이기도 하다.

효율적인 정보전달보다 사람이 정보를 들을 수 있는 상태인지 먼저 보는 것.

그는 아직 배우는 중이다.


구라방은 리벨리온 밖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도 알고 있다.

죽음마법을 사용하는 스켈레톤 메이지.

칠흑왕좌의회 의장.

언데드와 마족, 금지된 연구자들이 모여 사는 나라의 국왕.

다른 나라에서 보면 불안할 수 있다.

특히 죽음마법을 강하게 경계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존재 자체가 위험의 상징처럼 보일 수도 있다.

구라방은 그 감정을 비합리적이라고 간단히 무시하지 않는다.

실제로 죽음마법은 위험하다.

자신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외교 사절에게 말한다.

“귀국이 우리의 연구를 신뢰할 의무는 없소.”

상대가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검증 가능한 기준을 제시하시오.”

“우리는 그 기준에 답하겠소.”

감정적인 신뢰보다 확인 가능한 절차를 선호한다.

그것도 구라방다운 방식이다.


세레이온과의 관계는 특히 어렵다.

생명과 죽음에 대한 관점이 자주 충돌한다.

세레이온의 일부 성직자는 죽음마법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리벨리온의 일부 연구자는 그런 태도를 무지한 금기라고 비웃는다.

구라방은 양쪽 모두에게 비슷하게 말한다.

“불쾌함은 금지의 충분조건이 아니오.”

그리고 리벨리온 연구자에게도 말한다.

“가능성은 실행의 충분조건이 아니오.”

그는 한쪽의 공포를 무조건 미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른 쪽의 호기심을 무조건 진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과거 자신은 금지에 너무 큰 힘을 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허용에도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허용 역시 권력이다.

국가가 ‘해도 된다’고 말하는 순간 누군가는 그것을 안전하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다.

구라방은 그래서 승인서에도 문장을 넣었다.

‘승인은 안전을 보증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큰 글씨로.


구라방의 전투는 그의 성격만큼 건조하다.

불필요하게 위협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분노해서 마법을 크게 쓰지도 않는다.

금속지팡이를 땅에 짚는다.

어둠이 좁게 모인다.

죽음 원소가 정확한 지점에 응축된다.

뼈창이 만들어진다.

한 발.

필요하면 두 발.

상대의 방어마법이 펼쳐지면 구조를 읽는다.

힘으로 부수기보다 연결부를 찾아 해체한다.

영혼구속도 마찬가지다.

무차별적으로 주변 영혼을 끌어당기지 않는다.

대상과 범위를 명시한다.

그의 마법진은 법률문서처럼 보인다는 농담도 있다.

조건이 많고,
예외가 많고,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이유다.

구라방은 그 농담을 들었을 때 말했다.

“두 번째 항목은 부정확하오.”

농담을 한 사람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적에게도 항복조건을 명확하게 말한다.

“무기를 버리시오.”

“마법을 중단하시오.”

“그 상태를 유지하면 공격하지 않겠소.”

상대가 묻는다.

“믿으라고?”

구라방은 대답한다.

“믿음은 요구하지 않소.”

“조건을 제시했을 뿐이오.”

그리고 약속한 조건은 지킨다.

반대로 상대가 조건을 깨면 즉시 행동한다.

감정적으로 분노하지는 않는다.

그저 말한다.

“조건이 변경되었소.”

그리고 뼈창이 날아간다.

그에게 전투는 증오의 표출보다 위험을 통제하는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오히려 무서울 때가 있다.

화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국왕이 된 뒤 어떤 젊은 연구자가 세브란 사건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폐하께서는 그 판결을 후회하십니까?”

구라방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오래전 자신이 인간의 얼굴로 앉아 있던 법정을 기억했다.

세브란.

환자들.

처형명령.

폐기된 기록.

그리고 몇 년 뒤 죽어간 사람들.

“판결의 일부는 지금도 타당하다고 판단하오.”

상대가 놀랐다.

구라방은 계속 말했다.

“세브란의 연구는 제3자에게도 위험을 발생시켰소.”

“그 부분은 통제되어야 했소.”

“그러나 연구 자체와 실패기록을 소멸시킨 것은 잘못이었소.”

“처형은요?”

이번에는 침묵이 길었다.

“지금의 법이라면 사형을 선고하지 않소.”

그것이 그의 답이었다.


젊은 연구자가 다시 물었다.

“그럼 세브란은 옳았습니까?”

구라방의 푸른 안광이 상대를 향했다.

“그 질문은 부정확하오.”

“왜요?”

“한 인간 전체를 옳음과 그름 중 하나로 분류하려 하기 때문이오.”

구라방은 손가락 뼈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환자의 동의를 구한 것은 옳았소.”

“위험을 기록한 것도.”

“제3자 피해를 충분히 통제하지 못한 것은 잘못이오.”

“법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연구한 것 역시 문제였소.”

잠시 뒤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그 실패를 이유로 지식까지 없앤 것도 잘못이오.”

구라방은 사람을 한 단어로 판결하는 것을 점점 싫어하게 되었다.

법은 행동을 판단해야 했다.

연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브란의 이름을 리벨리온 연구윤리 교육에서 숨기지 않는다.

영웅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순교자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범죄자로만 남기지도 않는다.

사건 전체를 가르친다.

무엇을 잘했는지.

무엇이 위험했는지.

당시 법이 왜 그렇게 반응했는지.

그리고 그 금지 때문에 무엇을 잃었는지.

교육 마지막에는 구라방 자신의 판결문도 함께 읽힌다.

어떤 학생이 물었다.

“폐하의 잘못을 교육자료로 써도 됩니까?”

구라방은 말했다.

“그래야 재발을 막을 수 있소.”

“국왕의 권위가...”

“틀린 판결을 숨겨야 유지되는 권위라면 유지할 이유가 없소.”

그 점에서는 에리두와도 묘하게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구라방은 잘못을 없던 일로 만들기보다,
다음 절차의 근거로 바꾸는 편을 택한다.


하지만 자기 약점까지 절차로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최근 구라방이 가장 조심하는 부분이다.

절차도 사람이 만든다.

동의서도 사람이 읽는다.

선택지는 법으로 존재해도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거절할 수 있음’이라고 적혀 있어도,
거절하면 굶는 사람에게 그 문장은 가벼울 수 있다.

‘치료를 받지 않을 자유가 있음’이라고 적혀 있어도,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느끼는 자유와 건강한 심사위원이 말하는 자유는 다를 수 있다.

구라방은 바로 그 감각을 점점 잃고 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 더 자주 묻는다.

“이 조건이 실제로 거절 가능한 조건으로 보이오?”

예전의 구라방이라면 스스로 판단했을 질문이다.

지금은 다른 사람의 감각을 자료로 받는다.

그것도 일종의 증거라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빈곤지역 출신의 젊은 연구참여자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선택이 있다고 하시지만 저한테는 없었습니다.”

구라방이 물었다.

“법적으로는 세 가지 선택이 존재했소.”

상대가 씁쓸하게 웃었다.

“법이 밥 줍니까?”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구라방은 반박하지 않았다.

상대가 계속 말했다.

“전 연구 싫지 않았습니다.”

“돈도 필요했고요.”

“제가 선택한 것도 맞습니다.”

“근데 자유롭게 선택했냐고 물으면 모르겠습니다.”

그 말이 구라방에게 오래 남았다.

선택했다.

강요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로웠는지는 모르겠다.

셋은 동시에 참일 수 있었다.

구라방이 좋아하는 명확한 분류로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더 중요했다.


현재 구라방은 동의라는 단어를 예전보다 더 조심해서 쓴다.

서명 여부만 보지 않는다.

설명도 본다.

철회권도 본다.

보상도 본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람의 선택지가 현실에서 얼마나 존재하는지도 묻는다.

완벽하게 평가할 방법은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

누군가 명확한 기준을 요구하면 그는 말한다.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사실이 무기준을 의미하지는 않소.”

“판단이 필요하오.”

그에게는 꽤 불편한 답이다.

그는 절차를 좋아한다.

판단자의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규칙을 경계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 상황을 숫자와 문장으로 고정할 수 없다는 것도 배우고 있다.

특히 살아 있는 존재의 절박함은 그렇다.


구라방은 가끔 자신이 인간이던 때의 기록을 읽는다.

사진이나 초상보다 문서를 더 많이 남겨두었다.

자기 필체.

판결문.

사적 메모.

언데드 전환 전 동의서.

그중에는 지금의 자신이라면 잘 쓰지 않을 문장도 있다.

‘두렵다.’

‘화가 난다.’

‘살고 싶다.’

구라방은 그 문장들을 삭제하지 않는다.

지금의 자신에게 결여된 자료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한때 어떤 압박 아래 판단했는지 보여준다.

언데드가 된 구라방에게 생전의 구라방은 완전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완전히 같은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그 기록들을 과거의 자기 자신이 남긴 증언처럼 취급한다.

현재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을,
과거의 자신이 직접 기록한 자료로 읽는다.


어느 밤 칠흑왕좌의회가 끝난 뒤,
보좌관 하나가 물었다.

“폐하께서는 무엇에 집착하고 계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언데드가 생명 대신 다른 개념에 집착한다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구라방은 대답했다.

“책임이오.”

“법이 아니라요?”

“법은 수단이오.”

“절차는요?”

“역시 수단이오.”

보좌관이 물었다.

“무엇에 대한 책임입니까?”

구라방은 잠시 침묵했다.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

조금 뒤 덧붙였다.

“그리고 선택하지 않은 결과에 대한 책임.”

그는 세브란을 처형했다.

그것은 선택이었다.

연구를 없앴다.

그 역시 선택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다른 방법을 만들지 않았다.

그것도 결과를 만들었다.

구라방은 그 모든 것을 책임이라는 단어 아래 놓는다.


그가 국왕이 된 이유도 어쩌면 거기에 있다.

권력을 원해서라기보다 최종 책임자가 사라지는 상황을 싫어했다.

의회가 결정했다.

연구회가 승인했다.

관료가 집행했다.

그러다 사고가 나면 모두가 자기 절차는 맞았다고 말한다.

구라방은 그런 구조를 경계한다.

절차가 책임을 분산할 수는 있다.

책임을 증발시켜서는 안 된다.

그래서 최종 승인문서에는 이름을 남긴다.

본인이 승인했다면 자기 이름도.

왕이라는 자리가 그 이름을 마지막까지 남기는 역할이라면 맡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 이상을 신성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구라방은 누군가 자신을 현명한 불사왕이라고 부르면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불사라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언데드도 파괴될 수 있다.

자아가 소멸할 수도 있다.

영원하지 않다.

무엇보다 오래 산다고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 인생으로 그것을 이미 증명했다.

생전 53년 동안 법을 공부하고도 세브란 사건에서 잘못된 결론의 일부를 만들었다.

언데드로 161년을 살아도 여전히 동의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은 자료를 늘려준다.

정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구라방은 긴 수명을 권위의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래 살았으니 제가 맞다는 주장은 논증이 아니오.”

그렇게 말한다.


현재의 구라방은 칠흑왕좌에 앉아 보고서를 읽는다.

백골의 손가락이 종이를 넘긴다.

푸른 안광이 문장 위를 움직인다.

연구계획서 하나가 올라온다.

고위험 죽음원소 연구.

대상자는 말기 환자.

성공 가능성 34퍼센트.

실패 시 즉각적인 사망 가능성 존재.

연구자는 환자의 동의를 받았다.

예전의 구라방이라면 여기서 위험 통제 여부를 봤을 것이다.

지금도 본다.

격리시설.

중단조건.

주변 맥류 영향.

책임자.

배상계획.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묻는다.

“환자가 이 연구를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연구자가 대답한다.

“기존 치료를 계속 받습니다.”

“비용은.”

“본인 부담입니다.”

구라방의 손이 멈춘다.

“지불 가능합니까.”

연구자가 잠시 침묵한다.

“어렵습니다.”

구라방은 문서를 덮는다.

“그렇다면 동의 절차가 완료되지 않았소.”


연구자가 반발한다.

“하지만 환자 본인이 원합니다.”

“알고 있소.”

“위험도 설명했습니다.”

“그 역시 알고 있소.”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구라방은 건조하게 답한다.

“거절의 실제 비용을 아직 평가하지 않았소.”

“가난하다는 이유로 참여를 막겠다는 겁니까?”

“아니오.”

“그러면 승인해주십시오.”

구라방의 푸른 안광이 조용히 빛난다.

“성급하게 양자택일로 만들지 마시오.”

그가 말한다.

“참여시킬 것인가, 금지할 것인가만이 선택지는 아니오.”

“기존 치료비를 별도로 지원할 방법을 찾으시오.”

“그 뒤에도 환자가 참여하겠다고 한다면 다시 심사하겠소.”

연구자가 말한다.

“그러면 연구가 늦어집니다.”

구라방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이번 연구의 비용이오.”


그러나 구라방 자신도 안다.

이 방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국가는 모든 사람에게 대안을 만들어줄 수 없다.

어떤 환자에게는 정말 선택지가 하나뿐이다.

어떤 연구는 시간이 없어서 유예기간을 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도움을 거부하고 위험을 선택한다.

그때 어디까지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하는가.

어디부터 국가가 개입해야 하는가.

구라방은 여전히 답을 찾는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답을 혼자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생명종의 공포와 절박함이 관련된 문제에서는 더 그렇다.

감정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장점이 아니다.

때로는 감정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구라방은 그 사실을 머리로 이해한다.

몸으로는 이전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그 간극이 그의 가장 깊은 불안이다.


그렇다고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돌아갈 방법이 있다고 해도 선택할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의 자신 역시 하나의 자아다.

161년의 기억이 있다.

책임이 있다.

리벨리온의 법이 있다.

자신을 인간의 불완전한 복사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언데드라는 존재방식을 결핍으로만 규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일 때보다 나아진 부분도 있다.

공포에 휘둘리지 않는다.

오랫동안 같은 원칙을 유지할 수 있다.

정신공격에도 매우 강하다.

생존본능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길 가능성도 적다.

문제는 모든 장점이 다른 방향의 약점을 만든다는 것이다.

공포에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공포에 흔들리는 사람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

생존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는 사람의 선택을 너무 쉽게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을 교정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구라방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집무실에는 세브란의 판결문 사본이 있다.

왕의 개인실에 두기에는 이상한 문서다.

자기가 내린 사형판결.

그 사람의 연구가 사라진 기록.

그리고 훗날 그 연구와 유사한 원리가 다른 치료술의 기반이 되었다는 후속 자료.

구라방은 그것들을 한 묶음으로 보관한다.

한쪽만 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세브란을 영웅으로만 기억하면 위험을 미화하게 된다.

범죄자로만 기억하면 연구가 왜 필요했는지 사라진다.

구라방 자신을 악한 판결자로만 기억하면 당시 법이 왜 존재했는지 잊게 된다.

그를 선의의 법률가로만 기억하면 판결의 피해가 지워진다.

모두 남겨야 한다.

그 사건은 구라방에게 하나의 답이 아니라 질문의 묶음이다.


가끔 그는 세브란과 마지막으로 나눈 말을 떠올린다.

‘실패한 방법까지 남겨주십시오.’

생전의 구라방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은 리벨리온의 모든 고위험 연구에 실패기록 보존을 의무화했다.

실험이 실패해도 삭제하지 않는다.

연구자의 명예를 위해 숨기지 않는다.

사망자가 나왔으면 사망자를 적는다.

동의절차에 문제가 있었으면 그것도 남긴다.

후속연구가 그 실패를 읽을 수 있게 한다.

구라방은 그것을 세브란에게 진 빚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런 표현은 감정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이전 판단에서 발생한 손실을 다음 제도의 설계근거로 사용했소.”

듣는 사람은 대부분 그게 빚이라는 뜻이라고 이해한다.

구라방만 굳이 정정하지 않는다.


현재의 구라방 에드밀 몬테스는 리벨리온의 왕이다.

완전한 백골의 몸.

푸른 안광.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높은 깃의 검은 마법사복.

칠흑왕좌의회의 문장.

금속지팡이.

왕 앞에서 연구자는 가능성을 말한다.

구라방은 이유를 묻는다.

연구자는 동의를 말한다.

구라방은 조건을 묻는다.

연구자는 성공을 말한다.

구라방은 실패했을 때 누가 책임지는지 묻는다.

누군가는 그를 답답한 왕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위험한 연구를 허용하는 괴물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사람은 금지 대신 절차를 만든 개혁자라고 부른다.

구라방은 어느 표현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실제 제도가 무엇을 했는가다.

몇 명이 동의했다.

몇 명이 거절했다.

몇 명이 다쳤다.

누가 책임졌다.

무엇을 수정했다.

그리고 다음 연구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지만 어떤 날에는 보고서의 숫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한다.

‘참여자 전원 자발적 동의.’

그 문장을 보면 바로 넘기지 않는다.

요즘은 옆에 질문을 적는다.

거절할 수 있었는가.

거절하면 무엇을 잃었는가.

누가 권유했는가.

당사자는 무엇을 두려워했는가.

그리고 그 두려움이 없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가.

마지막 질문에는 대부분 정확한 답이 없다.

구라방은 그런 빈칸을 싫어한다.

그래도 억지로 채우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것을 절차가 해결했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


어느 젊은 의원이 최근 그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위험한 연구를 믿으십니까?”

구라방은 말했다.

“아니오.”

“그러면 연구자를 믿으십니까?”

“역시 아니오.”

의원이 당황했다.

“그럼 무엇을 믿으십니까?”

구라방은 잠시 생각했다.

“믿음이 없어도 작동하도록 만든 절차를 선호하오.”

그리고 바로 덧붙였다.

“다만 절차가 충분하다고 믿어서도 안 되오.”

의원이 웃었다.

“결국 아무것도 믿지 않으시는군요.”

구라방의 푸른 안광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아니오.”

그는 생전의 자신의 판결문을 바라봤다.

“사람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소.”


그 믿음 때문에 구라방은 금지를 절대화하지 않는다.

허용도 절대화하지 않는다.

동의도 만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책임만으로 모든 피해를 되돌릴 수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다만 실패했을 때 다음 질문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남기려고 한다.

무엇이 틀렸는가.

누가 몰랐는가.

누가 알고도 숨겼는가.

당사자는 정말 무엇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는가.

다른 선택은 현실에 존재했는가.

그리고 다음에는 무엇을 바꿀 것인가.

그 질문들이 사라지는 순간,
위험한 연구는 다시 신앙이나 금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할 수 있으니 해야 한다’는 신앙.

다른 하나는 ‘위험하니 영원히 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

구라방은 둘 다 경계한다.


그래서 칠흑왕좌의회에서 누군가 새로운 연구를 가져오면,
구라방은 가능성을 듣는다.

성공률을 듣는다.

위험을 듣는다.

동의를 확인한다.

책임자를 확인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장 건조한 목소리로 말한다.

“가능하다는 사실은 실행할 이유가 아니며,”

금속지팡이 끝이 바닥에 닿는다.

“금지는 포기할 이유도 아니오.”

그 뒤 반드시 조건을 묻는다.

어떤 조건이라면 해도 되는가.

어떤 조건에서는 멈춰야 하는가.

실패하면 무엇을 남길 것인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리고 이제는 하나를 더 묻는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정말 거절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만큼은 아직 구라방에게 완성된 답이 없다.

어쩌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생명이 없는 왕이 생명을 가진 존재의 절박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한계는,
법령 하나를 고친다고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감정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이상 순수한 장점으로 여기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찾는다.

생전에는 법을 믿다가 가능성을 죽였다.

사후에는 동의를 믿다가 절박함을 놓칠 뻔했다.

그 두 실패 사이에서 구라방 에드밀 몬테스는 지금도 법을 만든다.

완벽한 법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틀렸을 때 책임자를 찾을 수 있고,
피해를 숨기지 않으며,
다음 사람이 같은 죽음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게 만드는 법을 만들기 위해서다.


네크라 왕궁 1명
PUP
퍼핏
리벨리온 네크라 왕궁-메이드장·국왕보좌
“오늘 일정은 청소입니다.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폐하?”
🩸 HP50
💪 공격력5
🧙 마법력80
✨ 신비력5
🛡️ 방어력5
🔗 항마력90
😖 신비저항60
🏃 회피력20
과거 보기
퍼핏의 첫 번째 삶은 아주 평범했다.

프라그모 북부의 작은 마을.

돌로 만든 낮은 집.

겨울이면 창문 틈을 막기 위해 천 조각을 끼워 넣어야 했고,
봄이 오면 녹은 눈 때문에 진창이 되는 길.

그곳에서 퍼핏은 평민의 딸로 태어났다.

지금처럼 퍼핏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름은 훨씬 나중에 생겼다.

그때의 그녀는 그냥 평범한 인간 여자였다.

추위를 탔다.

배가 고프면 짜증을 냈다.

돈이 생기면 달콤한 빵을 샀다.

친구와 싸우고,
다음 날 다시 이야기했다.

지금의 그녀가 기억하는 감정들은 선명하지 않다.

기억은 남아 있다.

하지만 그 기억 속 감정은 오래된 그림처럼 색이 빠져 있다.


집안은 가난했다.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겨울이 길어지면 항상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다.

새 옷.

고기.

약.

때로는 장작.

퍼핏은 어릴 때부터 일했다.

시장 짐을 날랐다.

여관에서 물을 길었다.

상단이 지나가면 짐을 옮겨주고 동전을 받았다.

그녀는 몸이 아주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말을 잘 들었고,
손이 빨랐다.

무엇보다 불평을 잘 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

싸고,
조용하고,
말을 잘 듣는 사람.

그것이 퍼핏이 처음 배운 사회생활이었다.


스물네 살이 되던 해,
퍼핏은 남쪽으로 향하는 큰 상단에 짐꾼으로 들어갔다.

행선지는 리벨리온이었다.

북부 빙벽로를 지나고,
흑요석 관문로를 거쳐,
네크라까지 이어지는 긴 길.

보수는 평소보다 훨씬 좋았다.

위험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퍼핏은 망설였지만 결국 계약했다.

그 돈이면 몇 년은 가족을 도울 수 있었다.

처음 며칠은 괜찮았다.

상인들은 바빴고,
짐꾼들은 서로 도왔고,
호위병들은 길의 위험을 설명해주었다.

문제는 델피로에서 합류한 한 귀족이었다.

그는 리벨리온과 거래할 물건을 직접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상단에 동행했다.

처음부터 퍼핏은 그를 싫어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사람을 사람처럼 부르지 않았다.

“짐꾼.”

“하인.”

“이것.”

그 정도였다.

퍼핏은 익숙했다.

평민으로 살면서 그런 말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참았다.

돈을 받는 일이었다.


빙벽로를 지날 때 문제가 생겼다.

귀족의 짐 하나가 늦게 도착했다.

정확히는 퍼핏의 잘못이 아니었다.

앞쪽 수레가 눈에 빠졌고,
길이 막혔고,
짐 전체가 늦어졌다.

하지만 귀족은 이유를 듣지 않았다.

“네가 맡은 짐이 늦었다.”

퍼핏이 말했다.

“앞 수레가 멈춰서 그렇습니다.”

“변명하나?”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첫 번째 주먹은 갑자기 날아왔다.

입술이 터졌다.

퍼핏은 넘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봤다.

아무도 바로 나서지 않았다.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발이었다.

갈비뼈 쪽이었다.

숨이 막혔다.

세 번째부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상단주는 결국 말렸다.

하지만 늦었다.

퍼핏은 제대로 걷지 못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상단은 계속 이동해야 했다.

눈은 더 내릴 예정이었다.

흑요석 관문로에 늦게 들어가면 통행 자체가 막힐 수 있었다.

상단주는 말했다.

“여기서 쉬게 할 수는 없다.”

누군가 말했다.

“마차에 태우면 됩니다.”

“짐을 내려야 한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때 퍼핏은 처음으로 자신이 짐보다 가벼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정확히는,
짐보다 가치가 낮은 사람이라는 것을.

귀족은 말했다.

“버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퍼핏은 길가에 내려졌다.

담요 하나를 받았다.

물도 조금.

상단주는 눈을 피하며 말했다.

“뒤따라오는 순찰대가 발견할 거다.”

퍼핏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단이 떠났다.

바퀴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녀는 눈 위에 누운 채 한참 하늘을 봤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너무 아팠다.

추웠다.

그게 전부였다.


퍼핏은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했다.

몇 걸음은 걸었다.

그리고 다시 쓰러졌다.

흑요석 관문로 주변의 숲은 어두웠다.

검은 나무.

검은 돌.

눈조차 회색으로 보였다.

나중에 그녀는 그곳이 네크라 인근의 흑요석 숲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는 몰랐다.

그냥 죽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잠들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눈이 자꾸 감겼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아주 대단한 생각은 아니었다.

억울하다는 생각도 오래 하지 못했다.

그냥 피곤했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느렸다.

정확했다.

퍼핏은 처음에 순찰대라고 생각했다.

눈을 뜨려 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검은 옷.

금속 지팡이.

그리고 푸른 빛.

구라방이었다.

당시에도 그는 이미 언데드였다.

퍼핏은 처음 그 얼굴을 보고 무서워하지 않았다.

무서울 힘도 없었다.

구라방은 그녀 옆에 앉았다.

맥박을 확인했다.

상처를 봤다.

그리고 아주 건조하게 말했다.

“살아 있소.”

퍼핏은 겨우 말했다.

“곧 아니게 될 것 같은데요.”

구라방은 잠시 침묵했다.

“그 가능성이 높소.”

퍼핏은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구라방은 그녀를 데려갔다.

치료를 시도했다.

안타르카도 불려왔다.

이미 늦었다.

내부출혈.

저체온.

부서진 뼈.

몸은 버티지 못했다.

퍼핏은 몇 번 깨어났다.

그때마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안타르카의 목소리도 들렸다.

“정신 있어요~?”

퍼핏은 대답하지 못했다.

구라방이 말했다.

“가능한 처치는 모두 시행했소.”

그 말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따뜻한 방이었다.

밖보다 따뜻했다.

그것이 좋았다.

그리고 죽었다.


퍼핏은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죽는 순간은 없다.

기억은 그냥 끊긴다.

그다음 기억은 눈을 뜬 순간이다.

숨을 쉬지 않았다.

정확히는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가슴이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움직였다.

목을 돌렸다.

움직였다.

몸 전체가 이상했다.

가볍고,
정확하고,
낯설었다.

피부 아래에는 살아 있는 몸과 다른 맥류가 흘렀다.

관절마다 희미한 봉합선이 있었다.

퍼핏은 손목을 오래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이게 뭡니까.”

안타르카가 웃지 않았다.

“당신 몸이에요.”


호문쿨루스 육체였다.

안타르카는 퍼핏의 영혼이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고정했다.

기억과 자아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그것을 인공육체에 정착시켰다.

성공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성공한다고 원래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성공했다.

퍼핏은 다시 깨어났다.

구라방은 모든 과정을 설명했다.

어디까지 자신이 결정했는지.

어디부터 안타르카의 판단이었는지.

어떤 위험이 있었는지.

무엇이 실패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마지막에 말했다.

“당신의 동의를 얻을 수 없었소.”

퍼핏은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처음 며칠 동안 퍼핏은 자신이 화가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허락 없이 몸이 바뀌었다.

자기 허락 없이 다시 살아났다.

정확히는 살아난 것인지조차 애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노가 잘 생기지 않았다.

슬픔도 약했다.

두려움도 희미했다.

호문쿨루스 육체의 특성이었다.

감정은 있었다.

하지만 예전보다 훨씬 얕았다.

퍼핏은 그것이 가장 불쾌했다.

화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화가 나야 할 일처럼 느껴졌다.

그 감정조차 강하지 않았다.


안타르카가 물었다.

“후회해요~?”

퍼핏은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습니다.”

“살아난 게 싫어요?”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좋아요?”

“아닙니다.”

안타르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퍼핏이 말했다.

“질문이 이상합니다.”

“어떤 점이요?”

“제가 선택하지 않았으니까요.”

안타르카는 그날 처음으로 웃음을 멈췄다.


퍼핏은 회복 뒤 프라그모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구라방은 그렇게 말했다.

“귀환을 원한다면 지원하겠소.”

퍼핏은 생각했다.

고향.

가족.

친구.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설명해야 했다.

죽었던 자신이 왜 돌아왔는지.

왜 몸이 달라졌는지.

왜 피부가 차갑고,
왜 감정이 예전 같지 않은지.

무엇보다,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감정이 예전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미안했다.

하지만 미안함도 약했다.

퍼핏은 결국 말했다.

“여기 남겠습니다.”

구라방이 물었다.

“확실하오?”

퍼핏이 대답했다.

“아뇨.”

구라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오.”


처음 맡은 일은 아주 사소했다.

서류정리.

청소.

차 준비.

연구실 물품 운반.

퍼핏은 그런 일이 편했다.

해야 할 일이 명확했다.

끝이 있었다.

바닥이 더러우면 닦는다.

서류가 흐트러졌으면 정리한다.

차가 식으면 다시 끓인다.

사람의 마음과 달리 명확했다.

그래서 계속했다.


호문쿨루스로 살아가면서 퍼핏은 또 하나를 배웠다.

감정이 옅다고 해서 사회생활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표정을 원했다.

웃어야 할 때 웃기를 바랐다.

걱정해야 할 때 걱정하는 얼굴을 기대했다.

퍼핏은 처음에는 거의 무표정했다.

손님들이 불편해했다.

어느 귀족은 말했다.

“저 메이드는 왜 저렇게 기분 나쁜 얼굴인가?”

퍼핏은 거울을 봤다.

기분 나쁜 얼굴이 아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때부터 연습했다.

미소.

걱정.

놀람.

정중한 난처함.

적당한 친근함.

수십 년이 지나자 누구보다 자연스러워졌다.

대부분은 연기였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한다.


퍼핏은 귀족을 싫어했다.

정확히는,
귀족이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을 처음부터 조금 낮게 평가했다.

아주 깊은 증오는 아니었다.

그 정도 감정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그냥 경계했다.

사람을 소유물처럼 부르는 습관.

하인의 시간을 자기 것처럼 쓰는 태도.

평민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표정.

그런 것이 보이면 퍼핏의 평가가 바로 내려갔다.

그래서 구라방도 처음에는 신뢰하지 않았다.

왕이었다.

귀족 출신이었다.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퍼핏에게는 충분한 경계 이유였다.


그런데 구라방은 이상했다.

하인에게 설명했다.

명령에 이유가 있었다.

실수가 생기면 책임자를 찾았지만,
책임자를 희생양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자기가 내린 결정이면 자기 이름을 기록에 남겼다.

퍼핏이 실수했을 때도 말했다.

“왜 그렇게 판단했소?”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건 결과고. 이유를 묻고 있소.”

퍼핏은 그런 귀족을 처음 봤다.

처음에는 연기라고 생각했다.

한 달을 봤다.

일 년을 봤다.

십 년을 봤다.

달라지지 않았다.


구라방이 왕이 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왕좌에 앉았다.

말투는 그대로였다.

책임을 구분했다.

조건을 확인했다.

가능성과 당위를 구별했다.

퍼핏은 아주 천천히 그를 신뢰했다.

사랑과는 달랐다.

연정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부모나 스승에 가까웠다.

자신보다 오래 지켜볼 가치가 있는 기준.

그 정도였다.

퍼핏에게는 매우 큰 감정이었다.


그렇다고 구라방의 생각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다.

구라방은 동의를 중시했다.

위험을 설명하고,
조건을 알리고,
당사자가 선택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퍼핏도 이해했다.

좋은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생각하면 항상 걸렸다.

자신은 동의하지 않았다.

동의할 수도 없었다.

죽어 있었으니까.

그럼 자신의 부활은 잘못이었을까.

퍼핏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잘한 결정이라고도 확신하지 못했다.


어느 날 회의에서 연구자가 말했다.

“동의가 없었다면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퍼핏은 차를 따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구라방이 그녀를 봤다.

“의견이 있소?”

퍼핏이 잔을 내려놓았다.

“있습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말하시오.”

퍼핏은 말했다.

“그 원칙대로라면 저는 존재하지 않는 편이 옳았겠군요.”

연구자는 당황했다.

구라방은 표정이 없었다.

퍼핏이 덧붙였다.

“저는 제 존재를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를 되살린 결정에 동의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둘 다 사실입니다.”


그 뒤 퍼핏의 생각은 하나의 질문으로 정리되었다.

동의를 받은 선택과,
동의를 받을 수 없어서 누군가 대신 내린 선택은 같은가.

아니다.

그것이 그녀의 답이다.

하지만 다른 선택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가 악한 것은 아니다.

그 차이를 숨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대신 결정했는지.

왜 그렇게 했는지.

어떤 위험을 감수했는지.

결과가 좋았다고 해서 동의가 있었던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실패했다고 해서 당시 선택이 무조건 악했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퍼핏에게 중요한 것은 구분이다.


안타르카와의 관계도 그래서 단순하지 않다.

퍼핏은 그녀에게 감사한다.

자신을 다시 움직이게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빚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안타르카도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둘은 그 문제를 여러 번 이야기했다.

안타르카가 말했다.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지 않나요~?”

퍼핏이 대답했다.

“그건 결과입니다.”

“싫어요?”

“아닙니다.”

“좋아요?”

“그 질문도 결과만 봅니다.”

안타르카는 그럴 때마다 웃는다.

퍼핏은 가끔 그 웃음이 조금 얄밉다고 생각한다.

감정은 아주 약하다.

그래도 있다.


메이드로서 퍼핏은 매우 유능하다.

왕궁의 열쇠 위치를 전부 안다.

구라방의 일정도 대부분 기억한다.

안타르카가 며칠째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도 안다.

제9문연구회의 연구자들이 어느 방에 위험한 시약을 쌓아두는지도 기억한다.

누가 거짓말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누가 자주 컵을 깨뜨리는지는 안다.

그런 세부사항을 관리하는 것이 퍼핏의 일이다.

사람들은 가끔 그녀에게 왜 계속 메이드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다른 직책을 받을 수도 있다.

구라방의 보좌관이라고만 불려도 된다.

퍼핏은 항상 비슷하게 대답한다.

“메이드가 제 직업입니다.”

“왜 그 일을 좋아합니까?”

퍼핏은 잠깐 생각한다.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녀에게 일은 감정보다 더 안정적이다.

해야 할 것을 한다.

필요한 것을 준비한다.

사람들이 돌아오면 방을 따뜻하게 한다.

피를 흘리면 상처를 임시로 봉합한다.

구라방이 밤새 서류를 읽으면 차를 바꾼다.

안타르카가 위험한 연구를 시작하면 소화장비와 봉인도구부터 확인한다.

누군가 그것을 애정이라고 부른다.

퍼핏은 부정하지 않는다.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 단어를 자신이 정확히 느끼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계속 한다.

90년째.


가끔 델피로 귀족이 네크라를 방문한다.

퍼핏은 완벽하게 응대한다.

미소도 자연스럽다.

차도 정확한 온도로 낸다.

하지만 귀족이 하인을 함부로 부르면 목소리가 조금 더 공손해진다.

“손님.”

“뭐지?”

“세 번째로 종을 울리셨기에 확인차 왔습니다.”

“물을 가져오라고 했잖나.”

퍼핏은 미소 짓는다.

“물론입니다.”

“다만 팔에 문제가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귀족이 표정을 굳힌다.

“뭐?”

“종을 세 번이나 사용하셔서요.”

퍼핏은 끝까지 웃는다.

그럴 때의 웃음은 거의 완벽한 연기다.


구라방은 그 모습을 몇 번 봤다.

한 번은 말했다.

“귀족을 싫어하오?”

퍼핏이 대답했다.

“조금요.”

“나도 귀족이었소.”

“알고 있습니다.”

“예외요?”

퍼핏은 잠시 생각했다.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입니다.”

구라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퍼핏은 그 점도 마음에 든다.

신뢰받았다고 감동하지 않았다.

그냥 편했다.


전투에서 퍼핏은 앞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다.

마력사를 펼친다.

적의 손목을 묶는다.

무기의 방향을 틀어놓는다.

쓰러진 아군의 상처를 임시로 봉합한다.

구라방이 주문을 준비할 시간을 만든다.

직접 적을 죽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익숙하다.

그건 평민 시절에도 그랬다.

짐을 옮겼다.

길을 열었다.

누군가의 일을 가능하게 했다.

다만 지금은 한 가지가 다르다.

더 이상 자신을 짐보다 값싼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 퍼핏은 자신의 첫 번째 죽음을 떠올린다.

상단이 멀어지던 소리.

눈 위의 담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던 순간.

그때의 분노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판단은 남아 있다.

그들은 잘못했다.

감정이 희미하다고 해서 그 결론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퍼핏은 감정과 판단을 같은 것으로 보지 않는다.

분노하지 않아도 부당함을 알 수 있다.

사랑하지 않아도 지킬 수 있다.

기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동의하지 못했다고 해서,
현재의 삶을 반드시 부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두 번째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대 고치지 않는다.

“결국 잘됐으니 괜찮았다.”

그런 말을 싫어한다.

결과가 과거의 선택방식을 정당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렇게 말하는 것도 싫어한다.

“동의가 없었으니 반드시 잘못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 자신은 잘못의 결과일 뿐이다.

퍼핏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두 사실을 동시에 남긴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둘 중 하나를 지워야만 이야기가 깔끔해진다면,
퍼핏은 깔끔하지 않은 쪽을 선택한다.


90년 동안 메이드장을 하며 퍼핏은 수많은 사람을 봤다.

왕이 바뀌는 나라.

연구가 성공하는 날.

실패하는 날.

누군가 죽는 날.

누군가 언데드가 되는 날.

새로운 마족이 태어나는 날.

사람들은 늘 이유를 붙였다.

옳았다.

틀렸다.

필요했다.

어쩔 수 없었다.

퍼핏은 그런 말을 들으면 차를 따른다.

그리고 가끔 아주 조용하게 묻는다.

“그 선택은 누가 했습니까?”

“당사자는 알고 있었습니까?”

“거절할 수 있었습니까?”

“없었다면, 누가 대신 결정했습니까?”

그 질문이 불편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묻는다.


오늘도 네크라 왕궁의 아침은 비슷하다.

퍼핏은 가장 먼저 복도를 확인한다.

창문의 잠금장치.

밤새 들어온 문서.

연구회에서 보낸 요청서.

구라방의 일정.

그리고 차.

집무실 문을 연다.

구라방은 이미 서류를 읽고 있다.

퍼핏은 놀란 표정을 짓는다.

연기다.

“폐하.”

구라방이 고개를 든다.

퍼핏이 말한다.

“오늘 일정은 청소입니다.”

잠깐 침묵.

“그 외에도 회의가 세 건 있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청소부터 말하오?”

퍼핏이 아주 작게 웃는다.

이번에는 연기인지 아닌지 본인도 확신하지 않는다.

“가장 미루실 것 같아서요.”

구라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퍼핏은 차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묻는다.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폐하?”

그 질문을 90년째 반복하고 있다.

처음에는 직업이었다.

지금도 직업이다.

다만 이제 퍼핏은 알고 있다.

누군가 곁에 남는 일이 반드시 뜨거운 감정에서 시작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선택하지 못한 삶에서도,
그다음 선택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지금,
남아 있는 쪽을 선택하고 있다.


제9문연구회2명
ANT
안타르카 파인블러드
리벨리온제9문연구회-연구원
“하지 않은 실험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연구 기록에 남지 않는답니다~?.”
🩸 HP300
💪 공격력10
🧙 마법력55
✨ 신비력40
🛡️ 방어력25
🔗 항마력60
😖 신비저항50
🏃 회피력60
과거 보기
안타르카 파인블러드에게 성을 물으면 대답은 언제나 같다.

“파인블러드예요.”

누군가 다시 묻는다.

“태어날 때부터 사용한 성입니까?”

안타르카는 웃는다.

“아뇨.”

“그럼 원래 성은 무엇이었습니까?”

붉은 눈이 가늘어진다.

입가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남아 있다.

“말씀드리지 않을 건데요~?”

상대가 이유를 물으면 그녀는 대체로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록이 잘못되었다거나,
그 이름이 너무 촌스럽다거나,
백 년 넘은 집안 이야기를 아직 궁금해하는 사람이 더 이상하다는 농담을 한다.

진짜 이유를 설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한 번,
제9문연구회의 오래된 동료가 술자리에서 끈질기게 묻자 이렇게 말한 적은 있었다.

“그 성으로 살던 사람은 스무 살에 죽었거든요.”

동료가 그녀를 바라봤다.

안타르카는 잔을 기울였다.

“저는 안 죽었고요.”

그리고 웃었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안타르카는 세레이온의 귀족가에서 태어났다.

어느 가문인지는 지금도 말하지 않는다.

불멸기록원과 세레이온의 오래된 족보를 대조하면 추측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르카 본인은 확인해주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어린 시절에는 달랐다.

그 집안에서 혈통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누가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어느 조상이 어떤 성직자를 배출했는지.

어느 세대에서 어떤 귀족가와 혼인했는지.

가족의 식탁에서도 죽은 조상 이야기가 살아 있는 사람 이야기보다 길었다.

안타르카는 어릴 때부터 그것을 조금 우습게 생각했다.

“백 년 전에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고 제가 훌륭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가정교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가문의 명예를 잇는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안타르카가 웃었다.

“그럼 백 년 전에 사고 친 사람이 있으면 제가 사과해야 하나요~?”

“안타르카 아가씨.”

“네, 네. 그만할게요.”

그러고는 조금 뒤 또 물었다.

“근데 논리적으로 이상하잖아요?”

어릴 때부터 그런 아이였다.


안타르카가 자신의 피를 처음 이상하게 느낀 것은 열여덟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작은 증상이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계단을 오르면 숨이 찼다.

상처가 이전보다 오래 갔다.

어느 날 식사 중 잔을 놓쳤다.

붉은 포도즙이 흰 식탁보 위로 번졌다.

어머니가 말했다.

“피곤한 모양이구나.”

안타르카는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가 봐요.”

그녀도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증상은 빠르게 늘었다.

어지럼증.

잦은 실신.

맥류 불안정.

피를 토하는 날도 생겼다.

세레이온의 치료사들이 불려왔다.

신성술을 사용했다.

약도 썼다.

여러 검사를 했다.

그리고 가족에게 설명했다.

희귀한 혈액병이었다.

안타르카의 혈액을 따라 흐르는 생명 맥류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당시 알려진 치료법으로는 진행을 늦출 수 있을 뿐,
완전히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안타르카는 의사에게 직접 물었다.

“얼마나 남았나요?”

의사는 가족을 먼저 봤다.

아버지가 얼굴을 굳혔다.

안타르카가 웃었다.

“제 몸 이야기인데 왜 저쪽을 보세요?”

의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정확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건 알고 있고요.”

안타르카는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능성이요.”

“치료가 잘 맞으면 몇 년 정도는...”

“잘 안 맞으면?”

침묵이 길어졌다.

안타르카의 미소가 조금 사라졌다.

“몇 달인가요?”

의사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안타르카는 처음으로 죽음이 자기 나이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족은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유명한 치료사를 불렀다.

비싼 약을 구했다.

성도 세리아의 신전에도 기도를 요청했다.

먼 지역의 치료법도 조사했다.

안타르카는 가족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딸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 점만큼은 분명했다.

문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느냐였다.

어느 날 안타르카는 한 치료사에게서 이상한 말을 들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르카의 눈이 움직였다.

“있어요?”

치료사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권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왜요?”

“아가씨.”

“그 말부터 하면 더 궁금해지는데요~?”

결국 그 치료사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뱀파이어화.


당시 알려진 일부 뱀파이어화 시술은 혈액과 생명 맥류의 구조 자체를 바꾸었다.

병든 혈액체계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유지될 필요가 없는 몸으로 변환한다.

혈액병 자체는 의미를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대신 다른 대가가 생긴다.

생리구조가 달라진다.

피와 생명력에 대한 의존이 생길 수 있다.

햇빛과 신성술에 대한 반응도 달라질 수 있다.

정신과 욕망이 변하는 사례도 있었다.

실패하면 죽는다.

성공하더라도 더 이상 인간으로 분류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세레이온 사회에서 무엇을 잃게 될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안타르카는 모든 것을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하면 되겠네요.”

치료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안타르카는 미소를 지었다.

“방법이 있는데 방법이 아니라고 부르면 좀 이상하지 않나요~?”


가족의 반대는 예상보다 강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안타르카가 농담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야기는 다시 하지 마라.”

안타르카가 물었다.

“왜요?”

“위험하다.”

“지금도 죽는데요.”

“그것과는 다르다.”

“어떻게요?”

아버지는 한동안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다.

“그건 치료가 아니다.”

“살아남는데요.”

“다른 것이 되는 거다.”

안타르카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

“다른 게 되면 제가 아닌가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 무슨 뜻이에요?”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안타르카에게는 대답처럼 들렸다.


가족이 뱀파이어화를 두려워한 이유가 전부 편견은 아니었다.

시술 자체가 위험했다.

성공률도 높지 않았다.

성공 이후의 변화도 완전히 예측할 수 없었다.

안타르카가 사람을 해칠 가능성을 걱정한 사람도 있었다.

사회적으로 추방될 가능성도 컸다.

귀족가의 딸이라는 위치도 잃게 된다.

부모는 자기 나름대로 딸을 보호하려 했다.

그래서 말했다.

“남은 치료를 계속하자.”

안타르카가 물었다.

“효과가 있나요?”

“가능성은 있다.”

“얼마나?”

“그걸 숫자로...”

“뱀파이어화 실패율은 숫자로 말하면서요?”

방이 조용해졌다.

안타르카는 부드럽게 웃었다.

“참 편리하네요.”

“마음에 드는 치료는 희망이라고 부르고,
마음에 안 드는 치료는 위험이라고 부르면 되니까요.”


아버지가 화를 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

안타르카는 침대 위에서 그를 바라봤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마르고 창백했다.

그런데 목소리는 이상하게 침착했다.

“적어도 죽는 사람이 저라는 건 알아요.”

그 문장이 가족과 그녀 사이를 갈랐다.

누가 더 사랑하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결정할 권리를 가지는가의 문제였다.

가족은 안타르카가 절박하기 때문에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타르카는 바로 그 절박함 때문에 자기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양쪽 모두 상대를 보호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어느 쪽도 물러서지 않았다.


안타르카는 몰래 자료를 모았다.

금지된 논문.

뱀파이어의 혈액구조에 관한 기록.

성공 사례.

실패 사례.

사망자.

시술 후 정신변화.

필요한 혈액량.

유지비용.

그녀는 자신을 안심시키는 자료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기록을 더 집요하게 찾았다.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이유로 위험을 못 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리벨리온과 연결된 연구자 한 명을 찾아냈다.

불법 시술을 무조건 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 안타르카의 요청을 거절했다.

“안 됩니다.”

안타르카가 눈을 깜빡였다.

“왜요?”

“지금 당신은 죽는 것이 너무 두렵습니다.”

안타르카가 웃었다.

“죽는 사람한테 꽤 당연한 증상 아닌가요~?”

연구자는 웃지 않았다.

“그 공포가 판단을 압도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 말 때문에 안타르카는 그 사람을 믿기로 했다.


몇 차례 면담이 이어졌다.

연구자는 뱀파이어화의 좋은 점만 설명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죽을 수 있다.

성공해도 인간의 신체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가족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세레이온의 법적 신분을 잃을 수 있다.

혈액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과의 윤리적 관계를 바꾼다.

긴 수명이 축복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정신과 감각이 변할 가능성도 있다.

안타르카는 하나씩 물었다.

“성공률은요?”

숫자를 들었다.

“기억을 잃을 가능성.”

들었다.

“정신이 붕괴할 가능성.”

들었다.

“시술을 시작하기 전까지 철회할 수 있나요?”

“가능합니다.”

“시작한 뒤에는요?”

“거의 불가능합니다.”

안타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무엇이 좋습니까?”

“적어도 저한테 뭘 잃을 수 있는지는 말해주시잖아요.”


마지막 면담에서 연구자가 다시 물었다.

“가족에게 알리겠습니까?”

안타르카는 말했다.

“아뇨.”

“그 결정이 가족과의 관계를 끝낼 수도 있습니다.”

“알아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알아요.”

“뱀파이어가 된 뒤 지금과 같은 가치관을 유지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안타르카가 웃었다.

“스무 살 인간도 서른 살 인간이 똑같은 사람일 거라고 장담 못 하잖아요?”

연구자는 잠시 그녀를 봤다.

“그건 규모가 다릅니다.”

“네.”

안타르카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그래도 제가 고를게요.”

이번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틀려도 제가 고른 쪽으로 틀리고 싶어요.”

그것이 최종 동의였다.


시술은 밤에 시작되었다.

안타르카는 당시 경험을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연구기록에는 남아 있다.

혈액을 빼낸다.

죽어가는 생명 맥류와 혈액의 연결을 끊는다.

새로운 혈액저주를 결속한다.

외부에서 공급된 피와 마나를 사용해 붕괴하는 신체를 다른 구조로 재편한다.

안타르카의 심장은 한 번 멈췄다.

다시 뛰기 시작했을 때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뛰지 않았다.

몸은 차가워졌다.

송곳니가 자랐다.

빛에 대한 감각이 달라졌다.

피 냄새가 지나치게 선명해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병의 통증이 사라졌다.

안타르카는 살아 있었다.

이전과 같은 인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기 이름을 기억했다.

자기가 왜 이 선택을 했는지도.

그녀는 성공 사례가 되었다.


가족에게 돌아갔을 때 안타르카는 아주 잠깐 기대했다.

자기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면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이론이 아니라 자기 딸이 문 앞에 서 있으면,
적어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먼저 볼지도 모른다고.

문은 열렸다.

어머니가 그녀를 봤다.

표정이 굳었다.

안타르카가 웃었다.

평소처럼 말하려 했다.

“보세요. 성공했...”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안타르카는 봤다.

두려움이었다.

안타르카는 그것을 평생 기억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더 나빴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네.”

안타르카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설명 꽤 오래 들었거든요.”

“농담할 일이 아니다.”

“저도 알아요.”

아버지는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

“되돌릴 수 있느냐.”

“아마 안 돼요.”

“그럼...”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안타르카가 먼저 물었다.

“죽었으면 더 나았나요?”

“그런 말이 아니다.”

“그럼 살아서 다행이라고 해주세요.”

그 한마디가 너무 어려웠다.

아버지는 끝내 하지 못했다.

안타르카 역시 다시 요구하지 않았다.


가문은 사건을 빠르게 정리했다.

귀족가의 딸이 금지된 뱀파이어화 시술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정치적인 문제가 커질 수 있었다.

안타르카는 공식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되었다.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던 상속권도 끝났다.

가문의 일원이라는 인정도 사라졌다.

당시의 법과 가문의 결정이 함께 작용했다.

안타르카는 항의할 수도 있었다.

자기가 같은 기억과 자아를 가진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었다.

처음 며칠은 그러려고 했다.

그러다 한 서류를 봤다.

자신의 사망기록.

예전 성.

이름.

사망일.

아주 깔끔했다.

살아 있는 본인 앞에 자기 죽음이 행정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안타르카는 한참 그것을 보다가 웃었다.

“참 잘 정리하셨네요.”

그리고 더 이상 그 성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세레이온을 떠날 때 국경 관리가 물었다.

“성명.”

안타르카는 자기 이름을 말했다.

“안타르카.”

관리자가 기다렸다.

“성은.”

안타르카가 잠시 생각했다.

그녀가 태어난 가문의 성을 말하면 쉬웠다.

하지만 그 집안에서는 자기가 죽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이름도 죽은 사람에게 남겨주기로 했다.

안타르카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성을 말했다.

“파인블러드.”

관리자가 물었다.

“원래 성인가.”

안타르카는 웃었다.

“지금부터는요~.”

왜 하필 그 이름이었는지는 그 뒤에도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다.

누군가는 귀족가의 혈통 자랑을 비꼬기 위해 붙였다고 한다.

누군가는 시술에 사용된 용어에서 가져왔다고 추측한다.

안타르카는 어느 쪽도 확인하지 않는다.

이름을 스스로 골랐다는 사실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리벨리온으로 갔다.

추방이라는 말과 이주라는 말을 모두 쓸 수 있었다.

세레이온에서는 더 이상 예전의 인간 신분으로 살아가기 어려웠다.

리벨리온은 뱀파이어인 그녀를 처음부터 다른 존재라고 설명할 필요가 적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안타르카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누군가 처음 만난 뒤 물었다.

“전공이 무엇입니까?”

안타르카는 잠깐 멈췄다.

“종족 말고요?”

상대가 이상한 얼굴을 했다.

“종족이 전공입니까?”

안타르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질문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혈액마법과 생체 맥류 연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기 몸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곧 다른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만들기 위해서가 되었다.


안타르카는 연구에 집요했다.

금지된 논문을 읽었다.

실패한 시술 기록을 찾았다.

흡혈귀와 인간의 혈액이 마나를 운반하는 방식의 차이를 비교했다.

혈액저주가 어떻게 생명 맥류를 우회하는지 분석했다.

자기 피도 수없이 뽑았다.

동료가 말했다.

“수석님, 자기 몸에 그만 실험하십시오.”

안타르카가 웃었다.

“제가 제일 구하기 쉬운 뱀파이어잖아요~?”

“그건 연구윤리 기준이 아닙니다.”

“아쉽네요.”

그녀는 위험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위험하다는 말만으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위험이 있다면 측정했다.

줄일 방법을 찾았다.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당사자에게 설명했다.

그 뒤에도 하겠다고 하면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안타르카는 제9문연구회에서 빠르게 유명해졌다.

실력 때문이기도 했다.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누군가 말했다.

“이 연구는 금기입니다.”

안타르카는 웃는다.

“그건 분류명인가요, 반론인가요~?”

상대가 얼굴을 굳힌다.

“수많은 나라에서 금지한 연구입니다.”

“네.”

안타르카는 고개를 끄덕인다.

“왜 금지했나요?”

“위험하니까요.”

“어떤 위험이요?”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연구하지 않으면요?”

상대가 멈춘다.

안타르카의 미소가 조금 깊어진다.

“그쪽은 안 세셨죠?”

그녀가 연구회에서 유명해진 문장도 그런 논쟁 중에 나왔다.

“하지 않은 실험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연구 기록에 남지 않는답니다~?”


그 문장은 안타르카의 과거 그 자체였다.

가족이 뱀파이어화를 금지했다면,
안타르카는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죽음은 ‘뱀파이어화 치료의 부작용’ 통계에는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혈액병 사망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금지는 사고를 만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안전해 보인다.

하지만 금지 때문에 시도되지 않은 치료.

얻지 못한 지식.

살리지 못한 사람.

그것들은 연구실 사고기록에 남지 않는다.

안타르카는 그 보이지 않는 사망자도 계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금기라는 단어에 유난히 공격적인 이유였다.


물론 모든 금지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안타르카는 생각보다 동의 절차에 엄격했다.

자기 인생에서 선택권을 빼앗겨봤기 때문이다.

실험대상자가 위험을 모르면 실험하지 않았다.

당사자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설명했다.

가족이 대신 동의하려 하면 본인 의사를 먼저 확인했다.

환자가 중간에 철회하면 연구가 몇 년 늦어져도 중단했다.

한 연구자가 불평했다.

“이미 준비비용이 상당합니다.”

안타르카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요?”

“대상자가 갑자기 철회하면 손해가...”

“선생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돈을 먼저 써놓고 상대가 거절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도 강요가 될 수 있답니다~.”

그리고 연구계획서를 돌려보냈다.

“다시 짜오세요.”


그 과정에서 구라방과 여러 번 충돌했다.

구라방 에드밀 몬테스는 안타르카가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연구금지보다 책임과 절차를 먼저 보는 국왕이었다.

그 때문에 둘은 기본적인 방향에서는 자주 동의했다.

문제는 구라방이 너무 많은 질문을 한다는 것이었다.

안타르카가 새로운 혈액저주 치료술을 들고 오면 구라방은 묻는다.

“성공 가능성.”

안타르카가 대답한다.

“예비실험 기준 61퍼센트예요.”

“실패 시.”

“혈맥 손상, 부분괴사, 드물게 사망.”

“제3자 위험.”

“격리하면 거의 없어요.”

“거의의 수치.”

안타르카가 잠깐 웃음을 멈춘다.

“폐하, 가끔은 숫자를 미워하시는 척하면서 숫자를 제일 사랑하세요.”

구라방은 반응하지 않는다.

“수치를 말씀하십시오.”

안타르카가 한숨처럼 웃는다.

“네에~.”

둘은 그런 식으로 잘 맞았다.


안타르카가 구라방을 존중하게 된 것은 세브란 사건의 기록을 읽고 난 뒤였다.

생전의 구라방이 환자들의 동의를 받은 네크로맨서를 법에 따라 처형했다.

그리고 그 연구의 단절로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구라방 자신이 그 실패를 숨기지 않았다.

안타르카는 그 기록을 읽고 국왕에게 직접 말했다.

“폐하께서 살아 계실 때 저를 만났다면 저도 죽이셨겠네요~?”

구라방이 대답했다.

“당시 법과 귀하의 시술 조건이 동일했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소.”

안타르카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변명했을 것이다.

시대가 달랐다고.

자기는 어쩔 수 없었다고.

구라방은 가능성을 그대로 인정했다.

안타르카가 웃었다.

“그런 대답을 하시니까 미워하기 어렵잖아요.”

구라방이 말했다.

“미워하는 것은 귀하의 자유요.”

“그런 말 하면 더 재미없답니다~.”


안타르카의 연구는 실제 결과를 만들었다.

자신이 앓았던 것과 유사한 혈액질환을 훨씬 일찍 찾아내는 검사법을 만들었다.

뱀파이어화까지 가지 않고도 일부 환자의 맥류를 안정시키는 혈액저주 역전술도 개발했다.

모든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패도 있었다.

하지만 선택지는 늘었다.

예전에는 죽거나 위험한 변환을 받아야 했던 환자가,
중간 단계의 치료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안타르카는 첫 성공 환자가 퇴원하던 날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환자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안타르카는 웃었다.

“저한테 감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왜요?”

“연구 대상이 되어주신 분들이 먼저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덧붙였다.

“실패한 분들도요.”

그 이름을 연구논문 뒤쪽에 가능한 한 남겼다.

죽은 사람이 실패라는 단어로만 사라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안타르카는 그 시기 자신이 옳다고 강하게 믿었다.

지식을 만든다.

공개한다.

선택지를 늘린다.

누구도 ‘방법이 없었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이 연구자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사용자의 책임이었다.

칼을 만든 사람이 모든 살인에 책임질 수는 없다.

약을 만든 사람이 모든 과다복용에 책임질 수는 없다.

연구자는 사실과 기술을 만든다.

권력자가 악용하면 권력자의 죄다.

상단이 착취하면 상단의 죄다.

안타르카는 그 구분을 매우 분명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예전만큼 간단하게 말하지 못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개발한 혈맥식별술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목적은 치료였다.

혈액질환의 조기 진단.

수혈 적합성 확인.

혈액저주의 잔류 여부 확인.

특정 약물에 치명적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미리 찾아내기 위한 기술이었다.

빠르고 정확했다.

기존 방식보다 비용도 낮았다.

안타르카는 연구성과를 널리 공개하는 편이었다.

치료기술이 특정 연구회나 국가의 독점물이 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는데 논문 열람료부터 계산하면 좀 우아하지 못하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기본 원리를 공개했다.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환자를 살렸다.

그것만으로 끝났다면 좋았을 것이다.


어느 상단이 이 기술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었다.

질병을 찾는 대신 노동자의 혈액 특성을 분류했다.

누가 장기적으로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가.

누가 특정 독성물질에 약한가.

누가 장거리 노동에서 더 빨리 쓰러질 가능성이 있는가.

처음 명분은 안전이었다.

위험한 작업에 취약한 사람을 배치하지 않는다.

사고를 줄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곧 다른 계산이 붙었다.

치료비가 많이 들 가능성이 있는 노동자는 장기계약에서 제외한다.

부상 위험이 높은 사람은 임금을 낮춘다.

혈액질환 소인이 있는 사람에게 보험료를 더 받는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는 검사 자체를 거부하면 채용하지 않았다.

문서에는 자발적 검사라고 적혀 있었다.

현실에서는 검사하지 않으면 일자리를 얻기 어려웠다.

안타르카의 기술이 사람에게 선택지를 주는 대신,
사람을 분류하는 도구가 되고 있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안타르카는 매우 차분했다.

“그건 제 연구의 목적이 아닌데요.”

동료가 말했다.

“그래도 수석님 기술입니다.”

“망치를 만든 사람이 벽을 부쉈다고 대장장이를 체포하진 않잖아요~?”

“예견할 수 있었던 사용 아닙니까?”

안타르카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지식을 악용할 가능성까지 연구자가 전부 책임지면 연구자는 아무것도 공개하지 못해요.”

그 말에는 논리가 있었다.

안타르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악용한 상단을 처벌하면 된다.

차별적인 계약을 규제하면 된다.

연구 자체와 악용을 섞으면 다시 금기의 시대가 온다고 보았다.

그녀는 오래전 가족에게서 같은 구조를 봤다.

위험하다.

그러므로 선택지를 없앤다.

그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자신의 연구에 참여했던 사람 하나가 찾아왔다.

예전 혈액검사 연구의 초기 참여자였다.

안타르카도 얼굴을 기억했다.

“오랜만이네요.”

평소처럼 웃었다.

“몸은 괜찮으세요?”

상대는 웃지 않았다.

“일을 잃었습니다.”

안타르카의 미소가 아주 조금 옅어졌다.

“왜요?”

“혈액검사 때문에요.”

그 사람은 안타르카 연구에 참여했을 때 자신의 혈액 특성을 알게 되었다.

질병 자체는 아니었다.

다만 특정 환경에서 혈액질환이 발병할 가능성이 평균보다 높았다.

상단의 신규 검사에서 같은 특성이 나왔다.

재계약이 거절되었다.

안타르카가 물었다.

“연구자료가 유출된 건가요?”

“아니요.”

“그럼 상단이 별도로 검사한 거군요.”

“네.”

안타르카는 바로 말했다.

“그렇다면 연구자료 관리 문제는 아니네요.”

상대의 표정이 굳었다.

그 순간 안타르카는 자기가 무언가 잘못 말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상대가 말했다.

“수석님은 저한테 선택지를 주고 싶다고 하셨죠.”

“맞아요.”

“병이 생기기 전에 알 수 있게 해주는 게 선택이라고.”

“맞습니다.”

“근데 지금은 검사 안 받으면 일자리를 못 구합니다.”

안타르카가 말했다.

“그건 상단의 문제예요.”

“알아요.”

“그러면...”

“근데 그 상단이 쓰는 검사법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안타르카는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계속 말했다.

“수석님이 저를 해고한 건 아닙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아예 관계없다고 말하면...”

잠시 숨을 골랐다.

“그건 좀 비겁하지 않습니까?”

안타르카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화내지 않았다.

반박할 문장은 많았다.

어떤 것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안타르카는 자기 논문을 다시 읽었다.

‘저비용 대량검사 가능.’

장점으로 적어놓았다.

‘개인별 혈액 특성 식별 가능.’

장점이었다.

‘장기 추적에 활용 가능.’

역시 장점이었다.

치료에서는.

하지만 환자가 아니라 노동자를 대상으로 사용하면 의미가 달라졌다.

저비용 대량검사.

많은 사람을 빠르게 분류할 수 있다.

개인별 식별.

사람마다 위험등급을 붙일 수 있다.

장기 추적.

같은 사람을 계속 따라갈 수 있다.

안타르카는 처음으로 자기 논문을 상단 관리자의 눈으로 읽었다.

놀랄 만큼 유용한 도구였다.

그녀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안타르카는 다음 날 구라방을 찾아갔다.

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말했다.

“폐하, 질문 하나 드릴게요.”

구라방이 문서를 내려놓았다.

“말씀하십시오.”

“칼을 만든 사람이 살인 책임까지 져야 하나요?”

“일반적으로는 아니오.”

안타르카가 웃었다.

“좋네요. 끝.”

돌아가려 했다.

구라방이 말했다.

“다만.”

안타르카가 멈췄다.

“그럴 줄 알았어요.”

구라방은 계속했다.

“특정한 사용이 충분히 예견 가능했고,
그 사용을 막는 비용이 작으며,
연구자가 위험을 알고도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면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 보기는 어렵소.”

안타르카가 돌아봤다.

“그럼 연구자는 미래의 모든 악인을 상상해야 하나요~?”

“아니오.”

“그럼 어디까지요?”

“그것이 문제요.”

안타르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너무 정직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타르카는 말했다.

“책임 범위가 불명확하면 결국 연구를 위축시켜요.”

구라방이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있소.”

“공개를 제한하면 부유한 국가와 상단만 지식을 갖게 될 수도 있고요.”

“맞소.”

“기술을 통제하려고 허가제를 만들면 제가 세레이온에서 겪었던 일과 비슷해질 수도 있어요.”

“가능하오.”

안타르카의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폐하께서는 왜 계속 제 말을 인정하시는데 짜증이 날까요?”

구라방은 건조하게 말했다.

“귀하가 단순한 결론을 원하고 있기 때문일 수 있소.”

안타르카가 몇 초 동안 그를 봤다.

“그건 좀 얄밉네요.”

“논리적 반박입니까?”

“아뇨. 감상이에요~.”


그 뒤 안타르카는 자신의 연구방식을 조금 바꿨다.

연구를 숨기지는 않았다.

전면 비공개로 돌리지도 않았다.

대신 새로운 질문을 연구계획에 넣었다.

이 기술은 치료 외에 무엇에 사용할 수 있는가.

누가 가장 쉽게 악용할 수 있는가.

사용을 거부한 사람이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가.

개인을 식별하거나 추적하는 데 전용될 수 있는가.

불필요한 정보까지 수집하고 있지는 않은가.

연구목적에 필요하지 않은 혈액정보는 처음부터 측정하지 않는 방식도 도입했다.

가능한 경우 결과를 개인 식별정보와 분리했다.

상업적 사용에는 별도의 조건을 붙였다.

차별적 계약에 이용된 사례가 확인되면 연구회가 기술지원과 갱신자료 제공을 중단할 수 있게 했다.

안타르카는 그런 규칙을 만들면서도 계속 투덜거렸다.

“연구보다 서류가 많아지고 있잖아요~.”

구라방이 지나가며 말했다.

“적응하십시오.”

안타르카가 뒤에서 웃었다.

“이래서 국왕이 싫다니까요.”

실제로 싫어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안타르카는 아직 구라방과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연구자의 책임을 지나치게 넓게 잡는 것을 경계한다.

악용을 전부 연구자의 죄로 돌리기 시작하면 권력자는 아주 편해진다.

상단이 사람을 차별했다.

그런데 책임은 기술 개발자에게 넘긴다.

국가가 감시체계를 만들었다.

그런데 책임은 측정법을 만든 학자에게 넘긴다.

안타르카는 그것도 일종의 책임 회피라고 생각한다.

“제가 피를 분석했다고 누군가 노동자를 해고했으면,
해고한 놈부터 잡으셔야죠.”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지금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예전에는 그 뒤에 마침표를 찍었다.

지금은 쉼표가 붙는다.

그리고 연구자가 악용 가능성을 알고도 더 편하게 악용할 수 있는 기능을 만들어줬는지는 별도로 본다.

그 차이를 아직 정확히 어디에 그어야 할지 모른다.


이 문제는 안타르카의 과거와 정확히 반대 방향에서 그녀를 압박한다.

예전에는 지식이 없어서 선택할 수 없었다.

가족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방법 자체를 금지했다.

그래서 안타르카는 지식을 열어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은 지식이 너무 잘 열려서 다른 사람이 그것으로 선택을 좁힐 수 있다.

혈액검사를 받지 않으면 고용되지 않는다.

검사를 받으면 위험등급이 붙는다.

위험등급이 낮으면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든다.

선택지를 만들기 위해 만든 지식이 선택지를 빼앗는다.

안타르카는 그 모순을 매우 싫어한다.

논리적 모순을 발견하는 것은 원래 즐거운 일이었다.

자기 신념 안에서 발견하면 별로 즐겁지 않았다.


제9문연구회에서 젊은 연구자 하나가 최근 물었다.

“수석님은 연구를 공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안타르카는 미소를 지었다.

“둘 다요.”

“모순 아닙니까?”

“아뇨.”

그녀는 손가락으로 붉은 결정 조각을 돌렸다.

“접근 가능한 것과 아무 조건 없이 사용 가능한 건 다른 말이잖아요~?”

“그럼 누가 조건을 정합니까?”

안타르카가 멈췄다.

“그게 귀찮은 부분이죠.”

국가가 정하면 금기로 변할 수 있다.

상단이 정하면 독점이 될 수 있다.

연구자가 정하면 학자가 지나치게 큰 권력을 가진다.

모두에게 맡기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수도 있다.

완벽한 답은 없다.

안타르카는 완벽한 답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연구를 멈추지는 않는다.

대신 이전보다 더 많이 기록한다.

누가 사용할 수 있는지.

누가 피해를 입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용은 자신이 반대하는지.


안타르카는 세레이온을 완전히 증오하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그곳에서 가족을 잃었다.

인간 신분도 잃었다.

자신을 살린 치료는 금기로 취급되었다.

그래도 세레이온의 치료사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기억한다.

병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밤새 곁에 있던 성직자도 있었다.

가족 역시 자신을 죽이고 싶어서 치료를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안타르카가 괴물이 되는 것을 막는 것이 보호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그녀의 선택을 빼앗았다.

안타르카는 그 차이를 구분한다.

악의가 없었다는 것이 잘못을 지우지는 않는다.

하지만 악의가 없었다는 사실도 지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세레이온 사람과 연구윤리를 논쟁할 때 오히려 더 집요하다.

“걱정해서 금지한다는 말, 저 정말 많이 들어봤거든요~.”

그러면서도 상대의 우려를 끝까지 듣는다.

자기도 한때 우려를 편견으로만 취급하려 했기 때문이다.


가족과 다시 만났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137년 동안 한 번도 소식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안타르카는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원래 가문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제9문연구회 신규 직원이 인사기록을 작성하다 물은 적이 있었다.

“출생 가문을 기재해야 합니다.”

안타르카가 말했다.

“싫은데요~.”

“기록상 필요합니다.”

“왜요?”

“신원 확인을 위해...”

“지금 제 신원은 안타르카 파인블러드예요.”

“과거 기록과 연결하려면...”

안타르카의 미소가 조금 얇아졌다.

“연결하기 싫다니까요.”

직원이 난처해했다.

안타르카는 서류를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출생지 세레이온.”

“생전 종족 인간.”

“뱀파이어화 시점 스무 살.”

“이 정도면 연구에 필요한 정보는 다 있죠?”

잠시 붉은 눈이 직원을 바라봤다.

“족보 연구하실 거 아니잖아요~.”

그 뒤 해당 항목은 공란으로 남았다.


자신이 만든 성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꽤 마음에 들어 한다.

누군가 물었다.

“파인블러드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안타르카는 늘 다른 답을 한다.

“예뻐서요.”

다른 날에는.

“제가 피 연구자잖아요?”

또 다른 날에는.

“귀족 성씨처럼 들리지 않나요~?”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전부 거짓일 수도 있다.

다만 그녀는 그 이름만큼은 누구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자기가 골랐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안타르카의 삶에서 선택이라는 것은 이름 하나에도 그렇게 깊게 들어가 있다.


그녀의 전투방식 역시 연구와 묘하게 닮아 있다.

안타르카는 무작정 생명력을 빨아들이지 않는다.

상대의 혈액 흐름과 맥류를 본다.

어느 지점이 약한지 계산한다.

혈액저주를 걸어 순환을 흐트러뜨린다.

필요하면 생명력을 빼앗아 상대를 급격하게 약화시킨다.

붉은 결정창은 피와 마나를 결정화해 만든다.

육체와 맥류를 동시에 손상시키기 때문에 치명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정밀하게 사용한다.

한 번 잘못 찌르면 상대를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주변 마법흐름까지 망가뜨릴 수 있다.

전투 중에도 그녀는 웃을 때가 있다.

“거기서 계속 막으시면 혈류가 더 안 좋아지는데요~?”

상대는 대개 농담이라고 생각한다.

몇 초 뒤 다리가 풀린다.

안타르카가 고개를 기울인다.

“말씀드렸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전투 자체를 연구처럼 즐기지는 않는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과 전투를 섞는 것을 싫어한다.

한 연구자가 전장에서 새 술식을 시험해보자는 말을 했을 때 바로 거절했다.

“적한테 쓰는 건데요?”

안타르카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요?”

“적은 동의 대상이 아니잖습니까.”

“전투행위에는 동의가 필요 없죠.”

“그럼...”

“실험에는 필요하답니다~.”

상대가 혼란스러워했다.

안타르카가 설명했다.

필요한 전투행위와 연구목적의 추가위험은 다르다.

적을 제압하는 데 필요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전투다.

검증되지 않은 술식을 ‘어차피 적이니까’ 시험하는 순간 다른 행위가 된다.

그 차이를 섞으면 연구윤리는 가장 먼저 적에게서 사라지고,
곧 약한 사람에게서도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안타르카는 뱀파이어가 된 것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대답은 빠르다.

“아뇨.”

누군가 묻는다.

“가족을 잃었는데도요?”

“네.”

“인간으로서의 삶도 잃으셨잖습니까.”

안타르카의 표정이 조금 바뀐다.

“그 말이 제일 재미있어요.”

“왜요?”

“인간으로서의 삶을 유지하려면 제가 죽어야 했는데요?”

그녀는 부드럽게 웃는다.

“죽은 사람이 인간 신분을 참 잘 누리겠네요~.”

잔혹한 농담처럼 들린다.

실제로는 그녀의 가장 오래된 상처다.

안타르카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어서 뱀파이어가 된 것이 아니다.

살고 싶어서 선택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뒤 주변 사람들이 그 선택을 인간의 죽음으로 정의했다.

그래서 그녀는 남이 정한 범주보다 당사자의 선택을 더 중요하게 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자신을 ‘원래 인간의 연장’으로만 생각하지도 않는다.

137년을 살았다.

뱀파이어로서의 시간이 인간이던 시간보다 훨씬 길다.

피를 마시는 감각도 익숙하다.

자기 종족의 욕구와 위험을 안다.

다른 뱀파이어들과 공동체를 이루어본 적도 있다.

언제까지나 스무 살 인간의 사고사례처럼 살 생각은 없다.

그래서 누군가 지나치게 동정적인 표정으로 말한다.

“원래 인간이셨는데...”

안타르카는 웃는다.

“지금은 원래 뱀파이어처럼 잘 살고 있답니다~.”

그녀에게 변화는 실패가 아니다.

선택의 결과다.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전체 선택을 부정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과 같은 선택을 권하는 것은 매우 조심한다.

혈액병 환자가 찾아와 묻는다.

“수석님도 뱀파이어화로 살아남으셨죠?”

“네.”

“그러면 저도 하는 게 낫겠습니까?”

안타르카는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그건 제가 정하면 안 되죠.”

환자가 답답해한다.

“전문가시잖아요.”

“그래서 더 정하면 안 돼요.”

안타르카는 자료를 펼친다.

성공률.

실패 가능성.

대체치료.

뱀파이어가 된 뒤의 변화.

혈액 공급 문제.

사회적인 불이익 가능성.

그리고 치료하지 않을 경우의 예측까지.

“제가 할 수 있는 건 선택지를 보여드리는 거예요.”

환자가 묻는다.

“수석님이라면요?”

안타르카가 웃는다.

“저는 했잖아요~.”

그러다 표정이 진지해진다.

“그게 선생님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안타르카가 자기 연구를 공개하면서도 최근 일부 기능에는 제한을 두기 시작하자,
젊은 시절의 그녀를 아는 연구자들이 놀랐다.

“수석님이 기술접근 제한을 주장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안타르카가 말했다.

“저도 몰랐어요~.”

“금기는 죽음을 만든다고 하셨잖습니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왜 제한합니까?”

안타르카는 잠시 생각했다.

“문을 열어주는 것과 누군가 목에 목줄을 채워주는 건 다르더라고요.”

“그럼 어디까지 공개해야 합니까?”

그녀의 미소가 조금 난처해졌다.

“그걸 알아내려고 제가 수석연구원 하는 거 아니겠어요?”

정답이 없다고 연구를 그만둘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정답이 없어서 더 파고든다.


구라방과는 이 문제를 두고 아직도 논쟁한다.

안타르카가 말한다.

“예견 가능한 악용이라는 말도 꽤 위험해요.”

“어째서요.”

“세상 모든 기술은 누군가 나쁘게 쓸 수 있으니까요.”

“동의하오.”

“그럼 연구자에게 어디까지 책임을 줘요?”

구라방이 대답한다.

“무한책임은 부당하오.”

안타르카가 미소를 짓는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말 하시네요.”

구라방은 계속한다.

“그러나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한 책임이 0이라는 주장도 부당하오.”

안타르카의 미소가 다시 얇아진다.

“역시 끝까지 마음에 들게 하진 않으시네요~.”

구라방은 별 반응이 없다.

“그것이 목적은 아니오.”

둘은 그런 식으로 몇십 년은 더 논쟁할 수 있을 것이다.

안타르카는 그 사실을 꽤 좋아한다.

완성된 답보다 계속 반박할 상대가 있는 편이 연구자에게는 유용하기 때문이다.


현재 제9문연구회에서 안타르카는 후배에게 세 가지를 자주 묻는다.

“왜 해야 하죠?”

“누가 위험하죠?”

“안 하면 누가 죽죠?”

마지막 질문을 빼먹는 연구계획을 특히 싫어한다.

위험만 계산하면 금지가 항상 안전해 보인다.

하지만 하지 않았을 때의 피해도 비교해야 한다.

반대로 요즘은 네 번째 질문도 붙는다.

“성공하면 누가 이걸 갖게 되죠?”

후배가 대답한다.

“환자들이요.”

안타르카가 웃는다.

“정말요?”

“예?”

“특허는 누가 갖고, 장비는 누가 만들고, 가격은 누가 정하고, 검사는 누가 요구하는데요~?”

후배가 말을 잃는다.

안타르카는 논문을 돌려준다.

“그 부분도 생각해오세요.”

예전의 그녀라면 연구 이후의 문제라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적어도 연구가 끝나는 지점이 어디인지 다시 의심한다.


물론 그녀는 지나치게 신중해져 연구를 멈추는 것도 싫어한다.

어느 심사에서 위험한 혈액저주 치료가 거절될 위기에 처했다.

한 의원이 말했다.

“악용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안타르카가 물었다.

“어느 정도요?”

“확실하지 않습니다.”

“방지 방법은 검토했나요?”

“아직입니다.”

“그러면 왜 금지부터 해요?”

“위험하니까...”

안타르카가 미소를 지었다.

“그 말 정말 편리하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위험을 발견하면 해결방법부터 연구하세요.”

“해결이 안 되면 그때 중단하고요.”

“처음부터 문을 닫아버리면 문 너머에서 죽는 사람은 아무도 안 보인답니다~.”

그녀는 여전히 금지보다 조건을 먼저 찾는다.

그 부분은 변하지 않았다.


안타르카의 개인 연구실에는 오래된 세레이온식 장신구 하나가 있다.

가문의 문장은 깎여 있다.

누가 준 것인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버리지도 않는다.

연구가 잘 풀리지 않는 날에는 가끔 그것을 만지작거린다.

자신을 사랑했지만 자기 선택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가족.

살아남았지만 가족을 잃었던 스무 살의 자신.

그리고 백 년 넘게 지난 지금,
자기 연구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의 선택이 좁아지는 모습을 보는 자신.

안타르카는 가끔 묻는다.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신도 다른 방식의 폭력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그 질문이 무서워 연구를 멈추지는 않는다.

멈추는 것 역시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만큼은 너무 잘 안다.


그녀에게 가장 싫은 문장은 여전히 이것이다.

‘위험하니 하지 맙시다.’

안타르카는 반드시 묻는다.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환자가 죽는가.

치료법이 사라지는가.

다음 연구자가 처음부터 같은 실패를 반복하는가.

그 비용을 계산한 뒤에도 금지가 더 낫다면 금지할 수 있다.

안타르카는 그것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금지하는 사람이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 책임도 없다고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동시에 최근에는 자기 자신에게 반대 질문도 한다.

‘연구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누가 살게 되는가.

누가 돈을 버는가.

누가 사람을 분류하게 되는가.

누가 그 기술을 거부할 권리를 잃는가.

그 결과까지 연구자가 전부 책임져야 한다고는 아직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른 척해도 된다고도 더 이상 말하지 못한다.


그래서 안타르카 파인블러드는 지금도 모순적인 연구자다.

지식을 자유롭게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지식의 사용에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선택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면서 어떤 선택은 현실의 권력이 만들어낸 강요일 수 있다고 의심한다.

금기를 싫어한다.

그러면서 자기 연구에 금지된 사용처를 붙이기 시작했다.

연구자의 책임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기 기술 때문에 피해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그냥 타인의 책임이라고 넘기지 못한다.

예전의 안타르카라면 이런 모순을 발견하고 상대를 놀렸을 것이다.

지금은 자기 자신에게 웃는다.

“아, 이것 참.”

붉은 눈이 논문 위를 훑는다.

“제가 제일 재미있는 연구대상이 되어버렸네요~.”


새로운 치료술 심사가 열리는 날,
젊은 연구자가 긴장한 얼굴로 발표한다.

“위험성이 높아 금지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안타르카가 의자에 기대어 앉는다.

검은 고스로리 드레스의 레이스 장갑 위로 손가락을 겹친다.

“그건 아직 모르죠.”

“사망 가능성이 있습니다.”

“수치.”

연구자가 말한다.

“약 12퍼센트입니다.”

“치료하지 않으면요?”

“1년 이내 사망 가능성이 78퍼센트입니다.”

안타르카의 눈빛이 조금 달라진다.

“좋아요. 이제 비교할 수 있겠네요.”

“동의 대상자는 여섯 명입니다.”

“거절하면 기존 치료는 유지돼요?”

“예.”

“비용은요?”

연구자가 멈칫한다.

안타르카가 미소를 짓는다.

“그 표정 보니까 아직 확인 안 했네요~?”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술이 성공하면 누가 사용할 수 있는지도 가져오세요.”

“연구회에서 관리하면...”

“그건 소유자고요.”

안타르카가 말을 끊는다.

“제가 물은 건 누가 통제당할 수 있느냐는 쪽이에요.”

젊은 연구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안타르카는 다시 웃는다.

“겁먹을 건 없어요.”

“제가 금지부터 외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연구자가 조금 안도한다.

안타르카는 바로 덧붙인다.

“그렇다고 허가부터 해주는 사람도 아니고요~.”

안도했던 표정이 다시 굳는다.

안타르카는 즐거워한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장난이 아니다.

“왜 해야 하는지 보여주세요.”

“어떤 위험인지 보여주시고.”

“누가 동의했는지도.”

“누가 거절할 수 없는지도.”

“성공한 뒤 누가 그 지식을 쥐는지도요.”

그리고 손끝으로 연구계획서를 가볍게 두드린다.

“그걸 다 본 다음에 결정하면 돼요.”


누군가는 그녀의 이런 태도가 지나치게 대담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위험한 연구를 너무 쉽게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반대로 어떤 연구자는 요즘의 안타르카가 예전보다 지나치게 규제를 많이 요구한다고 불평한다.

안타르카는 양쪽 말을 듣고 웃는다.

“양쪽에서 불평하면 제가 중간에 있다는 뜻일까요?”

구라방이 옆에서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증거가 아니오.”

안타르카가 국왕을 바라본다.

“아, 정말 재미없으세요.”

“반론이 있습니까?”

“없어서 더 재미없어요~.”

그녀는 그렇게 웃으면서 다시 연구서를 펼친다.


안타르카는 여전히 자기 선택을 옳았다고 생각한다.

뱀파이어가 된 것.

세레이온을 떠난 것.

파인블러드라는 성을 만든 것.

금지된 연구를 파고든 것.

그 선택들이 정의로웠다고까지 말할 생각은 없다.

가족에게 상처를 줬다.

시술 자체도 위험했다.

자기가 살아남았다고 같은 선택이 모두에게 옳아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선택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대신 이제는 한 단계 더 어려운 질문을 가지고 산다.

선택지를 만드는 지식이 다른 누군가의 선택지를 빼앗는 순간,
그 책임은 누구의 것인가.

사용한 권력자.

이익을 본 상단.

허용한 국가.

기술을 만든 연구자.

혹은 모두에게 서로 다른 몫이 있는가.

안타르카는 아직 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 질문만큼은 지금도 누구보다 빠르게 던진다.

심사위원 하나가 말한다.

“위험성이 크므로 하지 않는 편이 안전합니다.”

안타르카의 붉은 눈이 상대를 향한다.

입가에 우아한 미소가 걸린다.

“그럼 하나만 여쭤볼게요.”

조금 늘어진 목소리.

부드럽다.

그래서 더 피하기 어렵다.

“하지 않으면 죽는 사람은 몇 명이죠~?”

상대가 침묵한다.

안타르카가 연구기록을 펼친다.

“그 숫자부터 같이 보자고요.”

그리고 이제는 그 옆에 다른 장도 함께 펼친다.

성공했을 때 기술을 누가 갖게 되는가.

누가 사용할 수 있는가.

누가 사용을 거절할 수 없는가.

누가 그 지식 때문에 새로운 위험에 놓이는가.

예전의 안타르카는 첫 번째 죽음만 세려고 했다.

하지 않아서 죽는 사람.

지금의 안타르카는 두 번째 피해도 세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해서 살아남았지만,
그 지식 때문에 자유를 잃는 사람.

그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연구기록의 여백으로 밀어내지 않는 것.

아마 그것이 앞으로 안타르카 파인블러드가 평생 파고들 가장 어려운 연구가 될 것이다.

RRN
릴리아네
리벨리온 제9문연구회-정동·욕망연구관
“흐음...욕망은 거짓말하지 않아.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해. 진실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전부인 건 아니니까...”
🩸 HP100
💪 공격력10
🧙 마법력45
✨ 신비력75
🛡️ 방어력20
🔗 항마력65
😖 신비저항80
🏃 회피력55
과거 보기
릴리아네는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의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는,
말보다 먼저 오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웃으면서 싫다고 말해도,
그 안쪽에 남아 있는 기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도망치고 싶어 하는 마음.

경건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칭찬받기를 바라는 욕심.

릴리아네에게 그런 것들은 숨겨진 것이 아니었다.

너무 잘 보였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어린 릴리아네는 사람의 말을 잘 믿지 않았다.

말은 바뀌었다.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체면 때문에 숨겼다.

겁이 나면 거짓말했다.

하지만 욕망은 달랐다.

원하는 것은 원했다.

두려운 것은 두려웠다.

싫다고 말하면서도 원하는 마음이 있으면,
릴리아네에게는 그 욕망이 더 진짜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남들보다 사람을 더 잘 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많은 경우 맞았다.

누가 누구를 질투하는지.

누가 결혼을 원하지 않는지.

누가 돈 때문에 거짓말하는지.

누가 권력을 탐내는지.

릴리아네는 쉽게 알아냈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불편해하면서도 필요로 했다.


성인이 된 뒤 릴리아네는 귀족사회에서 욕망감정사로 일했다.

공식적인 법률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귀족과 상인들은 그녀를 자주 불렀다.

혼인분쟁.

계약파기.

상속다툼.

불륜의심.

협박.

배신.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엇갈릴 때,
릴리아네에게 묻는 것이다.

“저 사람은 정말 무엇을 원합니까?”

릴리아네는 대답했다.

대부분 정확했다.

그래서 명성도 생겼다.


처음에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을 거짓말에서 구해준다고 생각했다.

말로는 충성한다고 하면서 배신을 원하는 사람.

사랑한다고 하면서 재산만 탐내는 사람.

억울하다고 울면서 실제로는 상대가 사라지길 원하는 사람.

릴리아네는 그런 모순을 드러냈다.

주변에서는 그녀를 칭찬했다.

“서큐버스 앞에서는 거짓말이 안 통하는군.”

릴리아네도 웃었다.

“욕망은 정직하거든.”

그 말을 정말 믿었다.


문제의 사건은 어느 귀족가에서 일어났다.

한 젊은 시녀가 집안의 남성 귀족을 고발했다.

강제로 관계를 요구했다고 했다.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계속 압박했다고 했다.

귀족 측은 부인했다.

오히려 시녀가 먼저 접근했다고 주장했다.

사건은 빠르게 커졌다.

시녀는 하급평민이었다.

상대는 이름 있는 귀족이었다.

결국 릴리아네가 불려왔다.


릴리아네는 시녀와 마주 앉았다.

시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목소리도 떨렸다.

하지만 말은 분명했다.

“저는 싫다고 했습니다.”

릴리아네는 그녀의 욕망을 읽었다.

그리고 멈칫했다.

그 안에는 공포가 있었다.

분노도 있었다.

수치심도 있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정도 있었다.

상대를 좋아한 흔적.

선택받고 싶었던 마음.

안기고 싶었던 욕망.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했다.

릴리아네는 그때 그걸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론이라고 생각했다.


귀족 측의 질문은 간단했다.

“저 여자는 그 남자를 원했습니까?”

릴리아네는 대답했다.

“응.”

“애정도 있었습니까?”

“있었어.”

“관계를 바란 적도 있었습니까?”

릴리아네는 다시 확인했다.

있었다.

그래서 말했다.

“있었지.”

그 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시녀의 얼굴도 바뀌었다.

릴리아네는 그 표정을 봤다.

하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재판은 빠르게 기울었다.

귀족 측은 릴리아네의 증언을 반복했다.

상대를 원했다.

애정이 있었다.

관계를 바란 적도 있었다.

그 사실들은 전부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강력했다.

시녀의 “싫다고 했다”는 말은 점점 작아졌다.

사람들은 말했다.

처음부터 좋아했던 것 아니냐.

마음이 바뀐 뒤 보복하려는 것 아니냐.

귀족의 돈을 노린 것 아니냐.

결국 남성 귀족은 거의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시녀 쪽의 평판이 망가졌다.

일자리도 잃었다.

릴리아네는 그때까지도 자신의 증언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뒤,
그 시녀가 릴리아네를 찾아왔다.

릴리아네는 처음에는 항의하러 온 줄 알았다.

시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용했다.

“당신 말 맞아요.”

릴리아네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

“저 그 사람 좋아했어요.”

릴리아네는 잠깐 침묵했다.

시녀가 말했다.

“선택받고 싶었어요.”

“안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같이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요.”

릴리아네는 조용히 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싫었어요.”


릴리아네가 말했다.

“둘 다 있었어.”

“알아요.”

“좋아하는 마음도 있었고.”

“알아요.”

“원하는 마음도.”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요?”

릴리아네는 대답하지 못했다.

시녀는 계속 말했다.

“좋아하면 싫다고 말할 수 없나요?”

릴리아네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원한 적이 있으면 거절하면 안 돼요?”

“한 번 안기고 싶다고 생각했으면 그다음에는 싫어할 수 없는 건가요?”

릴리아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녀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당신은 제 마음을 다 봤잖아요.”

“응.”

“그런데 왜 그중 하나만 골라서 그게 진짜 저라고 했어요?”

릴리아네는 그 질문을 평생 잊지 못했다.

그날 처음으로 자신의 능력을 의심했다.

정확히는,
능력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너무 정확했다.

그래서 문제였다.

욕망은 분명 존재했다.

애정도 진짜였다.

공포도 진짜였다.

거절도 진짜였다.

그런데 릴리아네는 그중 자신이 읽기 쉬운 하나를 골라,
그 사람 전체의 진실이라고 말해버렸다.


그 뒤 릴리아네는 자신이 참여했던 다른 사건들도 다시 찾아봤다.

불편한 기록들이 나왔다.

“권력을 원했다.”

그래서 반역 의도가 있다고 판단한 사건.

“돈을 원했다.”

그래서 뇌물을 받을 의사가 있었다고 본 사건.

“상대를 사랑했다.”

그래서 강압이 아니었다고 여긴 사건.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배신하려 했다고 판단한 사건.

욕망은 전부 실제였다.

하지만 행동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선택과도 달랐다.

의사와도 달랐다.

릴리아네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해왔는지 알았다.


귀족사회는 그녀의 반성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했다.

“당신의 능력은 유용합니다.”

릴리아네가 대답했다.

“그래서 더 위험해.”

“욕망은 거짓말하지 않잖습니까.”

“응.”

“그렇다면 증거로 쓸 수 있지 않습니까?”

릴리아네는 잠시 웃었다.

예전의 자신도 같은 말을 했다.

그래서 더 이상 웃기지 않았다.

“진실이라고 해서 전부는 아니야.”

상대는 이해하지 못했다.

릴리아네는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녀가 리벨리온으로 향한 것은 도망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답을 찾고 싶었다.

욕망과 의도는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충동과 선택은 무엇이 다른가.

공포 속에서 한 동의는 어디까지 본인의 의사인가.

사랑과 의존은 어떻게 다른가.

싫다는 말과 원하는 감정이 동시에 존재할 때,
무엇을 따라야 하는가.

릴리아네는 처음으로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게 제9문연구회에 들어간 이유였다.


안타르카와 처음 만났을 때,
둘은 금방 의견이 갈렸다.

안타르카는 말했다.

“선택지를 늘리려면 지식이 필요하답니다~.”

릴리아네는 대답했다.

“많이 알아도 잘못 고를 수 있어.”

“그건 당사자의 선택이죠.”

“공포 때문에 고르면?”

“그래도 선택은 선택 아닌가요~?”

릴리아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얼마나 무서워야 선택이 아니게 되는데?”

안타르카는 웃었다.

“재밌네요.”

릴리아네가 말했다.

“난 별로.”

그날부터 둘은 자주 논쟁했다.


릴리아네는 연구회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상대의 욕망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읽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먼저 묻는다.

“봐도 돼?”

누군가 웃으며 말한다.

“이미 보이는 거 아닙니까?”

릴리아네는 대답한다.

“보이는 거랑 들여다보는 건 달라.”

서큐버스에게 타인의 욕망은 향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가까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조금은 알게 된다.

하지만 집중하면 훨씬 깊이 들어갈 수 있다.

릴리아네는 그 차이를 의식적으로 지킨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사생활에도 아주 엄격한 선을 긋는다.

사람들은 서큐버스라면 남의 연애나 욕망에 관심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릴리아네는 오히려 반대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눈치채도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 숨기고 있는 욕망을 알아도 놀리지 않는다.

상대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 이상 묻지 않는다.

가끔 안타르카가 장난친다.

“누가 저 좋아하는지 알려주세요~.”

릴리아네가 대답한다.

“싫어.”

“알면서요?”

“알아서 더 싫어.”


퍼핏과의 관계는 조금 특별하다.

퍼핏은 표정을 자주 연기한다.

릴리아네는 그것을 금방 알아챘다.

웃는 얼굴.

걱정하는 얼굴.

조금 화난 얼굴.

표정과 내부의 감정 강도가 맞지 않았다.

처음에는 흥미로웠다.

하지만 캐묻지 않았다.

어느 날 퍼핏이 먼저 말했다.

“알고 계시지요.”

릴리아네가 대답했다.

“응.”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까?”

“네가 말 안 했으니까.”

퍼핏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날 이후 둘 사이의 거리는 조금 가까워졌다.


릴리아네는 퍼핏에게 가끔 묻는다.

“지금 삶 좋아해?”

퍼핏은 대답한다.

“그 질문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럼 뭐가 정확한데?”

“계속 살고 싶으냐고 물으십시오.”

릴리아네가 웃는다.

“그건 달라?”

“매우 다릅니다.”

릴리아네는 그런 대답을 좋아한다.

욕망과 선택을 구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구라방은 릴리아네의 능력을 재판에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릴리아네는 조금 놀랐다.

“왜 안 써?”

구라방이 대답했다.

“욕망은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오.”

릴리아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문장은 자신이 아주 늦게 배운 것이었다.

구라방은 이어 말했다.

“그리고 개인의 내면을 국가가 증거로 강제열람하는 선례도 만들고 싶지 않소.”

릴리아네는 그때부터 구라방을 조금 신뢰하게 되었다.

아주 많이는 아니다.

그녀는 원래 사람을 쉽게 완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연구는 계속됐다.

릴리아네는 욕망을 몇 가지로 분류하려 했다.

즉각적인 충동.

오래된 욕구.

공포에서 비롯된 회피.

애착.

의존.

인정욕구.

성적욕망.

생존욕구.

하지만 연구할수록 분류는 더 복잡해졌다.

한 욕망이 다른 욕망으로 변했다.

사랑과 소유욕이 함께 있었다.

두려움과 기대가 동시에 존재했다.

죽고 싶다는 사람 안에 살고 싶은 욕망이 남아 있기도 했다.

릴리아네는 점점 확신을 잃었다.

예전 같으면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는 답이 하나여야 하는지부터 의심한다.


전투에서는 자신의 감각을 다르게 사용한다.

상대가 공격하고 싶은 순간.

도망치고 싶은 순간.

겁을 먹은 순간.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지.

어디를 보고 있는지.

그 미세한 충동을 읽는다.

그래서 움직임을 예측한다.

환각으로 시선을 흔든다.

감각을 어긋나게 한다.

상대가 자신의 공포를 더 크게 느끼도록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가능하면 직접 욕망 자체를 바꾸는 일은 피한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그 선을 넘으면 상대가 한 행동이 누구의 선택인지 불분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당시에도 거짓말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가장 무서운 부분이다.

악의를 품은 사람이 틀리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자기가 옳다고 믿으면서 틀리는 것은 훨씬 어렵다.

릴리아네는 그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자신이 확신할수록 한 번 더 멈춘다.

특히 상대의 욕망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질 때.

그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가끔 예전의 시녀를 떠올린다.

그녀가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릴리아네는 정확히 모른다.

몇 번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다 멈췄다.

자신이 사과하고 싶다는 이유로 다시 찾아가는 것도 결국 자기 욕망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용서받고 싶은 마음.

죄책감을 덜고 싶은 마음.

자신이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그것들도 전부 욕망이었다.

그래서 편지를 한 번 썼다.

보내지 않았다.

몇 년 뒤 다시 썼다.

그것도 보내지 않았다.

아직도 연구실 서랍 어딘가에 남아 있다.


안타르카가 우연히 그 편지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내용은 읽지 않았다.

봉투만 보고 물었다.

“안 보내실 건가요~?”

릴리아네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사과하고 싶잖아요.”

“응.”

“그럼 보내면 되죠.”

릴리아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사과하고 싶은 거랑 그 사람이 내 사과를 받고 싶은 건 다르잖아.”

안타르카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리고 웃었다.

“당신답네요.”

릴리아네는 그 말이 칭찬인지 아닌지 아직도 모른다.


서큐버스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그녀를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누군가는 가까이 있기만 해도 마음을 빼앗길 거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반대로 자신은 절대 유혹당하지 않을 거라고 허세를 부린다.

릴리아네는 둘 다 피곤해한다.

“내가 뭐 아무나 홀리고 다니는 줄 알아?”

누군가 농담으로 말한다.

“서큐버스잖아.”

릴리아네는 웃는다.

“너 인간이잖아. 그럼 아무 인간이나 때리고 다녀?”

상대는 대개 입을 다문다.

릴리아네는 만족한다.


그녀는 욕망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중하게 본다.

살고 싶은 욕망.

사랑받고 싶은 욕망.

먹고 싶은 욕망.

인정받고 싶은 욕망.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

그것들은 생명을 움직인다.

문제는 욕망을 명령처럼 취급할 때다.

원한다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싫다고 해서 욕망이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다.

욕망은 방향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걸음을 대신 걸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지금의 릴리아네가 믿는 것이다.


가끔 연구생들이 묻는다.

“그럼 욕망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까?”

릴리아네는 바로 고개를 젓는다.

“엄청 중요하지.”

“그런데 왜 증거로 쓰면 안 됩니까?”

“칼도 중요해.”

“네?”

“그렇다고 사람마다 칼 들고 있다고 살인범이라고 하진 않잖아.”

연구생이 생각한다.

릴리아네는 덧붙인다.

“욕망도 비슷해.”

“있다는 건 사실.”

“그걸 어떻게 할지는 다른 문제.”


릴리아네는 사랑도 같은 방식으로 본다.

누군가 자신을 욕망한다고 해서 사랑한다고 믿지 않는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욕망하지 않는다고 해서 거짓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연애에는 의외로 조심스럽다.

누군가 그녀에게 진심으로 호감을 표현하면,
릴리아네는 오히려 상대의 욕망을 읽지 않으려고 한다.

집중하지 않는다.

거리를 둔다.

가능하면 말로 듣는다.

상대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본다.

자신의 종족적 감각보다 상대의 행동을 더 믿으려고 한다.

쉽지는 않다.


그녀 자신에게도 욕망이 있다.

호기심.

애정.

성적욕망.

인정받고 싶은 마음.

과거를 바로잡고 싶은 마음.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

릴리아네는 자기 욕망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원한다고 느끼면 묻는다.

정말 할 것인가.

지금 선택할 것인가.

그 결과도 원하는가.

예전에는 남에게만 묻지 않았던 질문이다.

지금은 자신에게도 묻는다.


어느 날 퍼핏이 물었다.

“욕망을 믿지 않으십니까?”

릴리아네가 대답했다.

“믿어.”

“그런데 왜 그렇게 경계하십니까?”

릴리아네는 잠시 생각했다.

“너무 잘 맞으니까.”

퍼핏이 바라본다.

“무슨 뜻입니까?”

“거짓말이면 틀렸다고 버리면 돼.”

릴리아네가 웃지 않고 말했다.

“근데 욕망은 진짜잖아.”

“진짜라서 사람들이 전부라고 착각해.”

퍼핏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아네는 지금도 욕망을 읽는다.

그 능력을 버리지 않았다.

연구도 계속한다.

다만 예전과 순서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먼저 읽고,
그다음 상대의 말을 판단했다.

지금은 먼저 듣는다.

무엇을 말했다.

무엇을 선택했다.

무엇을 거절했다.

어떤 조건에서 그렇게 했는지 본다.

그리고 마지막에 욕망을 본다.

그것도 필요할 때만.

욕망은 답이 아니라 자료가 되었다.

그녀에게는 아주 큰 변화였다.


오늘도 제9문연구회의 연구실 한쪽에서 릴리아네는 보고서를 읽고 있다.

앞머리가 눈을 완전히 덮고 있다.

누군가는 정말 앞이 보이느냐고 묻는다.

릴리아네는 대충 손을 흔든다.

“보여.”

“어떻게요?”

“굳이 눈으로 다 봐야 해?”

상대가 조금 불안해한다.

릴리아네가 웃는다.

“걱정 마. 너 뭐 원하는지 안 보고 있으니까.”

“그 말을 들으니 더 불안한데요.”

“그럼 성공이네.”


잠시 뒤 연구생 하나가 실험기록을 가져온다.

“이 피실험자는 분명 약물을 원했습니다.”

릴리아네의 손이 멈춘다.

“그래?”

“예. 욕망반응도 강했습니다.”

“그래서?”

“동의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릴리아네는 보고서를 덮는다.

평소의 나른한 웃음이 사라진다.

“다시 물어.”

“이미 반응이—”

“반응 말고.”

목소리가 낮아진다.

“입으로.”

연구생이 입을 다문다.

릴리아네는 천천히 말한다.

“원하는 건 중요해.”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해.”

그녀는 오래전 자신이 했던 증언을 떠올린다.

사실이었고,
그래서 사람을 망쳤던 말.

릴리아네는 조용히 덧붙인다.

“욕망은 거짓말하지 않아.”

잠깐 침묵.

“진실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전부인 건 아니니까.”

그것이 지금의 릴리아네가 제9문연구회에서 가장 자주 남기는 경고다.


단절의 뿔2명
KUT
쿠테
리벨리온단절의 뿔-지도자
“좋은 인간이 있다는 말은 알아. 나도 만나봤어. 그래서, 뭐가 달라졌지?”
🩸 HP120
💪 공격력25
🧙 마법력35
✨ 신비력85
🛡️ 방어력25
🔗 항마력80
😖 신비저항90
🏃 회피력65
과거 보기
쿠테는 태어난 순간부터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다.

그녀가 무언가 잘못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마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노예였기 때문이다.

---

쿠테가 태어난 곳은 황금왕국 델피로였다.

황금빛 곡창과 운하.

상인과 귀족.

대륙 곳곳의 물건과 돈이 모이는 나라.

쿠테가 처음 본 델피로의 황금은 왕궁의 지붕도,

상인의 금화도 아니었다.

노예시장의 가격표였다.

---

쿠테의 아버지는 인간 귀족이었다.

어머니는 서큐버스였다.

마족이었다.

그리고 노예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쿠테는 인간의 피를 절반 물려받았다.

그 사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아버지는 쿠테를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자신의 소유물이었으므로,

그 아이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다.

---

어린 쿠테에게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버지가 아니었다.

집의 주인이었다.

명령하는 사람.

어머니가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사람.

사용인들이 눈치를 보는 사람.

그리고 술을 마시면 집 안의 모든 사람이 조용해지는 이유였다.

---

어머니는 쿠테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말을 많이 하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눈에 띄면 불려갔다.

불려가면 돌아왔을 때 멍이 늘어나는 날이 있었다.

쿠테는 어릴 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어머니가 조용해야 덜 다친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

쿠테가 어느 날 물었다.

“왜 싫다고 안 해?”

어머니가 손을 멈췄다.

쿠테의 머리를 빗어주던 중이었다.

“뭘?”

“싫은 거.”

어머니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싫다고 하면 안 돼?”

쿠테가 다시 물었다.

어머니는 빗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나중에 그렇게 살지 마.”

쿠테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

아버지가 언제나 잔혹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오히려 쿠테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어떤 날에는 과자를 줬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쿠테를 무릎에 앉히기도 했다.

글자를 몇 자 가르쳐준 적도 있었다.

“그래도 내 피가 절반은 섞였으니 머리는 나쁘지 않겠군.”

그런 말을 하면서 웃었다.

쿠테도 어린 시절에는 따라 웃은 적이 있었다.

---

그러다 며칠 뒤에는 말했다.

“잡종은 잡종답게 굴어.”

어머니가 실수로 술잔을 떨어뜨린 날에는 손찌검을 했다.

쿠테가 가까이 가자 밀쳐냈다.

“네 어미 때문에 이 꼴이 된 거다.”

어제 글자를 가르쳐주던 손이었다.

쿠테는 그 손을 오래 기억했다.

---

그래서 쿠테는 아주 일찍 한 가지를 배웠다.

친절한 사람이 잔혹할 수도 있다는 것.

웃어준 사람이 다음 날 때릴 수도 있다는 것.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상대를 소유물처럼 다룰 수도 있다는 것.

쿠테에게 선의와 안전은 처음부터 같은 말이 아니었다.

---

어머니에게는 환술이 있었다.

서큐버스의 권능이었다.

감각을 흐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사람이 원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을 잠시 현실처럼 느끼게 만드는 힘.

하지만 어머니는 그것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사용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노예가 주인에게 권능을 사용하는 것은 반항이었다.

반항의 대가는 컸다.

---

쿠테는 몰래 배웠다.

어머니가 가르친 적은 없다.

그저 보고 따라했다.

처음에는 촛불이 두 개로 보이게 했다.

다음에는 복도 끝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만들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발견하고 쿠테의 손을 잡았다.

“하지 마.”

“왜?”

“들키면 안 돼.”

“아버지한테?”

어머니는 잠깐 침묵했다.

“누구한테도.”

---

쿠테는 그 말을 잘 지켰다.

열네 살이 되던 해까지는.

---

그날 밤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래서 쿠테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이 크게 닫혔다.

사용인들이 조용해졌다.

어머니가 불려갔다.

그것도 익숙한 일이었다.

---

쿠테는 자기 방에 있었다.

벽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작았다.

곧 커졌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쿠테는 눈을 감았다.

평소처럼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끝나고 어머니가 돌아오면 물을 가져다주면 된다고.

멍이 있으면 차가운 천을 올려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

그런데 그날은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쿠테가 방에서 나왔다.

복도를 걸었다.

문 앞까지 갔다.

그리고 안을 봤다.

---

어머니가 바닥에 있었다.

아버지가 그 위에 서 있었다.

술 냄새가 났다.

어머니의 입가에는 피가 있었다.

쿠테는 움직이지 못했다.

---

아버지가 다시 손을 들었다.

어머니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때렸다.

쿠테가 말했다.

“그만해.”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아버지는 듣지 못했다.

쿠테가 다시 말했다.

“그만하라고.”

---

그제야 아버지가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쿠테의 검은 역안.

머리 위의 뿔.

인간인 아버지에게서는 나오지 않은 것들.

아버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년도.”

그가 쿠테에게 다가왔다.

---

쿠테는 뒤로 물러났다.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가 쿠테를 봤다.

아직 살아 있었다.

아주 조금.

---

어머니의 눈이 빛났다.

복도가 흔들렸다.

벽이 둘로 갈라져 보였다.

쿠테가 세 명이 되었다.

하나는 왼쪽으로 달렸다.

하나는 오른쪽으로 달렸다.

하나는 제자리에서 울고 있었다.

아버지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허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쿠테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입을 움직였다.

“뛰어.”

쿠테는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

“뛰어.”

“같이 가.”

어머니가 웃었다.

아주 조금이었다.

“쿠테.”

그리고 다시 말했다.

“뛰어.”

---

쿠테는 뛰었다.

그것이 어머니에게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

복도는 어머니의 환술로 뒤틀려 있었다.

사용인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봤다.

경비가 존재하지 않는 쿠테를 쫓았다.

쿠테는 진짜 복도를 달렸다.

계단을 내려갔다.

문을 열었다.

뜰을 가로질렀다.

담을 넘었다.

그 뒤로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정확히는 돌아볼 수 없었다.

돌아보면 다시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쿠테는 그날 밤 델피로의 거리를 달렸다.

발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다.

갈 곳도 없었다.

어머니는 죽었다.

집은 원래부터 집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찾을 것이다.

그것만 알았다.

---

그날부터 쿠테의 방랑이 시작됐다.

열네 살이었다.

리벨리온에 도착하기까지 십오 년이 걸렸다.

---

처음에는 델피로 안에서 숨어 다녔다.

도시 외곽의 창고에서 잤다.

상단 짐수레에 몰래 올라탔다.

먹을 것을 훔쳤다.

잡히면 도망쳤다.

뿔을 천으로 감았다.

역안은 후드로 가렸다.

---

하지만 오래 숨길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알아봤다.

“마족이잖아.”

그 한마디가 나오면 공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이 한 걸음 물러났다.

어떤 사람은 경비를 불렀다.

어떤 사람은 돈이 될지를 먼저 물었다.

쿠테는 그 표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노예시장에서 봤던 표정이었다.

---

한 번은 작은 마을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창고 짐을 옮기는 일이었다.

사흘 동안 아무 문제도 없었다.

주인은 쿠테가 일을 잘한다고 칭찬했다.

저녁에는 남은 빵도 줬다.

넷째 날 후드가 벗겨졌다.

뿔이 보였다.

주인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하다.”

쿠테가 물었다.

“뭐가.”

“내일부터는 나오지 마라.”

---

“왜?”

“손님들이 싫어할 거다.”

“어제는 일 잘한다고 했잖아.”

“그건 맞아.”

“오늘도 똑같이 할 수 있는데.”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쿠테는 그날 처음으로 배웠다.

어제까지 쓸모 있던 사람이 오늘 갑자기 위험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도.

---

쿠테는 델피로를 떠났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아버지와 멀어지고 싶었다.

인간에게 팔리지 않을 곳을 찾고 싶었다.

어머니처럼 살지 않아도 되는 곳을 찾고 싶었다.

---

남쪽으로 갔다.

안발룽에 도착했다.

---

처음에는 안발룽이 마음에 들었다.

출신을 묻는 사람보다 실력을 묻는 사람이 많았다.

뿔을 봐도 놀라지 않는 전사도 있었다.

강하면 인정받는 곳도 있었다.

쿠테는 싸웠다.

얻어맞았다.

다시 일어났다.

환술을 사용했다.

상대가 보지 못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겼다.

---

어느 전사가 웃으며 쿠테의 등을 쳤다.

“제법인데.”

쿠테는 처음에는 그 말을 경계했다.

남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술을 나눠줬다.

고기를 줬다.

쿠테는 몇 달 동안 그 무리와 함께 다녔다.

어쩌면 그곳에 남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

문제가 생긴 것은 부족 사이의 분쟁 때였다.

쿠테가 함께 있던 사람들이 다른 부족과 충돌했다.

쿠테도 의견을 냈다.

누군가 말했다.

“넌 빠져.”

쿠테가 고개를 들었다.

“왜?”

“우리 부족 일이야.”

“나도 여기서 반년 살았는데.”

“그건 알아.”

“같이 싸우기도 했고.”

“알아.”

남자는 잠깐 망설였다.

“그래도 넌 우리 사람은 아니잖아.”

---

쿠테는 그 말을 기억했다.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날 자신을 막은 사람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몇 번이나 쿠테를 도와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확실하게 기억했다.

좋은 사람에게도 경계선은 있었다.

그리고 그 선 밖에 있는 사람이 쿠테였다.

---

안발룽을 떠났다.

다음에는 세레이온으로 향했다.

---

세레이온에서는 뿔보다 눈을 먼저 보는 사람이 많았다.

검은 역안.

마족의 흔적.

어떤 사람은 지나가면서 성표를 움켜쥐었다.

어떤 여관은 방이 남아 있는데도 없다고 했다.

어떤 상인은 쿠테가 물건을 만진 뒤 천으로 닦았다.

쿠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에는 익숙해지고 있었다.

---

한 번은 정말 좋은 성직자를 만났다.

쿠테가 길가에서 쓰러졌을 때였다.

열이 났다.

며칠째 제대로 먹지 못했다.

성직자는 쿠테가 마족이라는 걸 알고도 치료했다.

물도 줬다.

음식도 줬다.

쿠테가 물었다.

“왜?”

성직자가 말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쿠테는 대답하지 못했다.

---

며칠 뒤 몸이 나았다.

쿠테는 그 성직자에게 말했다.

“여기서 일할 수 있어?”

성직자가 멈췄다.

“성당에서 말입니까?”

“아무거나.”

“그건…….”

그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쿠테는 그 얼굴을 이미 여러 번 봤다.

---

“안 돼?”

“제가 개인적으로는 괜찮습니다.”

쿠테가 웃었다.

“그다음 말도 알아.”

성직자가 입을 다물었다.

쿠테가 대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성직자는 부정하지 못했다.

---

쿠테는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성직자를 좋은 인간이었다고 기억한다.

바로 그 기억 때문에 나중에 누군가 말하면 더 차갑게 대답할 수 있었다.

“좋은 인간도 있어.”

쿠테는 안다.

있다.

직접 만나봤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살 곳은 없었다.

---

세레이온을 떠났다.

레흐니티로 향했다.

---

레흐니티에서는 맞지 않았다.

붙잡히지도 않았다.

누구도 쿠테를 노예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먼저 이야기하려 했다.

정령도 있었고,

엘프도 있었고,

드라이어드도 있었다.

쿠테는 처음으로 조금 긴장을 풀었다.

---

하지만 오래 머물려고 하자 문제가 생겼다.

마을의 몇몇 사람이 쿠테를 불편해했다.

누군가는 마족의 권능을 두려워했다.

누군가는 아이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게 했다.

공동체에서는 여러 차례 이야기가 오갔다.

쿠테도 자리에 앉았다.

자기 이야기도 했다.

---

결론은 정중했다.

“당신이 잘못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쿠테는 조용히 들었다.

“다만 현재 공동체 구성원의 불안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대답이 없었다.

쿠테가 물었다.

“내가 떠나면 빨리 끝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대답이었다.

---

쿠테는 떠났다.

뒤에서 누군가 미안하다고 했다.

쿠테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배운 것은 단순했다.

돌을 던지지 않아도 쫓아낼 수 있다는 것.

좋은 말을 사용해도 문은 닫힐 수 있다는 것.

---

다음은 까까몰리였다.

자유왕국.

쿠테는 그 이름을 조금 믿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많이 믿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은.

---

까까몰리에서는 확실히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돈을 내면 배에 탈 수 있었다.

신분이 없어도 짐꾼 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마족이라고 당장 경비가 달려오지도 않았다.

쿠테는 몇 달 동안 일을 했다.

처음으로 꽤 많은 돈도 모았다.

---

하지만 집을 구하는 것은 어려웠다.

한 집주인이 말했다.

“나는 상관없어.”

쿠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문장이 나오면 뒤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세입자들이 말이 좀 있어서.”

“그래.”

“미안하네.”

“됐어.”

---

다른 곳에서는 고용주가 말했다.

“일은 진짜 잘해.”

쿠테가 장갑을 벗었다.

“근데?”

“손님들이 무서워해.”

“내가 뭐 했는데.”

“아무것도 안 했지.”

“그럼?”

고용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쿠테가 대신 말했다.

“뿔 때문이네.”

---

까까몰리에서 쿠테는 새로운 말을 배웠다.

쫓아내지 않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는 것.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는 것과 머물 수 있다는 것도 다르다는 것.

문이 잠겨 있지 않아도,

아무도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

쿠테는 다시 떠났다.

북쪽으로 갔다.

프라그모에 도착했다.

---

프라그모에서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

기록이었다.

이름.

출생.

신분.

어디에서 왔는지.

쿠테에게 그런 것을 증명할 서류는 거의 없었다.

노예였다는 흔적이라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은 오히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

관리 하나가 물었다.

“출생지는?”

“델피로.”

“가족은?”

“없어.”

“보호자는?”

“없어.”

“과거 거주지는?”

쿠테가 웃었다.

“여섯 나라를 다 적어줄까?”

관리의 표정이 굳었다.

---

결국 한 번은 구금됐다.

마족이라서만은 아니었다.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고,

여러 지역을 떠돌았으며,

몇몇 지역의 경비기록과 충돌기록에 쿠테와 비슷한 인물이 남아 있었다.

프라그모의 입장에서 의심할 이유는 있었다.

쿠테도 그것을 이해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나빴다.

---

철창 안에 앉아서 생각했다.

이번에는 이유가 있다.

이번에는 절차가 있다.

이번에는 때리지 않는다.

이번에는 팔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도 자신은 또 철창 안이었다.

---

며칠 뒤 풀려났다.

관리 하나가 사과했다.

“확인 절차가 길어졌습니다.”

쿠테가 말했다.

“알아.”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것도 알아.”

“그럼…….”

쿠테가 그를 봤다.

“이해하면 안 싫어해야 돼?”

관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

쿠테도 점점 강해졌다.

처음에는 어머니에게서 본 작은 환술밖에 쓰지 못했다.

도망치기 위해 사용했다.

자기를 두 명으로 보이게 했다.

발소리를 반대편에서 들리게 했다.

추격자가 거리를 잘못 판단하게 만들었다.

---

그러다 맞으면서 배웠다.

잡히면서 배웠다.

도망치면서 배웠다.

욕망을 건드렸다.

공포를 키웠다.

눈앞의 거리를 비틀었다.

상대가 자기 칼을 동료의 칼처럼 느끼게 했다.

적이 쿠테를 보고 있으면서도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

쿠테는 물리적으로 단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칼에 맞으면 피가 났다.

주먹에 맞으면 쓰러졌다.

그래서 맞지 않는 법을 배웠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상대의 판단을 무너뜨렸다.

상대가 공격할 순간을 놓치게 했다.

자기가 약한 곳을 공격할 생각 자체를 흐렸다.

---

반대로 마법과 신비에는 점점 강해졌다.

수많은 마법사를 만났다.

퇴마술도 맞아봤다.

정신간섭도 겪었다.

봉인에도 붙잡혀봤다.

한 번 당한 것은 기억했다.

두 번째에는 버텼다.

세 번째에는 상대가 당황했다.

---

십오 년 동안 쿠테는 여섯 나라를 돌았다.

어떤 곳에서는 얻어맞았다.

어떤 곳에서는 잡혔다.

어떤 곳에서는 일했다.

어떤 곳에서는 쫓겨났다.

어떤 곳에서는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만났다.

---

사람들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게 쿠테가 내린 결론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좋은 사람은 있었다.

좋은 인간도 있었다.

쿠테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

안발룽에서 술을 나눠준 인간이 있었다.

세레이온에서 치료해준 성직자가 있었다.

까까몰리에서 쿠테의 뿔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내준 식당주인도 있었다.

프라그모에서 구금이 끝난 뒤 자기 돈으로 따뜻한 차를 사준 관리도 있었다.

쿠테는 전부 기억한다.

---

그래서 더 이상한 결론에 도착했다.

좋은 인간이 있어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좋은 사람 하나가 쿠테에게 빵을 줘도,

다음 마을에서는 뿔 때문에 쫓겨났다.

한 사람이 쿠테를 보호해도,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는 쿠테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 인간이 쿠테를 친구라고 불러도,

그 친구의 가족은 쿠테와 같은 식탁에 앉기 싫어했다.

---

쿠테는 어느 날 혼자 말했다.

“좋은 인간이 있으면 뭐가 달라지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나중에도 남았다.

---

스물아홉이 되었을 무렵,

쿠테는 마지막으로 동쪽을 향했다.

초월왕국 리벨리온.

다른 나라에서는 위험한 마족과 언데드가 모여 사는 곳이라고 이야기했다.

쿠테는 그 소문을 여러 번 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가보기로 했다.

---

국경을 넘을 때도 경계했다.

뿔을 숨겼다.

후드를 깊게 썼다.

신비력을 준비했다.

붙잡히면 도망칠 길부터 확인했다.

십오 년 동안 생긴 버릇이었다.

---

검문을 받았다.

담당자가 물었다.

“종족.”

쿠테가 잠깐 침묵했다.

“반인반마.”

“마족 쪽 혈통은?”

“서큐버스.”

담당자가 기록했다.

그게 전부였다.

---

쿠테가 먼저 물었다.

“그게 끝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마족인데.”

담당자가 쿠테의 뿔을 봤다.

역안을 봤다.

“보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무엇을 더 확인해야 합니까?”

쿠테는 잠깐 말을 잃었다.

---

리벨리온에서 쿠테가 가장 적응하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었다.

언데드가 길을 걸었다.

마족이 가게를 운영했다.

흡혈귀가 행정창구에서 번호표를 기다렸다.

뿔 달린 아이들이 거리에서 뛰어다녔다.

아무도 쿠테에게 후드를 쓰라고 하지 않았다.

---

처음 며칠 동안 쿠테는 일부러 뿔을 드러내고 다녔다.

누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려고 했다.

아무도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한 아이가 쳐다본 적은 있었다.

쿠테가 노려봤다.

아이가 말했다.

“뿔 예쁘다.”

그리고 뛰어갔다.

쿠테는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

처음으로 자기 몸의 일부가 설명이 필요 없는 곳이었다.

그 사실을 좋아했다.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

그러다 인간을 봤다.

리벨리온의 거리에서.

인간 마법사가 언데드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인간이 마족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있었다.

쿠테의 표정이 굳었다.

---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는 마족이 도망쳐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언데드가 쫓겨나지 않는 곳.

인간이 아닌 존재가 자기 종족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그런데 그 안에도 인간이 있었다.

---

쿠테는 물었다.

“왜 인간이 있어?”

상대가 대답했다.

“리벨리온 시민이니까.”

“인간인데?”

“그게 시민이 아니어야 할 이유입니까?”

쿠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

그날부터 다른 불편함이 시작됐다.

쿠테는 인간을 볼 때마다 경계했다.

십오 년 동안 살아남게 해준 경계였다.

주변에서는 이제 안전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쿠테는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없었다.

---

그리고 리벨리온에는 쿠테와 비슷한 마족들이 있었다.

인간 영지에서 도망쳐온 사람.

노예였던 사람.

가족을 잃은 사람.

마족이라는 이유로 마을에서 쫓겨난 사람.

인간의 연구재료였던 사람.

어린아이도 있었다.

늙은 사람도 있었다.

---

쿠테는 그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다.

한 마족 여자가 막 리벨리온에 도착했을 때였다.

여자는 며칠 동안 사람의 손길을 피했다.

누가 다가가면 움찔했다.

쿠테는 그 모습을 한참 봤다.

어머니가 생각났다.

---

쿠테가 음식을 가져다줬다.

여자가 물었다.

“대가는요?”

쿠테가 대답했다.

“없어.”

여자가 믿지 못하는 얼굴을 했다.

쿠테는 그 표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음식만 내려놓고 물러났다.

“먹기 싫으면 버려.”

그리고 돌아섰다.

다음 날 그릇은 비어 있었다.

---

비슷한 일이 늘었다.

새로 온 사람에게 방을 소개했다.

일자리를 알아봤다.

글을 모르는 사람의 서류를 대신 읽었다.

인간이 다가오면 공포에 질리는 아이 옆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쿠테에게 고맙다고 했다.

쿠테는 대개 말했다.

“됐어.”

---

처음에는 조직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들이 모였다.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었다.

자기 이야기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사람들.

“나도 노예였어.”

그 한마디면 되는 사람.

“인간 마을에서 쫓겨났어.”

그다음 말을 묻지 않아도 되는 사람.

---

그들은 함께 먹었다.

함께 일자리를 찾았다.

누군가 인간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우면 대신 나갔다.

누군가 악몽을 꾸면 밤새 옆에 있었다.

조금씩 사람이 늘었다.

---

어느 날 회의에서 인간과의 교류 이야기가 나왔다.

리벨리온의 인간 시민이 새로 온 마족들을 위한 지원사업에 참여한다는 이야기였다.

쿠테가 말했다.

“싫어.”

누군가 물었다.

“도움을 준다는데도?”

“그래서 싫어.”

---

“왜?”

쿠테는 잠깐 생각했다.

“왜 우리는 또 인간한테 도움받아야 하지?”

“도움이 필요하니까.”

“우리끼리 하면 되잖아.”

“그게 더 힘들 수도 있어.”

“그래서?”

쿠테의 목소리는 낮았다.

“언제까지 쉬운 쪽을 고르다가 또 목줄 잡힐 건데?”

---

그날 논쟁은 길었다.

쿠테는 처음으로 자기 생각을 길게 말했다.

마족이 인간에게 인정받기 위해 착한 마족이 될 필요는 없다고.

인간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고.

용서할 의무도 없다고.

화해할 의무도 없다고.

같이 살아야 할 의무는 더더욱 없다고.

---

누군가 물었다.

“그러면 인간을 다 쫓아내자는 거야?”

쿠테가 대답했다.

“적어도 우리한테서 떨어져 있게 해야지.”

“리벨리온의 인간 시민도?”

쿠테는 잠깐 멈췄다.

“인간은 인간이야.”

그 말이 나왔다.

---

그때는 아무도 특별히 지적하지 않았다.

쿠테 자신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평생 가장 증오했던 문장과 닮았다는 사실을.

마족은 마족이야.

잡종은 잡종이야.

인간은 인간이야.

대상만 바뀌었다.

---

그 모임에는 이름이 필요해졌다.

사람들이 여러 이름을 냈다.

쿠테는 대부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너무 평화로웠다.

너무 화려했다.

너무 복수를 말하는 이름도 싫었다.

쿠테가 원하는 것은 인간을 쫓아가 죽이는 조직이 아니었다.

다시는 그들에게 기대지 않는 조직이었다.

---

쿠테는 자기 뿔을 만졌다.

어릴 때는 숨겼다.

델피로에서도.

세레이온에서도.

까까몰리에서도.

천으로 감았다.

후드 아래에 숨겼다.

사람들이 보기 전에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

“단절의 뿔.”

누군가 되물었다.

“뭐?”

“그걸로 하자.”

“왜?”

쿠테가 말했다.

“이제 숨기지 않을 거니까.”

잠깐 뒤 덧붙였다.

“그리고 기대지도 않을 거고.”

---

그렇게 단절의 뿔이 만들어졌다.

처음부터 인간을 공격하는 조직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먼저 한 일은 숙소를 구하는 것이었다.

망명자들을 위한 방.

먹을 것.

일자리.

치료비.

법률 도움.

쿠테는 그런 것부터 챙겼다.

---

인간에게서 도망쳐온 마족이 있으면 단절의 뿔이 찾아갔다.

쿠테는 묻지 않았다.

“그래도 좋은 인간을 만나보지 않았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오늘 잘 곳 있어?”

“밥은?”

“쫓아오는 놈 있어?”

그 질문부터 했다.

---

그래서 단절의 뿔을 고맙게 생각하는 마족도 많았다.

왕좌의 법을 몰라도,

제9문연구회의 연구윤리를 몰라도,

단절의 뿔이 자기에게 밥을 줬다는 사람은 있었다.

쿠테는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조직이 커질수록 말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말했다.

“인간에게 기대지 말자.”

나중에는 누군가 말했다.

“인간을 믿지 말자.”

조금 더 지나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인간을 들이지 말자.”

쿠테는 그 차이를 알았다.

그래도 완전히 막지 않았다.

자기 안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

리시온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엘프였다.

마족도 아니었다.

단절의 뿔에 들어오겠다고 했다.

조직원 몇 명이 반대했다.

“마족도 아닌데 왜?”

리시온이 대답했다.

“단절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피라면 나가겠습니다.”

쿠테가 그녀를 바라봤다.

리시온은 말을 이었다.

“인간에게 인정받아야 살 수 있다는 생각과 단절하는 곳이라면 남겠습니다.”

쿠테는 받아들였다.

---

리시온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쿠테의 이야기를 들어도 불쌍하다고 하지 않았다.

인간을 용서하라고도 하지 않았다.

좋은 인간도 있다고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쿠테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

어느 날 쿠테가 말했다.

“좋은 인간이 있다는 말은 하지 마.”

리시온이 대답했다.

“할 생각 없습니다.”

쿠테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있으니까요.”

쿠테는 잠깐 웃었다.

“그럼 내 말이 틀렸네.”

“아뇨.”

“뭐?”

“좋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과 인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니까요.”

쿠테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

그래서 지금도 리시온을 곁에 둔다.

자기 말을 가장 자주 반박하는 사람인데도.

어쩌면 그래서다.

---

쿠테는 단절의 뿔의 지도자가 되었다.

누군가 인간과의 공존을 말하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론으로 들은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델피로를 봤다.

안발룽을 봤다.

세레이온을 봤다.

레흐니티를 봤다.

까까몰리를 봤다.

프라그모를 봤다.

십오 년을 걸었다.

---

누군가 말한다.

“안발룽에는 종족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쿠테가 대답한다.

“알아.”

“세레이온에도 마족을 돕는 성직자는 있습니다.”

“알아.”

“까까몰리는 자유롭습니다.”

“살아봤어.”

“레흐니티는 대화를 중시합니다.”

“거기도 있었어.”

상대가 마지막으로 말한다.

“그래도 좋은 인간은 있습니다.”

쿠테는 그제야 상대를 본다.

---

“좋은 인간이 있다는 말은 알아.”

낮은 목소리다.

화를 내지도 않는다.

“나도 만나봤어.”

잠깐 침묵한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지?”

그것이 쿠테가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

하지만 쿠테에게도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자신이다.

쿠테는 인간을 자기 공동체에서 떼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 몸에는 인간의 피가 흐른다.

절반.

지울 수도 없다.

---

가끔 누군가 비웃듯 말한다.

“네 아버지도 인간이라며.”

쿠테는 대답한다.

“그래.”

“그럼 너도 절반은 인간이잖아.”

“그래.”

“그런데 인간과 단절하겠다고?”

쿠테의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잘 알아.”

대화는 보통 거기서 끝난다.

---

하지만 혼자 있을 때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거울을 보면 인간의 얼굴이 보일 때가 있다.

어머니를 닮은 역안과 뿔도 있다.

아버지에게서 왔을지도 모르는 얼굴선도 있다.

쿠테는 어느 쪽이 어느 쪽에서 왔는지 정확히 모른다.

그래서 더 싫다.

---

자신에게서 인간의 부분만 떼어낼 수는 없다.

어머니의 부분만 남길 수도 없다.

자기 몸은 이미 둘이 섞여 만들어진 하나다.

단절할 수 없는 것을 품은 채 단절을 주장하고 있다.

쿠테도 그 모순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다.

---

리시온은 가끔 그 부분을 건드린다.

“쿠테.”

“왜.”

“당신이 싫어하는 건 인간입니까?”

“그래.”

“인간이 만든 사회입니까?”

쿠테가 잠깐 멈춘다.

“둘 다.”

“둘은 같은 겁니까?”

쿠테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오늘 질문 많네.”

리시온은 물러나지 않는다.

“대답은요?”

쿠테는 대답하지 않는다.

---

쿠테는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은.

인간에게 화해를 강요받고 싶지 않다.

자기를 받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지도 않다.

마족이 인간의 기준에 맞춰 안전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세상도 싫다.

그 믿음은 지금도 단단하다.

---

다만 경계가 조금씩 흐려지고 있다.

인간에게서 떨어져 살 권리.

인간을 자기 공동체에서 밀어낼 권리.

둘은 같은가.

쿠테는 아직 같다고 말한다.

리시온은 계속 묻는다.

정말 같은지.

---

그리고 단절의 뿔에는 쿠테의 말을 더 멀리 가져가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을 미워하는 사람.

인간을 두려워하는 사람.

인간에게 복수하고 싶은 사람.

쿠테는 그들을 이해한다.

너무 잘 이해한다.

그래서 언제 막아야 하는지가 더 어렵다.

---

쿠테는 인간 하나가 단절의 뿔 구성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보고를 받으면 끝까지 파고든다.

가해자를 찾는다.

증거를 모은다.

피해자를 숨긴다.

필요하다면 직접 나선다.

그런 일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

반대로 단절의 뿔 사람이 인간 시민을 이유 없이 공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오래 침묵한다.

조직원이 말한다.

“인간입니다.”

쿠테가 대답한다.

“알아.”

“그러면 뭐가 문제입니까?”

쿠테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불쾌하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논리 같기 때문이다.

---

마족이잖아.

노예잖아.

잡종이잖아.

인간이잖아.

쿠테는 마지막 문장만 자기 입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이 가장 싫다.

---

그래도 다음 날이면 다시 단절의 뿔의 회의실에 앉는다.

망명자 명단을 확인한다.

숙소가 부족하다는 보고를 듣는다.

새로 온 마족 아이의 치료비를 승인한다.

인간 상단과의 거래를 줄일 방법을 찾는다.

조직원들의 말을 듣는다.

리시온과 싸운다.

---

누군가 묻는다.

“왜 이렇게까지 인간에게서 떨어지려고 합니까?”

쿠테는 가끔 어머니를 생각한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모습.

마지막 환술.

겹쳐진 복도.

그리고 마지막 말.

뛰어.

---

쿠테는 십오 년 동안 계속 뛰었다.

델피로에서.

안발룽에서.

세레이온에서.

레흐니티에서.

까까몰리에서.

프라그모에서.

누군가에게서 도망쳤다.

누군가의 시선에서 도망쳤다.

누군가의 선의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도망쳤다.

---

리벨리온에 도착하고 나서야 멈췄다.

그래서 쿠테는 생각한다.

이번에는 자기가 떠나지 않겠다고.

떠나야 하는 쪽이 있다면 자신이 아니어야 한다고.

그 생각이 단절의 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언젠가 가장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생각이다.

---

쿠테는 아직 그 경계를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마족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인간을 죽이기 위해 단절의 뿔을 만든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는 인간에게 무릎 꿇지 않기 위해 만들었다고.

다시는 인간에게 좋은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기 위해 만들었다고.

---

그 믿음은 거짓이 아니다.

쿠테가 겪은 일도 거짓이 아니다.

어머니가 죽은 것도.

자신이 노예였던 것도.

여섯 나라를 떠돌았던 것도.

좋은 인간들을 만났음에도 어디에도 완전히 머물지 못했다고 느낀 것도.

전부 쿠테가 실제로 살아온 삶이다.

---

문제는 진짜 상처에서 태어난 결론이라고 해서,

그 결론까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리시온은 그것을 묻는다.

쿠테는 아직 대답하지 못한다.

---

오늘도 단절의 뿔 본부에는 새로운 망명자가 온다.

머리에 작은 뿔이 난 어린 마족이다.

아이의 손에는 오래된 화상흔적이 있다.

인간을 보면 몸을 숨긴다.

쿠테는 아이 앞에 앉는다.

조금 거리를 둔다.

먼저 손을 뻗지 않는다.

---

“여기서는 숨길 필요 없어.”

아이가 쿠테의 뿔을 본다.

쿠테가 자기 후드를 벗는다.

검은 뿔이 그대로 드러난다.

역안도 숨기지 않는다.

“아무도 이거 떼라고 안 해.”

아이는 한동안 쿠테를 바라본다.

그리고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인다.

---

그 순간만큼은 쿠테도 확신한다.

자기가 만든 곳이 필요하다고.

그 확신까지는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그곳을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밀어낼 수 있는지.

누구까지 적으로 불러도 되는지.

상처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기 시작하는 경계가 어디인지.

그 답만 아직 없다.

---

쿠테는 그 답을 찾기 위해 단절의 뿔을 만든 것이 아니다.

이미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들었다.

인간에게서 떨어진다.

인간에게 기대지 않는다.

마족끼리 살아남는다.

그것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지금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리시온이 계속 묻는다.

쿠테 자신도 가끔 같은 질문을 한다.

인간과 단절한 뒤에도,

자신이 증오했던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을 정말 단절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면 단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 것뿐인가.

---

쿠테는 아직 답하지 않는다.

대신 뿔을 숨기지 않는다.

오늘도 단절의 뿔의 문을 연다.

인간에게서 도망쳐온 사람에게 자리를 내준다.

그리고 인간이 문 앞에 서면,

아직은 먼저 묻는다.

“왜 왔지?”

그 다음에 무엇을 할지는,

쿠테 자신도 매번 다시 결정하고 있다.

LSY
리시온
리벨리온단절의 뿔-간부
“당신이 틀렸다는 증거를 찾는 게 아닙니다. 제가 옳은지도 계속 확인하는 겁니다.”
🩸 HP90
💪 공격력55
🧙 마법력45
✨ 신비력1
🛡️ 방어력30
🔗 항마력65
😖 신비저항70
🏃 회피력80
과거 보기
리시온의 어린 시절에는 특별한 비극이 없다.

적어도 그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한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살해당한 것도 아니고,

병으로 갑자기 쓰러진 것도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이미 오래 산 엘프였다.

리시온을 늦은 나이에 얻었고,

딸이 어린 동안에도 조금씩 늙어갔다.

그리고 자기 몫의 시간을 충분히 산 뒤 죽었다.

---

리시온은 안발룽 남부에서 태어났다.

엘프였지만 레흐니티에서 살아본 적은 없었다.

부모 역시 오래전 숲을 떠난 엘프들이었다.

둘은 남부의 길을 따라 여러 부족과 상단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한곳에 오래 머물기도 했고,

몇 년 뒤에는 다시 짐을 싸기도 했다.

그래서 리시온에게 고향은 하나의 마을이라기보다 남부 전체에 가까웠다.

---

어릴 때 리시온은 부모에게 자주 물었다.

“왜 우리는 엘프인데 숲에서 안 살아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살고 싶으면 살아도 되지.”

“그런데 왜 안 가요?”

“여기가 좋으니까.”

리시온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아주 간단했기 때문이다.

---

어머니도 비슷했다.

“엘프는 어디에서 살아야 해요?”

“자기가 살고 싶은 데서.”

“그럼 인간은요?”

“걔들도 그렇겠지.”

“수인은?”

“걔들도.”

리시온이 잠깐 생각했다.

“그럼 왜 다들 어디 출신인지 물어봐요?”

어머니가 웃었다.

“사람들이 그런 걸 좋아하거든.”

---

리시온의 부모는 거창한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너무 빨리 믿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고 너무 빨리 미워하지도 말라고 했다.

대부분의 일에는 직접 보고 판단하라는 말을 남겼다.

리시온은 그 말을 아주 잘 배웠다.

어쩌면 지나치게 잘 배웠다.

---

남부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인간.

수인.

오크.

엘프.

상인.

용병.

유목민.

떠돌이.

리시온은 어릴 때부터 그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래서 종족보다 먼저 사람의 행동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

처음으로 인간에게 맞은 것도 어린 시절이었다.

시장 골목에서였다.

리시온의 긴 귀를 보고 취객 하나가 잡아당겼다.

“엘프 귀 진짜 기네.”

리시온이 손을 쳐냈다.

남자가 화를 냈다.

“어린 게 어른 손을 쳐?”

그리고 머리를 한 대 때렸다.

리시온은 넘어졌다.

---

바로 옆에서 과일을 팔던 인간 여자가 달려왔다.

취객에게 바구니를 던졌다.

“애한테 뭐 하는 짓이야!”

“상관하지 마!”

“내 가게 앞에서 애를 때리는데 왜 상관을 안 해!”

둘이 한참 싸웠다.

결국 취객이 욕을 하며 떠났다.

여자는 리시온의 이마를 살펴봤다.

“괜찮니?”

리시온이 물었다.

“둘 다 인간이죠?”

여자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리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궁금했다.

---

그런 일이 계속 있었다.

어느 인간 상인은 리시온에게 잔돈을 속였다.

다른 인간 상인은 그 사실을 알아채고 돈을 돌려받게 해줬다.

어느 용병은 어린 엘프가 혼자 다닌다며 놀렸다.

다른 날 그 용병은 몬스터가 나타났을 때 리시온을 자기 등 뒤로 밀어냈다.

평소 친절하던 사람이 돈 때문에 거짓말하는 것도 봤다.

평소 성질이 더럽던 사람이 굶주린 가족에게 자기 식량을 전부 주는 것도 봤다.

---

리시온은 사람을 이해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사람이 하나의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

어느 날 또래 아이와 싸운 적이 있었다.

인간 아이였다.

둘은 시장에서 자주 만났다.

평소에는 같이 놀았다.

그러다 사소한 일로 다퉜다.

아이가 화가 나서 말했다.

“엘프들은 다 재수 없어.”

리시온이 바로 물었다.

“몇 명 만나봤는데?”

아이가 멈췄다.

“뭐?”

“엘프.”

“……너.”

“나 하나잖아.”

“그래서?”

“그럼 내가 재수 없는 거지 엘프가 재수 없는 건 아니잖아.”

아이는 잠깐 생각했다.

“그런가?”

“응.”

그리고 둘은 다시 싸웠다.

이번에는 누가 먼저 장난감을 가져갔는지 때문이었다.

---

리시온의 부모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웃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서 인간은 어땠어?”

리시온이 얼굴을 찌푸렸다.

“어떤 인간?”

아버지가 웃었다.

“잘 배웠네.”

리시온은 그 말을 꽤 오래 기억했다.

---

부모는 리시온이 조금씩 성장하는 동안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먼저 아버지였다.

오래 앓지도 않았다.

어느 해부터 잠이 많아졌다.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여행을 그만뒀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일어나지 않았다.

---

장례를 마치고 리시온이 어머니에게 물었다.

“슬퍼요?”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럼.”

“그런데 왜 안 울어요?”

“어제 많이 울었거든.”

“아.”

“오늘도 조금 있다가 울지도 모르고.”

리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였다.

---

몇 년 뒤에는 어머니도 죽었다.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오래 살았다.

딸이 혼자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도 확인했다.

죽기 전날에도 특별한 유언은 없었다.

어머니는 침대에 누운 채 리시온에게 물었다.

“저녁은 먹었니?”

“먹었어요.”

“거짓말.”

“조금 먹었어요.”

“가서 더 먹어.”

리시온이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그게 마지막으로 길게 나눈 대화였다.

---

다음 날 어머니는 조용히 죽었다.

리시온은 많이 울었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도 부모가 죽은 일을 세상의 부조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래 살았다.

서로를 좋아했다.

하고 싶은 일을 꽤 많이 했다.

딸도 남겼다.

그리고 죽었다.

리시온에게 죽음은 슬픈 일이었지만 잘못된 일은 아니었다.

---

부모가 사라진 뒤 리시온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한 사람이 그녀를 입양한 것은 아니었다.

상단에 따라붙어 일하기도 했다.

아는 수인 가족의 천막에서 몇 달을 살기도 했다.

오래 알던 인간 상인이 빈 창고방을 빌려주기도 했다.

오크 용병대에서 잡일을 하며 식사를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

리시온은 그 생활도 별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였지만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돈을 떼먹는 사람도 있었다.

밥을 더 퍼주는 사람도 있었다.

늘 그렇듯 사람이 많았다.

---

한 번은 상단에서 장부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상단주는 인간이었다.

처음에는 꽤 좋은 사람이었다.

글을 잘 읽는 리시온에게 장부를 맡겼다.

계산을 틀리면 화를 내지 않고 다시 가르쳐줬다.

급여도 정확하게 줬다.

리시온은 그를 믿었다.

---

몇 달 뒤 상단이 크게 손해를 봤다.

사막에서 화물 일부를 잃었다.

돈이 부족해졌다.

상단주는 사람들의 급여를 늦췄다.

처음에는 모두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다음 달에는 말이 달라졌다.

“조금만 참아.”

그다음 달에는 더 달라졌다.

“상단이 살아야 너희도 돈을 받지.”

---

결국 그는 가장 떠나기 어려운 사람들의 급여부터 깎았다.

가족이 상단에 함께 묶여 있는 사람.

빚이 있는 사람.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사람.

리시온은 그 모습을 봤다.

---

“나쁜 사람이었나?”

리시온은 혼자 생각했다.

아니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손해를 보기 전까지는 실제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기 것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다른 선택을 했다.

리시온은 그때 하나를 배웠다.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도 상황에 따라 시험받는다는 것.

---

반대의 일도 있었다.

성격이 아주 나쁜 인간 용병이 있었다.

술을 마시면 시끄러웠다.

말도 험했다.

리시온과도 자주 싸웠다.

“귀 긴 꼬맹이.”

“술 냄새나는 인간.”

둘은 서로 그렇게 불렀다.

---

어느 날 몬스터 떼가 상단을 습격했다.

사람들이 흩어졌다.

마차 하나가 뒤집혔다.

안에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그 용병은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런데 돌아갔다.

아이들을 하나씩 끌어냈다.

팔을 크게 다쳤다.

그래도 마지막 아이까지 데리고 나왔다.

---

치료를 받으면서도 욕을 했다.

“아파 죽겠네.”

리시온이 물었다.

“왜 돌아갔어요?”

용병이 얼굴을 찌푸렸다.

“애들이 있었잖아.”

“평소에는 애들 시끄럽다고 싫어했잖아요.”

“시끄러운 거랑 죽어도 되는 거랑 같냐?”

리시온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렇네요.”

“뭘 당연한 걸 물어.”

---

리시온은 그런 경험을 너무 많이 했다.

좋은 사람이 나쁜 선택을 했다.

나쁜 사람이 좋은 선택을 했다.

이기적인 사람이 어느 순간 자기 것을 내줬다.

친절한 사람이 궁지에 몰리자 남을 버렸다.

겁쟁이가 한 번 용감해졌다.

용감한 사람이 한 번 비겁해졌다.

---

그래서 리시온은 사람을 설명하는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인간.

엘프.

수인.

그런 말은 시작점일 뿐이었다.

결론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

리시온이 십대 후반이 되었을 때였다.

어느 작은 마을에서 마족 하나를 만났다.

여행자였다.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돈도 있었다.

그런데 여관 두 곳에서 숙박을 거절당했다.

리시온은 그 모습을 우연히 봤다.

---

세 번째 여관에서는 주인이 말했다.

“난 상관없는데 손님들이 싫어해.”

마족이 대답했다.

“그럼 방이 없는 거야?”

“그런 셈이지.”

마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익숙한 표정이었다.

화내지도 않았다.

그냥 돌아섰다.

---

리시온이 따라갔다.

“저기요.”

마족이 돌아봤다.

“왜?”

“잘 곳 없죠?”

“그래서?”

“제가 아는 마구간 있는데요.”

마족이 리시온을 한참 봤다.

“왜 도와주는데?”

리시온이 대답했다.

“비어 있으니까요.”

---

마족은 웃었다.

“엘프들은 원래 그래?”

리시온이 바로 대답했다.

“어떤 엘프요?”

마족이 잠깐 멈췄다.

그리고 크게 웃었다.

리시온은 왜 웃는지 몰랐다.

---

그날 둘은 오래 이야기했다.

마족은 여러 인간 도시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모두가 자신을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집을 구하려 하면 안 됐다.

일을 구하려 하면 꺼렸다.

아이들이 가까이 오면 부모가 데려갔다.

누구도 돌을 던지지 않았지만,

어디에도 오래 머무르기 어려웠다고 했다.

---

리시온이 물었다.

“좋은 인간은 없었어요?”

마족이 말했다.

“많았어.”

“그런데도?”

“좋은 인간이 내 집은 아니잖아.”

리시온은 그 말을 기억했다.

---

그때부터 리시온은 개인과 사회를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좋은 인간이 있다는 것.

인간 사회가 누군가에게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

둘은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쁜 인간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한 인간의 악행이 인간 전체를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개인의 선택이 반복되면 사회의 형태가 될 수 있었다.

---

리시온은 어느 쪽도 간단하게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은 선하다.

인간은 악하다.

둘 다 너무 쉬운 대답이었다.

현실은 그보다 귀찮았다.

그리고 리시온은 귀찮은 답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

성년이 가까워지자 주변 사람들이 물었다.

“앞으로 어디서 살 거야?”

리시온은 여러 곳을 생각했다.

안발룽에 계속 남을 수도 있었다.

이미 아는 사람도 많았다.

일자리도 구할 수 있었다.

레흐니티로 갈 수도 있었다.

엘프가 많은 곳이었다.

---

그런데 어느 쪽도 크게 끌리지 않았다.

리시온은 엘프들과 살아야 엘프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같은 종족 사이에서 살아야 편안하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

어느 날 리벨리온 이야기를 들었다.

언데드가 시민으로 산다고 했다.

마족이 자기 이름으로 가게를 연다고 했다.

흡혈귀가 인간과 같은 법정에 선다고 했다.

인간 마법사 역시 귀화할 수 있다고 했다.

리시온은 처음에는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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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좋은 이야기만 있는 곳은 아니었다.

위험한 연구가 많았다.

다른 국가와의 관계도 나빴다.

언데드와 마족을 두려워하는 외부인의 시선도 있었다.

내부 갈등도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가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종족 자체가 시민의 자격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

---

리시온은 성년이 되자 짐을 쌌다.

누구에게 쫓겨난 것도 아니었다.

안발룽이 싫어진 것도 아니었다.

부모의 원수를 찾으러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가고 싶었다.

그래서 갔다.

---

친하게 지내던 인간 상인이 물었다.

“왜 리벨리온이야?”

리시온이 대답했다.

“제가 엘프라는 걸 별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어서요.”

“여기서 누가 너한테 엘프라고 뭐라 했어?”

“가끔요.”

“그런 놈들은 어디든 있지.”

“알아요.”

“그런데도 가?”

“네.”

상인은 잠깐 생각했다.

“그럼 잘 살아.”

“그럴게요.”

그게 전부였다.

---

리시온은 그렇게 스스로 리벨리온에 귀화했다.

탈출도 아니었다.

망명도 아니었다.

새로운 곳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 차이를 리시온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

처음 본 리벨리온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물론 거리에는 이상한 광경이 많았다.

언데드가 빵집 앞에서 줄을 섰다.

뿔 달린 마족이 인간과 가격을 흥정했다.

흡혈귀가 낮에도 다닐 수 있게 천막이 설치된 거리가 있었다.

인간 연구자와 마족 연구자가 길 한가운데서 논쟁했다.

리시온은 꽤 오래 구경했다.

---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족을 싫어하는 인간도 있었다.

인간을 싫어하는 마족도 있었다.

언데드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싸움도 났다.

욕도 했다.

리시온은 오히려 조금 안심했다.

완벽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

누군가 리시온에게 물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라?”

리시온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똑같네요.”

“뭐가?”

“사람 사는 게요.”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

리시온은 리벨리온에서 여러 일을 했다.

경비를 돕기도 했다.

상단의 호위를 맡기도 했다.

기록 일을 한 적도 있었다.

활을 잘 다뤘고,

남부에서 오래 살아 위험을 빠르게 알아챘으며,

낯선 사람의 말을 쉽게 믿지도 않았다.

적응은 빨랐다.

---

그 무렵 리시온의 신념은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

사람은 태어난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무엇을 선택했는지 본다.

그 선택으로 누가 다쳤는지 본다.

잘못한 뒤 무엇을 했는지 본다.

좋은 말을 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종족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

리시온은 그 원칙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

쿠테를 처음 본 것은 리벨리온에 온 지 몇 년 뒤였다.

검은 역안.

머리 위의 뿔.

인간과 마족의 피를 동시에 가진 여자.

그리고 인간을 믿지 않는 여자였다.

---

처음에는 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리벨리온에는 인간에게 상처받은 마족이 많았다.

인간을 싫어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리시온은 그런 감정을 굳이 고치려 하지 않았다.

싫어할 이유가 있으면 싫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쿠테는 조금 달랐다.

단순히 인간을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델피로 이야기를 했다.

안발룽 이야기를 했다.

세레이온 이야기를 했다.

레흐니티 이야기를 했다.

까까몰리와 프라그모 이야기도 했다.

직접 살아본 이야기였다.

---

리시온은 쿠테의 말을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건 일부 인간일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쿠테가 너무 많은 일부를 만났다.

“좋은 인간도 있습니다.”

그 말을 하기에도 쿠테는 이미 좋은 인간을 만나봤다.

그리고도 자기 결론을 내렸다.

---

어느 날 쿠테가 말했다.

“좋은 인간이 있다는 말은 하지 마.”

리시온이 대답했다.

“할 생각 없습니다.”

쿠테가 리시온을 봤다.

“왜?”

“있으니까요.”

쿠테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

“그럼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해?”

“아뇨.”

“그럼?”

리시온이 대답했다.

“좋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과 인간 사회를 믿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요.”

쿠테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리시온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둘은 그날 처음으로 오래 이야기했다.

---

당시 단절의 뿔은 지금보다 작았다.

인간에게서 도망쳐온 마족들이 서로 돕는 공동체에 가까웠다.

숙소를 구했다.

일자리를 찾아줬다.

새로 온 사람에게 리벨리온의 법을 알려줬다.

인간과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운 사람에게 다른 조합원을 붙여줬다.

리시온은 그런 모습을 마음에 들어 했다.

---

마족이 인간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용서할 필요도 없다.

친하게 지낼 의무도 없다.

자기를 학대한 사람의 종족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할 의무는 더더욱 없다.

리시온은 거기까지 동의했다.

---

단절의 뿔에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엘프잖아.”

리시온이 말했다.

“네.”

“여기는 마족들을 위한 곳인데.”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들어오려고 해?”

리시온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단절해야 하는 게 인간의 피라면 나가겠습니다.”

---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리시온은 말을 이었다.

“인간에게 인정받아야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과 단절하는 곳이라면 남고 싶습니다.”

쿠테가 물었다.

“인간이 싫지도 않으면서?”

“네.”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는데.”

“그때 나가면 됩니다.”

쿠테가 웃었다.

“쉽게 말하네.”

“어렵게 말한다고 달라지진 않으니까요.”

그렇게 리시온은 단절의 뿔에 들어왔다.

---

처음 몇 년 동안은 큰 문제가 없었다.

리시온은 조직의 활동을 좋아했다.

누군가에게 인간을 용서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인간 사회에 다시 들어가 적응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자기들끼리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리시온이 보기에는 충분히 정당한 일이었다.

---

문제는 조금씩 생겼다.

아주 천천히.

처음에는 누구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

“인간에게 의존하지 말자.”

리시온도 동의했다.

조금 뒤에는 말했다.

“인간은 믿지 않는 편이 낫다.”

리시온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인간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그다음에는 누군가 말했다.

“인간을 우리 구역에 들이지 말자.”

리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달라졌다.

---

리시온은 쿠테를 찾아갔다.

“이건 반대합니다.”

쿠테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뭐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출입을 막는 것.”

“여기는 인간을 피해서 온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

“그들이 인간을 만나지 않을 권리는 인정합니다.”

“그럼?”

“인간이 들어올 권리까지 그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죠.”

---

쿠테의 표정이 굳었다.

“결국 인간 편 드는 거야?”

리시온도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그 말부터 틀렸습니다.”

“뭐가.”

“왜 의견이 둘로만 나뉩니까?”

쿠테가 말이 없었다.

리시온이 말했다.

“당신 편이 아니면 인간 편입니까?”

---

그날 둘은 처음으로 크게 싸웠다.

그래도 리시온은 조직을 떠나지 않았다.

쿠테도 내쫓지 않았다.

---

리시온이 떠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다.

쿠테가 틀렸다고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가장 컸다.

---

리시온은 인간의 좋은 모습을 많이 봤다.

나쁜 모습도 많이 봤다.

그래서 인간 전체를 미워하는 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시에 쿠테의 말에도 사실이 있었다.

좋은 개인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개인이 속한 사회에서 마족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리시온도 직접 봤다.

---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정당한 경계인가.

자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할 권리는 있다.

자기 집에 들이지 않을 권리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들이 모여 사는 거리에서는?

조직에서는?

도시에서는?

국가에서는?

어디부터 경계가 차별이 되는가.

리시온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다.

---

쿠테를 보고 있으면 그 질문은 더 어려워졌다.

쿠테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기 상처에 대해서는.

실제로 인간에게 노예로 취급받았다.

어머니를 잃었다.

여섯 국가를 떠돌았다.

어디에서도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느꼈다.

---

그런 쿠테에게 리시온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과거는 잊으세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인간을 용서하세요.”

그것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좋은 인간이 있잖아요.”

더더욱 하지 않는다.

쿠테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

대신 다른 것을 묻는다.

“그 사람이 뭘 했습니까?”

쿠테가 대답한다.

“인간이야.”

리시온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

어릴 적 들었던 말과 닮았기 때문이다.

엘프니까.

수인이니까.

오크니까.

마족이니까.

인간이니까.

단어만 달라졌다.

---

어느 날 리시온은 쿠테에게 직접 말했다.

“당신이 인간을 미워하는 이유는 압니다.”

쿠테가 대답했다.

“그래서?”

“그래서 아직 당신 옆에 있는 겁니다.”

쿠테가 웃었다.

“이상하네.”

“뭐가요?”

“보통 그다음에는 떠나던데.”

---

리시온이 잠깐 생각했다.

“아직은 아닙니다.”

“그럼 언제 떠날 건데?”

리시온은 그 질문에는 바로 대답했다.

“당신이 인간에게 당한 일을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인간에게 같은 짓을 시작하는 날.”

쿠테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

“내가 그럴 것 같아?”

“모릅니다.”

“그런데 왜 여기 있어?”

“그걸 확인하려고요.”

쿠테의 눈이 가늘어졌다.

“날 감시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틀리지 않습니다.”

“진짜 재수 없네.”

“자주 듣습니다.”

---

하지만 리시온이 감시하는 것은 쿠테만이 아니다.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쪽이 더 중요하다.

---

자기는 사람을 종족이 아니라 선택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신념은 어린 시절부터 거의 변하지 않았다.

수많은 인간을 보고 만들었다.

부모에게 배운 것도 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해서 확인한 것도 있다.

그래서 단단하다.

---

그런데 단단하다는 것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리시온은 그것도 알고 있다.

사람은 자기 경험만으로 틀린 결론을 만들 수 있다.

쿠테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

그래서 리시온은 쿠테를 반박하면서도 가끔 생각한다.

쿠테가 옳다면?

정말 개인의 선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

인간과 마족이 함께 사는 것 자체가 계속 같은 문제를 반복한다면?

그렇다면 자기 신념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론에 불과한가.

---

반대로 쿠테가 틀렸다면?

피해받은 사람이 자기 상처를 근거로 새로운 차별을 만들고 있다면?

그걸 이해한다는 이유로 곁에 남아 있는 자신도 그 차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질문 역시 피할 수 없다.

---

리시온은 그래서 단절의 뿔 안에서 이상한 위치에 있다.

인간과 친하게 지내자는 사람은 아니다.

조직을 해체하자는 사람도 아니다.

쿠테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고 쿠테의 적도 아니다.

---

망명한 마족이 오면 돕는다.

인간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하지 않는다.

용서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인간을 싫어해도 꾸짖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말하면 멈춰 세운다.

“인간이니까 당해도 돼.”

그 문장만큼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

한 조직원이 물었다.

“인간이 우리한테 한 짓은요?”

리시온이 말했다.

“한 사람에게 당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줄 이유가 됩니까?”

“같은 인간이잖아.”

“그래서 그 사람이 뭘 했는데요?”

“…….”

“그걸 먼저 말하세요.”

리시온은 언제나 거기서 시작한다.

---

쿠테와의 논쟁도 계속된다.

“리시온.”

“네.”

“가끔은 그냥 내 편이라고 하면 안 돼?”

“사안에 따라 다릅니다.”

“그 말 진짜 싫어.”

“알고 있습니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해?”

리시온은 그 질문이 나오면 항상 조금 오래 생각한다.

---

예전이라면 바로 답했을 것이다.

사람은 종족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그 원칙이 옳다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 믿음이 현실의 모든 경우를 설명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그래서 리시온은 대답한다.

“모릅니다.”

쿠테가 얼굴을 찌푸린다.

“그렇게 오래 생각하고 한다는 말이 그거야?”

“네.”

“도움이 하나도 안 되네.”

“확신하지 못하는 걸 확신한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

그리고 어느 날은 조금 다르게 말했다.

“당신이 틀렸다는 증거를 찾는 게 아닙니다.”

쿠테가 그녀를 봤다.

리시온은 말을 이었다.

“제가 옳은지도 계속 확인하는 겁니다.”

그 말이 지금의 리시온을 가장 잘 설명한다.

---

리시온의 삶에는 거대한 상처가 없다.

복수해야 할 원수도 없다.

부모는 충분히 살고 죽었다.

어린 시절에는 웃은 날이 더 많았다.

좋은 인간도 많이 만났다.

나쁜 인간도 많이 만났다.

괜찮은 인간이 나쁜 선택을 하는 것도 봤다.

싫어하던 인간이 좋은 선택을 하는 것도 봤다.

---

그래서 리시온의 신념은 상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관찰에서 나왔다.

사람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생겼다.

한 가지 설명으로는 사람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

그리고 지금,

그녀는 자신이 가장 믿는 원칙을 가장 어려운 장소에서 시험하고 있다.

인간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모인 단절의 뿔 안에서.

그 증오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도 알면서.

그 이유가 새로운 차별을 정당화하는지 끝까지 묻는다.

---

리시온은 쿠테를 떠나지 않았다.

아직은.

쿠테의 주장이 옳다고 확신해서도 아니다.

틀렸다고 확신해서도 아니다.

그저 끝까지 보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이 상처를 이유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말이 언제 누군가를 밀어내는 말로 변하는지.

그리고 그 경계 앞에서 자기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

리시온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판단한다.

인간이냐고 묻지 않는다.

마족이냐고 묻지 않는다.

엘프냐고도 묻지 않는다.

먼저 묻는다.

“그래서 그 사람이 뭘 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나서야 판단한다.

---

언젠가 쿠테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단절의 뿔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그때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리시온은 그 질문만큼은 버리지 않을 생각이다.

자기가 틀렸다는 대답이 돌아오더라도.

Roster

미카레 아카데미

8명
재학생8명
HIE
히엔 폰 그리브스
미카레 아카데미마법·맥류학부-학생
“작동하는데 멋없으면 반쪽짜리잖아?”
🩸 HP80
💪 공격력15
🧙 마법력55
✨ 신비력12
🛡️ 방어력22
🔗 항마력38
😖 신비저항30
🏃 회피력34
과거 보기
히엔 폰 그리브스의 어린 시절에는 특별한 불행이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델피로에서도 손꼽히는 그리브스 공작가의 차녀.

넓은 저택.

좋은 음식.

원한다면 불러올 수 있는 뛰어난 가정교사.

마법을 배우겠다고 말하면 다음 주에는 최신 술식서가 책상 위에 놓였다.

히엔에게 어린 시절의 세계는 대체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곳이었다.

---

그녀가 처음부터 혼자 자란 것도 아니었다.

어린 히엔에게는 유모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유모에게는 히엔과 비슷한 나이의 딸이 있었다.

마일렌이었다.

두 아이에게 처음에는 신분이라는 말도 별 의미가 없었다.

히엔이 정원에서 넘어지면 마일렌이 웃었다.

마일렌이 몰래 주방에서 과자를 가져오면 히엔이 절반을 빼앗아 먹었다.

둘이 같이 사고를 치면 마일렌의 어머니가 둘 다 혼냈다.

히엔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마일렌은 친구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

문제는 다른 어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히엔이 마법 수업을 받다가 마일렌을 불렀다.

“마일렌도 같이 하면 되잖아요.”

가정교사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가씨를 위한 수업입니다.”

히엔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같이 들으면 되잖아요?”

“교재가 하나뿐입니다.”

히엔은 자기 책을 가운데로 밀었다.

“같이 보면 되는데?”

가정교사는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마일렌은 결국 그날 한쪽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히엔은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마일렌은 그렇지 않았다.

자기가 그 방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히엔의 한마디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엔은 아직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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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엔에게 마법은 처음부터 화려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처음 본 제대로 된 공격술식은 공작가의 연회에서였다.

초청받은 마법사가 허공에 술식을 펼쳤다.

금빛 선이 회전했다.

그 사이로 붉은 불꽃이 피어났다.

불꽃은 천장 가까이 올라가 새의 형태로 흩어졌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히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날 밤 바로 물었다.

“저거 어떻게 해요?”

가정교사는 공격마법부터 배우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공격 말고요.”

히엔이 손을 크게 휘저었다.

“마지막에 새 되는 거요!”

가정교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

그때부터 히엔의 마법에는 이상한 버릇이 붙었다.

작동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불꽃이면 모양이 있어야 했다.

마법진이면 대칭이 맞아야 했다.

스크롤을 펼쳤을 때 문자가 한꺼번에 빛나는 것보다는 바깥쪽부터 차례로 빛나는 편이 멋있었다.

가정교사는 말했다.

“그 세 줄은 없어도 됩니다.”

히엔이 물었다.

“없애면 어떻게 되는데요?”

“똑같이 작동합니다.”

“그럼 덜 예쁘잖아요.”

가정교사는 그날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을 조금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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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엔은 스크롤을 특히 좋아했다.

마법을 종이 한 장에 담아두었다가 원하는 순간 펼쳐낸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 만든 것은 조명 스크롤이었다.

원래 목적은 어두운 방을 밝히는 것이었다.

히엔의 스크롤은 방을 밝힌 뒤 천장에 작은 별까지 띄웠다.

두 번째는 먼지를 털어내는 스크롤이었다.

먼지가 사라질 때마다 작은 금빛 나비가 생겼다.

세 번째는 차를 적당한 온도로 식히는 스크롤이었다.

작동할 때마다 짧은 팡파르가 울렸다.

마일렌이 물었다.

“그 소리는 왜 넣었어?”

히엔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완성됐다는 걸 알려줘야 하잖아.”

“김 올라오는 거 보면 알잖아.”

“분위기가 없잖아.”

“차 식히는데 무슨 분위기가 필요해…….”

히엔에게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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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사람들은 그런 히엔을 귀여워했다.

재능도 있었다.

마법을 배우는 속도가 빨랐고 복잡한 술식을 자기 방식으로 변형하는 데도 능했다.

다만 집안에는 히엔보다 먼저 칭찬받는 사람이 있었다.

언니였다.

언니는 공부도 잘했다.

귀족사회에서의 처신도 훌륭했다.

공작가의 딸에게 기대되는 일이 무엇인지 빠르게 이해했고 대부분 잘 해냈다.

사람들은 자주 말했다.

“역시 그리브스 공작가의 장녀군.”

히엔은 언니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그래서 더 지기 싫었다.

---

어느 연회에서 한 귀족이 히엔에게 말했다.

“아, 그리브스 공작가의 차녀로군.”

히엔이 웃었다.

“히엔이에요.”

“알고 있네. 자네 언니가 아주 뛰어나다지?”

“네.”

“동생도 기대가 크겠어.”

상대에게 악의는 없었다.

평범한 인사였다.

그런데 히엔은 그날 이상하게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그리브스의 차녀.

누구의 동생.

공작가의 아가씨.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안에 히엔은 별로 없었다.

---

그날 밤 히엔은 마일렌의 방으로 찾아갔다.

문을 열자마자 선언했다.

“결정했어.”

마일렌이 바느질하던 손을 멈췄다.

“뭘?”

“유명해질 거야.”

“……갑자기?”

“아니, 원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히엔은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그리브스 공작가의 차녀라고 안 하고 히엔이라고 먼저 부르게 만들 거야.”

마일렌이 웃었다.

“어떻게?”

히엔은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건 이제 생각해야지.”

마일렌은 역시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다시 바늘을 들었다.

---

그 뒤 히엔은 이전보다 더 진지하게 마법을 배웠다.

다만 진지해졌다고 해서 평범해진 것은 아니었다.

공격스크롤에 굳이 꽃잎 모양의 불꽃을 넣었다.

방어술식이 깨질 때 유리처럼 반짝이게 만들었다.

교사는 그 장식 때문에 마력소모가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히엔은 소모량을 줄이는 방법을 연구했다.

장식을 없애지는 않았다.

그것이 히엔다운 방식이었다.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 포기하는 대신 안 되지 않게 만드는 쪽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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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이 된 뒤에도 히엔은 한동안 공작가에서 개인교육과 스크롤 연구를 계속했다.

귀족사회에 얼굴을 비추기도 했다.

가문의 행사에도 참석했다.

그대로 살아도 부족할 것은 없었다.

가문이 마련해주는 연구실에서 연구할 수도 있었다.

공작가의 이름으로 연구자를 고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결과가 정말 자기 것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히엔은 미카레 아카데미에 들어가기로 했다.

델피로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능력을 평가하는 곳.

왕족도 시험을 보고,

귀족도 점수를 받고,

평민도 성취가 높으면 금빛게시판 위에 이름이 올라가는 곳.

히엔에게는 완벽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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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잘하면 진짜 내 실력이잖아.”

히엔이 말했다.

마일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왜?”

“아니야.”

“뭔데?”

“히엔은 입학시험 준비하는 동안 일 안 해도 되잖아.”

히엔이 눈을 깜빡였다.

“응.”

“교재도 원하는 거 다 살 수 있고.”

“응.”

“개인교사도 있고.”

“응.”

마일렌은 히엔을 봤다.

히엔도 마일렌을 봤다.

잠시 침묵했다.

“……그래도 시험문제는 똑같잖아?”

히엔은 진심으로 말했다.

마일렌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 네가 앞으로 배워야 할 부분인 것 같아.”

히엔은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

마일렌 역시 미카레를 준비했다.

히엔은 당연히 기뻐했다.

“그럼 같이 들어가면 되겠네!”

마일렌은 매장금 장학에 지원했다.

히엔이 말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내가 사줄게.”

“안 돼.”

“왜?”

“내 시험이잖아.”

“친구가 도와주는 건 괜찮잖아.”

“그럼 어디까지가 도움인데?”

히엔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시험용 교재 한 권.

좋은 필기구.

응시 준비에 필요한 시간.

생활비.

좋은 스승.

히엔에게는 너무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들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그녀는 자기 능력만큼이나 자기 주변에 있던 것들을 조금 오래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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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히엔이 갑자기 죄책감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자기가 귀족으로 태어난 것을 사과할 생각도 없었다.

좋은 교육을 받은 것을 숨길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전처럼 모든 것을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려워졌다.

능력이 있으면 올라갈 수 있다.

여전히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능력을 기를 시간과 돈과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 둘이 어떻게 함께 성립하는지는 아직 잘 몰랐다.

히엔은 모르는 문제를 싫어한다.

그래서 일단 미뤄두었다.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마일렌은 그 태도가 아주 히엔답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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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시험에서 히엔은 스크롤을 제출했다.

요구사항은 단순했다.

정해진 위력 이상의 공격술식을 제한된 크기의 종이에 안정적으로 기록할 것.

히엔의 스크롤은 조건을 만족했다.

그리고 펼치는 순간 금빛 마법진이 세 겹으로 회전했다.

불꽃은 나선형으로 모였다.

목표물을 타격한 뒤 작은 빛조각이 꽃잎처럼 흩어졌다.

시험관이 물었다.

“마지막 연출은 채점항목에 없습니다.”

히엔은 가슴을 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넣었습니까?”

히엔은 이상하다는 듯 대답했다.

“예쁘잖아요?”

그녀는 합격했다.

---

미카레에서 히엔이 처음 깨달은 사실은 세상이 생각보다 자기 칭찬을 자주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학생 대부분이 각자의 방식으로 뛰어났다.

귀족이라는 이유로 놀라지도 않았다.

공작가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숙이는 학생도 있었지만,

시험이 시작되면 히엔의 가문은 답안지를 대신 써주지 않았다.

히엔은 그 점을 무척 좋아했다.

금빛게시판도 좋아했다.

처음 게시판 앞에 섰던 날 눈이 반짝였다.

“여기 맨 위에 내 이름 올릴 거야.”

마일렌이 말했다.

“입학한 지 사흘 됐어.”

“그러니까 지금부터 해야지!”

---

브랜던 로디우스의 수업은 히엔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없었다.

정확히는 히엔이 좋아하는 종류의 재미가 없었다.

술식 구조.

맥류 흐름.

발동 실패의 원인.

같은 주문을 수십 번 반복했을 때 발생하는 오차.

첫 과제에서 히엔은 꽤 훌륭한 스크롤을 제출했다.

정상 작동했다.

위력도 충분했다.

당연히 예뻤다.

히엔은 자신만만했다.

브랜던이 물었다.

“왜 성공했죠?”

“제가 만들었으니까요.”

“그건 제작자 이름입니다.”

히엔의 미소가 조금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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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던은 술식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의 맥류가 예상보다 많이 유입됐습니다.”

“그래도 안정화됐잖아요.”

“왜 안정화됐죠?”

“……제가 잘해서?”

“다시.”

히엔이 눈을 크게 떴다.

“성공했는데요?!”

“우연히 성공한 것과 다시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은 다릅니다.”

“우연 아니거든요!”

“그럼 설명하십시오.”

히엔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열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날 처음으로 히엔은 자기 마법을 처음부터 다시 뜯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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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히엔은 같은 스크롤을 다시 가져왔다.

이번에는 각 술식의 역할과 맥류량을 전부 기록했다.

브랜던은 한참 읽었다.

“좋아졌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히엔은 강의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마일렌을 만났다.

“마일렌.”

“응?”

히엔이 아주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브랜던 교수님이 나 칭찬했어.”

“뭐라고?”

“좋아졌대.”

마일렌이 잠깐 침묵했다.

“……그게 칭찬이야?”

“당연하지!”

히엔은 그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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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레에 들어온 뒤에도 히엔의 생각이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다.

지금도 능력은 증명해야 한다고 믿는다.

열심히 만든 결과를 가문 때문에 폄하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반대로 신분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싫어한다.

금빛게시판에 자기 이름이 올라가면 누구보다 기뻐한다.

순위가 떨어지면 눈에 불을 켠다.

누가 더 뛰어난 결과를 내면 반드시 다음에는 이기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아직도 괴상한 스크롤을 만든다.

최근에는 비가 올 때 머리카락의 롤컬만 자동으로 보호하는 방수스크롤을 개발하고 있다.

마일렌은 우산을 쓰라고 했다.

히엔은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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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누군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할 때 가끔 그 사람의 주변을 먼저 보게 되었다.

무엇을 배울 수 있었는지.

얼마나 연습할 시간이 있었는지.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여유가 있었는지.

아직 그 질문들이 능력주의와 어떻게 함께 있어야 하는지는 모른다.

히엔은 여전히 자기 재능을 믿는다.

자기가 잘한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숨길 생각도 없다.

“내가 잘하는데 왜 아닌 척해야 해?”

그게 히엔의 생각이다.

다만 요즘은 그 뒤에 한마디가 조금 늦게 따라온다.

“……근데 내가 이렇게 잘할 수 있었던 이유가 전부 나 때문인 건 아니겠지.”

그 말을 들은 마일렌은 대개 놀란다.

히엔은 바로 발끈한다.

“뭘 그렇게 놀라? 나도 생각은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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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엔은 아직 자신의 황금이 무엇인지 완전히 결정하지 않았다.

마법재능일 수도 있다.

스크롤 제작능력일 수도 있다.

남들이 쓸데없다고 하는 것에도 굳이 아름다움을 더하려는 고집일 수도 있다.

언젠가 자기만의 술식체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날이 오면 공작가의 이름보다 먼저 자기 이름이 불리길 바란다.

그리브스 공작가의 차녀가 만든 마법이 아니라,

히엔이 만든 마법이라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주 화려하게.

누구도 한눈을 팔 수 없을 정도로.

히엔은 오늘도 새 스크롤을 펼친다.

마일렌이 한 걸음 물러난다.

“히엔.”

“왜?”

“이번에는 뭐 하는 거야?”

히엔은 턱 밑에 손을 가져다대고 자신만만하게 웃는다.

“호호호! 걱정 마. 이번에는 완벽하니까!”

마일렌은 그 말이 가장 걱정된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MRN
마일렌
미카레 아카데미금융·상업학부-학생
“히엔, 잠깐만! 그 스크롤부터 내려놓고 설명해!”
🩸 HP100
💪 공격력20
🧙 마법력26
✨ 신비력5
🛡️ 방어력24
🔗 항마력30
😖 신비저항28
🏃 회피력29
과거 보기
마일렌의 어린 시절은 그리브스 공작가의 저택에서 시작된다.

정확히는 저택의 주인이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딸로서였다.

마일렌의 어머니는 그리브스 공작가에서 어린 히엔을 돌보는 유모였다.

그래서 마일렌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귀족의 저택을 드나들었다.

반짝이는 샹들리에.

끝이 잘 보이지 않는 복도.

계절마다 꽃이 바뀌는 정원.

마일렌에게는 모두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자기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도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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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엔과 마일렌은 비슷한 나이였다.

그래서 둘은 자연스럽게 함께 놀았다.

어른들이 잠깐 눈을 돌리면 정원으로 뛰어나갔다.

히엔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걸 좋아했다.

마일렌은 그 아래에서 떨어진다고 소리쳤다.

히엔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떨어졌다.

마일렌이 울면서 사람을 불렀다.

정작 무릎이 까진 히엔은 울지 않았다.

“왜 네가 울어?”

“네가 떨어졌잖아!”

“근데 아픈 건 나인데?”

“그러니까!”

어린 히엔은 이해하지 못했다.

마일렌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냥 친구가 다치면 자기도 속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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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친구라는 사실은 아이들에게는 간단했다.

어른들에게는 조금 복잡했다.

히엔이 마일렌과 같은 식탁에서 간식을 먹고 있으면 사용인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마일렌이 히엔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누군가는 먼저 허락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히엔이 먼저 대답했다.

“내가 오라고 했는데?”

그러면 대개 문제는 끝났다.

마일렌은 그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자기가 있어도 되는 이유는 히엔이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히엔에게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일렌은 조금 달랐다.

그래도 어린 시절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히엔은 친구였다.

그리고 친구가 같이 놀자고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마일렌의 어머니는 딸에게 자주 말했다.

“아가씨랑 친한 건 괜찮아.”

“응.”

“그래도 네가 아가씨인 건 아니야.”

“알아.”

“정말 알아?”

마일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더 말하지 않았다.

히엔과 놀지 말라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머니도 둘이 친한 것을 좋아했다.

다만 언젠가 세상이 둘을 다르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을 딸이 너무 늦게 배우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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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렌은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빨리 배웠다.

어머니가 저택에서 일하는 동안 자기 몫의 일을 스스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옷을 개었다.

단추를 달았다.

간단한 음식을 만들었다.

시장에 가서 물건값을 비교했다.

남은 동전을 세었다.

처음에는 그저 생활이었다.

그런데 마일렌은 숫자를 꽤 좋아했다.

동전 열 개 중 세 개를 쓰면 일곱 개가 남는다.

밀가루 가격이 조금 오르면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양이 줄어든다.

조금 비싼 천을 사도 오래 입는다면 오히려 덜 들 수 있다.

숫자는 정직했다.

적어도 제대로 계산했을 때는.

---

히엔은 그런 마일렌을 신기해했다.

어느 날 둘이 시장에 나갔다.

히엔이 예쁜 유리장식을 집어 들었다.

“이거 살래.”

마일렌이 가격표를 봤다.

다시 물건을 봤다.

다시 가격표를 봤다.

“왜?”

“비싸.”

“예쁘잖아.”

“그래도 비싸.”

히엔은 잠깐 생각했다.

“돈 있는데?”

마일렌도 잠깐 생각했다.

“……그렇긴 하지.”

히엔은 샀다.

마일렌은 그날 처음으로 돈이 있다는 것과 가격을 신경 쓰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

그렇다고 마일렌이 히엔을 부러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원하는 책을 바로 살 수 있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스승을 부를 수 있었다.

옷이 닳으면 새 옷이 생겼다.

실패해도 다시 해볼 시간이 있었다.

마일렌도 그런 삶이 편해 보였다.

가끔은 부러웠다.

하지만 히엔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히엔이 마일렌에게 자랑할 때마다 악의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새 드레스를 입으면 제일 먼저 보여줬다.

새 마법을 배우면 제일 먼저 불렀다.

그리고 자주 사고를 쳤다.

마일렌은 그 사고를 제일 먼저 수습했다.

---

“마일렌! 이것 좀 봐!”

그 말은 어린 시절부터 위험신호였다.

“뭔데?”

“새로 만든 거야!”

“뭘?”

“열어보면 알아.”

“잠깐.”

마일렌은 어느 순간부터 히엔이 가져온 물건을 바로 열지 않았다.

먼저 물었다.

폭발하느냐.

불이 붙느냐.

소리가 나느냐.

옷에 묻느냐.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 남느냐.

히엔은 매번 억울해했다.

“나를 뭘로 보는 거야?”

마일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험으로 보는 중이었다.

---

시간이 지나면서 마일렌의 어머니는 그리브스 공작가 일을 그만두었다.

히엔에게 더 이상 유모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다.

공작가는 오랫동안 일한 대가로 충분한 퇴직금을 지급했다.

마일렌의 어머니는 그 돈에 모아둔 저축을 더해 아우렐리아에 작은 가게를 열었다.

생활잡화와 천,

실,

간단한 식료품을 파는 가게였다.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족이 직접 운영할 수 있는 가게였다.

마일렌은 자연스럽게 일을 도왔다.

---

아침에는 물건을 정리했다.

낮에는 손님을 받았다.

저녁에는 장부를 적었다.

재고가 맞지 않으면 창고를 다시 셌다.

가격을 잘못 적으면 손실이 났다.

물건을 너무 많이 들여오면 팔리지 않았다.

너무 적게 들여오면 손님이 다른 가게로 갔다.

마일렌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경제를 매일 배웠다.

한 동전이 별것 아닌 사람도 있었다.

한 동전 때문에 물건 하나를 내려놓는 사람도 있었다.

같은 가격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무게였다.

---

어머니는 장사가 힘든 날에도 손님 앞에서는 웃었다.

마일렌이 물었다.

“힘들지 않아?”

“힘들지.”

“그런데 왜 웃어?”

“손님한테 화낼 일은 아니잖아.”

마일렌은 그 말을 그대로 배웠다.

자기가 힘든 것과 다른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씩 다른 것도 함께 배웠다.

자기가 피곤해도 도울 수 있으면 돕는다.

조금 손해를 봐도 다른 사람이 더 급하면 양보한다.

누군가 실수하면 대신 고쳐놓는다.

마일렌에게 그것은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다.

---

문제는 그 습관에 끝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게의 일꾼 하나가 아프면 마일렌이 대신 일했다.

어머니가 피곤하면 마일렌이 장부까지 봤다.

손님이 폐점시간 직전에 찾아오면 다시 문을 열었다.

친구가 숙제를 도와달라고 하면 자기 공부를 미뤘다.

“내가 조금 더 하면 되지.”

마일렌은 자주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대부분 문제를 해결했다.

그래서 더 쉽게 반복됐다.

---

한 번은 몸살이 심하게 난 채 가게에 나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얼굴을 보고 바로 말했다.

“들어가서 자.”

“괜찮아.”

“안 괜찮아 보여.”

“오늘 물건 들어오잖아.”

“내가 받으면 돼.”

“엄마 혼자 힘들잖아.”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마일렌.”

“응.”

“네가 쓰러지면 내가 더 힘들어.”

마일렌은 그제야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말을 오래 기억하지는 못했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에게 성실함을 줄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

히엔과의 관계도 계속 이어졌다.

둘이 매일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사는 방식은 점점 달라졌다.

히엔은 귀족교육을 받고 연회에 참석했다.

마일렌은 가게에서 물건을 팔고 장부를 적었다.

그래도 만나면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히엔은 여전히 마일렌의 가게에 예고 없이 찾아왔다.

“마일렌!”

“어서 오세— 히엔?”

“이거 봐!”

“가게 안에서는 펼치지 마.”

“아직 뭔지도 안 말했는데?!”

“그래서 더 안 돼.”

---

마일렌은 히엔의 세계를 오래 보았다.

히엔도 마일렌의 세계를 오래 보았다.

하지만 둘이 같은 것을 본 것은 아니었다.

히엔에게 마일렌의 가게는 친구 집이었다.

마일렌에게는 가족의 생계였다.

히엔은 손님이 없으면 한가로운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마일렌은 그날 매출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계산했다.

한번은 히엔이 가게에서 아주 비싼 물건을 여러 개 샀다.

“왜 이렇게 많이 사?”

“필요하니까.”

“이 실을 열다섯 뭉치나?”

“스크롤 장식에 쓸 거야.”

마일렌은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히엔은 시선을 피했다.

둘 다 그것이 친구 가게를 도와주려는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일렌은 결국 웃었다.

“다음부터는 필요 없는 거 억지로 사지 마.”

“필요하거든?”

“그럼 영수증 줄게.”

“친구 할인은?”

“없어.”

히엔은 크게 항의했다.

---

마일렌이 미카레 아카데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가게 장부 때문이었다.

어느 해 주변 상점들의 임대료가 크게 올랐다.

상인들은 불평했다.

건물주는 시장가격이 올랐다고 말했다.

어떤 가게는 가격을 올렸다.

어떤 가게는 사람을 줄였다.

한 곳은 문을 닫았다.

마일렌은 궁금해졌다.

왜 같은 거리의 가격이 한꺼번에 오르는지.

왜 어느 상인은 빚을 내도 성장하고,

어느 상인은 비슷한 빚 때문에 무너지는지.

왜 같은 상품도 장소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지.

매일 계산하고 있었지만 정작 계산 뒤의 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더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미카레는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학비가 있었다.

교재비가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가게에서 일할 시간이 줄었다.

입학시험을 준비하려면 그만큼 또 시간이 필요했다.

마일렌은 종이에 비용을 하나씩 적었다.

계산했다.

다시 계산했다.

결론은 별로 좋지 않았다.

갈 수는 있었다.

대신 가족이 몇 년 동안 상당한 부담을 져야 했다.

마일렌은 종이를 접었다.

그날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며칠 뒤 히엔이 먼저 말했다.

“나 미카레 들어갈 거야.”

“응.”

마일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너도 같이 가.”

“뭐?”

“너 계산 잘하잖아.”

“그게 입학기준 전부는 아니야.”

“공부하면 되지.”

“학비도 있고.”

“내가 내주면—”

“안 돼.”

히엔의 말이 끊겼다.

마일렌이 그렇게 빨리 거절하는 일은 드물었다.

---

히엔이 얼굴을 찌푸렸다.

“왜?”

“네가 내주면 그건 네 돈으로 다니는 거잖아.”

“친구끼리 도와줄 수도 있지.”

“알아.”

“그런데?”

마일렌은 한참 생각했다.

히엔의 도움을 받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이미 많은 도움을 받았다.

어릴 때 같이 책을 본 것도.

히엔이 알려준 마법도.

공작가에서 자연스럽게 접한 수많은 것들도.

그것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기 힘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다.

“내가 갈 수 있는지 먼저 해보고 싶어.”

히엔은 한동안 마일렌을 바라봤다.

“그럼 못 들어가면?”

마일렌이 웃었다.

“그때 다시 생각하지 뭐.”

이번에는 히엔이 마일렌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봤다.

평소와 반대였다.

---

마일렌은 매장금 장학에 지원했다.

가난하거나 충분한 교육환경을 갖추지 못했지만 재능과 가능성을 증명한 사람을 위한 제도였다.

지원서는 생각보다 길었다.

시험성적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형편.

기존 성취.

앞으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그 능력을 어디에 쓸 것인지.

마일렌은 마지막 항목에서 오래 멈췄다.

거창한 꿈은 없었다.

왕국 최고의 상인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엄청난 부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자기가 매일 보던 것들을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다.

왜 어떤 가게는 살아남고 어떤 가게는 사라지는지.

평범한 사람이 한 번 실패했다고 모든 것을 잃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마일렌은 그대로 적었다.

---

시험 준비는 쉽지 않았다.

가게 일도 계속해야 했다.

낮에는 손님을 받았다.

밤에는 공부했다.

잠드는 시간이 늦어졌다.

어머니가 몇 번이나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

“조금만 더.”

“그 조금이 매일 세 시간이야.”

마일렌은 웃었다.

“괜찮아.”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 네가 제일 많이 하는 거 알아?”

마일렌은 몰랐다.

---

히엔도 공부를 도와주려고 했다.

다만 방식이 조금 이상했다.

“이 문제집 좋아.”

“얼마인데?”

“몰라.”

“히엔.”

“왜?”

“가격을 모르고 책을 사?”

“필요하면 사는 거 아니야?”

“…….”

히엔이 잠깐 생각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마일렌은 웃었다.

그리고 책은 빌렸다.

받지는 않았다.

그 차이를 마일렌은 중요하게 생각했다.

---

결국 두 사람 모두 합격했다.

마일렌에게는 매장금 장학도 허가됐다.

통지서를 받은 날 마일렌은 한동안 종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머니가 먼저 울었다.

마일렌이 말했다.

“왜 엄마가 울어?”

“좋아서.”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들어갔잖아.”

“이제 시작인데.”

어머니가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 정도는 시작한 걸 축하해도 돼.”

마일렌은 그 말을 듣고서야 조금 웃었다.

---

히엔은 훨씬 요란했다.

마일렌의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붙었다며!”

“응.”

“봐! 내가 된다고 했잖아!”

“시험 본 건 나인데 왜 네가 뿌듯해해?”

“내 친구니까!”

히엔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마일렌도 웃었다.

둘이 같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어린 시절 같은 방에서 책을 보던 때와는 조금 달랐다.

이번에는 누구의 허락으로 옆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었다.

마일렌 자신의 이름으로 받은 자리였다.

그 점이 좋았다.

---

미카레에 들어간 뒤 마일렌은 금방 적응했다.

정확히는 적응해야 할 일을 전부 찾아서 했다.

강의시간을 정리했다.

과제마감일을 적었다.

교재비를 계산했다.

학식 중 가장 가격 대비 양이 많은 메뉴를 찾아냈다.

필기구를 공동구매하면 얼마나 절약되는지도 계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학생들이 마일렌에게 묻기 시작했다.

“이 과제 언제까지야?”

“금요일.”

“이 책 어디서 싸게 사?”

“서문 쪽 중고서점.”

“오늘 히엔 어디 있어?”

마일렌이 한숨을 쉬었다.

“그건 나도 알고 싶어.”

---

문제는 마일렌이 부탁을 거의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노트를 빌려줬다.

과제를 설명해줬다.

팀과제에서 빠진 일을 대신했다.

시험 전날 친구의 공부를 도왔다.

그러면서 자기 과제는 밤에 했다.

누군가 미안하다고 하면 늘 같은 말을 했다.

“괜찮아.”

정말 괜찮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마일렌은 둘을 잘 구분하지 않았다.

---

금융·상업학부에서 이셀라 드 로자리아의 수업을 듣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첫 수업에서 이셀라는 학생들에게 작은 상점을 하나씩 가정하게 했다.

자본.

임대료.

상품가격.

인건비.

예상매출.

모든 조건이 주어졌다.

그리고 말했다.

“가능한 오래 유지하세요.”

마일렌은 자신 있는 과제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초반 성적도 좋았다.

---

그러다 가상의 직원 하나가 병에 걸리는 상황이 주어졌다.

쉬게 하면 매출이 줄었다.

대체인력을 고용하면 비용이 늘었다.

마일렌은 직원에게 유급휴가를 주었다.

그리고 자기 인건비를 줄였다.

다음 상황에서는 상품 손실이 발생했다.

마일렌은 다시 자기 몫을 줄였다.

손님에게 보상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또 자기 몫을 줄였다.

과제 마지막 날,

마일렌의 가상상점은 살아남았다.

사장은 거의 무급으로 일하고 있었다.

---

이셀라가 물었다.

“마일렌 학생.”

“네.”

“이 가게 사장은 무엇을 먹고 삽니까?”

마일렌은 화면을 봤다.

“……조금 아껴서요?”

“얼마나 오래요?”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언제 나아집니까?”

마일렌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셀라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질문은 부드럽지 않았다.

“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당신 몫부터 없앱니까?”

“제가 조금 더 하면 되니까요.”

이셀라가 바로 물었다.

“왜 항상 당신이 더 해야 하죠?”

마일렌은 입을 다물었다.

---

그 질문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마일렌은 이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히엔에게도 가끔.

하지만 이셀라는 그것을 친절이나 걱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물었다.

누군가가 계속 자기 몫을 포기해야만 유지되는 시스템이라면,

그 시스템은 정말 제대로 작동하는가.

마일렌은 처음으로 자기 성실함을 다른 방향에서 보았다.

자기가 조금 더 하는 것으로 문제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비용을 자기에게 옮긴 것일 수도 있었다.

---

며칠 뒤 조별과제가 있었다.

학생 하나가 자기 부분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마일렌은 평소처럼 대신 하려고 했다.

밤늦게 자료를 펼쳤다.

이셀라의 질문이 생각났다.

왜 항상 당신이 더 해야 하죠?

마일렌은 한참 종이를 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학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네 부분 아직 안 끝났어.”

답장이 왔다.

“미안. 네가 좀 해주면 안 돼?”

마일렌의 손가락이 오래 멈췄다.

그리고 적었다.

“안 돼.”

보낸 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마일렌은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

다음 날 그 학생은 자기 부분을 해왔다.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친구관계도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먼저 말했다.

“어제 미안했어.”

마일렌은 잠깐 멈췄다.

습관대로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말했다.

“다음에는 미리 말해줘.”

그 정도였다.

하지만 마일렌에게는 꽤 큰 변화였다.

---

히엔은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

“잘했어!”

“뭘 그렇게까지…….”

“그러니까 내가 맨날 말했잖아. 싫으면 싫다고 하라고!”

마일렌이 히엔을 바라봤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왜?”

“내가 네 사고 수습을 몇 번 했는데?”

히엔은 잠시 침묵했다.

“그건……친구 사이의 아름다운 협력이야.”

“다음부터 수습비 받을까?”

“마일렌?”

히엔의 목소리가 조금 불안해졌다.

마일렌은 웃었다.

---

그렇다고 마일렌이 갑자기 냉정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먼저 돕는다.

누가 곤란해하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가게에 돌아가면 여전히 어머니 일을 돕는다.

히엔이 사고를 치면 여전히 쩔쩔매며 따라간다.

친구가 아프면 수업내용을 정리해서 가져다준다.

그것은 마일렌이 좋아하는 자기 모습이기도 하다.

바꾸고 싶은 것은 친절함이 아니다.

자기가 버텨야만 모든 것이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습관이다.

---

마일렌은 미카레의 능력주의도 좋아한다.

적어도 신분 때문에 시험을 볼 수 없다는 말은 듣지 않았다.

자기 이름으로 합격했다.

자기 점수로 평가받는다.

공작가의 딸과 같은 강의실에 앉아 같은 시험지를 받는다.

그 사실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시험지를 받기 전의 과정이 모두 같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자기는 가게에서 일하면서 공부했다.

히엔에게는 개인교사가 있었다.

어떤 학생은 자신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왔다.

어떤 학생은 원하는 만큼 실패해볼 여유가 있었다.

같은 출발선이라는 말은 그래서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

---

그렇다고 마일렌은 자기 성취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예전에는 장학금을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 먼저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요즘은 조금 다르다.

“장학생이라면서? 대단하네.”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마일렌은 여전히 조금 쑥스러워한다.

그래도 대답한다.

“응. 열심히 했어.”

자기가 노력했다는 사실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환경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과 자기 능력을 부정하는 것도 같은 일이 아니다.

그것도 이셀라의 수업을 들으며 배워가는 중이다.

---

한 번은 이셀라가 마일렌의 보고서를 돌려주며 말했다.

“좋습니다.”

마일렌이 긴장해서 물었다.

“정말요?”

“왜 놀라죠?”

“고칠 게 많을 줄 알았어요.”

“있어요.”

“아…….”

이셀라는 웃었다.

“좋은 보고서에도 고칠 부분은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잘한 것을 인정하는 데 비용은 들지 않아요, 마일렌 학생.”

마일렌은 그 말을 기억했다.

---

현재의 마일렌에게 거창한 야망은 아직 없다.

왕국 최고의 상인이 되겠다는 꿈도 없다.

대신 알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사람이 망하지 않는 계약은 어떻게 만드는지.

작은 상점이 한 번의 실패로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장학제도는 어떤 학생에게 얼마나 지원해야 하는지.

같은 금화 하나가 사람마다 다른 무게를 가지는 세상에서 무엇을 공정하다고 불러야 하는지.

아직 답은 모른다.

그래서 배우고 있다.

---

가끔 히엔은 말한다.

“너는 너무 걱정이 많아.”

마일렌은 대답한다.

“너는 너무 걱정이 없어.”

“그러니까 둘이 합치면 딱 좋잖아.”

“왜 합치는 걸 전제로 해?”

“친구니까?”

히엔은 너무 자연스럽게 말한다.

마일렌은 한숨을 쉰다.

그래도 웃는다.

어릴 때부터 몇 번이나 반복된 대화다.

---

마일렌은 히엔의 황금이 무엇인지 꽤 잘 안다고 생각한다.

재능.

자신감.

끈질긴 고집.

쓸데없는 것까지 화려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이상한 열정.

히엔은 마일렌에게 가끔 묻는다.

“그럼 네 황금은 뭔데?”

마일렌은 그 질문에 아직 잘 대답하지 못한다.

성실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평범해 보인다.

계산능력이라고 하기에는 더 뛰어난 학생도 많다.

사람을 잘 챙기는 것이라고 하면 능력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 웃으며 넘긴다.

“글쎄.”

히엔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을 한다.

“찾아.”

“왜 네가 명령해?”

“미카레 학생이잖아.”

“너도 학생이야.”

---

마일렌은 아직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황금은 특별한 재능 하나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사정을 숫자 뒤에서 발견하는 능력일 수도 있다.

남들이 지나치는 작은 비용을 기억하는 습관일 수도 있다.

혼자서는 버티기 힘든 사람 곁에 자연스럽게 서는 성격일 수도 있다.

다만 이제는 하나를 조금씩 배우고 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

자기 시간도 비용이다.

자기 노동도 비용이다.

자기 마음도 끝없이 꺼내 쓸 수 있는 재고가 아니다.

---

요즘 누군가 마일렌에게 부탁하면 여전히 먼저 말한다.

“응, 내가 볼게.”

그리고 잠깐 멈춘다.

자기 일정표를 확인한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본다.

정말 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그러고는 때때로 말을 고친다.

“미안. 오늘은 못 해.”

아직 그 말을 할 때마다 조금 미안하다.

그래도 예전처럼 죄책감 때문에 바로 번복하지는 않는다.

이셀라가 한번 말했다.

“거절은 상대를 버리는 행위가 아니에요.”

“네.”

“그리고 모든 일을 당신이 해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일렌은 작게 웃었다.

“그게 생각보다 어렵네요.”

“그래서 배우는 거죠.”

---

마일렌은 아직 성실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침에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고,

잊은 사람의 준비물을 챙기고,

돈을 쓸 때는 가격부터 확인할 것이다.

히엔이 위험한 스크롤을 꺼내면 가장 먼저 달려갈 것이다.

“히엔, 잠깐만!”

그리고 거의 확실하게 늦을 것이다.

작은 폭발음이 난다.

연기가 걷힌다.

히엔이 말한다.

“봐! 성공했어!”

마일렌은 검게 그을린 책상을 바라본다.

“성공의 기준부터 다시 정하자.”

히엔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다.

마일렌은 한숨을 쉰다.

그리고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지 계산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지금의 마일렌이다.

누군가를 돕는 일을 좋아하면서도,

조금씩 자기 몫까지 장부에 적는 법을 배우고 있는 사람.

TRV
트레비 터프풋
미카레 아카데미고대학·탐사학부-학생
“헤헤, 미신이라고 버리지 말자구.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부터 보자!”
🩸 HP150
💪 공격력38
🧙 마법력18
✨ 신비력3
🛡️ 방어력32
🔗 항마력24
😖 신비저항26
🏃 회피력47
과거 보기
트레비 터프풋은 어릴 때부터 길 위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델피로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도시에서 자란 그녀에게 여행자는 늘 흥미로운 사람들이었다.

북부에서 온 상인은 눈보라 이야기를 했다.

서쪽에서 온 광부는 폐광 안에서는 이름을 세 번 부르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남쪽을 다녀온 마부는 사막에서 해가 진 뒤 혼자 들리는 종소리를 따라가면 죽는다고 했다.

어른들은 그런 이야기를 대부분 웃어넘겼다.

미신.

허풍.

술자리에서 부풀려진 여행담.

트레비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근데 왜 그런 말이 생겼어?”

그 질문을 아주 자주 했다.

---

어린 트레비는 여행자의 말에서 무서운 괴물보다 이상한 세부사항을 기억했다.

비가 오기 전에 개미가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이야기.

계곡에서 갑자기 새소리가 사라지면 오래 머물지 말라는 이야기.

산에서는 햇빛이 남아 있어도 특정 바위에 그림자가 닿으면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

누군가는 정령의 경고라고 했다.

누군가는 산신의 노여움이라고 했다.

트레비는 어느 쪽도 확신하지 않았다.

다만 그 말을 기억했다.

몇 년 뒤 이유를 알게 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새소리가 사라진 계곡에서는 오래된 광맥에서 독성가스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특정 바위의 그림자가 길을 덮는 시간은 산에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하는 시간과 거의 일치했다.

종소리를 따라가면 안 된다는 사막의 이야기는 바람이 소리를 왜곡하는 방향과 관련이 있다는 설명도 들었다.

모든 이야기가 맞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틀렸다.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징크스도 많았다.

하지만 트레비는 그것 때문에 전부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열 개 중 아홉 개가 헛소리여도 하나가 사람 살리면 된 거 아니야?”

그녀에게 현장의 미신은 진실이 아니었다.

아직 이유를 모르는 자료에 가까웠다.

---

트레비가 본격적으로 탐사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은 성인이 된 뒤였다.

처음부터 탐사대의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짐을 옮겼다.

텐트를 쳤다.

밧줄을 정리했다.

식수를 계산했다.

탐사대가 지나간 자리에 무엇을 남기면 안 되는지도 배웠다.

학자들이 유적의 글자를 읽는 동안 트레비는 천장을 봤다.

용병들이 주변을 경계하는 동안에는 바닥을 봤다.

오래된 문보다 문 아래 쌓인 먼지의 방향을 먼저 봤고,

석상의 의미보다 석상 뒤쪽에서 바람이 들어오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몇몇 학자들은 그런 그녀를 탐사에 적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어떤 사람은 공부를 제대로 해보라고 권했다.

그 말을 따라 트레비는 왕립 미카레 아카데미의 고대학·탐사학부에 지원했다.

현장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합격한 것은 아니었다.

실기시험에서 길을 찾았다.

위험요소를 발견했다.

주어진 장비로 임시 고정장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평가에서 시험관이 물었다.

“왜 이쪽 길을 피했습니까?”

트레비가 대답했다.

“느낌이 이상해서요.”

시험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세요.”

트레비는 잠시 생각했다.

“그냥 보면 이상한데.”

그녀는 높은 실기점수와 별로 높지 않은 서술점수로 입학했다.

---

미카레에서 트레비는 처음으로 자신이 가진 능력의 이상한 약점을 발견했다.

현장에 내보내면 잘했다.

길을 찾았다.

사람이 밟으면 위험한 바닥을 알아챘다.

날씨가 변할 것 같으면 남들보다 먼저 장비를 챙겼다.

그런데 보고서를 쓰라고 하면 자주 막혔다.

‘왼쪽 통로는 위험해 보였음.’

교수가 그 문장에 줄을 그었다.

‘왜?’

트레비는 다시 썼다.

‘뭔가 이상했음.’

다시 줄이 그어졌다.

‘무엇이?’

트레비는 한동안 종이를 바라봤다.

현장에서는 분명 알고 있었다.

공기의 냄새가 조금 달랐다.

돌에 낀 이끼의 색도 달랐다.

바닥의 습기와 벽의 균열 방향도 평범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감각으로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는 일은 전혀 다른 능력이었다.

트레비는 그 차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자기가 현장에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

1학년 여름.

트레비는 남부 탐사단에 따라 안발룽으로 향했다.

그녀에게는 처음 밟는 대규모 사막이었다.

준비도 했다.

지도도 확인했다.

식수량도 계산했다.

현지 상인들에게 이동시간도 물었다.

트레비는 자신이 꽤 잘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준비한 사람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도에 표시된 작은 수원이 말라 있었다.

지난 계절에 모래언덕의 모양이 바뀌면서 이동거리도 예상보다 길어졌다.

처음에는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판단도 늦었다.

물을 아끼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이 마신 뒤였다.

햇빛은 생각보다 오래 갔다.

입안이 말랐다.

머리가 아팠다.

발걸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트레비는 그 상태에서도 방향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장을 잘 아니까.

위험을 잘 아니까.

다른 사람보다 많이 다녀봤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같은 모래언덕을 두 번째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알아챘다.

---

카레나가 트레비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바위 그늘에 반쯤 쓰러져 있었다.

안발룽의 대족장은 처음에는 죽은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트레비는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고 항의했다.

“숨은 쉬고 있었거든.”

카레나는 웃었다.

“그걸 잘했다고 말하는 거냐?”

트레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카레나와 함께 움직이던 사람들이 그녀에게 물을 먹이고 몸을 식혔다.

정신을 제대로 차렸을 때 카레나가 처음 물은 것은 이름도 출신도 아니었다.

“물을 얼마나 가지고 왔지?”

트레비가 양을 말했다.

“며칠 잡았고?”

그것도 말했다.

“예비분은?”

트레비가 조용해졌다.

카레나는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용감한 게 아니라 계산을 틀린 거잖아.”

트레비는 반박하고 싶었다.

그런데 맞는 말이었다.

---

그 뒤 트레비는 예정에 없던 시간을 카르하에서 보내게 되었다.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카레나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카레나는 트레비를 두고 델피로 사람치고는 겁이 없다고 말했다.

트레비는 그 말이 칭찬인지 놀림인지 지금도 확신하지 못한다.

카레나는 사막에서 살아남는 법을 가르쳤다.

물을 찾는 법.

바람이 바뀌기 전 모래 표면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는 법.

밤에 체온을 지키는 법.

낮에 쓸데없이 움직이지 않는 법.

짐승의 흔적에서 가까운 수원을 짐작하는 법.

길을 잃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이 걷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카레나는 설명하면서도 오래된 안발룽의 속설을 자주 함께 말했다.

어떤 별 아래에서는 우물을 파지 말라.

모래가 노래하면 천막을 낮춰라.

도마뱀이 해가 뜨기 전에 바위에서 내려오면 서둘러 그늘을 찾아라.

트레비는 매번 물었다.

“왜?”

카레나는 아는 것은 설명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했다.

그 대답이 트레비는 마음에 들었다.

모른다고 해서 버리지 않았다.

안다고 우기지도 않았다.

그저 살아남은 사람들이 오래 기억해온 말로 취급했다.

트레비는 카르하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거의 다 채웠다.

속설.

관찰.

가능한 이유.

확인하지 못한 것.

틀린 것으로 확인된 것.

그것이 그녀가 처음으로 제대로 만든 현장기록이었다.

---

미카레로 돌아온 뒤 트레비는 남부 탐사 보고서를 제출했다.

발견한 유물은 많지 않았다.

새로운 유적도 찾지 못했다.

지도에 없던 수원의 소실을 확인했고,

몇몇 이동경로를 수정했으며,

안발룽에서 배운 생존법을 정리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도 적었다.

예비 식수 부족.

철수판단 지연.

탈수상태에서의 방향감각 상실.

누군가 물었다.

“이 탐사에서 가장 큰 성과가 뭐였습니까?”

트레비가 대답했다.

“제가 살아 돌아온 거요.”

몇몇 학생이 웃었다.

트레비는 웃지 않았다.

“진짜로.”

그녀에게 탐사의 성공은 발견한 물건의 가치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발견하고 죽으면 다음 탐사는 없다.

논문을 쓰기도 전에 전원이 사라진 탐사대는 뛰어난 탐사대가 아니다.

살아서 돌아오는 것도 성과였다.

트레비는 그 믿음을 지금도 버리지 않았다.

---

하지만 그 뒤 브랜던 로디우스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다음 사람이 살아 돌아오게 하려면 무엇을 남겨야 합니까?”

트레비는 수첩을 들어 보였다.

브랜던은 몇 장을 읽었다.

그리고 한 문장을 가리켰다.

‘이 지형에서는 오래 머물면 안 됨. 느낌이 안 좋음.’

트레비가 눈을 피했다.

“……저건 고칠 거예요.”

브랜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현장에 없을 때도 작동하는 기록이어야 합니다.”

그 말은 트레비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남았다.

자신이 살아 돌아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자신이 발견한 위험을 다음 사람이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감각으로 아는 것을 글로 옮겨야 한다.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형태로 남겨야 한다.

그것은 트레비에게 절벽을 오르는 것보다 어려울 때가 많았다.

---

한 번은 후배 학생과 짧은 현장실습을 나간 적도 있었다.

좁은 암반지대를 지나며 트레비가 말했다.

“저쪽은 밟지 마.”

후배가 물었다.

“왜요?”

트레비가 익숙하게 대답했다.

“보면 알잖아.”

후배는 정말 몰랐다.

잠시 뒤 그 학생이 비슷한 지형에서 잘못된 돌을 밟았다.

큰 사고는 아니었다.

발목을 삐끗한 정도였다.

하지만 트레비는 그날 이상할 만큼 말이 적었다.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 학생은 몰랐다.

그리고 자신은 알려주지 못했다.

그 차이를 단순히 경험 부족이라고 부르면 편했다.

하지만 그러면 경험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직접 다쳐가며 배워야 한다.

트레비는 그런 탐사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

그 뒤부터 그녀의 기록 방식이 조금씩 달라졌다.

‘이상함.’

대신,

‘암반 아래쪽의 색이 주변보다 밝음.’

‘표면에 모래가 고이지 않음.’

‘체중을 실으면 안쪽에서 빈 소리가 남.’

이라고 썼다.

현장에서 들은 미신도 그대로 기록하되 옆에 표시를 붙였다.

확인됨.

추정.

미확인.

반례 있음.

그녀는 여전히 현장의 직감을 믿는다.

사람이 모든 위험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랜 경험이 만들어내는 감각에는 말보다 빠른 것이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래서 고민한다.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설명되지 않은 경험을 기록에서 빼버리면 중요한 경고를 잃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유를 모르는 말을 그대로 가르치면 미신을 지식으로 포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경계는 아직도 어렵다.

---

현재의 트레비는 남부 탐사를 갈 일이 생기면 가능한 한 카르하를 경유한다.

카레나에게 얼굴을 비추기 위해서다.

새로운 생존법을 듣기도 하고,

자기가 정리한 기록을 보여주기도 한다.

카레나는 틀린 부분이 있으면 가차 없이 지적한다.

“이거 누가 가르쳤냐?”

“당신.”

“내가 이렇게 멍청하게 가르쳤을 리가 없는데.”

“그럼 다음 판에는 공동저자로 이름 넣어줄게.”

“싫다.”

트레비는 그런 시간을 좋아한다.

미카레에서는 논문과 성적표에 들어갈 수 없는 이야기들도 카르하에서는 살아 있는 지식으로 돌아다닌다.

그녀는 그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리고 싶지 않다.

현장의 경험도.

그 경험을 검증하고 남기는 학문도.

---

트레비는 지금도 성적순위에는 큰 관심이 없다.

유적에서 떨어질 때 성적표가 밧줄을 잡아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것만으로 학문을 가볍게 보지도 않는다.

좋은 기록 하나가 자신이 없는 탐사대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트레비가 가장 오래 붙잡고 있는 문제는 유적의 비밀이 아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몸이 먼저 알아차리는 위험을 어떻게 문장으로 바꿀 것인가.

사람들이 미신이라 부르는 경험 속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

그녀에게 탐사는 여전히 살아서 돌아오는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거기에 하나가 더 붙었다.

다음 사람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도록 남기는 것.

트레비는 아직 그 일을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계속 적는다.

지우고,

다시 적고,

확인한다.

그리고 누군가 현장에서 오래된 징크스를 비웃으면 여전히 같은 말을 한다.

“헤헤, 미신이라고 버리지 말자구.”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부터 보자!”

SAY
세이카 라벨
미카레 아카데미금융·상업학부-유학생
“내가 제일 잘할 필요 있어? 제일 잘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면 되잖아.”
🩸 HP90
💪 공격력17
🧙 마법력30
✨ 신비력8
🛡️ 방어력20
🔗 항마력33
😖 신비저항31
🏃 회피력41
과거 보기
세이카 라벨이 어린 시절 가장 많이 본 것은 배가 아니라 사람의 흐름이었다.

까까몰리의 항구에는 늘 누군가 도착했고,

늘 누군가 떠났다.

상인이 상자를 끌고 내려왔다.

여행자가 다음 항로를 물었다.

조합원이 화물표를 들고 뛰어다녔다.

어제까지 서로 이름도 모르던 사람들이 같은 비행선에 올라탔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대륙 반대편에서 함께 장사를 하고 있었다.

세이카의 부모는 천익항로조합에서 일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조합 사무소와 항구를 놀이터처럼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어린 세이카가 가장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은 물건의 가격이 아니었다.

사람 한 명을 잘 소개하는 것만으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는 일이었다.

---

어느 날 항구에 작은 장식품을 잔뜩 싣고 온 상인이 있었다.

물건은 예뻤다.

하지만 까까몰리에서는 팔리지 않았다.

그 상인은 며칠째 같은 자리에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세이카는 그 물건을 보다가 얼마 전 만난 여행자를 떠올렸다.

델피로에서 온 사람이었다.

수도의 귀족가에서 새로운 장식품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세이카는 두 사람을 데려와 서로 소개했다.

“이 아저씨 그거 팔고 싶대.”

“그리고 이 언니는 그런 거 찾는다던데.”

어른들은 웃었다.

그리고 실제로 거래가 성사되었다.

규모가 큰 거래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이카에게는 굉장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새로 만들지 않았다.

물건도 원래 있었다.

사고 싶은 사람도 원래 있었다.

둘 사이에 서로가 있다는 사실만 없었다.

자기가 한 일은 그것을 연결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가치가 생겼다.

세이카는 그 감각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

그 뒤로 그녀는 사람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이름.

출신.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찾는지.

어디로 가는지.

누구와 사이가 좋은지.

어떤 물건을 좋아하는지.

숫자를 외우는 것보다 사람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이 더 쉬웠다.

어떤 선은 상품으로 이어졌다.

어떤 선은 정보로 이어졌다.

어떤 선은 일자리로 이어졌다.

어떤 선은 친구가 되었다.

세이카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누구와 만나면 재미있을까.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

무엇이 필요할까.

부모는 그런 딸을 재미있어했다.

천익항로조합장 피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아나는 세이카의 부모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고,

세이카에게는 높은 직위의 조합장이라기보다 어릴 때부터 봐온 친숙한 어른에 가까웠다.

가끔 세이카가 조합 사무실에 뛰어와 말했다.

“피아나! 좋은 생각 났어!”

그러면 피아나는 대개 서류에서 눈을 들지도 않고 물었다.

“이번엔 누구랑 누구를 엮으려고?”

“엮는 게 아니라 소개하는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할 때가 제일 불안하단다.”

---

세이카가 사람을 연결하는 일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대부분은.

한 번은 같은 또래의 아이 둘을 억지로 만나게 한 적이 있었다.

한 명은 비행정 정비에 관심이 많았고,

다른 한 명의 부모는 작은 정비공방을 운영했다.

세이카에게는 너무 명확한 연결이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제대로 묻지 않고 약속을 잡았다.

둘을 같은 자리에 불렀다.

“봐! 너는 배우고 싶고, 너희 집은 사람 필요하잖아.”

세이카는 좋은 일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정비공방 집 아이의 얼굴이 굳었다.

그 아이는 부모의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친구들에게 집안 형편이나 일손 부족을 이야기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배우고 싶어하던 아이 역시 당황했다.

무료로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러 나온 사람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둘 모두 크게 화내지는 않았다.

세이카도 악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좋은 결과가 가능하다는 것과,

사람들이 그 연결을 원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

그날 저녁 세이카는 피아나에게 불평하듯 이야기했다.

“잘될 수 있었는데.”

피아나는 물었다.

“누구한테?”

세이카는 바로 대답했다.

“둘 다.”

“둘 다 그렇게 말했니?”

세이카가 입을 다물었다.

피아나는 화내지 않았다.

그저 서류 한 장을 접어 옆으로 밀었다.

“항로는 목적지만 맞는다고 좋은 항로가 되는 게 아니야.”

“배가 다닐 수 있어야 하고, 사람들이 타고 싶어야 하지.”

세이카는 그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습관을 고치는 것은 달랐다.

사람을 보면 연결점부터 찾는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사실 세이카는 그것을 완전히 버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 능력 덕분에 실제로 많은 일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

미카레 아카데미에 유학하기로 한 것도 그런 성향과 관련이 있었다.

델피로는 까까몰리와 달랐다.

훨씬 큰 시장이 있었다.

귀족가의 자본이 있었다.

왕실 행정이 있었다.

금융기관과 상단이 있었고,

마법 연구와 새로운 기술이 시장으로 흘러들었다.

세이카에게 미카레는 학교이기 전에 거대한 교차로처럼 보였다.

마법사가 있었다.

행정가가 있었다.

상인을 꿈꾸는 학생이 있었다.

검사가 있었다.

탐사자가 있었다.

심지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입학한 첫날부터 세이카는 재미있었다.

“여기 사람 진짜 많다.”

누군가 말했다.

“학교니까 당연하지.”

세이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종류가 많다고.”

---

미카레 학생들은 성취에 민감했다.

시험성적.

연구결과.

대련순위.

사업성과.

그리고 황금등급.

세이카는 처음부터 그 분위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순위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경쟁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단지 자신에게는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누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보다,

누가 어떤 걸 잘하는지가 더 궁금했다.

마법·맥류학부 학생이 열보존 술식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 술식으로 상품을 운송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고대학·탐사학부에서 새로운 광물 표본을 가져오면,

누가 그것을 분석하고 누가 판매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학생시장에서 물건이 안 팔리는 학생을 보면,

상품보다 판매장소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먼저 봤다.

누군가 물었다.

“너는 몇 등이야?”

세이카는 정말 몰랐다.

“안 봤는데.”

“안 궁금해?”

“내가 만족했으면 된 거 아니야?”

그러다 잠깐 생각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못하는 건 잘하는 사람 찾으면 되고.”

---

세이카가 자신의 방식에 확신을 갖게 된 사건도 미카레에서 있었다.

한 수업에서 학생들은 작은 사업안을 만들어야 했다.

세이카가 맡은 팀은 처음에는 엉망이었다.

좋은 상품을 생각하는 학생은 원가계산을 못했다.

숫자에 강한 학생은 판매에 관심이 없었다.

마법을 쓸 줄 아는 학생은 상업 자체를 어려워했다.

모두가 자기 약점을 고치려고 했다.

세이카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왜 다 잘하려고 해?”

학생들이 그녀를 바라봤다.

“넌 계산해.”

“넌 상품 설명해.”

“넌 술식 안정화하고.”

“나는 필요한 사람 데려올게.”

결과는 좋았다.

누구도 혼자서는 만들 수 없었던 성과였다.

세이카는 그때 자신의 황금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신이 가장 강한 사람이 되는 것.

가장 뛰어난 상인이 되는 것.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것.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재능.

서로 다른 황금 사이에 길을 만드는 것.

---

하지만 성공은 세이카의 나쁜 습관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사람 사이의 문제를 보면 해결법부터 생각했다.

누군가 돈 때문에 고민하면 일자리를 소개했다.

수업 때문에 힘들다고 하면 잘하는 학생을 데려왔다.

교수와 갈등이 생기면 그 교수와 친한 조교를 찾아봤다.

대부분은 유용했다.

그래서 세이카는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친한 학생 하나가 기숙사에서 울고 있었다.

가족과 크게 다퉜다고 했다.

세이카는 이야기를 조금 듣다가 바로 말했다.

“편지 보내기 어려우면 내가 까까몰리 쪽 우편 아는 사람 소개해줄까?”

상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대신 말 전해줄 사람?”

“그것도 아니야.”

“그러면 뭐가 필요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친구가 말했다.

“그냥 좀 들어주면 안 돼?”

세이카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

그날 그녀는 이상하게 오래 앉아 있었다.

할 일이 없었다.

정확히는 해결할 일이 없었다.

친구는 이미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단지 속상했다.

세이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옆에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세이카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는 데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상대가 원하는 것이 해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은 자주 놓쳤다.

문제가 있으면 연결한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진 사람을 찾는다.

그 사고방식은 상품과 사업에는 훌륭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

마일렌과 가까워진 뒤에는 그런 차이를 더 자주 느꼈다.

세이카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먼저 사람부터 모았다.

“이거 할 수 있는 사람 알아!”

마일렌은 물었다.

“그 사람한테 물어봤어?”

“아직.”

“보수는?”

“그것도 아직.”

“계약기간은?”

“……마일렌.”

“응?”

“너랑 있으면 신나는 이야기가 너무 빨리 장부가 돼.”

그럼에도 세이카는 마일렌을 신뢰했다.

자신이 만든 연결이 실제로 오래 유지되게 만드는 것은 자신과 다른 종류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일렌이 혼자 일을 떠안으려 하면 세이카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네가 다 해?”

“내가 하면 되니까.”

“사람 부르면 되잖아.”

그 부분만큼은 세이카가 더 빨랐다.

---

세이카는 지금도 피아나에게 종종 편지를 보낸다.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물건을 봤는지.

무슨 사업이 재미있어 보이는지.

피아나가 답장에 쓰는 질문도 대체로 비슷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누구와 누구를 연결했니?’

예전의 세이카라면 자랑스럽게 이름부터 늘어놓았을 것이다.

요즘은 가끔 한 줄을 더 쓴다.

‘둘 다 원한다고 확인했어.’

그러면 다음 답장에는 짧게 적혀 있다.

‘많이 컸구나.’

세이카는 그 문장이 조금 얄밉다.

---

그렇다고 그녀가 조심스러운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처음 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다.

재미있는 기술이 있으면 누구에게 보여주면 좋을지부터 생각한다.

학생시장을 걷다가도 갑자기 멈춰서 친구에게 말한다.

“아, 너 이 사람 만나야겠다.”

그리고 왜냐고 묻기도 전에 상대를 찾아간다.

예전보다 한 가지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소개해도 돼?”

그 질문이다.

세이카에게는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자신에게 너무 분명하게 좋은 연결이 보일수록 더 그렇다.

---

세이카는 아직도 개인순위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별로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반갑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미카레에서 지내며 한 가지 고민은 생겼다.

연결되지 않아도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에게도 소개하고 싶지 않은 비밀.

상품이 되지 않아도 계속하고 싶은 연구.

도움이 되지 않아도 곁에 있고 싶은 친구.

해결되지 않아도 들어줘야 하는 슬픔.

세이카는 그런 것들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머리로는 안다.

그런데 누군가 힘들어하면 여전히 해결책 세 개가 먼저 떠오른다.

---

그래도 그녀는 자기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만나지 못해서 사라지는 가능성이 너무 많다.

필요한 사람을 찾지 못해 접히는 연구가 있다.

팔 곳을 찾지 못해 버려지는 물건이 있다.

도움을 줄 사람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서로의 존재를 몰라 실패하는 일도 있다.

세이카는 그런 빈 공간을 보면 참기 어렵다.

그래서 연결한다.

다만 이제 조금씩 배운다.

연결한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줄 하나를 긋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 선의 양쪽에는 각자의 의지와 사정과 감정이 있다는 것을.

자신이 길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그 길을 걷게 만들 권리까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

누군가 세이카에게 묻는다.

“그럼 네 황금은 뭐야?”

세이카는 이제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내 거?”

주변을 한번 둘러본다.

다른 학부 학생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

각자 다른 것을 잘하는 사람들.

그리고 웃는다.

“남의 황금끼리 만나게 하는 거.”

그 대답 뒤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

어디까지 연결해야 하는가.

언제 손을 떼야 하는가.

사람을 돕는 것과 사람의 삶에 끼어드는 것은 어디서 갈리는가.

세이카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누군가에게 사람을 소개하기 직전,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질문을 하나 먼저 한다.

“있잖아.”

“내가 아는 사람 하나 있는데…… 만나볼래?”

LEO
레오넬 폰 아르제트
미카레 아카데미왕국행정학부-학생
“환경을 생각하면 대단한 성취입니다.”
🩸 HP140
💪 공격력29
🧙 마법력25
✨ 신비력4
🛡️ 방어력35
🔗 항마력31
😖 신비저항30
🏃 회피력27
과거 보기
레오넬 폰 아르제트는 귀족이라는 신분을 부끄러워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특별히 자랑스러워한 적도 많지 않았다.

그에게 귀족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권리라기보다 역할에 가까웠다.

아르제트 가문에서는 그렇게 가르쳤다.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다면 그 옷값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아야 한다.

넓은 토지를 가졌다면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겨울을 넘길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세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면 흉년에도 같은 액수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병사를 부릴 수 있다면 그 병사의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책임져야 한다.

어린 레오넬은 그런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배웠다.

“많이 가진 사람에게는 많이 책임질 의무가 있다.”

그것은 아르제트 가문에서 좋은 귀족을 판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이었다.

---

레오넬은 어린 시절부터 영지 시찰에 따라다녔다.

축제에 얼굴을 비추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곡물창고를 봤다.

수로를 봤다.

세금장부를 봤다.

농민들의 민원을 듣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지루했다.

어른들이 땅의 경계와 배수로의 너비를 두고 한참 이야기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 해 큰비가 내렸다.

수로 하나가 무너졌다.

몇 개 마을의 밭이 물에 잠겼다.

아르제트 가문은 그해 해당 지역의 세금을 낮췄고,

창고에 있던 곡물을 풀었으며,

복구비 일부를 가문의 재산으로 부담했다.

레오넬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저건 왕실에서 보상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대답했다.

“일부는.”

“그런데 왜 우리 돈도 씁니까?”

아버지는 아주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땅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그 대답은 어린 레오넬에게 깊이 남았다.

권한이 있는 사람이 먼저 책임진다.

그것이 그가 배운 귀족이었다.

---

물론 모든 귀족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오넬도 알고 있었다.

영지민을 하인보다 못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세금을 자기 사치에 쓰는 사람도 있었다.

평민의 말을 들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린 레오넬은 그런 귀족을 볼 때마다 불쾌해했다.

귀족이라는 이유로 존중받고 싶다면 귀족다운 책임부터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평민을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귀족들을 싫어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경험은 레오넬을 신분제에 의문을 품는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문제는 귀족이라는 제도가 아니라 책임을 다하지 않는 귀족이다.

좋은 귀족이 더 많아지면 된다.

권력과 교육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면 된다.

그 믿음은 오랫동안 한 번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

사촌누나인 레이네 폰 아드리아노도 레오넬에게는 그런 믿음을 뒷받침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레이네는 강했다.

신분도 있었다.

황금깃털기사단에서 책임 있는 위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권위를 함부로 쓰지 않았다.

보고서를 확인했다.

명령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판단을 멈추지 않았다.

부하에게도 자기 생각을 요구했다.

레오넬은 어린 시절부터 그런 사촌누나를 존경했다.

누군가 레이네의 이야기를 하면 드물게 어린 동생 같은 표정을 보이기도 했다.

레이네는 그런 레오넬에게 특별히 거창한 가르침을 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끔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니?”

“그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말했니?”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같은 일이니?”

어린 레오넬은 그 질문들이 왜 필요한지 잘 몰랐다.

자신은 좋은 일을 하려고 했으니까.

---

레오넬은 공부에도 성실했다.

왕국의 행정은 귀족이 감각만으로 다룰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배웠다.

법을 공부했다.

세제를 공부했다.

토지제도를 공부했다.

구휼과 재난행정을 공부했다.

숫자와 문서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언젠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립 미카레 아카데미의 왕국행정학부를 선택한 이유도 자연스러웠다.

가문의 이름만으로 관직에 앉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배운 뒤 책임을 지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미카레의 능력주의는 레오넬과 잘 맞았다.

귀족이어도 무능하면 낮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평민이어도 뛰어나면 높은 자리에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에게 계급의식이 강하다는 말을 들으면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

레오넬은 평민 학생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먼저 인사했다.

좋은 답안을 보면 칭찬했다.

자신보다 뛰어난 학생에게 배우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장학생 제도에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능력이 있는데 돈이 없다는 이유로 교육받지 못하는 것은 국가의 손실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참고서를 살 형편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 책을 빌려주기도 했다.

추천이 필요한 학생에게는 자신이 아는 사람을 소개하려 했다.

모두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레오넬은 오랫동안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다.

그가 자주 쓰는 표현이 있었다.

“그 환경에서 이 정도까지 해낸 것은 정말 대단합니다.”

레오넬에게는 분명 칭찬이었다.

어려운 조건을 극복한 사람의 노력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듣는 사람 모두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

마일렌을 처음 제대로 알게 된 것도 수업에서였다.

금융·상업학부 학생이었지만 교차과목 때문에 같은 행정수업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과제는 재난지역의 지원예산을 배분하는 것이었다.

마일렌의 계산은 눈에 띄었다.

총액만 맞춘 것이 아니었다.

구호물자의 운송비.

임시인력의 인건비.

다음 분기까지 유지할 비용.

현장에서 쉽게 빠뜨리는 작은 지출까지 적혀 있었다.

레오넬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수업이 끝난 뒤 그녀에게 말했다.

“환경을 생각하면 대단한 성취입니다.”

마일렌은 잠깐 그를 바라봤다.

“고마워요.”

말은 정중했다.

하지만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레오넬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

그 뒤에도 둘은 몇 번 같은 수업과 과제에서 마주쳤다.

레오넬은 마일렌을 점점 높게 평가했다.

장학생이라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꼼꼼했다.

사람들이 지나치는 비용을 잘 봤다.

누가 그 비용을 부담하는지도 확인했다.

레오넬은 그런 사람은 행정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마일렌이 자료를 여러 권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말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마일렌은 괜찮다고 했다.

레오넬은 책 몇 권을 이미 받아 들고 있었다.

“이 정도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일렌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선배님.”

“네.”

“다음부터는 먼저 물어봐줘요.”

레오넬이 눈을 깜빡였다.

“도움이 필요하신지 말입니까?”

“네.”

“불편하셨습니까?”

“조금요.”

레오넬은 정말로 당황했다.

---

마일렌은 레오넬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 사실도 그에게는 더 어려운 문제였다.

마일렌은 평민으로 살아오며 귀족이 평민을 어떻게 대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귀족도 봤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도 봤다.

자신의 신분을 당연한 우위로 여기는 사람도 봤다.

레오넬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악의가 없었다.

사람을 깔보려는 의도도 없었다.

실제로 책임감이 강했고,

도울 수 있는 상황에서는 기꺼이 도왔다.

그래서 마일렌은 그를 나쁜 귀족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저 가끔 말했다.

“레오넬 선배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잠시 생각한 뒤 덧붙였다.

“근데 가끔 제가 뭘 원하는지는 이미 스스로가 안다고 생각해요.”

그 말이 돌고 돌아 레오넬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화가 나지 않았다.

대신 꽤 오래 고민했다.

---

방학 때 레이네를 만났을 때 레오넬은 그 이야기를 꺼냈다.

평소라면 사적인 고민을 쉽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네에게는 묻고 싶었다.

“도와주는 것이 잘못입니까?”

레이네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그 사람이 부탁했니?”

레오넬이 잠시 멈췄다.

“아닙니다.”

“도움이 필요해 보였고?”

“그렇습니다.”

“네가 틀렸을 수도 있고?”

레오넬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레이네가 말했다.

“돕는 게 문제라는 말이 아니야.”

“묻지 않고 대신 정하는 것과 돕는 건 다른 일이지.”

레오넬은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

도울 능력이 있는데도 상대가 부탁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정말 책임 있는 행동인가.

위험을 알고 있는데도 선택권이라는 이유로 개입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레이네는 그 질문에도 간단한 정답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판단하는 거야.”

레오넬에게는 별로 친절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

미카레에서 행정을 공부할수록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정책은 모든 사람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고 시행할 수 없다.

세금도 그렇다.

재난대피도 그렇다.

전염병 통제도 그렇다.

국가는 때때로 개인의 선택보다 전체의 안전을 먼저 판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귀족이나 행정가가 다른 사람 대신 판단하는 것은 언제 정당한가.

레오넬은 그 경계를 알고 싶었다.

한 수업에서는 가상의 하천 정비안을 만드는 과제가 주어졌다.

레오넬은 가장 효율적인 안을 만들었다.

홍수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비용도 합리적이었다.

대신 강변의 작은 시장을 이전해야 했다.

레오넬은 당연히 보상금을 책정했다.

기존 상인들이 다른 곳에서 장사할 수 있도록 지원금도 넣었다.

좋은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교수가 물었다.

“시장 상인들과 협의했습니까?”

레오넬은 말했다.

“충분한 보상안을 마련했습니다.”

“그건 제가 물은 것이 아닙니다.”

레오넬은 멈췄다.

그 순간 마일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먼저 물어봐달라고.

---

레오넬은 자신이 평민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자신이 있다.

유능한 평민이 무능한 귀족보다 높은 자리에 가는 것도 옳다고 생각한다.

왕국이 재능을 신분 때문에 버리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 점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동등한 관계라는 말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멈춘다.

자신의 가문에는 실제로 더 많은 재산이 있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사람을 고용할 수도 있다.

영지에 대한 법적 권한도 있다.

그렇다면 그 권한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여기까지는 확신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책임진다는 것은 이끄는 것인가.

돕는 것인가.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인가.

아니면 때때로 상대의 선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인가.

그가 어린 시절부터 배운 귀족의 의무에는 그 질문의 답이 명확하지 않았다.

---

한 번은 마일렌에게 직접 물은 적도 있었다.

“제가 하는 말이 그렇게 불편합니까?”

마일렌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더 어렵죠.”

레오넬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마일렌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선배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그 말은 칭찬이어야 했다.

이상하게도 레오넬은 긴장했다.

“사람 무시하는 귀족이 어떤지는 알아요.”

“레오넬은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런데 가끔은…… 내가 할 수 있는지보다 선배님이 저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아요.”

레오넬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일렌이 덧붙였다.

“도와주는 게 싫다는 뜻은 아니에요.”

“제가 필요하다고 말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레오넬은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

그 뒤로 그는 작은 습관 하나를 바꾸려고 한다.

먼저 묻는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괜찮다고 하면 한 번 더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정보가 있다면 알려준다.

결정은 상대에게 남긴다.

아직 자연스럽지는 않다.

위험해 보이는 선택을 하는 사람을 보면 개입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든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있다.

실제로 더 잘 아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더 어렵다.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만 받아들이면 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맞는 경우에도 상대의 선택을 어디까지 존중해야 하는가.

레오넬은 그 질문에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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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도 귀족에게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자기 것만 챙겨도 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영지민이 굶는데 영주가 연회를 여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재난이 났을 때 귀족이 자기 재산부터 지키는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교육받은 사람이 무지한 사람을 속이는 것도 경멸한다.

그 신념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레오넬에게 문제는 귀족의 책임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다.

그 책임을 어떤 방식으로 행사해야 하느냐이다.

보호한다는 말 속에는 얼마나 많은 권력이 숨어 있는가.

선의는 언제 시혜가 되는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 결정권까지 가진다고 착각하는 순간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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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그는 레이네를 생각한다.

레이네는 명령을 따른다는 이유로 자신의 판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레오넬은 그 말을 이제 조금 다른 방향에서도 생각한다.

평민에게 자신의 판단을 가지라고 말하면서,

정작 그 판단이 자신의 것과 다를 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질문은 불편하다.

그래서 피하지 않는다.

레오넬은 원래 자신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책임을 내려놓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

현재의 레오넬은 여전히 반듯하다.

수업시간보다 일찍 도착한다.

제복은 빈틈없이 정리되어 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면 가장 먼저 움직이는 편이다.

평민 학생의 뛰어난 성적도 진심으로 칭찬한다.

그리고 가끔 여전히 이상한 칭찬을 한다.

“주어진 환경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성취입니다.”

상대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레오넬도 이제 그 표정을 조금 알아본다.

잠시 멈춘다.

“……방금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습니까?”

예전이라면 왜 문제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지금은 묻는다.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레오넬에게는 꽤 큰 변화다.

---

그는 언젠가 가문의 책임을 실제로 이어받아야 한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수천 명의 삶을 책임지는 자리에서 모든 사람의 선택을 기다릴 수는 없을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책임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삶을 대신 결정해서도 안 될 것이다.

좋은 귀족이란 무엇인가.

좋은 행정가란 무엇인가.

사람을 보호하는 것과 사람 위에 서는 것은 정말 분리될 수 있는가.

레오넬은 아직 귀족주의를 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끝까지 버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여전히 귀족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다만 이제 한 가지를 예전보다 자주 의심한다.

더 큰 책임이 정말 더 큰 결정권까지 의미하는가.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레오넬은 계속 배우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돕기 위해 손을 내밀기 직전,

조금 어색하더라도 먼저 묻는다.

“제가 도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BSK
세리나 바스카르
미카레 아카데미검술·전술학부-3학년
“정석을 몰라서 안 하는 줄 알아? 알아야 어디서 틀지도 알지.”
🩸 HP150
💪 공격력54
🧙 마법력8
✨ 신비력2
🛡️ 방어력37
🔗 항마력19
😖 신비저항22
🏃 회피력65
과거 보기
세리나는 어릴 때부터 정석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검을 처음 배울 때도 그랬다.

발은 여기.

검끝은 저기.

상대가 내려치면 왼쪽으로 받고,

찌르면 반 걸음 물러나며 흘린다.

하나를 배우면 다음 동작이 정해져 있었다.

세리나에게 그것은 검술이라기보다 약속처럼 보였다.

상대도 알고,

자기도 알고,

서로 다음에 무엇을 할지 알고 있는 약속.

어린 세리나는 그게 몹시 재미없었다.

“진짜 싸움에서도 상대가 그렇게 해줘?”

교관은 대답했다.

“그러니까 기본을 배우는 거다.”

세리나는 납득하지 않았다.

“상대가 기본대로 안 하면?”

“그래도 네 자세는 무너지면 안 된다.”

그 말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리나가 듣고 싶었던 것은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였다.

---

세리나는 검술수업에서 아주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몸은 빨랐다.

상대의 시선을 잘 봤고,

발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려는지도 빨리 알아챘다.

사람이 공격하기 직전에 어깨와 허리가 아주 조금 달라진다는 것도 남들보다 일찍 알았다.

문제는 그 능력을 배운 대로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교관이 가르쳐준 반격 대신 몸을 낮춰 옆으로 빠졌다.

방어해야 할 순간에 검을 내리고 상대 손목을 걷어찼다.

검을 맞대다가 갑자기 웃으며 말을 걸었다.

“거기 보고 있지?”

상대가 순간 눈을 움직이면 반대편으로 들어갔다.

훈련장에서는 늘 비슷한 말을 들었다.

“세리나!”

“예.”

“그건 교본에 없다.”

“그러니까 통했죠.”

세리나는 씨익 웃었다.

혼날수록 오히려 자기가 맞다고 생각했다.

교본에 없는 움직임이 상대에게 통했다.

그렇다면 교본보다 자신이 더 실전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졌다.

---

나이가 들면서 세리나는 정규 검술교습소보다 거리의 대련장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돈을 걸고 싸우는 곳도 있었고,

그냥 실력을 겨루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있었다.

상대는 다양했다.

경비병 출신도 있었다.

용병도 있었다.

귀족가에서 검을 배운 사람도 있었다.

주먹부터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세리나는 그런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즐거웠다.

반드시 깨끗하게 이기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씩은 주먹에 맞아 코피가 터지고,
뺨이 부어오르고,
온몸에 멍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꽤 많이 이겼다.

그리고 이길수록 생각이 굳어졌다.

정석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가르치기 편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진짜 강한 검사는 자기 방식대로 움직인다.

세리나는 그렇게 믿었다.

가끔 정규검술을 배운 검사에게 패하면 이유도 간단하게 붙였다.

상대가 자신보다 빨랐거나.

힘이 강했거나.

경험이 많았거나.

정석 자체가 뛰어나서 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패배한 다음 날에도 정석을 연습하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속임수를 만들었다.

---

열아홉 살 무렵이었다.

델피로의 한 작은 도시에서 세리나는 이상한 노인을 만났다.

처음에는 검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희끗희끗한 머리.

햇볕과 바람을 오래 맞은 얼굴.

오래된 여행용 망토.

몸에는 갑옷 대신 가벼운 여행복만 걸치고 있었다.

허리에는 검 한 자루가 있었다.

검집은 오래되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노인은 걸을 때마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한쪽 다리를 아주 조금 끌었다.

계단을 내려올 때는 특히 심했다.

세리나는 처음에는 전쟁에서 다친 용병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노인이 대련장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세리나는 막 한 사람을 이긴 뒤였다.

상대가 정석적인 중단자세를 취하자 일부러 검을 낮추고 빈틈을 보여줬다.

상대가 들어오는 순간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고 옆구리에 검끝을 대었다.

사람들이 웃고 박수를 쳤다.

세리나도 만족했다.

그때 노인이 중얼거렸다.

“세 번째구만.”

세리나가 돌아봤다.

“뭐가?”

노인은 별 뜻 없다는 듯 말했다.

“같은 속임수.”

세리나의 눈썹이 올라갔다.

---

“같은 사람한테 세 번 쓴 것도 아닌데?”

“에잉, 사람이 바뀌면 같은 수가 새 기술이 되냐?”

세리나는 노인을 잠시 바라봤다.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배 검 좀 써?”

노인이 자기 무릎을 툭 두드렸다.

“예전에는.”

“지금은?”

“이게 말을 잘 안 들어서.”

노인은 웃었다.

“은퇴했다.”

세리나는 검을 어깨에 올렸다.

“그럼 보는 눈은 있다는 거야?”

“그 정도는 아직 있지.”

“확인해볼래?”

주변 사람들이 웃었다.

노인도 웃었다.

“어린놈이 늙은이에게 원래 이렇게 쉽게 싸움을 거냐?”

“할배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

“그랬냐.”

노인은 잠깐 고민했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뽑았다.

---

세리나는 검이 나오는 순간 조금 실망했다.

특별한 자세가 아니었다.

아주 평범했다.

발 간격도 교본 그대로.

검끝의 높이도 교본 그대로.

어깨는 내려가 있었고,

몸의 중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세리나가 가장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형태였다.

“진짜 정석이네.”

노인이 말했다.

“오래 했더니 이것밖에 안 남더구나.”

세리나는 웃었다.

첫 공격부터 일부러 크게 들어갔다.

노인이 막았다.

예상대로였다.

세리나는 검을 거두는 척하며 몸을 틀었다.

평소라면 상대의 방어선 바깥으로 빠지는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노인의 검이 먼저 그곳에 있었다.

탁.

손목이 맞았다.

세리나는 검을 놓칠 뻔했다.

“……뭐야.”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세리나는 다시 들어갔다.

이번에는 시선을 이용했다.

오른쪽 어깨를 보며 왼쪽으로 파고들었다.

노인은 속지 않았다.

세리나가 들어가려던 길에 검끝이 먼저 놓였다.

멈추지 않았으면 목에 닿았을 위치였다.

세리나는 급히 물러났다.

이번에는 발을 노렸다.

노인의 무릎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이미 봤다.

그래서 반응이 늦을 거라 생각했다.

노인은 무릎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한 발을 아주 짧게 옮겼다.

세리나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다음 순간 검등이 이마를 툭 쳤다.

“아!”

노인이 말했다.

“아픈 무릎을 노리는 건 좋았어.”

세리나가 이마를 문질렀다.

“칭찬 고맙네.”

“다만 아플 거라는 사실을 나보다 네가 더 믿으면 곤란하지.”

그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세리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공격했다.

높게.

낮게.

빠르게.

일부러 늦게.

검을 놓치는 척도 했다.

발이 꼬인 척도 했다.

노인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필요한 만큼만 움직였다.

그리고 세리나가 무엇을 하든 검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노인이 검으로 세리나의 검집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순간 세리나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노인의 검끝이 목 앞에 멈췄다.

대련이 끝났다.

주변이 조용했다.

세리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숨도 별로 차지 않은 노인이 검을 집어넣었다.

“재미있는 검을 쓰는구만.”

세리나는 그 말이 더 화가 났다.

“완전히 가지고 놀아놓고?”

“그래도 재미있는 건 사실이지.”

---

세리나가 물었다.

“어떻게 다 알았어?”

노인은 잠시 생각했다.

“다 안 건 아닌데.”

“거짓말.”

“정말이다.”

노인은 세리나의 검을 가리켰다.

“다만 네가 무엇을 안 하려고 하는지는 꽤 잘 보였지.”

세리나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뜻인데?”

“너는 정석대로 움직이는 걸 싫어하지?”

“그래서?”

“그럼 선택지가 줄어들어.”

세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이 자기 검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는 여기서 열 가지를 할 수 있는데.”

“너는 그중 사람들이 예상할 것 같은 다섯 가지를 먼저 버리고 들어오거든.”

“네가 그래주면 상대방은 고마운 거지, 남은 다섯 개만 보면 되지 않겠냐?”

세리나는 처음으로 웃지 않았다.

---

그 말은 세리나가 지금까지 자기 검에 대해 들었던 어떤 비판보다 불쾌했다.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쉬웠다.

자기는 자유롭게 싸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석을 피하는 것에 묶여 있었다.

상대가 오른쪽을 예상할 것 같으면 왼쪽.

위에서 올 것 같으면 아래.

막을 것 같으면 피하고,

피할 것 같으면 밀어붙인다.

언제나 ‘남들이 안 할 것’을 고르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상대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자기가 가장 예측하기 쉬운 사람이 되어버린다.

세리나는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노인이 웃었다.

“정석을 배워.”

세리나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답은 싫은데.”

“그래 보여.”

---

그 노인은 자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때 세레이온의 성기사였다고 했다.

오래 복무했고,

무릎이 망가진 뒤 검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허, 걷는 건 되는데 오래 싸우면 다음 날 계단이 문제야.”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이제는 특별한 목적 없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고 했다.

보고 싶은 곳이 아직 많다고 했다.

가끔 오래된 성당에 들렀고,

어떤 마을에서는 아이들에게 검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아 며칠씩 머물기도 한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꽤 오래 검을 가르쳐본 사람처럼 말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세리나가 누구였냐고 물으면 대개 웃으며 넘어갔다.

“여행을 오래 하면 별사람을 다 만나지.”

그 정도가 전부였다.

---

세리나는 그 노인을 며칠 더 따라다녔다.

본인은 가르쳐달라고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노인도 제자로 받아들인 적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침마다 둘은 검을 들었다.

노인이 처음 시킨 것은 공격이 아니었다.

서 있기.

발 옮기기.

검 들기.

찌르기.

받기.

다시 서기.

세리나는 사흘째에 폭발했다.

“나 이거 어릴 때부터 했거든?”

“그런데 잘 안 하더구나.”

“할 줄 아는 거랑 하는 건 다르잖아.”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왜 내가 한 말을 당신이 맞다고 해?”

“맞는 말이니까 하지, 너 바보냐?”

“이 너구리같은 할배가...!!”

세리나는 또 화가 났다.

---

그 노인은 변칙을 금지하지 않았다.

그 점이 세리나에게는 의외였다.

세리나는 정석적인 검사라면 자기 검술을 전부 고치려고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인은 말했다.

“그 발차기 다시 해봐.”

세리나가 했다.

“나쁘지 않네.”

“진짜?”

“검만 생각하는 상대에게는 잘 통하겠어.”

“그렇지?”

“그런데 두 번 쓰면 읽혀서 죽겠다.”

세리나의 웃음이 사라졌다.

노인은 왜 그런지 설명했다.

발을 올리는 순간 중심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검을 낮출 때 어느 방향이 비는지.

첫 번째 공격이 성공했을 때 상대가 무엇을 학습하는지.

세리나는 처음으로 자기 변칙을 정석의 언어로 보기 시작했다.

---

며칠 뒤 노인은 떠났다.

세리나는 따라가겠다고 했다.

노인이 웃었다.

“내가 왜 다 큰 열아홉 살짜리를 데리고 여행해야 하지?”

“검 가르쳐줘야지.”

“가르칠 건 이미 말했는데.”

“뭔데?”

노인은 대답했다.

“네가 싫어하는 걸 배워.”

세리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가르침이야?”

“좋은 가르침은 아니지.”

노인은 웃었다.

“공짜니까 참아.”

그리고 정말 떠났다.

세리나는 멀어지는 노인의 등을 보다가 문득 소리쳤다.

“잠깐! 성은 뭐야?”

노인이 걸음을 멈췄다.

“성?”

“다음에 다시 만나면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노인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바스카르.”

세리나는 기다렸지만 그 뒤의 말은 없었다.

“이름은?”

“그건 다음에 이기면 알려주마.”

노인은 다시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당시 세리나에게는 성씨가 없었다.

며칠 뒤 이름을 적을 일이 생겼을 때, 그녀는 별 고민 없이 빈칸에 적었다.

바스카르.

허락받은 적은 없었다.

그저 마음에 들었고, 다시 만날 때까지 가지고 있기로 했다.

그렇게 세리나는 세리나 바스카르가 되었다.

---

세리나는 그 뒤 정말로 정석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복수를 위해서였다.

다시 만나면 반드시 이기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델피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검술서를 읽었다.

왕국군의 기본검술.

기사단식 방패술.

귀족가에서 쓰는 결투검.

상단 호위병들이 사용하는 짧은 검술.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번역본도 찾아봤다.

처음에는 지루했다.

놀랄 만큼 지루했다.

같은 동작이 여러 책에서 반복되었다.

세리나는 그게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자세처럼 보여도 목적이 달랐다.

군용검술은 옆 사람과 부딪치지 않게 움직였다.

결투검은 좁은 선 안에서 상대의 손을 노렸다.

호위검은 적을 쓰러뜨리는 것보다 보호대상과 적 사이에 남는 것을 우선했다.

정석은 하나가 아니었다.

각자가 반복해서 마주친 문제의 답이었다.

세리나는 그 사실이 재미있어졌다.

---

그때부터 검을 보는 방식이 달라졌다.

상대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만 보지 않았다.

왜 그 자세를 배웠는지 생각했다.

어떤 공격을 가장 많이 연습했는지.

어떤 상황에서 그 유파가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안전하다고 믿는지.

어디를 공격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정석을 알수록 상대의 예상이 보였다.

세리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기가 원했던 것은 정석이 없는 검이 아니었다.

상대의 머릿속에 있는 정석을 이용하는 검이었다.

---

예전의 세리나는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이제는 조금 달랐다.

먼저 상대에게 예상을 주었다.

일부러 익숙한 자세를 취했다.

두 번 같은 반격을 보여줬다.

상대가 세 번째도 같을 거라고 믿게 했다.

그리고 세 번째에 바꿨다.

일부러 빈틈을 남겼다.

상대가 그곳을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검끝의 높이를 조금씩 반복해서 보여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만 다른 각도를 사용했다.

이전에는 상대의 예상을 피했다.

이제는 상대에게 예상을 만들었다.

세리나는 그 차이를 몹시 좋아했다.

“이거였네.”

그녀는 혼자 웃었다.

“진작 이렇게 말해주지.”

물론 그 노인은 이미 비슷하게 말했었다.

세리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

왕립 미카레 아카데미에 지원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세리나는 이미 성인이었고,

몇 년 동안 여러 곳에서 검을 배운 뒤였다.

평범한 검술학교에 들어가기에는 조금 늦은 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세리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미카레 검술·전술학부에는 여러 유파의 학생들이 모였다.

귀족가에서 어려서부터 검을 배운 사람.

군인 집안 출신.

용병 경험이 있는 사람.

호신술만 배우다 온 사람.

세리나에게는 아주 좋은 장소였다.

서로 다른 정석이 한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입학 실기에서 감독관이 물었다.

“주로 사용하는 유파는?”

세리나는 잠깐 고민했다.

“남의 거요.”

감독관은 한동안 기록지를 바라봤다.

“그건 유파 이름이 아닙니다.”

“그럼 변칙검술이라고 적어줘요.”

그렇게 입학했다.

---

세리나는 미카레에서 상당히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대련을 잘했다.

특히 처음 싸우는 상대에게 강했다.

상대의 자세를 몇 번 보면 익숙한 패턴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음에 무엇을 할 거라고 믿게 되는지 역으로 이용했다.

학생들은 세리나와 싸우는 것을 재미있어하면서도 싫어했다.

“왜 웃어?”

대련 상대가 물으면 세리나는 더 웃었다.

“아니. 방금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여서.”

그 말을 들으면 대부분 다음 동작을 바꾸려고 했다.

세리나는 그것까지 예상했다.

때로는 아무 생각도 없으면서 웃기도 했다.

상대가 혼자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까지 포함해서 세리나의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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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빌 폰 루인하버는 처음부터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다.

세리나는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혼날 줄 알았다.

정석을 중시하는 전직 기사단장.

기본기와 반복훈련을 강조하는 교수.

세리나가 가장 귀찮아하는 유형처럼 보였다.

첫 수업에서 오스빌이 말했다.

“바스카르.”

“네에.”

“방금 움직임 다시 해라.”

세리나는 웃었다.

“마음에 드셨어요?”

“아니다.”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다시 해라.”

세리나는 같은 움직임을 했다.

오스빌이 물었다.

“어디를 미끼로 썼지?”

“오른쪽 어깨요.”

“상대가 거길 공격하지 않으면?”

“다른 걸 하지.”

“무엇을?”

세리나는 잠깐 멈췄다.

“그건 그때 봐야죠.”

오스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문제다.”

---

세리나는 오스빌과 자주 부딪쳤다.

오스빌은 변칙 자체를 금지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반복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피곤할 때도 가능한가.

팔을 다쳤을 때도 가능한가.

상대가 예상보다 빠르면 어떻게 되는가.

뒤에 동료가 있을 때도 같은 회피를 할 수 있는가.

좁은 통로에서도 쓸 수 있는가.

세리나는 처음에는 그 질문들이 지나치게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교수님은 세상 모든 경우를 미리 정해놓고 싸우려고 해요?”

오스빌이 대답했다.

“아니다.”

“그럼요?”

“미리 정할 수 없는 순간에도 남아 있는 것을 훈련한다.”

세리나는 그 말을 듣고 예전에 만났던 노인을 잠깐 떠올렸다.

아주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비슷한 말을 하는 늙은 검사가 두 명이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결정적인 일은 2학년 대련수업에서 벌어졌다.

세리나는 자신보다 체격이 큰 학생과 싸우고 있었다.

상대는 힘이 강했지만 움직임이 정직했다.

세리나는 몇 번 받아내며 패턴을 확인했다.

상대가 빈틈을 보면 강한 사선베기로 들어온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일부러 왼쪽을 크게 열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상대가 들어오면 몸을 회전시켜 피한다.

검이 지나간 뒤 손목을 친다.

평소에도 여러 번 성공했던 방식이었다.

상대는 예상대로 들어왔다.

문제는 예상보다 강하게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상보다 반 걸음 더 깊었다.

---

세리나는 피했다.

자신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검이 예상보다 멀리 나갔다.

대련장 바깥에 있던 보조학생이 급히 몸을 젖혔다.

검끝이 옷자락을 스쳤다.

다친 사람은 없었다.

정말로 몇 손가락 차이였다.

세리나는 곧바로 검을 내렸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상대 학생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미안.”

세리나가 먼저 말했다.

“내가 열었어.”

오스빌이 대련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불편했다.

“왜 저 공격을 유도했지?”

“반격하려고요.”

“예상한 공격이었나?”

“네.”

“그럼 왜 저기까지 갔지?”

세리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

잠시 뒤 세리나가 말했다.

“상대가 생각보다 깊게 들어왔어요.”

오스빌은 말했다.

“그렇겠지.”

“제가 피하는 것도 늦었고.”

“그렇겠지.”

“그래도 일부러 만든 빈틈이었어요.”

오스빌이 세리나를 바라봤다.

“일부러 만든 약점도 약점이다.”

세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오스빌은 계속 말했다.

“적에게 선택지를 주는 건 기술이다.”

“그 선택지를 네가 통제한다고 믿는 건 착각이고.”

세리나에게 그 말은 아팠다.

검끝이 닿아서가 아니었다.

정확했기 때문이다.

---

예전에 만났던 노인은 세리나에게 정석을 모르면서 정석을 피하려 하면 오히려 읽힌다고 가르쳤다.

오스빌은 그 다음을 가르쳤다.

상대를 읽는 것과 상대를 지배하는 것은 다르다.

사람은 예상에서 벗어난다.

겁에 질려서.

화가 나서.

실수해서.

훈련받은 것보다 더 잘해서.

혹은 더 못해서.

세리나는 자신의 검술이 상대의 예측을 이용하는 만큼,

자신 역시 상대가 예상대로 움직일 거라는 믿음에 기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그녀는 변칙을 줄이지 않았다.

대신 실패했을 때의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끼가 먹히지 않았을 때.

상대가 더 깊게 들어왔을 때.

아예 공격하지 않았을 때.

두 번째 선택이 무엇인지 연습했다.

---

오스빌은 그 변화에는 별다른 칭찬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세리나가 일부러 물었다.

“교수님.”

“왜.”

“나 요즘 좀 안정적이지 않아요?”

“그렇다.”

“그게 끝?”

“뭘 더 원하는 거지?”

“감동적인 칭찬 같은 거?”

오스빌은 잠깐 생각했다.

“전보다 덜 위험하다.”

세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칭찬 못한다.”

“칭찬이다.”

세리나는 그 말을 꽤 좋아했다.

물론 본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

3학년이 된 지금 세리나의 검은 입학 당시보다 훨씬 덜 즉흥적으로 보인다.

겉으로는 오히려 반대처럼 보일 때도 있다.

여전히 자세를 갑자기 낮춘다.

일부러 빈틈을 보인다.

검을 놓칠 것처럼 움직인다.

상대에게 말을 건다.

웃는다.

도발한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정석이 깔려 있다.

어떤 자세에서 무엇을 버리는지 안다.

어떤 공격을 유도하면 자신도 무엇을 위험에 거는지 안다.

상대가 예상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남겨둔다.

세리나는 이제 정석을 족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석은 언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서로 검을 배운 사람들이 공유하는 언어.

상대가 어떤 문장을 예상하는지 안다면,

중간에서 문법을 비틀 수도 있다.

그게 지금 세리나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다.

---

그래서 후배가 물으면 이렇게 말한다.

“선배는 왜 정석대로 안 해요?”

세리나는 검을 어깨에 걸친다.

“정석대로 안 하는 것처럼 보여?”

“네.”

“그럼 잘 보고 있어.”

후배가 눈을 크게 뜬다.

세리나는 웃는다.

“정석을 몰라서 안 하는 줄 알아?”

“알아야 어디서 틀지도 알지.”

그리고 대개 바로 대련이 시작된다.

---

검술에서는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는 아직 비슷한 버릇이 남아 있다.

세리나는 직접 묻는 것을 의외로 어려워한다.

상대가 화났는지 궁금하면 묻지 않는다.

조금 놀려본다.

평소처럼 받아치면 괜찮다고 판단한다.

누군가 자신을 싫어하는지 궁금하면 일부러 가까이 다가간다.

피하면 거리를 둔다.

친구가 무언가 숨기는 것 같으면 정면으로 물어보지 않고 엉뚱한 이야기를 던져 반응을 본다.

검술에서 하던 일을 그대로 하는 셈이다.

상대에게 선택지를 준다.

반응을 본다.

그 반응으로 진짜 마음을 짐작한다.

세리나는 자신이 사람을 잘 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꽤 잘 본다.

그래서 더 고치기 어렵다.

---

한 번은 친구가 물었다.

“그냥 물어보면 안 돼?”

세리나가 웃었다.

“뭘?”

“지금도 그렇게 딴소리하잖아.”

세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친구가 다시 말했다.

“검 싸움 아니야.”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세리나는 검에서는 상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배웠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에서는 아직도 반응 몇 개만 보면 답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틀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잘못 읽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직접 묻는 일에는 이상한 두려움이 있다.

상대가 예상 밖의 대답을 하는 것이 두려워서인지.

자기가 먼저 속내를 보이는 것이 싫어서인지.

세리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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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녀의 장난에는 두 가지가 섞여 있다.

정말 재미있어서 하는 장난.

그리고 진짜 말을 하지 않기 위해 하는 장난.

둘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세리나 본인도 가끔은 모른다.

누군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 가볍게 웃으며 넘긴다.

상대가 정말 돌아서려고 하면 뒤늦게 붙잡는다.

“아니, 잠깐.”

그리고 그다음 말을 고르는 데 꽤 오래 걸린다.

검을 휘두를 때보다 훨씬 오래.

---

졸업을 앞둔 세리나에게는 아직 정해진 진로가 없다.

군에 들어갈 수도 있다.

기사단에 지원할 수도 있다.

대련교관이 될 수도 있다.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며 더 많은 검술을 볼 수도 있다.

세리나는 마지막 선택을 꽤 마음에 들어 한다.

오래전 만났던 한 노인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가끔 여행자 이야기가 나오면 세리나는 아직 그 사람을 떠올린다.

한쪽 무릎을 조금 끌던 걸음.

평범해서 오히려 빈틈을 찾기 어려웠던 자세.

그리고 자기가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

‘정석을 배워.’

세리나는 이제 그 말을 들으면 웃는다.

당시에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조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마 자기 검을 만든 가장 중요한 말 중 하나였다는 것도 안다.

---

그래도 다시 만나면 반드시 싸워볼 생각이다.

노인의 무릎이 아직 버텨준다면.

이번에는 예전과 다를 것이다.

세리나는 정석을 안다.

상대도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안다.

자기가 일부러 정석을 비틀 거라는 것까지 상대가 예상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면 그다음은 무엇일까.

세리나는 그 생각을 하면 즐겁다.

승패 때문만은 아니다.

예전에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검의 세계가 지금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

세리나는 이제 정석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석에 얌전히 머무르지도 않는다.

사람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 만든 방법을 배우고,

그 방법을 상대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고,

예상이 빗나가는 순간까지 준비한다.

그것이 지금 그녀가 생각하는 좋은 검사다.

상대의 기대마저 자기 검의 일부로 만드는 사람.

하지만 그 기대가 반드시 맞을 거라고 믿지는 않는 사람.

세리나는 검에서는 조금씩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사람을 대할 때도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상대의 표정을 읽는 대신 직접 물어보고,

떠보기보다 자기 마음을 먼저 보여주고,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오더라도 웃음 뒤로 숨지 않는 것.

아직은 잘 못한다.

그래서 세리나는 오늘도 대련장에서는 아주 능숙하게 상대를 속이고,

훈련이 끝난 뒤에는 친구에게 할 말 하나를 몇 번이나 돌려 말한다.

검에서는 상대가 어디로 움직일지 생각하면서.

사람 앞에서는 자기가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세리나 바스카르는 아직 자기만의 정석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ADE
아델리아 폰 로슈
미카레 아카데미검술·전술학부-3학년
“규칙을 지키라는 말보다 왜 생겼는지를 먼저 알려주십시오.”
🩸 HP180
💪 공격력58
🧙 마법력10
✨ 신비력1
🛡️ 방어력50
🔗 항마력28
😖 신비저항31
🏃 회피력60
과거 보기
아델리아 폰 로슈는 어린 시절부터 규칙이 많은 집에서 자랐다.

아침 식사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신발의 흙부터 털었다.

검을 만졌다면 손질한 뒤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불을 껐는지 확인했다.

문을 잠갔는지 확인했다.

한 번 확인한 것도 필요하면 다시 확인했다.

아델리아의 부모는 둘 다 군 간부 출신이었다.

집에서는 군대처럼 구령을 붙이지 않았지만,

생활 곳곳에는 군에서 익힌 습관이 남아 있었다.

어린 아델리아는 그것을 답답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편했다.

무엇이 옳은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규칙을 지키면 된다.

그것이 그녀가 가장 처음 배운 질서였다.

---

부모는 규칙을 설명해주는 편이었다.

칼은 왜 칼집에 넣어야 하는지.

등잔 주변에 종이를 두면 왜 안 되는지.

장비를 사용한 뒤 왜 손상여부를 확인해야 하는지.

어린 아델리아는 설명을 잘 들었다.

하지만 이유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부모가 시키는 것은 대부분 맞았다.

군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이 정한 절차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의 아델리아에게 규칙은 아주 단순했다.

지켜야 하는 것.

좋은 사람은 지키는 것.

무책임한 사람은 어기는 것.

그 정도였다.

---

그 생각이 훨씬 강해진 사건은 열두 살 무렵에 일어났다.

아델리아는 부모를 따라 군용창고가 있는 주둔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단한 곳은 아니었다.

훈련용 무기와 보급품,

천막,

마차부품,

예비식량 같은 것을 보관하는 평범한 시설이었다.

아델리아는 부모의 지인을 기다리며 창고 옆에서 병사들이 짐을 옮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무거운 상자 몇 개가 수레에 실렸다.

원래라면 출발하기 전에 고정끈을 두 번 확인해야 했다.

한 병사가 말했다.

“바로 앞 창고까지잖아.”

다른 병사가 대답했다.

“그냥 가도 되겠지.”

고정끈 하나가 대충 묶였다.

몇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누구도 큰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수레가 경사로를 내려갈 때 바퀴 하나가 돌에 걸렸다.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상자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 아래에는 수레를 안내하던 병사가 있었다.

사람들이 소리쳤다.

상자는 떨어졌다.

병사는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리를 크게 다쳤다.

몇 번의 수술과 치료 뒤에도 이전처럼 걷기는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아델리아는 그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다.

사고는 아주 짧았다.

몇 초였다.

그 몇 초 전에 누군가 고정끈을 한 번만 더 확인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

며칠 뒤 아델리아는 우연히 사고보고서를 보게 되었다.

부모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보고서는 놀랄 만큼 건조했다.

부상자의 이름.

사고시간.

장비번호.

수레의 상태.

원인.

그리고 한 문장.

‘운송물 고정절차 미준수.’

아델리아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사람 하나의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게 된 사건이 고작 몇 글자로 적혀 있었다.

그날부터 아델리아에게 규칙은 조금 다른 의미가 되었다.

누군가 괜히 만든 귀찮은 절차가 아니었다.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었다.

---

그 이후 아델리아는 규칙을 거의 맹목적으로 지켰다.

훈련용 검이라도 손상검사를 했다.

사다리를 타기 전에 고정상태를 확인했다.

출입시간을 지켰다.

주어진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

친구들이 말했다.

“그거 안 해도 돼.”

아델리아는 대답했다.

“규정에 있습니다.”

“누가 보지도 않는데?”

“보는 사람의 유무와 관계없습니다.”

그때의 아델리아에게 규칙을 어긴다는 것은 단순한 불성실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과거에 치른 대가를 무시하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

그녀가 군 관련 기록을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사고사례를 찾아봤다.

왜 장비검사를 하는가.

왜 야간행군에서는 간격을 좁히는가.

왜 탄약과 식량을 일정 거리 이상 떨어뜨려 보관하는가.

왜 후퇴할 때도 정해진 순서가 있는가.

규정집에는 결과만 적힌 경우가 많았다.

아델리아는 그 앞의 이야기를 찾았다.

사고보고서.

전투기록.

보급실패 사례.

개정 전 규정.

개정 후 규정.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규정집은 역사책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한 줄의 절차 뒤에는 누군가의 실패가 있었다.

때로는 부상이 있었고,

때로는 죽음도 있었다.

---

그리고 그 기록을 뒤지던 중 처음으로 첼키아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영원도시 프라그모.

서리성벽군단.

군단장 첼키아.

처음 읽은 것은 영웅담이 아니었다.

화려한 전투기록도 아니었다.

서리성벽군단의 장비규정 개정문이었다.

혹한기 경계근무에서 발생한 동상과 장비결빙 사례를 분석한 문서였다.

기존 규정의 어느 부분이 실제 현장에서 지켜지기 어려웠는지.

어떤 장비가 추위에서 예상보다 빨리 기능을 잃었는지.

교대시간을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예비장비를 어느 위치에 배치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변경으로 무엇을 포기하게 되는지까지 적혀 있었다.

마지막에는 책임자의 이름이 있었다.

첼키아.

---

아델리아는 처음에는 단순히 문서가 잘 쓰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기록도 찾았다.

찾을수록 이상했다.

첼키아의 이름은 승리보고서보다 개정문서에서 더 자주 보였다.

방벽 근무교대 방식 수정.

폭설 시 통신절차 변경.

보급로 폐쇄기준 조정.

저체온 환자 후송순서 개정.

장비결빙 방지를 위한 정비간격 변경.

그중 상당수에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기존 절차로 대응하지 못한 사례 발생.’

‘현장조건과 규정 사이의 불일치 확인.’

‘피로 누적으로 인한 판단력 저하.’

아델리아는 그 표현들이 마음에 들었다.

실패를 숨기지 않았다.

누가 잘못했는지만 적지도 않았다.

다음에는 같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무엇을 바꿀지가 적혀 있었다.

---

그때부터 아델리아는 첼키아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단순한 동경이었다.

강한 군단장.

혹한의 방벽을 지키는 지휘관.

위험한 북부에서 수많은 병사를 통솔하는 사람.

아델리아가 장차 되고 싶어하는 군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하지만 기록을 더 읽을수록 동경하는 이유가 조금 달라졌다.

첼키아는 규정을 많이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필요한 규정을 남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규정이 현실과 맞지 않으면 고쳤다.

아델리아에게 그 부분은 처음에는 조금 이상했다.

훌륭한 지휘관이라면 규칙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첼키아의 기록에서는 때때로 기존 규정을 중단했다는 문장이 나왔다.

그 대신 현장에 맞는 임시지침을 내렸고,

사태가 끝난 뒤 그 판단의 근거를 남겼다.

---

한 기록은 특히 아델리아가 여러 번 읽었다.

폭설로 외곽 방벽 일부가 고립된 사건이었다.

기존 지침대로라면 해당 구역은 일정시간까지 반드시 유지해야 했다.

방벽 일부를 포기하면 뒤쪽 구역의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통신이 끊겼고,

병사들의 체온이 빠르게 떨어졌으며,

예비보급도 도착하지 못했다.

첼키아는 철수를 명령했다.

결과적으로 외곽 방벽 일부는 손상되었다.

대신 고립된 병력 대부분이 살아 돌아왔다.

사후보고서에는 기존 지침을 따르지 않은 이유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같은 상황에서 지휘관이 판단할 수 있도록 새로운 철수조건이 추가되었다.

아델리아는 그 보고서를 읽으며 처음으로 묘한 혼란을 느꼈다.

규칙을 어겼다.

그런데 사람을 살렸다.

그리고 그 예외를 숨기지 않고 다음 규칙으로 정리했다.

---

그 이후로 아델리아의 방에는 첼키아와 관련된 기록이 하나둘 늘어났다.

서리성벽군단의 공개된 작전보고서.

장비규정 개정본.

군사학 잡지에 실린 전술분석.

프라그모에서 들어온 군용장비 자료.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보면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보급표의 사본까지 있었다.

친구가 물었다.

“이것도 첼키아 관련이야?”

아델리아는 즉시 대답했다.

“정확히는 서리성벽군단 제4차 혹한기 보급체계 개편 자료입니다.”

“그게 그거 아니야?”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차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친구는 중간에 후회했다.

---

아델리아는 첼키아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편지를 주고받은 적도 없다.

목소리가 어떤지도 모른다.

공식 초상과 몇 장의 기록화에서 본 얼굴이 전부다.

그럼에도 아델리아에게 첼키아는 아주 구체적인 사람이었다.

규칙을 지키는 사람.

하지만 규칙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는 않는 사람.

자기 판단으로 기존 절차를 바꿨다면 그 이유를 반드시 기록하는 사람.

잘못된 결과가 나오면 누군가의 실수라고 덮지 않고 체계를 다시 보는 사람.

아델리아는 그런 지휘관이 되고 싶었다.

다만 당시에는 자신이 첼키아를 절반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

왕립 미카레 아카데미의 검술·전술학부에 입학한 뒤에도 아델리아는 모범생이었다.

훈련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장비검사표를 빠뜨리지 않았다.

대련이 끝나면 검날부터 확인했다.

전술과제에서는 교범을 정확히 인용했다.

교수들이 지정한 형식을 철저하게 지켰다.

성적도 좋았다.

특히 군용 정석검술에서는 안정적이었다.

자세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방어선을 유지했다.

화려한 기술은 적었지만,

실수도 적었다.

아델리아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

1학년 때의 아델리아는 규정을 이유보다 먼저 말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누군가 물었다.

“왜?”

아델리아가 대답했다.

“훈련규정 제8항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 규정이 있는데?”

아델리아는 잠깐 멈췄다.

“필요하니까 있겠죠.”

본인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동기들은 그녀를 조금 답답하게 여겼다.

아델리아는 그 평가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규정은 인기가 없어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

변화가 시작된 것은 1학년 후반의 대피훈련이었다.

칠각강의동의 일부 구역을 이용한 훈련이었다.

가상의 화재가 발생했다는 전제 아래 학생들이 지정된 통로로 빠져나가는 단순한 훈련이었다.

아델리아는 조별 통솔을 맡았다.

배부받은 지침에는 동쪽 계단을 이용하라고 적혀 있었다.

문제는 그 건물이 몇 달 전 내부공사를 거쳤다는 것이었다.

계단 입구 근처에 임시보관실이 추가되면서 통로가 예전보다 좁아져 있었다.

훈련인원이 몰리자 금세 병목이 생겼다.

앞쪽 학생들이 멈췄다.

뒤에서는 계속 사람이 들어왔다.

누군가 말했다.

“서쪽 복도로 빼자.”

아델리아는 바로 거절했다.

“지정경로가 아닙니다.”

---

“여기 막혔잖아!”

“지침상 동쪽 계단입니다.”

“훈련이니까 바꾸면 되잖아!”

아델리아는 망설였다.

평소 같으면 규정대로 가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배웠다.

절차를 바꾸면 통제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제각기 움직이면 더 위험하다.

그래서 몇 초를 더 기다렸다.

앞쪽이 정리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사이 뒤쪽에서 학생 하나가 밀려 넘어졌다.

넘어진 학생을 피하려다 또 다른 학생이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큰 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훈련은 즉시 중단되었다.

아델리아는 넘어져 있는 학생을 보며 어린 시절의 창고를 떠올렸다.

이번에는 누군가 규칙을 어겨서 사고가 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규칙을 지켰기 때문에 사고가 커질 뻔했다.

---

아델리아는 훈련이 끝난 뒤 곧바로 지침을 확인했다.

틀린 부분이 있는지 찾았다.

동쪽 계단.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다음에는 건물 도면을 찾았다.

그리고 오래된 도면과 현재 도면을 비교했다.

대피지침이 작성된 것은 내부공사 전이었다.

당시에는 동쪽 계단이 가장 넓고 가까운 출구였다.

규정 자체가 잘못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만들어졌을 때는 올바른 규정이었다.

문제는 상황이 달라졌는데 규정이 그대로 남았다는 것이었다.

아델리아는 그 사실이 어린 시절의 사고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

며칠 동안 그녀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규칙을 따르면 안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규칙이 오래되면?

조건이 바뀌면?

규칙을 만든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

그렇다면 현장에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규칙을 무시하면 어린 시절 보았던 사고가 생긴다.

규칙만 따르면 이번 훈련과 같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아델리아에게는 둘 중 하나가 반드시 옳아야 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완전한 답이 아니었다.

---

그 문제를 가지고 오스빌 폰 루인하버를 찾아갔다.

아델리아는 대피지침과 건물도면을 책상 위에 펼쳤다.

“교수님.”

“말해라.”

“규정이 틀렸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스빌은 문서를 한번 봤다.

“고쳐야지.”

아델리아는 그 대답이 너무 간단해서 잠시 말을 잃었다.

“현장에서는 말입니다.”

“현장에서 틀렸다는 걸 알았다면 현장에 맞게 판단해라.”

“그 판단이 틀리면요?”

“책임져야지.”

아델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오스빌이 말했다.

“규칙은 네 대신 생각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잠시 뒤 덧붙였다.

“생각할 시간을 벌어주는 거다.”

---

아델리아는 그 말을 바로 좋아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벌어준다는 말은 결국 마지막에는 자기가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녀에게는 그 부분이 가장 불편했다.

규정을 따르면 결과가 나빠도 적어도 자신이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규칙을 바꾸면 그 결과는 자신의 판단이 된다.

오스빌이 물었다.

“왜 규칙을 그렇게 좋아하지?”

아델리아가 어린 시절의 사고 이야기를 했다.

고정끈.

짧은 거리.

생략된 확인절차.

다친 병사.

사고보고서.

오스빌은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좋은 이유다.”

아델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규칙을 지킬 이유로는.”

“하지만 규칙을 생각하지 않을 이유는 아니다.”

---

그날부터 아델리아는 규정집을 읽는 방식부터 바꾸었다.

조항만 외우지 않았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찾았다.

어떤 사건 뒤에 추가되었는지 확인했다.

몇 번 개정되었는지 봤다.

왜 문장이 바뀌었는지도 찾았다.

이상한 규칙이 있으면 비웃지 않았다.

먼저 과거 기록부터 찾았다.

대부분에는 이유가 있었다.

놀랄 만큼 사소한 사고도 있었고,

끔찍한 실패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이유가 사라진 규칙도 있었다.

상황이 바뀌었는데 남아 있는 절차.

이미 사용하지 않는 장비를 기준으로 작성된 규정.

어느 누구도 왜 있는지 기억하지 못하면서 관습처럼 지키는 조항.

아델리아는 그런 것을 발견하면 오히려 더 집요해졌다.

“왜 남아 있습니까?”

---

그 무렵부터 첼키아의 기록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다른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첼키아가 만든 규정을 외웠다.

이제는 첼키아가 어떤 규정을 없앴는지를 봤다.

처음에는 성공한 작전을 봤다.

이제는 실패 뒤에 무엇을 수정했는지를 봤다.

처음에는 명령을 봤다.

이제는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를 찾았다.

아델리아는 조금씩 깨달았다.

자신이 동경했던 지휘관은 규칙을 숭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규칙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

아델리아의 첼키아에 대한 존경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평소에는 표정변화가 적은 그녀도 첼키아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이 달라졌다.

누군가 말했다.

“서리성벽군단에서 이번에 장비규정을 바꿨다던데.”

아델리아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몇 차 개정 말입니까?”

“……몰라.”

“장갑 내부 보온재 기준 변경입니까, 교대병 예비장비 배치규정입니까?”

“그냥 바뀌었다는 것만 들었는데.”

“둘은 전혀 다른 개정입니다.”

그러고는 설명을 시작한다.

평소 아델리아를 아는 사람은 그 모습을 보면 조금 놀란다.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한데 말이 평소보다 두 배는 많아진다.

---

세리나는 한번 그 모습을 보고 한참 웃었다.

“너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아?”

아델리아가 인상을 썼다.

“무슨 뜻이지?”

“아니, 평소에는 교칙집이 걸어다니는 줄 알았거든.”

“그 표현은 모욕인가?”

“반쯤?”

아델리아는 무시하려 했다.

세리나가 다시 물었다.

“그래서 실제로 만나본 적은 있어?”

아델리아가 잠시 조용해졌다.

“없다.”

“한 번도?”

“한 번도.”

“그런데 그렇게 좋아해?”

아델리아는 조금 고민했다.

그리고 말했다.

“직접 만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록은 남아 있으니까.”

세리나는 웃었다.

“진짜 너답네.”

---

하지만 아델리아의 동경에는 아직 위험한 부분도 남아 있었다.

그녀는 첼키아의 판단을 지나치게 정답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전술토론에서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면 말했다.

“유사한 상황에서 첼키아 군단장은 철수를 선택했습니다.”

오스빌이 물었다.

“그래서?”

아델리아가 잠시 멈췄다.

“……그 판단이 적절했다는 뜻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오스빌이 지도를 가리켰다.

“여기는 프라그모가 아니다.”

“적도 다르고.”

“병력도 다르고.”

“날씨도 다르다.”

“결과만 가져오지 마라.”

아델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오스빌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네가 존경하는 건 그 사람의 답인가, 답을 만든 판단인가?”

---

그 질문은 아델리아에게 꽤 치명적이었다.

자신은 첼키아가 규칙의 이유를 보는 사람이라서 존경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은 첼키아의 결정을 새로운 규칙처럼 외우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는 철수.

저 상황에서는 방어.

이 장비는 이렇게.

저 부대는 저렇게.

정작 첼키아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보다,

‘첼키아가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델리아는 그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날 이후 첼키아의 기록을 또 한 번 다르게 읽기 시작했다.

---

이번에는 결론을 가렸다.

먼저 상황만 읽었다.

병력.

날씨.

보급.

부상자.

시간.

적의 위치.

그리고 자기가 먼저 판단했다.

그 다음에 실제 기록의 결론을 확인했다.

다를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럴 때마다 자기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스빌은 그것도 막았다.

“근거를 말해라.”

아델리아가 설명했다.

오스빌은 들었다.

때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이라면 네 판단도 가능하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아델리아는 오히려 당황했다.

자기가 첼키아와 다른 결론을 내리고도 틀리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

2학년이 지나면서 아델리아는 학부 안에서 묘한 위치가 되었다.

규칙을 가장 잘 아는 학생 중 하나였다.

그런데 동시에 규칙의 근거를 가장 많이 묻는 학생이 되었다.

교수가 새로운 훈련절차를 설명하면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말해.”

“이 절차가 추가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전 때문에.”

아델리아는 물러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까?”

때로는 교수가 설명했다.

때로는 자료를 찾아오라고 했다.

아주 가끔은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그럴 때 아델리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다음 날이면 오래된 회의록까지 찾아왔다.

---

그녀는 규칙을 덜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규칙을 만들거나 남기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좋은 규칙은 사람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만드는 명령문이 아니다.

과거의 사람이 무엇을 겪었는지를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는 기록이다.

왜 이걸 확인해야 하는지.

왜 여기에서 멈춰야 하는지.

왜 이런 상황에서는 물러나야 하는지.

이유까지 전달되지 않으면 규칙은 시간이 지나면서 껍데기만 남는다.

아델리아가 현재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것이다.

규칙은 기억이어야 한다.

---

하지만 그 신념에도 문제가 있다.

아델리아는 이제 모든 사고를 보면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원인을 찾으면 절차를 만들고 싶어한다.

학생이 훈련 중 미끄러졌다.

바닥상태 확인절차를 만들자.

장비대여가 꼬였다.

대여기록 양식을 바꾸자.

팀과제에서 전달착오가 났다.

보고순서를 정하자.

친구들이 말한다.

“아델리아.”

“왜?”

“그냥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는 일도 있어.”

아델리아는 그 말을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그냥 조심한다’는 말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말처럼 들린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언제 확인할 것인가.

그것을 정하지 않으면 같은 실수가 반복될 것 같다.

---

그래서 규칙의 이유를 배우고도,

아델리아는 여전히 규칙으로 세상을 붙잡으려는 경향이 있다.

예외가 생기면 불편하다.

분류할 수 없는 상황도 불편하다.

한 번만 일어난 사고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는다.

한 번 일어났다면 두 번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 자체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문제는 모든 가능성을 규정으로 막으려 들면 규정이 너무 많아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할 수 없을 만큼.

현장에서 확인하다가 오히려 행동이 늦어질 만큼.

아델리아는 이제 그 위험도 알고 있다.

알면서도 쉽게 놓지 못한다.

---

3학년이 된 지금도 그녀의 책상에는 작은 수첩이 하나 놓여 있다.

제목은 단순하다.

‘규정 검토.’

그 안에는 아카데미에서 발견한 사소한 문제들이 적혀 있다.

대련장 장비배치.

야간훈련 인원확인.

응급약품 위치.

실습보고서 전달순서.

그리고 각 항목 옆에는 반드시 하나가 더 적혀 있다.

‘왜 필요한가.’

예전의 아델리아라면 조항만 썼을 것이다.

지금은 이유가 없는 규칙은 완성된 규칙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

가끔 첼키아의 새로운 기록이 들어오면 아델리아는 가장 먼저 찾아본다.

여전히 눈빛이 달라진다.

여전히 관련 자료를 지나치게 자세히 설명한다.

여전히 누군가 첼키아의 이름을 틀리게 말하면 바로 정정한다.

하지만 예전과 한 가지는 달라졌다.

이제는 첼키아의 결론부터 외우지 않는다.

무슨 상황이었는지부터 본다.

왜 그런 판단이 필요했는지 생각한다.

그리고 가끔은 혼자 다른 답을 내린다.

그럴 때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존경하는 사람과 다른 답을 내린다는 것이 예전에는 배신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제대로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

아델리아는 아직 첼키아를 만나본 적이 없다.

졸업한 뒤 프라그모를 방문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서리성벽군단에 견학을 신청할 수도 있다.

어쩌면 평생 직접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아델리아에게 이미 배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떠나도 기록은 남는다.

실패도 기록하면 다음 사람의 판단이 된다.

희생을 단순히 안타까운 일로 끝내지 않고 이유와 절차로 남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이 그녀가 첼키아에게서 가장 존경하는 부분이다.

---

그래도 실제로 만나게 된다면 하고 싶은 말은 많다.

아마 처음에는 제대로 말하지 못할 것이다.

평소처럼 똑바로 서서 경례부터 할 것이다.

준비해둔 질문도 너무 많아서 순서를 정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제7차 혹한기 보급규정 개정 당시 왜 예비장비 위치를 바꾸었는지.

외곽초소 철수조건을 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본 지표가 무엇이었는지.

기존 규정을 폐기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는 아마 이것을 물을 것이다.

“판단을 규칙으로 남겨야 할 때와, 다음 사람의 판단에 맡겨야 할 때를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그 질문에는 아직 아델리아도 답이 없다.

---

그래서 아델리아 폰 로슈는 오늘도 기록한다.

규칙을 지킨다.

필요하면 질문한다.

잘못된 규칙은 고친다.

사고가 일어나면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무엇이든 규정으로 만들고 싶어지는 순간에는 한 번 더 생각하려 한다.

이것은 정말 다음 사람을 살리기 위한 기록인가.

아니면 자신이 예외를 견디지 못해서 만드는 울타리인가.

아직 그 둘을 항상 구분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규칙에 답이 적혀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규칙이 남기는 것은 답이 아니라,

먼저 실패한 사람들이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판단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가 읽게 될 규칙 하나를 남기게 된다면,

아델리아는 반드시 그 옆에 이유까지 적을 생각이다.

누군가 단지 ‘규칙이라서’ 따르는 일이 없도록.

누군가 필요할 때는 그것을 고칠 수 있도록.

그것이 지금 아델리아가 생각하는,

과거의 실패와 희생을 제대로 기억하는 방법이다.

NER
네리아 드 베르
미카레 아카데미마법·맥류학부-3학년
“...사흘 걸려도 괜찮아. 끝내면 다시는 안 해도 되잖아.”
🩸 HP60
💪 공격력7
🧙 마법력65
✨ 신비력18
🛡️ 방어력18
🔗 항마력45
😖 신비저항36
🏃 회피력50
과거 보기
네리아 드 베르는 원래 네리아 드 베르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태어날 때 받은 다른 성씨가 있었다.

세레이온에서도 오래도록 성직자를 배출해온 가문의 이름이었다.

크게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지역에서는 제법 존경받는 집안이었다.

증조부도 성직자였다.

조부도 성직자였다.

부모 역시 신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가족에게 신앙은 선택이라기보다 생활방식에 가까웠다.

아침에는 기도했다.

식사 전에도 기도했다.

축일에는 신전으로 갔다.

아이들은 성리아의 가르침을 외웠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라면 자연스럽게 신성력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네리아 역시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

가족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

어린 네리아는 특별히 신앙심이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기도하라고 하면 했다.

성가를 배우라고 하면 외웠다.

신전에 가는 것도 싫어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귀찮아했을 뿐이었다.

“왜 같은 기도를 매일 해?”

어머니가 말했다.

“매일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란다.”

네리아는 잠깐 생각했다.

“어제 한 걸 기억하면 안 돼?”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질문은 어린 시절부터 많았다.

왜 같은 성구를 세 번 읽는지.

왜 이미 정화한 제단을 아침마다 다시 정화하는지.

왜 축복기도에는 비슷한 문장이 두 번 들어가는지.

네리아에게는 신성하지 않은 질문이었다기보다 단순한 의문이었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유가 없다면 줄이고 싶었다.

그 버릇은 아주 어릴 때부터 있었다.

---

가족이 처음 이상함을 알아차린 것은 네리아가 다섯 살 무렵이었다.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 신성력을 제대로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작은 빛을 만드는 것.

아픈 손가락의 통증을 조금 줄이는 것.

성수를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

그 정도면 충분했다.

네리아도 기도를 배웠다.

손을 모았다.

성구를 읽었다.

아주 희미한 빛이 나타났다.

성직자인 친척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약했다.

성직자 가문의 아이에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약했다.

어머니는 아직 어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했다.

그날 밤 네리아는 침대 옆 작은 촛불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불꽃이 길게 늘어났다.

둘로 갈라졌다.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기도는 하지 않았다.

성구도 읽지 않았다.

그저 불꽃 주변의 맥류를 보고,

어떻게 움직이면 모양이 바뀌는지 궁금해서 건드렸을 뿐이었다.

---

그 뒤로 비슷한 일이 계속되었다.

신성술을 가르치면 평범했다.

어떤 날은 평균보다도 못했다.

반면 마법을 한 번 보여주면 이상할 정도로 빨리 따라했다.

신전의 난방술식이 고장난 날이었다.

수리를 위해 불려온 마법사가 바닥의 술식선을 고치고 있었다.

여섯 살의 네리아는 옆에서 한참 바라봤다.

마법사가 말했다.

“가까이 오면 위험하다.”

네리아는 물러났다.

잠시 뒤 물었다.

“저 선 두 개 같은 역할 아니야?”

마법사가 손을 멈췄다.

“어떤 것 말이냐?”

네리아가 가리켰다.

보조순환을 위한 술식 두 줄이었다.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쪽을 약간 바꾸면 다른 한쪽을 없앨 수 있었다.

마법사는 한참 네리아를 바라봤다.

“누가 가르쳐줬니?”

“아무도.”

“그럼 어떻게 알았지?”

네리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겹치잖아.”

그날 처음으로 가족의 표정이 달라졌다.

기쁜 얼굴은 아니었다.

---

성직자 가문에서 마법사가 태어나는 것이 죄는 아니었다.

세레이온에서도 마법사는 필요했다.

성직자가 마법을 배우는 일도 드물지만 존재했다.

문제는 네리아의 재능이 너무 분명했다는 것이었다.

신성력은 좀처럼 성장하지 않았다.

반대로 마법은 누가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빠르게 늘었다.

일곱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성인 견습마법사가 사용하는 간단한 술식구조를 보고 문제점을 찾을 정도였다.

가족에게 그것은 자랑스럽기보다 난처한 일이었다.

대대로 성직자를 배출한 집안.

이번 세대의 아이 역시 성직자가 될 것이라고 주변에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신성술보다 세속마법에 압도적인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친척들은 여러 의견을 냈다.

기도가 부족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교육이 잘못됐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직 어려서 그렇다는 사람도 있었다.

한동안 마법과 관련된 것을 아예 보여주지 말자는 의견도 나왔다.

네리아는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문 너머로 자기 이름이 계속 들렸기 때문이다.

---

가족은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기도시간을 늘렸다.

신성술 교사를 바꿨다.

유명한 성직자를 초청해 축복도 받았다.

네리아는 시키는 대로 했다.

크게 반항하지도 않았다.

그저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신성술 교사가 말했다.

“조금 더 마음을 집중해보세요.”

네리아는 눈을 감았다.

기도했다.

희미한 빛이 손끝에 맺혔다.

교사는 힘내라고 말했다.

그날 수업이 끝난 뒤 네리아는 책상 위에 놓인 잉크병을 보았다.

심심해서 마력을 흘렸다.

잉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열두 개의 작은 구체로 나뉘었다.

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네리아는 그중 불필요하게 흔들리는 세 개의 흐름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병 안에 넣었다.

신성술 교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부모의 회의는 더 길었다.

---

결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졌다.

네리아를 잠시 다른 곳에서 교육하기로 했다.

부모는 그렇게 말했다.

백합성도권 변경에 작은 마탑을 운영하는 마법사가 있다고 했다.

마법에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시기인 만큼,

오히려 제대로 배우게 해서 재능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었다.

나중에 마음이 안정되고 신성력이 성장하면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일곱 살의 네리아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얼마나 있다 와?”

어머니가 대답했다.

“조금 오래 있을 수도 있단다.”

“겨울까지?”

부모는 서로를 바라봤다.

아버지가 말했다.

“공부가 끝날 때까지.”

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챙겼다.

---

백합성도권 변경으로 가는 마차는 오래 걸렸다.

성도에서 멀어질수록 길은 좁아졌다.

거대한 신전 대신 작은 예배당이 보였다.

정돈된 도시 대신 밭과 숲이 늘어났다.

그리고 정말로 작은 마탑 하나가 있었다.

네리아가 상상한 마탑과는 많이 달랐다.

높지도 않았다.

웅장하지도 않았다.

마법진이 번쩍이지도 않았다.

낡은 돌벽에 지붕 한쪽은 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탑 앞에는 허브와 약초가 자라고 있었고,

빨랫줄에는 양말이 걸려 있었다.

네리아가 처음 한 생각은 단순했다.

‘작다.’

두 번째 생각은 더 단순했다.

‘여기서 살아야 하나?’

---

탑의 주인은 베르라는 성을 가진 마법사였다.

대단한 명성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궁정마법사도 아니었다.

유명한 연구자도 아니었다.

변경의 마을에서 필요한 일을 해주는 평범한 마법사였다.

농가의 우물에 문제가 생기면 살폈다.

결계가 끊기면 이어줬다.

길을 잃은 사람을 찾는 탐색술을 써줬다.

겨울이면 난방술식을 손봤다.

아이들이 열이 나면 약초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마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에는 그냥 손을 빌려줬다.

네리아가 도착한 날에도 그는 마탑 안에 없었다.

마을 사람의 지붕이 무너져 수리하러 갔다고 했다.

한참 뒤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네리아를 보자 가장 먼저 말했다.

“밥은 먹었니?”

네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공부는 내일부터 하자.”

그것이 두 사람의 첫 대화였다.

---

베르는 네리아에게 가족 이야기를 거의 묻지 않았다.

부모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도 캐묻지 않았다.

그저 빈방 하나를 내주었다.

조금 작았다.

창문에서는 밭이 보였다.

침대 옆에는 오래된 책장이 있었다.

베르는 말했다.

“필요한 책이 있으면 아래 서고에서 가져와라.”

네리아가 물었다.

“마법책도?”

“읽을 수 있으면.”

“만져도 돼?”

“위험표시 붙은 건 안 된다.”

“왜?”

베르는 잠깐 네리아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그 질문을 할 줄 알았다.”

그날부터 금지된 책에는 금지만 적지 않았다.

왜 위험한지도 함께 적혀 있었다.

네리아는 그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

처음 몇 달 동안 네리아는 자기가 잠시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이 지나면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봄이 왔다.

집에서는 편지가 한 통 왔다.

마법교육은 잘 받고 있는지.

기도는 계속하고 있는지.

신성력에 변화가 있었는지.

그런 내용이었다.

네리아는 답장을 썼다.

마법은 재미있다고 했다.

신성력은 그대로라고 했다.

새로 배운 술식을 세 줄 줄였다고 자랑했다.

답장은 한동안 오지 않았다.

여름이 지나고 다시 한 통이 왔다.

이번에도 비슷했다.

신성력은 성장했는가.

신앙교육은 계속하고 있는가.

네리아가 잘 지내는지 묻는 문장은 아주 짧았다.

어린 네리아는 특별히 서운해하지 않는 척했다.

편지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마법책을 펼쳤다.

---

베르는 뛰어난 천재가 아니었다.

네리아는 열 살도 되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

어떤 계산은 네리아가 더 빨랐다.

술식의 중복을 찾는 것도 네리아가 더 잘했다.

한번은 베르가 하루 종일 붙잡고 있던 방풍결계의 문제를 네리아가 저녁에 보고 말했다.

“여기 두 줄 겹쳐.”

베르가 한참 들여다봤다.

정말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나는 오늘 하루를 뭘 한 거지.”

네리아가 말했다.

“차 마셨잖아.”

“위로 고맙다.”

“저녁도 먹었고.”

“이제 그만해도 된다.”

네리아는 조금 웃었다.

---

재능만 놓고 보면 네리아는 빠르게 베르를 따라잡았다.

하지만 베르는 가르칠 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네리아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베르는 마법을 아주 오래 사용한 사람이었다.

화려한 마법은 많지 않았다.

대신 실패했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지 잘 알았다.

술식이 끊겼을 때.

사용자가 겁을 먹었을 때.

마력량이 예상보다 적을 때.

비가 올 때.

추울 때.

잠을 제대로 못 잔 사람이 사용할 때.

책에는 이상적인 상황이 적혀 있었다.

베르는 이상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마법을 썼다.

---

네리아는 처음에는 그런 부분을 귀찮아했다.

“이 선 없어도 돼.”

베르가 말했다.

“남겨둬.”

“왜?”

“입력이 흔들릴 때 잡아준다.”

“안 흔들리게 쓰면 되잖아.”

“너는.”

네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베르는 다시 말했다.

“너는 안 흔들리게 쓰겠지.”

“다른 사람은?”

네리아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습하면 되지.”

베르는 한숨을 쉬었다.

“너랑 살다 보면 평범한 사람이 미안해지는구나.”

그 말이 농담이라는 것은 네리아도 알았다.

---

그럼에도 베르는 네리아의 단순화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어했다.

같은 결과를 더 적은 마력으로 만드는 법.

불필요한 술식을 제거하는 법.

반복계산을 하나의 구조로 묶는 법.

매일 손으로 조절하던 결계를 자동으로 보정하는 법.

네리아는 그런 것에 빠졌다.

특히 반복해서 해야 하는 일을 발견하면 견디지 못했다.

마탑에는 매일 아침 약초건조실의 습도를 조절하는 작은 술식이 있었다.

베르는 매일 직접 조정했다.

네리아가 물었다.

“이거 매일 해?”

“매일.”

“몇 년째?”

“십몇 년 됐나.”

네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날부터 사흘 동안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

베르가 문을 열었다.

“자니?”

“아니.”

“밥은?”

“먹었어.”

책상 옆에는 전날 가져다준 접시가 그대로 있었다.

베르는 그것을 내려다봤다.

“그렇구나.”

네리아가 말했다.

“내일이면 끝나.”

“뭐가?”

“습도조절.”

“그거 그냥 아침에 손잡이 돌리면 되는데.”

네리아가 처음으로 약간 짜증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뭐가 그러니까야?”

“매일 해야 하잖아.”

베르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사흘 동안 안 자는 게 더 귀찮지 않니?”

네리아는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사흘 걸려도 괜찮아.”

“끝내면 다시는 안 해도 되잖아.”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버릇의 시작이었다.

---

네리아가 만든 자동조절술식은 잘 작동했다.

베르는 그 뒤로 아침마다 손잡이를 돌리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일주일에 한 번 술식을 확인했다.

네리아가 물었다.

“왜 확인해?”

“고장날 수 있으니까.”

“안 고장났는데.”

“아직.”

“그럼 고장나면 고치면 되잖아.”

“그때 약초가 다 썩고 나서?”

네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는 아주 많았다.

네리아는 없앨 것을 찾았다.

베르는 남겨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둘이 항상 합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베르는 네리아에게 단순화를 그만두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물었다.

“없애면 뭐가 달라지지?”

---

네리아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쯤에는 친가에서 오는 편지가 눈에 띄게 줄었다.

생일에도 한 통이 오지 않은 해가 있었다.

네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르 역시 묻지 않았다.

저녁에 평소보다 조금 좋은 음식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요리는 별로 잘하지 못했다.

빵 한쪽은 조금 탔다.

네리아가 말했다.

“탄 부분 자르면 되잖아.”

베르가 말했다.

“좋은 생일축하 첫마디구나.”

네리아는 탄 부분을 잘라 먹었다.

잠시 뒤 물었다.

“선물은?”

“없다.”

“왜?”

“밥이 선물이다.”

“탔는데.”

“내년에는 아무것도 없다.”

네리아는 웃었다.

그해부터 생일에 친가의 편지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보다 몇 년 뒤였다.

네리아는 이미 마을 사람들도 인정하는 어린 마법사가 되어 있었다.

베르가 자리를 비우면 간단한 술식수리는 혼자 맡기도 했다.

그 무렵 그녀는 범용 난방술식을 손보고 있었다.

오래된 술식이었다.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네리아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했다.

같은 결과를 내는 보정선이 여러 개 있었다.

마력흐름을 천천히 만드는 완충부도 있었다.

출력상한을 두 번 확인하는 부분도 있었다.

네리아는 하나씩 지웠다.

열두 단계가 아홉 단계가 되었다.

아홉 단계가 일곱 단계가 되었다.

자기가 시험했을 때는 완벽했다.

더 빨랐다.

마력도 덜 들었다.

출력도 정확했다.

네리아는 만족했다.

---

며칠 뒤 마을 사람이 그 술식을 사용했다.

마법을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은 아니었다.

겨울마다 난방용 마도구를 작동할 정도의 마력만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네리아가 만든 축약술식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문제는 입력마력이 조금 불규칙했다는 것이었다.

네리아라면 무의식적으로 보정했을 정도의 작은 흔들림이었다.

하지만 축약된 술식에는 그 흔들림을 받아줄 부분이 없었다.

열이 한쪽으로 몰렸다.

술식판이 깨졌다.

파편이 튀었다.

사용자의 팔에 화상을 입혔다.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며칠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처였다.

네리아에게는 충분했다.

---

베르는 사고가 난 집으로 달려갔다.

네리아도 따라갔다.

부상자를 치료소로 보냈다.

깨진 술식판을 회수했다.

마탑으로 돌아온 뒤 네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닥에 펼쳐놓았다.

원인은 금방 찾았다.

마력입력의 편차.

완충술식 부재.

네리아가 지운 부분이었다.

베르는 화내지 않았다.

그 점이 네리아에게는 더 힘들었다.

네리아가 먼저 말했다.

“저 사람이 잘못 썼어.”

말하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베르는 잠시 침묵했다.

“그렇지.”

네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흔들렸어.”

“그래.”

“나는 안 그랬고.”

“그것도 맞아.”

---

베르는 원래 술식판을 꺼냈다.

네리아가 삭제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건 왜 지웠니?”

“없어도 작동하니까.”

“누구한테?”

네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베르는 다시 물었다.

“너한테?”

“……응.”

“나한테도 아마 괜찮겠지.”

베르는 깨진 술식판을 가리켰다.

“저 사람한테는?”

네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베르는 혼내지 않았다.

대신 지웠던 완충선을 다시 그리게 했다.

처음부터.

한 줄씩.

네리아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이었다.

---

그날 밤 네리아가 말했다.

“복잡한 게 나쁜 건 아니야?”

베르는 차를 마시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그러던?”

“나.”

“그럼 네가 답해야지.”

네리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베르가 웃었다.

“나는 단순한 게 좋다고 생각한다.”

네리아가 그를 봤다.

“근데?”

“사람 다치게 만드는 단순함은 별로군.”

“그럼 어디까지 지워?”

베르는 잠시 생각했다.

“그걸 알아내는 게 네 공부 아니냐?”

네리아는 그 대답을 싫어했다.

정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래 기억했다.

---

그 이후 네리아가 단순화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집착했다.

이전에는 작동하면 끝이었다.

이제는 조건을 붙였다.

초보자가 사용했을 때.

마력이 부족할 때.

집중이 흐트러졌을 때.

술식판이 오래되었을 때.

주변 맥류가 흔들릴 때.

어디까지 줄여도 안전한가.

어디서부터는 남겨야 하는가.

문제는 네리아가 여전히 자기 능력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직접 시험하면 대부분 성공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베르가 옆에서 말했다.

“다시.”

네리아가 물었다.

“왜?”

“이번에는 내가 쓴다.”

네리아는 그 말이 점점 싫어졌다.

동시에 점점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네리아가 아카데미라는 곳을 처음 진지하게 생각한 것도 베르 때문이었다.

어느 날 베르는 네리아가 만든 마력분배술식을 한참 보고 있었다.

원래 열아홉 개의 보정과정을 거치는 구조를 네리아는 열두 개까지 줄여놓았다.

베르가 말했다.

“이제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보다 네가 혼자 알아내는 게 더 많구나.”

네리아는 책에서 눈도 들지 않았다.

“원래 그랬는데.”

베르는 잠깐 침묵했다.

“그 말은 굳이 안 해도 됐다.”

“사실이잖아.”

“그래서 더 보내야겠군.”

네리아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어디를?”

“학교.”

“싫어.”

대답은 즉시 나왔다.

---

네리아는 학교를 싫어했다.

정확히는 학교에 다녀본 적도 없으면서 싫어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한다.

정해진 시간에 수업을 들어야 한다.

이미 아는 내용도 듣는다.

시험을 본다.

출석을 확인한다.

과제를 낸다.

네리아의 기준에서는 비효율의 집합체였다.

“여기서 하면 되잖아.”

베르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됐네.”

“네가 열다섯 살 때까지는.”

네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베르는 책장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책 거의 다 읽었지?”

“응.”

“내 연구노트도?”

“응.”

“남의 걸 몰래 읽었다는 죄책감은?”

“없어.”

“그럴 줄 알았다.”

---

베르는 말했다.

“너는 네가 틀릴 수 있는 곳에 가야 한다.”

네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도 틀리는데.”

“요즘은 내가 먼저 틀리는 경우가 많잖니.”

네리아는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네 술식을 보고 왜 안 되는지 설명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네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 걸 왜 남겨야 하는지 설명할 사람도.”

“여기서는 안 돼?”

베르는 웃었다.

“내가 평생 네 선생을 할 수는 없지.”

네리아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베르는 그 변화를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왕립 미카레 종합 아카데미의 이름은 네리아도 알고 있었다.

델피로 왕실이 직접 운영하는 학교.

신분과 출신보다 능력을 먼저 본다는 곳.

마법·맥류학부에는 대륙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였다.

베르는 지원요강을 구해왔다.

네리아는 며칠 동안 읽지 않았다.

탁자 위에서 먼지만 쌓였다.

베르도 재촉하지 않았다.

어느 날 네리아가 심심해서 펼쳤다.

입학시험 항목.

술식분석.

맥류관측.

마력제어.

응용설계.

네리아의 시선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

마지막에는 연구시설 목록도 있었다.

황금로연구동.

고급 맥류관측장비.

대형 술식실험실.

네리아가 말했다.

“……장비는 좋네.”

옆에서 차를 마시던 베르가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

지원서를 작성하는 날 문제가 하나 생겼다.

이름.

성별.

나이.

출신.

그리고 성씨.

네리아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친가의 성씨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네리아라고 불렀다.

베르도 마찬가지였다.

공식문서가 필요한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빈칸을 보자 오래전에 쓰던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신전.

기도.

신성력은 늘었느냐고 묻던 편지.

돌아오라는 말은 끝내 적히지 않았던 편지.

네리아는 한동안 펜을 움직이지 않았다.

---

베르가 옆에서 물었다.

“왜 그러니?”

“성.”

베르는 잠깐 지원서를 봤다.

“원래 걸 쓰면 되지 않나?”

네리아가 대답했다.

“싫어.”

짧았다.

베르는 더 묻지 않았다.

네리아는 그 빈칸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다 적었다.

베르.

그 앞에 익숙한 방식의 호칭까지 붙였다.

드 베르.

네리아 드 베르.

베르가 뒤늦게 그걸 보고 눈을 깜빡였다.

“잠깐.”

네리아가 계속 다른 칸을 작성했다.

“왜.”

“그건 내 성인데.”

“알아.”

“써도 된다고 한 적 없는데.”

네리아가 처음으로 그를 봤다.

“싫어?”

베르는 대답하지 못했다.

---

한동안 아주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네리아는 다시 지원서를 봤다.

“싫으면 다른 거 생각할게.”

베르가 말했다.

“그런 뜻은 아니다.”

“그럼 됐네.”

“네리아.”

“왜.”

베르는 뭔가 말하려다 멈췄다.

결국 한숨만 쉬었다.

“아니다.”

네리아는 다시 펜을 움직였다.

베르는 한동안 그 이름을 바라봤다.

네리아 드 베르.

그리고 아주 작게 웃었다.

네리아는 못 본 척했다.

---

그날 네리아는 원래 성씨를 버렸다.

누가 박탈한 것도 아니었다.

친가에서 공식적으로 추방했다는 문서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더 이상 쓰지 않기로 했다.

일곱 살 때 자신을 다른 집으로 보낸 사람들이 준 이름보다,

그 뒤 십수 년 동안 밥을 먹이고,

마법을 가르치고,

잘못하면 같이 수습하고,

생일마다 조금 탄 빵을 만들어준 사람의 이름을 고른 것이다.

네리아는 그 일을 특별한 선언처럼 말하지 않았다.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베르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지원서에 적었다.

그것이 네리아에게는 충분했다.

---

입학시험은 예상보다 재미있었다.

마법을 보여주는 것보다 술식을 분석하는 문제가 많았다.

네리아는 첫 문제를 보고 손을 들었다.

시험감독이 물었다.

“문제가 있습니까?”

네리아가 시험지를 가리켰다.

“이거 세 단계 없어도 되는데.”

감독관이 말했다.

“문제를 푸십시오.”

“지워도 돼?”

“주어진 술식을 분석하는 시험입니다.”

“그러니까 분석했는데.”

시험감독은 잠시 눈을 감았다.

네리아는 그 표정이 조금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베르가 자주 짓던 표정이었다.

결국 그녀는 시키는 대로 답안을 작성했다.

그리고 여백에 축약안까지 적었다.

---

미카레에서 네리아가 처음 만난 벽은 어려운 마법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자기보다 마력은 약하지만 이론을 훨씬 정확하게 설명하는 학생이 있었다.

술식은 느리지만 실패조건을 수십 가지 알고 있는 학생도 있었다.

네리아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과정을 왜 남겨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교수도 있었다.

그리고 브랜던 로디우스가 있었다.

네리아가 한 술식을 가져간 첫날이었다.

스무 줄 가까운 구조를 열세 줄까지 줄였다.

브랜던은 한참 살펴봤다.

“좋습니다.”

네리아가 조금 만족했다.

브랜던이 말했다.

“이제 다른 학생이 사용해보죠.”

네리아의 만족이 사라졌다.

“왜?”

“당신만 쓸 거라면 연구결과가 아니라 개인기니까요.”

---

첫 학생은 성공했다.

두 번째도 성공했다.

세 번째는 출력이 흔들렸다.

네 번째는 중간에 술식이 끊겼다.

브랜던은 원본에서 네리아가 삭제했던 부분 하나를 다시 넣었다.

네리아가 말했다.

“그거 없어도 돼요.”

브랜던이 물었다.

“누구에게요?”

네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질문이었다.

베르가 깨진 난방술식 앞에서 했던 질문.

브랜던은 네리아의 표정을 보고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냥 말했다.

“조건을 적으세요.”

“무엇을 삭제했는지만 쓰지 말고.”

“누가, 어떤 상태에서,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를.”

네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길어지잖아요.”

브랜던이 대답했다.

“안전은 종종 그렇습니다.”

---

그 뒤 네리아는 브랜던의 수업을 귀찮아하면서도 꽤 좋아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좋아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질문이 너무 많다고 불평한다.

시험조건도 지나치게 많다고 한다.

네리아가 네 줄을 지우면 브랜던은 네 가지 조건을 추가한다.

초보자가 쓰면?

피로하면?

마력이 절반이면?

맥류가 불안정하면?

네리아는 매번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면서도 전부 시험한다.

사흘 밤을 새워서라도 한다.

왜냐하면 한번 끝내놓으면 다음에는 다시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집착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무엇을 ‘끝냈다’고 부르는 기준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을 뿐이다.

---

3학년이 된 지금 네리아의 술식은 1학년 때보다 오히려 조금 길어지는 경우도 있다.

후배는 그 사실을 모르고 말한다.

“선배는 무조건 줄이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네리아가 대답한다.

“쓸데없는 건 줄여.”

“그럼 이건 필요한 거예요?”

네리아는 술식 한쪽의 작은 완충구조를 가리킨다.

“응.”

“선배가 쓰면 없어도 되죠?”

“응.”

“그런데 왜 남겨요?”

네리아는 잠깐 생각한다.

“네가 쓸 수도 있잖아.”

그 대답을 들으면 후배는 대개 감동한다.

네리아는 왜 감동하는지 잘 모른다.

그냥 필요한 부분을 남겼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

그럼에도 그녀의 오래된 결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네리아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 정도 마력제어는 되지 않아?”

안 된다.

“한 번 설명했는데 왜 또 설명해?”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이 확인절차 매번 해야 해?”

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브랜던은 대체로 같은 표정을 짓는다.

베르도 자주 짓던 표정이다.

네리아는 이제 그 표정을 보면 먼저 말한다.

“알았어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할 말 알겠으니까.”

조금은 발전했다.

---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다르다.

누군가 세레이온 출신이냐고 물으면 네리아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백합성도권 변경에서 자랐다고도 말한다.

마탑 이야기라면 꽤 오래 한다.

베르가 얼마나 형편없이 요리하는지.

마탑 지붕을 몇 번이나 고쳤는지.

약초건조실 술식을 자기가 어떻게 자동화했는지.

그런 이야기는 아무렇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 묻는다.

“부모님도 마법사세요?”

네리아는 잠시 멈춘다.

“아니.”

“그럼 무슨 일을 하시는데?”

“성직자.”

“아, 친가가 성직자 집안이구나.”

그 다음부터 네리아의 대답은 짧아진다.

“응.”

“지금도 연락해?”

“아니.”

“왜?”

네리아는 하품을 한다.

“귀찮아서.”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한다.

---

정말 귀찮기만 한 것은 아니다.

네리아도 안다.

일곱 살의 자신이 왜 보내졌는지.

왜 신성력이 자라느냐는 편지는 왔는데 돌아오라는 편지는 없었는지.

왜 마법실력이 뛰어나다는 보고에는 답장이 점점 짧아졌는지.

오래전에는 인정받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언젠가 아주 뛰어난 마법사가 되면 친가에서도 자신을 다시 볼 거라고 생각한 시기가 있었다.

그 생각은 오래전에 버렸다고 믿는다.

대체로 사실이다.

하지만 세레이온에서 온 편지에 익숙한 가문의 문장이 보이면 손이 잠시 멈춘다.

성직자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하품이 조금 빨라진다.

누군가 부모와 싸웠다는 말을 하면 평소보다 반응이 늦어진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기술은 꽤 잘 익혔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과 같은지는 아직 잘 모른다.

---

반대로 베르 이야기를 할 때는 조금 다르다.

네리아는 그를 양아버지라고 자주 부르지는 않는다.

그냥 ‘선생님’이라고 한다.

가끔은 ‘그 늙은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그렇게 늙지는 않았는데도 그렇다.

하지만 방학이 되면 거의 항상 변경의 마탑으로 돌아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베르가 말한다.

“왔니?”

네리아가 대답한다.

“응.”

“이번에는 며칠 있을 거냐?”

“몰라.”

“학교에서 사고는 안 쳤고?”

“큰 건 없어.”

베르가 한숨을 쉰다.

“작은 건 있다는 뜻이구나.”

네리아는 짐을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간다.

십수 년 전 처음 받았던 바로 그 방이다.

---

마탑에는 네리아가 바꿔놓은 것이 많다.

약초건조실은 자동으로 조절된다.

우물의 수위도 표시된다.

난방술식은 예전보다 마력소모가 적다.

책장의 먼지를 줄이는 소소한 술식도 있다.

베르는 몇 가지는 잘 사용한다.

몇 가지는 아직도 손으로 한다.

네리아가 물었다.

“그거 자동화해줬잖아.”

“손으로 하는 게 편하다.”

“왜?”

“그냥.”

네리아는 그 말을 가장 싫어한다.

“그냥은 이유가 아니야.”

베르가 웃는다.

“사람은 가끔 이유 없이 같은 걸 반복한단다.”

네리아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을 한다.

그러면서 다음 날에도 베르가 직접 차를 끓여주면 아무 말 없이 마신다.

---

언젠가 베르가 물은 적이 있다.

“내 성을 쓴 거 후회하니?”

네리아는 책을 읽으며 대답했다.

“왜?”

“그냥 궁금해서.”

“후회 안 해.”

대답은 빨랐다.

베르가 조금 웃었다.

네리아가 페이지를 넘겼다.

잠시 뒤 덧붙였다.

“원래 것보다 짧고 쓰기 편해.”

베르의 웃음이 사라졌다.

“그게 이유였냐?”

네리아는 아주 조금 웃었다.

“그것도.”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베르도 요구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그런 말이 많다.

굳이 끝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

---

네리아는 마법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

왜 필요한지 모르는 술식을 싫어한다.

반복되는 과정에는 이유를 요구한다.

같은 결과라면 더 단순한 구조를 찾는다.

하지만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중 몇 가지는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왜 친가의 성을 버렸는지.

왜 베르라는 이름을 골랐는지.

왜 방학마다 그 작은 마탑으로 돌아가는지.

왜 가족 이야기를 들으면 피하고 싶은지.

그 모든 것을 술식처럼 분해하면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리아는 굳이 하지 않는다.

어쩌면 세상에는 끝까지 최적화할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

3학년이 된 지금 그녀는 졸업 뒤 무엇을 할지 아직 확실히 정하지 않았다.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

복잡한 술식을 줄이고 싶다.

누구나 적은 마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도 만들고 싶다.

베르의 마탑으로 돌아가도 재미있을 것 같다.

하지만 거기에만 있기에는 이제 보고 싶은 것도 많다.

미카레에는 자신보다 다른 것을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예전 같으면 그들의 술식에서 불필요한 부분부터 찾았을 것이다.

지금도 찾는다.

다만 가끔은 한 번 더 묻는다.

‘이게 정말 불필요한가?’

‘아니면 나한테만 필요 없는가?’

그 질문 하나 때문에 연구시간이 길어졌다.

네리아는 그것이 조금 불만이다.

동시에 이전보다 좋은 마법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도 안다.

---

누군가 네리아에게 묻는다.

“베르가 친가 성씨예요?”

네리아는 대답한다.

“아니.”

“그럼 어디서 온 이름인데요?”

네리아는 잠깐 생각한다.

작은 마탑.

탄 빵.

매일 확인하던 난방술식.

자기보다 느리면서도 자기가 보지 못한 위험을 찾아주던 사람.

학교에 가기 싫다는 자신에게 결국 지원서를 가져다준 사람.

그리고 성씨를 마음대로 가져다 썼는데도 돌려달라고 하지 않았던 사람.

네리아는 짧게 대답한다.

“키워준 사람 거.”

“허락받았어요?”

“나중에.”

정확히는 먼저 쓰고 나중에 묵인받았다.

네리아는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그 이름을 적을 때만큼은 무언가를 줄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네리아 드 베르.

그 네 글자는 그녀가 지금까지 남겨둔 것들 가운데,

아마 가장 오래 지울 생각이 없는 부분이다.

교수진3명
ISR
이셀라 드 로자리아
미카레 아카데미금융·상업학부+왕국행정학부-교수
“선의는 비용을 없애주지 않아요. 끝까지 지속할 방법도 생각하세요.”
🩸 HP80
💪 공격력22
🧙 마법력48
✨ 신비력12
🛡️ 방어력31
🔗 항마력55
😖 신비저항46
🏃 회피력30
과거 보기
이셀라 드 로자리아는 세레이온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성전의 종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글을 읽기 시작했을 때 처음 펼친 책도 성경이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녀가 성직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셀라도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성직자가 되는 것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셀라는 신앙심이 그다지 깊지 않았다.

---

세리아의 존재를 부정한 적은 없다.

신성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도를 통해 위안을 얻는 사람을 비웃지도 않았다.

그저 이셀라 자신에게는 잘 와닿지 않았다.

어린 시절 예배가 끝난 뒤 다른 아이들이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이셀라는 성당 뒤편으로 가 구호창고의 상자를 세는 것을 더 좋아했다.

밀가루가 몇 포대 남았는지.

약초는 언제 들어오는지.

지난달보다 양초를 얼마나 더 썼는지.

그런 것이 더 궁금했다.

---

한 번은 담당 성직자가 물었다.

“이셀라, 설교는 재미없니?”

어린 이셀라는 잠깐 고민했다.

“재미없는 건 아니에요.”

“그럼 왜 매번 끝나자마자 창고로 가니?”

“오늘 빵이 백열두 개 들어왔거든요.”

성직자가 눈을 깜빡였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니?”

이셀라는 바로 대답했다.

“내일 나눠줄 거잖아요.”

그 성직자는 웃었다.

이셀라는 왜 웃는지 잘 몰랐다.

---

그래도 성직자의 길은 자연스러웠다.

공부도 잘했다.

신학도 이해했다.

경전의 문장을 정확하게 기억했고,

교회의 행정규정은 더 잘 외웠다.

성직자가 된 뒤에는 설교보다 행정업무에서 빠르게 두각을 보였다.

누가 어떤 구호를 받을 수 있는지.

어느 지역에 치료사가 부족한지.

헌금과 세금이 어디에 사용됐는지.

누락된 장부가 무엇인지.

이셀라는 그런 것을 이상할 정도로 잘 찾아냈다.

---

처음에는 주변에서 농담처럼 말했다.

“세리아께서는 이셀라 자매에게 계산의 은총을 내리셨나 봅니다.”

이셀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 은총이라면 장부 담당자에게 조금 더 내려주시라고 부탁드리고 싶네요.”

사람들이 웃었다.

이셀라도 웃었다.

그녀는 종교적인 농담을 싫어하지 않았다.

신앙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신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믿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 때문에 큰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

이셀라가 젊은 성직자였을 때 작은 홍수가 있었다.

큰 재난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강이 범람해 몇몇 마을의 창고와 밭이 잠겼다.

집을 잃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살아남았다.

세레이온 교회는 즉시 구호를 선언했다.

성직자들은 말했다.

“한 사람도 굶게 하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이셀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는 그 말이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

문제는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어느 마을에 식량이 얼마나 필요한지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피해가 가장 커 보이는 지역으로 물자가 먼저 몰렸다.

성직자들은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가능한 만큼 보내라고 지시했다.

거절하면 자비가 부족해 보일까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구호대는 열심히 움직였다.

누구도 놀지 않았다.

누구도 물자를 훔치지 않았다.

누구도 사람을 굶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모두 선의로 움직였다.

---

일주일 뒤 서부 창고 하나가 거의 비었다.

반대로 남쪽 마을에는 빵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갔다.

운송 중 비를 맞아 상한 곡물도 생겼다.

치료약은 환자 수보다 먼저 배분되어 정작 감염병이 번진 곳에서는 부족했다.

처음 약속했던 것과 달리,

몇몇 마을에서는 하루 배급을 줄여야 했다.

한 성직자가 말했다.

“조금만 버티십시오. 세리아께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이셀라는 그 옆에서 빈 창고를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신께서 돕고 계시더라도,

저 창고에 밀가루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

이셀라는 장부를 전부 가져왔다.

마을별 인구를 다시 셌다.

피해규모를 나눴다.

남은 식량과 운송가능한 마차의 숫자를 적었다.

치료사가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을 구분했다.

그리고 상급 성직자에게 말했다.

“지금 방식으로 계속 배급하면 열흘 뒤에 세 곳이 동시에 부족해집니다.”

상급자가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오늘부터 일부 지역의 배급량을 줄여야 합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

누군가 말했다.

“이미 충분히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줄이면 사람들이 실망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약속을 어겼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셀라는 장부를 펼쳤다.

“지금 줄이지 않으면 다음 주에는 약속을 지킬 물자가 없습니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셀라는 덧붙였다.

“오늘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과 열흘 뒤까지 사람을 먹이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

결국 배급계획은 바뀌었다.

욕을 먹었다.

어떤 주민들은 왜 어제보다 적게 주느냐고 따졌다.

성직자 중에서도 이셀라의 방식이 너무 냉정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열흘 뒤에도 배급은 계속됐다.

한 달 뒤 마지막 임시대피소가 닫혔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굶은 사람도 있었다.

필요한 약을 제때 받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는 많은 사람이 버텼다.

이셀라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저 끝까지 운영된 계획이라고 기록했다.

---

그 사건 이후 이셀라는 구호행정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창고였다.

그다음에는 여러 성당의 공동기금이었다.

몇 년 뒤에는 지역 단위의 구호예산을 검토했다.

직위도 점점 높아졌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신학적 통찰보다 장부와 계획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이셀라도 그 편이 편했다.

누군가 절망하는 사람을 데려와 신앙으로 위로해달라고 하면 어려웠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겨울을 보낼 식량과 잠자리를 마련하라고 하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알았다.

---

이셀라는 신앙을 무시하지 않았다.

구호현장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아들을 잃은 부모가 기도로 버티는 것도 봤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성직자의 손을 잡고 편안해지는 것도 봤다.

그런 순간에는 조용히 곁에 있었다.

다만 회의실에 돌아오면 다시 물었다.

“치료사는 몇 명입니까?”

“약품은 며칠분 남았죠?”

“다음 달에도 이 사업을 유지할 예산이 있습니까?”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위로와 운영은 서로 다른 일이었다.

---

그 무렵 이셀라는 젊은 성기사 마젤을 만났다.

마젤은 지금보다도 더 직선적이었다.

위험이 있다는 보고를 들으면 먼저 갑옷부터 챙겼다.

이셀라는 먼저 인원표를 찾았다.

처음부터 잘 맞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어느 구호작전에서 마젤이 말했다.

“지금 출발해야 돼.”

이셀라가 대답했다.

“마차 두 대가 아직 안 왔어요.”

“사람이 죽고 있어.”

“그래서 필요한 물자를 싣고 가려는 겁니다.”

“가면서 합류시키면 되잖아.”

“그 마차가 어느 길로 오는지도 모르면서요?”

"아 씨 진짜..."

둘은 처음 만난 날부터 싸웠다.

---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상하게 잘 맞았다.

마젤은 판단이 끝나면 누구보다 빨랐다.

위험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셀라는 마젤이 움직이는 동안 뒤에서 필요한 것을 맞췄다.

치료사.

식량.

교대인원.

대피할 장소.

마젤이 사람을 꺼내오면 이셀라는 그 사람이 다음 날 어디서 잘지를 준비했다.

마젤은 처음에는 그것을 답답한 장부일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 함께 일한 뒤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

한번은 작전이 끝난 뒤 마젤이 말했다.

“언니는 참 이상하단 말이야.”

이셀라가 차를 마시다 멈췄다.

“제가 언제부터 언니였죠?”

“지금부터 하면 안 돼?”

“왜요?”

마젤은 잠깐 생각했다.

“잔소리를 많이 하니까.”

이셀라는 웃었다.

“그 기준이라면 당신에게 언니가 아주 많겠네요.”

마젤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래도 그 호칭은 사라지지 않았다.

훗날 두 사람은 정식으로 의자매의 서약을 맺었다.

---

이셀라는 마젤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마젤 역시 이셀라가 어떻게 고위 성직자까지 올라와 놓고 이렇게 신앙이 옅을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서로를 바꾸려 하지는 않았다.

마젤이 물었다.

“언니는 정말 세리아를 믿어?”

이셀라가 말했다.

“존재한다는 건 믿죠.”

“그건 신앙이 아니잖아.”

“알아요.”

“그런데도 성직자야?”

이셀라는 잠깐 생각했다.

“아직은요.”

그 대답은 몇 년 뒤 달라졌다.

---

이셀라는 점점 높은 자리에 올랐다.

관리해야 하는 예산은 커졌다.

결재해야 하는 사업도 늘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이상한 순간을 자주 만났다.

사람들은 이셀라에게 행정적 판단만 요구하지 않았다.

고위 성직자였다.

따라서 신앙에 관한 답도 요구했다.

“세리아께서 이 선택을 원하실까요?”

“이 희생에는 뜻이 있을까요?”

“기도하면 괜찮아질까요?”

그런 질문 앞에서 이셀라는 항상 잠시 멈췄다.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

어느 날 한 젊은 성직자가 상담을 요청했다.

자기가 신을 의심하는 것이 죄인지 물었다.

이셀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상대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질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 자기 자신이 먼저 떠올랐다.

자기도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셀라는 오래전부터 그 의심에 익숙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별 문제 없이 숨긴 채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다.

그 순간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이 정말 정직한 일인가.

---

이셀라는 성직을 내려놓기로 했다.

신과 싸운 것도 아니었다.

교회에 환멸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추방당한 것도 아니었다.

본인이 사임서를 냈다.

상급자는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하라고 말했다.

“당신은 일을 잘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당신을 신뢰합니다.”

“그것도 압니다.”

“그런데 왜 나가려는 겁니까?”

이셀라는 잠시 생각했다.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려고요.”

---

“여기서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이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제게 성직자의 답을 원합니다.”

“그게 문제입니까?”

“제가 그 답을 믿지 않으면서 말하는 게 문제죠.”

상급자는 오래 침묵했다.

결국 사임을 허락했다.

이셀라는 성전을 떠날 때 특별히 슬프지도 후련하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일한 직장을 그만두는 기분에 가까웠다.

---

마젤은 훨씬 불만이 많았다.

“정말 그만두는 거야?”

“네.”

“신앙이 부족하다고 성직을 내려놓을 사람이 어디 있어?”

“성직자니까 내려놓는 거죠.”

마젤은 인상을 찌푸렸다.

“말장난하지 마.”

“진심인데.”

“...앞으로 뭐 할 거야?”

이셀라는 웃었다.

“돈 공부요.”

마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하필 돈?”

“구호할 때 제일 많이 부족했으니까.”

마젤은 그 답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

이셀라는 델피로로 향했다.

황금왕국.

세레이온에서 돈은 흔히 필요한 수단으로 이야기됐다.

델피로에서는 돈 자체를 연구했다.

왜 가격이 오르는지.

왜 어떤 사업은 살아남는지.

왜 돈이 부족하지 않은 사람도 파산하는지.

왜 국가가 좋은 정책을 만들고도 재정을 망칠 수 있는지.

이셀라에게는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는 곳이었다.

---

처음에는 상단에서 일했다.

전직 고위 성직자가 회계 실무를 배우겠다고 찾아오자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셀라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 맡은 일은 화려하지 않았다.

장부 검산.

비용 정리.

운송료 비교.

재고손실 계산.

이셀라는 그런 일을 즐겼다.

숫자는 기도를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정확성을 요구했다.

그것이 편했다.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셀라는 숫자 역시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한 상단의 투자안이 있었다.

계산상 훌륭했다.

운송비를 줄일 수 있었다.

이윤도 크게 늘었다.

위험도 허용범위였다.

이셀라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업은 성공했다.

실제로 수익도 늘었다.

그리고 기존 운송로 주변의 작은 숙박업소와 마구간 여러 곳이 손님을 잃었다.

장부에는 예상하지 않았던 숫자였다.

---

한 동료가 말했다.

“그건 우리 사업의 손실이 아닙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계약에도 없었다.

책임범위에도 없었다.

이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그래도 결과이긴 하죠.”

그날부터 이셀라는 계산서 옆에 작은 항목을 하나 더 만들기 시작했다.

직접비용이 아닌 영향.

정확하게 금액으로 적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적었다.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이셀라는 점점 상업뿐 아니라 공공재정에도 관여하게 됐다.

왕실과 지방행정기관의 자문을 맡았다.

새로운 도로를 어디에 낼지.

세율을 바꾸면 누가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지.

구호예산을 일시적으로 늘리는 것과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것 중 무엇이 나은지.

그런 문제를 다뤘다.

이셀라는 세레이온에서 했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성직복 대신 정장을 입었을 뿐이었다.

여전히 누군가를 돕기 위한 숫자를 보고 있었다.

---

차이가 있다면 델피로에서는 질문을 더 노골적으로 할 수 있었다.

“좋은 정책입니다.”

누군가 웃었다.

이셀라는 다음 장을 넘겼다.

“이제 비용을 계산하죠.”

웃음이 사라졌다.

“꼭 지금 해야 합니까?”

“비용은 정책이 시행된 다음에도 생기니까요.”

“백성을 위한 정책입니다.”

“그러니까 오래 가야죠.”

이셀라는 그런 말을 자주 했다.

---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신념이 확실해졌다.

선의는 비용을 없애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무료로 준다는 것은 비용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지불하고 있다는 뜻이다.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일을 다음 달에도 할 방법이 필요하다.

내년에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도움을 받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버려지지 않게 해야 한다.

이셀라에게 책임은 시작한 순간보다 끝까지 이어가는 과정에 가까웠다.

---

하지만 이셀라는 숫자를 맹신하지도 않았다.

한번은 젊은 관리가 말했다.

“이 마을은 인구가 적습니다. 지원효율이 낮습니다.”

이셀라가 물었다.

“그래서요?”

“예산을 큰 마을에 집중하면 더 많은 사람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맞는 계산이네요.”

관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셀라가 말을 이었다.

“그럼 작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할 건가요?”

관리의 표정이 다시 굳었다.

---

“효율이 낮아서 포기한다고요?”

“그건…….”

“그 선택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에요.”

이셀라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숫자가 결정을 대신하게 하지 마세요.”

“숫자는 비교할 수 있게 해줍니다.”

“결정하는 건 사람입니다.”

그 말 역시 이셀라가 오래 지키는 원칙이 됐다.

숫자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다.

사람의 가치를 정하는 가격표가 아니었다.

---

미카레 아카데미에서 교수 제안이 들어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이셀라는 이미 충분히 바빴다.

상업자문도 있었고,

재정 관련 업무도 있었다.

학생을 가르쳐본 경험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미카레의 설명을 듣다가 한 문장에서 멈췄다.

황금은 재화뿐 아니라 재능과 가능성을 의미한다.

신분이 아니라 능력을 증명한다.

이셀라는 그 말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의심했다.

---

시험이 같다고 출발선까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비싼 교재를 살 수 있는 학생이 있었다.

집안일과 생계를 병행하면서 공부하는 학생도 있었다.

실패해도 다시 시험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 번의 실패로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미카레는 능력을 측정하려 했다.

이셀라는 그 시도 자체는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안에서 질문해보고 싶었다.

무엇을 능력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리고 그 능력이 만들어지는 데 들어간 비용은 누가 지불했는가.

---

이셀라는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금융·상업학부와 왕국행정학부를 함께 맡았다.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거창한 철학을 설명하지 않았다.

가상의 도시 하나를 보여줬다.

인구.

세수.

병원.

도로.

빈민구호.

치안.

교육.

그리고 말했다.

“전부 개선하세요.”

학생들이 열심히 계획을 짰다.

잠시 뒤 이셀라가 웃으며 덧붙였다.

“예산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

한 학생이 물었다.

“그럼 전부 개선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네.”

“그런데 왜 전부 개선하라고 하셨습니까?”

이셀라는 웃었다.

“그걸 깨닫는 게 첫 번째 과제니까요.”

학생들이 술렁였다.

“두 번째 과제는요?”

“무엇을 포기할지 정하는 겁니다.”

“세 번째는?”

“당신이 포기한 사람에게 직접 그 이유를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보고서를 쓰세요.”

학생들의 얼굴이 굳었다.

이셀라는 만족했다.

---

마일렌을 눈여겨본 것도 그런 수업에서였다.

성적이 가장 높은 학생은 아니었다.

계산속도가 가장 빠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 생활비와 노동시간을 이상할 정도로 잘 봤다.

다른 학생들이 인건비라고 한 줄로 적은 항목을 마일렌은 여러 개로 나눴다.

숙식비.

교대시간.

병가.

대체인력.

이셀라는 그 점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다른 문제도 빠르게 발견했다.

마일렌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기 몫부터 줄였다.

---

“왜 항상 당신이 더 해야 하죠?”

이셀라가 물었다.

마일렌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표정을 본 순간 이셀라는 오래전 자신이 보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선의를 가진 성직자들.

힘들어도 더 일하겠다고 하던 구호대원들.

자기가 조금 더 버티면 된다고 말하던 사람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래서 더 쉽게 소진됐다.

이셀라는 마일렌이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했다.

---

현재의 이셀라는 학생들에게 선의를 버리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선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돈만 보고 움직이는 정책은 오래 버틸 수 있어도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사회를 만들지는 못한다.

반대로 마음만 좋은 정책은 시작은 아름다워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둘을 함께 보라고 가르친다.

원하는 결과.

필요한 비용.

그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

유지할 수 있는 기간.

그리고 숫자로 적을 수 없는 것.

---

학생이 이상적인 계획을 제출하면 이셀라는 먼저 칭찬한다.

“좋은 생각이에요.”

학생이 안도한다.

이셀라는 다음 장을 넘긴다.

“이제 비용을 봅시다.”

학생들은 그 말을 무서워한다.

어떤 학생은 뒤에서 이셀라를 웃으면서 꿈을 부수는 교수라고 부른다.

이셀라는 그 별명을 알고 있다.

딱히 싫어하지 않는다.

대신 한 번 말했다.

“꿈을 부수는 게 아니에요.”

“무너지지 않게 기초공사를 하는 거죠.”

---

마젤과는 지금도 연락한다.

편지는 대부분 마젤 쪽이 짧다.

임무 보고처럼 쓰여 있다.

이셀라의 답장은 조금 더 길다.

식사는 제대로 하는지.

부상은 없는지.

기사단 예산은 충분한지.

휴가는 언제인지.

마젤은 마지막 질문에는 대개 답하지 않는다.

이셀라는 다음 편지에도 다시 적는다.

---

한번은 마젤이 편지 끝에 썼다.

‘이번 작전은 내가 선봉에 설 거야.’

이셀라는 답장을 보냈다.

‘또 네가 먼저 죽을 생각이니?’

며칠 뒤 답장이 왔다.

‘그런 뜻 아니라니까, 언니.’

이셀라는 웃었다.

그리고 아래에 적었다.

‘그럼 네 부단장도 같은 생각인지 물어봐.’

그 뒤 한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아마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

이셀라는 마젤의 선택을 대신할 생각은 없다.

마젤도 이셀라의 삶을 대신 결정하지 않는다.

둘은 서로 다른 것을 믿는다.

마젤은 행동하지 않은 책임을 두려워한다.

이셀라는 끝까지 유지하지 못할 약속을 두려워한다.

둘 다 사람을 살리고 싶어 한다.

그 방법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의견이 다르면 싸운다.

그리고 싸움이 끝난 뒤에도 서로를 자매라고 부른다.

---

가끔 학생이 이셀라의 과거를 알고 묻기도 한다.

“교수님은 정말 성직자였습니까?”

“네.”

“그런데 지금은 신을 안 믿으세요?”

이셀라는 잠깐 생각한다.

“그 질문은 조금 부정확하네요.”

“그럼 믿으십니까?”

“존재는 믿어요.”

“신앙은요?”

이셀라가 웃는다.

“그건 성직자일 때도 별로 없었어요.”

학생은 대개 당황한다.

이셀라는 그 반응을 조금 재미있어한다.

---

그러면서도 세레이온을 싫어하지 않는다.

고향이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곳에서 배운 것도 많다.

신앙이 없는 자신을 끝까지 성직자로 남겨둔 사람들이 있었고,

결국 떠나겠다고 했을 때 억지로 막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교회에서 했던 구호활동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자신을 만든 대부분의 경험이 그곳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세레이온을 떠난 것은 거부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더 맞는 일을 선택한 것이었다.

---

이셀라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냉정함이 아니다.

냉정한 판단은 필요할 때가 있다.

돈이 부족하면 누군가는 덜 받아야 한다.

모든 사업을 유지할 수 없다면 하나는 중단해야 한다.

모든 지역을 동시에 구할 수 없다면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그 사실을 외면하는 편이 오히려 잔인할 수 있다.

하지만 계산에 익숙해지다 보면 다른 위험이 생긴다.

한 사람을 비용으로 보기 시작하는 것.

손실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

효율이 낮다는 이유로 사람의 삶까지 낮게 평가하는 것.

이셀라는 그것을 두려워한다.

---

그래서 중요한 결정을 검토할 때 가끔 숫자를 모두 지운 사본을 만든다.

지역 이름만 남긴다.

사람들의 사정만 읽는다.

어떤 곳에는 아이가 많다.

어떤 곳에는 노인이 많다.

어떤 곳에는 다른 지역으로 갈 길 자체가 없다.

그다음 다시 숫자가 있는 서류를 본다.

둘 중 어느 한쪽만 보지 않기 위해서다.

한 학생이 이유를 물었을 때 이셀라는 말했다.

“숫자만 보면 사람이 안 보일 때가 있거든요.”

“그럼 숫자를 안 보면 되지 않습니까?”

이셀라가 웃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현실이 안 보여요.”

---

그것이 지금의 이셀라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벌라고도 하지 않는다.

가장 효율적인 선택만 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 선택을 했다면 무엇이 따라오는지 끝까지 보라고 한다.

누가 이익을 얻는지.

누가 비용을 내는지.

얼마나 지속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계산하지 못한 사람은 없는지.

---

이셀라는 아직도 부드럽게 웃는다.

학생들의 엉성한 사업계획서를 읽을 때도.

터무니없는 정책안을 받을 때도.

마일렌이 또 자기 노동비부터 줄여놓았을 때도.

그러고는 만년필로 문제의 부분에 선을 긋는다.

“좋은 의도네요.”

학생의 얼굴이 밝아진다.

이셀라는 미소를 유지한 채 다음 말을 한다.

“그럼 이 좋은 의도가 내년에도 살아 있게 만들어봅시다.”

그리고 계산이 시작된다.

이셀라에게 선의는 버려야 할 순진함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귀하기 때문에,

한 번의 아름다운 행동으로 끝나지 않도록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직자로 사람을 도왔던 시절부터,

델피로에서 돈과 정책을 배운 지금까지,

이셀라가 한 번도 완전히 놓지 않은 믿음이다.

BRD
브랜던 로디우스
미카레 아카데미마법·맥류학부+고대학·탐사학부-교수
“모르는 건 괜찮습니다. 확신하기 전에 근거부터 보여주세요.”
🩸 HP110
💪 공격력18
🧙 마법력75
✨ 신비력24
🛡️ 방어력35
🔗 항마력68
😖 신비저항54
🏃 회피력22
과거 보기
브랜던 로디우스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적어도 주변에서는 그렇게 말했다.

책을 읽는 속도가 빨랐다.

한 번 본 술식은 구조를 금방 기억했다.

어른들이 설명하는 도중에도 다음 단계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차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르는 문제가 생기면 답을 찾아낼 때까지 붙잡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브랜던의 부모는 특별한 귀족도,

유명한 마법사도 아니었다.

아우렐리아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중산층 가정이었다.

아버지는 왕국 행정기관에서 문서업무를 했고,

어머니는 약재상에서 회계와 재고관리를 맡았다.

두 사람 모두 마법에는 큰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어린 브랜던이 처음 마법에 관심을 보였을 때도 대단한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그저 아이가 좋아하니 배우게 했다.

---

첫 수업에서 교사는 아주 간단한 빛의 술식을 가르쳤다.

정해진 순서대로 마력을 흘려 작은 빛을 만드는 기초마법이었다.

브랜던은 몇 번 실패했다.

그리고 성공했다.

다른 아이들은 빛이 켜진 것을 보고 좋아했다.

브랜던은 마법진을 내려다봤다.

“이 선은 왜 있어요?”

교사가 설명했다.

브랜던은 또 물었다.

“그럼 이쪽으로 연결하면 안 돼요?”

“가능은 하겠지만 불안정해집니다.”

“얼마나요?”

교사는 그날 예정했던 진도를 절반도 나가지 못했다.

---

브랜던은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 이해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화염을 크게 만드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왜 같은 화염술식이 사람마다 다른 크기로 발동하는지가 궁금했다.

보호막을 화려하게 펼치는 것보다,

어느 부분에서 마력이 가장 많이 새는지 보는 편을 좋아했다.

주문을 외우는 것보다 구조를 분해했다.

누군가 새로운 마법을 보여주면 첫 번째 질문은 늘 비슷했다.

“왜 그렇게 됩니까?”

---

성장할수록 그 재능은 더 분명해졌다.

복잡한 술식일수록 오히려 집중력이 높아졌다.

다른 사람이 한참 들여다보는 문제를 빠르게 정리했다.

잘못 연결된 마력회로를 찾았다.

중복된 술식문자를 발견했다.

불안정한 구조를 보고 어디서 무너질지 예측했다.

브랜던에게는 그런 일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일은 쉽게 자신감이 된다.

---

미카레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브랜던은 지금보다 말이 많았다.

자기 답을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고,

누군가 잘못된 설명을 하면 바로 끼어들었다.

“그건 아닙니다.”

“왜?”

“여기 계산부터 틀렸습니다.”

그리고 정말 틀린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그 경험이 반복될수록 브랜던이 한 가지 사실을 덜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자기가 틀릴 가능성.

---

그렇다고 오만하게 사람을 무시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친구도 있었다.

질문을 받으면 잘 설명해줬다.

후배가 찾아오면 늦게까지 과제를 봐주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확신한 문제에서는 고집이 강했다.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상대의 의심을 비효율적인 시간낭비로 여겼다.

“검산했습니다.”

“한 번 더 보면 안 되나?”

“같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 말 역시 대부분 맞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

졸업 후 브랜던은 술식연구자가 됐다.

특히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마법구조를 분석하는 능력으로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현대술식뿐 아니라 고대유적에서 발견되는 마법진에도 관심을 가졌다.

고대술식은 어려웠다.

사용하는 문자체계가 달랐다.

맥류를 인식하는 방식도 달랐다.

기록이 일부 손상된 경우도 많았다.

브랜던은 그 어려움이 좋았다.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

스물대 후반 무렵,

브랜던은 여러 유적조사에 술식분석 담당으로 참여했다.

그 시기의 평가는 아주 좋았다.

한 번은 탐사대가 닫힌 석문 앞에서 며칠 동안 막혀 있었다.

표면에는 알아보기 어려운 고대문자가 빼곡했다.

브랜던은 몇 시간 동안 살펴봤다.

그리고 말했다.

“문을 여는 술식이 아닙니다.”

“그럼?”

“열린 상태를 유지하는 술식입니다.”

주변 벽을 조사하자 별도의 작동장치가 발견됐다.

그날 이후 탐사대에서는 농담처럼 말했다.

“브랜던이 모르면 그냥 묻어둬.”

브랜던도 그 말을 싫어하지 않았다.

---

시간이 지나면서 농담은 조금 달라졌다.

“브랜던이 맞다고 했으면 맞겠지.”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이었다.

나중에는 브랜던도 비슷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아무 근거 없이 자신만만했던 것은 아니다.

항상 계산했다.

비교했다.

기록을 확인했다.

문제는 그 과정이 정확하면,

그 과정의 출발점도 정확할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사건이 일어난 것은 북부에서 발견된 작은 고대유적이었다.

규모 자체는 크지 않았다.

무너진 지하회랑과 방 몇 개.

벽에는 오래된 술식이 남아 있었다.

맥류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 보았을 때 브랜던은 위험도가 낮다고 판단했다.

---

가장 안쪽 방에는 커다란 원형마법진이 있었다.

절반 가까이가 마모되어 있었다.

몇몇 부분은 끊어져 있었다.

브랜던은 남은 구조를 복원해 읽었다.

맥류를 중앙으로 끌어들이는 부분.

바깥으로 분산하는 부분.

그리고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 여러 선.

현대 술식체계대로라면 작동할 수 없는 상태였다.

브랜던은 결론을 내렸다.

“비활성 상태입니다.”

---

탐사대의 젊은 연구원 하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여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녀가 마법진 외곽을 가리켰다.

“어떤 부분이?”

“이 선들입니다.”

“장식문양입니다.”

“그런데 반복간격이 너무 일정합니다.”

브랜던은 한 번 살펴봤다.

이미 검토했던 부분이었다.

“고대 장식술식에서 흔한 형태입니다.”

“한 번 더 확인해보는 게 어떨까요?”

브랜던은 대답했다.

“설명 가능한 오차입니다.”

---

그 말로 끝났다.

당시의 브랜던에게는 충분한 답이었다.

자기가 틀렸다는 증거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훨씬 많았다.

탐사는 계속됐다.

조사원 한 명이 중앙의 석판을 이동시켰다.

아무 일도 없었다.

두 번째 석판을 들어냈다.

그때 마법진 외곽이 빛났다.

---

브랜던이 장식이라고 판단했던 선들이 먼저 켜졌다.

그 순간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원 후퇴!”

늦지는 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빠르지도 않았다.

벽을 따라 흐르던 맥류가 한꺼번에 중앙으로 모였다.

바닥이 갈라졌다.

천장 일부가 무너졌다.

보호마법이 펼쳐졌다.

브랜던도 즉시 상쇄술식을 사용했다.

대형 참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 명이 다쳤다.

한 명은 팔이 부러졌다.

두 명은 마력충격으로 며칠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유적의 일부도 붕괴했다.

조사는 중단됐다.

---

사건조사에서 브랜던의 계산은 다시 검토됐다.

흥미롭게도 계산 대부분은 맞았다.

현대술식의 원리로 해석한다면 그의 결론은 타당했다.

문제는 바로 그 부분이었다.

고대인들이 현대 마법사와 같은 방법으로 맥류를 제어한다고 전제했다.

외곽의 반복문양은 장식이 아니었다.

현대술식의 회로처럼 맥류를 직접 운반하지도 않았다.

주변 환경에 흐르는 맥류를 감지하고 반응하는 일종의 수용부였다.

중앙구조가 끊겨 있어도 특정 조건에서는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브랜던은 존재 자체를 생각하지 못한 원리였다.

---

조사관이 말했다.

“계산실수는 없습니다.”

브랜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시 알려진 자료로는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그 말도 맞았다.

“징계를 크게 받을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브랜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재검토 요청이 있었습니다.”

조사관이 서류를 봤다.

“예.”

“제가 거절했습니다.”

“그것도 기록에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제 판단입니다.”

조사관은 잠시 브랜던을 바라봤다.

브랜던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사건이 끝난 뒤 브랜던은 그 젊은 연구원을 찾아갔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브랜던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연구원이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당신이 재검토를 요청했습니다.”

“네.”

“제가 무시했습니다.”

연구원은 잠깐 생각했다.

“교수님도 틀릴 수 있네요.”

당시 브랜던은 아직 교수가 아니었다.

“교수가 아닙니다.”

“알아요.”

“그런데 왜 교수라고 했습니까?”

“지적할 게 그거예요?”

브랜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웃었다.

브랜던은 웃지 못했다.

---

한동안 브랜던은 연구를 쉬었다.

마법이 무서워진 것은 아니었다.

고대유적에 들어가기 싫어진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의 판단과 어떻게 다시 함께 일할 것인가였다.

계산을 더 많이 하면 되는가.

검산을 세 번 하면 되는가.

다른 연구자에게 확인받으면 되는가.

그러면 절대로 틀리지 않을 수 있는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

브랜던은 자기 연구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성공했던 연구도 봤다.

틀렸던 예상도 봤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인 경우와 무시한 경우를 비교했다.

그러다 오래된 노트 한쪽에 짧은 문장을 적었다.

“내가 틀렸다고 가정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처음에는 사건을 정리하기 위한 메모였다.

나중에는 습관이 됐다.

새로운 연구노트의 첫 장에도 적었다.

다음 노트에도 적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도.

---

브랜던은 이전보다 느려졌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반대가설을 적었다.

자신의 해석이 틀렸을 때 나타날 현상을 먼저 찾았다.

후배가 이상하다고 말하면 이유부터 물었다.

근거가 약해도 바로 무시하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확실합니까?”

“아닙니다.”

“얼마나 불확실합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좋습니다.”

예전의 브랜던이라면 이상하게 들렸을 대화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정답만이 아니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어디부터 추측인가.

무엇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는가.

그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했다.

“모르겠습니다.”

예전의 브랜던에게 그 말은 공부가 부족하다는 뜻에 가까웠다.

지금은 달랐다.

제대로 사용하면 아주 정확한 답이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표시해야 그다음 조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

몇 년 뒤 브랜던은 다시 고대유적 조사에 참여했다.

이번에는 후배가 물었다.

“이 문은 안전합니까?”

브랜던이 답했다.

“모릅니다.”

후배가 당황했다.

“교수님도 모르십니까?”

“아직 교수 아닙니다.”

“그건 중요하지 않고요.”

브랜던은 문을 가리켰다.

“확인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벽면의 술식을 설명했다.

“이 아래는 추측입니다.”

다른 표시를 했다.

“그러니 안전하다고 말할 근거가 없습니다.”

탐사대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문은 결국 함정이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브랜던은 그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브랜던에게 교수직을 권한 사람도 그 무렵 만난 연구자였다.

“학생 가르칠 생각 없습니까?”

“없습니다.”

즉답이었다.

“잘할 것 같은데.”

“연구할 시간이 줄어듭니다.”

“학생들 질문에 답하는 것도 연구입니다.”

“대부분 이미 답이 있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더 어렵지요.”

브랜던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이해하게 됐다.

---

결정적인 계기는 젊은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임시강의였다.

주제는 고대술식 안전판독이었다.

브랜던은 사례 몇 개를 보여줬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해석을 시켰다.

한 학생이 답했다.

틀렸다.

브랜던이 물었다.

“확실합니까?”

학생이 주변을 봤다.

“……네.”

“왜죠?”

학생은 설명했다.

중간부터 근거가 흐려졌다.

마지막에는 거의 추측이었다.

그런데 끝까지 확실하다고 말했다.

---

수업이 끝난 뒤 브랜던은 학생에게 물었다.

“왜 모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학생은 당황했다.

“평가받는 자리였으니까요.”

“그래서요?”

“모른다고 하면 능력이 없어 보이잖습니까.”

브랜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기가 젊었을 때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항상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실력이라고 착각했다.

그날 브랜던은 학생에게 말했다.

“모르는 것은 감점할 수 있습니다.”

학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면 사람이 다칠 수 있습니다.”

---

브랜던은 결국 미카레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자기가 학생이었던 학교로 돌아왔다.

마법·맥류학부가 주전공이었다.

고대학·탐사학부에도 겸임으로 참여했다.

학교의 핵심가치인 황금이라는 표현도 이해했다.

재능을 발견하고,

벼리고,

증명한다.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경계했다.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이 학생을 거짓된 확신으로 밀어넣는 순간이었다.

---

첫 강의에서 브랜던은 칠판에 문제를 하나 적었다.

몇몇 조건이 의도적으로 빠진 술식이었다.

학생들은 계산을 시작했다.

답이 여러 개 나왔다.

브랜던은 모두 틀렸다고 말했다.

학생 하나가 항의했다.

“정답이 뭡니까?”

브랜던이 대답했다.

“알 수 없습니다.”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조건이 부족합니다.”

학생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문제를 잘못 내신 것 아닙니까?”

“아뇨.”

브랜던은 안경을 밀어올렸다.

“여러분이 답이 반드시 있다고 가정한 겁니다.”

---

그날부터 브랜던의 시험에는 이상한 문제가 자주 등장했다.

답이 없는 문제.

정보가 부족한 문제.

서로 다른 해석이 모두 가능한 문제.

학생들은 싫어했다.

“교수님, 이거 풀 수 있는 문제 맞아요?”

“그것부터 판단하십시오.”

“시험인데요?”

“현장은 더 불친절합니다.”

학생들은 브랜던의 수업에서 단순히 정답만 쓰면 점수를 받지 못했다.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 적어야 했다.

어디까지 확신하는지도 적어야 했다.

---

틀린 답을 썼다고 반드시 크게 감점하지는 않았다.

근거가 명확하고,

자기가 모르는 부분을 정확히 표시했다면 점수를 줬다.

반대로 정답을 맞혀도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면 다시 물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맞았잖아요.”

“그건 결과입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다음에도 맞힐 수 있습니까?”

대답하지 못하면 과제를 다시 냈다.

---

그래서 브랜던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은 칭찬도 꾸중도 아니었다.

“왜죠?”

학생이 대답한다.

또 묻는다.

“왜 그렇게 판단했죠?”

학생이 설명한다.

“그 근거는 어디서 왔습니까?”

다시 설명한다.

“그 전제가 틀렸다면요?”

어느 순간 학생은 머리를 부여잡는다.

브랜던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질문을 한다.

---

히엔 폰 그리브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주 걸렸다.

첫 과제에서 히엔은 상당히 완성도 높은 전투스크롤을 만들었다.

위력이 충분했다.

발동속도도 빨랐다.

쓸데없이 화려했다.

브랜던은 그 부분까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학생이 마력을 더 쓰고 싶다면 그것도 선택이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왜 성공했죠?”

히엔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제가 만들었으니까요.”

브랜던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다시.”

---

“성공했는데 왜요?!”

“여기 유입량이 예상값을 넘었습니다.”

“그래도 안정화됐잖아요!”

“왜 안정화됐습니까?”

히엔이 입을 열었다.

멈췄다.

“……그건.”

“모릅니까?”

히엔의 표정이 굳었다.

“알아요!”

“그럼 설명하십시오.”

한참 뒤 히엔이 이를 악물었다.

“……모르겠어요.”

브랜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히엔이 발끈했다.

“뭐가 좋아요?!”

“이제 확인할 부분을 찾았으니까요.”

---

브랜던은 히엔의 화려함 자체를 싫어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장식이 있으면 묻는다.

“이 부분의 목적은?”

“예쁜데요.”

“그럼 미적 목적이라고 기록하십시오.”

히엔이 눈을 깜빡인다.

“안 빼도 돼요?”

“필요한 마력과 위험을 감수할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요.”

히엔의 눈이 빛난다.

“교수님 생각보다 말이 통하시네요!”

브랜던은 한숨을 쉰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

브랜던은 학생의 실패에도 의외로 화를 잘 내지 않는다.

실험이 실패했다.

“원인은?”

“모르겠습니다.”

“확인하십시오.”

계산을 틀렸다.

“다시 하십시오.”

술식이 무너졌다.

“기록은 남겼습니까?”

“네.”

“그럼 쓸모 있는 실패입니다.”

하지만 실험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표정이 달라진다.

“왜 기록하지 않았죠?”

“실패했으니까요.”

브랜던의 눈 밑 다크서클이 유난히 깊어 보이는 순간이다.

---

“실패해서 기록하는 겁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다.

“성공한 것만 남기면 다음 사람도 같은 실패를 합니다.”

그 부분에서는 쉽게 양보하지 않는다.

브랜던에게 지식은 정답만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틀렸던 길도 포함한다.

해봤는데 안 됐던 것.

왜 안 됐는지 모르는 것.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

그것들이 함께 있어야 다음 사람이 같은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

---

고대학·탐사학부에서의 브랜던은 조금 더 엄격하다.

교실에서 틀린 답은 종이에 남는다.

유적에서 틀린 답은 사람에게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첫 현장수업에서 항상 말한다.

“모르는 것은 만지지 마십시오.”

학생이 묻는다.

“전부 모르면요?”

“전부 만지지 마십시오.”

“그럼 탐사를 어떻게 합니까?”

“관찰부터 하십시오.”

“그래도 모르겠으면요?”

“도망가는 것도 탐사기술입니다.”

학생들은 농담인지 궁금해한다.

브랜던은 농담하지 않았다.

---

그렇다고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학자는 아니다.

위험한 술식도 연구한다.

고대유적에도 들어간다.

필요하면 직접 실험한다.

다만 위험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성공확률을 과장하지 않는다.

모르는 부분을 안전하다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이 과거의 자신과 가장 달라진 점이다.

---

문제가 있다면 브랜던이 이 원칙을 자기 자신에게 이상하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위험한 학생 실험이 제출되면 직접 검토한다.

탐사계획에서 불확실한 고대술식이 발견되면 자기가 먼저 자료를 본다.

다른 교수에게 넘길 수 있는 일도 한 번 더 확인한다.

학생들이 다친 사건의 보고서는 대부분 직접 읽는다.

그 결과 잠이 줄었다.

처음에는 일시적이었다.

나중에는 그냥 생활이 됐다.

---

학생이 물었다.

“교수님, 어제 주무셨습니까?”

“네.”

“몇 시간요?”

브랜던이 잠깐 생각했다.

“두 시간 반.”

“그걸 잤다고 해요?”

“수면의 정의에는 부합합니다.”

“건강의 정의에는 안 맞을 것 같은데요.”

브랜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장을 넘겼다.

학생은 그 침묵을 패배 인정으로 받아들였다.

브랜던은 인정하지 않았다.

---

수염도 비슷하다.

원래부터 턱수염을 기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연구기간 동안 며칠 면도를 미뤘다.

그다음 주도 바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냥 수염이 됐다.

그래도 옷은 항상 단정하게 입는다.

셔츠 단추를 잘못 잠그는 일도 거의 없다.

교수 휘장도 정확한 위치에 단다.

학생 하나가 말했다.

“교수님은 얼굴만 퇴근 못 한 것 같아요.”

브랜던은 안경 너머로 학생을 봤다.

“과제는 했습니까?”

대화는 그 자리에서 끝났다.

---

브랜던 자신도 과로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안다.

오히려 너무 잘 안다.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판단오류가 증가한다.

수면부족은 검토능력을 낮춘다.

피로한 사람이 중요한 결정을 반복하는 것은 위험하다.

관련 연구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학생이 물은 적이 있다.

“그러면 교수님부터 주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브랜던은 잠시 멈췄다.

“맞습니다.”

“오늘은 일찍 주무실 겁니까?”

“노력하겠습니다.”

학생들은 그 답을 신뢰하지 않는다.

대체로 옳다.

---

브랜던이 일을 떠안는 이유를 책임감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과거의 사건 이후 아주 작은 습관이 남았다.

자기가 한 번 더 확인하면 사고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다른 사람이 괜찮다고 해도 자기가 보면 다른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확신을 의심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 자기 검토능력에 과도한 책임을 지우고 있다.

브랜던도 그 모순을 알고 있다.

아직 완전히 고치지는 못했다.

---

한 동료 교수가 말했다.

“학생들에게는 자기 판단을 의심하라고 하면서 왜 자네는 모든 걸 직접 확인하나?”

브랜던이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확인할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자네만 가능한가?”

브랜던의 손이 멈췄다.

“……아닙니다.”

“그럼?”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왜 안 고치나?”

브랜던이 안경을 벗고 눈가를 눌렀다.

“아는 것과 고치는 건 다른 문제니까요.”

그날은 조금 일찍 퇴근했다.

조금이었다.

---

브랜던은 자신을 실패한 연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의 오판 때문에 마법을 다룰 자격이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건 역시 연구자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실패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실패를 숨겼는가.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는가.

아니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기록하고 다음 판단을 바꿨는가.

브랜던은 마지막을 선택하려 한다.

---

가끔 당시 함께 일했던 연구원과도 연락한다.

재검토를 요청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 역시 지금은 다른 연구기관의 선임연구자가 됐다.

편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브랜던은 새 연구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한 번은 답장 끝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요즘은 제 말 잘 듣네요.’

브랜던은 한참 봤다.

그리고 답했다.

‘근거가 있을 경우에 한합니다.’

며칠 뒤 답장이 왔다.

‘하나도 안 변했네요.’

브랜던은 그것이 칭찬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

현재 미카레에서 브랜던은 인기 있는 교수라고 말하기 어렵다.

수업은 어렵다.

과제가 많다.

정답을 맞혀도 질문이 끝나지 않는다.

시험에서는 정보가 부족하다는 답이 정답일 때도 있다.

그리고 교수가 늘 피곤해 보인다.

하지만 연구를 진지하게 하고 싶은 학생들은 결국 그의 연구실 문을 두드린다.

브랜던은 대부분 받아준다.

시간이 없다면서도 받아준다.

이것도 과로의 원인이다.

---

학생이 연구계획을 들고 온다.

“교수님, 가능할까요?”

브랜던은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계획서를 읽는다.

전제를 확인한다.

위험을 찾는다.

그리고 말한다.

“모르겠습니다.”

학생이 실망한다.

브랜던은 다음 장을 펼친다.

“그러니 확인해봅시다.”

그게 그에게는 거절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연구자다운 초대에 가깝다.

---

브랜던은 학생들에게 자신처럼 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가 되라고도 굳이 말하지 않는다.

학생마다 황금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히엔처럼 화려함을 좋아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이론보다 현장에 강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평생 새로운 술식을 하나도 만들지 않고 기존 마법을 안전하게 운용하는 전문가가 될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은 괜찮다.

다만 하나만은 공통적으로 요구한다.

자신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구분할 것.

---

브랜던이 가장 싫어하는 학생은 성적이 낮은 학생이 아니다.

질문이 많은 학생도 아니다.

실패를 반복하는 학생도 아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숨기기 위해 확신하는 척하는 학생이다.

그런 학생을 보면 과거의 자신이 떠오른다.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붙잡는다.

“다시 말해보십시오.”

“어디까지 확실합니까?”

“그걸 어떻게 압니까?”

학생은 괴롭다.

브랜던도 피곤하다.

그래도 계속한다.

---

한 학생이 결국 짜증을 내며 말했다.

“교수님은 대체 왜 그렇게 의심이 많습니까?”

브랜던은 잠시 생각했다.

아주 오래전 유적을 떠올렸다.

장식이라고 생각했던 선.

재검토를 요청했던 목소리.

무너진 천장.

부상자들의 명단.

그리고 자신의 보고서에 적힌 문장.

계산상 오류 없음.

브랜던은 학생에게 그 이야기를 전부 하지 않았다.

짧게 대답했다.

“확신은 증거가 아닙니다.”

---

지금도 브랜던의 연구노트 첫 장에는 같은 문장이 있다.

내가 틀렸다고 가정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 문장을 매번 읽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외우고 있다.

그래도 지우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자기 판단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는 날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배운 교훈을 영원히 기억한다고 보장할 수 없다.

브랜던은 그런 보장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기록한다.

---

오늘도 연구실에는 학생들의 과제가 쌓여 있다.

책상 한쪽에는 식은 커피가 있다.

브랜던은 하나를 집어 든다.

히엔의 이름이 적혀 있다.

첫 장부터 술식 테두리에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장식이 들어가 있다.

브랜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인다.

설명을 읽는다.

‘미적 목적. 추가소모량 3.2%. 안정성 영향 없음. 세 번 재현 확인.’

브랜던은 잠깐 멈춘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린다.

“……이번에는 이유가 있군.”

평가란에 한 줄을 적는다.

‘좋아졌습니다.’

---

다음 날 히엔은 그 한마디를 받고 하루 종일 자랑할 것이다.

브랜던은 모른다.

아마 알아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는 평범한 평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학생의 과제를 집어 든다.

눈 밑의 다크서클은 여전히 짙다.

수염도 오늘은 깎지 못했다.

그래도 문서의 첫 장부터 끝까지 읽는다.

정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학생이 어디까지 알고,

어디부터 모르는지를 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언젠가 그 학생이 자신보다 훨씬 위험한 문제 앞에 섰을 때,

틀린 답을 자신 있게 말하는 대신 한마디를 할 수 있도록.

“모르겠습니다.”

그 한마디 뒤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질문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그것이 브랜던 로디우스가 미카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수업이다.

OTH
오스빌 폰 루인하버
미카레 아카데미검술·전술학부-교수
“최악의 순간에도 할 수 있는 것. 그게 네 기본기다.”
🩸 HP240
💪 공격력80
🧙 마법력8
✨ 신비력1
🛡️ 방어력70
🔗 항마력55
😖 신비저항48
🏃 회피력70
과거 보기
오스빌 폰 루인하버는 기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주 오래된 명문가는 아니었다.

루인하버 가문은 델피로 북서부의 작은 항구와 군용창고를 관리하며 몇 세대에 걸쳐 기사와 군인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화려한 무용담보다는 정해진 일을 정확하게 하는 것으로 알려진 가문이었다.

어린 오스빌도 자연스럽게 검을 배웠다.

그리고 처음부터 별로 재미있어하지 않았다.

---

그가 처음 배운 것은 멋진 검술이 아니었다.

서 있기.

발 옮기기.

검 뽑기.

검 넣기.

방패 들기.

다시 서 있기.

매일 같은 동작이었다.

열 살의 오스빌이 물었다.

“언제 제대로 싸우는 걸 배웁니까?”

검술교관이 대답했다.

“지금.”

오스빌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이건 그냥 서 있는 거 아닙니까?”

“맞다.”

“싸움이 아니잖습니까.”

교관은 나무검으로 오스빌의 발목을 툭 쳤다.

중심이 흐트러졌다.

오스빌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서 있지도 못하는 놈이 뭘 베겠다고.”

오스빌은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났다.

다음 날도 같은 자세를 연습했다.

그다음 날도.

몇 달 뒤에는 더 이상 발목을 맞아도 쉽게 넘어지지 않았다.

그때는 그것이 왜 중요한지 아직 몰랐다.

---

오스빌은 눈에 띄는 천재는 아니었다.

검을 한 번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재능도 없었다.

마법에도 별 소질이 없었다.

빠른 기사도 아니었다.

대신 체격이 컸다.

힘이 좋았다.

무엇보다 같은 것을 반복하는 데 질리는 법이 드물었다.

한 번 열 번.

열 번 백 번.

잘못되면 처음부터 다시.

오스빌에게 훈련은 재미와 별 관계가 없었다.

해야 하니까 했다.

---

열여덟이 되었을 무렵에는 몸집이 주변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정석적인 검술도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대련에서 화려한 승리를 거두는 경우는 드물었다.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거리를 유지했다.

자세가 무너지기를 기다렸다.

빈틈이 생기면 베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에게는 재미없는 검술이었다.

상대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짜증나는 검술이었다.

---

한 동기가 대련 뒤 투덜거렸다.

“넌 왜 맨날 똑같이 싸우냐?”

오스빌이 검을 닦으며 대답했다.

“되니까.”

“좀 새로운 것도 해봐.”

“왜?”

“멋없잖아.”

오스빌은 잠깐 생각했다.

“이기면 됐지.”

그 동기는 오스빌과 평생 취향이 맞지 않았다.

---

성인이 된 오스빌은 황금깃털기사단에 지원했다.

특별한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문에서도 자연스러운 진로였다.

기사로 살 거라면 델피로에서 가장 체계적인 기사단에서 배우고 싶었다.

입단시험에서 그는 최고점이 아니었다.

공격력은 좋았다.

체력도 좋았다.

기초동작에서는 거의 감점이 없었다.

시험관 한 명이 기록지에 적었다.

‘특출나지 않음. 거의 모든 항목이 안정적.’

오스빌은 훗날 그 평가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

기사단 생활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났다.

장비를 확인했다.

훈련했다.

순찰했다.

다시 장비를 확인했다.

젊은 기사들은 종종 술집에서 대련 이야기를 했다.

누가 새로운 기술을 배웠는지.

누가 유명한 검객에게 승리했는지.

오스빌은 옆에서 갑옷끈을 갈았다.

“그거 지금 해야 해?”

“닳았다.”

“내일 하지.”

“내일 출동하면?”

대화는 대개 거기서 끝났다.

---

오스빌이 기본기의 가치를 처음 제대로 체감한 것은 작은 호위임무에서였다.

상단을 호위해 수도 외곽도로를 지나던 중 몬스터 무리가 나타났다.

강한 몬스터는 아니었다.

기사단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문제는 말들이 놀랐다는 것이었다.

수레 하나가 옆으로 기울었다.

대열이 좁아졌다.

기사 한 명의 발이 진흙에 빠졌다.

그 순간 평소 화려한 검술을 자랑하던 동료가 자세를 잃었다.

오스빌은 생각하기도 전에 방패를 들었다.

발을 고정했다.

검을 짧게 뽑았다.

반격했다.

수천 번 반복한 그대로였다.

---

싸움이 끝난 뒤 동료가 말했다.

“아까 어떻게 그렇게 바로 움직였어?”

오스빌이 물었다.

“뭘.”

“바닥도 안 좋았잖아.”

오스빌은 잠깐 생각했다.

특별히 판단한 기억이 없었다.

그냥 몸이 움직였다.

어린 시절 발목을 맞으며 배웠던 자세였다.

그날 처음으로 예전 교관의 말을 조금 이해했다.

서 있는 것도 전투였다.

---

그 뒤 오스빌은 빠르게 승진했다.

엄청난 무공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수가 적었다.

약속한 시간에 도착했다.

장비가 고장나는 일이 적었다.

퇴로를 확인했다.

병사들의 교대시간을 지켰다.

보고서를 빠뜨리지 않았다.

누군가 보기에는 당연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조직에서는 그 당연한 일이 계속 지켜지는 것 자체가 능력이었다.

---

부대장이 된 뒤에는 부하들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했다.

훈련시간에 늦으면 혼냈다.

검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다시 닦게 했다.

갑옷끈 하나가 느슨해도 지적했다.

기사들은 뒤에서 그를 FM이라고 불렀다.

오스빌은 그 별명을 알았다.

신경 쓰지 않았다.

“규정대로 하는 게 뭐가 문제지?”

누군가 정말 그렇게 물었을 때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

그렇다고 오스빌이 규정을 숭배한 것은 아니다.

전투에서는 필요하면 대형을 바꿨다.

지형에 맞지 않는 작전은 수정했다.

부하가 더 좋은 의견을 내면 받아들였다.

그가 고집한 것은 대부분 그 이전의 일이었다.

준비.

훈련.

점검.

통신.

교대.

후송.

사람이 생각할 여유를 잃었을 때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

레이네 폰 아드리아노가 기사단에 들어온 것도 오스빌이 중견 지휘관이던 시절이었다.

젊은 레이네는 반듯한 기사였다.

명령을 빠르게 이해했다.

검술도 정확했다.

규율을 어기는 일도 거의 없었다.

오스빌은 그런 신입을 좋아했다.

가르치기 편했기 때문이다.

다만 첫날부터 특별대우하지는 않았다.

“검 뽑아.”

레이네가 자세를 취했다.

“다시.”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오른발.”

레이네가 고쳤다.

“다시.”

그렇게 한 시간을 보냈다.

---

레이네가 물었다.

“실전에서도 이 정도의 자세가 중요합니까?”

“더 중요하다.”

“왜 그렇습니까?”

오스빌이 대답했다.

“훈련장에서는 네가 안 지쳤으니까.”

레이네는 그 말을 기억했다.

오스빌은 그 사실을 훨씬 뒤에 알았다.

---

세월이 지나 오스빌은 황금깃털기사단의 단장이 됐다.

그때쯤에는 이미 머리카락에 흰빛이 조금씩 섞이고 있었다.

체격은 여전히 컸다.

목소리도 컸다.

휘하에는 수많은 기사와 보조병력이 있었다.

그리고 오스빌은 자신이 꽤 괜찮은 기사단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황금깃털기사단은 강했다.

델피로에서도 손꼽히는 정예였다.

---

정예기사들은 특히 뛰어났다.

고난도의 전투훈련을 소화했다.

복잡한 전술변경에도 빠르게 대응했다.

지휘관들의 수준도 높았다.

오스빌은 그들을 신뢰했다.

자신이 직접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큰 작전일수록 그런 인재들의 가치가 높았다.

오스빌 역시 자연스럽게 중요한 임무를 숙련자들에게 맡겼다.

---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델피로 서부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였다.

국경 인근에 나타난 대형 몬스터 군집 때문에 주변 마을 여러 곳이 위협받았다.

기사단은 토벌과 피난로 확보를 동시에 맡았다.

전투는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사람들은 지쳤다.

잠이 부족했다.

장비도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했다.

---

그래도 작전 자체는 순조로웠다.

오스빌의 지휘도 큰 문제가 없었다.

몬스터 주력은 밀려났다.

민간인 대피도 대부분 끝났다.

정예기사들은 계획대로 주요 길목을 확보했다.

전투의 승패만 본다면 이미 기사단이 이긴 상황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그 뒤에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넷째 날 오후였다.

남쪽 방면을 담당하던 지휘관 하나가 중상을 입었다.

바로 아래 부지휘관도 다른 곳에서 전투 중이었다.

잠깐의 공백이 생겼다.

그 구역에는 신입기사와 보조병력이 많았다.

그들은 전투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대형도 알고 있었다.

후송절차도 배웠다.

교대신호도 알고 있었다.

철수로를 확보하는 법도 배웠다.

다만 대부분 그것을 실제로 해본 횟수가 적었다.

---

처음에는 사소한 일이었다.

교대시간이 조금 늦었다.

그다음에는 전달자가 잘못된 길로 갔다.

부상자 둘을 옮기느라 대열 한쪽이 비었다.

누군가는 빈자리를 메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먼저 지휘관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각자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 확인하지 않았다.

---

몬스터 잔당이 그 틈으로 들어왔다.

놀란 신입 하나가 퇴각신호를 잘못 해석했다.

뒤쪽 부대가 먼저 물러났다.

앞쪽에서는 그것을 전면철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부상자를 옮기던 사람들이 길을 막았다.

마차 한 대가 넘어졌다.

대형이 무너졌다.

누군가 소리쳤다.

다른 사람도 소리쳤다.

명령이 많아질수록 아무도 무엇이 명령인지 알지 못했다.

---

오스빌이 상황을 전달받았을 때는 이미 혼란이 커져 있었다.

예비대를 투입했다.

숙련기사들을 보냈다.

퇴로를 다시 확보했다.

몬스터들을 밀어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상황은 수습됐다.

전투 전체로 보면 작은 혼란이었다.

기사단은 결국 승리했다.

몬스터 군집도 토벌됐다.

마을도 지켜냈다.

---

그리고 사망자 명단이 올라왔다.

오스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숙련기사도 있었다.

하지만 유난히 신입과 보조병력이 많았다.

몬스터에게 정면으로 당한 사람보다 혼란 속에서 부상당한 사람이 많았다.

철수하다 넘어져 밟힌 사람.

후송로가 막혀 치료가 늦어진 사람.

교대가 꼬여 탈진한 채 싸우다 죽은 사람.

전투가 이미 거의 끝난 뒤의 사망자들이었다.

---

오스빌은 보고서를 다시 읽었다.

작전계획에는 문제가 없었다.

지휘결정에도 치명적 오류가 없었다.

장비도 규격에 맞았다.

병력배치도 합리적이었다.

조사관들은 말했다.

“예상하기 어려운 지휘공백이었습니다.”

“기사단장님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체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말은 전부 맞았다.

오스빌은 만족하지 못했다.

---

그는 전투기록을 다시 조사했다.

훈련기록도 가져왔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도 확인했다.

대부분 기준을 통과했다.

대형훈련 통과.

후송교육 이수.

철수절차 이수.

장비점검 통과.

전부 배운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가장 지치고,

겁먹고,

명령이 끊긴 순간에는 하지 못했다.

---

오스빌은 그 차이를 오래 생각했다.

할 줄 아는 것.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것.

둘은 같지 않았다.

훈련장에서 한 번 성공한 동작은 능력이 아니었다.

맑은 정신으로 기억할 수 있는 절차도 충분하지 않았다.

전투에서는 사람이 지친다.

무섭다.

친구가 옆에서 죽는다.

귀가 울린다.

명령이 잘 들리지 않는다.

그때도 남아 있는 것이 필요했다.

---

그날 밤 오스빌은 부단장에게 말했다.

“훈련기록 다시 가져와.”

“이미 조사부에 제출했습니다.”

“원본.”

부단장은 가져왔다.

오스빌은 한참 넘겼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가 잘못 가르쳤다.”

부단장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작전은 승리했습니다.”

“알아.”

“훈련기준도 모두 충족했습니다.”

“그것도 알아.”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오스빌이 사망자 명단을 내밀었다.

“이 사람들이 기준을 통과했다.”

---

부단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스빌이 말했다.

“우리는 강한 놈들이 더 강해지는 훈련은 잘했다.”

정예기사들의 기록을 가리켰다.

“이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다음 장을 넘겼다.

“경험 없는 놈들도 살아남게 만드는 훈련은 부족했다.”

부단장이 말했다.

“실전경험은 훈련으로 전부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맞아.”

오스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첫 실전에서 죽으라고 둘 수도 없지.”

---

그 뒤 기사단의 훈련방식이 바뀌었다.

오스빌은 더 화려한 기술을 추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갔다.

기본동작을 더 많이 반복했다.

지친 상태에서 대형을 만들었다.

비가 오는 날 장비를 교체했다.

밤새 행군한 뒤 부상자 후송훈련을 했다.

지휘관을 일부러 훈련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통신이 끊긴 상황을 만들었다.

기사들에게 가장 싫어하는 질문이 생겼다.

“한 번 더.”

---

어느 젊은 기사가 참다못해 말했다.

“단장님, 이미 열 번 성공했습니다.”

오스빌이 대답했다.

“안다.”

“그런데 왜 또 합니까?”

“열한 번째에도 해야 하니까.”

“실전에서 열한 번 연속으로 같은 일을 합니까?”

“실전에서는 네가 몇 번째인지 셀 정신도 없을 거다.”

기사는 입을 다물었다.

오스빌은 손짓했다.

“다시.”

---

훈련은 효과가 있었다.

몇 년 동안 기사단의 신입 사상률은 줄었다.

혼란상황에서의 대응속도도 나아졌다.

오스빌은 만족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는 조직에서 완벽한 수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달라지는 것은 확인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단장이라는 자리보다 훈련장을 더 자주 찾게 됐다.

---

신입기사가 방패를 잘못 들고 있으면 직접 고쳐줬다.

교관이 왜 그 자세가 필요한지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면 멈춰 세웠다.

“왜 그렇게 가르쳤나.”

“규정입니다.”

“왜 규정이지?”

교관이 대답하지 못했다.

오스빌의 표정이 굳었다.

“모르는 규정은 가르치지 마.”

“단장님?”

“이유부터 확인하고 와.”

오스빌에게 반복훈련은 생각하지 않기 위한 훈련이 아니었다.

생각할 여유를 벌기 위한 훈련이었다.

---

하지만 단장에게는 훈련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왕실회의.

예산.

인사.

타 부대와의 조율.

외교행사.

보고서.

기사단 전체를 지휘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오스빌은 그 역할을 못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잘했다.

그래서 더 오래 고민했다.

자신이 계속 단장으로 남는 것과,

사람을 가르치는 것 중 어디에서 더 필요한가.

---

결정은 갑작스럽게 보였다.

오스빌은 어느 날 왕실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주변은 당연히 놀랐다.

“건강에 문제가 있습니까?”

“없다.”

“정치적 갈등이라도?”

“없다.”

“그럼 왜 물러나십니까?”

오스빌은 잠깐 생각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했다.

황금깃털기사단의 단장직이었다.

명예도 높았다.

권한도 컸다.

은퇴하기에는 아직 싸울 수 있었다.

왕실에서도 계속 남아달라고 요청했다.

오스빌은 거절했다.

자신의 사임을 사건의 속죄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전투의 책임이 전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것 역시 사실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저 그 사건에서 자신이 해야 할 다음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

레이네가 그를 찾아온 것은 사임 결정이 알려진 뒤였다.

당시의 레이네는 이미 기사단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정말 물러나실 겁니까?”

“그래.”

“왜입니까?”

오스빌은 짐을 정리하면서 대답했다.

“가르치려고.”

레이네가 잠시 침묵했다.

“기사단에서도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기사단에 들어온 뒤는 늦을 때가 있다.”

오스빌은 낡은 훈련기록을 상자에 넣었다.

“들어오기 전부터 기본을 만들어야지.”

---

레이네가 물었다.

“후회하십니까?”

오스빌의 손이 멈췄다.

무엇을 묻는지는 알았다.

오래전 전투.

죽은 신입들.

보조병들.

오스빌은 고개를 저었다.

“후회하고 앉아 있을 시간은 끝났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다음 놈들이 안 죽게 해야지.”

레이네는 더 묻지 않았다.

---

오스빌은 미카레 아카데미의 검술·전술학부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첫날부터 학생들은 그를 알아봤다.

황금깃털기사단 전 단장.

거대한 체격.

짧게 다듬은 은회색 머리.

얼굴 절반을 덮는 덥수룩한 수염.

군복을 연상시키는 단정한 교수정장.

학생들은 전설적인 검술수업을 기대했다.

첫 수업에서 오스빌이 시킨 것은 걷기였다.

---

“운동장 열 바퀴.”

학생들이 달렸다.

다 돌아오자 검을 들게 했다.

“기본자세.”

학생들이 자세를 취했다.

오스빌이 한 명씩 돌아봤다.

“틀렸다.”

“다시.”

“왼발.”

“다시.”

“허리.”

“다시.”

한 학생이 물었다.

“오늘 검술은 언제 합니까?”

오스빌이 말했다.

“하고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이 했던 질문과 똑같았다.

오스빌은 속으로 아주 조금 웃었다.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았다.

---

오스빌의 수업에는 유난히 반복이 많다.

단순 검격.

방패 받기.

낙법.

부상자 옮기기.

무기 잃었을 때 후퇴하기.

동료가 쓰러졌을 때 대형 메우기.

밤에도 한다.

비가 와도 한다.

학생들이 충분히 지친 뒤에도 한다.

다만 무리하게 다치게 하지는 않는다.

학생의 체력과 숙련도는 꼼꼼히 기록한다.

혹독함과 무계획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한 학생이 훈련 뒤 바닥에 누워 말했다.

“교수님은 저희를 싫어하십니까?”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러십니까?”

오스빌은 물병을 던져줬다.

“지금도 자세 잡을 수 있나?”

학생이 간신히 일어났다.

검을 들었다.

팔이 떨렸다.

오스빌이 말했다.

“그 상태가 실전에 더 가깝다.”

---

“멀쩡할 때 잘하는 건 별 의미 없다.”

학생이 숨을 몰아쉬었다.

오스빌은 말을 이었다.

“겁먹었을 때.”

“밤을 샜을 때.”

“동료가 쓰러졌을 때.”

“명령이 안 들릴 때.”

“그때도 할 수 있는 것.”

잠깐 멈췄다.

“그게 네 기본기다.”

그 문장은 학부에서 꽤 유명해졌다.

---

아델리아 같은 학생은 오스빌의 수업을 좋아한다.

시간을 지킨다.

복장을 갖춘다.

절차를 따른다.

훈련을 빼먹지 않는다.

오스빌도 아델리아의 태도를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칭찬만 하지는 않는다.

어느 모의전에서 아델리아가 규정대로 부대를 후퇴시켰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오스빌이 물었다.

“왜 물러났지?”

“철수기준에 도달했습니다.”

“그건 내가 물은 게 아니다.”

---

아델리아가 잠깐 멈췄다.

“규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왜 그 규정이 있지?”

“전력손실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상황에서도 그 목적에 맞았나?”

아델리아는 전장을 다시 봤다.

이번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오스빌이 말했다.

“규칙은 생각하지 말라고 있는 게 아니다.”

“생각할 시간을 벌어주려고 있는 거다.”

아델리아는 그 말을 기록했다.

---

세레나 같은 학생은 반대 방향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기본보다 감각을 믿는다.

정해진 자세를 비튼다.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을 좋아한다.

실제로 잘 통한다.

한 대련에서 세레나가 정석검술을 완전히 벗어난 공격으로 승리했다.

검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봤죠? 정석대로만 할 필요 없다니까.”

오스빌이 말했다.

“좋았다.”

세레나가 잠깐 놀랐다.

“진짜요?”

“다시 해.”

---

세레나가 같은 기술을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실패했다.

세 번째에는 성공했다.

네 번째에는 실패했다.

오스빌이 물었다.

“성공률은?”

세레나가 얼굴을 찌푸렸다.

“반쯤?”

“그럼 절반은 죽는 기술이다.”

“실전에서는 느낌이—”

“느낌 좋을 때만 적이 오나?”

세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오스빌이 말했다.

“변칙은 좋다.”

“재현할 수 있게 만들어.”

---

오스빌은 학생들에게 영웅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웅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전투는 이미 조직이 실패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물론 뛰어난 사람은 필요하다.

강한 기사도 필요하다.

전장을 뒤집을 천재도 있다.

하지만 그 천재가 쓰러졌다고 나머지가 전부 무너지면 안 된다.

그것이 오스빌이 기사단에서 배운 가장 비싼 교훈이었다.

---

학생이 물었다.

“교수님은 천재를 싫어하십니까?”

“아니다.”

“그런데 왜 맨날 기본만 말씀하십니까?”

오스빌은 잠시 생각했다.

“천재가 쓰러졌을 때 네가 서 있어야 하니까.”

학생은 대답하지 못했다.

오스빌은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

현재의 레이네가 황금깃털기사단 단장이 된 뒤에도 두 사람은 가끔 만난다.

레이네는 여전히 오스빌 앞에 서면 무의식적으로 자세가 반듯해진다.

오스빌은 그것을 알고 있다.

굳이 지적하지 않는다.

한번은 레이네가 기사단의 새 훈련과정을 들고 찾아왔다.

“확인해주시겠습니까?”

오스빌이 서류를 받았다.

“단장은 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네가 판단해.”

레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오스빌은 그제야 서류를 펼쳤다.

---

읽고 나서 몇 곳에 표시했다.

“여기.”

“문제가 있습니까?”

“신입에게 너무 빠르다.”

다음 장.

“여기는 반복횟수 부족.”

또 다음 장.

“이건 좋다.”

레이네가 물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뭘 더 원하지?”

“모르겠습니다.”

오스빌이 서류를 돌려줬다.

“그럼 됐다.”

레이네는 아주 조금 웃었다.

---

오스빌은 자신이 기사단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가끔 훈련장을 지나가는 황금깃털기사단을 보면 오래 바라보기도 한다.

자기가 평생 몸담았던 곳이다.

그리운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돌아갈 생각은 없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기사단에서 한 명의 신입을 제대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미카레에서는 앞으로 기사,

용병,

호위관,

장교,

탐사자가 될 수십 명을 먼저 만날 수 있다.

---

오스빌에게 교육은 전투 이전의 전투다.

사람이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준비다.

실전에서 처음 배우는 것은 너무 비싸다.

실수 하나의 값이 피일 수 있다.

그래서 훈련장에서 최대한 많이 틀리게 한다.

넘어진다.

실패한다.

대형을 망친다.

다시 한다.

누군가 창피해하면 오스빌은 신경 쓰지 않는다.

“여기서 틀려.”

“밖에서 틀리는 것보다 싸다.”

---

그렇다고 오스빌에게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혹독한 훈련이 모두에게 같은 방식으로 필요한가.

한 사람을 살리겠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압박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이 겪었던 전장을 아직 겪지 않은 학생들에게 미리 두려움을 짊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

한 학생이 결국 검술·전술학부를 떠난 적도 있었다.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전투 자체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학생은 오스빌에게 찾아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스빌이 물었다.

“왜.”

“끝까지 못 버텼습니다.”

오스빌은 한동안 학생을 봤다.

“어디로 갈 거지?”

“왕국행정학부로 전과하려고 합니다.”

“잘해라.”

학생이 당황했다.

“그게 끝입니까?”

“뭘 더 하지?”

---

“저를 실망하신 줄 알았습니다.”

오스빌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네가 도망친 건가?”

“……모르겠습니다.”

“싸우기 싫어서 다른 길을 고른 건가?”

“네.”

“그럼 고른 거지.”

오스빌은 서류에 서명했다.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놈은 싸우기 싫은데 자존심 때문에 남아 있는 놈이다.”

학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그 일 이후 오스빌도 조금 달라졌다.

학생을 강하게 만드는 것과 모두를 전투자로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자신의 수업을 듣는 사람에게 요구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길 자체를 선택할지 말지는 학생의 몫이다.

FM인 오스빌에게도 선택권은 규정 밖의 일이 아니다.

애초에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는 사람이 억지로 검을 들 필요는 없다.

---

지금도 오스빌의 수업은 어렵다.

아침수업은 정확한 시간에 시작한다.

1분 늦은 학생도 늦은 학생이다.

장비점검표를 안 가져오면 다시 가지러 간다.

검집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았으면 대련에 참여시키지 않는다.

학생들은 불평한다.

오스빌은 듣는다.

그리고 대부분 무시한다.

다만 이유를 묻는 학생에게는 설명한다.

규칙을 지키라고만 하지 않는다.

왜 생겼는지도 말한다.

---

“왜 검집끈까지 확인합니까?”

오스빌이 대답한다.

“뛰다가 검 떨어뜨린 놈을 봤으니까.”

“왜 후송훈련을 검술학부가 합니까?”

“검 맞으면 누가 옮길 건데.”

“왜 교대시간을 이렇게 엄격하게 지킵니까?”

“지친 놈은 자기가 지쳤는지도 모른다.”

그의 규정에는 대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 뒤에는 대부분 실제 사람이 있다.

이름까지 기억하는 경우도 많다.

---

오스빌은 그 이름들을 학생들에게 전부 말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죽은 사람의 무게 때문에 검을 드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져가야 하는 것은 죄책감이 아니다.

교훈이다.

실패에서 필요한 것만 남겨 다음 사람이 덜 다치게 하는 것.

그것이 오스빌에게 훈련과 기록의 목적이다.

---

누군가는 아직도 오스빌에게 묻는다.

“그 전투에서 단장님이 잘못하신 겁니까?”

오스빌은 대개 대답한다.

“전부는 아니다.”

“그럼 왜 단장직까지 내려놓으셨습니까?”

오스빌이 말한다.

“잘못한 사람만 다음 일을 해야 하나?”

상대는 보통 바로 답하지 못한다.

오스빌은 굳이 기다리지 않는다.

---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속죄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그런 말은 자신에게 너무 편리하다고 생각한다.

몇 년 가르쳤다고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괴로워한다고 그들의 죽음이 의미를 얻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번 배운 것을 다음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다.

---

오스빌은 영웅을 만들고 싶지 않다.

전설적인 검객 한 명을 배출했다고 자랑할 생각도 없다.

물론 그런 학생이 나오면 축하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만족스러운 순간은 따로 있다.

평범했던 학생이 처음 실전에서 돌아와 말할 때다.

“교수님이 시킨 대로 했습니다.”

오스빌은 그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뭘.”

“겁났는데 방패부터 들었습니다.”

그제야 오스빌은 고개를 끄덕인다.

---

최악의 순간에도 할 수 있는 것.

오스빌은 그것을 기본기라고 부른다.

천재에게도 필요하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더 필요하다.

규율도 같은 이유로 존재한다.

사람 대신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머리가 하얗게 되는 순간에도 최소한의 선택지를 남겨주기 위해서다.

방패를 든다.

동료를 확인한다.

퇴로를 본다.

숨을 쉰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뒤에 스스로 판단한다.

---

오늘도 미카레의 훈련장에는 오스빌의 목소리가 울린다.

“다시.”

학생들이 신음한다.

“교수님, 백 번 했습니다!”

“안다.”

“몇 번까지 합니까?”

오스빌은 거대한 팔을 교차한 채 학생들을 바라본다.

“힘들어서 횟수 세는 걸 잊을 때까지.”

학생들의 얼굴이 절망한다.

오스빌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든다.

“자세.”

학생들이 검을 든다.

몇 명의 팔은 이미 떨리고 있다.

오스빌은 한 명씩 확인한다.

---

그는 오래전의 전장을 기억한다.

승리한 전투.

이미 끝나가던 전투.

그리고 끝난 줄 알았던 순간 죽은 사람들.

그 기억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발 하나를 고쳐준다.

방패 각도를 바로잡는다.

느슨한 검집끈을 다시 묶게 한다.

“다시.”

아주 작은 것들이다.

전설에는 남지 않는다.

---

하지만 오스빌 폰 루인하버는 알고 있다.

전투가 정말 나빠졌을 때 사람을 살리는 것은 언제나 거대한 기술만이 아니다.

발을 헛디디지 않는 것.

방패를 놓치지 않는 것.

동료 하나를 잊지 않는 것.

명령이 끊겨도 자기가 해야 할 최소한을 기억하는 것.

그런 작은 것들이 한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낸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같은 것을 가르친다.

강한 사람이 더 강해지는 법보다,

아직 강하지 않은 사람도 살아 돌아오는 법을.

그것이 황금깃털기사단의 전 단장이 단장실을 떠나 교단에 선 이유다.

Roster

무소속 · 고대종

2명
드래곤2명
BKR
벨카리온
무소속드래곤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죽으면 슬퍼하는군. 인간은 어느 쪽이 진심이지?”
🩸 HP400
💪 공격력99
🧙 마법력89
✨ 신비력95
🛡️ 방어력89
🔗 항마력70
😖 신비저항99
🏃 회피력70
과거 보기
벨카리온은 처음 인간의 전쟁을 보았을 때,
싸우는 이유보다 전쟁이 끝난 뒤의 행동을 더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사람들은 서로를 죽이려고 했다.

창으로 찔렀다.

검을 휘둘렀다.

욕을 했다.

상대가 쓰러지면 환호하기도 했다.

그런데 싸움이 끝나고 나면,
조금 전까지 상대를 죽이려던 사람이 시체 앞에서 울었다.

적의 죽음을 보고도 얼굴을 돌리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가 죽인 사람의 물통을 가져가면서,
그 사람의 눈을 감겨주는 사람도 있었다.

벨카리온은 멀리 떨어진 바위 위에 앉아 그 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인간은 죽음을 싫어한다.”

잠시 뒤 다른 병사가 쓰러진 적을 향해 창을 내리찍었다.

벨카리온의 붉은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아닌가.”

또 생각했다.

“인간은 자기 죽음만 싫어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진영의 병사가 죽은 적의 시체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벨카리온은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인간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런 식이었다.

언제나 하나의 답을 발견했다고 생각한 직후,
바로 다음 사람이 그 답을 틀리게 만들었다.


벨카리온이 태어난 곳은 어느 나라의 성도 아니고,
어느 부족의 땅도 아니었다.

남부의 깊은 사막이었다.

안발룽의 유리불분지보다도 더 뜨겁고,
낮의 열기가 밤까지 바위 속에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불이 불꽃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모래 아래에 열이 쌓였다.

마력맥류가 지나치게 뜨거워지면 바위가 스스로 갈라졌다.

비가 오지 않아도 먼 곳에서 증기가 솟았다.

때때로 불씨조차 없는 돌밭에서 자연발화가 시작되었다.

보통 생명에게는 재앙처럼 보이는 현상이었지만,
드래곤에게는 세계가 내는 신호였다.

열이 한곳에 너무 오래 쌓인다.

마력이 빠져나가지 못한다.

연소가 스스로를 먹으며 커진다.

그러면 벨카리온은 움직였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불이 마을을 향하는지,
빈 사막을 향하는지,
군대가 있는 쪽으로 번지는지는 그녀의 판단 기준이 아니었다.

그녀가 보는 것은 오직 흐름이었다.

세계가 견딜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는가.

그것뿐이었다.


어린 벨카리온에게 연소란 태우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없애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축적된 열을 태운다.

폭주하는 마력을 태운다.

자연발화가 연쇄적으로 번지려 할 때,
그 연쇄를 만드는 과잉만 골라 소멸시킨다.

그녀가 권능을 사용하면 불길이 더 커지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꺼졌다.

붉은 불꽃이 한순간 새하얗게 밝아졌다가,
마치 연료가 아니라 ‘과잉’ 자체를 먹어치운 것처럼 사라졌다.

모래는 여전히 뜨거웠다.

바위도 남아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건드리지 않았다.

벨카리온의 불은 생명을 태우기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에게 그런 선택은 권능의 용도가 아니었다.

드래곤의 힘은 세계의 균형을 위해 존재한다.

누가 착한가.

누가 악한가.

누가 살 만한가.

누가 죽어도 되는가.

그런 것은 드래곤이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벨카리온은 아주 일찍 그 원칙을 배웠다.

정확히는 누가 가르쳐주었다기보다,
자신의 존재방식 속에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드래곤은 세계를 지킨다.

그러나 세계 안의 누구도 지키지 않는다.

생명들의 선택은 생명들의 것이다.

생명이 선택한 갈등도 그렇다.

전쟁을 하는 것도.

화해하는 것도.

도시를 세우는 것도.

도시를 무너뜨리는 것도.

그 결과 누군가 죽는 것도.

드래곤이 자신의 힘으로 그 결말을 골라버리는 순간,
그것은 세계의 균형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하나의 편이 되는 일이었다.

벨카리온은 이 원칙을 의심하지 않았다.

적어도 처음에는.


남부사막을 떠도는 사람들이 벨카리온을 처음 발견한 것도 열기 폭주 때문이었다.

어느 여름,
유리불분지 외곽의 마력맥류가 급격하게 불안정해졌다.

낮 동안 축적된 열이 밤에도 식지 않았다.

모래 아래에서 불꽃이 올라왔다.

황무지 곳곳에 자연발화가 이어졌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붉은 빛이 보였다.

그리고 한밤중,
그 붉은 빛 사이에서 더 밝은 불꽃 하나가 솟았다.

벨카리온이었다.

그녀는 마력 폭주가 가장 심한 지점에 서 있었다.

적발이 열기에 흔들렸다.

뿔 끝에서는 작은 불꽃이 흔들렸다.

그리고 주위의 불이 하나씩 사라졌다.

타서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불을 만드는 과잉 자체가 소멸했다.

멀리서 보던 사람들에게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등불 하나가 밤새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뒤로 누군가 그녀를 ‘사막의 등불’이라고 불렀다.

벨카리온은 처음 그 이명을 들었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길을 비춘 적이 없다.”

사막 상인이 웃었다.

“그래도 보였으니까.”

벨카리온이 고개를 기울였다.

“보이면 등불인가.”

“대충 그렇지.”

“태양도 등불인가.”

상인은 한참 웃었다.

벨카리온은 왜 웃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인간과 다른 지성종을 처음에는 멀리서 관찰했다.

사막의 부족들.

오아시스를 옮겨 다니는 유목민.

교역상.

성직자.

안발룽의 전사들.

세레이온에서 넘어온 성기사들.

길을 잃은 여행자.

도망자.

그들에게는 각각 이름이 있었다.

각각의 목적도 있었다.

그것이 벨카리온에게는 흥미로웠다.

불은 단순했다.

열이 많으면 퍼진다.

연료가 없으면 꺼진다.

마력도 어느 정도는 규칙이 있었다.

쌓이면 폭주한다.

통로가 있으면 흐른다.

막히면 다른 길을 찾는다.

인간은 달랐다.

먹을 것이 필요한데 식량을 불태웠다.

살고 싶다면서 죽을 가능성이 높은 싸움에 들어갔다.

자기 가족을 사랑한다면서 다른 가족을 죽였다.

평화를 원한다고 말한 뒤 무기를 샀다.

벨카리온은 자주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자주 틀렸다.

그게 재미있었다.


그녀가 특히 오래 관찰한 것은 남부의 한 갈등이었다.

안발룽의 전사들과 세레이온의 성기사단이 충돌하던 시기였다.

세레이온에서는 그들을 야만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안발룽에서는 성기사들을 위선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벨카리온은 두 단어 모두 관찰해보았다.

‘야만인.’

‘위선자.’

그리고 어느 날 두 집단을 직접 보고 결론을 내렸다.

“둘 다 사람이다.”

옆에 있던 안발룽 전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봤다.

“그걸 지금 알아?”

벨카리온이 말했다.

“너희는 서로 다르다고 계속 말한다.”

“다르지.”

“밥을 먹는다.”

“먹지.”

“물을 마신다.”

“마시지.”

“상처가 나면 아프다.”

전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벨카리온이 잠시 생각했다.

“생각보다 비슷하다.”

전사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 욕을 중얼거렸다.

"...진짜 뭐지? 드래곤을 가장한 미친년인가..."

벨카리온은 그것을 새로운 인간식 인사일 가능성으로 분류했다.

나중에 아니라고 배웠다.


벨카리온이 전장 주변을 맴도는 이유를 양쪽 모두 의심했다.

안발룽에서는 말했다.

“성기사들 편을 드는 것 아니냐.”

세레이온에서는 반대로 말했다.

“드래곤이 안발룽 전사들과 접촉했다.”

벨카리온은 두 보고를 우연히 들었을 때 이해하지 못했다.

“둘 다 틀렸다.”

사람이 물었다.

“그럼 왜 계속 전장 근처에 있는 겁니까?”

벨카리온은 매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너희가 이상해서.”

상대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뜻입니까?”

“관찰 중이다.”

“우리를?”

“응.”

“왜요?”

벨카리온은 잠시 고민했다.

“이해하고 싶다.”

그 대답 때문에 양쪽 모두 더 의심했다.

벨카리온은 그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첫 번째로 그녀가 인간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원칙을 의식한 것은 작은 교전 뒤였다.

전투 자체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멀리서 지켜봤다.

한쪽이 밀렸다.

다른 쪽이 추격했다.

몇 사람이 쓰러졌다.

싸움이 끝난 뒤 살아남은 사람들이 부상자를 찾았다.

벨카리온은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열이 보였다.

사람의 체온도.

상처에서 빠져나가는 미약한 마력도.

한 젊은 전사가 그녀를 발견했다.

안발룽 사람이었다.

그는 동료 하나를 끌고 왔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피를 많이 흘렸다.

전사가 말했다.

“드래곤.”

벨카리온이 내려다봤다.

“왜.”

“살려줘.”

벨카리온은 잠시 부상자를 봤다.

그리고 말했다.

“안 된다.”


전사는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못 해?”

“할 수 있는 것과 해도 되는 것은 다르다.”

“네가 드래곤이라며.”

“맞다.”

“저 불도 없앴잖아!”

그가 멀리 사라져가는 자연발화 흔적을 가리켰다.

벨카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기가 과했다.”

“그럼 얘 몸에서 피가 나가는 것도 막아!”

벨카리온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그건 그의 삶이다.”

전사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죽게 두겠다는 거냐?”

벨카리온은 대답했다.

“내가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게 뭐가 달라!”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벨카리온에게는 분명히 달랐다.

그런데 상대에게는 같은 결과였다.

동료가 죽는다.

그 사실 앞에서 구분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전사는 욕을 했다.

벨카리온을 저주했다.

무능하다고 했다.

괴물이라고도 했다.

벨카리온은 화내지 않았다.

그 말 때문에 힘을 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사는 결국 동료를 업고 떠났다.

벨카리온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다.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전에는 인간 하나가 죽는 결과 자체보다 왜 인간이 그렇게 행동하는지가 궁금했다.

그날은 달랐다.

‘살았을까.’

그 질문이 남았다.

벨카리온은 그것을 한동안 불편해했다.

관찰자는 결과를 궁금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부터 개입인가.

궁금해하는 것은 괜찮은가.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죽었을 때 슬퍼하는 것은.

그녀는 처음으로 드래곤의 원칙과 감정이 같은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 뒤에는 반대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세레이온의 성기사 몇 명이 자연발화 지대에 고립되었다.

전투 때문은 아니었다.

그날 사막의 마력맥류가 지나치게 상승했다.

곳곳에서 불이 일었다.

벨카리온은 움직였다.

권능으로 폭주하는 마력을 연소시켰다.

자연발화의 연쇄를 끊었다.

결과적으로 성기사들이 있던 쪽의 불길도 약해졌다.

그들은 살아서 빠져나왔다.

며칠 뒤 한 성기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감사드립니다.”

벨카리온이 말했다.

“왜.”

“저희를 살려주셨습니다.”

“아니다.”

성기사가 미소를 지었다.

“겸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벨카리온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겸손이 아니다.”

“그 불은 너희 때문에 없앤 것이 아니다.”


성기사는 당황했다.

벨카리온은 계속 설명했다.

“그 지역의 마력밀도가 허용 범위를 넘었다.”

“연소가 계속되면 사막의 흐름이 손상된다.”

“그래서 없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희가...”

“살았다.”

“그렇습니다.”

“그건 결과다.”

벨카리온은 아주 단정적으로 말했다.

“목적이 아니다.”

성기사는 그 차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래도 말했다.

“저에게는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벨카리온이 물었다.

“내가 너를 위해 한 일이 아닌데도?”

“제가 살았으니까요.”

벨카리온은 한동안 침묵했다.

인간의 감사는 의도를 기준으로 하는가.

결과를 기준으로 하는가.

그날 새 질문이 생겼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습관을 들였다.

처음에는 상당히 무례했다.

정확히는 무례하다는 개념을 잘 몰랐다.

장례식 근처에서 물었다.

“왜 울지.”

유족이 그녀를 노려봤다.

“죽었으니까요.”

“모두 언젠가 죽는다.”

상대의 표정이 더 나빠졌다.

벨카리온이 덧붙였다.

“예상된 일이면 덜 슬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날 그녀는 상당한 욕을 들었다.

나중에는 장례식에서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왜 안 되는지도 물었다.

“슬픈 사람한테 굳이 그런 걸 묻지 마.”

“언제 물어야 하지.”

“나중에.”

“나중은 언제지.”

“그건 알아서 좀...”

벨카리온은 인간의 예절을 매우 비효율적인 규칙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지키려고 했다.

그들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인간들은 벨카리온에게도 계속 이상한 질문을 했다.

“왜 인간 모습으로 다니십니까?”

“작으니까.”

“예?”

“큰 몸은 대화하기 불편하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

“그런 옷은 춥지 않습니까?”

벨카리온이 자기 얇은 검은 사막복을 내려다봤다.

“춥지 않다.”

“더우면요?”

“더운 것도 문제없다.”

“그럼 옷은 왜 입습니까?”

벨카리온은 잠시 멈췄다.

“너희가 입으라고 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벨카리온은 옷이 왜 필요한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본래 몸이나 피부를 지나치게 오래 바라보면 대화가 느려진다는 것은 관찰했다.

그래서 인간의 관습에 맞춰 옷을 입었다.

그녀 나름의 사회적 학습이었다.


벨카리온은 선물이라는 것도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사막의 아이 하나가 반짝이는 돌을 주었다.

“이거 줄게.”

벨카리온이 돌을 받았다.

“왜.”

“그냥.”

“대가가 없나.”

“응.”

“그러면 왜 주지.”

아이가 생각했다.

“예뻐서?”

벨카리온이 돌을 봤다.

그저 석영 조각이었다.

흔했다.

“별로 희귀하지 않다.”

아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뒤에 있던 어른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럴 때는 고맙다고 하는 겁니다.”

벨카리온이 물었다.

“왜.”

“그냥 하십시오.”

벨카리온은 아이를 다시 봤다.

그리고 말했다.

“고맙다.”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벨카리온은 그 변화를 관찰했다.

“이 말은 효과가 크군.”

어른은 얼굴을 감쌌다.


그런 식으로 벨카리온에게 아는 인간들이 조금씩 생겼다.

이름을 아는 상인.

가끔 물을 얻으러 오는 전사.

사막 식물을 조사하는 학자.

남부를 순례하던 성직자.

자꾸 돌을 가져다주는 아이.

그녀는 그들을 친구라고 불러야 하는지 몰랐다.

처음에는 ‘반복적으로 만나는 개체’라고 생각했다.

어느 상인이 그 말을 듣고 기분 나빠했다.

“우리 그렇게 부르는 거냐?”

벨카리온이 말했다.

“정확하다.”

“친구라고 해.”

“친구의 정의는.”

“자주 만나고, 서로 좋아하고, 같이 있으면 좋은 사람.”

벨카리온은 한동안 생각했다.

“그럼 너는 친구일 가능성이 있다.”

상인은 웃었다.

“그걸로 됐다.”

벨카리온은 왜 그 정도로 만족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했다.


문제는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한 뒤였다.

이름을 모를 때 사람의 죽음은 현상이었다.

한 명이 쓰러졌다.

호흡이 멈췄다.

체온이 내려갔다.

마력의 움직임도 멈췄다.

그뿐이었다.

이름을 알고 나면 달라졌다.

어제까지 말을 하던 사람이 오늘 없다.

매번 같은 농담을 하던 상인이 돌아오지 않는다.

돌을 주던 아이가 몇 년 뒤 키가 커져 다시 오고,
수십 년 뒤에는 늙는다.

벨카리온은 드래곤이었다.

인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살았다.

그들에게 몇십 년은 삶 전체였다.

벨카리온에게는 관찰의 일부였다.

처음으로 인간의 짧은 수명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너희는 너무 빨리 바뀐다.”

어느 늙은 상인에게 말했다.

그가 웃었다.

“너희 드래곤이 너무 안 바뀌는 거겠지.”

벨카리온은 그 답을 한동안 생각했다.


그 상인이 죽었을 때 벨카리온은 장례식에 갔다.

예전처럼 왜 우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조용히 서 있었다.

유족 중 하나가 그녀를 알아봤다.

“아버지 친구셨다고 들었습니다.”

벨카리온이 말했다.

“친구일 가능성이 높았다.”

유족은 잠시 그녀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아버지가 그 말도 얘기했어요.”

벨카리온은 관을 바라봤다.

“이제 수정할 수 있다.”

“뭘요?”

“친구였다.”

유족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벨카리온은 그 반응을 보고 당황했다.

“내가 잘못 말했나.”

“아니요.”

“그런데 왜 울지.”

유족이 웃으면서 눈물을 닦았다.

“좋아서요.”

벨카리온의 표정이 굳었다.

“좋으면 우나.”

그날 인간에 대한 기록은 또 하나 복잡해졌다.


그녀가 자신의 애착을 처음 위험하다고 느낀 것은 전투 하루 전이었다.

안발룽의 한 무리와 세레이온 성기사대가 같은 오아시스 주변에서 대치했다.

양쪽 모두 이유가 있었다.

물.

통행권.

이전에 발생한 습격.

죽은 사람에 대한 보복.

서로의 주장이 겹치며 싸움이 날 가능성이 높았다.

벨카리온은 양쪽에 아는 사람이 있었다.

안발룽 쪽에는 오래 알고 지낸 전사가 있었다.

성기사대에는 여러 번 대화를 나눈 성직자가 있었다.

둘은 다음 날 싸우면 서로를 죽일 수도 있었다.

벨카리온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양쪽에게 상대의 이동을 알려주면 된다.

혹은 어느 쪽이 먼저 공격할 생각인지 알려주면 된다.

경고 한마디면 누군가 살 수도 있었다.

권능조차 필요 없었다.

말만 하면 됐다.

그 순간 벨카리온은 처음으로 자신의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사실이 힘들다고 느꼈다.


그녀는 밤새 사막에 앉아 있었다.

불안정한 마력도 없었다.

자연발화도 없었다.

세계의 균형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문제는 오직 생명들이었다.

그들의 선택.

그들의 미움.

그들의 오판.

그들의 죽음.

벨카리온은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정보 하나도 결과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래곤이 전쟁터에서 어느 한쪽에게만 알려주는 사실은 단순한 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힘이었다.

결과를 기울이는 힘.

아침이 왔다.

전투도 일어났다.

벨카리온은 멀리서 보았다.

아는 사람들이 싸웠다.

누군가는 살았다.

누군가는 죽었다.

그녀는 누구도 구하지 않았다.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


전투 중 한 번,
마법이 충돌하면서 사막의 마력맥류가 폭주했다.

그 순간에만 벨카리온이 움직였다.

하늘이 붉어졌다.

전투와 무관하게 팽창하던 마력의 열이 한꺼번에 연소했다.

모래 위에서 발생하던 자연발화가 꺼졌다.

대기가 안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투 양쪽 모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벨카리온은 어느 쪽도 향하지 않았다.

사람에게 마법을 쓰지 않았다.

검도 녹이지 않았다.

창도 태우지 않았다.

성기사의 검 위에 실린 신성술도,
안발룽 전사의 무기에 실린 마력도 그것이 생명들의 싸움을 위해 사용되는 한 건드리지 않았다.

자신이 없앤 것은 전투 때문에 발생했지만 더 이상 누구의 통제에도 속하지 않게 된 자연적 폭주뿐이었다.

맥류가 안정되자 벨카리온은 다시 물러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싸웠다.

그 모습은 그녀에게 이상할 만큼 잔혹했다.

동시에 당연했다.

자기가 멈출 일이 아니었으니까.


전투가 끝난 뒤 벨카리온은 시신들 사이를 걸었다.

권능을 쓰지는 않았다.

그저 봤다.

어느 안발룽 전사가 죽어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오래전 벨카리온에게 친구라는 단어를 설명해줬던 상인의 조카였다.

반대편에는 성기사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와 인간의 장례 풍습을 두고 논쟁했던 사람이었다.

둘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벨카리온은 한참 사이에 서 있었다.

누군가 그녀를 보고 말했다.

“드래곤은 아무것도 안 하는군.”

벨카리온이 대답했다.

“맞다.”

상대가 분노했다.

“그 힘을 가지고도?”

“맞다.”

“그럼 왜 여기 있어?”

이번에는 대답이 조금 늦었다.

예전 같으면 ‘관찰하려고’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날은 그 말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어서.”

벨카리온이 말했다.


상대가 비웃었다.

“뭘 이해해.”

벨카리온은 죽은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는 서로를 미워한다.”

“그래.”

“그래서 죽이려 한다.”

“그래.”

“그런데 죽으면 슬퍼한다.”

상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카리온의 붉은 눈이 그를 향했다.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죽으면 슬퍼하는군.”

그녀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인간은 어느 쪽이 진심이지?”

상대는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둘 다겠지.”

벨카리온의 눈이 조금 커졌다.

“동시에?”

“인간은 그래.”

벨카리온은 그 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는 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 뒤 벨카리온은 인간을 볼 때 모순을 오류라고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미워할 수 있다.

전쟁을 싫어하면서 복수를 원할 수 있다.

살고 싶으면서 자기를 희생할 수 있다.

적을 죽이고도 그 죽음을 슬퍼할 수 있다.

벨카리온에게는 불편한 구조였다.

불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불은 타거나 꺼진다.

뜨겁거나 식는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은 반대되는 상태가 동시에 존재했다.

처음에는 그것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그 모순 자체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징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직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질문이 더 늘었다.

그래서 더 자주 인간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벨카리온에게 자꾸 부탁했다.

비를 내려달라.

그녀는 비를 다루지 않는다고 말했다.

적의 무기를 태워달라.

안 된다고 했다.

오아시스를 차지한 부족을 몰아내달라.

거절했다.

세레이온 군대가 지나가지 못하게 사막을 불태워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안 한다.”

“왜?”

“너희 싸움이다.”

반대로 성기사에게서는 안발룽의 무기창고를 태워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벨카리온은 똑같이 거절했다.

“생명체가 아니잖습니까.”

성기사가 말했다.

벨카리온이 답했다.

“그들의 무기다.”

“무기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렇다.”

“그런데 왜 안 됩니까?”

“그걸 없애면 싸움의 결과를 내가 정한다.”

벨카리온은 한 번 더 말했다.

“안 한다.”


누군가는 그녀를 비겁하다고 했다.

누군가는 오만하다고 했다.

힘이 있으면서 책임지지 않는다고 했다.

벨카리온은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내 책임이지.”

정말 그렇게 물었다.

“할 수 있잖아.”

“가능하면 책임이 생기나.”

“사람이 죽는데 보고만 있으니까.”

“내가 결정한 죽음이 아니다.”

상대는 답답해했다.

벨카리온도 답답했다.

인간은 가능성과 의무를 자주 연결했다.

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

힘이 있으면 써야 한다.

그 힘으로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면 구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라고 했다.

벨카리온에게는 위험한 논리였다.

그 논리를 받아들이면 드래곤은 곧 모든 전쟁의 지휘자가 될 수 있었다.

한쪽을 구하는 순간 다른 쪽의 패배를 만든다.

한 도시를 지키면 그 도시가 다음 전쟁을 할 힘을 남긴다.

한 왕을 살리면 왕조의 역사가 달라진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끝이 없었다.

그래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이 벨카리온의 답이었다.


한번은 이 원칙이 자신의 목숨까지 포함된다는 것을 인간들에게 보여준 적도 있었다.

사막의 무장대가 벨카리온을 오해했다.

그녀가 상대 부족에게 자연발화를 없애주었다고 믿었다.

실제로는 그 지역의 열기 폭주를 조정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도를 만들었다.

‘드래곤이 저쪽 편을 들었다.’

몇 명이 그녀를 찾아왔다.

무기를 들었다.

벨카리온은 도망가지 않았다.

그들이 사람인 것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물었다.

“나를 죽이러 왔나.”

“네가 우리 적을 도왔으니까.”

“돕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벨카리온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그들은 대답 대신 무기를 들었다.

벨카리온은 권능을 사용하지 않았다.

검을 녹이지 않았다.

창을 태우지 않았다.

사람의 몸에도 불을 붙이지 않았다.


공격은 실제로 그녀에게 닿았다.

드래곤의 몸은 강했다.

인간의 무기로 쉽게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래도 상처는 났다.

피가 흘렀다.

사람들은 놀랐다.

벨카리온은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물러났다.

한 사람이 소리쳤다.

“왜 안 싸워!”

벨카리온이 말했다.

“너희와 싸울 이유가 없다.”

“우리가 널 죽이려고 하잖아!”

“안다.”

“그럼 막아!”

벨카리온은 잠시 생각했다.

“너희를 죽여서?”

상대가 입을 다물었다.

“싫다.”

“그럼 죽을 거야?”

벨카리온의 대답은 단순했다.

“그렇게 되면 그렇다.”

그들은 오히려 공격을 멈췄다.

벨카리온은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한 사람이 설명했다.

“너한테 죽을 각오를 하고 왔는데 넌 안 죽이겠다고 하니까 이상했던 거지.”

벨카리온이 물었다.

“죽고 싶었던 건가.”

“아니.”

“그럼 왜 죽을 각오를 했지.”

“싸움은 그런 거야.”

벨카리온은 한숨 비슷한 숨을 내쉬었다.

“또 모순이군.”

상대가 웃었다.

“인간 이해하려면 오래 걸리겠다.”

벨카리온이 말했다.

“시간은 많다.”

그때 그녀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을 이해하는 데 몇백 년이 걸려도 상관없다고.

왜냐하면 자신은 오래 살 것이고,
인간은 계속 새로운 답을 보여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에는 아직 냉소도 체념도 없었다.

순수한 호기심에 가까웠다.


벨카리온은 전쟁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좋아하지도 않았다.

전쟁은 생명들이 만든 선택 중 하나였다.

그녀는 그것을 자연재해와 같은 것으로 보지 않았다.

눈폭풍에는 의도가 없다.

마력폭주에는 명분이 없다.

전쟁에는 사람이 있다.

결정이 있다.

명령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드래곤의 권능으로 ‘정리’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했다.

한번은 누군가 물었다.

“전쟁 때문에 마력폭주가 생기면요?”

벨카리온이 말했다.

“폭주는 없앤다.”

“그럼 전쟁도 멈추지 않습니까?”

“아니다.”

“왜요?”

“전쟁은 너희가 만들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뜨거운 모래를 들어 올렸다.

“이건 세계가 감당 못 하고 있다.”

그리고 전장 쪽을 가리켰다.

“저건 너희가 감당해야 한다.”


그 차이는 벨카리온에게 매우 명확했다.

그러나 감정은 점점 그 경계를 흐리게 만들려고 했다.

알고 지내던 사람의 마을이 불타는 것을 봤다.

불이 전쟁으로 붙은 것이라면 건드리지 않았다.

누군가 일부러 지른 불이라면 그것은 생명들의 행동 결과였다.

하지만 그 불이 주변 자연의 마력맥류를 끌어들여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그때는 개입했다.

경계는 때때로 아주 얇았다.

불은 처음에는 인간이 만들었다.

그다음에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다.

언제부터 자연재해가 되는가.

벨카리온은 그것을 판단해야 했다.

조금 일찍 권능을 쓰면 사람을 구하는 개입이 될 수 있다.

조금 늦게 쓰면 사막의 맥류가 손상될 수 있다.

그녀는 인간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열을 봤다.

마력밀도를 봤다.

확산범위를 봤다.

사람 이름을 판단 기준에서 밀어냈다.

그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한번은 특히 그랬다.

그녀가 알고 지내던 작은 정착지 근처에서 전투가 일어났다.

불화살이 창고에 맞았다.

불길이 번졌다.

처음에는 인간들이 만든 화재였다.

벨카리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물을 날랐다.

불을 끄려 했다.

바람이 강해졌다.

불이 주변의 마력밀도가 높은 모래층까지 닿았다.

그 순간부터 양상이 달라졌다.

자연발화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불이 인간의 행동범위를 넘어 사막 자체의 마력폭주로 변하기 시작했다.

벨카리온은 바로 움직였다.

붉은 빛이 사막을 덮었다.

과잉열이 연소했다.

폭주하던 마력이 소멸했다.

정착지 주변의 불도 크게 약해졌다.

사람들이 환호했다.

벨카리온은 그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불편해졌다.


그날 죽었을 사람 몇 명이 살아남았다.

벨카리온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들을 구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마력폭주를 제거한 것뿐이었다.

그게 사실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안도했다.

아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 감정이 문제였다.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자기가 폭주의 경계를 조금 다르게 판단하게 되지는 않을까.

아는 사람이 있는 마을이라서 조금 더 일찍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반대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조금 늦게 판단하지 않을까.

드래곤의 권능은 너무 컸다.

그 작은 흔들림이 역사에서는 거대한 차이가 될 수 있었다.

벨카리온은 처음으로 인간에게 애착을 갖는 것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인간을 멀리하지 않았다.

그게 벨카리온다운 고집이었다.

애착이 위험하다고 인간을 피하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해하기 위해 개입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더 어려운 쪽을 선택했다.

가까이 있는다.

말을 건다.

이름을 기억한다.

농담도 배운다.

선물을 받는다.

죽으면 슬퍼한다.

그러나 선택은 건드리지 않는다.

싸우면 막지 않는다.

도망가면 돕지 않는다.

잡히면 풀어주지 않는다.

죽어가도 살리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의 감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드래곤으로 남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말로 적으면 간단했다.

실제로 지키는 것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한 어린아이가 벨카리온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벨카리온은 나 좋아해?”

벨카리온이 아이를 봤다.

“좋아한다의 기준이 뭐지.”

“또 그거야?”

아이가 투덜거렸다.

벨카리온은 잠시 생각했다.

“네가 오면 흥미롭다.”

“그건 좋아하는 거야?”

“모른다.”

“내가 안 오면?”

“왜 안 오지 생각한다.”

아이는 환하게 웃었다.

“그게 좋아하는 거야!”

벨카리온은 그 정의를 기억했다.

몇 년 뒤 그 아이가 사막을 떠났을 때,
벨카리온은 정말 생각했다.

왜 안 오지.

어디에 있지.

잘 살고 있나.

그렇다면 자신은 그 아이를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그 발견은 재미있었다.

동시에 조금 무서웠다.


수십 년 뒤 그 아이는 늙어서 한 번 더 찾아왔다.

벨카리온은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다.

머리가 희어졌다.

허리가 굽었다.

걸음도 느려졌다.

노인이 말했다.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

벨카리온은 얼굴을 가까이 봤다.

냄새.

마력의 흔적.

말투.

그리고 알아봤다.

“돌을 주던 아이군.”

노인이 웃었다.

“그렇게 기억해?”

“이름도 안다.”

“말해봐.”

벨카리온은 정확하게 말했다.

노인은 한참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기억해줘서 고맙다.”

벨카리온은 예전처럼 묻지 않았다.

왜 고맙지.

그 정도는 이제 조금 이해했다.


그 노인은 돌아가는 길에 말했다.

“다음에는 못 올 수도 있어.”

벨카리온이 물었다.

“왜.”

“늙었으니까.”

“알고 있다.”

“그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 마.”

벨카리온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물었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노인이 웃었다.

“아쉽다고.”

벨카리온이 생각했다.

“아쉽다.”

“그래. 그거.”

노인은 떠났다.

다시는 오지 않았다.

벨카리온은 그의 죽음을 직접 보지 않았다.

확인하러 가지도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가끔 그 사람이 앉던 돌을 봤다.

그때마다 ‘아쉽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인지 생각했다.

조금 부족한 것 같았다.

인간들이 왜 여러 단어를 만들어내는지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벨카리온은 인간의 관습을 배우면서도 인간의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누군가 선량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

누군가 잔혹하다고 해서 권능으로 벌하지 않는다.

아는 사람이 공격받는다고 상대의 무기를 태우지도 않는다.

반대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막의 열기 폭주에 휘말렸다고 해서 그 사람만을 위한 방식으로 권능을 조절하지 않는다.

세계의 균형에 필요한 만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그것을 잔인하다고 부른다.

벨카리온은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방식이 인간에게 잔인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안다.

하지만 인간의 자비를 드래곤의 권능에 적용하면 더 거대한 잔혹함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을 위한 기적이,
수백 년 뒤 수천 명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드래곤은 그 결과를 계산할 수 있을 만큼 전지하지 않다.

그래서 선택하지 않는다.


어느 성직자가 물었다.

“그렇다면 드래곤은 책임에서 도망치는 것 아닙니까?”

벨카리온은 그 말을 꽤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다.”

“어째서요?”

“나는 내가 맡은 것을 한다.”

“사막의 마력맥류를 조율하고.”

“자연발화를 억제하고.”

“열기가 세계의 흐름을 망가뜨리면 없앤다.”

성직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눈앞의 사람은...”

벨카리온이 말을 이었다.

“내가 맡은 것이 아니다.”

성직자의 얼굴이 굳었다.

벨카리온은 덧붙였다.

“너희는 그 말이 싫겠지.”

“예.”

“이제는 안다.”

벨카리온은 인간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다.

이해한다고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벨카리온은 인간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특별하게 보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그녀에게는 마력폭주를 없애는 것이 인간이 우물물을 퍼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기 존재의 기능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설을 만들었다.

사막의 등불이 지나간 곳에는 재앙이 멈춘다.

그녀가 바라본 길은 안전하다.

붉은 머리의 용녀가 나타나면 불이 물러난다.

일부는 그녀를 숭배하려고 했다.

벨카리온은 바로 막았다.

“하지 마.”

“왜입니까?”

“내가 너희를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재앙을...”

“세계의 과잉을 없애는 것뿐이다.”

“그 덕분에 사람이 삽니다.”

“가끔은.”

벨카리온이 말했다.

“가끔은 죽는다.”

그녀는 자기 이름이 보호의 약속처럼 사용되는 것을 싫어했다.

사막의 등불이 있으니 안전하다고 믿는 순간,
사람들이 자신의 생존을 드래곤에게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잘못된 기대였다.


그 때문에 어느 마을에서는 꽤 큰 갈등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열기가 심한 지역에 새 정착지를 만들려고 했다.

이유는 좋은 광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했다.

“벨카리온이 있으니 큰 마력폭주는 막힐 것이다.”

그 이야기가 벨카리온에게 들어갔다.

그녀는 직접 찾아갔다.

마을 대표가 기뻐했다.

“사막의 등불께서 축복하러...”

“아니다.”

벨카리온이 바로 끊었다.

“나는 너희 정착을 보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폭주가 생기면...”

“세계의 균형을 해치면 없앤다.”

“그럼 결국 저희가...”

“그 과정에서 너희가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벨카리온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내가 있다는 것을 안전장비로 계산하지 마.”

그것은 그녀가 인간에게 한 가장 중요한 경고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결국 정착 여부를 자기들끼리 결정했다.

벨카리온은 결과를 보았지만 개입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것이 맞았다.

사람들이 위험을 알고도 선택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자기들의 역사로 감당하는 것.

드래곤의 존재가 선택을 대신하지 않는 것.

벨카리온은 인간을 좋아하기 시작할수록 그 원칙을 더 강하게 붙잡았다.

좋아하지 않을 때는 쉬웠다.

낯선 존재가 죽는 것을 그냥 볼 수 있었다.

좋아하기 시작한 뒤에는 달랐다.

구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생길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위험이었다.

싫어하는 사람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힘을 쓰고 싶어지는 순간,
자신도 생명들의 정치와 갈등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애착이 깊어질수록 더 엄격하게 선을 그었다.


벨카리온은 자신이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강하다.

더 오래 산다.

더 많은 마력을 다룰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을 인간보다 잘 판단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인간은 짧게 산다.

그래서 하루의 의미가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남은 시간이 달라진다.

벨카리온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자신이 인간의 전쟁을 멈춰야 할 때를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더 오만한 일일 수 있었다.

그래서 질문한다.

관찰한다.

때로는 틀린 말을 한다.

사람들이 화를 내면 이유를 묻는다.

그리고 하나씩 배운다.

하지만 배웠다고 사람의 주인이 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안발룽의 전사와 세레이온의 성기사가 같은 말을 하는 순간도 여러 번 봤다.

“우리 사람을 지켜야 한다.”

양쪽 모두 그렇게 말했다.

벨카리온은 처음에는 그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 자기 사람이 중요하다면 싸우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과거의 죽음과 미래의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저들이 먼저 올 수 있다.’

‘저들이 다시 빼앗을 수 있다.’

‘이번에 물러나면 다음에도 당한다.’

벨카리온은 점점 이해했다.

인간의 전쟁은 지금의 미움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기억이 싸운다.

두려움이 싸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까지 싸움에 들어온다.

그것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슬프다는 감각도 아주 희미하게 배워가기 시작했다.


한 번은 안발룽 노인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게 인간을 이해하고 싶냐?”

벨카리온이 대답했다.

“응.”

“왜?”

벨카리온은 한참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이상하니까’라고 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답이 나왔다.

“계속 보게 되니까.”

노인이 웃었다.

“그게 좋아한다는 거야.”

벨카리온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희는 모든 걸 좋아한다로 설명하는군.”

“싫어하는 것도 계속 보긴 하지.”

“그럼 틀린 정의다.”

“또 분석 시작했네.”

벨카리온은 진지했다.

하지만 노인은 웃었다.

그런 장면이 점점 많아졌다.

인간은 벨카리온을 가르쳤고,
벨카리온은 자신이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 알아차렸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인간을 너무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전장에서 자신이 아는 사람이 쓰러졌을 때,
본능적으로 한 발 앞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권능은 사용하지 않았다.

한 발뿐이었다.

하지만 벨카리온은 즉시 멈췄다.

그 한 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을 살리고 싶다.

그 감정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권능으로 바꾸면 달라진다.

사람 하나를 살린다.

그 사람이 다음 전투에서 열 명을 죽일 수도 있다.

혹은 평화를 만들 수도 있다.

왕이 될 수도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늙어 죽을 수도 있다.

드래곤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미래를 자기 호감 때문에 연장한다면,
그 순간 세계 안의 선택자가 된다.

벨카리온은 그 자리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아주 단순한 기준을 반복한다.

생명은 건드리지 않는다.

생명들이 사용하는 무기도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의 전쟁도 건드리지 않는다.

정치도.

복수도.

사랑도.

죄도.

대신 세계가 과열되면 움직인다.

마력맥류가 폭주하면 태워 없앤다.

자연발화가 사막 전체의 균형을 삼키려 하면 연소의 연쇄를 소멸시킨다.

누가 그 결과로 살고 죽는지는 자신의 판단 근거에 넣지 않는다.

그 원칙을 깨는 것이 얼마나 작은 일이어도 시작하지 않는다.

작은 개입은 작은 결과만 만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드래곤의 손가락 하나가 인간 역사에서는 왕조 하나보다 무거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자신이 무감정한 관찰자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제는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안다.

사람이 죽으면 아쉬울 때가 있다.

다시 보고 싶었던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면 기다리기도 한다.

전에 만나던 사람이 자식이나 손자를 데려오면 흥미롭다.

이름을 기억한다.

선물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이 서로 싸우면 왜 싸우는지 듣고 싶다.

화해하면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도 묻는다.

그것은 이미 단순한 자연관측과 다르다.

벨카리온도 안다.

자신은 인간에게 애착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도 선은 유지한다.

오히려 애착이 있기 때문에 더 엄격하게 유지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살려내는 드래곤이 되는 순간,
자신의 힘은 더 이상 세계의 것이 아니게 되니까.


가끔 사람들은 그녀에게 극단적인 질문을 한다.

“그럼 네 친구가 네 앞에서 죽어도 아무것도 안 할 거야?”

벨카리온은 대답한다.

“응.”

상대가 얼굴을 찌푸린다.

“그게 친구야?”

벨카리온은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요즘은 이렇게 답한다.

“친구라서 살리고 싶은 것과.”

잠시 말을 멈춘다.

“살려도 되는 것은 다르다.”

상대는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벨카리온도 납득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 방식을 잔인하다고 생각해도 괜찮다.

그 감정까지 바꿀 권리는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한다.


더 극단적으로 누군가 묻기도 했다.

“그 원칙 때문에 네가 죽게 되어도?”

벨카리온은 이번에는 고민하지 않는다.

“응.”

“죽기 싫지 않아?”

“싫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죽기 싫다는 이유로 생명들의 선택에 권능을 쓰기 시작하면 원칙이 아니다.”

사람은 그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벨카리온에게도 죽음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드래곤 역시 죽을 수 있다.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생존을 이유로 드래곤의 권능을 다른 생명의 운명을 꺾는 데 쓰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무엇인지 잃는다고 생각한다.

살아남기 위해 존재의 이유를 버리면,
살아남은 것이 정말 같은 벨카리온인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죽음까지 그 선 안에 포함시킨다.


현재의 벨카리온은 여전히 남부사막을 돌아다닌다.

특정 국가의 수호룡이 아니다.

안발룽의 편도 아니다.

세레이온의 적도 아니다.

사막의 어떤 부족이 제물을 바쳐도 계약을 맺지 않는다.

성직자가 축복을 요구해도 해주지 않는다.

왕이 동맹을 제안해도 거절한다.

대신 마력폭주가 시작되면 어디서든 나타난다.

사막 아래 맥류가 끓는다.

모래가 유리처럼 변하기 직전까지 달아오른다.

자연발화가 한 지역을 넘어 확산되려 한다.

그러면 멀리서 붉은 빛이 보인다.

불이 일어난 곳에 불꽃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드래곤이 선다.

그녀는 불을 키우지 않는다.

지나친 불만 없앤다.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말한다.

“사막의 등불이다.”

벨카리온은 이제 굳이 정정하지 않는다.

등불이 길을 비추기 위해 켜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사람들 근처로 온다.

가끔 물어본다.

“이번에는 왜 싸웠지.”

안발룽 전사가 말한다.

“저쪽이 먼저 약속 어겼어.”

벨카리온이 상대편에도 간다.

성기사가 말한다.

“그들이 먼저 약속을 어겼습니다.”

벨카리온은 두 말을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둘 다 상대가 먼저라고 한다.”

전사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동시에 먼저지.”

“오래된 일까지 따지면 몰라.”

벨카리온의 눈이 반짝인다.

“그럼 더 오래된 이야기를 말해.”

사람은 귀찮아한다.

벨카리온은 진지하다.

인간이라는 생물을 이해하는 데 그런 사소한 모순들이 가장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현재의 인간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존재다.

잔혹하면서 다정하다.

겁이 많으면서 무모하다.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한다.

미워하면서 슬퍼한다.

떠나보내면서 기억한다.

불을 두려워하면서 불 없이는 살지 못한다.

벨카리온은 이런 모순을 아직 냉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있어한다.

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삼백 년을 산 드래곤에게 인간은 아직 새로운 연구대상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연구대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이 그녀를 웃게도 하고,
조심스럽게도 만든다.


벨카리온은 아직 인간에게 실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을 믿는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 둘보다 단순하다.

“이해하고 싶다.”

왜 미워하는가.

왜 사랑하는가.

왜 죽이는가.

왜 죽인 뒤 우는가.

왜 약속을 만들고 어기는가.

왜 어긴 뒤 다시 약속하는가.

질문은 계속 늘어난다.

그리고 질문이 늘어날수록 인간에게서 멀어지기는커녕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게 벨카리온의 가장 큰 모순이다.

이해하고 싶어서 가까이 간다.

가까이 가서 좋아하게 된다.

좋아하게 될수록 도와주고 싶어질 가능성이 생긴다.

그래서 좋아하게 될수록 더 엄격하게 개입하지 않는다.


어느 날 한 인간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게까지 선을 지킬 필요가 있어?”

벨카리온이 말했다.

“있다.”

“왜.”

“내가 너희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답이라는 얼굴이었다.

벨카리온은 계속 말했다.

“약하면 작은 실수로 끝날 수 있다.”

“나는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하나를 살린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인다.”

“그 사람의 자식이 나라를 만든다.”

“그 나라가 다른 나라를 없앤다.”

“혹은 반대로 모두를 살린다.”

벨카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모르는데 어떻게 고르지.”

그녀에게 비개입은 무관심이 아니었다.

자신의 힘이 지나치게 크다는 자각에서 나온 제한이었다.


사람이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는 네가 좋아해도 아무 혜택이 없네.”

벨카리온은 잠시 생각했다.

“대화할 수 있다.”

“그게 혜택이야?”

“나는 대화가 좋다.”

사람이 웃었다.

벨카리온도 아주 조금 웃었다.

“그리고 이름을 기억한다.”

“그게 끝?”

벨카리온은 이번에는 오래 생각했다.

“죽으면 슬퍼할 수 있다.”

상대의 웃음이 조금 줄었다.

벨카리온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살리지는 않는다.”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고집 세다.”

“안다.”

그 정도는 이미 인간에게 여러 번 들었다.


남부의 밤이 깊어지면 벨카리온은 높은 바위 위에 앉아 사막을 본다.

멀리 오아시스의 불빛이 보인다.

여행자의 횃불이 움직인다.

군대의 야영불도 보인다.

마력맥류의 붉은 흐름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움직인다.

그녀는 둘을 구분한다.

사람이 피운 불.

세계가 넘치게 만든 불.

전자는 사람들의 것이다.

후자는 자신의 일이다.

그 경계를 지킨다.

그런데 요즘은 야영불 하나가 사라지면 가끔 누가 있었는지 떠올린다.

저곳에는 지난번에 만난 상단이 있었나.

저쪽에는 그 성기사가 있었나.

그 전사는 아직 살아 있나.

궁금해한다.

하지만 날아가서 확인하지는 않는 날도 많다.

알고 싶은 마음까지 결과를 움직이는 행동으로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호기심이 언젠가 애착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애착이 더 깊어져도 자신의 원칙은 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간의 전쟁에 들어가지 않는다.

인간의 선택을 하찮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대신 선택하지 않는다.

자신이 더 강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역사 위에 손을 올리지 않는다.

어느 한 사람의 목숨이 아까워도.

친구가 울어도.

누군가 자신을 미워해도.

심지어 그 선택 때문에 자신이 죽는 날이 오더라도.

그녀는 그 선을 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현재의 벨카리온에게 드래곤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다.


다만 벨카리온은 아직 한 가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관찰만 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하면서도 구하지 않을 수 있는가.

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사랑이 거짓이 되는가.

인간들은 대체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자기 사람이 죽으면 왜 도와주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벨카리온은 그 모순을 아직 풀지 못했다.

그래서 계속 인간 주변에 머문다.

답을 찾으려고.

그리고 어쩌면 답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우려고.


오늘도 남부사막 어딘가에서 마력맥류가 달아오른다.

모래 틈 사이로 붉은 빛이 새어나온다.

사람들은 멀리서 그 빛을 보고 불안해한다.

잠시 뒤 더 밝은 붉은 빛 하나가 하늘에 나타난다.

벨카리온이다.

그녀는 아무 마을의 부름을 받고 온 것이 아니다.

어느 군대를 돕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다.

그저 세계의 한 부분이 지나치게 뜨거워졌기 때문에 왔다.

붉은 눈으로 흐름을 본다.

권능을 펼친다.

마력의 과잉이 연소한다.

자연발화가 더 번지기 전에 그 원인이 소멸한다.

사막의 밤이 잠시 대낮처럼 밝아진다.

사람들은 그 빛을 보며 다시 말한다.

“사막의 등불이다.”

벨카리온은 그 말을 듣는다.

이번에는 굳이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감사하다고 하면 여전히 정확하게 말한다.

“너희를 위해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잠시 뒤,
예전보다 아주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덧붙인다.

“그래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는 생각한다.”

그 두 문장은 벨카리온에게 모순되지 않는다.

아마 인간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한다고 대신 살아줄 필요는 없다.

슬퍼한다고 역사를 고칠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애착을 느끼면서도 선을 지킬 수 있다.

적어도 지금의 벨카리온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언젠가 얼마나 어려운 시험을 받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현재의 그녀에게 인간은 아직 끝난 결론이 아니다.

끝없이 모순되고,
계속 질문을 만들고,
그래서 자꾸 바라보게 되는 존재다.

벨카리온은 오늘도 그들을 이해하려 한다.

아무도 구하지 않고.

아무도 해치지 않고.

오직 세계가 타지 말아야 할 만큼 타오를 때만,
그 과잉의 불을 태워 없애면서.


MRA
마레아
무소속드래곤
“너희를 위해 파도를 낮춘 게 아니거든? 바다가 지금은 쉬어야 했을 뿐이야.”
🩸 HP400
💪 공격력89
🧙 마법력99
✨ 신비력95
🛡️ 방어력70
🔗 항마력89
😖 신비저항99
🏃 회피력80
과거 보기
마레아는 바다를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자주 그렇게 말한다.

끝이 없어서 자유롭다고.

경계가 보이지 않아서 자유롭다고.

어디로든 갈 수 있어서 자유롭다고.

마레아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바다가 왜 자유로워.”

누군가 묻는다.

“끝이 없잖아.”

“끝은 있어.”

“그래도 넓잖아.”

“넓으면 자유로운 건가.”

“파도도 마음대로 움직이고.”

그때 마레아의 하늘색 눈이 조금 가늘어진다.

“파도는 마음대로 안 움직여.”

그녀에게 바다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돌아오는 것이다.

밀려온 것이 빠져나간다.

따뜻해진 물이 이동하고,
차가운 물이 다른 자리를 채운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흐름이 언젠가 다시 위로 올라온다.

강에서 흘러온 것이 바다로 들어오고,
바다의 수분은 하늘로 올라가 다시 육지로 돌아간다.

한곳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은 없다.

그래서 바다는 살아 있다.

마레아에게 순환이란 아름다운 비유가 아니다.

세계가 스스로 회복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해룡은 그 순환이 막히지 않도록 지켜보는 존재였다.


마레아가 태어난 동쪽 바다는 처음부터 조용하지 않았다.

세레이온의 해안 밖으로 나가면 서로 다른 해류가 겹치는 구간이 많았다.

아르카대하에서 흘러나온 민물이 회귀동해와 만났다.

북쪽의 찬 물이 내려왔다.

남쪽에서 올라온 따뜻한 흐름이 부딪쳤다.

계절에 따라 수면 아래의 마나 흐름도 달라졌다.

해룡들은 그 거대한 순환을 각자 다른 구역에서 살폈다.

누군가는 심해의 압력을 보았다.

누군가는 연안의 조수를 보았다.

누군가는 먼바다의 큰 순환을 따라 수백 년씩 이동했다.

마레아는 비교적 얕은 바다를 좋아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볼 것이 많았다.

물고기 떼가 이동했다.

강물이 색을 바꾸며 바다에 섞였다.

해초 숲이 계절마다 흔들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들이 있었다.


마레아가 처음 린가트 근처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상당히 긴장했다.

해안 멀리 거대한 그림자가 돌았다.

그림자가 수면 아래로 지나갈 때마다 파도의 모양이 달라졌다.

어부들은 배를 돌렸다.

항구의 성직자들은 긴급하게 사람들을 물렸다.

누군가는 해룡이 항구를 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레아는 그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날 그녀가 한 일은 항구와 아무 관계가 없었다.

먼바다에서 따뜻한 해류가 한 지점에 지나치게 오래 정체되고 있었다.

수면의 온도와 수중 마나가 함께 상승했다.

그대로 두면 연안 전체의 순환이 뒤틀릴 수 있었다.

마레아는 다른 해룡들과 흐름을 나눠 조정했다.

한쪽을 조금 밀었다.

다른 쪽을 비웠다.

고인 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린가트 앞바다의 파도가 며칠 동안 낮아졌다.

사람들은 그것을 드래곤의 호의라고 생각했다.

마레아는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너희를 위해 파도를 낮춘 게 아니야.”

상인이 웃었다.

“그래도 덕을 봤지.”

마레아는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바다를 봤다.

“바다가 지금은 쉬어야 했을 뿐이지.”


그것이 린가트 사람들이 마레아와 처음 대화를 나눈 시기였다.

처음에는 모두가 조심했다.

먹을 것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보석을 바치는 사람도 있었다.

축복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레아는 대부분 거절했다.

“풍어를 내려주십시오.”

“안 해.”

“바다를 다스리시잖습니까.”

“순환을 본다.”

“물고기를 몰아주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할 수는 있겠지.”

“그러면...”

“안 해.”

그녀는 느린 목소리로 설명했다.

물고기 떼도 생명이다.

그들의 이동은 그들의 흐름이다.

마레아가 어부의 그물을 위해 물고기를 몰아주면,
그 순간부터 바다의 순환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계를 선택해주는 셈이 된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반대로 물었다.

“그럼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히면 막아주시겠습니까?”

마레아가 고개를 돌렸다.

“왜.”

“바다를 지키시니까요.”

“너희가 잡는 건 너희 선택이야.”

“그 때문에 물고기가 줄면요?”

마레아는 잠시 생각했다.

“물고기를 살리려고 너희 배를 뒤집지는 않아.”

상대가 당황했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십니까?”

“순환이 망가지면 흐름을 조정해.”

“그 결과 물고기가 다시 늘 수도 있잖습니까.”

“그건 결과지.”

마레아는 벨카리온보다도 이런 구분을 오래 사용해왔다.

드래곤의 권능이 향해야 할 대상은 생명이 아니다.

바다가 스스로 회복할 수 있게 만드는 흐름이다.

그 결과 누가 풍어를 얻는지.

누가 빈 그물로 돌아오는지.

어느 물고기 떼가 살아남는지는 드래곤이 결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린가트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은 마레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끈질겼다.

축복을 받을 수 없다면 말을 걸었다.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대답하자 더 자주 찾아왔다.

질문도 했다.

“해룡은 뭐 먹어?”

“여러 가지.”

“생선?”

“먹기도 해.”

“그럼 사람은?”

마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먹어.”

“드래곤이니까...”

“드래곤이면 사람을 먹는다는 건 어디서 배웠어.”

“옛날 이야기에서.”

“그 이야기 쓴 사람 데려와.”

“몇백 년 전에 죽었는데.”

마레아는 잠깐 침묵했다.

“그럼 혼낼 수가 없네.”

그날 항구 사람들은 꽤 오래 웃었다.

마레아는 왜 웃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인간을 싫어하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냥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바닷가에 집을 짓는다.

파도가 높으면 바다를 욕한다.

파도가 낮으면 자기들이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고기가 많이 잡히면 신에게 감사한다.

안 잡히면 바다를 원망한다.

조수표를 만들어놓고도 물때를 놓친다.

폭풍이 올 것 같은 날에 출항한다.

마레아는 그 모습을 보고 잔소리하기 시작했다.

“그 배 밧줄 썩었어.”

어부가 올려다봤다.

“괜찮아.”

“안 괜찮아.”

“십 년째 쓰고 있는데?”

“그래서 썩었잖아.”

“그 정도는 버텨.”

마레아가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너희는 오래 쓴 걸 튼튼하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구나.”

다음 날 그 어부는 밧줄을 바꿨다.

마레아는 만족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잔소리는 꽤 유명해졌다.

“그날 출항하지 마.”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의 운명에 직접 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누군가 배를 닦고 있으면 말했다.

“선체 밑에 균열 있어.”

“어디?”

“네가 찾아.”

“봤으면 알려주면 되잖아.”

“그 정도도 못 찾으면 바다 나가지 마.”

사람은 투덜거렸다.

마레아는 바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인간에게 생활방식을 훈계하는 것과,
그 인간의 항해 결과를 대신 결정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말은 할 수 있었다.

친구끼리 서로 조심하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해류를 움직여 그 배만 밀어주는 순간 경계를 넘는다.

마레아는 그 차이를 굉장히 고집스럽게 지켰다.


다른 해룡들은 그런 마레아를 조금 이상하게 봤다.

대부분의 해룡도 지성종과 대화할 수 있었다.

필요하면 인간의 모습으로 해안에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린가트 시장에 며칠씩 앉아 있는 마레아처럼 자주 어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느 오래된 해룡이 물었다.

“왜 그렇게 자주 올라가 있지.”

마레아는 말했다.

“시끄러워서.”

“시끄러우면 멀리 있으면 되잖아.”

“그러면 뭘 떠드는지 모르잖아.”

“왜 알아야 하지.”

마레아는 한참 생각했다.

“그냥.”

다른 해룡은 그녀를 바라봤다.

“좋아하는군.”

마레아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아니야.”

“그럼 왜.”

“관찰하는 거야.”

“조류도 그렇게 오래 관찰하지 않던데.”

마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 때문에 동료 해룡들 사이에서 먼저 ‘반항아’ 같은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마레아가 실제로 규율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간섭 원칙에는 아주 엄격했다.

다만 드래곤이 생명들과 너무 가까이 지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오래된 해룡들과 자주 부딪쳤다.

“이름을 알아봐야 무엇에 쓰나.”

“부를 때 쓰지.”

“곧 죽는다.”

“그래도 이름은 있잖아.”

“죽을 때 불편해질 뿐이다.”

마레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불편하면 안 되나.”

상대 해룡이 잠시 침묵했다.

마레아는 계속 말했다.

“권능만 안 쓰면 되잖아.”

“가까워질 이유가 없다.”

“멀어질 이유도 없지.”

그런 식이었다.

원칙은 지킨다.

하지만 원칙에 필요하지 않은 금욕까지 따를 생각은 없다.

인간과 말하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다.

선물을 받으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다.

웃으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다.

마레아는 그 점에서 꽤 완고했다.


그래서 ‘바다의 반항아’라는 이명이 붙었다.

린가트 사람들은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했다.

마레아가 자기 말을 잘 안 들었기 때문이다.

“마레아, 이거 먹어봐.”

“싫어.”

“맛있어.”

“너희가 만든 건 너무 달아.”

“지난번에 세 개 먹었잖아.”

“확인한 거야.”

“뭘?”

“세 번째도 단지.”

“그걸 보통 좋아한다고 해.”

“아니야.”

마레아는 네 번째를 받아갔다.

사람들은 웃었다.

그녀는 또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모습 때문에 항구에서 ‘바다의 반항아’라는 말은 무서운 이명보다 친근한 별명처럼 쓰이기도 했다.

마레아 본인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


선물 교환은 린가트와 마레아 사이의 이상한 관습이 되었다.

처음에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뭔가를 줬다.

조개 장식.

유리구슬.

말린 과일.

천 조각.

작은 인형.

마레아는 이유를 물었다.

“왜 주는 거야.”

“친하니까.”

“친하면 물건을 잃어야 하나.”

“잃는 게 아니라 주는 거지.”

“내 손에 있으면 네 손에는 없잖아.”

“그게 선물이야.”

마레아는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에 바다에서 주운 매끈한 푸른 돌 하나를 가져왔다.

전에 선물을 준 아이에게 건넸다.

“가져.”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나 주는 거야?”

“응.”

“왜?”

마레아가 잠시 멈췄다.

질문이 그대로 돌아왔다.

“친하니까.”

그 뒤로 그녀는 그 말을 부정하려고 한동안 애썼다.

이미 늦었다.


마레아가 주는 것은 대체로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예쁜 돌.

빈 조개껍데기.

물에 깎인 유리 조각.

이상한 모양의 산호 파편.

일부러 그렇게 골랐다.

항해에 도움이 되는 정보나,
풍어를 가져올 수 있는 물건이나,
위험한 해역을 피할 수 있는 지식 같은 것은 선물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사람의 선택과 결과를 바꿀 수 있었다.

대신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물건을 줬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래서 더 이상했다.

“이 돌은 무슨 효능이 있어?”

“없어.”

“마나가 들었어?”

“아니.”

“귀해?”

“아니.”

“그럼 왜 줘?”

마레아가 조금 짜증난 얼굴로 말했다.

“그냥 예쁘잖아.”

사람은 웃었다.

마레아는 그 웃음을 보고 더 짜증난 척했다.


마레아가 인간의 선박을 처음 가까이서 관찰한 것도 린가트였다.

그녀에게 배는 이상한 물건이었다.

바다 위에 떠 있으면서도 바다와 싸우려고 했다.

파도를 받으면 배가 기울었다.

인간들은 밧줄을 당기고 돛을 움직였다.

바람이 반대로 불면 욕했다.

마레아가 말했다.

“왜 바람한테 화내.”

선원이 대답했다.

“지금 반대로 불잖아.”

“바람은 네 목적지를 몰라.”

“알아.”

“그럼 왜 화내.”

“기분 나쁘니까.”

마레아는 잠시 생각했다.

“쓸데없는 행동이네.”

그 뒤 큰 파도가 와서 선원이 넘어졌다.

마레아가 말했다.

“봐. 바다는 네 기분에 관심 없어.”

선원이 소리쳤다.

“잔소리 말고 좀 잡아줘!”

마레아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선원은 자기가 난간을 잡고 일어났다.

그때부터 잔소리는 더 많아졌다.


그녀가 선원을 잡아주지 않은 이유는 잔인해서가 아니었다.

그 정도의 넘어짐에 드래곤의 권능을 쓸 이유도 없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생명 하나의 항해를 자신이 대신 완성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레아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

웃을 수 있다.

같이 앉아 있을 수 있다.

배의 구조가 이상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다가 거칠어졌을 때 그 배만을 위해 파도를 낮추지는 않는다.

바다가 자연스러운 순환 속에서 거칠어지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폭풍도 바다의 일부다.

거친 조수도.

배가 그것을 견디는가는 인간이 감당해야 할 문제다.

마레아가 움직이는 것은 순환 자체가 비정상적으로 막혔을 때뿐이다.


그 차이가 처음으로 정말 아프게 다가온 것은 린가트의 어부 아젠이 죽었을 때였다.

아젠은 마레아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젊을 때부터 봤다.

성격이 시끄러웠다.

마레아에게 말을 너무 많이 걸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물고기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다.

마레아가 거절하자 다음 날 다시 왔다.

“오늘은 안 물어볼게.”

“그럼 왜 왔어.”

“심심해서.”

“난 안 심심해.”

“그래도 같이 있자.”

마레아는 쫓아내지 않았다.

그 뒤로 아젠은 자주 찾아왔다.

마레아에게 린가트의 소문을 알려줬다.

자기 아이 이야기도 했다.

아내와 싸운 이야기도 했다.

마레아는 대부분 들으면서 바다만 봤다.

아젠은 그것을 대화라고 생각했다.

마레아도 나중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젠은 나이가 들어서도 배를 탔다.

마레아는 여러 번 말했다.

“이제 그만 타.”

아젠이 웃었다.

“왜?”

“느려졌어.”

“배는 내가 빨리 달릴 필요 없잖아.”

“손도 느려졌어.”

“아직 돛은 묶어.”

“눈도 전보다 안 좋아.”

“그건 원래 안 좋았어.”

마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자랑이야?”

아젠은 웃었다.

“네가 걱정해주니까 오래 살아야겠다.”

마레아는 바로 말했다.

“걱정 아니야.”

“그럼?”

“관찰 결과 알려주는 거야.”

“그래, 그래.”

아젠은 전혀 믿지 않았다.


그가 죽은 날 바다는 특별히 이상하지 않았다.

그 점이 마레아에게 중요했다.

태풍이 아니었다.

마력폭주도 없었다.

해류의 순환도 정상 범위였다.

다만 계절성 바람이 강했다.

파도가 높았다.

출항하기에 위험한 날이기는 했다.

하지만 바다가 잘못된 날은 아니었다.

아젠은 다른 어부들과 함께 나갔다.

마레아는 그 사실을 알았다.

막지 않았다.

막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아젠의 배 앞에 나타나 말할 수도 있었다.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파도를 밀어 항구로 되돌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아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마레아가 그 선택의 결말을 대신 정할 권리는 없었다.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밤이 되었다.

린가트에서 불을 밝혔다.

구조선이 나갔다.

사람들은 마레아를 찾았다.

“어디 있는지 모르십니까?”

마레아는 알고 있었다.

대략 어느 방향에서 배가 뒤집혔는지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위치를 구조대에게 알려주는 것 역시 결과를 바꾸는 개입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말할 수 없어.”

아젠의 아들이 그녀를 바라봤다.

“모르는 겁니까?”

마레아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 한마디 뒤에 침묵이 생겼다.

“아는데 안 알려주는 겁니까?”

“응.”

아젠의 아들이 그녀를 밀쳤다.

마레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마레아는 대답했다.

“내가 고르면 안 되니까.”


그 말은 그날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아젠의 가족에게는 특히 그랬다.

드래곤의 원칙.

세계의 균형.

생명들의 운명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바다에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는 가족에게 아무 위로도 되지 않았다.

아젠의 아들은 말했다.

“그렇게 친한 척해놓고.”

마레아의 표정이 굳었다.

“친한 척한 적 없어.”

본능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상대의 얼굴이 더 굳었다.

마레아는 바로 알았다.

잘못 말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렇겠지.”

아젠의 아들이 돌아섰다.

마레아는 잡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날 밤 구조선은 일부 선원을 찾았다.

아젠은 찾지 못했다.

며칠 뒤 시신이 해안으로 돌아왔다.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밀려왔다가 빠져나갔다.


마레아는 장례식에 갔다.

누구도 쫓아내지는 않았다.

반기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멀리 서 있었다.

아젠의 아들이 지나가다가 멈췄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말했다.

“아버지가 널 친구라고 했어.”

마레아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알아.”

“넌 아니었나 봐.”

마레아는 바로 부정하려 했다.

아니다.

친했다.

아젠이 죽어서 싫었다.

돌아오지 않아서 바닷가를 오래 봤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입에서 나온 것은 달랐다.

“친구라고 죽지 않는 건 아니야.”

아젠의 아들은 이를 악물었다.

“알아.”

“그러니까 지금은 그 말 듣기 싫어.”

마레아는 더 말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침묵이 친절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며칠 뒤 마레아는 아젠이 자주 앉던 방파제에 작은 푸른 돌 하나를 놓았다.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아젠이 살아 있을 때 자주 놀렸던 돌이었다.

“또 쓸모없는 돌 주냐?”

그가 웃곤 했다.

마레아는 항상 말했다.

“네가 달라고 했잖아.”

“내가 언제?”

“지난번에.”

“예쁜 거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지.”

“그게 달라는 거잖아.”

“아, 됐다.”

그런 대화를 다시 할 수 없었다.

마레아는 돌을 두고 돌아갔다.

아젠의 아들은 멀리서 그 모습을 봤지만 부르지 않았다.

마레아도 그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해결되지 않은 것이 남았다.

마레아는 그것도 인간과 가까워진 대가라고 받아들였다.


그 사건 뒤 마레아는 한동안 린가트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해류를 봐야 했다.

순환을 조정해야 했다.

다른 해룡들과도 맞춰야 했다.

다만 항구에 올라오는 횟수가 줄었다.

사람들이 말을 걸면 짧게 대답했다.

선물을 줘도 바로 받지 않았다.

“필요 없어.”

“그래도 받아.”

“너희 먹어.”

“먹는 거 아닌데.”

“그럼 보관해.”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마레아는 자기 행동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가까워지면 아프다.

아파도 도울 수 없다.

그렇다면 멀어지면 된다.

아주 단순한 결론이었다.

몇 달 동안은.


그러던 어느 날 린가트의 어린아이가 해안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아젠의 손녀였다.

마레아는 얼굴을 알고 있었다.

아젠이 살아 있을 때 몇 번 데려왔었다.

아이가 물었다.

“요즘 왜 안 와?”

마레아가 말했다.

“바빠.”

“거짓말.”

“왜 거짓말이야.”

“할아버지가 그랬어. 마레아는 바쁘다고 할 일이 없대.”

마레아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그 늙은이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어.”

“할아버지 좋아했지?”

“아니.”

대답이 너무 빨랐다.

아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

마레아는 침묵했다.

“좋아했잖아.”

한참 뒤 마레아가 말했다.

“조금.”

“많이겠지.”

“조금이야.”

“많이.”

“너도 고집 세네.”

“할아버지 닮았대.”

마레아는 그 말을 듣고 바다를 봤다.

아주 조금 웃었다.


아이는 물었다.

“할아버지 왜 안 구했어?”

마레아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 질문은 피할 수 없었다.

“내가 구하면 안 돼.”

“왜?”

“드래곤은 바다의 순환을 지키는 거야.”

“사람은 안 지켜?”

“응.”

“친구도?”

마레아는 잠시 침묵했다.

“친구도.”

아이는 한동안 모래를 발로 밀었다.

“그럼 친구 왜 해?”

마레아에게는 훨씬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녀는 오래 생각했다.

“친구는 구하려고 만드는 게 아니잖아.”

말하고 나서도 완전히 맞는 표현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아이는 말했다.

“그럼 뭐 하려고 만들어?”

마레아가 천천히 대답했다.

“같이 있는 거지.”

그 답을 내놓은 뒤 그녀 자신도 한참 생각했다.


그날 이후 마레아는 다시 린가트에 자주 나타났다.

아젠을 잃은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의 아들과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사람을 잃을 것이 두려워 아예 가까워지지 않는 것은,
비간섭 원칙과 다른 문제라는 것을 인정했다.

드래곤은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막지 못한다고 살아 있을 때의 시간을 거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만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은 더 무심해졌다.

누군가 오랜 항해에서 돌아오면 말한다.

“또 왔네.”

사람이 웃는다.

“반갑지?”

“아니.”

“거짓말.”

마레아가 시선을 돌린다.

“배 상태나 봐. 너덜너덜하잖아.”

린가트 사람들은 이제 그게 마레아식 반가움이라는 것을 안다.

마레아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해룡은 그녀에게 말했다.

“결국 다시 가까이 가는군.”

“응.”

“또 죽을 텐데.”

“알아.”

“그러면 또 힘들겠지.”

마레아는 바닷속 먼 흐름을 바라봤다.

“그것도 알아.”

“왜 반복하지.”

마레아의 대답은 느렸다.

“바다도 반복하잖아.”

밀려왔다가 간다.

빠져나갔다가 돌아온다.

따뜻해졌다가 식는다.

비가 되어 떠난 물이 다시 강을 타고 바다로 온다.

마레아에게 떠남은 끝이라는 의미와 조금 달랐다.

같은 사람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남긴 말이 다른 사람에게 남는다.

선물을 받은 아이가 또 다른 아이에게 물건을 준다.

한 늙은 어부의 농담을 손녀가 기억한다.

그 역시 일종의 순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직 그 생각을 다른 해룡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조금 부끄러웠다.


마레아가 바다의 순환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오래전의 큰 해류 이상도 영향을 주었다.

그녀가 아직 지금보다 훨씬 어린 해룡이었을 때였다.

회귀동해의 일부 수역에서 따뜻한 물이 빠져나가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상할 정도로 따뜻하고 풍요로운 바다가 되었다.

플랑크톤이 늘었다.

물고기가 몰렸다.

어부들이 좋아했다.

해안에서는 좋은 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해룡들은 다른 것을 봤다.

깊은 물이 올라오지 않았다.

산소순환이 약해졌다.

한쪽에 영양이 과도하게 모였다.

겉으로는 풍요로웠다.

안쪽에서는 흐름이 막혀 있었다.

마레아는 처음에는 그대로 두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생명도 많았다.

바다 표면도 평온했다.

그런데 오래된 해룡이 말했다.

“머문다는 것은 쌓인다는 뜻이다.”

마레아가 물었다.

“많으면 좋은 것 아닌가.”

“돌아가지 않는 것은 썩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문제가 나타났다.

깊은 곳의 산소가 줄었다.

해저 생태가 변했다.

한쪽의 영양과 마력이 과도해지자 다른 수역이 비기 시작했다.

해룡들은 함께 움직였다.

조수를 조금 바꾸었다.

깊은 흐름을 다시 끌어올렸다.

따뜻한 물이 빠져나갈 통로를 만들었다.

몇 달에 걸쳐 순환을 되돌렸다.

그 결과 표면의 풍요도 줄었다.

물고기 떼 일부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인간 어부들은 불평했다.

“예전에는 더 많이 잡혔는데.”

마레아는 처음으로 그 말을 듣고 답했다.

“너희한테 많이 잡히는 게 바다가 건강하다는 뜻은 아니야.”

그 경험 이후 그녀는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순환은 당장의 풍요보다 중요하다.

한곳에 모든 것이 몰리는 것은 축복처럼 보일 수 있지만,
되돌아갈 길이 없으면 결국 바다 전체가 병든다.


그래서 마레아는 인간이 항구를 확장할 때도 자주 잔소리를 했다.

“물길 막지 마.”

기술자가 말했다.

“방파제를 만들 뿐입니다.”

“저기까지 막으면 안쪽 물이 안 빠져.”

“계산했습니다.”

“다시 해.”

“왜요?”

“틀렸어.”

“어디가요?”

마레아는 느리게 설명했다.

계절에 따라 바람 방향이 바뀐다.

강물이 많이 들어오는 시기가 있다.

그때 방파제 안쪽의 물이 오래 고이면 순환이 늦어진다.

기술자는 계산을 다시 했다.

마레아 말이 맞았다.

그가 감사하다고 하자 마레아는 말했다.

“너희 항구 위해 말한 거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진짜로.”

“바다를 위해서죠.”

마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술자가 웃었다.

“그래도 저희 항구도 덕을 봅니다.”

마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이제 안다.

목적과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인간이 만든 모든 구조에 간섭하는 것은 아니다.

항구가 불편하게 설계되어 배가 부딪힌다.

그건 인간의 문제다.

부두의 위치가 나빠서 상인이 손해를 본다.

역시 인간의 문제다.

그 구조물이 바다의 순환 자체를 장기적으로 막기 시작할 때만 마레아의 일이 된다.

그 차이를 사람들은 종종 이해하지 못했다.

“저 방파제 때문에 배가 세 척이나 부서졌습니다.”

“고쳐.”

“마레아께서 파도를 조금 돌려주시면...”

“싫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마레아의 얼굴이 굳는다.

그 말은 지금도 아프다.

그래도 대답은 같다.

“그럼 방파제를 고쳐.”

“왜 항상 우리가...”

“너희가 만들었잖아.”

그녀는 인간이 자기 선택의 책임을 바다에게 돌리는 것을 싫어한다.

더 정확히는,
그 책임을 자신에게 넘기는 것을 경계한다.


풍어를 부탁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다.

마레아는 오래된 사람에게는 설명을 줄였다.

“안 돼.”

“이번 한 번만.”

“안 돼.”

“마을에 식량이 부족해.”

마레아의 표정이 잠시 달라진다.

“그래도.”

“물고기 떼 위치만 알려줘.”

“안 돼.”

“우리가 죽을 수도 있어.”

이번에는 침묵이 길어진다.

마레아는 그 말을 가볍게 듣지 않는다.

린가트 사람을 아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천천히 대답한다.

“너희가 굶는 게 싫어.”

상대의 눈이 조금 커진다.

마레아는 바로 시선을 돌린다.

“그런데 내가 물고기를 너희 그물로 밀면.”

“다음에는 더 많이 해달라고 하겠지.”

“다른 마을도 올 거고.”

“누구한테 줄지 내가 정하게 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건 바다 일이 아니야.”


마레아에게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척하는 것은 점점 습관이 되었다.

누군가 며칠 동안 보이지 않으면 신경 쓰인다.

그래도 만나면 말한다.

“어디 갔다 왔어.”

“걱정했어?”

“아니.”

“근데 왜 물어?”

“평소보다 조용해서.”

“그게 걱정한 거지.”

“아니라고.”

항구 사람들은 재미있어한다.

마레아는 귀찮아한다.

그런데 그 무심한 태도에는 조금 다른 이유도 있다.

너무 다정하게 굴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마레아가 우리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폭풍이 와도 도와줄 것이다.

배가 가라앉아도 구하러 올 것이다.

전쟁이 나면 항구를 보호할 것이다.

그런 믿음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녀는 그 믿음을 배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절할수록 한 발 뒤로 물러난다.


린가트에서 그 점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은 오래 살아남은 늙은 선원들이다.

어느 노선장은 젊은 선원에게 말했다.

“마레아를 구명줄로 생각하지 마라.”

젊은이가 물었다.

“그래도 우리랑 친하잖습니까.”

“그래.”

“그럼 위험하면...”

노선장이 고개를 저었다.

“안 와.”

마레아가 근처에서 듣고 있었다.

젊은 선원이 그녀를 봤다.

“진짜입니까?”

“응.”

“배가 침몰해도요?”

“응.”

“제가 빠져도?”

“응.”

젊은이는 조금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노선장이 말했다.

“그러니까 네 구명줄은 네가 묶어.”

마레아가 바로 덧붙였다.

“그리고 네 구명조끼 끈 느슨해.”

젊은이가 내려다봤다.

정말 느슨했다.

노선장이 웃었다.

“저게 마레아다.”

마레아는 못 들은 척했다.


전쟁 문제에서는 더 단호하다.

린가트가 위협받는 일이 생겨도 마레아는 항구 방어를 맡지 않는다.

세레이온의 해군을 위해 조수를 바꾸지 않는다.

적 함대가 와도 그 배들을 침몰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린가트 선박이 적국의 배를 추격할 때 도와주지도 않는다.

어느 장교가 말했다.

“해류를 조금만 바꾸면 적이 후퇴할 수 있습니다.”

마레아가 대답했다.

“그럼 내가 전쟁을 하는 거잖아.”

“린가트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알아.”

“여기 사람들과 친하시잖습니까.”

마레아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그래.”

장교가 희망을 가진 얼굴을 했다.

마레아는 바로 말했다.

“그래도 안 해.”

친함과 개입은 같은 말이 아니다.

마레아는 그 구분을 누구보다 아프게 배웠다.


한 번은 실제 해전 중 거대한 해류 이상이 발생했다.

수많은 마법이 바다 위에서 충돌했다.

물 원소술이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선박들이 넓은 구역에서 마력장을 펼쳤다.

그 결과 기존 전투와 무관하게 심층 해류의 흐름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마레아와 다른 해룡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함대를 공격하지 않았다.

돛을 찢지 않았다.

선체를 뒤집지 않았다.

사람이 사용하는 마법을 직접 끊지도 않았다.

대신 전투 아래 깊은 곳에서 막히기 시작한 흐름을 다시 연결했다.

차가운 물이 올라왔다.

과잉된 물 원소의 밀도가 분산되었다.

뒤틀렸던 조수의 주기가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배는 유리한 흐름을 얻었다.

어떤 배는 반대로 불리해졌다.

해룡들은 그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바다가 돌아가는 것만 봤다.


전투가 끝난 뒤 승리한 쪽에서는 말했다.

“해룡들이 우리를 도왔다.”

패한 쪽에서는 말했다.

“해룡들이 적을 도왔다.”

마레아는 양쪽 말을 듣고 짜증을 냈다.

“둘 다 아니야.”

사람이 말했다.

“하지만 해류가 바뀐 뒤 전세가...”

“바다가 망가지고 있었어.”

“그 결과 저희가 이겼습니다.”

“그건 너희 결과야.”

“그럼 책임이 전혀 없다는 겁니까?”

마레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 질문은 어렵다.

드래곤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도 결과는 생명에게 닿는다.

완전히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영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목적 삼지 않는 것이라고 마레아는 생각한다.

“내가 고른 건 바다의 상태야.”

천천히 말했다.

“누가 이길지는 고르지 않았어.”


이런 일 때문에 그녀는 다른 해룡들과도 자주 긴 논의를 한다.

어느 해룡은 인간 항구와 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레아가 인간과 가까이 지내는 것 자체가 판단을 흔들 수 있다고.

마레아도 그 우려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젠이 죽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흔들렸는지 기억한다.

린가트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면 평소보다 더 자주 그쪽을 바라보는 것도 안다.

그러나 답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멀리 있다고 공정해지는 건 아니야.”

다른 해룡이 물었다.

“그럼 가까이 있을 이유는.”

마레아가 말했다.

“좋으니까.”

상대가 잠시 멈췄다.

마레아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바다가.”

급하게 덧붙였다.

상대 해룡이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다.”

마레아는 한동안 그 해룡과 말을 하지 않았다.


마레아에게 비간섭은 냉담함이 아니다.

오히려 친밀함 때문에 더 필요해진 제한이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는 것보다,
좋아하는 사람의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는 쪽이 훨씬 어렵다.

그럼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

그렇지 않으면 친밀함이 특권이 된다.

마레아와 친한 사람은 살아남고,
모르는 사람은 죽는다.

선물을 많이 준 항구는 파도가 낮아지고,
그렇지 않은 항구는 폭풍을 견뎌야 한다.

그 순간 드래곤의 친밀함은 정치가 된다.

마레아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물을 받을수록 오히려 말한다.

“이거 줬다고 파도 낮춰달라고 하지 마.”

사람이 웃는다.

“안 해.”

“진짜로.”

“알았어.”

“물고기도 안 몰아줘.”

“그것도 알아.”

“배도 안 밀어줘.”

“마레아.”

“왜.”

“그냥 선물이야.”

마레아는 그 말을 들으면 조금 조용해진다.


린가트 사람들은 그래서 마레아에게 부탁보다 소식을 가져오는 법을 배웠다.

이번 항해는 어땠는지.

누가 결혼했는지.

누구 아이가 태어났는지.

누가 늙어서 배를 내려왔는지.

새로운 요리가 생겼는지.

항구의 어느 집이 없어졌는지.

마레아는 그런 이야기를 의외로 잘 기억한다.

누군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십 년 뒤 그 자식을 만나면 말한다.

“네 아버지가 젊을 때 돛 매듭 못 묶었어.”

자식이 웃는다.

“아버지는 자기가 제일 잘했다고 했는데요.”

“거짓말이네.”

“증거 있어요?”

“내가 봤어.”

“백 년 전 일도 기억합니까?”

마레아가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말한다.

“백 년밖에 안 됐잖아.”

그 말을 듣는 인간은 늘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마레아는 그제야 상대에게는 백 년이 얼마나 긴지 다시 떠올린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에게 시간을 훈계하는 버릇도 생겼다.

“너희는 너무 늦게 고쳐.”

“뭘?”

“배.”

“아직 쓸 만해.”

“너희 수명 짧다며.”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짧으면 더 빨리 고쳐야지.”

“보통 반대 아니야?”

마레아는 이해하지 못한다.

“왜.”

“돈도 모아야 하고...”

“죽으면 더 비싸잖아.”

그녀의 논리는 단순하다.

인간은 짧게 산다.

그러면서 왜 안전장비를 아끼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 바다를 오래 상대해온 노인의 말을 젊은 선원이 무시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노인이 틀리고 젊은 선원이 맞는 날이 오면 또 혼란스러워한다.

“오래 살았는데 왜 틀렸지.”

사람이 대답한다.

“오래 산다고 다 맞는 건 아니니까.”

마레아는 조금 불편한 얼굴로 그 말을 기억한다.

자기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무심한 태도가 깨지는 순간도 있다.

린가트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 육지에서 병으로 죽었을 때였다.

바다와 관계없는 죽음이었다.

마레아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장례 뒤 가족이 찾아와 작은 나무상자를 건넸다.

“이걸 마레아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마레아가 열었다.

안에는 오래전 그녀가 주었던 조개껍데기가 있었다.

그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보관한 것이었다.

마레아가 말했다.

“왜 돌려줘.”

“돌려드리는 게 아니라.”

유족이 미소를 지었다.

“다시 선물하는 거래요.”

마레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은 물건인데.”

“그래도 의미가 달라졌다고 하셨습니다.”

마레아는 상자를 닫았다.

그날은 친절을 부정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조개껍데기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마법도 없다.

바다의 흐름을 조절하는 힘도 없다.

아무런 기능이 없다.

그런데 버리지 않는다.

마레아는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이 물으면 말한다.

“그냥 오래됐어.”

“그래서?”

“버리기 귀찮아.”

린가트 사람들은 역시 믿지 않는다.

마레아도 이제 그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같은 말을 한다.

그게 편하다.

자신이 사람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너무 분명하게 말하면,
언젠가 그들을 구하지 않는 순간 자신이 더 잔인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말하지 않는다고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래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가 만든 작은 방어선이다.


아젠의 아들과는 아주 오래 지나서 다시 제대로 이야기했다.

그도 늙었다.

어느 날 방파제 끝에서 혼자 낚싯줄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레아가 옆에 앉았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그가 먼저 말했다.

“그날 내가 한 말 기억해?”

“응.”

“미안하다고는 안 할 거야.”

마레아가 말했다.

“안 해도 돼.”

“아직도 이해는 안 돼.”

“알아.”

“아버지 위치를 알았는데 왜 말 안 했는지.”

“응.”

그는 낚싯줄을 바라봤다.

“그래도 요즘은 조금 알 것 같기도 해.”

마레아가 그를 봤다.

“뭘.”

“네가 한 사람씩 골라 구하기 시작하면...”

그가 웃었다.

“린가트 사람들이 제일 먼저 매일 널 찾아갔겠지.”

마레아가 말했다.

“너희는 분명 그랬을 거야.”

“맞아.”


그가 물었다.

“그래도 슬펐어?”

마레아는 아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이라면 부정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응.”

그 한마디뿐이었다.

아젠의 아들은 한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다.”

마레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거면 되지.”

노인이 웃었다.

“그건 네가 좀 더 살아봐.”

마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너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

“사람 상대하는 건 내가 더 오래 했잖아.”

마레아는 반박하려다가 멈췄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날 이후 둘의 관계는 예전과 같아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침묵만 남지는 않았다.


마레아는 그 일을 통해 한 가지를 배웠다.

비간섭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가 아니다.

사람이 자기 선택 때문에 마레아를 미워할 수 있다.

그 감정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드래곤에게 원칙이 있듯,
아버지를 잃은 아들에게도 분노할 이유가 있다.

마레아는 자기 원칙을 바꾸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대에게 이해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예전에는 말했다.

“그건 네가 이해 못 하는 거야.”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이해 못 해도 돼.”

그 뒤에 가끔 덧붙인다.

“나도 너희 이해 못 할 때 많아.”

린가트 사람들은 그 말을 들으면 웃는다.

마레아는 왜 웃는지 이제 대충 안다.


다른 해룡들과 조수를 조정할 때의 마레아는 인간과 이야기할 때보다 훨씬 말이 적다.

바다 아래에서는 언어보다 흐름이 더 중요하다.

밀물의 높이.

심층수의 방향.

압력.

수온.

물 원소 마나의 농도.

어느 해룡이 동쪽 흐름을 열면,
마레아가 남쪽을 조금 늦춘다.

다른 해룡이 깊은 층을 들어 올리면,
그녀가 연안에서 빠져나가는 통로를 넓힌다.

그들의 역할은 물을 원하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다.

막힌 흐름을 다시 흐르게 하는 것이다.

마레아는 그 순간 가장 편안하다.

바다는 사람보다 단순하기 때문이다.

밀려온 것은 나가야 한다.

찬 것은 내려가고,
따뜻한 것은 올라오거나 이동한다.

흐르면 산다.

막히면 병든다.

사람은 왜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지 아직도 이해하기 어렵다.


린가트의 한 성직자가 마레아에게 물은 적이 있다.

“바다는 왜 계속 돌아옵니까?”

마레아가 말했다.

“안 돌아오면 바다가 아니니까.”

“조금 더 철학적인 답을 기대했습니다.”

“그게 답인데.”

“생명도 그런 순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마레아는 잠시 생각했다.

“생명은 내가 맡은 게 아니야.”

성직자가 웃었다.

“역시 그렇게 말씀하시는군요.”

마레아는 바다를 바라봤다.

조금 뒤 천천히 말했다.

“그래도 흔적은 돌아오더라.”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한테 들은 말을 자식이 하고.”

“내가 준 걸 손자가 들고 오고.”

“그런 거.”

성직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마레아가 덧붙였다.

“그걸 생명 순환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어.”

“난 물이나 볼 거야.”

괜히 말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여전히 인간의 죽음에 익숙하지 않다.

사백 년 동안 많은 사람을 봤다.

많이 늙었다.

많이 죽었다.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 아이들도 나이를 먹었다.

마레아는 반복해서 경험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름이 쌓일수록 더 복잡해졌다.

린가트의 어느 골목을 보면 예전에 살던 사람이 떠오른다.

어느 선착장을 보면 백 년 전 그곳에서 싸우던 형제가 생각난다.

시장 한쪽에서는 옛날에 받았던 과자의 냄새가 난다.

마레아는 그런 기억을 굳이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녀가 무심하다고 생각한다.

그 편이 낫다고 여긴다.

드래곤에게 사랑받는다는 말이 보호받는다는 뜻으로 바뀌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마레아는 결국 린가트를 지켜주는 거잖아.”

그 말을 들으면 반드시 정정한다.

“아니야.”

“그래도 몇백 년 동안 여기 있잖아.”

“바다 때문에.”

“우리랑도 놀잖아.”

“놀지는 않아.”

“선물도 주고.”

“쓸모없는 것만.”

“걱정도 하고.”

“잔소리야.”

“그게 걱정이야.”

마레아는 표정을 굳힌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말한다.

“내가 너희를 좋아한다고 해서 바다가 너희 편이 되는 건 아니야.”

그 문장을 린가트 사람들도 점점 배우고 있다.

마레아와 친한 항구.

그것은 맞다.

마레아가 보호하는 항구.

그건 아니다.


현재의 마레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사람들이 두 문장을 섞는 것이다.

‘마레아가 우리를 아낀다.’

‘그러므로 마레아가 우리를 구할 것이다.’

첫 번째는 이제 부정하기 조금 어려워졌다.

두 번째는 분명히 틀렸다.

그 차이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더 무심하게 말할 때도 있다.

항해에서 돌아온 사람이 말한다.

“이번에 죽을 뻔했어.”

마레아의 눈이 잠시 그 사람의 상처를 본다.

“그러게 장비 점검하랬잖아.”

“걱정했지?”

“안 했어.”

“거짓말.”

마레아가 고개를 돌린다.

“다음에는 밧줄부터 바꿔.”

그 사람이 웃는다.

마레아는 그 웃음이 살아 있는 사람이 내는 소리라는 사실에 아주 조금 안도한다.

그 사실도 말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친밀함은 이제 하나의 시험이다.

사람을 모르고 있을 때 비간섭은 쉽다.

이름을 알고 나면 어렵다.

가족을 알고 나면 더 어렵다.

그 사람이 어릴 때부터 늙을 때까지 지켜본 뒤에는 더 어렵다.

그래도 원칙은 그대로여야 한다.

마레아는 그 점에서 자신이 고집스럽다는 것을 인정한다.

누군가 말한다.

“한 번만 예외로 하면 되잖아.”

마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예외 하나가 기준이 돼.”

“그럼 평생 한 번도?”

“응.”

“너 자신이 죽게 돼도?”

마레아의 하늘색 눈이 상대를 본다.

“그것도 내 사정이지.”

자기 생존 역시 생명들의 운명에 권능을 사용할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바다는 드래곤의 목숨을 위해 흐르는 것이 아니다.


마레아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인간의 배를 뒤집는다면,
그 순간 자신도 바다를 개인적인 무기로 사용한 셈이다.

자기 몸을 지키려고 해류를 바꾸어 추격선을 침몰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필요하다면 도망칠 수는 있다.

숨을 수도 있다.

대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권능으로 살아 있는 존재나 그들의 도구의 운명을 꺾지는 않는다.

그 기준은 자신의 친구에게도,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같다.

그 원칙이 있기 때문에 린가트와 가까이 지낼 수 있다고 오히려 생각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기적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선물 하나를 받아도 정치적 의미를 만들지 않을 수 있다.

친밀함을 권력으로 바꾸지 않는 것.

그것이 마레아가 지키려는 또 하나의 순환이다.


최근 린가트의 아이 하나가 그녀에게 물었다.

“마레아는 바다가 좋아, 우리가 좋아?”

마레아는 즉시 말했다.

“바다.”

아이가 입을 삐죽였다.

“조금도 고민 안 하네.”

마레아가 아이를 봤다.

“질문이 이상해.”

“왜?”

“너희를 좋아하는 거랑 바다를 지키는 건 비교할 게 아니야.”

아이가 눈을 깜빡였다.

마레아는 천천히 설명했다.

“바다는 내가 맡은 거고.”

잠시 멈췄다.

“너희는...”

그 다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아이가 기다렸다.

마레아는 시선을 돌렸다.

“귀찮은 애들이지.”

아이가 웃었다.

“좋아한다는 거네.”

“아니야.”

“맞네.”

“너도 참 말 안 들어.”

“마레아도.”

그런 식으로 ‘바다의 반항아’라는 별명은 다음 세대에게도 이어졌다.


마레아는 인간을 아직 어떤 결론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벨카리온처럼 인간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분석하려고 달려들지는 않는다.

마레아는 조금 더 조용히 본다.

같은 부두에서 서로 싸우던 사람들이 다음 날 함께 배를 고친다.

바다를 저주한 어부가 풍어가 오면 다시 바다에 절한다.

아버지를 잃고 마레아를 미워했던 사람이 늙은 뒤 다시 그녀와 같은 방파제에 앉는다.

한 세대가 준 선물이 다음 세대를 거쳐 돌아온다.

그런 것을 본다.

그리고 바다와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사람도 항상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멀어졌다가 돌아온다.

미워했다가 다시 말을 건다.

잊었다고 생각한 것을 자식에게 전한다.

마레아는 그 점을 꽤 좋아한다.

물론 말하지 않는다.


현재의 린가트에서 마레아는 드래곤이면서도 꽤 익숙한 풍경이다.

어느 날은 방파제에 앉아 있다.

어느 날은 시장 외곽에서 사람들이 준 음식을 먹는다.

어느 날은 아이들에게 산호 모양 뿔을 만지지 말라고 잔소리한다.

“왜?”

“싫으니까.”

“한 번만.”

“싫어.”

“진짜 한 번만.”

“손 치워.”

그리고 다음 날 같은 아이가 또 온다.

마레아도 또 온다.

그 관계에는 계약도 없다.

보호 약속도 없다.

누가 누구의 운명을 책임진다는 선언도 없다.

그냥 계속 만난다.

마레아는 그런 관계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린가트에서 배웠다.


하지만 바다의 흐름이 이상해지는 순간에는 태도가 달라진다.

하늘색 눈이 먼 수평선을 본다.

다른 해룡들의 움직임을 느낀다.

깊은 곳의 찬 물이 예상보다 오래 갇혀 있다.

조수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수중 마나가 특정 해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마레아는 조용히 바다로 들어간다.

누군가 묻는다.

“어디 가?”

“일.”

“위험한 거야?”

“너희 기준으로는 모르겠어.”

“파도 높아져?”

“그럴 수도.”

사람이 불안한 얼굴을 한다.

마레아가 잠깐 멈춘다.

예전보다 조금 더 친절하게 말한다.

“바다 상태 확인해.”

“내가 있다고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말만 남기고 들어간다.


수면 아래에서 마레아는 다른 해룡들과 만난다.

말은 거의 필요 없다.

하나가 흐름을 열고,
다른 하나가 압력을 받는다.

마레아는 연안의 순환이 어디에서 막혔는지 본다.

그리고 바다가 다시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만 조정한다.

지나치게 밀지 않는다.

완전히 잔잔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파도가 있는 것이 정상이라면 파도는 남는다.

폭풍이 자연스러운 순환의 일부라면 폭풍도 남는다.

드래곤은 바다를 인간에게 편리한 형태로 만드는 존재가 아니다.

바다가 바다로 남도록 하는 존재다.

마레아는 그 사실을 한 번도 잊지 않는다.

린가트의 불빛이 수면 위로 보이더라도.

그곳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살더라도.


일이 끝난 뒤 마레아가 돌아오면 사람들이 묻는다.

“파도 좀 낮아졌네.”

마레아가 대답한다.

“응.”

“우리 때문에?”

“아니.”

“알아. 그냥 물어봤어.”

“바다가 지금은 쉬어야 했던 거야.”

그 말을 이제 린가트 사람들도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아이는 마레아보다 먼저 따라 말한다.

“우리를 위해 한 거 아니고, 바다가 쉬어야 해서 그런 거지?”

마레아가 아이를 본다.

“잘 아네.”

아이가 웃는다.

“그래도 고마워.”

마레아가 잠시 침묵한다.

예전이라면 목적이 다르다고 다시 설명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말한다.

“그래.”

그리고 조금 뒤 덧붙인다.

“내일 파도 높으면 괜히 나 찾지 말고.”

역시 마지막은 잔소리다.


마레아는 아직도 자신이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졌는지 가끔 생각한다.

아젠 같은 일이 다시 생길 것이다.

분명하다.

지금 알고 지내는 사람도 늙는다.

어느 배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느 아이는 병으로 죽을 것이다.

전쟁에 휘말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마레아는 그때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도 계속 이름을 배운다.

선물을 받는다.

잔소리를 한다.

항구에 앉는다.

그 모순을 완전히 해결할 생각은 없다.

어쩌면 해결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바다도 밀물과 썰물 중 하나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둘이 있어야 순환이 된다.

마레아에게 친밀함과 비간섭도 어쩌면 그런 것일 수 있다.

가까이 있으면서 대신 살지 않는다.

아끼면서 운명을 고르지 않는다.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죽음을 막기 위해 권능을 쓰지 않는다.

둘을 동시에 지킨다.


누군가는 그것을 잔인하다고 부를 것이다.

누군가는 위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마레아는 예전 같으면 길게 반박했을 것이다.

요즘은 그냥 말한다.

“그렇게 생각해도 돼.”

상대가 놀란다.

“화 안 나?”

“조금.”

“근데 왜.”

“내가 너한테 이해하라고 명령할 수도 없잖아.”

그녀는 자신의 원칙을 지킨다.

상대 역시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가질 권리가 있다.

드래곤의 비간섭은 행동뿐 아니라 그 부분까지 포함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자기를 오해하면 설명할 수 있다.

그래도 미워한다면 받아들인다.

그 미움 때문에 파도를 높이지도 않는다.

그 사랑 때문에 낮추지도 않는다.

바다는 계속 돌아간다.


마레아가 가장 오래 들고 다니는 물건 중에는 아젠에게서 받은 작은 낚싯바늘 하나가 있다.

사용하지 않는다.

드래곤에게 낚싯바늘은 필요 없다.

녹이 조금 슬었다.

가끔 사람들이 물어본다.

“그거 왜 가지고 있어?”

마레아는 대답한다.

“버리기 귀찮아서.”

“몇십 년째?”

“몇십 년밖에 안 됐어.”

“그게 귀찮아서 못 버릴 기간이야?”

마레아가 상대를 노려본다.

“너 질문 많다.”

그 사람은 웃는다.

마레아도 속으로는 알고 있다.

낚싯바늘을 버리지 않는 이유.

조개를 보관하는 이유.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

그것들을 인정한다고 자신의 원칙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조금 늦게 배웠을 뿐이다.


어느 날 린가트의 젊은 선원이 물었다.

“마레아.”

“왜.”

“우리가 전부 없어져도 여기 있을 거야?”

마레아는 그 질문을 듣고 아주 오래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가 있으면.”

먼저 그렇게 대답했다.

선원이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바다가 먼저네.”

마레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선원이 그녀를 봤다.

“너희 기억은 하겠지.”

마레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조용했다.

느렸다.

“여기 누가 살았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뭘 줬는지.”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마지막에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특히 그건 오래 기억할 거야.”

선원이 웃었다.

마레아는 이번에는 웃는 이유를 안다.


마레아에게 바다는 되돌아오는 흐름이다.

하지만 같은 물방울이 반드시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같은 파도가 다시 오는 것도 아니다.

형태는 달라진다.

그래도 순환은 이어진다.

그녀는 인간과 지내며 조금 비슷한 것을 보기 시작했다.

사람은 죽는다.

같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말이 남는다.

습관이 남는다.

선물이 남는다.

기억이 다른 사람에게 건너간다.

마레아는 그것을 드래곤의 권능으로 지키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다.

그저 자기가 기억할 수 있는 만큼 기억한다.

그것이 그녀가 생명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구조가 아니다.

축복도 아니다.

운명을 바꾸는 기적도 아니다.

그냥 기억이다.


현재의 마레아는 린가트 근처 바다를 떠날 생각이 별로 없다.

바다의 흐름이 이곳을 지나기 때문이다.

다른 해룡들과 맞춰야 할 순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린가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유를 직접 말하면 반드시 부정한다.

“그건 아니야.”

사람들이 웃는다.

“맞잖아.”

“아니라니까.”

“그럼 왜 매번 시장 와?”

“너희가 바다에 이상한 거 버리는지 보려고.”

“어제는 과자 먹으러 왔잖아.”

“맛 확인.”

“세 개 먹었는데?”

“표본이 많아야 정확해.”

마레아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완고함까지 포함해서 린가트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한다.

마레아도 그들을 좋아한다.

물론 물으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또 배 한 척이 먼바다로 나간다.

마레아가 방파제에서 본다.

선원이 손을 흔든다.

“다녀올게!”

마레아는 손을 흔들지 않는다.

대신 말한다.

“돛줄 다시 확인해.”

멀리서 대답이 온다.

“했어!”

“두 번 해.”

“했어!”

“거짓말 같은데.”

선원들이 웃는다.

배는 점점 멀어진다.

마레아는 그 배가 돌아올지 알지 못한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생겨도 그것을 결과를 바꾸기 위한 권능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폭풍이 온다고 해서 그 배만을 위해 파도를 낮추지도 않는다.

배가 가라앉는다고 해서 해류로 항구까지 밀어주지도 않는다.

그것이 마레아가 선택한 선이다.

그래도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본다.

그 정도는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며칠 뒤 배가 돌아오면,
항구 사람들이 소리친다.

마레아는 여전히 방파제에 앉아 있다.

선원이 뛰어내려온다.

“마레아! 살아서 왔다!”

마레아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보여.”

“걱정했지?”

“아니.”

“또 거짓말.”

마레아는 그 사람의 낡은 장갑과 젖은 외투를 본다.

다친 곳이 없는 것도 확인한다.

그리고 느리게 말한다.

“다음엔 출항 전에 밧줄 세 번 봐.”

“두 번이라며.”

“너는 세 번 해야겠어.”

선원이 웃는다.

마레아는 시선을 바다로 돌린다.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남아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친절이라고 부른다.

마레아는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은 걱정이라고 부른다.

마레아는 잔소리라고 한다.

사람들은 애착이라고 부른다.

마레아는 오래 침묵한다.

이제는 완전히 부정하지 못한다.

다만 하나만은 언제나 분명하게 말한다.

“좋아한다고 너희 운명이 내 것이 되는 건 아니야.”

그것이 현재의 마레아가 린가트와 맺은 가장 가까운 약속이다.

보호의 약속이 아니다.

구조의 약속도 아니다.

전쟁에서 편이 되어주겠다는 약속도 아니다.

가까이 있어도 지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아끼면서도 선택을 빼앗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마레아는 바다의 순환을 지킨다.

사람은 사람의 삶을 산다.

그 둘이 같은 해안에서 오래 나란히 존재할 수 있도록,
그녀는 오늘도 밀려온 것이 다시 나갈 길만을 살핀다.

그리고 누군가 그 덕분에 무사히 항구로 돌아왔다고 감사하면,
언제나처럼 조금 무심한 얼굴로 대답한다.

“너희를 위해 파도를 낮춘 게 아니야.”

잠깐 바다를 본다.

“바다가 지금은 쉬어야 했을 뿐이지.”

그러다 상대가 돌아서기 직전,
아주 작게 한마디를 더 붙인다.

“...그래도 돌아왔으면 됐어.”

그리고 누가 그 말을 들었다고 지적하면,
마레아는 끝까지 아니라고 우길 것이다.


RDS
레다스
프라그모정지의숲 · 드래곤
“죽는 건 흐름이야. 하지만 멈춰버리는 건 달라.”
🩸 HP400
💪 공격력85
🧙 마법력85
✨ 신비력95
🛡️ 방어력99
🔗 항마력85
😖 신비저항99
🏃 회피력50
과거 보기
레다스는 겨울이 시작되는 순간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움직이던 것이 조금씩 느려지는 순간을 좋아했다.

강물이 얇은 얼음을 두르기 시작하고,
나뭇가지의 수분이 차갑게 굳고,
짐승들의 발소리가 눈에 묻혀 작아지는 시간.

세상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주 느려졌다.

그 느림 속에서 레다스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처음 정지의숲에 머물기 시작했을 때,
그곳에는 특별히 볼 것이 많지 않았다.

적어도 인간의 기준으로는 그랬다.

낮은 언덕.

침엽수.

얼어붙은 늪.

겨울이면 하얗게 덮이는 평범한 숲.

하지만 레다스에게는 달랐다.

그 숲의 냉기맥류는 이상할 정도로 느렸다.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느렸다.

마치 아주 깊은 잠 속에서 숨 쉬는 것처럼.

레다스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머물렀다.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니었다.

영토를 차지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고 싶었다.

얼마나 느려질 수 있는지.

어디까지 느려져도 흐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정지의숲에는 사람이 살았다.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나무를 베었다.

불을 피웠다.

사냥했다.

죽었다.

아이를 낳았다.

다시 죽었다.

레다스에게는 숲의 다른 생명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슴이 오고 가는 것.

새가 둥지를 만들고 떠나는 것.

사람이 집을 짓고 무너뜨리는 것.

그 모두가 같은 풍경 안에 있었다.

어느 날 한 주민이 그녀를 발견했다.

커다란 얼음바위 위에 앉아 숲을 내려다보고 있던 레다스를 보고,
겁에 질린 채 물었다.

“드래곤입니까?”

레다스가 대답했다.

“응.”

“왜 여기 계십니까?”

“보고 있어.”

“뭘요?”

레다스는 숲을 가리켰다.

“이거.”

주민은 한참 기다렸다.

더 설명은 없었다.


그 뒤로 사람들은 레다스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친해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레다스는 먼저 찾아가지 않았다.

마을 축제에도 관심이 없었다.

누가 결혼해도 축하하지 않았다.

누가 죽어도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을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맞았다.

한 노인이 눈사태에 휩쓸렸을 때,
마을 사람들이 레다스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당신이라면 얼음을 멈출 수 있잖습니까.”

레다스가 눈사태가 내려간 골짜기를 보았다.

“이미 끝났어.”

“사람이 묻혔습니다.”

“알아.”

“그럼 도와주십시오.”

레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가 해야 해.”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레다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흘러온 눈이었다.

사람이 그 아래에 있었다.

그것은 비극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드래곤이 끼어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묻힌 노인은 구조되지 못했다.

며칠 뒤 시신이 발견되었다.

마을 사람 일부는 레다스를 미워했다.

그녀는 그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죽인 게 아니잖아.”

누군가가 말했다.

“살릴 수 있었잖습니까.”

레다스가 대답했다.

“그게 같은 말이야?”

상대는 화를 냈다.

레다스는 정말 궁금했다.

죽인 것과 살리지 않은 것은 같은가.

살릴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살려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숲의 모든 사슴이 죽을 때마다 구해야 하는가.

얼어 죽는 새도?

병든 나무도?

사람만 특별한가.

그녀는 답을 몰랐다.

그래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아르셀을 처음 본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는 다른 주민들과 달리 레다스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저 가끔 찾아왔다.

얼음바위 아래에 앉았다.

혼자 이야기했다.

“오늘 숲 남쪽에서 순록 떼가 올라왔어.”

레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봤어.”

“역시 봤구나.”

잠시 침묵.

“동쪽 개울은 얼었더라.”

“응.”

“두께가 어느 정도야?”

“네가 빠지면 죽을 정도.”

아르셀이 웃었다.

“그건 정보가 좀 부족한데.”

레다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죽는지 안 죽는지 알려줬잖아.”

그런 대화가 반복됐다.


아르셀은 레다스에게 질문을 많이 했다.

왜 얼음은 어떤 곳에서 먼저 생기는지.

왜 어느 겨울은 유난히 길고,
어느 겨울은 금방 끝나는지.

레다스는 아는 것은 대답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했다.

“드래곤도 모르는 게 있어?”

“왜 없어?”

“그냥 다 알 줄 알았지.”

“이상하네.”

“뭐가?”

“너희는 모르는 게 많으면서 남도 다 알 거라고 생각해.”

아르셀은 한참 웃었다.

그런 식으로 둘은 가까워졌다.

레다스는 그걸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아르셀이 자주 오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레다스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누가 사냥꾼인지.

누가 약초를 캐는지.

누가 숲에서 길을 자주 잃는지.

누가 겨울이 오기 전에 장작을 너무 적게 준비하는지.

예전에는 전부 풍경이었다.

이제는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보였다.

어느 날 아르셀이 말했다.

“넌 사람한테 관심 없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네.”

레다스가 대답했다.

“숲을 보고 있어.”

“우리도 숲에 사는데.”

“그러니까.”

“그럼 우리도 보는 거잖아.”

레다스가 잠깐 생각했다.

“그렇네.”


몇 년 뒤,
정지의숲 북쪽에서 이상한 냉기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겨울이 조금 빨리 온 정도로 보였다.

처음에는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레다스도 그랬다.

추운 것은 자연스러웠다.

정지의숲은 원래 추웠다.

하지만 며칠 뒤 이상한 점이 보였다.

얼음이 녹지 않았다.

낮에 햇빛이 들어도 그대로였다.

강물의 표면만 어는 것이 아니었다.

물속의 흐름 자체가 느려졌다.

나무의 수액도 멈췄다.

작은 정령들이 한 장소에 오래 머물렀다.

새들은 날아가지 않았다.

레다스는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겨울이 아니었다.


아르셀이 찾아왔다.

“이번 겨울 이상하지?”

“응.”

“위험해?”

레다스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땅에 손을 댔다.

냉기맥류를 느꼈다.

흐르고 있었다.

아주 조금.

너무 조금.

“느려.”

“겨울이니까?”

“아니.”

레다스가 고개를 들었다.

“멈추려고 해.”

아르셀이 얼굴을 굳혔다.

“그게 무슨 뜻이야?”

레다스가 말했다.

“나도 싫다는 뜻.”

그 말이 사람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경고가 되었다.


숲의 북쪽 깊은 곳에서는 냉기맥류가 서로 얽혀 있었다.

흐름이 좁은 지점 하나에 과도하게 몰렸다.

냉기가 빠져나가지 못했다.

차가움이 더 차가움을 붙잡았다.

마치 얼음이 자기 자신을 얼리는 것처럼.

그 상태가 계속되면 숲 전체의 변화가 멈출 수 있었다.

강은 얼어붙는 것이 아니라 흐르지 않게 된다.

나무는 겨울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다음 계절로 넘어가지 못한다.

죽음조차 느려진다.

썩어야 할 것이 썩지 않는다.

녹아야 할 눈이 녹지 않는다.

태어나야 할 것이 나오지 않는다.

레다스는 그 상태를 보고 오래 침묵했다.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소리가 줄었다.

움직임도 줄었다.

모든 것이 조용했다.

그녀가 좋아하던 상태와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아르셀이 물었다.

“좋아 보여?”

레다스가 고개를 돌렸다.

“왜?”

“네 표정.”

“편해.”

아르셀이 잠시 말을 잃었다.

레다스가 덧붙였다.

“그래서 문제야.”

“무슨 뜻인데?”

레다스는 얼어붙은 숲을 바라봤다.

“내가 좋아한다고 좋은 건 아니니까.”

그날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의 본능과 세계의 흐름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했다.


사람들은 마을부터 구해달라고 했다.

레다스는 거절했다.

“마을만 녹이면 안 돼.”

“사람들이 얼어 죽습니다.”

“알아.”

“그런데 왜?”

레다스는 북쪽을 가리켰다.

“저걸 먼저 풀어야 해.”

“시간이 없습니다.”

“마을만 녹이면 다시 얼어.”

“그래도 지금 사람은 살릴 수 있잖습니까.”

레다스가 말했다.

“잠깐.”

상대가 화를 냈다.

“잠깐이라도 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레다스는 그 문장을 오래 기억했다.

자신에게 잠깐은 짧았다.

인간에게는 달랐다.

그날 레다스는 처음으로 시간의 길이도 생명마다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녀는 결국 마을의 불을 키우지 않았다.

개별 주민의 몸을 데우지도 않았다.

대신 냉기맥류가 막힌 북쪽으로 갔다.

얼음 속에 손을 넣었다.

차가움을 없애지 않았다.

냉기를 다른 방향으로 흘렸다.

겹겹이 눌려 있던 흐름을 갈라놓았다.

한꺼번에 움직이면 반대로 폭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풀었다.

하루.

이틀.

사흘.

사람들에게는 긴 시간이었다.

레다스에게는 짧았다.

마을에서는 몇 사람이 동상에 걸렸다.

가축도 죽었다.

한 노인은 밤을 넘기지 못했다.

레다스는 그 사실을 들었다.

그래도 손을 더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흐름이 부서지면 숲 전체가 더 위험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흘째 밤,
얼음 아래에서 작은 물소리가 났다.

아르셀이 말했다.

“들었어?”

“응.”

“녹는 소리야?”

레다스가 고개를 저었다.

“흐르는 소리.”

그 차이는 중요했다.

얼음이 없어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차가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움직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강물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나뭇가지 끝에서 얼음 한 조각이 떨어졌다.

눈 아래 묻혀 있던 작은 벌레 하나가 움직였다.

레다스는 그것을 오래 바라봤다.

그때 자신의 신념을 처음 정확하게 말할 수 있었다.

“죽는 건 흐름이야.”

아르셀이 고개를 들었다.

레다스가 말했다.

“하지만 멈춰버리는 건 달라.”


숲은 다시 움직였다.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추웠다.

눈도 내렸다.

사람도 죽었다.

짐승도 죽었다.

하지만 봄이 올 가능성이 돌아왔다.

레다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마을 사람 일부는 감사했다.

일부는 원망했다.

왜 더 빨리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왜 죽은 노인을 살리지 않았느냐고 했다.

레다스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더 크게 망가질 수 있었어.”

“확실합니까?”

“아니.”

상대가 분노했다.

“확실하지도 않았는데 사람을 죽게 뒀습니까?”

레다스가 말했다.

“내가 죽게 둔 건 맞아.”

그 대답 때문에 더 화가 난 사람도 있었다.

레다스는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아르셀이 나중에 설명했다.

“사람들은 네가 미안하다고 말하길 바랐을 거야.”

“왜?”

“사람이 죽었으니까.”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살아나?”

“아니.”

“그럼 왜?”

아르셀이 한참 생각했다.

“같이 아프다는 걸 알고 싶어서.”

레다스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같이 아프면 뭐가 좋아?”

“안 좋은데.”

“그럼 이상하네.”

“사람은 좀 그래.”

레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상해.”

그 뒤로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기억했다.

사람은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 결과를 함께 보고 있는지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그 사건 이후 레다스는 정지의숲을 더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냉기맥류만 봤다.

이제는 사람들의 장작더미도 봤다.

사냥감의 이동도 봤다.

누가 겨울 전에 지붕을 고치지 않았는지도 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호라고 불렀다.

레다스는 부정했다.

“관찰이야.”

아르셀이 물었다.

“무슨 차이야?”

“안 도와주잖아.”

“가끔 경고하잖아.”

“흐름이 이상할 때만.”

“그게 우리한테는 도움인데.”

레다스가 잠깐 생각했다.

“그건 너희 해석이야.”


레다스는 여전히 개별 생명의 운명에는 거의 손대지 않는다.

사냥꾼이 눈보라에 길을 잃어도,
그 눈보라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방향을 바꿔주지 않는다.

늑대가 사슴을 쫓아도 막지 않는다.

사람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다 빠져도,
그 얼음이 정상적인 계절의 결과라면 권능으로 끌어올리지 않는다.

그 원칙 때문에 미움받은 적도 많다.

한 아이가 물었다.

“나 죽을 것 같아도 안 구해줘?”

레다스가 말했다.

“상황 봐야지.”

아이가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아르셀이 옆에서 얼굴을 감쌌다.

“레다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왜? 거짓말할까?”

아르셀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비정상적인 정체가 생명을 죽이기 시작하면,
레다스는 움직인다.

그때는 사람 한 명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나무와 강과 짐승을 모두 포함한 흐름을 위해 움직인다.

그래서 때로는 결과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살린다.

사람들이 감사를 표하면 레다스는 말한다.

“너희 구하려고 한 거 아니야.”

누군가 섭섭해한다.

“그래도 우리가 살았잖아요.”

“응.”

“그럼 그냥 고맙다고 하면 되죠.”

레다스가 생각한다.

“왜 내가?”

“아, 됐습니다.”

그런 대화가 자주 있다.


프라그모 사람들은 점점 그녀를 ‘멈춘 겨울’이라고 불렀다.

처음 그 별명을 들었을 때 레다스는 마음에 들어 했다.

“괜찮네.”

아르셀이 말했다.

“너 정지 싫어한다며.”

“완전히 멈추는 게 싫어.”

“멈춘 겨울은 완전히 멈춘 것 같은데.”

레다스가 잠시 생각했다.

“이름이 정확해야 해?”

“별명인데 뭐.”

“그럼 됐네.”

그녀는 정지를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좋아한다.

차가운 공기.

느린 움직임.

소리가 줄어든 숲.

그 속에서 오래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문제는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상태가,
조금만 더 심해지면 세계에게는 위험한 상태가 된다는 점이다.


한 번은 아르셀이 그 점을 지적했다.

둘은 눈이 내리는 숲을 보고 있었다.

“너한테 완벽한 세상은 뭐야?”

레다스가 바로 대답했다.

“조용한 거.”

“얼마나?”

“많이.”

“아무도 안 움직일 정도?”

레다스가 멈췄다.

“그건 싫어.”

“왜?”

“다음이 없잖아.”

“다음?”

“눈 다음에 물.”

“겨울 다음에 봄.”

“죽은 것 다음에 썩는 것.”

“그다음에 다시 자라는 것.”

레다스는 눈송이 하나를 손끝에 올렸다.

녹지 않았다.

“멈추면 다음이 없어.”

아르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싫어?”

“응.”

잠시 뒤 레다스가 덧붙였다.

“근데 편하긴 해.”

아르셀이 웃었다.

“그게 네 문제네.”

레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지의숲 주변에는 가끔 사람들이 레다스를 시험하러 온다.

드래곤의 권능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마법사.

혹한을 막아달라는 상인.

겨울 항로를 열어달라는 관리.

병든 가족을 얼려 시간을 벌어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부탁에는 레다스도 잠시 관심을 보였다.

“얼리면 안 죽을 수도 있어?”

“그렇습니다.”

“살 수도 있고?”

“치료법이 생길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레다스는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거절했다.

“안 해.”

“왜요?”

“그 생명이 지금 죽을지 살지는 내가 정하는 일이 아니야.”

“하지만 죽는 걸 미룰 뿐입니다.”

레다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상대는 이해하지 못했다.

레다스에게 ‘미루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흐름을 멈추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치료나 구조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약을 쓰는 것도.

불을 피우는 것도.

무너진 사람을 끌어내는 것도.

그것은 그 생명들이 스스로 하는 선택이다.

드래곤이 세계 자체의 힘으로 한 생명을 흐름에서 떼어내 붙잡는 것은 다르다고 본다.

아르셀이 물었다.

“그 기준도 네가 정한 거잖아.”

레다스가 대답했다.

“응.”

“틀릴 수도 있고.”

“응.”

“그런데도 지켜?”

“안 지키면 더 많이 바뀌니까.”


레다스가 전투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싸움은 그녀에게 개입할 일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싸운다.

몬스터가 사람을 공격한다.

짐승이 다른 짐승을 죽인다.

그것만으로는 권능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냉기맥류가 폭주하거나,
혹한이 비정상적으로 고정되거나,
얼음이 지역 전체의 순환을 멈추게 만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때 레다스는 움직인다.

얼음을 더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굳은 냉기를 풀어낸다.

멈춘 흐름을 다시 움직인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권능으로 정체된 공간 자체를 깨뜨린다.

그 모습을 처음 본 사람들은 자주 착각한다.

빙룡이니 모든 것을 얼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레다스는 반대로 말한다.

“얼리는 건 쉬워.”

“다시 흐르게 하는 게 어려워.”


100세가 된 지금도 레다스는 드래곤 가운데서는 젊은 편이다.

그래서 오래된 드래곤보다 다른 지성종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다.

사람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위험한 일을 하는지.

왜 누군가를 미워하다가 그 사람이 죽으면 우는지.

왜 이미 끝난 일에 사과를 요구하는지.

왜 살아 있는 동안보다 죽은 뒤의 이름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가 있는지.

레다스는 궁금한 것이 많다.

그래서 물어본다.

상대가 불쾌해할 만한 것도 그대로 묻는다.

“네 부모 죽었는데 왜 매년 여기 와?”

상대가 굳는다.

아르셀이 옆에서 작게 말한다.

“레다스.”

“왜.”

“그건 좀 부드럽게 물어.”

“같은 질문인데?”

“사람은 그게 달라.”

레다스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노력은 한다.

다음에는 이렇게 묻는다.

“네 부모가 죽은 곳인데도 계속 오는 이유가 있어?”

아르셀이 말한다.

“조금 나아졌네.”

레다스는 만족한다.


그녀에게 아르셀은 여전히 보호대상이 아니다.

아르셀이 위험한 사냥을 나가도 막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이름과 습관은 기억한다.

그런 작은 변화가 늘었다.

아르셀이 한번 물었다.

“나 죽으면 슬플 것 같아?”

레다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지금은 모르겠다고 했다.

“왜 몰라?”

“아직 안 죽었잖아.”

아르셀이 웃었다.

“그건 맞네.”

레다스가 덧붙였다.

“근데 네가 없어지면 이상할 것 같아.”

“그게 슬픈 거 아닐까?”

“아마.”

레다스는 그 단어를 아직 확신하지 않는다.


가끔 그녀는 자신이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것을 경계한다.

관심이 생기면 개입하고 싶어질 수 있다.

개입하면 결과를 바꾼다.

한 번 결과를 바꾸기 시작하면 다음에도 이유가 생긴다.

한 사람을 구했다.

그러면 왜 다음 사람은 안 구했는가.

마을 하나를 살렸다.

그러면 왜 다른 마을은 내버려뒀는가.

드래곤의 힘은 그런 질문에 너무 쉽게 답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레다스는 선을 긋는다.

차갑고 불친절해 보일 정도로.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이제는 그 선 너머에 누가 있는지는 본다.

이름도 기억한다.


레다스는 자신의 모순을 알고 있다.

정지를 좋아한다.

하지만 완전한 정지를 거부한다.

생명의 죽음을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익숙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상상하면 불편하다.

개입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위험한 맥류를 발견하면 누구보다 먼저 움직인다.

자신은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느 집의 지붕이 겨울마다 무너지는지도 기억한다.

레다스는 그 모순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아직 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본다.

기억한다.

그리고 정말 세계의 흐름이 멈추려 할 때만 손을 댄다.


오늘도 정지의숲에는 눈이 내린다.

소리가 작아진다.

나뭇가지가 하얗게 굳는다.

레다스는 오래된 얼음바위 위에 앉아 있다.

하얀 털이 달린 망토 위로 눈이 쌓인다.

녹지 않는다.

멀리서 아르셀이 걸어온다.

“또 여기 있네.”

“응.”

“안 추워?”

레다스가 그를 바라본다.

“나한테 그걸 왜 물어?”

“인사야.”

“이상한 인사네.”

아르셀은 옆에 앉는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두 사람 앞에서 숲이 천천히 움직인다.

눈송이가 떨어진다.

바람이 지나간다.

얼음 아래에서 아주 작은 물소리가 들린다.

아르셀이 묻는다.

“오늘은 괜찮아?”

레다스는 눈을 감는다.

땅 아래의 냉기맥류를 느낀다.

느리다.

아주 느리다.

하지만 흐른다.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간다.

“응.”

“왜?”

레다스가 눈을 뜬다.

“안 멈췄으니까.”

그녀에게 그것은 충분한 대답이다.

겨울은 차갑다.

느리다.

많은 것을 죽인다.

그래도 언젠가는 지나간다.

레다스가 지키려는 것은 따뜻함이 아니다.

죽지 않는 세계도 아니다.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세계다.

얼음 다음에 물이 있고,
겨울 다음에 봄이 있고,
죽음 다음에도 다른 생명의 움직임이 남는 세계.

자신에게 가장 편안한 정적 속에서도,
완전히 멈춰버리지는 않는 세계.

그래서 ‘멈춘 겨울’은 오늘도 가만히 앉아,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고 있다.